## 핏빛 제국, 깨어나는 민중
—
**[에피소드 1: 심연의 그림자, 잿빛 구역에 드리우다]**
**[장면 전환]**
**[1컷]**
**[배경]** 아스타리아 제국의 수도 크로노스. 찬란한 상층 도시의 첨탑들이 뿌연 아침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빛난다. 그러나 화면 아래쪽, 잿빛 연기와 눅진한 습기가 뒤섞인 하층민 구역, ‘잿빛 구역’의 풍경이 대조적으로 펼쳐진다. 낡고 기울어진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좁은 골목길은 쓰레기와 오물로 가득하다.
**[내레이션]** 이 도시는 두 얼굴을 가졌다. 빛나는 심장과… 썩어가는 그림자.
**[2컷]**
**[지문]** 잿빛 구역의 음습한 골목길. 동이 채 트지 않은 어둠 속에서, 낡은 천 조각으로 머리를 가린 소녀, 연(軟)이 웅크린 채 부스러기들을 뒤지고 있다. 손가락은 때와 추위로 갈라져 있고, 눈빛은 피로하지만 날카롭다. 옆에는 다 쓴 양철통이 놓여 있다.
**[효과음]** 끼이익… (낡은 깡통 문 여는 소리)
**[연]** (작게 중얼거림) 오늘은 또 뭘…
**[3컷]**
**[지문]** 연의 시선으로 본 잿빛 구역의 아침. 희미한 횃불 빛 아래, 어린아이들이 앙상한 몸으로 기침을 하며 지나가고, 지친 얼굴의 어른들은 묵묵히 짐을 짊어지고 어디론가 향한다. 공기 중에는 쇠락과 절망의 냄새가 짙다.
**[내레이션]** 매일 아침은 똑같다. 제국의 태양은 상층민에게만 빛을 허락하고, 우리에게는 그림자만을 드리운다.
**[4컷]**
**[지문]** 연이 낡은 천 조각 사이에서 반쯤 썩은 과일 조각을 찾아낸다. 그녀의 표정에는 희미한 기쁨보다는 익숙한 체념이 깃들어 있다. 그때, 멀리서 둔탁한 발소리와 함께 제국 기사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효과음]** 쿵, 쿵, 쿵… (제복 입은 발소리)
**[제국 기사]** (쩌렁쩌렁) 길을 비켜라! 헌납의 날이 임박했다! 불결한 자들은 물러서라!
**[내레이션]**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제국은 끊임없이 우리를 쥐어짠다.
**[5컷]**
**[지문]** 연이 몸을 움츠려 골목 벽에 바싹 붙는다. 검은색 갑옷을 입은 ‘흑의 기사단’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위압적으로 거리를 행진한다. 그들의 갑옷에는 기묘하게 뒤틀린 촉수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병사들의 눈빛은 차갑고 무표정하다.
**[내레이션]** 헌납의 날. 우리에게는 ‘약탈의 날’이라 불리는 날. 매년 더욱 잔인해지는 제국의 법령은 이제 우리 삶의 마지막 조각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
**[장면 전환]**
**[6컷]**
**[배경]** 헌납의 날 당일. 잿빛 구역 한복판의 작은 광장. 제국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제국 관리들이 주민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있다. 관리들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함께 역겨운 우월감이 서려 있다.
**[내레이션]** 이전에는 곡식과 금전을 요구했다. 그 다음은 우리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 상층으로 데려갔다. 이제는… 무엇을 원할까?
**[7컷]**
**[지문]** 광장의 연단에 올라선 대신관 루시안. 그의 흰 사제복은 상층 도시의 웅장함을 닮아 있지만, 그의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창백하고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담고 있다. 그는 마치 주문을 외듯 나지막이 말한다.
**[대신관 루시안]** (나지막하지만 쩌렁쩌렁하게 들림) 아스타리아의 자비로운 영광 아래, 모든 피조물은 위대한 존재에게 헌납해야 마땅하다. 이는 축복이며, 영광이다. 너희의 고통은… 제국의 영생이 될 것이다.
**[효과음]** 웅성웅성… (불안한 주민들의 수군거림)
**[8컷]**
**[지문]** 한 노인이 관리 앞에 끌려 나간다. 노인의 얼굴은 병색이 완연하고, 손에는 겨우 주먹만 한 빵 조각이 들려 있다. 병사 하나가 노인을 거칠게 밀친다.
**[제국 관리]** 노인! 자네의 헌납품은 고작 이것인가? 제국의 위대한 존재께서 이런 불결한 것을 받으시겠나!
**[노인]** (쉰 목소리로) 제, 제가 가진 전부입니다요… 흐윽… 며칠을 굶어…
**[제국 기사]** 닥쳐라, 불결한 늙은이!
**[9컷]**
**[지문]** 제국 기사가 노인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끌어당긴다. 노인의 눈은 공포로 가득하고, 주변의 주민들은 두려움에 질려 고개를 숙인다. 그때, 한 어린아이가 울면서 노인에게 달려가려 한다.
**[어린아이]** 할아버지! 흐윽… 할아버지!
**[지문]** 연은 구석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린다. 노인의 앙상한 팔뚝 위로, 기사의 손이 닿는 순간, 노인의 몸에서 검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환영이 연의 눈에 스친다.
**[내레이션]** 아니… 이것은… 무엇인가? 제국은 단순한 착취가 아닌,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10컷]**
**[지문]** 대신관 루시안이 나지막이 손짓하자, 기사가 노인을 땅바닥에 내팽개친다. 노인의 몸은 순식간에 더욱 바싹 마른 듯 보이고, 얼굴에는 생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루시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린다.
**[대신관 루시안]** 헌납의 축복이 그대에게 임하길. 불멸의 어둠이 영원하기를.
**[내레이션]** 그는 우리를 축복한다고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서는 차가운 굶주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잿빛 구역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
**[장면 전환]**
**[11컷]**
**[배경]** 밤이 깊은 잿빛 구역의 주점. 탁하고 낡은 나무 탁자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앉아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다. 연은 구석 테이블에서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효과음]** 웅성웅성… (술집 소음)
**[주민 1]** (낮은 목소리로) 밤마다… 이상한 꿈을 꿔.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덮치는 꿈…
**[주민 2]** 나도 그랬어! 벽에서 기어 나오는 듯한… 촉수들이 나를 붙잡으려고…
**[내레이션]** 사람들은 ‘헌납의 날’ 이후로 모두 꿈에 시달린다고 했다. 악몽 속에서 무언가가 그들의 생기를 빨아먹는다고.
**[12컷]**
**[지문]** 테이블 건너편에서 낡은 외투를 입은 노인 카일이 불안한 눈빛으로 벽에 그려진 흐릿한 상형문자를 응시하고 있다. 그의 옆에는 두건을 쓴 젊은이가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다.
**[카일]** (중얼거림) 제국 놈들이… 놈들이 불러낸 것이… 이제 깨어나기 시작한 거야.
**[연]** (자신도 모르게 내뱉듯) ‘깨어난다’고요?
**[효과음]** 쨍그랑! (작은 유리잔 깨지는 소리)
**[지문]** 주변의 대화가 순간 끊어진다. 모든 시선이 연에게로 향한다.
**[13컷]**
**[지문]** 카일이 연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의 눈빛은 굳어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인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학자였던 듯, 낡은 양피지 조각들을 품고 있다.
**[카일]** 쉿, 아가씨.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게 아니네. 하지만… 자네도 본 것 같군.
**[연]** (애써 침착하게) 전… 그냥… 노인에게서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를 봤을 뿐이에요. 그리고 루시안 대신관의 눈빛도… 섬뜩했죠.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14컷]**
**[지문]**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에게 다가온다. 그는 탁자에 놓인 낡은 맥주잔을 한 손으로 만지작거린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다.
**[카일]** 짐승이라… 그래, 짐승이 맞지. 다만, 그 짐승은… 우리가 아는 형태가 아닐 뿐. 제국은 그 짐승에게 우리를 바치고 있는 걸세. 너희의 고통, 너희의 절망, 너희의 생명력까지도.
**[연]** (눈을 크게 뜨며) 무슨… 말씀이세요?
**[15컷]**
**[지문]** 카일이 낡은 양피지 조각 하나를 꺼내 연 앞에 펼쳐 보인다. 양피지에는 기이하고 복잡한 문양들이 그려져 있다. 그 중심에는 셀 수 없는 눈들이 한데 모여 있는 듯한 형상이 섬뜩하게 새겨져 있다.
**[카일]** 이들은 ‘눈 없는 신’이라고 불렸네. 제국이 건국될 무렵, 초대 황제가 어둠 속의 군주와 맺은 계약… 그 대가로 제국은 번영했지만, 그 댓가는… 영원한 헌납이었지.
**[내레이션]** 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내가 겪은 불합리함과 고통은, 그저 인간의 잔혹함이 아니었던가? 그 배후에는… 더욱 거대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던 건가?
—
**[장면 전환]**
**[16컷]**
**[지문]** 주점의 음침한 분위기 속, 연과 카일이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카일의 설명에 연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간다.
**[카일]** 그들이 ‘헌납’이라 부르는 것은 단순히 재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네. 우리 민중의 절망, 우리의 생명, 심지어 우리의 꿈까지도… 그 심연의 존재에게 바쳐지는 제물이야. 제국은 그 대가로 무한한 권능을 얻었지만, 크로노스 전체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잠식당하고 있는 거지.
**[연]** (떨리는 목소리) 그럼… 우리 모두가… 죽어가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알지 못하는 사이에?
**[17컷]**
**[지문]** 카일이 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그의 눈빛에는 지친 회한과 함께, 한줄기 희망이 깃들어 있다.
**[카일]** 우리는 오랫동안 싸워왔네. 어둠 속에서. 하지만 제국은 너무 강했고, 그들의 뒤에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가 버티고 있었지. 그러나 이제는 달라. 민중의 고통은 한계에 다다랐고, 그로 인해 ‘눈 없는 신’의 잠식도 빨라지고 있어. 혼돈 속에서… 기회가 온다.
**[연]** 기회라뇨?
**[18컷]**
**[지문]** 카일이 낡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연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린다. 그의 손은 거칠지만 따뜻하다.
**[카일]** 민중은… 아직 순수해. 제국의 타락과 심연의 존재에게 오염되지 않은… 진짜 인간들이지. 우리가 바로 그 존재에 대항할 유일한 힘일세. 제국은 우리가 무지하고 약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자들이야말로… 가장 큰 불꽃을 지필 수 있는 법.
**[내레이션]** 내 안의 분노가 서서히, 하나의 뜨거운 불꽃으로 변하고 있었다. 단순한 인간의 폭정에 대한 반항이 아니었다. 이 싸움은… 존재의 의미를 건 싸움이었다.
**[19컷]**
**[지문]** 연이 주먹을 꽉 쥔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피로하지 않다. 그 속에는 강한 결의와 함께, 미지의 공포를 넘어설 용기가 타오르고 있다.
**[연]** 그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죠? 이 거대한 제국과… 그리고 그 뒤의 존재에 맞서려면…
**[카일]** (엷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는… 진실을 알려야 해. 그리고… 그들의 어둠을 깨부술 작은 불씨가 되어야지. 자네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 이대로 썩어가는 제국의 노예로 살 것인가? 아니면… 미지의 공포에 맞서… 이 세상의 진정한 새벽을 만들 것인가?
**[20컷]**
**[지문]** 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낡은 주점의 희미한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강렬하다. 그녀는 잿빛 구역의 소녀가 아닌, 새로운 운명 앞에 선 전사처럼 보인다.
**[연]** (단호하게) 전…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거예요. 이 제국의 어둠에 굴복하지도 않을 거고요. 그 존재가 무엇이든… 우리 민중의 힘으로… 맞설 겁니다!
**[내레이션]** 그날 밤, 잿빛 구역의 작은 주점 안에서, 하나의 불씨가 타올랐다. 그것은 단순히 제국에 대한 반란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21컷]**
**[지문]** 잿빛 구역 너머, 상층 도시의 가장 높은 첨탑 위. 대신관 루시안이 달빛 아래 홀로 서 있다. 그의 뒤로, 기괴하게 뒤틀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다. 그의 눈은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며, 알 수 없는 언어로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그의 목소리에는 인간의 것이 아닌, 섬뜩한 파장이 실려 있다.
**[대신관 루시안]** (흐릿하고 음산하게) 크크크… 어리석은 인간들… 그들의 고통은… 위대한 존재를… 더욱… 굶주리게 할 뿐…
**[에피소드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