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의 심장, 재를 뚫고
**1화. 잿빛 심연의 그림자**
강하준은 낡아빠진 조종석에 몸을 욱여넣은 채, 흐릿한 모니터 너머의 세상을 응시했다. 잿빛 먼지가 덮인 풍경. 한때는 스카이라인을 자랑했을 고층 빌딩들은 뼈대만 남은 채 하늘을 찌르는 흉물로 변해 있었다. 그의 기체, ‘갈가마귀’의 관절에서 삐걱거리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벌써 몇 년째 이 소리에 익숙해져 버린 스스로가 섬뜩했다.
“젠장, 또 헛걸음인가.”
하준의 중얼거림은 통신 장치를 통해 갈가마귀의 내부 스피커로 울렸다. 폐허 속에서 홀로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공허하게 들렸다. 오늘 목표는 구형 에너지 코어 잔해였다. 도심 깊숙한 곳, 지반 침하로 붕괴된 지하 발전소 구역에 있을 거라는 막연한 정보 하나를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센서가 포착하는 건 오직 부식된 콘크리트와 뒤틀린 철근 더미뿐이었다.
갈가마귀의 거대한 발이 무너진 도로 위를 밟자, 으스러진 아스팔트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육중한 기체가 내는 진동이 하준의 온몸을 휘감았다. 왼쪽 어깨 장갑은 지난번 ‘붉은 안개 괴수’와의 전투에서 파괴된 후, 급하게 주운 전차의 장갑판으로 대충 덧대어져 있었다. 보기 흉한 상처였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런 세상에선 무엇이든 버려선 안 된다. 생존의 기본이었다.
“온도 상승… 동력 코어 출력 불안정. 점검 필요.”
인공지능 비서 ‘에코’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준은 한숨을 쉬었다. 점검? 당장 쓸 부품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좀 더 버텨줘, 에코. 아직 할 일이 남았어.”
그의 손이 조종간을 단단히 쥐었다. 갈가마귀의 오른팔에 달린 대구경 산탄총이 묵직하게 흔들렸다. 이 녀석만이 하준의 유일한 생존 도구이자, 동반자였다.
갈가마귀가 천천히 한때는 번화가였을 거리로 접어들었다. 부서진 상점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끔찍한 쇳소리를 냈다. 시야 밖에서 뭔가 번뜩였다. 하준은 즉시 갈가마귀를 멈췄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에코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센서에 잡히지 않는 미세한 움직임. 가장 위험한 징조였다.
“무슨 소리였지…?”
그가 속삭이듯 묻자, 갈가마귀의 광학 센서가 줌인되며 잔해가 뒤섞인 건물 틈새를 비췄다. 오래된 은행 건물의 외벽이 완전히 무너진 곳이었다. 그림자 속에서 뭔가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포착했다. 작았다. 그러나 민첩했다.
“에코, 저거 뭐야? 짐승… 아니, 다른 건가?”
“생체 신호 감지. 분석 중… 유전자 변형체 ‘날개달린 사냥꾼’ 추정. 다수.”
날개달린 사냥꾼. 폐허에서 가장 성가신 놈들이었다. 몸집은 작지만, 지독한 산성 물질을 분비하며 기체를 부식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게다가 떼로 몰려다녔다.
“젠장, 하필이면 지금…!”
하준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림자 속에서 수십 마리의 날개달린 사냥꾼들이 튀어나왔다. 끔찍하게 변형된 날개를 퍼덕이며 쇠사슬처럼 얽힌 다리로 벽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쇳소리와 비슷한 불쾌한 비명을 지르며 갈가마귀를 향해 돌진했다.
“돌격! 방어막 올려, 에코!”
갈가마귀의 에너지 방어막이 푸른빛을 내며 활성화되었지만, 워낙 낡아빠진 시스템이라 얼마나 버틸지 장담할 수 없었다. 첫 번째 사냥꾼 무리가 덮쳐오자, 방어막에 부딪히며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기체가 흔들렸다.
하준은 오른팔의 산탄총 방아쇠를 당겼다. 굉음과 함께 굵은 탄환들이 쏟아져 나가자, 선두에 있던 사냥꾼 몇 마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그 틈을 타 다른 놈들이 갈가마귀의 어깨와 팔, 다리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발톱과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산성 액체가 덧대어진 장갑판을 녹이기 시작했다.
“크악! 왼쪽 다리! 시스템 과부하!”
에코의 경고가 들렸다. 하준은 조종간을 격렬하게 움직였다. 갈가마귀가 육중한 몸을 흔들며 다리에 달라붙은 놈들을 떼어내려 애썼다. 몇 마리가 떨어져 나가 바닥에 처박혔지만, 이미 장갑판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대로는 안 돼. 동력 코어 출력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 싸움은 불리했다. 하준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무너진 버스 차체, 폐기된 물류 컨테이너, 그리고 아까부터 눈여겨보던 무너진 은행 건물.
“에코, 동력 코어 잔해는 어디였지? 가장 가까운 곳.”
“현재 위치에서 동북쪽 30미터. 무너진 은행 건물 지하 3층 잔해.”
“좋아, 저기로 간다! 어서!”
하준은 갈가마귀의 추진기를 최대로 가동했다. 낡은 엔진에서 굉음과 함께 붉은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갈가마귀는 남은 사냥꾼 무리들의 공격을 방어막으로 막아내며 전속력으로 은행 건물 쪽으로 돌진했다. 잔해로 가득한 거리에서 거대한 강철 덩어리가 돌진하는 모습은 흡사 날뛰는 맹수 같았다.
추진력을 이용해 건물 입구의 잔해를 부수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뒤따라 들어온 사냥꾼들이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거나, 갈가마귀의 발에 밟혀 끔찍한 소리를 냈다.
건물 내부도 엉망진창이었다. 천장이 무너지고, 바닥은 갈라져 있었다. 하준은 갈가마귀를 조종해 지하로 이어지는 비상계단 통로 입구를 찾아냈다. 하지만 통로는 무너진 잔해로 거의 막혀 있었다.
“젠장! 저걸 뚫고 내려가야 한다고?”
“현재 장갑 상태로 돌파는 무리입니다. 추가 손상 발생 시 기체 기능 정지 가능성 30% 이상.”
에코의 냉정한 분석에 하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밖에는 날개달린 사냥꾼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멈추는 건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상관없어.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그는 조종간을 움켜쥐고 갈가마귀의 오른팔에 달린 산탄총의 개머리판을 벽에 고정시켰다. 이어서 왼팔의 잔해 제거용 드릴을 최대로 작동시켰다. 굉음과 함께 드릴이 회전하며 무너진 콘크리트를 갈아내기 시작했다. 진동이 조종석을 뒤흔들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갈가마귀는 지하로 통하는 길을 뚫고 내려갔다. 위에서 사냥꾼들의 불쾌한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좁은 통로 때문에 그들은 안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도 없이, 하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지하 3층에 펼쳐진 광경이었다.
지하 발전소의 통제실 같았다. 부식된 계측기들과 엉망으로 얽힌 케이블 더미. 그리고 그 중앙에는, 하준이 찾던 에너지 코어의 잔해가 거대한 원형 구조물 속에 박혀 있었다.
“찾았다…!”
하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겨우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그는 갈가마귀를 조심스럽게 코어 잔해 가까이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그 순간, 에코가 다급하게 외쳤다.
“경고! 대형 생체 신호 감지! 접근 중!”
하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형 생체 신호? 날개달린 사냥꾼들보다 더 거대한 존재가 이 지하에 있었다는 말인가?
콘크리트 기둥 뒤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칙칙한 회색빛 몸체에,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난 거대한 앞발. 그리고 등에서는 마치 부러진 철골처럼 튀어나온 뼈 돌기가 솟아 있었다. 놈의 몸집은 갈가마귀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지하 잠식자’. 폐허 지하에서 가끔 출몰하는, 이 땅의 진정한 포식자였다.
놈의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갈가마귀를 향했다. 침묵이 흘렀다.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하준은 조종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런 젠장…!”
하준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겨우 희망을 찾았다 싶었는데, 이번엔 또 다른 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갈가마귀의 에너지 코어 잔해를 노리는 듯, 지하 잠식자가 거대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저 코어는 하준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준은 이를 악물었다. 낡고 지쳐가는 강철의 심장이, 절망적인 폐허 속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 하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