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고층 빌딩의 앙상한 철골들이 뼈대처럼 솟아 있었다. 한때는 번화했던 도시의 심장이었을 이곳은 이제 죽음의 침묵만이 감도는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폐허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귓가에 윙윙거렸고, 썩은 살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공기는 한 모금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비릿한 역겨움을 안겼다.
강원은 낡은 마스크를 코까지 끌어올린 채, 부서진 상점가를 조심스럽게 헤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녹슨 철근이 들려 있었고, 등 뒤에는 내용물이 텅 비어가는 낡은 배낭이 매달려 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된 식량은커녕, 수아가 먹을 만한 약 한 줌도 찾지 못했다. 수아, 그의 유일한 혈육이자,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이유.
“젠장…”
강원은 으스러진 유리 파편을 밟으며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빈번한 약탈로 쓸만한 것은 진작에 사라진 지 오래였고, 간혹 운 좋게 찾아내는 통조림이나 의약품도 죄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것들뿐이었다. 수아의 기침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녀의 작은 몸이 열에 시달리며 힘겨워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강원의 심장은 바싹 조여드는 듯했다.
끼이이익-
갑작스러운 소음에 강원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버려진 병원의 입구였다. 깨진 창문 너머로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안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기척이라기보다는… 비틀거리는 그림자. 감염자였다.
‘저 안에 뭐가 있을지도 몰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강원은 숨을 죽인 채 병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복도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퀴퀴한 핏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의 발소리만이 적막을 깨트렸다. 한참을 더듬어 들어가자,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방이 보였다. 약품 보관실 같았다.
강원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바닥에는 부패한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선반들은 반쯤 넘어져 약병들이 깨져 있었다. 하지만 구석진 곳, 아직 쓰러지지 않은 캐비닛 위에 작은 약 상자가 하나 보였다.
그 순간, 뒤에서 섬뜩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으… 흐으윽…
강원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감염자 세 마리가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피부는 괴사해 너덜거렸다. 놈들은 마치 죽음 그 자체가 형상화된 듯했다.
“빌어먹을…”
강원은 이를 악물었다. 약 상자까지의 거리는 불과 몇 걸음. 놈들과의 거리는 그보다 더 가까웠다. 그는 주저 없이 철근을 고쳐 쥐고 제일 앞에 있는 감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강원의 철근이 감염자의 머리를 강타했다. 썩은 살점이 터져 나오며 역겨운 냄새가 훅 끼쳐왔다. 하지만 놈은 비틀거릴 뿐,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격렬하게 팔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강원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며 옆구리에 있던 단도를 뽑아 들었다. 철근으로 놈의 몸통을 막아 세우고, 다른 감염자가 달려드는 틈을 타 단도로 놈의 목을 그었다. 썩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지만, 이미 죽은 놈에게는 통증도 없었다. 결국 강원은 철근으로 놈의 머리를 다시 한번 힘껏 내리쳐 완전히 쓰러뜨렸다.
남은 두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강원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수아의 상태를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했다. 그는 분노와 절박함을 담아 철근을 휘둘렀고, 마침내 마지막 감염자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강원은 재빨리 약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 크지 않은 상자였지만, 그 안에는 아직 온전한 약병 몇 개가 들어 있었다.
‘됐다… 살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생존자들이 아니었다. 규칙적인 발소리,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 제국 병사들이었다.
“젠장, 하필 지금…”
강원은 약 상자를 품에 안고 병원 뒤편으로 이어지는 비상구로 재빨리 몸을 피했다. 철제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가자, 차가운 하수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곳이라면 잠시 몸을 숨길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어둠 속에 웅크려 앉아,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병사들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강원은 간신히 심장을 진정시켰다.
* * *
간신히 폐허를 벗어나 그의 거처로 향했다. ‘거처’라고 해 봐야 도시 외곽에 허름하게 세워진 판잣집 몇 채가 전부인, 초라한 피난민 캠프였다. 제국이 관리하는 ‘안전지대’와는 한참 떨어진 곳. 제국은 감염자에게 노출될 위험이 적은 도시의 핵심 구역만 성벽으로 둘러쳐 놓고, 바깥의 평민들은 알아서 살아가라며 내버려 두었다. 아니, 내버려 두는 것을 넘어 착취하고 있었다.
강원이 캠프 입구에 다다르자, 불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안전지대에서 온 제국 병사들이 캠프를 에워싸고 있었다. 번쩍이는 은빛 갑옷과 잘 정돈된 무기들이 낡은 판잣집과 대비되며 섬뜩한 위압감을 풍겼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울음소리와 고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제국의 물품이다! 징발에 불응할 시에는 반역죄로 다스릴 것이다!”
병사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연민도 없었다. 병사들은 사정없이 판잣집을 뒤지며 식량과 물품들을 빼앗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와 노인들의 절규가 캠프를 가득 메웠지만, 병사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 평민들은 그저 쓸모 있는 자원이거나,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강원의 눈에 불꽃이 타올랐다. 저들은 언제나 그랬다. 감염자들이 도시에 창궐할 때도, 그들은 안전지대의 문을 걸어 잠그고 평민들을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겨우 살아남은 자들의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빼앗으러 온 것이다.
멀리서 지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우리 아이가 먹을 마지막 식량이에요! 이것마저 가져가면 저희는 어떻게 살라는 거예요!”
지아는 강원과 함께 scavenging을 나가는 동료였다. 그녀 역시 어린 동생을 홀로 부양하고 있었다. 병사 한 명이 지아의 손에서 빵 조각을 빼앗으며 그녀를 거칠게 밀쳤다. 지아는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빵 조각은 흙바닥에 떨어져 짓밟혔다.
“주제넘게 저항하지 마라, 천한 것들! 이 모든 건 제국을 위한 일이다!”
병사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강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나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수아를 위해서라도,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때, 저 멀리서 한 늙은 노인이 병사에게 항의했다. “안전지대 안에서는 배 터지게 먹으면서, 밖에선 우리가 굶어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거냐! 이게 제국이 말하는 백성 아니냐!”
병사는 노인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닥쳐라, 불온한 언행은 엄금한다!”
그는 노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노인은 비틀거리며 쓰러졌고, 주위 평민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병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징발을 이어갔다.
강원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놈들의 잔혹함은 더 이상 참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품속에 약 상자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수아에게 이 약을 먹여야 한다. 그리고 이 약이 떨어지면, 또다시 이런 지옥을 겪어야 할 것이다. 제국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결코 안전할 수 없었다.
징발이 끝나고 병사들이 철수하자, 캠프는 깊은 한숨과 함께 망연자실한 침묵에 잠겼다. 평민들은 빼앗긴 물품들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해 할 뿐이었다.
강원은 지아에게 다가갔다. 지아는 흙투성이 얼굴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강원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지 않아… 우리는 이렇게 계속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 거야? 쟤들은 우리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정작 우린 감염자보다 더 비참하게 죽어가잖아…”
그녀의 눈에는 절망과 함께 깊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강원은 지아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 아니야.”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더 이상은 아니야.”
강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평민들의 얼굴에 절망과 함께 깊은 회의감이 서려 있었다. 그들의 눈은 이미 제국에 대한 마지막 희망을 버린 듯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것을, 그리고 제국이 그들의 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우리가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을 방법은 하나뿐이야.”
강원의 말에 지아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녀의 눈에 희미한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우리가 이 제국을, 우리 손으로 바꿔야 해.”
강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거대한 파문처럼 캠프의 공기를 흔들었다.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강원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은 혼란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오랜 갈증에 시달리던 자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한 미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그림자 아래, 새로운 반란의 씨앗이 움트고 있었다. 그것은 강원 혼자만의 분노가 아니었다. 짓밟힌 수많은 평민들의 억압된 절규가 만들어낸, 거대한 폭풍의 전조였다. 그리고 그 폭풍의 첫 번째 빗방울은, 이제 막 떨어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