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찢고 솟아오른 고층 빌딩 숲 한가운데, 홀로 시간을 잃어버린 듯 서 있는 낡은 아파트가 있었다. 회색빛 콘크리트 외벽 사이, 붉은 벽돌과 녹슨 철제 난간이 어우러진 그곳은 흡사 과거의 유령처럼 도시의 숨통을 조이는 듯했다. ‘해원궁 맨션’. 이름만 들으면 고풍스러운 왕궁이라도 연상되지만, 실상은 1970년대 지어진 고급 아파트로, 지금은 재개발의 칼날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마지막 보루 같은 곳이었다.
그날 밤, 해원궁 맨션 17층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비명은, 이내 굳게 닫힌 문 안으로 스며들어 영원히 침묵했다.
형사 이수아는 자신의 좁은 오피스텔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해원궁 맨션을 째려봤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 밑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사건은 기이했다. 피해자는 고미술품 수집가 정태우 씨.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심장이 칼에 찔린 채 발견되었다. 문제는 그 서재가,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된 밀실이었다는 점이었다.
“젠장, 정말 완벽한 밀실이라니까요.” 이수아가 담배 대신 쌉쌀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녀의 앞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며칠째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한유진. 천재 탐정이라고 불리지만, 실상은 그 기행과 불친절함으로 인해 ‘미치광이’라는 별명이 더 어울리는 남자였다. 하지만 어떤 수사도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언제나 그를 찾았다.
“완벽한 밀실이라는 건 없어.” 유진이 턱을 괴고 나른하게 말했다. 그의 눈은 커피잔 바닥에 맺힌 미세한 물방울을 좇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경찰들의 환상일 뿐이지. 모든 밀실은 언젠가 깨지게 되어 있어. 마치 굳건해 보이는 건물도 균열을 숨기고 있듯이.”
이수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 균열이 뭔지 모르니까 부른 거잖아요. 서재 문은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고, 열쇠는 피해자 주머니에 있었어요. 창문은 이중 잠금장치로 단단히 잠겨 있었고,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어요. 환기구는 사람이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좁고요. 이거, 범인이 유령이라도 된다는 소리 아니냐고요?”
유진은 피식 웃었다. “유령이라… 재미있는 가설이군. 하지만 유령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 혹은… 그들이 살인을 저지를 때는 눈에 보이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겠지.” 그의 시선이 이수아의 얼굴에 닿았다. “그러니, 이건 인간의 소행이라는 이야기야. 이수아 경위.”
다음 날 아침, 유진은 이수아와 함께 해원궁 맨션 17층, 정태우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현장 보존을 위해 경찰이 철수했지만, 여전히 공기 중에는 미세한 긴장감과, 핏물 냄새 비슷한 것이 남아 있는 듯했다. 오래된 건물 특유의 퀴퀴한 냄새와, 값비싼 고미술품에서 풍겨 나오는 고색창연한 향이 뒤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봐요, 이 아파트… 뭔가 좀 으스스하네요.” 이수아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피해자는 평생을 고서와 유물에 파묻혀 살았다고 해요. 가족도 없이. 희귀한 물건에 집착했다고.”
“물건은 그 주인의 영혼을 담는 법이지.” 유진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손이 현관문을 감쌌다. 낡은 문틀과, 묵직한 나무 문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 문은… 수십 년 동안 수많은 희로애락을 지켜봤겠군.”
서재는 거실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봉쇄 라벨이 찢긴 흔적이 생생했다. 유진은 문 앞에 섰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를 대하듯, 그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그의 손가락이 문틈과 빗장, 그리고 자물쇠 주변을 더듬었다. 일반적인 형사라면 현미경으로도 찾아내기 힘들었을 미세한 흔적들을 그는 맨눈으로 훑어보는 듯했다. 그의 눈빛은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깊은 우수가 서려 있었다.
“이 문… 스스로 닫힌 게 아니군.” 그가 중얼거렸다. “누군가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어. 닫히는 순간까지도… 강렬한 의지가.”
이수아는 유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어떤 심오한 통찰을 얻었음을 직감했다. “범인이 이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갔다는 뜻인가요? 어떻게? 피해자 주머니에 열쇠가 있었잖아요!”
“그 열쇠는 미끼였을 뿐이야.” 유진이 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미끼가 된 열쇠지.”
내부로 들어서자, 서재는 고미술품 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책장에는 빼곡히 고서들이 꽂혀 있었고, 벽면에는 자개장과 비단 병풍, 오래된 도자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고풍스러운 책상 뒤로, 정태우 씨가 쓰러져 있었다. 가슴팍에는 상아로 장식된, 날카로운 문진(文鎭)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유진은 시신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무감각해 보였지만, 그의 눈은 살아있는 듯 움직였다. “피해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 책상을 사랑했겠군.”
그의 시선이 책상 위를 스쳤다. 가지런히 놓인 만년필, 돋보기, 그리고 희귀한 고서들. 그리고 책상 한편에 묵직하게 놓여 있던, 은빛으로 장식된 정교한 자개장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그 자개장은, 마치 이 방의 작은 왕국처럼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유진은 방 안을 천천히 걸었다. 삐걱이는 마루 소리조차 듣기 싫다는 듯, 그의 발걸음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는 창문과 벽면, 심지어 천장까지 훑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시선이 서재 문 주변의 벽지 한쪽에 멈췄다.
“이리 와봐.” 유진이 이수아를 불렀다.
이수아가 다가가자, 유진은 손가락으로 벽지 한 점을 가리켰다. 언뜻 보기엔 오래되어 해진 벽지일 뿐이었다. 하지만 유진의 눈은 그 미세한 지점을 꿰뚫어 보았다.
“이 벽지… 아주 미세하게 들떠 있지 않아? 그리고 이 문틀… 아주 얇은 실 같은 것으로 쓸린 자국이 보이지 않나?”
이수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봤지만, 좀처럼 유진이 말하는 ‘실 같은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요? 저는 도저히…”
“이곳은 과거의 흔적이 가장 짙게 남는 곳이야. 특히 문은… 수많은 비밀을 품고 있지.” 유진이 손가락으로 문틀 모서리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범인은 이 방에서 정태우를 살해했어. 그리고 문을 안에서 빗장을 걸어 잠갔지. 그때 피해자의 주머니에 열쇠를 넣었을 거야.”
“하지만 어떻게 밖으로 나갔죠?” 이수아가 물었다.
유진의 시선이 방 안의 자개장으로 향했다. “이 방에 있는 수많은 골동품 중, 범인이 가장 잘 알고, 가장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있었겠지. 피해자의 심미안이 탁월했지만, 동시에 그의 약점이 된 물건이기도 했어.”
그가 자개장 앞으로 다가갔다. 자개장 상판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용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옆으로는 얇고 섬세한 명주실 뭉치 하나가 먼지에 쌓인 채 놓여 있었다. 아마도 고서나 유물을 보수하는 데 쓰이던 것으로 보였다.
“이 자개장은… 단순히 장식품이 아니야.” 유진이 나직이 말했다. “정태우는 이 자개장의 숨겨진 기능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범인은 그걸 알고 있었던 거지.”
그는 자개장 옆에 놓인 명주실 뭉치에서 한 가닥을 집어 올렸다. 얇디얇은 실은 햇빛에 반사되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범인은 이 명주실을 이용했어. 살인을 저지른 후, 빗장을 잠그고 열쇠를 피해자의 주머니에 넣었지. 그리고 이 실을 빗장 손잡이에 묶은 거야. 아주 튼튼하면서도,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이 명주실을. 그리고는 이 자개장을 이용해 밖으로 나간 거지.”
이수아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개장을 바라봤다. “자개장으로 어떻게 밖으로 나가요? 이게 비밀 통로라도 된다는 건가요?”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자개장은 단순한 자개장이 아니야. 정태우 씨의 수집품 중 가장 값비싼 물건 중 하나였지. 희귀한 자개 공예품일 뿐만 아니라… 사실, 이 자개장은 오래된 방식의 이중 문을 숨기고 있어. 마치 책장 뒤의 비밀 통로처럼.”
유진은 자개장의 특정 부분을 눌렀다. ‘딸깍’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자개장이 놓여 있던 벽면의 일부가 서서히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 뒤로는 건물 외부로 연결되는, 오래된 벽돌로 된 좁은 통로가 드러났다.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한, 어둡고 퀴퀴한 공간이었다.
“이곳은 아주 오래전, 건물이 처음 지어졌을 때 비상용 통로로 사용되던 곳이었을 거야. 혹은 고층 아파트에 비밀스럽게 물건을 운반하기 위한 장치였을 수도 있지. 외부에서는 벽돌로 완벽하게 위장되어 있어 아무도 알 수 없었을 테고. 정태우 씨는 이 통로를 알고 있었고,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거나… 아니면 자신만의 은밀한 탈출구로 이용했을 수도 있어.”
유진이 설명을 이어갔다. “범인은 이 통로를 이용해 밖으로 나갔어. 통로로 나가면서, 문을 닫는 동시에 빗장에 묶어두었던 명주실을 당겨 문을 완벽하게 잠근 거야. 그리고는 실을 당겨 통로 틈새로 빼냈겠지. 워낙 얇은 실이라 미세한 틈으로도 충분히 빼낼 수 있었을 테고. 그렇게 모든 흔적을 감춘 채 유유히 사라진 거지. 피해자 주머니에 있는 열쇠는 완벽한 밀실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연극이었던 거야.”
이수아는 경악했다. “세상에… 정말 그런 트릭이 있었다니! 그렇다면 범인은 대체… 정태우 씨가 이 비밀 통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어야겠네요!”
“그렇지.” 유진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은 다시 그 자개장을 향했다. “이 자개장은 단순한 가구가 아니었어. 어떤 면에선… 정태우 씨의 영혼의 반영이었지. 비밀과 욕망, 그리고 죽음까지도 담고 있는.”
“범인은 아마도 정태우 씨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을 겁니다. 이 맨션의 구조와 피해자의 특이한 수집 취미, 그리고 이 자개장의 비밀까지 알고 있던 사람….” 이수아는 자신의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이제 용의자의 범위는 확연히 좁혀졌다. 살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돈? 원한? 아니면, 정태우가 숨기고 있던 또 다른 ‘비밀’ 때문이었을까.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건 너의 일이지, 이수아 경위. 나는 그저 닫힌 문을 열어줬을 뿐이니까.”
서재 창밖으로는 서울의 밤이 다시 내려앉고 있었다. 수많은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 그 불빛 아래, 또 다른 비밀들이 끊임없이 숨 쉬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한유진은, 그 비밀들이 그를 부를 때까지, 다시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자개장에 잠시 비쳤던 용의 잔영처럼, 그의 존재는 그렇게 도시를 떠돌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한 그곳에서, 유진은 마지막으로 자개장을 응시했다. 마치 그 오래된 가구가 그에게 다른 비밀을 속삭이는 듯한 착각에 빠진 채. 그리고 문을 닫고, 뒤를 돌아섰다. 완벽했던 밀실은, 더 이상 완벽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