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하늘 아래, 낡아빠진 콘크리트 잔해들 사이로 바람이 스산하게 울부짖었다. 진우는 녹슨 철근이 튀어나온 벽에 기대어 지친 숨을 몰아쉬었다. 며칠째 제대로 된 식량은 입에 대지도 못했다. 뱃속에서는 천둥이라도 치는 듯 요란한 소리가 울렸고, 뼈만 남은 손은 무의식적으로 옆구리에 매달린 낡은 배낭을 움켜쥐었다. 그 안에는 딱딱하게 굳은 건빵 몇 조각과 거의 바닥을 드러낸 물통이 전부였다.
“오빠, 저기… 뭐가 보여.”
작고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귀에 닿았다. 진우는 고개를 돌려 유나를 바라봤다. 열 살 남짓한 소녀는 그의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온통 먼지로 뒤덮인 얼굴에도 또렷한 눈망울은 여전히 희미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유나가 가리킨 곳은 멀리 떨어진 거대한 건물 잔해였다. 유리창은 대부분 깨져나갔고, 외벽은 검은 그을음과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옛날에는 번화했을 법한 백화점 건물이었다.
“백화점…?” 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런 곳에 뭐가 남아 있을 거라고….”
수없이 많은 폐허를 뒤져봤지만, 대부분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남아있는 것이라곤 부서진 가구 조각이나 썩은 옷가지, 그리고 이따금씩 나타나는 기괴한 변이체들의 흔적뿐이었다. 그러나 유나의 작은 손이 그의 소매를 살짝 당겼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따뜻한 거라도 마실 수 있을지도….”
그 간절한 눈빛에 진우는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사실 그 자신도 희망이라는 한 줄기 빛을 찾고 있었다. 지쳐버린 심장이 다시 뛰게 할 만한, 그런 작은 기적이라도.
“알았어. 가보자. 하지만 조심해야 해. 언제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진우는 허리춤에 매달린 낡은 칼자루를 다시 고쳐 잡았다. 칼날은 여러 번 갈아서 닳아 있었지만, 날카로움만큼은 여전했다.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우의 뒤를 바싹 따랐다. 둘은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와 녹슨 자동차 뼈대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치며 걸어갔다. 차갑고 끈적한 공기가 폐부를 파고들었고, 쥐죽은 듯 고요한 정적만이 그들을 짓눌렀다.
백화점의 거대한 출입문은 이미 산산조각 나 있었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고, 낡은 철골 구조물은 마치 괴물의 뼈대처럼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퀘퀘한 먼지 냄새와 함께 섬뜩한 냉기가 감돌았다. 한때 화려했을 내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모든 것이 폐허가 된 도시만큼이나 처참한 몰골이었다.
“어둡다….” 유나가 진우의 옷자락을 더욱 세게 잡았다.
진우는 배낭에서 손전등을 꺼내 불을 밝혔다. 희미한 불빛이 거대한 홀의 일부를 비췄다. 텅 빈 진열대와 뒤집어진 마네킹들이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저 위층에 식료품 코너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진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쪽이야. 천천히 움직여. 소리 내지 말고.”
둘은 발소리를 죽이며 엉망진창이 된 내부를 헤쳐나갔다. 이따금씩 천장에서 부스러지는 소리나 벽 틈새에서 바람이 새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 말고는 어떤 생명의 흔적도 없었다. 아니, 그게 더 위험한 징조일 수도 있었다. 너무 조용하면 오히려 무언가가 숨어있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몇 층을 올라갔을까. 식료품 코너였을 법한 곳에 도착했지만,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진열대는 텅 비어 있었고, 바닥에는 찢어진 포장지와 내용물이 흘러나온 캔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모든 것이 이미 다른 생존자들의 손을 거쳐 갔거나, 썩어서 먹을 수 없게 된 것들이었다.
“젠장….” 진우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실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유나의 어깨가 축 처지는 것을 보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오빠, 나… 괜찮아.” 유나가 애써 웃으려 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그 순간이었다.
정적을 깨고, 홀 저편에서 *스스스스…* 하는 섬뜩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마치 수많은 작은 발들이 바닥을 기어가는 듯한 소리였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유나를 자신의 뒤로 밀어 넣었다. 손전등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뭐… 뭐지?” 유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움직이지 마. 소리 내지 마.” 진우는 바닥에 떨어진 낡은 철제 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의 시선은 소리가 나는 어둠 속으로 향했다.
*스스스스… 철컥!*
이번엔 조금 더 명확한 소리였다. 무엇인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손전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두 점의 눈이 진우를 응시했다.
“크으으… 끽!”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진열대 위에서 튀어나왔다. 잔뜩 뒤틀린 사지와 비정상적으로 길쭉한 발톱, 그리고 곤충을 연상시키는 겹눈을 가진 변이체였다. 마치 거대한 사마귀와 거미를 합쳐놓은 듯한 혐오스러운 모습. 놈은 사방으로 뻗은 다리로 진열대 사이를 빠르게 가로지르며 달려들었다.
“젠장!”
진우는 유나에게 “숨어!”라고 외치며 철제 파이프를 휘둘렀다. 파이프가 놈의 단단한 외골격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콰앙!* 그러나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우에게 달려들었다. 그 날카로운 발톱이 진우의 팔을 스치며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욱!*
“오빠!” 유나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우는 팔에서 흐르는 피를 애써 무시하고 파이프를 다시 한번 들어올렸다. 놈은 놀라운 속도로 진우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빈틈을 노렸다. 마치 춤을 추는 듯했지만,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죽음을 의미했다.
“여기야!” 유나가 어디선가 주워온 깡통을 놈에게 집어 던졌다. 깡통이 놈의 등딱지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변이체가 잠시 움찔하며 유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진우는 전력을 다해 파이프를 내리찍었다.
*퍼억!*
변이체의 머리 부분이 찌그러지며 녹색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놈은 격렬하게 몸부림치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시체에서는 역겨운 비린내가 진동했다.
“하아… 하아….”
진우는 숨을 헐떡이며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팔의 상처는 꽤 깊었다. 따가운 통증이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유나는 울먹이며 진우에게 다가와 그의 팔을 내려다봤다.
“오빠… 피가….”
“괜찮아. 이 정도는….” 진우는 애써 유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저런 변이체가 또 있을지도 몰랐다. 더 이상 여기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했다. 진우는 유나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자.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해.”
둘은 다시 발소리를 죽이며 이동했다. 이번에는 구석에 있는 직원 전용 통로를 택했다. 비상 계단이 있을 것 같았다. 낡고 어두운 통로를 한참 걷다가, 진우는 문득 어떤 방 앞에 멈춰 섰다. 다른 문들과 달리 두꺼운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옆에는 빛바랜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비상용 식량 창고’.
진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희미한 희망이 그의 가슴을 간질였다.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지만, 녹슨 틈이 보였다. 진우는 힘겹게 자신의 칼을 꺼내 자물쇠 틈새에 넣고 비틀었다. *찌이익! 쨍그랑!* 녹슨 자물쇠가 부서지며 철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시원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진우와 유나는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선반 위에는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통조림 캔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건조식품 봉지들과 멸균된 물통들도 즐비했다. 마치 이 세상의 종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곳의 시간은 멈춰버린 것 같았다. 다른 생존자들의 손이 닿지 않았던, 완벽하게 보존된 비상 창고였다.
유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오빠… 이거… 진짜야?”
진우는 무릎을 꿇고 통조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쇠고기 장조림’. 유통기한은 한참 지났겠지만, 이 정도 보존 상태라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유나를 끌어안았다. 굶주림과 절망 속에서 헤매던 자신들에게 찾아온 작은 기적이었다.
“진짜야, 유나. 우리… 살았어.”
선반 한쪽에서 빛바랜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작은 아이의 서툰 그림과 함께 삐뚤빼뚤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엄마 아빠, 꼭 살아남아서 다시 만나요. 사랑해요.’ 진우는 그림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 그림을 그린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살아 있을까.
한때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았던 세상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폐허가 되었지만, 그래도 희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 작은 창고처럼, 어딘가에는 아직 빛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진우는 유나에게 통조림 하나를 따서 건넸다. 소녀의 얼굴에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비록 세상은 여전히 회색빛이었고, 팔의 상처는 계속해서 따끔거렸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고통이 잊히는 듯했다.
“우리, 살 수 있을까?” 유나가 통조림을 먹으며 물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든 여정이 될 것이고, 내일은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응, 살 거야. 반드시.”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다짐 속에는, 폐허가 된 세상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을 작은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