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새 아파트, 새 삶, 새… 손님?
“드디어 내 집!”
한세아는 양팔을 활짝 벌린 채 거실 한가운데 섰다. 짐짝들이 가득한 작은 원룸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이보다 더 넓고 화려한 궁궐이 따로 없었다. 스물아홉, 뼈 빠지게 일해서 겨우 마련한 전셋집. 비록 대출의 노예가 되는 길을 택했지만, 드디어 혼자만의 공간을 가졌다는 사실에 세아는 가슴이 터질 듯 설렜다.
“흐음~ 이 정도면 딱이지.”
내 눈에만 예쁜 초록색 벽지를 자랑스럽게 바라봤다. 며칠 밤을 새워 직접 바른 벽지였다. 친구들은 그 돈으로 도배업자를 부르라고 했지만, 자기 손으로 공간을 채우고 싶다는 로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은 박스로 가득하지만, 차곡차곡 정리하면 그녀만의 아늑한 보금자리가 될 터였다.
이사도 무사히 마쳤겠다, 저녁은 배달음식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스마트폰을 들고 치킨 앱을 열었다. 바삭한 후라이드를 시킬까, 양념치킨을 시킬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 순간, 현관 쪽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뭐야?”
세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낡은 현관문이 삐걱거리며 약간 열려 있었다.
“아, 내가 문을 제대로 안 닫았나?”
이사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치킨 메뉴를 고르는데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어? 내 열쇠….”
현관문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선반에 늘 올려두던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방금 이사짐 정리할 때 이 선반 위에 뒀는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보조키는 항상 선반 위에 두는 습관이 있었다.
“뭐야, 어디 갔지?”
선반 위를 아무리 뒤져도 열쇠는 없었다. 혹시 바닥에 떨어졌나 싶어 무릎을 굽히고 바닥을 샅샅이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흐음… 하도 난리법석을 떨었더니 나도 정신이 없나 보네.”
치매 초기인가 싶어 스스로를 자책하며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짐짝들 사이를 헤집었다. 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으악!”
세아는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널브러진 박스들 중 하나에 무심코 기댄 순간, 그 박스 안에서 ‘짤랑’ 소리가 나며 열쇠가 튀어나온 것이다. 그것도 박스 맨 위, 내용물이 가득 찬 곳에서.
“미쳤나 봐. 분명 선반 위에 뒀는데… 내가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열쇠를 박스에 넣을 리가 없잖아?”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사 스트레스가 심했나 보다 생각하며 애써 머리를 흔들었다. 빨리 치킨이나 먹고 쉬어야겠다.
* * *
밤 11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길고 긴 하루였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그녀의 숨소리만이 고요한 방을 채웠다.
“괜찮아, 세아야. 너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대단해.”
스스로를 다독이며 애써 눈을 감으려는데, 문득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놓인 리모컨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베개 옆에 두고 잠들 준비를 했는데, 왜 테이블 위에 가 있는 거지?
“내가 뭘 착각했나?”
다시 리모컨을 집어 베개 옆에 두었다. 그리고 눈을 감는 순간.
‘딸칵!’
거실에 켜져 있던 작은 스탠드 조명이 스스로 꺼졌다.
“악!”
세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발밑까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뭐야? 스위치도 건드린 적 없는데?!”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혹시 이 집… 뭐가 있는 건가? 머릿속에 온갖 오컬트 영화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당장이라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싶었지만, 혹시 이불 속에서 뭔가 튀어나올까 봐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겨우 용기를 내어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 스탠드 스위치를 다시 올렸다. ‘딸칵’ 소리와 함께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이게… 전기가 노후돼서 그런 건가? 이 아파트가 좀 오래됐다고는 하던데….”
애써 과학적인 이유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래, 전압이 불안정해서 그럴 거야. 낡은 건물이라 그렇겠지! 이사를 막 한 집에 귀신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녀는 재빨리 모든 불을 켰다. 거실등, 침실등, 화장실등… 온 집안이 환해지자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침대 옆 리모컨도, 스탠드도 켜져 있었다. 안심하고 잠이 들려는데, 문득 침대 끝자락에 놓인 스마트폰이 눈에 들어왔다.
“음? 저거… 아까 분명히 충전기에 꽂아놨는데.”
충전기는 분명히 거실에 있었고, 세아는 자기 전에 충전기를 빼고 침대에 올라왔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충전선과 함께 침대 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침대에 올라오면서 충전기를 들고 왔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이사 첫날부터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 * *
다음 날 아침, 세아는 잔뜩 부은 눈으로 일어났다. 잠을 설친 탓에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침실 문을 여는 순간, 세아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으악!!!”
분명히 어젯밤 잠들기 전에 닫아둔 화장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 열려 있었는지, 안에서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쳐오는 것 같았다.
“이건… 이건… 진짜 아니야!”
세아는 더 이상 낡은 건물 탓이나 이사 스트레스 탓으로 돌릴 수 없었다. 이 집, 뭔가 이상하다.
“귀… 귀신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귀신 들린 집 특징’, ‘폴터가이스트 현상’ 같은 단어를 검색했다. 검색 결과는 그녀의 불안감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집안 물건들이 저절로 움직인다?’ – 어젯밤 열쇠랑 리모컨.
‘전등이 저절로 켜지고 꺼진다?’ – 어젯밤 스탠드 조명.
‘문이 저절로 열린다?’ – 지금 화장실 문.
세아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짜 귀신이라면? 로맨틱 코미디 웹툰 작가를 꿈꾸는 그녀가 아니라, 오컬트 웹툰 작가가 되어야 할 판이었다.
“안 돼! 이 집, 전세금도 비싸다고! 절대로 귀신에게 쫓겨날 수 없어!”
세아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성과 과학으로 무장해야 했다. 우선은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생각해 보자. 뭐든 든든하게 먹어야 힘이 나는 법이니까.
냉장고 문을 열고 식빵과 달걀을 꺼냈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불을 켰다.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프라이팬이 달궈졌다. 달걀을 깨 프라이팬에 올리고, 토스터기에 식빵을 넣었다. 평화로운 아침 식사가 될 뻔했다.
그때였다.
세아의 등 뒤, 싱크대 위에 놓여있던 소금통이 갑자기 ‘탕!’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플라스틱 통이 박살 나면서 하얀 소금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꺄아아악!!!”
세아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만 벌린 채 덜덜 떨었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명백한 ‘어떤 존재’의 소행이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주변을 더듬었다.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식칼이라도 들고 있어야 하나?
그때였다.
‘딩동!’
현관문 벨이 울렸다. 세아는 깜짝 놀라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흐읍… 흐읍….”
문밖의 존재가 ‘귀신’일까? 아니면 범죄자? 이사 첫날부터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딩동! 딩동!’
벨 소리가 집요하게 이어졌다. 세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몸을 일으켜 현관문까지 기어갔다. 문밖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구멍, 렌즈를 통해 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단정한 검은색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 얼핏 봐도 180cm는 넘어 보이는 큰 키에, 꽤나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마치 똥 씹은 표정처럼.
“누… 누구세요?”
세아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물었다.
“옆집입니다. 좀 조용히 해주시면 안 될까요?”
남자는 한숨을 쉬듯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투에서 짜증이 뚝뚝 묻어났다.
“네? 조용히… 라니요? 저는….”
“아침부터 비명 지르고 난리 치는 소리가 다 들립니다. 이사 첫날이라 이해는 합니다만, 공동주택에서는 최소한의 에티켓을 지켜주세요.”
그의 차가운 시선이 세아에게 꽂혔다. 그 시선은 마치 ‘도대체 무슨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세아는 말문이 막혔다. 이사 첫날부터 옆집 남자에게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다니! 하지만 지금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괴한 현상들을 이 남자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너무 잘생겼잖아! 망할, 이런 상황에서 잘생긴 남자와 첫 대면이라니!
“저… 그게….”
세아는 바닥에 흩뿌려진 소금과 박살 난 소금통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또 무슨 해괴한 변명을 늘어놓을 셈이야?’라고 묻는 듯.
그 순간, 세아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저 남자도 이 집에 사는 ‘손님’ 중 한 명인가?*
세아의 눈빛이 흔들리자, 남자의 미간은 더욱 깊게 패였다.
“…….”
그의 시선에 세아는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겼다. 그래, 내 집인데! 내가 비명을 지르든, 소금통이 깨지든 무슨 상관인데!
“네! 조용히 할게요! 죄송합니다! 됐죠?!”
세아는 냅다 문을 닫았다. ‘쾅!’ 하고 닫힌 문 앞에서 남자는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
그리고 세아는 문에 기대 주르륵 주저앉았다.
오늘 아침, 그녀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평화롭기는커녕, 낯선 존재와 낯선 이웃이 뒤섞인 혼돈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사 첫날부터, 그녀의 평범한 일상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과연, 그녀는 이 미스터리한 아파트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지긋지긋하게 잘생긴 옆집 남자는 또 뭐란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