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아파트 복도를 가득 채운 정적은 끈적하고 무거웠다. 은채는 익숙하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며칠 전부터 이런 식이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올 때마다 아파트 전체가 마치 깊은 심해에 잠긴 듯 싸늘하고 음습한 기운에 짓눌려 있는 것 같았다.

“젠장, 에어컨 좀 그만 틀지.”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왠지 모르게 변명처럼 들렸다. 8월의 마지막 주, 아직 한낮은 찜통더위였지만 밤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지는 기이한 날씨가 이어졌다. 그렇다 해도 이건 너무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냉기가 후끈 끼쳐왔다. 보일러를 켜볼까 하다가도, 곧 꺼버리겠지 싶어 관뒀다. 어차피 이 집은 뭘 해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현관에 구두를 벗어두고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불을 켜지 않아 온통 어두컴컴한 집 안은 창밖의 도시 불빛을 희미하게 받아들여 기괴한 그림자들을 드리우고 있었다. 순간, 거실 테이블 위 화병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은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아침에 나갈 때는 똑바로 세워두었다.

“고양이라도 키워야 하나, 요즘 부쩍 덜렁거리네.”

자신이 건드렸을 거라고 애써 합리화하며 화병을 바로 세웠다. 유리컵 안에 꽂힌 조화 한 송이가 서늘한 공기 속에서 맥없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피곤이 몰려왔다. 대충 샤워만 하고 잠들어야지. 주방을 가로질러 욕실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쿵.’

침실 쪽에서 들린 소리에 은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잘못 들었나? 침 삼키는 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것 같은 적막이 다시 찾아왔다. 은채는 숨을 들이켜고 귀를 기울였다.

‘쿵, 쿵….’

이번엔 확실했다. 낮고 둔탁한 소리가 침실 안에서 울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무거운 물건을 바닥에 내리찍는 듯한, 규칙적인 박자를 가진 소리였다.
몸의 모든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누가 들어온 건가? 강도? 침입자?
은채는 손에 잡히는 대로 현관 옆 우산꽂이에 꽂혀 있던 튼튼한 장우산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누구세요?”

떨리는 목소리가 겨우 튀어나왔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쿵’ 하는 소리가 멈췄다. 완벽한 침묵. 너무나 완벽해서 오히려 더 소름 끼치는 침묵이었다.
은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침실 문을 노려봤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잠겨 있지는 않았다.

“경찰 부릅니다….”

반쯤 협박하듯 말하며 뒷걸음질 쳤다. 휴대폰을 꺼내 112를 누르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는 순간,

‘철컥.’

침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은채는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눈앞에서 문고리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마치 문 안에 있는 존재가 바깥의 자신을 구경하듯.
그리고 이내, 문이 안쪽에서 스르륵 열렸다.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은채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어둠 속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장우산을 든 손에 힘이 풀려 손목이 덜덜 떨렸다.

“누구야…! 빨리 나와…!”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침실 안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순간, 침실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은채의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스탠드 램프가 스스로 켜졌다.
노란색 불빛이 침실을 비추자, 은채는 그제야 침실 안의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은채의 눈은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침실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옷장 문은 활짝 열려 안에 걸려 있던 옷들이 바닥에 팽개쳐져 있었고,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화장품들은 전부 엎어져 제멋대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서랍이 열려 내용물이 쏟아져 나온 것도 모자라, 서랍 자체도 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침대였다. 은채가 아침에 정돈하고 나갔던 침대 이불과 베개가 마치 누군가 격렬하게 몸부림친 것처럼 전부 헝클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불 한가운데, 마치 누군가 그 위에 앉아 있다가 방금 일어난 것처럼 깊게 눌린 자국이 선명했다.

은채는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오직 헉헉거리는 숨소리만이 텅 빈 복도를 채웠다.
이건 강도가 아니었다. 강도라면 물건을 훔치고 도망갔을 것이다.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덩그러니 문을 열어두고 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때, 은채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액자.
오랜 연인과 함께 찍은, 가장 소중하고 행복했던 순간을 담은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였다.
그 액자가 협탁 모서리에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그리고 액자 유리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은채의 얼굴 위로, 마치 핏줄처럼 굵은 금이 쭉 그어져 있었다.

‘똑… 똑… 똑….’

아까의 쿵쿵거림과는 다른, 규칙적이면서도 끈기 있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은채는 고개를 돌렸다.
소리는 주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주방으로 향하는 복도 끝, 싱크대.
그 위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수도꼭지가 잠겨 있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수도꼭지는 굳게 잠겨 있었다.
물은 천장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은채는 눈을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천장.
그런데 물방울이 떨어지는 바로 그 지점, 작고 검은 점 하나가 보였다.
그 점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마치 천장에 먹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그 검은 점 주변의 벽지가 서서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불쾌한 그림자처럼 번져 나갔다.

‘똑…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이제는 둔탁한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그 소리를 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천장의 검은 점은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천장 안쪽에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며 천장을 밀어내는 것처럼.
벽지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이내 미세한 실금들이 번지기 시작했다.

은채는 손에 든 우산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소리가 고요한 집 안을 날카롭게 갈랐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바싹 말라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천장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천장의 검은 점이 마치 눈동자처럼 은채를 똑바로 응시하는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검은 점이, 벌어졌다.

그 틈새로 보이는 것은 어둠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태초의 어둠.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너무나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아주 작은 눈처럼.

은채의 등골에 차가운 물이 흐르는 듯한 오한이 스쳤다.
그것은 단순히 어둠 속에서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은채를 보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이 집, 이 공간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였다.
은채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을 향해 내달렸다.
어둠 속에서 발버둥치듯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도어락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쾅!’

뒤에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은채는 복도 한가운데서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방금 뛰쳐나온 아파트 문을 노려봤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문 안쪽에서.

‘똑… 똑… 똑….’

아직도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아주 희미하게, 문 안에서 규칙적인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문이 자신을 조롱하듯, 그 소리를 밖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때, 은채의 시선이 복도 바닥에 닿았다.
자신이 방금 서 있던 문 바로 앞, 복도 바닥에.
젖어 있는 발자국 하나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물방울이 아니라, 누군가 물을 밟고 걸어 나온 듯한 발자국이었다.
그리고 그 발자국은, 은채가 서 있는 곳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마치… 은채의 바로 뒤에서, 누군가 함께 뛰어 나온 것처럼.
아니, 그 발자국은 현관 문을 향하고 있었다.
문 밖으로, 자신을 따라 나온 것이었다.
은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아파트 복도의 끝, 저 너머.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끝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벽에 드리워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천천히 은채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그녀는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