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풍이 휘몰아치는 밤이었다. 얼어붙은 숲은 뼈마디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달은 핏빛으로 물든 듯 창백한 푸른 기운을 토해내고 있었다. ‘천수혈’이라 불리는 이 은밀한 골짜기는 언제나 비정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으나, 오늘만큼은 그 침묵마저도 날카로운 비수처럼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수백 년간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은 이 저주받은 땅에, 한 줄기 푸른 섬광이 사납게 들이닥쳤다. 섬광은 골짜기 한가운데의 고목 아래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고, 이내 청명한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비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초조함과 인내, 그리고 무엇보다 깊은 갈망이 뒤섞여 있었다. 청월은 늘 그래왔듯, 약속된 시간에 이미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푸른 도포 자락이 희미한 달빛 아래 나부꼈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선(神仙)의 기운은 삭풍마저도 잠재우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고요한 수면 아래 감춰진 격랑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으스스한 골짜기 저편에서 섬뜩하리만치 아름다운 붉은 섬광이 번뜩였다. 차가운 공기가 일렁이며, 섬광은 이내 한 여인의 형상으로 변했다. 붉은 비단옷을 입은 그녀, 비화였다. 그러나 평소의 당당하고 오만한 자태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는 고통과 두려움이 역력했고, 붉은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청월…!”
그녀가 힘겹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청월은 순식간에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의 눈이 그녀의 어깨를 훑었다. 붉은 비단옷이 찢어진 틈으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흉터가 깊었다. 단순히 요괴의 발톱에 찢긴 상처가 아니었다. 강력한 신력(神力)이 담긴 공격이었다.
“무슨 일이냐! 대체 누가 감히 너에게…!”
청월의 목소리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비화의 어깨를 감쌌다. 그의 손끝에서 따스한 신력이 흘러나와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졌으나, 비화는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어… 그들의 신력이 내 마기에 뒤섞여 있어서… 네 힘으로는 완전히 정화할 수 없어.”
그녀의 말에 청월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그들의 신력과 마기는 서로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존재. 그들의 사랑만큼이나 금기시되는 것이었다.
“대체 누가? 천계의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나?”
비화는 힘없이 그의 품에 기대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천계의 감시자가… 나의 거처를 습격했어. 내가 너를 만나러 가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아… 내가 너무 방심했어.”
그녀의 목소리는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청월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감쌌다. 그의 심장이 고통스럽게 죄어왔다. 몇 백 년을 이어온 이 금지된 사랑이 이제는 은밀한 만남조차 허락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네 잘못이 아니야.” 청월은 그녀의 붉은 머리칼에 뺨을 기댔다. 그의 숨결이 떨렸다. “나 때문이야. 내가 너를 위험에 빠뜨렸어.”
“아니… 너는 내 삶의 이유야. 네가 없었다면 난 이미 오래전에…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벗어났을 거야.”
비화는 고개를 들어 그의 푸른 눈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핏빛 달빛이 서려 있었고, 그 안에는 슬픔과 사랑, 그리고 지독한 연모가 가득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차가운 손이었다. 마기의 영향을 받은 그녀의 몸은 늘 서늘했지만, 지금은 어쩐지 더욱 차가웠다.
“이젠 더 이상… 숨을 곳도 없어졌어, 청월.” 그녀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천계는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을 거야. 마계 또한… 내가 너와 만난다는 사실을 알면 나를 용서치 않을 테고.”
그들의 사랑은 천계(天界)에는 불경한 금기였고, 마계(魔界)에는 배신이었다. 신선과 마족. 서로를 존재 자체가 악이라 규정하는 두 세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한 두 존재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재앙을 불러오는 일이었다.
청월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갑게 빛났다. 그가 누구인가. 천계의 최고 신선 중 하나로, 수많은 전쟁에서 마계를 무릎 꿇린 장본인이었다. 그의 의지 하나로 천계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한 여인의 상처와 고통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너를 해하려 한다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부술 것이다.”
낮게 깔린 청월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 대고 선포하는 듯한 맹세였다. 그의 푸른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골짜기의 삭풍을 압도했다. 비화는 그의 강렬한 의지에 순간 멍해졌다.
“안 돼… 청월. 그렇게 되면… 너는 천계의 적으로 돌아설 것이고, 마계는 너를 이용하려 들 거야. 결국 너는 홀로 모든 것의 적이 될 뿐이야.”
“상관없어.” 청월은 비화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들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그녀의 핏빛 눈동자에 깊이 박혔다. “네가 없는 세상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이 세상이 부서지든, 내가 사라지든… 너만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그의 뜨거운 눈빛에 비화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수천 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수많은 영광과 고통을 겪어왔지만, 이토록 뜨겁고 순수한 감정은 처음이었다. 이것이 금지된 사랑의 비극이자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차갑던 그녀의 입술은 그의 온기에 서서히 데워지는 듯했다. 숨 막히는 침묵 속, 그들의 절박한 입맞춤만이 이어졌다. 세상의 모든 금기와 규칙, 그리고 다가오는 재앙마저도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직 서로의 존재만이 진실이었다.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청월의 푸른 신력과 비화의 붉은 마기가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서로를 밀어내던 이질적인 기운들이, 이상하리만치 조화롭게 뒤섞이며 신비로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심장이 동시에 격렬하게 울렸다.
그때였다.
멀리 떨어진 숲 저편에서 날카로운 징소리가 울려 퍼졌다. 쨍그랑! 징소리는 이내 수십 개의 다른 소리들과 합쳐져 거대한 경고음이 되었다. 이어 수많은 발걸음 소리와 함께, 숲을 가르는 섬광들이 이곳 천수혈을 향해 빠르게 접근하고 있음을 알렸다.
천계의 감시자들!
그들의 만남이 발각된 것이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이 은밀한 장소마저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청월은 황급히 비화에게서 입술을 떼어냈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지독한 살기가 번뜩였다. 그는 비화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도망쳐, 비화. 내가 시간을 벌겠다.”
“안 돼! 너 혼자서는…!” 비화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이곳은 내가 가장 잘 아는 곳이다. 그리고… 너의 상처로는 그들을 상대할 수 없어.” 청월의 목소리는 흔들렸지만, 그의 의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반드시 살아남아. 내가 너를 찾아낼 것이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경고음은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고, 숲은 이미 푸른 신력의 섬광들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청월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심장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던 푸른 빛의 수정 하나를 꺼내 비화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것을 가지고… 북쪽의 설산으로 가. 그곳은 한동안 안전할 거야.”
“청월…!”
비화의 애절한 외침에도 청월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거대한 고목 앞에 서서, 서서히 다가오는 천계의 감시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푸른 도포가 격렬한 바람에 펄럭였고, 그의 전신에서 휘몰아치는 신력이 핏빛 달빛 아래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감히… 이곳을 침범하려 하는가.”
그의 목소리는 비수처럼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골짜기 전체를 뒤흔드는 푸른 기운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비화는 그의 뒤를 돌아보며 주저했지만, 청월의 강렬한 눈빛이 그녀에게 ‘가라’고 소리치는 듯했다.
울부짖는 바람 소리 사이로 비화의 흐느낌이 섞여 들었다. 그녀는 결국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붉은 섬광이 되어 숲 속으로 사라졌다. 청월은 그녀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사방에서 숲을 에워싸듯 나타난 천계의 감시자들이 수십의 신력을 모아 그를 겨누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분노와 경멸, 그리고 불경한 자를 심판하겠다는 결의가 가득했다.
“신선 청월! 감히 마족과 통정(通情)하여 천계의 율법을 어기다니! 네 죄가 크니 순순히 잡혀라!”
선두에 선 감시대장의 목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청월은 그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그의 입술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율법? 너희의 율법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나.”
그의 손끝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푸른 신력이 응축된 거대한 기파(氣波)가 감시자들을 향해 맹렬히 쇄도했다. 천수혈 골짜기 전체가 폭풍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비화가 도망칠 충분한 시간을 벌어야 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등지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의 눈은 오직 하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화가 사라진 숲 저편의 어둠.
핏빛 달이 처절하게 울부짖는 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