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 (시간여행) 독립적인 단편 소설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이미 죽어 있었다.

지독한 재와 흙먼지가 뒤섞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천천히 깜빡이는 눈꺼풀 위로 뻑뻑한 먼지가 내려앉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것은 온통 회색빛으로 뒤덮인 거대한 폐허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덮쳐온 강렬한 섬광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기에 있었다.

“여… 여기는 대체….”

갈라진 목소리가 황량한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손을 들어보니, 손목에 채워져 있던 스마트워치는 액정이 완전히 나간 채 검게 변해 있었다. 시간이라도 확인하려던 내 어리석은 시도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주변은 익숙한 듯 낯선 풍경이었다. 높이 솟아있던 빌딩들은 마치 거인의 뼈대처럼 앙상하게 남아 있었고, 유리창들은 대부분 깨져나가거나 녹아내려 기괴한 형태로 일그러져 있었다. 거리에는 녹슨 차량들이 뼈대만 남긴 채 뒹굴고 있었고, 그 위로는 두껍게 쌓인 모래와 흙먼지가 만 년의 세월을 덮은 듯했다.

나는 하윤, 평범한 20대 직장인이었다. 미래를 꿈꾸며 오늘을 살아가는, 그런 흔하디흔한 존재. 그런데 이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마치 꿈속을 걷는 것 같았다. 아니, 악몽이었다.

몸을 일으켰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며칠을 굶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갈증이 극심했다. 목구멍이 바싹 말라붙어 침조차 삼키기 힘들었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충동이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상점가였다. 익숙한 간판의 흔적들이 먼지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거의 없었다. ‘편의점’이라고 적혀 있었을 법한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에는 깨진 유리 파편과 썩어 문드러진 상품 포장지들이 널려 있었다. 희망은커녕 절망만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선반을 뒤지기 시작했다. 먼지와 곰팡이, 알 수 없는 이물질로 뒤덮인 캔이나 봉지들이 손에 잡혔다. 하지만 내용물이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찢어지고, 부패하고, 그나마 남은 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가 가져갔을 터였다.

“물… 물이라도….”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비명에 가까웠다. 그때, 구석에 처박혀 있던 낡은 자판기가 눈에 들어왔다. 투명했던 전면부는 이미 불투명한 먼지층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 형태는 분명 자판기였다. 혹시 하는 마음에 발로 몇 번 차 보았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반응은 없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더 세게 발로 차자, 기계음과 함께 작은 플라스틱병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병을 집어 들었다. 라벨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내용물은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갈증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 모금, 조심스럽게 목으로 넘겼다. 흙맛이 나는 듯했지만, 동시에 생명수가 온몸으로 퍼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물 한 모금에, 그런 덧없는 희망이 솟아났다.

폐허 속에서 며칠이 흘렀는지, 몇 주가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낮에는 타는 듯한 태양이, 밤에는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나를 괴롭혔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건물을 뒤지고, 낡은 배수관에서 겨우 한 모금의 물을 찾아내 목을 축였다. 어느 날은 먼지 쌓인 책더미에서 ‘2247년’이라는 숫자가 박힌 낡은 달력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내가 시간여행을 했다는 것, 그것도 무려 20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뛰어 종말을 맞은 미래에 떨어졌다는 것을 그제야 실감했다.

“왜… 왜 하필 나야….”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익숙했던 세상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나 혼자, 이 거대한 무덤 속을 헤매고 있었다. 절망은 목을 조르는 끈처럼 나를 옥죄어 왔다. 여기서 죽는다면,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슬퍼해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생각보다 쉽게 오지 않았다. 아니, 죽을 수 없었다. 아무리 비참하고 고통스러워도, 심장이 뛰는 한, 숨을 쉬는 한, 내 몸은 살려고 발버둥 쳤다.

나는 움직였다. 무작정 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유도 목적도 없었다. 그저 멈춰 서 있으면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았기에,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거친 모래와 돌부리 위를 걷는 발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다.

며칠 밤낮을 걸었을까. 멀리서 거대한 건축물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의 가장자리에 있던, 과거에는 아마도 어떤 산업 시설이었을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었다. 혹시 그곳에 무언가 남아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로 그곳으로 향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모래밭에 수상한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원형의 구덩이들, 그리고 그 주변으로 굳어버린 듯한 이상한 물질의 흔적. 불길한 예감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내 발아래 땅이 거세게 흔들렸다. 진동은 점점 강해졌고, 모래밭이 거대한 파도처럼 출렁이기 시작했다. 등골을 타고 오싹한 냉기가 흘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모래구덩이 한가운데서, 검고 단단한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머리가 솟아올랐다. 거대한 송곳니가 드러나고, 맹렬한 기세로 모래를 뿜어내며 몸체를 드러내는 그것은,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거대한 모래벌레였다. 나의 발걸음이, 미세한 진동이 녀석을 불러낸 것이다.

“크아악!”

나는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온몸의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발을 놀렸다. 모래벌레는 나를 쫓아 빠르게 이동했다. 내가 달리는 방향으로 땅이 울리고, 모래가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한 번 잡히면 그대로 삼켜질 것이라는 공포가 내 생존 본능을 극대화시켰다.

간신히 산업 시설의 철골 구조물 안으로 몸을 던졌다. 녹슨 철제 계단을 두 칸씩 건너뛰며 위로 향했다. 모래벌레는 구조물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하는 듯, 밖에서 거대한 몸체를 비비며 으르렁거렸다. 거대한 철골들이 흔들리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위층으로 올라가다, 나는 낡은 제어실처럼 보이는 공간을 발견했다. 먼지 쌓인 모니터들과 부서진 기계들 사이,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낡은 금속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먼지투성이였지만 훼손되지 않은, 작은 유리병 여러 개가 들어 있었다.

병 안에는 붉은빛이 감도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라벨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물’. 그리고 그 옆에는 조그맣게 ‘비상 식량’이라고 적힌 캡슐 몇 개도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

나는 붉은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흙맛도, 곰팡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단맛과 함께 몸에 활력이 도는 듯했다. 캡슐 하나를 삼키자, 며칠간 굶주렸던 위장이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때, 제어실 한가운데에 놓인 낡은 단말기에서 희미한 녹색 불빛이 깜빡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죽은 줄 알았던 기계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호기심과 함께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전원 버튼을 눌러보자, 노이즈가 가득한 화면이 켜졌다. 화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코드들과 함께, 몇 개의 기록 파일이 보였다.

떨리는 손으로 파일 하나를 재생했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속에서 낡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곳은 잔류 인류 보호 구역, ‘별무리 기지’다. 대붕괴 이후, 우리는 이곳에서… 마지막 희망을… 찾고 있다. 만약 이 신호를 듣는 자가 있다면… 북쪽 270도 방향으로… 이동하라. 생존… 생존자들이 기다린다….”

목소리는 이내 노이즈에 묻혀 사라졌다. 하지만 내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별무리 기지’. ‘생존자들’. ‘마지막 희망’.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 황폐한 세상 속에도, 아직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들린 붉은 액체 병과 비상 식량 캡슐, 그리고 주머니에 넣은 단말기. 나는 다시 일어섰다. 몸은 여전히 지치고, 발은 아팠지만,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뜨거운 불꽃이 가슴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벗어난 나는 이제 단순한 생존을 넘어, 새로운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했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황량한 모래벌판 너머로,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별무리처럼 보이는 지점이 있었다. 어쩌면 그곳이, 내게 남은 유일한 희망일지도 몰랐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한 발 한 발, 그 빛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 죽은 세상 속에서, 나의 시간은 이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