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독립적인 단편 소설

세상은 회색빛으로 물든 지 오래였다. 빌딩 숲은 거대한 묘비처럼 웅장하게 서 있었지만, 그 안에서 뛰놀던 생명은 모조리 흩어지고 사라진 뒤였다. 지훈은 그 거대한 무덤의 한 조각, 12층짜리 아파트의 704호에 갇혀 있었다. 아니, 스스로를 가두었다. 밖은 살아남은 것들보다 죽은 것들이 더 많았고, 살아남은 것들조차 언제 죽음을 가져올지 알 수 없는 흉측한 존재들이었으니.

해가 뜨면 작은 창문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방 안을 더 칙칙하게 만들었다. 지훈은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눈을 떴다. 삐걱이는 스프링 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밤새 별다른 일은 없었다. 아니,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는 늘 그랬듯이 희미한 인기척이나 긁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그 환청에 시달리다 간신히 잠들었을 뿐이었다.

“젠장…”

지훈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이 필요했다. 부엌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 조심스러웠다. 복도에 깔린 닳고 닳은 나무 마루는 작은 움직임에도 삐거덕거렸다. 오래된 가구들 위에는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며칠 전 먹다 남은 건조 비상 식량이 담긴 캔이 놓여 있었다. 옆에는 손때 묻은 라이터와 닳아빠진 후레쉬가 나란히 있었다.

부엌은 그나마 정돈된 공간이었다. 썩어가는 음식 냄새가 덜했고, 비상용으로 비축해둔 생수가 선반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훈은 물통 하나를 꺼내 들었다. 뚜껑을 돌려 따고, 벌컥벌컥 목으로 넘겼다. 한 줄기 시원한 물이 마른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등 뒤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닫혀있던 부엌 문이 미세하게 열려 있었을 뿐이었다. 낡은 문이 바람에 삐걱거렸나?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문을 다시 닫았다. 하지만 아파트는 고요했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죽은 공간이었다.

“뭐야, 또 환청인가.”

지훈은 피곤에 절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폐허가 된 도시의 정적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한 소음보다 더 치명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이상한 일은 계속되었다.
지훈이 침대에 앉아 천장 벽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거실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충격에 숨을 들이켰다. 벌떡 일어나 거실로 달려갔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물이 담긴 컵이 깨져 있었다. 산산조각난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고, 테이블 위는 물로 흥건했다. 지훈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컵은 테이블 정중앙에 놓여 있었다. 누가 건드리지 않고서야 절대 저렇게 떨어질 리 없었다.

“누구야…?”

지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낡은 칼이 들려 있었다.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니던 최후의 보루였다. 아파트 내부를 샅샅이 뒤졌다. 침실, 작은 방, 화장실, 베란다, 그리고 심지어 벽장까지. 숨을 죽인 채, 귀를 쫑긋 세운 채, 그림자 하나하나를 의심하며 탐색했다. 아무도 없었다. 완벽하게, 그리고 섬뜩하게 고요했다.

그날 밤부터 밤은 지옥으로 변했다.
지훈이 겨우 눈을 붙이려 할 때면, 침실 문이 삐걱이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심장이 터질 듯한 공포를 견뎌야 했다.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리고, 손에 칼을 꽉 쥐었다. 인기척이 들렸다. 발소리였다.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히, 침대 옆을 지나가는 발소리였다. 그의 침대 옆을 한 바퀴 빙 돌고, 다시 침실 문으로 향하는 듯했다.

지훈은 간신히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문이 서서히 닫히는 것을 보았다. 삐걱이는 소리도 없이, 마치 누군가 부드럽게 밀어 닫는 것처럼.

“씨발…”

욕지기가 터져 나왔다. 그는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정신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다음 날, 그는 아파트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이 빌어먹을 곳은 더 이상 그의 피난처가 아니었다. 공포 그 자체였다.

배낭을 꾸렸다. 몇 안 되는 비상 식량과 생수, 그리고 칼. 조심스럽게 현관문으로 향했다. 문고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가지 마…”

차가운 숨결이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했다. 지훈은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방 안은 그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공기만큼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누구야! 나오란 말이야!”

그는 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떨렸다. 메아리가 되어 방 안을 울렸다. 정적은 다시 찾아왔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해서 오히려 더욱 섬뜩했다.

그 순간, 거실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아앙!’ 마치 건물 전체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였다. 지훈은 놀라서 거실로 달려갔다.

거실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모든 가구가 뒤집혀 있었다. 테이블은 산산조각이 나고, 의자는 부서져 있었다. 낡은 소파는 찢겨져 있었고, 베개는 솜이 튀어나와 바닥에 나뒹굴었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들은 전부 떨어져 깨져 있었고, 창문은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바깥의 회색빛 세상이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마치 격렬한 싸움이라도 벌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생명의 흔적도 없었다.
지훈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함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 이건 대체…”

그때였다. 부서진 소파의 잔해 사이에서, 먼지 덮인 낡은 스탠드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스탠드는 그의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그의 머리 위로 뚝 떨어졌다.

‘콰직!’

지훈은 간신히 피했지만, 스탠드는 그의 발치에 떨어져 바닥을 박살 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휘감았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외침이 뇌리를 때렸다.

창문 밖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정적이 더욱 깊게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 아니,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지훈은 부서진 거실을 뒤로하고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복도를 따라 달렸다. 낡은 아파트의 계단을 쿵, 쿵, 쿵, 하고 뛰어 내려갔다.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달칵… 달칵…’ 마치 열쇠 꾸러미라도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그의 뒤를 따라오는 듯했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볼 수 없었다. 돌아보는 순간, 분명 무언가 그를 덮칠 것만 같았다.

1층 현관문이 보였다. 녹슬어 삐걱이는 거대한 철문을 필사적으로 밀쳤다. 바깥 세상의 흐릿한 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는 그대로 도시의 폐허 속으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704호의 창문이 ‘끼이이익’ 하고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이내, 아파트 전체를 울리는 듯한 기이한 웃음소리가, 지훈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웠다.
공포스러웠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절망을 머금은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지훈은 달리고 또 달렸다. 폐허 속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아파트에서 멀어지기 위해.
어쩌면 그는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안전해야 할 곳이 가장 위험한 곳으로 변했을 때, 세상의 종말은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떠난 704호의 텅 빈 공간에서, 깨진 유리창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마치 살아있는 눈동자처럼 섬뜩하게 깜빡였다.
아파트는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다음 희생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