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백 년 묵은 이끼처럼, 피부 위로 기어 오르는 거미처럼. 지훈은 손전등이 비추는 좁은 원 안에서 고대 문양들을 쫓았다. 잊혀진 문명, 신화 속에서나 존재하던 이야기가 눈앞에서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환희보다는 차가운 의문이 더 깊게 스며들었다.
“교수님, 이 문양들… 아무리 봐도 해석이 안 됩니다.”
혜진의 목소리가 젖은 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그녀는 늘 침착했지만, 지금은 그 단단한 벽에도 미세한 균열이 가 있는 듯했다. 지훈은 거친 벽에 손을 짚었다. 촉감은 돌이 아니었다. 매끄러우면서도 차갑고,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살아있는 무엇인가가 숨 쉬었던 흔적처럼 희미한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상하군. 지금까지 우리가 발굴했던 어떤 문양과도 달라. 이건… 기록되지 않은 언어야.”
그들의 발아래에는 수많은 돌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거대한 통로를 막고 있던 돌벽이 무너지면서 드러난 공간. 그 안에는 벽을 따라 알 수 없는 상징들이 물결처럼 이어져 있었고, 중앙에는 정체 모를 제단이 웅크리고 있었다.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훈은 뭔가가 ‘사라진’ 듯한 공허함을 느꼈다.
“교수님, 저기… 물이 새는 소리 같지 않으세요?”
혜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손전등을 천장으로 비췄다. 오래된 석회암 벽 사이로 검은 얼룩들이 거미줄처럼 번져 있었지만, 물방울이 떨어지는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소리는 분명했다. 규칙적이고 느릿한,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둔탁한 소리.
툭. 툭. 툭.
지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명료했다. 마치 그들의 심장 박동과 동기화라도 하려는 듯,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물이 새는 게 아니야, 혜진. 이 진동… 느껴지나?”
지훈은 손바닥을 벽에 바짝 대었다. 차가운 벽을 통해 희미한 떨림이 전달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지하수의 흐름이나 지반의 움직임과는 달랐다. 생물학적인 리듬, 거대한 존재의 호흡 같은 것이었다.
혜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주변을 경계했다. “기계음도 아니고… 대체 뭘까요? 혹시 아직 다른 생존자가 있는 걸까요, 이 지하에?”
지훈은 그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수천 년 전 잊혀진 문명의 유적이라면, 어떻게 현대인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그들’이 아직도…
“진동의 근원은… 더 깊은 곳에 있는 것 같아. 이 제단이 있는 방이 끝이 아니라는 뜻이야.”
그들이 서 있는 방은 원형의 형태로, 벽면 전체가 빽빽한 상징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중앙에 위치한 문양은 거대한 눈동자를 연상시켰다. 동공은 검고 깊어, 마치 모든 빛을 집어삼킬 듯했다. 지훈은 그 눈동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순간, 눈동자가 희미하게 번뜩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교수님, 빛이… 잠깐.”
혜진의 손전등이 흔들렸다. 아니, 흔들린 건 그녀의 손이 아니라 손전등 자체였다. 전등의 불빛이 급격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어둠이 한 조각씩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빛은 불안정하게 떨리며 방을 간헐적으로 조명했다.
툭. 툭. 툭.
심장 소리는 더 커졌다. 이제는 둔탁한 소리 너머로 얇고 날카로운 마찰음이 섞여 들었다. 마치 거대한 뼈대가 움직이는 소리 같기도, 거대한 발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 같기도 했다.
“배터리가… 이렇게 빨리 닳을 리가 없는데.” 혜진이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여기 자기장이 이상해요. 모든 장비가 오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때였다. 지훈의 등 뒤, 그들이 들어왔던 통로 너머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인간의 형체라기보다는 훨씬 길고 얇았으며, 기괴하게 휘어지는 움직임이었다.
“뭐야? 혜진, 방금 뭐 봤어?” 지훈이 소리쳤다.
혜진은 얼어붙은 듯 벽을 등지고 섰다. 그녀의 눈은 공포로 크게 뜨여 있었다. “아무것도… 못 봤어요. 교수님은 뭘 보셨습니까?”
“그림자… 아주 길고 흐릿한 그림자였어. 어쩌면 착각이었을 수도…” 지훈은 말끝을 흐렸다. 그의 이성이 끊임없이 ‘착각’이라고 외쳤지만, 몸의 모든 세포가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툭. 툭. 툭. 탁. 촤르륵.
심장 소리 뒤에 이어지는 마찰음이 이번에는 훨씬 가까이에서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무언가 질질 끌려오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
“교수님, 제단… 제단 좀 보세요!” 혜진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훈은 황급히 제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텅 비어 있었던 제단 위. 그곳에, 아주 느리게, 아주 조용하게, 무언가 나타나고 있었다. 검고 반투명한 물질이 마치 안개처럼 바닥에서 피어 오르더니, 이내 사람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완전한 검은색이었다. 심연처럼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색. 팔다리는 비정상적으로 길고 얇았으며, 얼굴이 있어야 할 부분에는 깊은 그림자만이 존재했다.
“이게… 뭐야.” 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학자로서 수많은 기이한 유물과 현상을 접했지만, 이런 것은 그의 상식 밖이었다.
그림자 형체는 서서히 일어섰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대 거상이 깨어나는 것처럼 거대하고 위압적이었다. 그리고 그 형체가 완전히 일어서는 순간, 방 안의 모든 빛이 꺼졌다.
완전한 어둠. 숨통을 조이는 듯한 심연의 암흑 속에서, 오직 심장 소리만이 지훈과 혜진의 귀를 때렸다.
툭. 툭. 툭.
이제 그 심장 소리는 더 이상 멀리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들 앞에서, 그 검은 형체의 가슴팍에서 울려 퍼지는 듯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한, 하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천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속삭이는 듯한, 고대 언어의 조각들이 뒤섞인 음성이었다.
“…도래하라… 심연의… 주인아…”
지훈은 얼어붙었다. 혜진의 거친 숨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일한 인간의 흔적이었다. 그들의 손전등은 완전히 죽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들 코앞에 서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지훈의 손에 쥐여 있던 고대 유물, 지하 통로를 열었던 마지막 열쇠가 거짓말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유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이 어둠을 간신히 뚫고 나와, 눈앞의 거대한 그림자 형체를 비췄다.
그제야 지훈은 볼 수 있었다. 그림자 형체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에, 오직 하나의 눈동자가 거대하게 박혀 있었다. 그 눈동자는 그들이 벽에서 보았던 문양의 눈동자와 정확히 일치했다. 검고 깊은, 모든 빛을 집어삼킬 듯한 눈동자가 그들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거대한 거울이 깨지는 것처럼, 눈동자 표면에 무수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균열 사이로 붉은 빛이 새어 나왔고, 그 빛은 점점 더 강렬해지며 방 전체를 불길한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지훈은 직감했다. 이건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다. 잊혀진 고대 문명은 무언가를 깨우기 위해, 무언가를 봉인하기 위해 이곳을 지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봉인된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교수님… 도망쳐야 해요!”
혜진의 비명과 동시에, 거대한 그림자 형체가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길고 얇은 손가락들이 허공을 갈랐을 때,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방 전체를 가득 채웠다.
그것은 혜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니, 혜진의 목소리였으나, 동시에 수천 명의 희생자들이 동시에 외치는 듯한 절규였다.
그리고 지훈은 깨달았다.
그 눈동자는, 그들의 영혼을 읽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