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淸凉山)의 정적을 깨고, 짐승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찢어질 듯이 밤하늘을 갈랐다. 무영(無影)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그의 손에는 낡은 사냥칼이 쥐여 있었고, 온몸은 땀과 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한 달 전부터 이 산에 출몰하며 주변 마을을 공포에 떨게 한 거대 늑대의 짓이었다. 무영은 그 늑대를 쫓아 고룡곡(古龍谷)이라 불리는, 발길 닿지 않는 깊은 계곡까지 들어온 참이었다.
“젠장… 너무 깊이 들어왔나.”
나직이 중얼거렸지만, 늑대의 울음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놈은 분명 무영의 냄새를 맡았다. 달빛조차 들지 않는 빽빽한 숲은 사방이 검은 그림자투성이였다. 무영은 발소리를 죽여 바위 틈새를 따라 움직였다. 이대로 싸움이 벌어진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놈은 단순히 크기만 한 짐승이 아니었다. 비정상적으로 날렵하고, 교활하기까지 했다.
갑자기 땅이 울렸다. 쾅! 쾅! 늑대가 발굽이라도 가진 양 거친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듯했다. 무영은 급히 몸을 날려 작은 동굴 같은 바위 틈으로 파고들었다. 간신히 숨을 고르려는 찰나, 밖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벼락이었다. 산 전체를 뒤흔드는 충격에 동굴 안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크악!”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던 무영은 손을 짚으려다 차가운 바위에 닿았다. 그 순간, 바위 표면을 뒤덮고 있던 두꺼운 이끼와 흙먼지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바위 아래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단순한 바위가 아니었다. 매끈한 검은 현무암 같은 재질에, 섬세하고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오래된 상형문자 같기도 하고, 태고적 주술 문양 같기도 했다. 무영의 손이 닿자마자, 문양들이 희미한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점차 강해지더니, 동굴 안을 가득 채울 만큼 밝아졌다.
눈을 가늘게 뜬 무영은 황홀경에 빠진 듯했다. 문양들은 살아 움직이는 듯 파동쳤고, 그 빛은 무영의 손을 타고 온몸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고목이 뿌리내리는 모습, 폭포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장엄한 광경, 바람이 바위를 깎고 물이 대지를 빚어내는 태고의 순간들… 그것들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무영의 몸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그의 하단전에서부터 시작된 기운은 온몸의 혈맥을 따라 흐르며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물을 만난 대지처럼 갈증을 해소했다. 그의 손에 닿아 있던 검은 석판은 빛을 최고조로 발하더니, 이내 먼지처럼 부스러져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무영의 하단전에는,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의 구슬이 새로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미약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이것은… 대체…”
무영은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깨달음의 전율을 느꼈다. 눈을 감자, 아까 보았던 태고의 영상들이 더욱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단순한 영상이 아니었다. 그 속에서 그는 바람의 흐름을 읽고, 물의 속성을 이해하며, 땅의 견고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무공이 아니었다. 무공보다 훨씬 심오하고, 자연의 이치에 가까운, 어떤 ‘힘’이었다.
몸을 일으킨 무영은 동굴 밖으로 나섰다. 벼락은 멈추었지만, 여전히 거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숲은 습기와 흙냄새로 가득했다. 바로 그때, 눈앞에서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벼락에 맞아 쓰러지기 시작했다. 굉음을 내며 무영의 방향으로 쓰러지는 나무는 피할 틈도 주지 않을 듯했다.
그러나 무영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오른손을 들어 쓰러지는 나무를 향해 가볍게 밀었다. 힘을 주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단순한 기(氣)가 아니었다. 형체는 없었지만, 거대한 파동이 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앙!
나무는 무영에게 닿기도 전에,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떠밀린 것처럼 방향을 틀어 옆으로 쓰러졌다. 그 충격에 주변의 작은 나무들이 꺾여 나가고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무영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방금 그 힘은, 분명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것이… 심원력(深遠力)인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였다. 깊고도 아득한, 근원의 힘.
그때, 숲 저편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쥐새끼 한 마리 잡으러 왔더니, 웬 재수 없는 벼락에 나무까지 쓰러지고 지랄이군!”
“어이! 아무래도 여기 뭔가 있어! 늑대 놈이 쫓던 사냥꾼은 아닌 것 같은데?”
몇몇 거친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 거구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풍대(黑風隊)라 불리는 산적 무리였다. 최근 이 산을 근거지로 삼아 지나가는 행인들을 약탈하고 마을까지 들쑤시던 악명 높은 도적떼였다. 그들의 손에는 번쩍이는 도끼와 칼이 들려 있었다.
“흠… 꼴은 꽤나 볼품없는데, 아까 저 큰 나무를 밀친 게 너냐?”
선두에 선 흑풍대의 대장, ‘광표(狂彪)’가 잔뜩 비웃는 얼굴로 무영을 노려봤다. 거대한 몸집에 흉터 가득한 얼굴이 위압적이었다.
무영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전의 불안감은 온데간데없이, 고요한 호수처럼 깊어 보였다. 심원력이 그의 온몸을 휘감으며 감각을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그는 바람의 흐름을 읽고, 땅의 미세한 떨림을 느끼며, 흑풍대원들의 근육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야! 대답이 없어? 이 새끼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광표가 성질을 내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다른 대원들도 칼을 뽑아들고 무영을 에워쌌다.
“죽여서 늑대 밥으로 줘버려!”
한 대원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무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칼날이 그의 코앞에 닿는 순간, 그는 마치 바람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대원의 뒤로 넘어간 무영은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투욱!
외마디 비명과 함께 대원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쓰러진 그의 몸은 마치 얼어붙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뭐… 뭐냐?”
광표가 당황했다. 다른 대원들도 혼란스러워했다. 그들은 무영의 움직임을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
무영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흑풍대원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나갔다. 주먹이나 발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가볍게 찌르거나, 손바닥으로 밀치거나, 심지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눈빛만으로도 그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그의 움직임은 무협 고수들의 초절정 비기와는 또 다른 경지였다. 그것은 자연 그 자체였다. 바람처럼 움직이고, 물처럼 유연했으며, 땅처럼 견고했다.
“이… 이 자식… 정체가 뭐야!”
광표가 절규했다. 어느새 그의 주변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부하들만이 널브러져 있었다. 무영은 그의 눈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네놈… 귀신인가!”
광표는 공포에 질려 도끼를 떨어뜨렸다. 무영은 천천히 손을 들어 광표를 향해 내밀었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빛의 파동이 일렁였다.
“이제… 멈춰라.”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파동이 광표에게 닿자, 그의 몸은 굳어버렸다. 마치 거대한 바위에 눌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는 공포와 함께 알 수 없는 경외심이 서렸다.
무영은 그들을 모두 제압한 후, 멀리 떨어진 관부에 그들의 위치를 알리는 표식을 남겼다. 이제 더 이상 흑풍대는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어 있었다. 무영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폐부 가득 신선한 공기가 차올랐다. 그의 심장은 고동치고 있었다. 단순한 사냥꾼이었던 자신이, 우연히 발견한 고대의 힘으로 인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다. 심원력. 이 힘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의 삶은 이제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무영은 고룡곡을 뒤로하고 산 아래를 향해 걸어 내려갔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눈빛은 전보다 훨씬 깊고 굳건했다. 거대한 자연의 힘이 그의 몸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그림자 같은 무영이 아니었다. 그는 바람이 될 것이고, 물이 될 것이며, 땅이 될 것이다. 그의 새로운 이야기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