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3화: 잿빛 심연의 부름
미르의 폐허, 잿빛 도시의 외곽은 언제나 죽은 듯 고요했다. 바람 한 점 없는 적막 속에서, 무너진 고층 빌딩의 뼈대만이 핏기 없는 하늘을 찌르고 서 있었다. 밤은 깊었고,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망토를 파고들었다. 카엘은 허물어진 건물의 잔해 사이, 겨우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 웅크려 앉아 불씨를 응시했다. 마지막 남은 마른 나뭇가지가 탁, 하고 터지며 짧은 불꽃을 피웠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식량은… 이제 한 끼 남았네.”
곁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리아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지만, 또렷한 눈빛만은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반짝였다. 카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건 딱딱하게 굳은 말린 고기 한 조각과 곰팡이가 슬기 시작한 비스킷 몇 개가 전부였다. 이런 식으로라면, 이틀도 버티지 못할 터였다.
그는 폐허 너머로 희미하게 빛나는 ‘재앙’의 소용돌이를 올려다봤다. 불규칙하게 명멸하는 보라색 섬광은 세계를 집어삼킨 거대한 상처와 같았다. 저 재앙이 모든 것을 뒤엎기 전, 이곳은 활기 넘치는 대도시였다. 푸른 하늘 아래,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꿈을 꾸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기억 속에만 존재했다. 카엘의 머릿속을 스치는 과거의 파편들. 행복했던 순간, 그리고 한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간 지옥의 불길…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아픈 기억을 떨쳐냈다.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다.
“잊힌 지식의 전당.” 카엘이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그곳으로 가야 해.”
리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선배… 그곳은 ‘그림자 망령’들의 소굴이라고 했어요. 지금까지 우리가 마주쳤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알아.” 카엘은 차갑게 잘라 말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어. 잿빛 도시에 아직 온전한 물건이 남아있다면, 그곳뿐이야. 어쩌면… 생존에 필요한 중요한 정보가 있을지도 몰라.”
‘잊힌 지식의 전당’은 재앙이 덮치기 전, 이 세계의 모든 지식과 역사가 보관되어 있던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온전하게 남아있을 리 없다는 것이 모두의 생각이었지만, 몇몇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전당의 깊은 곳에는 재앙으로부터 보호된 비밀 장소가 존재한다고 했다. 미친 소리처럼 들렸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그 미친 소리 한 조각이라도 붙잡아야 할 절박함이 있었다.
새벽녘, 어스름이 걷히자마자 그들은 움직였다. 그림자처럼 폐허의 틈새를 기어 다니며, 무너진 잔해들을 조심스럽게 헤치고 나아갔다. 잿빛 도시는 이름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잿빛으로 물들었고, 간혹 보이는 오래된 낙서나 깨진 간판만이 이곳이 한때 인간의 삶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음을 증명했다. 스산한 바람이 텅 빈 창문 구멍 사이를 스치며 귀곡성을 냈다.
리아는 예민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눈은 작은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았고, 귀는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소음에 반응했다.
“선배, 저기… 뭔가 있어요.”
리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다른 건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거대한 석조 구조물이 서 있었다. 재앙의 폭풍이 할퀴고 지나갔을 텐데도, 외벽은 기묘하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창문은 깨져 있었지만, 건물 자체의 위압감은 여전했다. 저곳이 바로 ‘잊힌 지식의 전당’이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 또한 외부만큼이나 기묘했다. 거대한 홀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부서지지 않은 채 희미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수많은 서가가 무너지고 책들이 흩어져 있었지만, 중앙의 넓은 공간은 비교적 깨끗했다. 그리고 그곳에,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홀의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석판이 놓여 있었다. 고대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진 석판은 희미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느릿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빛은 맥박처럼 두근거렸고, 잊힌 시대의 숨결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했다.
“이게… 뭐지?” 리아가 조심스럽게 다가가려 하자, 카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
카엘은 석판 주변을 맴돌며 문양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는 비록 고대 문자에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상징들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결계’… ‘경계’… ‘차원’… 이건 단순히 지식을 담은 것이 아니야. 어떤 장치를 봉인하거나… 다른 세계와의 문을 제어하는 것 같아.”
그의 시선이 석판 바로 옆에 놓인 부서진 유물로 향했다. 한때 화려했을 마법 지팡이의 잔해였다. 보석은 사라지고 나무와 금속 조각만이 앙상하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카엘의 손이 유물에 닿는 순간, 파편들 사이에서 잊혔던 마력이 아주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크르르릉…!**
전당의 깊은 곳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홀에 가득 차 있던 고요가 순식간에 깨졌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형체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것들은 흐릿한 그림자처럼 보였지만, 분명한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 일렁이는 검은 연기 속에서 붉은 눈이 번뜩였다. ‘그림자 망령’들이었다. 물질적인 공격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던 바로 그 존재들.
“젠장!” 카엘이 이를 갈았다.
“선배, 도망쳐야 해요!” 리아가 외쳤지만, 이미 망령들은 그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카엘은 재빨리 낡은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은 날은 희미한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망령 하나가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카엘에게 달려들었다. 카엘은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하고, 검을 휘둘러 망령의 몸을 갈랐다. 하지만 검이 닿는 순간, 망령의 몸은 검은 연기처럼 흩어졌다가 이내 다시 합쳐졌다.
“역시…!” 카엘의 얼굴에 절망감이 스쳤다.
망령들은 멈추지 않았다. 홀 전체가 그들의 섬뜩한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리아는 작은 단검을 뽑아 들고 망령들의 틈새를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몸놀림은 민첩했지만, 망령들은 숫자가 너무 많았다.
하나의 망령이 카엘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검은 연기가 닿자마자 살갗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카엘은 신음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 사이, 다른 망령 하나가 리아에게 달려들었다. 리아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검은 촉수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리아!”
카엘은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몸을 던졌다. 망령의 촉수가 그의 팔뚝을 꿰뚫고 지나갔다. 고통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그는 리아를 감싸 안으며 뒤로 밀쳐냈다. 리아는 비틀거리며 넘어졌고, 그녀의 손이 바닥에 놓여 있던 부서진 마법 지팡이 파편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리아의 손에 쥐여진 파편에서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콰아앙!**
섬광과 함께 엄청난 마력의 파동이 홀을 뒤흔들었다. 리아를 공격하던 망령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검은 재로 변해 소멸했다. 마력의 폭풍은 주변의 다른 망령들도 휘청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푸른빛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지팡이 파편은 완전히 바스러지며 부스러기가 되었다.
“이런…!” 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 자신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짧은 순간의 틈을 놓칠 카엘이 아니었다. 그는 리아의 팔을 잡아챘다.
“도망쳐!”
둘은 망령들의 혼란을 틈타 전당의 입구로 내달렸다. 뒤에서는 망령들의 섬뜩한 울음소리가 더욱 거세게 따라붙었다. 폐허 밖으로 뛰쳐나온 그들 앞에는, 더욱 거대한 절망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은 더욱 어두워졌고, ‘재앙’의 소용돌이는 거대하게 부풀어 올라 도시를 집어삼키려는 듯 휘몰아치고 있었다. 보라색 섬광이 번개처럼 작렬하며, 세계의 끝을 알리는 듯한 굉음을 냈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도시의 끝자락, 발아래는 아득한 심연이 펼쳐진 절벽 끝이었다.
앞에는 심연, 뒤에는 망령 군단과 재앙의 폭풍.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카엘은 헐떡이며 리아를 돌아봤다. 그녀의 손에는 부서진 마법 지팡이의 마지막 남은 파편이 쥐여 있었다. 그의 팔에서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게 끝일지도.” 카엘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더 이상 희망의 빛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리아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카엘을 마주봤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눈에서 알 수 없는 결의가 빛나기 시작했다.
“아니, 끝이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흐느꼈지만, 이전과는 다른 단단함이 실려 있었다. “우리는… 살아남을 거야.”
그녀가 손에 쥔 파편을 꽉 움켜쥐는 순간, 재앙의 폭풍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것은 폭풍의 심장부에서 솟아오르는 듯했고, 거대한 눈동자처럼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마치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리아의 파편에서 미약한 푸른빛이 다시 한 번 깜빡였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