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틀린 상흔
금속 섞인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허물어진 콘크리트 잔해 위로 기괴한 형태의 덩굴들이 마치 살아있는 혈관처럼 꿈틀대며 얽혀 있었다. 하늘은 언제나처럼 잿빛 구름과 녹색 섬광이 뒤섞여 희미한 빛을 토해냈다. 그 아래, 하준은 무너진 백화점의 외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옆에는 서연이 낡은 배낭을 고쳐 메며 주위를 경계했다. 얇은 마스크 너머로 그녀의 불안한 숨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저 안쪽, 아직 뒤져보지 않은 곳 같아.”
하준의 낮은 목소리가 텅 빈 폐허에 울렸다. 백화점의 유리창은 진작에 깨져나가고, 내부의 상품들은 오랜 시간 먼지와 오염에 절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층계참을 부수고 자라난 거대한 버섯군락 사이로, 아직 미치지 않은 구역이 보였다. 어쩌면 그곳에선 한 조각의 통조림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끔찍한 세상에서, 그 한 조각이 생과 사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이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에는 망설임이 가득했다. “너무 깊숙한데… 거기서 느껴지는 게 안 좋아, 하준. 뭔가…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그녀의 말에 하준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무너진 건물 잔해, 뒤틀린 철골, 심지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조차도. 세상이 뒤틀린 지 몇 년째인지, 이제는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달력도, 시간도,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남은 것은 오직 생존을 향한 본능적인 발버둥뿐.
“배가 고프면 그런 소리도 안 들릴 거야.”
하준은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냈지만, 그의 심장 역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부스러지는 잔해 조각들이 끔찍한 정적을 깨뜨렸다. 그 소리마저도 이 공간에선 왠지 모르게 불길하게 느껴졌다.
거대한 기둥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백화점 내부로 들어서자,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한때 화려했을 매장들은 이제 어둠과 기괴한 그림자의 놀이터였다. 희미한 바깥 빛이 겨우 닿는 곳마다 녹슨 선반과 형체 없는 상품 더미들이 실루엣처럼 보였다. 곰팡이 냄새와 썩은 비린내가 뒤섞여 역겨움을 유발했다.
“조심해, 바닥이 불안정해.”
하준이 앞서가며 깨진 타일 조각들을 발로 밀어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백화점 깊숙한 곳, 식료품 코너가 있었을 법한 자리였다. 지붕 일부가 무너져 내려 그나마 빗물과 오염된 공기 유입이 적었을 곳.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준, 저거 봐.”
서연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뭉개진 벽이었다. 벽을 따라 붉은색 이끼 같은 것이 끈적하게 붙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단순히 이끼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신경망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가느다란 줄기들이 벽 안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붉은 이끼의 표면에서는 미세하게 빛을 내는 포자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런 건 처음 봐…” 서연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약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하준은 멈춰 서서 그것을 응시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뒤틀려 버렸지만, 이런 유기체는 또 다른 차원의 불쾌감을 선사했다. 그것은 마치 건물의 피부를 뚫고 솟아난, 전혀 다른 존재의 생명 같았다.
“건드리지 마. 그냥 지나가자.”
그는 최대한 태연하게 말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식료품 코너는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어둠은 더욱 짙어졌고, 그들의 손전등 빛에 의지해야만 했다. 손전등이 비추는 곳마다 녹슬고 곰팡이 핀 상품들이 보였다. 몇몇 통조림이 보였지만, 대부분은 부풀어 오르거나 녹슬어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젠장, 이것도 썩었어.” 하준이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캔 하나를 던졌다. 텅 빈 소리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직… 저 안쪽이 있어.” 서연이 손전등을 들어올려 더 안쪽을 비췄다. 그곳에는 직원 전용 통로처럼 보이는 좁은 복도가 있었다. 복도 끝에는 굳게 닫힌 강철문이 보였다.
“저긴 냉동창고나 저장고였을지도 몰라.” 하준의 눈에 희미한 희망이 스쳤다. 냉동창고라면, 혹시라도…
그들이 강철문 앞에 다가섰다. 문은 두껍고 튼튼했지만, 자물쇠는 진작에 녹슬어 끊어져 있었다. 누군가 이미 이곳을 뒤져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준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한기(寒氣)에 그는 침을 삼켰다. 안에서 미세하게 썩은 냄새가 났지만, 냉기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희망적인 신호였다.
하준이 문을 밀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틈이 벌어졌다. 내부의 어둠은 칠흑 같았다. 손전등을 들이밀자, 그 빛이 닿는 곳마다 얼어붙은 서리가 반사되었다. 폐쇄된 공간은 외부의 오염에서 어느 정도 보호받은 듯했다.
“여긴… 뭔가 남아있을 것 같아.” 서연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섞였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공간은 생각보다 넓었고, 곳곳에 선반들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반은 텅 비어 있었다. 역시나, 누군가가 이미 다 털어간 후였다. 하준의 어깨가 축 처졌다. 또다시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그때, 서연의 손전등 빛이 한쪽 구석에 닿았다. 녹슨 선반 아래, 얼어붙은 먼지더미 속에 파묻힌 상자들이 보였다. 크고 튼튼한 나무 상자들.
“하준! 저거 봐!”
하준이 다가가 상자를 발로 툭 건드렸다. 낡고 오래된 상자였지만, 아직 단단했다. 그는 상자 위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희미하게 인쇄된 글자가 보였다. ‘비상식량’이라는 단어와 함께, 알 수 없는 제조사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이거라면…!” 하준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상자를 열자, 진공 포장된 에너지바와 건조식품 팩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비록 유통기한은 진작에 지났지만, 밀봉 상태가 완벽해 보였다.
“찾았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걸 찾았어!” 서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기쁨과 안도감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방 전체를 감싸는 듯한, 아주 낮은 울림이 시작되었다. 웅웅거리는 듯한, 심장이 아니라 영혼의 심장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선반 위의 먼지가 희미하게 떨렸다.
“뭐… 뭐야?” 서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하준은 주변을 둘러봤다. 소리의 근원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벽 자체에서, 혹은 이 공간의 공기 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단순한 물리적인 소음이 아니었다.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어떤 거대한 존재의 숨결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서연의 손전등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손전등… 배터리가 나갔나?” 그녀가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하준은 알고 있었다. 배터리 문제는 아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기계는 ‘그것’들이 가까이 오면 제 기능을 잃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압력이 모든 질서를 뭉개버리는 것처럼.
웅웅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며 그들의 귀를 때렸다. 그것은 고통스럽게도 불쾌한 소리였다. 인간의 신경을 직접적으로 갉아먹는 듯한 주파수였다. 서연은 귀를 막았지만, 소리는 내부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나가야 해…!” 하준이 외쳤다. 그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이곳에 더 오래 머물다가는 그들의 정신마저 무너질 것이다.
그는 재빨리 상자에서 비상식량 팩 몇 개를 뜯어내 배낭에 쑤셔 넣었다. 그러자 그들의 손전등이 다시 안정적으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소리가 멀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것’이 지나쳐 가는 것일까?
“빨리, 서연! 빨리 나가자!”
그들은 상자를 뒤로 한 채, 허둥지둥 냉동창고를 벗어났다. 복도를 달려가고, 다시 붉은 이끼가 뒤덮인 벽을 지나, 무너진 백화점의 입구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뒤에서는 여전히 낮은 울림이 그들을 쫓아오는 듯했다.
간신히 백화점 밖으로 나왔을 때, 하준은 폐 속에 가득 찬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셨다. 잿빛 하늘 아래, 그들의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괜찮아?” 하준이 서연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해진 얼굴은 공포로 얼룩져 있었다.
“방금… 그게 뭐였어?”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하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맞닥뜨린 존재는 항상 그랬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으며,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존재했다. 그저 그들의 오감을, 그리고 정신을 뒤흔들 뿐이었다.
그는 배낭을 열어 방금 꺼내온 에너지바 하나를 서연에게 건넸다. “일단 이거라도 먹어. 그리고… 이동하자.”
서연은 말없이 에너지바를 받아 들었다. 비록 목마르고 배고팠지만, 식욕보다는 방금 겪은 공포가 더 크게 위를 짓눌렀다. 끈적한 단맛이 입안에 퍼졌지만, 그 맛조차도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다시 무너진 도시의 잔해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록 약간의 식량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정신은 또 한 조각의 불안과 공포로 깎여 나갔다. 이 세상에서의 생존은 끊임없는 자기 파괴의 과정과 같았다.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삶 속에서, 그들은 오늘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까, 아니면 또다시 시작될 고통을 예감해야 할까. 잿빛 하늘은 그들에게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