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지하 굴 안은 습기 찬 흙냄새와 사람들의 눅진한 한숨으로 가득했다. 굴 한가운데 놓인 투박한 탁자 위에는 기름이 간당거리는 촛불 몇 개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희미한 불빛 아래 모여 앉은 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고단함과 불안으로 얼룩져 있었다. 제국의 혹독한 수탈과 끊이지 않는 감시를 피해 숨어든 평범한 농부들, 떠돌이 장인들, 그리고 이름 모를 백성들이었다. 그들의 눈빛 속에는 꺾이지 않는 불씨가 살아 있었지만, 동시에 바닥 모를 절망 또한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번 달에도 징세관들이 마을을 싹 다 훑고 갔습니다. 곡식은 씨앗까지 가져갔고, 젊은이들은 또 몇 명 끌려갔는지….”
한 노파가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은 주름져 있었지만 굳게 쥐어져 있었다.
“병든 아비는 약 한 첩 못 쓰고, 굶주린 아이들은 밤마다 울음도 못 내고 끙끙 앓습니다요….”
다른 이의 말에 이어진 탄식들이 굴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탁자 머리에 앉은 사내에게 향했다. 강산. 이름처럼 우직하고 단단한 사내였다. 허름한 옷차림이었지만 그의 어깨는 어떤 무거운 짐도 견뎌낼 듯 넓고 굳건했다. 그는 묵묵히 모두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촛불처럼 흔들림 없이 타올랐지만, 그 깊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고뇌가 깃들어 있었다.
“알고 있다.” 강산이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고통을, 분노를,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그의 말에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우리가 숨어든 이 지하 굴보다 더 깊은 곳에 썩어 문드러진 제국의 뿌리가 박혀 있다. 그 뿌리를 뽑아내지 않는 한, 너희의 가족도, 너희의 땅도, 결코 평안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힘을 얻자, 축 처졌던 이들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그러나 우리는 약하지 않다. 제국이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지만,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고, 우리에게는… 꺾이지 않는 마음이 있다. 이 불씨가 모여 거대한 불길이 될 때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굴 입구 쪽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리더니, 어린 새벽이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비틀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땀과 눈물, 그리고 극심한 공포로 얼룩져 있었다.
“강산님! 큰일 났습니다! 제국군입니다!”
그녀의 외침에 굴 안의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정적. 그리고 이어지는 불안한 술렁거림.
“무슨 일이냐, 새벽아. 침착하게 말해보아라.” 현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지만, 그 눈빛은 흐트러짐 없이 날카로웠다.
새벽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을 이었다. “북쪽 길목에… 제국군이 대규모로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수송로를 완전히 틀어막고, 마을들을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움직이던 길목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굴 안은 아연실색했다. 북쪽 길목은 이들이 외부와 접촉하고, 숨겨둔 물자를 조달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그곳이 막히면 이들은 고립무원에 빠지게 된다.
“젠장! 그 쥐새끼 같은 제국놈들이…!”
“설마 내부자가…?”
공포에 질린 속삭임이 퍼져나갔다. 이대로 가다간 갇혀 죽거나, 굶어 죽는 수밖에 없었다.
강산의 주먹이 탁자를 내려쳤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굴 안에 울렸다.
“다들 진정해라.”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모든 잡음을 삼켜버릴 만큼 강력했다. “침착하게 생각해야 한다.”
현노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새벽아, 병력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또, 무엇을 수송하는 것으로 보이더냐?”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수천은 족히 넘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마차에 거대한 나무 상자들이 가득 실려 있었습니다. 쇠사슬로 꽁꽁 묶여 있었고, 제국군 병사들이 평소보다 훨씬 더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새벽의 말에 현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무 상자… 쇠사슬….”
현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결심한 듯 강산을 바라보았다.
“강산아, 어쩌면… 이것이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현노에게로 향했다. 기회?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제국군이 저토록 삼엄하게 경계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물건을 수송한다는 뜻이다. 단순한 식량이거나 군수품일 리 없다. 그것은 필시 제국의 가장 깊은 곳, 황궁으로 향하는 아주 귀한 물품일 게다.” 현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헌데, 그게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된단 말입니까?” 한 청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생각해 보아라. 북쪽 길목을 막은 것은, 우리가 그곳을 이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게다. 허나 그들이 감히 상상이나 할까? 우리가 그들의 가장 중요한 수송품을 노릴 줄은!”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과 함께 혼란이 스쳤다. 제국군 주력 부대가 지키는 수송 행렬을 공격하다니… 그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현노 어르신, 그건 너무 무모합니다! 우리 병력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맞습니다! 괜히 어설프게 움직였다간 모두 죽을 겁니다!”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현노는 흔들림 없이 강산을 응시했다.
“물론 위험하다. 어쩌면 전멸할 수도 있는 작전이다. 허나 이대로 숨어 지낸다면, 우린 결국 굶어 죽거나, 제국군에게 잡혀 죽을 뿐이다. 어떤 죽음을 택할 것이냐, 강산아?”
현노의 눈빛은 질문하는 동시에 답을 강요하는 듯했다.
강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그림자가 촛불에 일렁이며 굴 벽에 거대하게 드리워졌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그의 눈은 동요하는 사람들과, 단호한 현노, 그리고 공포에 질린 새벽의 얼굴을 차례로 훑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이들의 희망을 꺾을 수는 없다.
그는 다시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닳아 해진 낡은 지도에는 북쪽 길목이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곳은 낭떠러지였지만, 동시에 반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현노 어르신. 만약 우리가 그 수송품을 탈취한다면… 제국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강산의 목소리는 한층 가라앉았지만, 그 속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현노는 강산의 의중을 간파한 듯, 미소를 지었다. “아마… 지축을 흔드는 분노와 광기 어린 추격을 보일 게다. 온 제국이 뒤집힐 것이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게다.”
강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대신, 비장한 결의가 떠올랐다.
“좋다. 현노 어르신의 뜻을 따르겠다.”
그의 말에 굴 안은 순간 고요해졌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우리는 제국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제국의 심장을 관통하는 비수가 될 것이다.”
강산은 모여 있는 이들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모두 들어라. 이제부터 우리는… 제국의 심장을 향해 걷는다. 두려운가?”
그의 질문에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서서히, 두려움을 넘어선 결연함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두려워 마라. 우리는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이다. 잃을 것이 없는 자는, 얻을 것이 더 많은 법이다.”
그의 목소리가 굴 안을 가득 채웠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모두 채비를 갖춰라. 우리는 새벽이 오기 전에, 북쪽 길목으로 향한다.”
그의 선언과 함께, 굴 안에 희망의 불씨가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절망의 그림자 속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기로 결심한 평민들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한 가지. 거대한 제국의 목줄을 잡고, 모든 것을 걸고 흔들어 깨우는 것뿐이었다.
북쪽 길목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그 그림자 속으로, 감히 제국의 거대한 발톱에 맞서는 미약한 불꽃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앞에는 죽음 아니면 새로운 세상, 오직 두 갈래 길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