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4화: 달빛 아래 맹세, 핏빛 그림자

고요는 비단처럼 매끄러웠다. 천년 묵은 고목들이 빚어낸 푸른 돔 아래, 달빛이 얇은 수막처럼 스며들어 에메랄드빛 호수 위에 부서졌다. 물안개처럼 피어오른 영기(靈氣)는 이곳이 속세와는 완전히 단절된, 신비로운 공간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현우는 이 비현실적인 풍경 속에서조차, 오직 이령의 눈빛만을 쫓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이령의 목소리는 호수 표면을 스치는 바람처럼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 천년 세월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은발은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났고, 비단 옷자락 아래로 살짝 드러난 흰 발목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겼다. 현우는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이령은 주저 없이 그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현우의 마음속엔 뜨거운 불꽃이 일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두렵소.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이렇게나 짧을까 봐.”

현우의 목소리에는 깊은 고뇌가 배어 있었다. 그는 명문 선문(仙門)의 촉망받는 차기 문주이자, 인간으로서 도(道)의 경지에 가까워진 존재였다. 그러나 그 모든 명성과 영광은 이령과의 관계 앞에 무의미했다. 이령은 인간이 아니었다. 천 년 묵은 구미호, 아홉 꼬리를 모두 펼치면 천지를 뒤흔들 만한 힘을 가진 존재. 인간 세상에서는 요괴이자, 선계에서는 이단으로 치부되는 이령과의 사랑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이령은 현우의 손을 더 꼭 잡았다. “두려워 말거라. 우리는 이미 수없이 많은 금기를 넘어섰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주변의 감시가 더 삼엄해졌소. 문파 내에서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하고, 요족(妖族) elders 또한 당신의 행방을 쫓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오. 더 이상 이곳도 안전하지만은 않아.” 현우는 불안한 시선을 주위로 돌렸다. 그들이 만나기 위해 설치한 복잡한 금제(禁制)와 은신진(隱身陣)이 완벽하다 할지라도, 이령의 존재감은 워낙 막대했다. 언젠가 들킬 것이라는 불안감은 현우의 심장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령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대 곁을 떠나는 것이 나을까? 그대가 더는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그 말에 현우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절대 안 되오! 당신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소.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과 함께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어리석은 소리.” 이령은 현우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대는 선문이 기대하는 미래이자, 인간 세상을 수호할 영웅이 될 몸. 모든 것을 버린다는 말은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웅이든 무엇이든,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홀로 남는 것보다는 나으오!” 현우의 눈빛은 간절함으로 불타올랐다. “내 비록 인간의 몸일지라도, 당신을 지킬 힘을 키워왔소.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자가 있다면, 설령 천제(天帝)라 할지라도 맞설 것이오.”

이령은 현우의 굳건한 마음에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는 그를 감싸 안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현우의 따스한 체온이 그녀의 차가운 심장에 파고들었다.

“그래. 믿는다, 그대를. 내가 너를 지키고, 네가 나를 지키면 된다.” 이령의 눈가에 아련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의 사랑이 금기라 불릴지언정, 이 심장이 멎는 순간까지 그대를 연모할 것이다.”

그때였다.

정적이 깨졌다. 호수 표면 위로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이령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변했다. 현우도 동시에 이상을 감지했다. 그들이 설치한 은신진의 한 부분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듯 흐트러지고 있었다.

“누구냐!” 이령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녀의 뒤로 아홉 개의 꼬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희고 풍성한 꼬리털은 달빛 아래 은빛으로 빛나며, 엄청난 기세를 뿜어냈다.

호수 건너편, 어둠이 짙게 깔린 숲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십여 명에 달하는 인영(人影)이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들의 몸에서는 강력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인간의 기운이 아니었다. 요족이었다. 그러나 이령과는 다른, 이질적인 기운.

“이령! 네년이 감히 요족의 율법을 어기고 인간과 사통했겠다!”

선두에 선 그림자가 거대한 낫을 든 채 외쳤다. 그의 눈은 붉게 빛났고, 전신에서는 뱀과 같은 비늘이 언뜻 비쳤다. 그는 요족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고집스러운 뱀 요괴들의 수장이자, 과거 이령의 세력을 견제하던 자였다.

“감히 내 연인에게 손대려 하지 마라!” 현우는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 검광(劍光)이 어둠을 가르고 섬광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사랑하는 이를 지키겠다는 결의만이 가득했다.

“인간 주제에!” 뱀 요괴 수장이 비웃듯 으르렁거렸다. “네놈의 피를 뽑아내어 이 요괴의 음란함을 증명할 것이다!”

요괴들이 사방에서 덮쳐오기 시작했다. 호수의 물이 들끓고, 고목들이 휘청거렸다. 현우는 검을 휘둘러 가장 먼저 달려드는 요괴를 베어냈다. 푸른 검기가 뱀 요괴의 몸을 갈랐지만, 그들의 수는 너무나 많았다.

이령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아홉 꼬리가 바람처럼 솟구쳐 올랐다. 꼬리 하나하나가 강력한 영기를 머금고 요괴들을 후려쳤다. 쿵, 쿵, 쿵!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요괴들이 터져나가거나 멀리 날아갔다. 그녀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뱀 요괴 수장은 이령의 빈틈을 노렸다. 그는 이령이 다른 요괴들을 상대하는 찰나의 순간, 번개처럼 빠르게 몸을 뻗어 현우에게 달려들었다.

“크악!” 현우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뱀 요괴 수장의 낫에 어깨를 깊게 베였다. 피가 솟구치며 푸른 도포를 붉게 물들였다.

“현우!” 이령의 외침이 절규처럼 터져 나왔다. 그녀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구미호의 본능, 사랑하는 이를 다치게 한 자에 대한 광폭한 분노가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아홉 꼬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기가 푸른빛을 넘어 검붉은 광채를 띠기 시작했다. 하늘이 먹구름에 휩싸이고, 호수가 폭풍처럼 요동쳤다.

“네놈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 이령의 목소리는 더 이상 부드러운 여인의 것이 아니었다. 천 년 묵은 요괴의 진정한 분노였다.

뱀 요괴 수장은 순간 움찔했다. 이령의 잠재된 힘은 그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령의 검붉은 꼬리 하나가 채찍처럼 뱀 요괴 수장을 강타했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산산조각 났다.

다른 요괴들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이령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현우의 피를 닦아내며, 요괴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돌진했다. 호수는 피로 물들고, 하늘에서는 벼락이 떨어졌다.

“이령, 멈추시오!” 현우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그녀를 불렀다. “더 이상 힘을 쓰면 위험하오!”

이령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녀가 분노하여 모든 힘을 해방하면 스스로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다. 현우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령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더는 안 돼! 지금 즉시 도망쳐야 해!”

현우는 상처를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이령을 붙잡아 정신을 차리게 해야 했다. 그녀가 모든 것을 잃고 광폭한 요괴가 되기 전에. 그러나 그 순간,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다.

거대한 날개를 가진, 백색의 신성한 기운을 뿜어내는 존재. 선계의 사자가, 아니, 감찰관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의 표정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요괴 이령. 그리고 인간 현우. 감히 천지(天地)의 율법을 어기고 금기를 범했구나. 너희는 선계와 인간계, 요계(妖界)의 모든 질서를 어지럽혔다. 지금 즉시, 그 죄를 심판하겠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신성한 빛이 이령의 붉게 타오르는 힘을 억눌렀다. 이령은 현우를 감싸 안으며 신성한 기운에 저항했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불꽃처럼 타올랐지만, 신성한 힘은 모든 것을 잠재우는 듯했다.

현우는 이령의 품에 안겨, 자신의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들은 대체 어디로 도망쳐야 한단 말인가? 온 세상이 그들을 죄인으로 여기고 쫓고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파멸뿐인가.

아니다. 현우는 이령의 손을 잡았다. “이령, 도망치시오! 내가 막겠소!”

“어리석은 소리! 나는 절대로 너를 두고 가지 않는다!” 이령은 비록 몸이 꺾일지언정 현우를 놓지 않았다.

선계 감찰관의 거대한 손이 그들을 향해 뻗어왔다. 호수는 핏빛으로 물들고, 달빛은 차갑게 식어갔다. 이 금지된 사랑은, 과연 이대로 끝장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이 잔혹한 운명에 맞서 새로운 길을 열 것인가? 그들의 피와 영혼을 건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