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고고학자의 낡은 노트와 수상한 남자
“젠장, 젠장, 젠장!”
이서진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녀의 등 뒤로 쌓인 고문헌 더미는 흡사 거대한 책 무덤 같았고, 퀴퀴한 먼지 냄새는 그녀의 지독한 불운을 대변하는 듯했다. 국립 아카이브의 가장 후미진 곳, 존재 자체가 망각된 듯한 ‘미분류 자료실’에서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고독한 싸움을 이어온 지도 벌써 석 달째였다.
서진은 명문대 고고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발굴 현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는 것보다, 논문 심사에서 박사 학위보다 ‘결혼은 언제 하냐’는 질문이 더 빈번하게 날아오는 것이 대한민국의 젊은 고고학자, 이서진의 현실이었다. 그녀는 이 상황을 타개할 한 방이 절실했다. 그래서 매달리는 것이, 오랫동안 실체를 알 수 없는 소문으로만 떠돌던 ‘잃어버린 지하 왕국’에 대한 고문헌들이었다.
“젠장, 이따위 암호로는 박사 학위는커녕 국밥 한 그릇도 못 얻어먹겠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낡고 해진 노트는 가죽 표지에 정체불명의 문양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수십 년 전, 고고학계의 이단아로 불리다 홀연히 자취를 감춘 그녀의 증조할아버지, 이학범 교수의 유품 중 하나였다. 이 노트는 그가 생전에 남긴 수수께끼 같은 기록들로 가득했다. 알 수 없는 그림,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 배열, 그리고 지도 같기도 하고 낙서 같기도 한 기호들. 서진은 이 노트가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고 직감했다.
그녀의 눈길이 한 페이지에 고정되었다. 다른 암호들과는 달리 유독 눈에 띄는,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조악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언덕 위에 솟아 있는 거대한 바위, 그 바위 아래로 파고 들어가는 듯한 길, 그리고 그 끝에 그려진 거대한 문양. 서진은 이 그림이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거… 설마?”
서진은 황급히 노트북을 펼쳐 들었다. 며칠 전, 논문을 위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던 옛 문헌 속 삽화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수백 년 전, 한 은둔형 화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작은 마을의 풍경화. 그 그림 속에서도 언덕 위 거대한 바위가 유독 강조되어 있었고, 그 바위 옆에 작게 그려진 굽이진 길은 노트 속 그림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 바위 옆에 덧그려진 희미한 문양이었다. 증조할아버지의 노트 속 문양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 장소는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시골 마을이었다. 심지어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곳. 그런 곳에 ‘잃어버린 지하 왕국’의 단서가 있을 리 없다고 모두가 코웃음 쳤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는 달랐다. 평생을 기이한 유적을 찾아다녔고, 기상천외한 학설을 주장하며 학계의 비웃음을 샀던 인물. 하지만 그의 통찰력은 항상 시대를 앞서 있었다.
서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손이 떨리고, 낡은 노트의 종이 질감이 손끝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노트는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잃어버린 지하 왕국으로 가는 지도가 될 수도 있었다.
“젠장, 설마 이렇게 싱겁게?”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개월간의 고독한 사투가 드디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흥분한 나머지 노트북을 챙기다 그만 의자 다리에 걸려 휘청거렸다. 중심을 잃은 몸이 옆으로 기울며, 그만 옆 칸에 쌓여 있던 낡은 서적 더미를 와르르 무너뜨리고 말았다.
“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책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서진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통증보다 더 심한 건 민망함이었다. 이곳은 평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이었기에 다행이라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거기, 괜찮으십니까?”
낮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 저 목소리는 또 뭐야! 미분류 자료실에 사람이 있었다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쏟아진 책 더미 너머로 삐딱하게 서 있는 한 남자였다. 백열등 불빛 아래 은색 머리카락이 언뜻 비쳤고, 정돈되지 않은 듯하면서도 묘하게 섹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남자는 마치 패션 화보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이곳 미분류 자료실의 또 다른 구역,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도록 철창으로 봉쇄되어 있던 ‘특수 보관 구역’이었다.
“당신, 당신이 왜 거기에…!”
서진은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특수 보관 구역은 외부인의 접근이 엄격히 금지된 곳이었다. 더욱이 그녀조차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어떻게?
남자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묘하게 경멸적이면서도, 동시에 지독히 매력적이었다.
“아, 좀 돌아다니다 보니 길이 이쪽이더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길치라서.”
‘길치? 길치라서 철창을 뚫고 들어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서진은 분노에 부르르 떨었다.
“여긴 외부인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당신 누굽니까? 어떻게 들어왔어요?”
남자는 천천히 철창에 기대어 그녀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신분증 검사는 안 하던데요. 혹시 여기 제가 찾던 유물이 있을까 해서요.”
남자의 시선이 서진의 손에 들린 낡은 노트로 향했다. 그는 순간 눈을 가늘게 뜨더니,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오호라… 이 노트, 꽤 오래된 물건 같은데. 혹시 제가 찾던 ‘그것’과 관련된 단서가 아닐까 싶군요.”
서진은 본능적으로 노트를 등 뒤로 숨겼다. 이 남자는 수상하다. 너무 잘생긴 것도 수상하고, 태연하게 금지 구역에 들어온 것도 수상하고, 심지어 노트를 보는 눈빛까지 수상했다. 마치 그녀의 노트를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이건 제 개인 소장품입니다!”
“개인 소장품이라… 흐음.”
남자는 철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바닥에 쏟아진 책들 중 하나를 톡 건드렸다. 그 책은 다름 아닌 증조할아버지의 다른 저서, ‘잃어버린 문명의 그림자’였다.
“이학범 교수의 저서군요. 고고학계의 이단아라고 불렸던 분이죠. 특히, ‘영원히 잠든 지하 왕국’에 대한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쳐 학계에서 매장당하다시피 한… 뭐, 저도 그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남자의 말에 서진은 순간 얼어붙었다. 이학범 교수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심지어 ‘영원히 잠든 지하 왕국’까지 정확히 짚어냈다. 이 남자는 대체 누구지? 단순한 도둑이 아닌가?
“당신… 누구야?” 서진은 잔뜩 경계하며 물었다.
남자는 그제야 철창에서 몸을 떼고 똑바로 섰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강지한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음, 탐험가라고 해두죠.”
강지한. 이름만큼이나 재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인상이었다. 서진은 그의 눈빛에서 알 수 없는 자신감과 함께, 그녀의 노트를 향한 노골적인 흥미를 읽어냈다. 탐험가? 탐험가라니, 21세기에 무슨 인디아나 존스라도 된단 말인가?
“탐험가라니, 장난하세요? 여긴 당신 같은 사람이 올 곳이 아니에요!”
“그럼 당신 같은 학자들이 시들시들한 책 더미 속에서 미스터리를 썩히기 좋은 곳은 맞나 보죠?”
강지한의 도발적인 말에 서진은 울컥했다.
“이 노트는 제가 수년간 추적해온 거예요! 당신이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강지한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수년간 추적해온 것치고는, 방금 전까지 ‘젠장, 젠장’을 외치며 머리를 쥐어뜯고 계시던데요. 게다가 지금, 흥분해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덕분에 저도 한 조각의 ‘단서’를 발견했지 않습니까?”
강지한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서진의 손에 들린 노트가 아닌, 그 옆에 놓인 그녀의 노트북 화면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녀가 미처 덮지 못한 노트북 화면에는 아까 그녀가 발견했던, 옛 그림 속 바위와 노인 문양 사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거기, 저 바위 그림 옆에 희미하게 그려진 문양… 꽤나 흥미로운데요.”
강지한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서진의 증조할아버지 노트 속에 있는 문양과 노트북 화면 속 문양을 번갈아 보더니,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거, 제가 찾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일지도 모르겠군요.”
“무,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찾던 퍼즐이라니!”
서진은 노트를 꽉 움켜쥐었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그녀의 노트를 노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강지한은 철창 문고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학범 교수의 노트에 담긴 단서, 그리고 그 단서를 완성하는 또 다른 조각… 흥미롭지 않습니까? 당신은 아마 그 단서의 절반만 보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나머지 절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그림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의 말은 서진의 가슴을 쿵 하고 때렸다. 절반? 자신이 절반만 보고 있다고?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웃는 강지한을 노려보았다. 잘생긴 얼굴은 그대로인데, 그 웃음은 왠지 모르게 불길하게 느껴졌다.
“흥, 웃기지도 않네요. 내 증조할아버지의 연구는 내가 이어받을 겁니다. 당신 같은 수상한 사람이 끼어들 틈은 없어요.”
“수상하다니… 당신이야말로 지금 ‘잃어버린 지하 왕국’이라는 허무맹랑한 소문에 매달리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당신은 그 유적의 ‘비밀’을 파헤치고 싶어 하고, 저는 그 ‘비밀’이 담고 있는 ‘보물’을 찾고 싶어 하죠.”
강지한은 서진의 말꼬리를 잡고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목표는 다르지만, 향하는 곳은 같군요. 이런 우연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서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이 남자는 자신의 노트를 가로채려 하는 건가, 아니면 협박하는 건가?
“어쨌든, 전 혼자서도 충분해요.”
강지한은 그녀의 말에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자료실에 그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너무 웃겨서. 혼자서요? 이 어둡고 칙칙한 자료실에 갇혀서, 다른 사람들은 코웃음 치는 옛 기록만 붙들고 있다가, 겨우 그림 하나 발견하고서 온몸으로 기쁨을 표출하는 당신이요? ‘엉덩방아 전문가’ 이서진 박사님 말입니까?”
그의 비웃음에 서진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엉덩방아 전문가라니!
“어, 어차피 당신은 저 철창도 못 나오잖아요! 나는 이제 곧 떠날 거니까, 평생 그 안에 갇혀서… 으읍!”
서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지한은 주머니에서 익숙한 열쇠 한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그중 제일 큰 열쇠를 골라 철창 문고리에 꽂더니, 가볍게 돌렸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창 문이 스르륵 열렸다.
강지한은 마치 쇼라도 하듯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어둠 속에서 한 발짝, 두 발짝 걸어 나왔다.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미분류 자료실의 어둠 속에서도 그의 은회색 머리카락은 빛을 발하는 듯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서진의 앞에 섰다.
“어때요, 이제 제가 당신보다 한 발 앞서 나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제가 당신보다 이 ‘탐험’에 더 적합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비죽이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서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방금 전까지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의 증조할아버지 노트가 지도를 가리킨다 한들, 그 미스터리를 해결하고 지하 왕국으로 향하는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이 수상하고 재수 없지만, 어쩐지 강하게 이끌리는 남자… 강지한.
“젠장… 왜 하필 당신이야!”
서진은 결국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이것이 어쩌면, 그녀의 인생 가장 파란만장한 모험의 서막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그녀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강지한은 그녀의 한숨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환하게 웃었다.
“자, 그럼 이제 우리의 ‘엉덩방아 전문가’ 이서진 박사님. 영원히 잠든 지하 왕국을 찾아 나설 준비는 되셨습니까?”
그의 질문은 마치 모험으로의 초대장과 같았다. 그리고 서진은, 지금 막 그 초대장을 받아 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