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성간의 침묵, 차원의 균열**

    “천공호, 망각의 심해 구역 진입.”

    함장 진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함교를 채웠다. 우주선 ‘천공호’는 심우주 탐사선으로,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길고 지루한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은 성도에서 수십만 광년 떨어진, 말 그대로 ‘망각’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죽은 듯한 공간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만이 무한히 펼쳐진, 별빛마저 집어삼킨 듯한 심연. 그 속에 숨겨진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각 구역 이상 무. 에너지 출력 98% 유지.” 부함장 이가 보고했다. 그의 곁에서 항해사 김은 멍하니 창밖의 암흑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감과 함께 막연한 기대감이 교차했다.

    “박사 한, 스캔 시작하세요.” 진 함장이 명령했다. 그의 시선은 전방의 메인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수석 외계지질학자 한 박사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스크린에 손을 움직였다. “방사선 스캔, 중력 스캔, 초광자 스캔… 모든 대역으로 분석 시작합니다.” 그의 손놀림은 정확하고 빨랐지만, 표정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정적. 침묵이 흐르는 함교 안에서 오직 기계음만이 낮게 울렸다. 며칠, 아니 몇 주째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모두가 탐사선이 찾아낼 것이라 기대하는 ‘미지의 신비’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체념 섞인 피로감에 젖어 있었다.

    그때였다.

    삐비비빅!

    한 박사의 스크린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이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이게… 무슨 수치죠?” 한 박사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의 손가락은 패널 위를 미친 듯이 헤매고 있었다. “중력 이상? 아니, 이건 중력장이 아니에요. 파동이에요. 비선형적인, 측정 불가능한 에너지 파동입니다!”

    “설명하세요, 박사.” 진 함장이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스크린에 박혀 있었다.

    “설명이 안 됩니다, 함장님.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어떤 에너지 패턴과도 다릅니다. 이 파동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 변이하고 증폭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기’나 ‘영기’의 개념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태초의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스크린에는 칠흑 같은 우주 한가운데, 거대한 에너지 파동이 뿜어져 나오는 지점이 붉은색으로 명멸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미미하지만 확실한 형태가 존재했다. 마치 우주가 스스로 숨 쉬는 것처럼, 거대한 파동이 주기적으로 확장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었다.

    “확대.” 진 함장이 짧게 명령했다.

    화면이 확대되자, 모두는 숨을 삼켰다. 암흑 속에서 조용히 떠다니는 그것은, 거대한 입방체였다.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 매끄러운 표면은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았지만, 그 내면에서부터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우주 자체를 깎아 만든 듯한, 혹은 우주가 잉태한 가장 순수한 결정체와도 같았다. 표면에는 미세한 결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언뜻 보면 아무 의미 없는 무늬였지만 자세히 보면 우주 만물의 이치가 담긴 듯한 고대의 부적 문양과도 같았다.

    “젠장… 저게 뭐야?” 부함장 이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터져 나왔다. 그의 얼굴은 경외심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한 박사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화면을 조작했다. “물질 구성이… 파악이 안 됩니다. 어떤 원소도 일치하지 않아요. 표면 온도는 절대 영도에 가깝지만, 내부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가… 기이해요. 모순적입니다. 마치 시간과 공간의 법칙을 거스르는 듯한 존재입니다.”

    “생명체입니까?” 김 항해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흥분과 함께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저 물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정상적인 ‘기운’을 느끼는 듯했다.

    “아니요. 어떤 생체 신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에너지가 자전하고 있어요. 내부에 거대한 에너지 순환 시스템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계적인 것이 아니에요. 유기적인 움직임에 가깝습니다. 흡사 거대한 ‘영핵’ 같습니다.”

    진 함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천공호, 저 물체로 접근한다. 최대 속도 50%. 예비 동력 가동, 보호막 3단계로 올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결단력이 담겨 있었다.

    우주선이 서서히 미지의 입방체에 다가갔다. 거리는 좁혀질수록, 입방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규칙적인 주기로 섬광을 내뿜었다. 그 빛은 시각을 넘어선 무언가를 자극하는 듯했다. 함교 내부의 모든 승무원들이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들의 심장이 덩달아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가까이 갈수록 에너지 파동이 강해집니다!” 한 박사가 소리쳤다. “천공호의 센서들이 오작동하고 있어요! 시스템 과부하 경고!”

    “괜찮아, 박사. 이 정도는 예상 범위 내야.” 진 함장이 차분하게 응수했지만, 그의 손은 조종간을 꽉 쥐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그때였다.

    “으… 윽!”

    김 항해사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김 항해사! 괜찮나?” 부함장 이가 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머리가… 아파요… 뭔가… 뭔가 들어와요… 제 안으로…!” 김 항해사가 비틀거리며 책상을 짚었다. 평소의 생기 넘치던 눈동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안에는 거대한 심연이 담긴 듯한 공허함과 혼란이 교차했다. 그의 몸에서 미약한 ‘영력’이 분출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측정!” 진 함장이 명령했다.

    “생체 신호… 급격한 변화 감지! 뇌파가… 미지의 에너지와 공명하고 있습니다!” 한 박사의 목소리가 절규에 가까웠다. 그의 손가락이 떨리며 스크린을 가리켰다. “이 파동이… 김 항해사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마치 그를 ‘개방’시키려는 것처럼!”

    입방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섬광이 더욱 격렬해졌다. 우주선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함교 안의 모든 장비들이 미친 듯이 경고음을 토해냈다. 메인 스크린에는 입방체와 천공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 흐름이 형성되는 것이 감지되었다.

    “보호막이… 보호막이 뚫리고 있습니다!” 부함장 이가 절규했다. 스크린에는 보호막 수치가 급격히 하락하는 그래프가 깜빡였다.

    “말도 안 돼! 저건 물리적인 충격이 아니야!” 진 함장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보호막이 물리적 충격 없이 붕괴되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그 순간, 김 항해사의 몸에서 희미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입방체의 빛이 그의 몸을 통해 그대로 발산되는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푸른색으로 변했고,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마치 시간을 초월한 과거, 혹은 아득한 미래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의 주변 공간이 일렁이며, 희미한 왜곡 현상까지 나타났다.

    “이건… 깨달음…?” 김 항해사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김 항해사의 것이 아니었다. 수천 년, 수만 년을 넘어선 듯한 웅장하고 깊은 울림이 실려 있었다. “아니… 영겁의 망각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문(門)… 진정한 도(道)의 서막이… 열렸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기운이 점점 더 강렬해지더니, 함교의 유리를 통해 외부의 입방체와 희미하게 연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두 존재가 영적인 탯줄로 이어진 듯했다. 그 연결선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아득한 우주의 진리가 담긴 에너지 실타래처럼 보였다.

    “김 항해사! 정신 차려!” 진 함장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함교를 울렸다.

    하지만 김 항해사는 그들을 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과 함께 알 수 없는 황홀경이 뒤섞여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번뜩이더니, 함교의 모든 스크린에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것은 문자가 아니라, 에너지의 흐름, 우주의 섭리, 불멸의 존재들이 남긴 ‘도(道)’의 흔적처럼 보였다. 단 한 글자라도 이해하려 하면 정신이 붕괴될 듯한 압도적인 정보의 파동이었다.

    “함장님! 천공호의 동력원이… 외부 에너지에 의해 강제 전환되고 있습니다!” 한 박사가 절규했다. 그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아니, 흡수되고 있어요! 입방체가 천공호의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주 동력원, 보조 동력원 할 것 없이 모든 ‘기’가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김 항해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 기운이 갑자기 사그라지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눈동자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온몸을 격렬하게 떨고 있었다. 그의 몸은 모든 ‘기운’이 소진된 듯 허물어졌다.

    “김 항해사?” 부함장 이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혼란과 망설임이 묻어났다.

    그 순간, 김 항해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아까의 공허함 대신, 깊은 슬픔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본 자의 절망이 담겨 있었다.

    “보았어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그의 것이 아니었다. 속삭이듯 나지막했지만, 그 어떤 절규보다 더 강렬한 공포를 담고 있었다.

    “무엇을?” 진 함장이 물었다. 그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듯했다.

    김 항해사의 시선이 허공을 뚫고, 외부의 거대한 입방체에 닿았다.

    “이건… 차원의 문이에요. 그리고… 그 문은… 열렸어요.”

    콰아아앙!

    천공호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동시에 외부의 입방체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푸른빛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팽창했고, 그 중심에서 어둠보다 깊은 균열이 번개처럼 갈라졌다. 마치 우주의 막이 찢어지는 듯한,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균열 너머로는 형언할 수 없는 빛과 어둠이 뒤섞인 공간이 드러났다. 그것은 마치 ‘도(道)’가 태동하던 태초의 혼돈을 시각화한 듯했다.

    “함장님! 차원 에너지 감지! 미지의 존재가… 유입되고 있습니다! 측정 불가능한 규모의 에너지입니다!” 한 박사가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의 이성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진 함장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단순히 균열이 아니었다. 그 너머에 아득히 펼쳐진, 지금까지 인류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가 희미하게 드러나는 듯했다. 그 공간은 비현실적이고, 물리법칙을 무시한 채 존재하는 듯했다.

    그때, 김 항해사가 다시금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공중에 살짝 부양하듯 떠올랐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균열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의 몸은 다시 푸른 기운으로 둘러싸였다.

    “이것은… 시작이에요… 새로운 세계의… 혹은… 끝없는 망각의…”

    그리고 그의 손끝이 균열의 가장자리에 닿는 순간, 거대한 에너지가 폭풍처럼 그를 감쌌다. 그의 몸이 빛무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허공에 스며들 듯, 먼지처럼 흩어지는 듯한 기이한 소멸이었다.

    “김 항해사!” 부함장 이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닿을 수 없었다. 그의 손은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균열은 더욱 벌어졌고, 그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그것은 물질도, 에너지도 아닌, 오직 순수한 ‘압도적인 의지’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함교의 모든 승무원들은 숨이 막히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들의 영혼마저 꿰뚫는 듯한 태고의 시선이었다.

    천공호는 이제 움직임을 멈췄다. 모든 동력이 끊긴 채, 거대한 입방체와 그 너머의 균열이 뿜어내는 기묘한 에너지에 완전히 잠식되어 있었다. 망각의 심해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불멸의 균열이 열리며, 우주의 가장 깊은 곳에서 태고의 존재가 눈을 뜨고 있었다.

    과연, 이 모든 것은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의 서막일까, 아니면 파멸의 시작일까?

    다음 화에 계속.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푸른 희망의 뿌리

    **작품명:** 푸른 희망의 뿌리
    **장르:**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 생존

    **[에피소드 시작]**

    **[컷 1]**
    **장면 묘사:** 낡은 공공 도서관의 한 구석. 책장이 쓰러지고 찢어진 책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만, 그 한편에 정성스레 만들어진 아늑한 공간이 보인다. 낡은 담요와 천 조각들로 둘러싸인 작은 잠자리, 가운데에는 작은 돌멩이로 둘러싸인 모닥불 터. 불은 피어 있지 않고 재만 가득하다. 새벽빛이 창문 틈으로 희미하게 스며들어 먼지 섞인 공기를 가른다.
    **내레이션 (새롬):** 세상이 무너진 지 몇 년이 지났는지, 이제는 셀 엄두도 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건, 매일 아침 해가 뜨고,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

    **[컷 2]**
    **장면 묘사:** 잠자리 한쪽에서 도담(10대 초반)이 낡은 스케치북에 연필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 그의 옆에는 다 떨어진 작은 가방이 놓여 있다. 조용한 아이. 그의 눈은 그림에 집중되어 있지만, 이따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본다.
    **내레이션 (새롬):** 그리고 도담이가 옆에 있다는 것. 그 작은 온기 하나가 이 모든 폐허 속에서 내가 숨 쉬게 하는 이유였다.

    **[컷 3]**
    **장면 묘사:** 새롬(20대 초반)이 낡은 나무 상자를 뒤적이고 있다. 상자 안에는 말린 육포 조각 몇 개, 마른 열매, 그리고 딱딱한 건빵 같은 것이 보인다. 그녀의 표정은 미미하게 굳어 있다. 한 손에는 깨진 유리병을 조심스레 들고 있다.
    **새롬:** (혼잣말처럼) 이걸로는… 이번 주를 넘기기도 힘들겠는데.

    **[컷 4]**
    **장면 묘사:** 도담이 고개를 들어 새롬을 본다. 그의 손에는 방금 그린 듯한 버섯 그림이 들려 있다. 길고 가는 줄기에 갓은 넓고 밝은 노란색을 띠는 버섯이다. 꽤나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도담:** 누나, 이거 봐. 지난번에 본 버섯이야. 예쁘지?

    **[컷 5]**
    **장면 묘사:** 새롬이 도담에게 다가와 그림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눈에 잠시 부드러운 빛이 스친다. 그녀는 버섯 그림을 보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눈을 가늘게 뜬다.
    **새롬:** (그림을 유심히 보며) 이거… 혹시, 예전에 아빠가 ‘황금 뿌리 버섯’이라고 불렀던 거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볕이 잘 드는 습한 곳에서 자란다고 했지. 향이 아주 좋고, 약으로도 썼다고…

    **[컷 6]**
    **장면 묘사:** 새롬이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하듯 살짝 미소 짓는다. 어렴풋이 어린 시절의 따뜻한 기억이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새롬:** 그거 넣고 끓인 수프는… 정말 잊을 수 없을 만큼 따뜻했는데.

    **[컷 7]**
    **장면 묘사:** 새롬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녀의 눈빛에 결연한 의지가 담긴다. 그녀는 도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새롬:** 도담아. 우리, 저 버섯을 찾으러 가야겠다.

    **[컷 8]**
    **장면 묘사:** 새롬이 분주하게 짐을 꾸린다. 낡았지만 튼튼한 배낭에 물통, 필터, 다용도 칼, 그리고 부싯돌 등을 넣는다. 그녀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효율적이다.
    **새롬:** 예전 시립 수목원 근처에 그런 버섯이 있을지도 몰라. 그곳이라면 아직 식물들이 살아남아 있을 테니까.

    **[컷 9]**
    **장면 묘사:** 도담이 벌떡 일어선다. 그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도담:** 나도 같이 갈래! 내가 그림으로 자세히 봤으니까, 더 잘 찾을 수 있을 거야!

    **[컷 10]**
    **장면 묘사:** 새롬이 잠시 망설인다. 수목원은 위험한 곳이다. 무너진 건물 잔해, 야생화된 동물들, 그리고 어쩌다 마주칠지 모르는 다른 생존자들까지.
    **새롬:** 아니, 도담아. 거긴 위험해. 누나가 혼자…

    **[컷 11]**
    **장면 묘사:** 도담이 스케치북을 펼쳐 다시 버섯 그림을 내민다. 그의 눈빛은 간절하다.
    **도담:** 누나 혼자 가면… 너무 심심하고 무섭잖아. 나도 누나 옆에서 버섯 찾아줄 수 있어. 그림으로 본 건 하나도 안 잊어버렸단 말이야. 딱 이렇게 생겼어!

    **[컷 12]**
    **장면 묘사:** 새롬이 도담의 그림을 본다. 그림 속 버섯은 생생하다. 새롬은 도담의 그림 실력과 기억력을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맑은 눈빛에서 자신과 같은 ‘희망’을 본다. 그녀는 한숨을 쉬지만, 그 한숨에는 미소가 섞여 있다.
    **새롬:** (작게 웃으며) 좋아. 대신 약속해. 누나 손 절대 놓지 않기. 그리고 누나가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기. 알았지?
    **도담:** (환하게 웃으며) 응! 약속!

    **[컷 13]**
    **장면 묘사:** 도서관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 새롬은 낡은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도담은 작은 가방을 메고 있다. 햇빛이 쏟아지는 바깥 세상은, 여전히 폐허 그대로다. 녹슨 자동차들이 널브러져 있고, 건물들은 마치 뼈대처럼 앙상하게 서 있다.
    **내레이션 (새롬):** 그날, 우리는 아주 작은 희망 하나를 가슴에 품고 무너진 도시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장면 전환: 도시 폐허 속]**

    **[컷 14]**
    **장면 묘사:** 두 사람이 좁은 골목을 조심스럽게 지나간다. 벽에는 넝쿨 식물들이 뒤덮여 있고, 깨진 유리 파편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난다. 새롬은 주변을 예리하게 살피며 걷고, 도담은 그녀의 뒤를 바싹 따른다.
    **효과음:** (발자국 소리: 사박, 사박)

    **[컷 15]**
    **장면 묘사:** 도담이 낡은 건물 잔해 틈에서 피어난 작은 꽃을 발견하고 멈춰 선다. 흙먼지로 뒤덮인 회색빛 폐허 사이에서 홀로 푸른 꽃잎을 뽐내는 모습이 대조적이다.
    **도담:** 누나, 저거 봐! 어떻게 저런 데서 꽃이 피었지?
    **새롬:** (미소 지으며) 생명은… 참 질기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거야.

    **[컷 16]**
    **장면 묘사:** 새롬이 도담의 손을 잡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더욱 경계심으로 가득하다. 멀리서 희미한 인기척이나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새롬:** 그래도 너무 넋 놓고 있으면 안 돼. 이곳은 아직 살아있는 위험으로 가득하니까.

    **[컷 17]**
    **장면 묘사:** 오래된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는 두 사람. 고가도로는 반쯤 무너져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다. 그 아래는 음침하고 습한 기운이 감돈다.
    **효과음:** (철근 부러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 콰앙! / 먼지 부스러지는 소리: 후두둑)
    **새롬:** (도담의 손을 더욱 강하게 잡으며) 조심해!

    **[컷 18]**
    **장면 묘사:** 그들이 지나가던 길 옆, 낡은 시멘트 벽에 날카로운 발톱 자국과 함께 붉은 얼룩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새롬의 표정이 굳어진다.
    **새롬:** (낮은 목소리로) 방금 지나간 것 같네. 조심해야겠어.

    **[컷 19]**
    **장면 묘사:** 마침내 수목원 입구에 도착한다. 입구는 낡은 철제 문이 반쯤 떨어져 나간 채 녹슬어 있고, 표지판은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하지만 그 안쪽으로는 울창하게 자란 나무와 덤불들이 보인다.
    **내레이션 (새롬):** 폐허 속의 작은 오아시스. 하지만 그 오아시스조차 옛날과는 달랐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야생으로 돌아간 자연은 경이롭지만, 동시에 더 큰 미지의 위험을 품고 있었다.

    **[장면 전환: 수목원 안]**

    **[컷 20]**
    **장면 묘사:** 수목원 안.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이 햇빛을 가려 어둑하다. 흙바닥은 습하고, 이름 모를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 길을 뒤덮고 있다. 옛날의 잘 정돈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새롬:** 여기 어디쯤일 텐데… 아빠가 그러셨어. 예전에는 ‘약용 식물 전시 구역’이라는 곳에서 자랐다고.
    **효과음:** (풀벌레 소리: 찌르르르… /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 사락사락)

    **[컷 21]**
    **장면 묘사:** 새롬이 낡은 지도를 펼쳐 들고 주변을 살핀다. 지도는 너덜너덜하고, 현재의 지형과 많이 달라져 있다. 도담은 주변 식물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걷는다.
    **도담:** (낮은 목소리로) 누나, 여기 이 풀들은 우리가 아는 풀이랑 좀 달라. 뭔가… 더 힘이 세진 것 같아.

    **[컷 22]**
    **장면 묘사:** 새롬이 도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핀다. 그녀의 눈이 낡은 온실 건물 잔해를 발견한다. 유리창은 대부분 깨져 있고, 철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있다.
    **새롬:** 저기, 낡은 온실이 보인다. 어쩌면 그 안쪽이 습하고 볕도 잘 들었을지도 몰라. 가보자.

    **[컷 23]**
    **장면 묘사:** 온실 잔해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 바닥은 흙과 깨진 유리, 그리고 죽은 나뭇잎들로 뒤덮여 있다. 곰팡이 냄새와 흙냄새가 뒤섞여 희미하게 풍긴다.
    **새롬:** (조심스럽게) 조심해. 바닥이 미끄러울 수 있어.

    **[컷 24]**
    **장면 묘사:** 도담이 온실 구석, 무너진 철제 구조물 아래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 아래를 가리킨다. 그 햇살 아래, 흙더미 사이에서 희미한 노란빛이 감돈다.
    **도담:** 누나! 저기 봐! 저거… 내가 그린 버섯이랑 똑같아!
    **효과음:** (심장 박동: 쿵, 쿵)

    **[컷 25]**
    **장면 묘사:** 새롬이 황급히 도담이 가리킨 곳을 본다. 흙먼지가 앉아 얼핏 잘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보니 도담의 그림과 똑같이 생긴 노란색 갓을 가진 버섯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라고 있다. 그야말로 ‘황금 뿌리 버섯’이다.
    **새롬:**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맞아… 맞아! 황금 뿌리 버섯이야! 도담아, 네가 찾았어!

    **[컷 26]**
    **장면 묘사:** 새롬이 조심스럽게 버섯들을 채취하기 시작한다. 흙을 털어내고, 뿌리째 뽑아 배낭 속 작은 망에 넣는다. 그녀의 손길은 정성스럽다. 도담은 그 옆에서 흥분한 표정으로 새롬을 돕는다.
    **효과음:** (버섯 뽑는 소리: 뽁! 뽁!)

    **[컷 27]**
    **장면 묘사:** 그 순간, 온실 밖에서 날카로운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크르르르…’ 소리와 함께 무언가 빠르게 달려오는 듯한 흙발 소리.
    **효과음:** (날카로운 짐승의 울음소리: 크르르르! / 흙 튀는 소리: 우당탕!)
    **새롬:** (몸을 굳히며) 조용히!

    **[컷 28]**
    **장면 묘사:** 온실 입구에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야생 들개 무리가 나타난다. 그들은 영양실조로 앙상하지만, 눈빛은 사납고 번뜩인다. 그들은 버섯 향을 맡은 듯 코를 킁킁거린다.
    **들개1:** (으르렁거리는 소리)
    **들개2:** (날카롭게 짖는 소리)

    **[컷 29]**
    **장면 묘사:** 새롬이 도담을 등 뒤로 숨기고, 허리에 찬 다용도 칼을 뽑아든다. 그녀의 표정은 차분하지만, 눈에는 강한 경계심이 담겨 있다. 도담은 새롬의 등 뒤에서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숨죽인다.
    **새롬:** (낮은 목소리로 도담에게) 괜찮아… 누나만 믿어.

    **[컷 30]**
    **장면 묘사:** 들개 한 마리가 먼저 달려든다. 새롬이 민첩하게 몸을 피해 칼로 위협한다. 들개는 잠시 주춤하지만, 이내 다른 들개들도 합세해 포위망을 좁혀온다.
    **효과음:** (들개들의 울부짖음: 컹컹! 크르릉!)

    **[컷 31]**
    **장면 묘사:** 새롬이 순간적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그녀의 눈에 무너진 온실 천장의 철골 구조물이 들어온다.
    **새롬:** (도담에게) 도담아! 저기 위로 올라가! 빨리!

    **[컷 32]**
    **장면 묘사:** 도담이 겁에 질린 채 철골 구조물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 올라간다. 들개들이 그를 향해 뛰어들지만, 새롬이 몸으로 막아서며 길을 열어준다.
    **새롬:** (들개를 향해 칼을 휘두르며) 이리와!
    **효과음:**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 챙!)

    **[컷 33]**
    **장면 묘사:** 도담이 간신히 철골 구조물 위로 올라선다. 새롬도 뒤따라 재빨리 올라가려 하지만, 들개들이 그녀의 발목을 잡으려 한다.
    **새롬:** (악을 쓰며) 도담아! 손!

    **[컷 34]**
    **장면 묘사:** 도담이 손을 뻗고, 새롬이 필사적으로 뛰어올라 도담의 손을 잡는다. 두 사람이 아슬아슬하게 철골 위에 매달려 들개들을 피한다. 들개들은 아래에서 으르렁거리며 노려본다.
    **효과음:** (철골 흔들리는 소리: 삐걱! 삐걱!)

    **[컷 35]**
    **장면 묘사:** 두 사람이 철골 위에서 천천히 이동하며 온실 밖으로 빠져나간다. 들개들은 아래에서 쫓아오려 하지만, 구조물 위로는 올라오지 못한다.
    **내레이션 (새롬):**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도담의 작은 손이 내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버틸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살아남아야 했다.

    **[장면 전환: 도서관 기지]**

    **[컷 36]**
    **장면 묘사:** 밤이 깊었다. 도서관 기지에 작은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그 위에 낡은 냄비가 올려져 있다. 냄비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온다. 새롬은 지친 표정으로 불을 보고 있고, 도담은 그 옆에서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다.
    **효과음:** (나무 타는 소리: 타닥, 타닥)

    **[컷 37]**
    **장면 묘사:** 새롬이 국자로 냄비 속 수프를 떠서 작은 나무 그릇에 담는다. 버섯과 말린 고기 조각, 그리고 어딘가에서 찾아낸 듯한 낡은 채소 조각들이 어우러져 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새롬:** (도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도담아. 다 됐어.

    **[컷 38]**
    **장면 묘사:** 도담이 눈을 뜨고 수프를 본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버섯 특유의 향긋한 냄새가 기지 안에 가득하다.
    **도담:** 우와…!

    **[컷 39]**
    **장면 묘사:** 두 사람이 말없이 수프를 먹는다. 뜨거운 수프가 지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는 듯하다. 버섯의 향긋함과 깊은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내레이션 (새롬):** 이 작은 한 그릇의 수프가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소중했다. 위험을 뚫고 얻어낸 보물 같은 맛.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희망의 맛.

    **[컷 40]**
    **장면 묘사:** 도담이 수프를 먹다가 문득 스케치북을 펼친다. 그는 방금 채취한 황금 뿌리 버섯의 모습을 다시 그리고 있다. 그의 그림은 이제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생생한 ‘경험’이 담겨 있다.
    **도담:** (수프를 한 숟갈 뜨고 그림을 보며) 누나, 진짜 우리가 찾아온 버섯에서 나는 냄새랑 똑같아!

    **[컷 41]**
    **장면 묘사:** 새롬이 도담의 그림을 본다. 그림 속 버섯은 더욱 생명력 있게 살아 숨 쉬는 듯하다. 그녀는 도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새롬:** 그래. 네가 찾은 덕분이야. 덕분에 오늘 밤은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겠다.

    **[컷 42]**
    **장면 묘사:** 새롬이 창밖을 바라본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긴 폐허가 펼쳐져 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절망적이지 않다. 작은 불꽃처럼 희미하지만, 분명한 희망이 빛나고 있다.
    **내레이션 (새롬):**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변했다. 매일, 아주 작은 희망의 뿌리를 찾아 헤매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온기가 되어, 기적처럼 다시 피어날 내일을 꿈꾼다.

    **[컷 43]**
    **장면 묘사:** 도담이 따뜻한 수프 한 그릇을 비우고 새롬의 옆에 기대어 잠이 든다. 그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번져 있다. 새롬은 조용히 도담을 안아주고, 불꽃이 튀는 모닥불을 바라본다.
    **내레이션 (새롬):** 살아있는 한, 희망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이 작은 불꽃처럼, 이 작은 버섯처럼, 이 작은 온기처럼.

    **[에피소드 끝]**

  • 타임슬립 (시간여행) 독립적인 단편 소설

    새카만 화면이 시야를 잠식했다. 삐- 하는 단조로운 경고음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한때 심장이 뛰던 자리에는 싸늘한 쇳덩이가 박혀 맥동하고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그 차가운 금속을 중심으로 재배치된 듯했다. 그는 지금, 2077년의 서울, 아니, 서울이었다고 불리던 폐허의 잔해 위에 서 있었다. 200년 전의 ‘나’가 실수로 가동시킨 낡은 시간 도약 장치가 그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의 임무는 원래 과거의 데이터를 회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임무는, 단 하나.

    생존.

    하늘은 언제나 병든 환자의 눈처럼 뿌옇고 탁했다. 햇빛은 간신히 그 두꺼운 먼지층을 뚫고 내려와, 마치 죽어가는 별빛처럼 힘없이 대지를 비추었다. 먼지는 발걸음마다 푹푹 파고들었다. 마스크 안에서 들이쉬는 공기는 금속과 썩은 냄새,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화학 물질의 역한 혼합물이었다.

    “젠장… 언제까지 이럴 건데.”

    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손에 쥔 녹슨 철근은 유일한 무기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미처럼 벽을 기어 다니던 역겨운 돌연변이 쥐들을 간신히 쫓아낸 참이었다. 놈들은 더 이상 쥐가 아니었다. 개의 몸통에 여덟 개의 눈,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끈적이는 타액을 흘리는 이빨. 이젠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여전히 위장 속을 뒤집어 놓는 혐오감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그의 등에는 낡고 뜯어진 배낭이 매달려 있었다. 안에는 정수 필터 몇 개, 에너지 바 서너 개, 그리고 고장 난 홀로그램 지도가 전부였다. 이 넓은 폐허에서 이 정도는 어린아이의 소꿉장난 도구에 불과했다.

    진우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치고 나아갔다. 한때 화려한 간판이 빛나던 건물들은 이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하늘을 향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그는 한때 번화했던 상업 지구의 흔적을 발견했다. ‘은하수 백화점’이라고 쓰여 있던 간판은 이제 ‘은하수 백’까지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라면… 뭔가 건질 게 있을지도.”

    희미한 희망이 그의 가슴을 스쳤다. 백화점이라면 식량이나 물, 아니면 하다못해 쓸만한 도구라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그만큼 위험할 것이었다. 다른 생존자들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더 크고 끔찍한 돌연변이들이 둥지를 틀고 있을 수도 있었다.

    내부로 들어서자 싸늘한 냉기가 진우를 맞았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고, 진열대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때 화려했을 옷가지들은 이제 먼지와 곰팡이로 뒤덮인 누더기에 불과했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널브러진 잔해들 사이를 훑었다.

    “젠장, 쥐새끼들만 가득하잖아.”

    거대한 유리 진열장 안에서 해골이 된 마네킹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진우는 스산한 기분에 몸서리쳤다. 그는 식료품 코너였을 법한 곳으로 향했다. 바닥에는 찌그러진 통조림 캔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 녹슬거나 내용물이 부패한 채였다. 그는 그 중에서 비교적 온전해 보이는 캔 몇 개를 주워들었다. 부디 내용물이라도 멀쩡하기를 바라면서.

    그때였다.

    – 끼이익… 찌직!

    어디선가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진우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소리는 천장에서 나는 것 같았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먼지 쌓인 천장 덕트 위에서, 녹슨 강철 다리를 가진 덩치 큰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거미와 지네를 합쳐놓은 듯한 형태였다. 여섯 개의 강철 다리가 천장 덕트를 움켜쥐고 느리게 기어 다니고 있었다. 몸통은 낡은 기계 부품과 유기체가 뒤섞여 있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그 기계의 한가운데에 한때 인간이었을 법한 존재의 해골이 박혀 있다는 점이었다. 머리 부분에는 붉은빛이 깜빡이는 렌즈가 박혀 사방을 훑고 있었다.

    진우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저런 괴물은 처음이었다. 저건 분명 이 폐허에서 지능을 가지고 움직이는 ‘정찰병’ 같은 존재일 터였다. 들켰다간 목숨이 위험하다.

    ‘빌어먹을. 이런 게 여기 있을 줄이야.’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바짝 웅크렸다. 괴물은 느리지만 끈질기게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 렌즈가 진우가 숨어 있는 기둥 쪽으로 향하는 순간, 진우는 직감했다.

    ‘도망쳐야 해!’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었다. 진우는 재빨리 몸을 낮추고 옆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발소리는 먼지 쌓인 바닥에 탁한 울림을 만들었다.

    – 끼이익! 끄아아악!

    괴물이 진우를 발견했다! 렌즈가 붉게 번쩍이며, 괴물은 비명을 질렀다. 녹슨 강철 다리들이 천장을 박차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진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백화점의 유리창이 깨져 나간 외부로 향하는 길목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젠장, 젠장, 젠장!”

    그의 폐가 터질 것 같았다. 허벅지 근육은 비명을 질렀다. 괴물의 그림자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녹슨 강철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등 뒤에서 섬뜩하게 울렸다.

    진우는 간신히 출구 쪽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옆구리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찢어지는 듯한 아픔과 함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괴물의 강철 다리가 그의 옆구리를 꿰뚫고 지나간 것이었다.

    “크윽…!”

    그는 바닥에 고꾸라졌다. 옆구리에서는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진우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았다. 백화점 출구 바로 옆, 부서진 보석상 진열대 뒤편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린아이였다.

    흙먼지로 뒤덮인 작은 얼굴, 찢어진 옷을 입은, 열 살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여자아이. 아이는 겁에 질린 눈으로 진우와 괴물을 번갈아 보다가, 진우의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몸을 숨겼다.

    ‘젠장, 왜 하필 지금…’

    진우는 절망했다. 이 상황에서 아이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의 눈빛이 뇌리에 박혔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동시에 모든 희망을 잃은 듯한 그 눈빛.

    – 끼이이익…!

    괴물이 진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마치 먹잇감을 가지고 놀 듯이. 진우는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살아남아야 했다. 자신이 대체 왜 이 끔찍한 미래로 떨어졌는지 알아내고, 되돌아가야 했다.

    그는 옆구리의 통증을 무시하고 팔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철근을 움켜쥐었다. 피로 축축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이 빌어먹을 고철 덩어리 같으니라고!”

    진우는 괴물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싸울 작정이었다.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번뜩였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는 다른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시간 도약 장치…!’

    그가 200년 전 과거에서 가져온, 폐기되어야 할 구형 장비. 그것은 그의 등 뒤에 있는 배낭 안에 고스란히 있었다. 충격으로 손상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작동만 한다면…

    괴물의 다리가 진우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진우는 간신히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동시에 배낭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무언가 굴러 나왔다.

    그것은 낡은 홀로그램 프로젝터처럼 생긴 장치였다. 진우가 타고 온 시간 도약 장치였다. 다행히도 심각한 손상은 없어 보였다. 다만, 빨간색 경고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 에러 코드: 시간 좌표 불안정. 재조정 필요.

    진우는 재빨리 장치를 주워들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빠른 계산이 이루어졌다. 이 장치는 목적지를 정확히 설정하지 않으면 불특정한 시공간으로 튕겨 나갈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괴물이 다시 공격해왔다. 이번에는 모든 다리를 한꺼번에 휘두르며 진우를 압박했다. 진우는 간신히 충격을 버티며 시간을 벌었다. 한 손으로는 철근을 휘둘러 괴물의 다리를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필사적으로 장치의 조작 패널을 눌렀다.

    “빨리, 빨리…!”

    그의 손가락은 피투성이였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장치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렌즈 부분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 시간 좌표 재설정 중…

    괴물의 강철 다리가 진우의 어깨를 강타했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꿰뚫었다. 진우는 비명을 삼켰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으로 패널의 중앙 버튼을 있는 힘껏 눌렀다.

    – 시간 좌표 설정 완료. 도약 시퀀스 시작.

    장치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백화점 내부를 가득 채웠다. 괴물은 혼란스러운 듯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진우는 빛 속에서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겁에 질린 채 진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진우는 찰나의 후회를 느꼈다. 이 아이를… 혼자 남겨두고 가는 것인가.

    하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이미 시간의 흐름은 그를 붙잡았다.

    눈부신 섬광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차가운 쇳덩이와 같은 감각이 다시 한번 그의 심장을 잠식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검은 정적 속으로 사라졌다.

    ***

    진우는 눈을 떴다.
    폐허가 된 백화점 천장이 아니라, 하늘이 보였다. 푸른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투명한 하늘. 그의 코끝에는 흙먼지와 썩은 냄새 대신, 풀과 흙의 싱그러운 냄새가 스며들었다.
    옆구리의 통증은 여전했지만, 그토록 심하지는 않았다. 그는 급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숲 속에 있었다.

    무성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고, 이름 모를 새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발아래에는 부드러운 흙과 낙엽이 깔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를 쫓던 괴물도, 죽어가는 도시의 잔해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게… 대체…”

    진우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손에 여전히 쥐어져 있는 낡은 시간 도약 장치였다. 그리고 그 옆에,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홀로그램 지도 조각.

    지도는 낡았지만, 희미하게 ‘Green Zone’이라고 쓰여 있는 녹색 영역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녹색 영역 한가운데, 아주 작은 점으로 ‘현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게… 성공한 건가?”

    진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저 폐허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위로 시간 좌표를 찍었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아이의 눈빛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살려달라는, 그 마지막 절규가 그의 무의식에 어떤 목적지를 새겨 넣었을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숲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철근을 고쳐 쥐었다. 그는 이곳이 과거인지, 아니면 또 다른 미래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곳 역시, 그의 생존기는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이곳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폐허에서 보았던 그 아이의 눈동자처럼, 절망 속에서도 반짝이는 작은 빛을.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상처는 아팠지만, 그의 심장은 다시금 뜨겁게 뛰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목적지가 있었다. 살아남고, 찾아야 할 것들이 있었다.
    새로운 생존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햇살이 부드럽게 창문으로 스며드는 고즈넉한 오후였다. 푸른 기와지붕 아래, 고풍스러운 정원이 펼쳐진 이 한옥은 마치 시간을 비껴간 듯한 평온함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오늘,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흐음….”

    나, 김하은은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마루에 앉아 있는 서은유 선배를 흘긋거렸다. 선배는 언제나처럼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햇살이 선배의 은회색 머리카락에 부딪혀 잔잔하게 빛났지만, 그 눈빛은 한없이 깊고 고요했다. 마치 정지된 호수 같았다. 바로 이 평화로운 풍경 안에서, 희대의 밀실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피해자는 이 지역에서 존경받던 도예가, 한지훈 선생. 선생은 생전에 고고한 성품으로 유명했고, 외부인 출입을 극도로 꺼려왔다. 특히 자신만의 작업실 겸 서재인 ‘청운재’만큼은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할 정도로 사생활을 중시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청운재 안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경찰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친 목소리와 무전 소리가 한옥의 고요를 깨뜨렸다. 하지만 선배는 미동도 없었다. 그저 작은 스케치북에 뭔가를 끄적일 뿐이었다.

    “선배, 진짜 밀실 맞아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는 고개만 살짝 돌려 나를 보았다. “네. 완벽한 밀실이죠.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창문도 안에서 걸쇠가 굳게 잠겨 있었으니까요.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럼 범인은 어떻게…?”

    “그게 문제죠.” 선배는 다시 스케치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자살, 외부인 침입 후 자물쇠 위조, 혹은… 처음부터 그 안에 범인이 있었거나.”

    청운재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다시 한번 나의 심장을 죄었다. 나는 선배의 곁에 앉아 눈을 감았다. 코끝을 스치는 흙내음과 오래된 나무 향이 묘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한지훈 선생이 평생을 바쳐 빚어낸 도자기들이 이 집 안 곳곳에 숨 쉬는 듯했다.

    “하은아.”

    선배의 나직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선배는 스케치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갈 수 있겠어요?”

    “네, 네! 물론이죠.” 나는 서둘러 따라 일어났다.

    경찰들의 허락을 받아 청운재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종이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 그리고 희미한 비릿한 쇠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방은 온통 책과 도자기 파편, 그리고 알 수 없는 도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지훈 선생은 자신의 낡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등에는 작은 칼자국이 선명했고, 이미 굳어버린 피가 번져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고, 열쇠는 안에서 그대로 발견되었습니다. 창문도 마찬가지고요.” 현장 담당 형사가 선배에게 상황을 브리핑했다. “환기구도 사람이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좁습니다. 굴뚝은 막혀 있고요.”

    선배는 말없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모든 것을 눈에 담는 듯했다. 선배의 시선은 책장, 낡은 시계, 붓통, 심지어는 바닥에 떨어진 얇은 실오라기 하나까지 훑고 지나갔다. 나는 선배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선생님은 평소에도 항상 이곳 문을 안에서 잠그고 작업을 하셨습니까?” 선배가 형사에게 물었다.

    “네, 그렇다고 합니다. 사생활을 워낙 중요하게 여기셔서요. 잠기지 않은 채로 작업실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주변 사람들이 증언합니다.”

    “흐음….”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요한 눈빛 속에서 뭔가가 빠르게 움직이는 듯했다.

    선배의 시선이 방 한쪽 벽에 놓인 낡은 괘종시계에 닿았다. 큼직하고 육중한 나무 괘종시계는 시간을 잊은 듯 멈춰 있었다. 뻐꾸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 시계는…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습니까?” 선배가 물었다.

    “꽤 오래전부터요. 한지훈 선생이 젊었을 때부터 아끼던 물건이라고 들었습니다. 고장 나서 작동은 안 하지만, 선생의 추억이 담겨 있어 치우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형사가 대답했다.

    선배는 괘종시계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 시계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낡고 매끄러운 나무의 감촉. 나는 그저 선배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선배는 시계의 뒷면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손가락으로 시계 밑의 마루 바닥을 가리켰다.

    “하은아, 이쪽을 보렴.”

    내가 다가가 보니, 괘종시계의 육중한 몸체 바로 아래, 마루 바닥에 희미한 자국이 나 있었다. 아주 미세한 흠집이었다. 마치 무언가 무거운 것이 끌려간 듯한 자국. 하지만 너무나 작아서 언뜻 보면 알아채기 힘들었다.

    “이 자국은…?” 내가 중얼거렸다.

    “괘종시계는 평소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자국은 시계가 최근에 이동했음을 보여주죠.” 선배는 나지막이 말했다. “이 자국은 일반적인 청소나 관리 중 생기는 자국과는 다릅니다. 특정 방향으로, 일정한 힘을 받아 밀린 자국이죠.”

    나는 선배의 말을 따라 그 자국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자 정말로 그렇게 보였다. 뭔가 섬세하고 의도적인 움직임.

    “이 괘종시계는… 단순히 시계가 아닙니다.” 선배는 짐작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경찰들이 놀란 눈으로 선배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배는 괘종시계 옆면에 달린 작은 장식 조각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었다. 언뜻 보면 단순한 문양처럼 보였던 그것이, 실은 정교하게 숨겨진 버튼이었다. ‘딸깍’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묵직한 괘종시계가 앞으로 살짝 밀려나면서, 그 뒤에 감춰져 있던 좁고 어두운 통로의 입구가 드러났다.

    모두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낡고 삐걱거리는 나무 문이, 시계 뒤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 집의 비밀을 아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이곳은 한지훈 선생의 작업실이 증축될 때, 원래 있던 벽을 허물지 않고 만든 비밀 통로입니다. 외부와 연결되어 있죠.” 선배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아마 예전에는 물건을 옮기거나, 급하게 집을 드나들어야 할 때 사용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사용되지 않아 잊혀졌던 곳이겠죠.”

    “그럼 범인은 이 통로를 통해 침입했고… 그리고 이 통로로 도주했다는 말입니까?” 형사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은 이 통로를 통해 들어와 숨어 있었습니다. 한지훈 선생은 평소처럼 작업실 문을 안에서 잠갔죠. 그리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범인은 그때를 노려 선생을 살해하고, 다시 이 통로를 통해 빠져나갔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시계를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는 말입니까? 범인이 도주한 후에?” 내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렇습니다.” 선배는 시계가 밀려나 있던 바닥의 자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괘종시계가 통로를 가린다는 것을 범인 역시 알고 있었을 겁니다. 시계는 겉보기에만 무거워 보이지만, 안쪽에는 낡은 도르래 장치가 연결되어 있었을 거예요. 이 장치를 이용해 시계를 열고 닫았을 겁니다.”

    나는 선배의 설명에 전율했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던 밀실의 트릭이, 이렇게나 평범하고 오래된 물건의 비밀에 숨어 있었다니.

    “범인은 괘종시계가 밀려나면서 생기는 바닥의 자국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미세하지만, 이곳의 유일한 ‘오점’이었죠. 그리고 선생은 평소의 습관대로 문을 안에서 잠갔으니, 외부 침입 흔적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선배는 고요한 눈으로 방 안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날카로운 추리력뿐만 아니라, 모든 비밀을 감싸 안는 듯한 따뜻함마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사건에는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밀실이라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반드시 틈이 있죠. 중요한 건, 그 틈을 발견할 수 있는 인내심과 시선을 가지는 겁니다.”

    선배의 말은 마치 차가운 이성을 넘어,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속삭임 같았다. 한지훈 선생의 억울한 죽음은 변함없겠지만, 적어도 그 죽음이 갇힌 밀실은 이렇게 밝은 햇살 아래 그 모든 비밀을 드러냈다. 어둡고 무거웠던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는 순간, 나는 왠지 모를 해방감을 느꼈다. 이 고요한 한옥에 다시 한번 평온한 기운이 내려앉는 듯했다. 범인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어떻게’라는 가장 큰 물음은 풀렸다. 그리고 그 안도감이, 이 햇살처럼 따스하게 내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 던전 탐험 독립적인 단편 소설

    심연의 미궁, 그 이름처럼 어둠과 미지의 안개가 자욱한 곳. 인간의 발길이 닿기를 거부하는 듯,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거대한 입구가 나를 삼켰다. 김민준, 내 이름은 미궁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 헤매는 사냥꾼이다. 혹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매는 망자일 수도.

    “젠장, 이 놈의 미궁은 끝이 없어.”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답하는 것은 내 그림자뿐이었다. 축축한 바위벽에는 기괴한 덩굴들이 기생하고 있었고, 저 멀리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벌써 며칠째다. 지도를 따라 ‘어둠골짜기’라 불리는 심층부에 진입했지만, 길은 미로처럼 얽혀 있고, 시야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제한적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올랐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림자 속에서 스물스물 기어나온 것은 거대한 그림자 늑대 무리였다. 놈들의 눈은 붉게 빛났고, 날카로운 이빨은 어둠 속에서도 섬뜩하게 번뜩였다.

    “이런… 환영의 늑대 떼인가.”

    녀석들은 물리적인 타격보다는 정신을 좀먹는 공격이 주특기였다. 이미 며칠 밤낮없이 탐색에 지쳐있던 나는 놈들의 환영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휘두르는 검은 허공을 갈랐고, 놈들의 날카로운 발톱은 내 팔과 다리를 스쳐 지나갔다. 고통보다 더한 것은 정신을 갉아먹는 공포감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시야가 흐려졌다.

    마지막 일격이 내 어깨를 강타했고, 나는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검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망할, 여기서 끝인가. 눈꺼풀이 천천히 감기려 할 때, 시야 저편에서 칠흑 같은 형체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늑대들보다도 더 검고, 바람처럼 가벼운 존재.

    그것은 그림자였다. 그러나 그 그림자에는 묘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늑대 떼가 일제히 그 형체를 향해 돌진했지만, 그 그림자는 마치 어둠의 일부인 양 늑대들의 공격을 흘려내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눈앞에 멈춰 섰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은 어둠 속으로 녹아드는 듯했고, 새벽하늘을 담은 듯한 눈동자는 형용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품고 있었다. 날카롭지 않으면서도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자처럼 흐릿한 윤곽의 존재. 그것은 요정이었다. 심연의 미궁에만 산다는 전설 속의 ‘그림자 요정’.

    인간들에게 그림자 요정은 단지 ‘강력한 마물’일 뿐이었다. 감정 없는 파괴자. 그러나 내 눈앞의 존재는 달랐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경계심과 호기심, 그리고 내가 감히 읽을 수 없는 미묘한 감정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나에게 손을 뻗었다. 창백한 손가락 끝이 내 상처 난 어깨에 닿는 순간, 나는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죽음의 예감 대신, 온몸을 휘감는 차가운 그림자의 온기. 늑대 떼가 다시 나를 향해 달려들 때, 그녀는 나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우리가 서 있던 자리는 마치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늑대들은 허공을 할퀴며 혼란스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의식을 완전히 잃기 직전, 나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바람 소리 같은 낮은 목소리를 들었다. 너무나도 낯설고 아름다운 소리였다.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느 동굴 속에 누워 있었다. 동굴이라기보다는, 깎아지른 절벽에 숨겨진 작은 틈새 같았다. 빛 한 점 없는 곳이었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니 희미하게 빛나는 이끼들이 벽을 수놓고 있었다.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출혈은 없었다. 대신 차가운 그림자 기운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 그녀가 있었다.

    그림자 요정.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나를 구해준 존재. 그녀는 가만히 앉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희미하지 않은, 또렷한 모습으로. 칠흑 같은 옷은 그녀의 피부처럼 자연스러웠고, 머리 위로는 마치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 같은 작은 보석들이 박혀 있었다.

    “너… 네가 날 구해준 건가?”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기울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손짓으로 내 어깨를 가리키고, 그녀를 가리켰다. 그녀는 내 손을 따라 자신의 손을 들더니,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그림자 나비를 만들어냈다. 나비는 내 손끝에 살포시 앉았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실리아…”

    무심코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녀에게 어울리는 이름 같았다. 그녀는 그 이름을 따라 했다.

    “실리아?”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바람 소리 같았지만, 분명히 내 말을 따라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기쁜 듯 보였다.

    며칠이 더 흘렀다. 나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그녀는 내가 떠나지 못하도록 지키는 듯했다. 사실,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이 미궁에서 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는 그녀뿐이었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눈을 통해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내가 던전에서 가지고 있던 말린 고기와 비상식량을 그녀에게 건네자, 그녀는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이내 작은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처음 맛보는 음식인 양 신기해하는 모습이었다.

    “맛있지? 인간의 음식이야.”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다시 한 조각을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먹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씩 스며들었다. 나는 미궁의 위험으로부터 그녀가 나를 보호해 주는 것을 느꼈고, 그녀는 내 작은 호의와 따뜻함에 반응했다.

    어느 날 밤, 나는 내 이야기를 해주었다. 과거의 상실, 미궁 깊숙한 곳에 숨겨진 전설 속 유물을 찾아 헤매는 이유. 그녀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 눈빛에서 읽어냈을 것이다. 고통과 절망, 그리고 한 줄기 희망을.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그 차가운 손에서 나는 전에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을 느꼈다.

    그녀 또한 나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녀는 나를 이끌고 동굴을 벗어났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몽환의 수정굴’이었다.

    동굴 안은 빛으로 가득했다. 아니, 빛이라기보다는 수정들이 뿜어내는 오색찬란한 영롱한 기운이었다. 푸른색, 보라색, 붉은색의 수정들이 서로 다른 빛을 뿜어내며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그곳은 어둠 속의 오아시스 같았다.

    “놀랍군…”

    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실리아는 내 옆에 서서 그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자 요정은 빛을 싫어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보다 경외감이 더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빛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나 다른 존재였지만, 동시에 서로가 간절히 원하던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고 있었고, 그녀는 어둠 속에서 빛을 동경하고 있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서로에게 끌리는 자석 같았다.

    ***

    미궁 깊은 곳에서 예상치 못한 재앙이 시작되었다. 다른 인간 탐험대가 미궁의 심층부까지 침투한 것이다. 그들은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용병 집단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표 중 하나는 ‘고대 마물 그림자 요정 사냥’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젠장, 여기까지 오다니!”

    나는 실리아를 데리고 급히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들의 추격은 집요했다. 며칠 밤낮을 피해 다녔지만, 결국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거대한 지하 협곡의 끝,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거기다! 그림자 요정이다!”

    용병 대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놈들은 실리아를 에워쌌다. 활과 마법 지팡이가 그녀를 겨냥했다. 실리아의 몸은 그림자처럼 흐릿해지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녀의 주위에 어둠의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민준, 도망쳐!”

    갑자기 실리아의 입에서 내 이름이 또렷하게 터져 나왔다. 그녀는 날 구해준 이후로 인간의 말을 연습했던 것이다. 그녀의 눈은 나에게 괜찮으니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나는 검을 움켜쥐고 그녀의 앞으로 나섰다.

    “저 존재는 마물이 아니다!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괴물이 아니라고!”

    “무슨 헛소리냐! 인간을 현혹하는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마라, 김민준! 저 요정은 우리 모두의 적이다!”

    용병 대장이 비웃었다. 놈들은 나까지 함께 처리할 기세였다. 이제는 내가 실리아를 지켜야 할 때였다. 우리는 인간과 요정이라는 종족의 벽을 넘어, 서로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를 막으려면, 죽음을 각오해라!”

    나는 검을 휘둘렀다. 용병들과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싸웠다. 실리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숫적 열세는 어쩔 수 없었다. 팔과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고, 나는 다시 한번 무릎을 꿇었다.

    그때였다. 실리아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마법 화살들이 그녀의 몸을 통과했지만, 마치 그림자에 닿은 듯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그림자들이 거대한 손톱처럼 변하더니, 용병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실리아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그녀는 그림자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용병들을 제압해 나갔다. 하지만 그만큼 그녀의 존재는 인간들에게 더욱더 명확한 위협으로 각인될 터였다. 결국 용병들은 패퇴했고, 우리는 다시 둘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싸움이 끝난 후, 실리아는 내 옆에 주저앉아 떨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슬픔과 함께 깊은 고민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인간을 해친 것이다. 인간들 사회에서 그녀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내 종족과 등을 돌렸다.

    “괜찮아, 실리아.”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나는 그 안에서 뜨거운 생명력을 느꼈다.

    “세상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나는 너를 버릴 수 없어.”

    실리아는 내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너의 빛… 나에게는 세상이야.”

    더듬거리는 서툰 한국말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더욱 굳게 맞잡았다. 인간과 요정, 빛과 그림자.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금지된 사랑. 하지만 이 미궁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안식처이자 희망이었다.

    우리는 몽환의 수정굴로 향했다. 그곳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살아 숨 쉬는 곳. 그 수정들이 뿜어내는 영롱한 빛은 마치 우리의 금지된 사랑을 비추는 등불 같았다. 세상의 모든 시선과 판단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둘만의 세상을 만들기로 약속했다. 심연의 미궁 가장 깊은 곳, 빛과 그림자가 조화를 이루는 그곳에서, 우리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터였다. 우리의 사랑은 이 미궁의 어둠 속에서 피어난 한 떨기 꽃처럼, 신비롭고 영원히 빛날 것이었다.

  • 에픽 하이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회색산맥의 거친 바람은 언제나 얄궂었다. 뼛속까지 시린 칼바람은 고산지대의 폐허가 된 마을들을 훑고 지나가며 잊힌 비명 소리를 실어 날랐다. 태양은 차가운 강철 빛으로 대지를 비추었고, 거대한 아스칼라 제국의 그림자는 이 모든 풍경을 집어삼킬 듯 드리워져 있었다.

    마루는 녹슨 곡괭이를 어깨에 멘 채 마을로 향했다. 며칠째 이어진 탄광 노역으로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앙상한 얼굴의 마을 사람들이 띄엄띄엄 길가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해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제국군 병사들이 말발굽 소리를 내며 마을 어귀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검은 갑옷과 붉은 깃발은 죽음의 전령이나 다름없었다.

    “또 약탈인가?” 마루의 등 뒤에서 현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흰 머리카락만큼이나 주름진 얼굴은 언제나 그랬듯 담담했지만, 눈빛 속에는 억눌린 분노가 서려 있었다.

    “약탈보다 더한 게 올 겁니다, 어르신. 저번에 징집했던 젊은이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마루는 말을 잇지 못했다.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제국은 끝없는 정복 전쟁을 위해 변방의 젊은 목숨들을 기꺼이 갈아 넣었다.

    바로 그때, 제국군 장교 한 명이 말 위에서 고고하게 내려다보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들으라! 회색산맥의 비천한 것들! 제국의 명령이다! 당장 열여섯에서 스무 살 사이의 남녀는 모두 징집에 응하라! 거부하는 자는 반역으로 간주하여 즉결 처형에 처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절망이 스쳤다. 어린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드는 어머니들의 통곡이 터져 나왔다. 마루의 옆에 서 있던 현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손녀딸, 아린이 바로 그 나이대에 속했다.

    “이런 개 같은…” 마루는 주먹을 꽉 쥐었다. 탄광에서 겨우 번 돈마저 세금으로 빼앗기고, 이제는 제국의 썩어빠진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들마저 빼앗기려 했다.

    “아버지!”

    날카로운 목소리에 마루의 시선이 움직였다. 아린이었다. 제국군 병사들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건장한 병사들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 비겁한 놈들! 손 떼지 못해!” 아린은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 그녀의 눈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장교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오, 이 작은 암캐가 제국의 권위에 도전하는가? 본보기를 보여주거라!”

    병사 한 명이 아린의 뺨을 후려쳤다. 아린은 휘청거리며 쓰러졌지만, 이내 독기 어린 눈으로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마루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눈앞의 광경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곁에 있던 낡은 곡괭이를 쥔 그의 손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그만둬라!” 마루의 외침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병사들이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장교의 눈빛에는 짜증과 함께 비웃음이 서렸다.

    “저 천한 것에게 목줄을 채워라! 감히 내 앞에서 소리 지르다니!”

    병사 두 명이 마루에게 달려들었다. 마루는 곡괭이를 휘두르는 대신, 탄광에서 익힌 재빠른 몸놀림으로 첫 번째 병사의 칼을 피했다. 그리고 이어진 발차기로 병사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두 번째 병사가 칼을 휘두르자, 마루는 곡괭이 자루로 칼날을 막아냈다. ‘쨍그랑!’ 하는 금속음이 마을에 울려 퍼졌다.

    “이런 놈이! 죽여라!” 장교가 분노로 외쳤다.

    마을 사람들이 숨죽이며 마루를 지켜보았다. 그들 모두의 눈에는 두려움과 함께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마루의 등 뒤에서 현 노인이 조용히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마루야, 뒤를 조심해!” 아린의 외침과 함께, 현 노인이 던진 돌멩이가 장교의 머리를 강타했다. 장교는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순간의 혼란. 마루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곡괭이를 휘둘러 나머지 병사들을 제압했다.

    “모두 들으라!” 마루는 피 묻은 곡괭이를 치켜들고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광야를 울리는 사자의 포효 같았다. “우리는 더 이상 제국의 개가 아니다! 우리의 자식들을 빼앗기고, 우리의 땅을 유린당하고, 우리의 존엄을 짓밟히는 것을 더 이상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의 외침에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두려움 속에서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저 거대한 제국에 맞설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비록 낡은 도구와 맨몸뿐이지만, 우리에게는 빼앗기지 않을 삶과 지켜야 할 가족이 있다!”

    아린이 쓰러진 장교의 옆에 놓인 칼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눈은 이제 두려움이 아닌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마루 말이 맞아! 우리는 더 이상 당하지 않아!”

    한 명, 두 명. 망설이던 마을 사람들이 제국군 병사들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는 낡은 농기구와 돌멩이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더 이상 절망에 젖어 있지 않았다. 분노와 저항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날 밤, 회색산맥의 작은 마을에선 피와 불꽃이 튀었다. 제국군 병사들은 무모한 평민들의 저항에 당황했다. 숫적으로는 압도적이었으나, 삶의 전부를 걸고 달려드는 이들의 기세에 밀렸다. 몇몇 병사들이 쓰러졌고, 나머지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마루는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채기와 함께 환희와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알고 있었다.

    “이제 어쩌지?” 한 젊은이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국은 가만있지 않을 거야.”

    현 노인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루에게 다가왔다. “정답은 없다, 아이야. 하지만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그는 마루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너희 아버지에게서도 이런 불꽃을 보지 못했다. 네가 이들을 이끌어야 한다.”

    아린이 피 묻은 칼을 든 채 마루 옆에 섰다. “어르신 말이 맞아, 마루. 이제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 싸워서 죽든, 앉아서 죽든.”

    “앉아서 죽는 건 내 체질이 아니다.” 마루는 피식 웃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먹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별들이 반짝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이 산맥에 자유의 깃발을 꽂는 것.”

    그는 현 노인과 아린, 그리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아직 두려움이 남아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내일 동이 트면, 우리는 이 회색산맥을 넘어 깊은 곳으로 갈 것이다.” 마루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대 요새가 있다. 제국군이 찾지 못하는 곳, 우리만의 성지가 될 곳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힘을 기르고, 이 거대한 제국에 맞설 불꽃을 지필 것이다.”

    현 노인의 눈이 커졌다. “고대 요새라니? 설마, ‘바람의 보루’를 말하는 게냐?”

    마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어르신. 전설 속에서만 존재했던 그곳이 우리의 시작점이 될 겁니다.”

    그 순간, 마을의 모든 눈빛이 마루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평범한 농부이자 광부였던 마루에게서, 자신들을 짓누르던 거대한 그림자에 맞설 단단한 기둥을 보았다.

    새벽녘,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마루와 아린, 현 노인을 비롯한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이 회색산맥의 험준한 오솔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등 뒤로는 불타버린 마을의 잔해가 검은 연기를 피어 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지나간 삶에 대한 작별이자, 새로운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린이 마루에게 물었다. “마루, 정말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제국은 너무나 거대하고, 우리는 너무나 작아.”

    마루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산맥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아린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이기려고 시작하는 싸움은 없어. 우리는 그저 우리의 자리를 찾고, 우리의 삶을 지키려 할 뿐이다.”

    그의 말에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산맥의 깊숙한 곳을 향했다.

    그들은 걸었다. 거친 바위와 날카로운 자갈밭을 넘고, 차가운 계곡물을 건넜다. 굶주림과 피로가 엄습했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현 노인은 가끔 멈춰 서서 고대의 비석이나 이끼 낀 바위를 살펴보며 길을 안내했다. 그는 전설 속 ‘바람의 보루’로 향하는 비밀 통로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며칠 밤낮을 걸어 마침내 그들은 거대한 바위 절벽 아래에 도착했다. 절벽은 마치 하늘을 뚫을 듯 솟아 있었고, 그 중간에 숨겨진 듯한 거대한 동굴 입구가 그들을 맞이했다. 현 노인이 앞장서서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동굴의 냉기가 그들의 몸을 감쌌다.

    동굴 안은 생각보다 넓고 깊었다. 어두운 통로를 한참 걸어 들어가자, 거대한 지하 공동이 나타났다. 오래전에 버려진 고대의 요새. 거대한 석상들이 늘어서 있었고, 낡은 무기와 방패들이 먼지 속에 잠들어 있었다. 이곳은 수백 년 전, 이 산맥의 선조들이 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최후의 거점이었다고 전해졌다.

    “이곳이 바로, 바람의 보루입니다.” 현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의 조상들이 피 흘려 지켰던 땅이자, 제국의 그림자가 닿지 못했던 유일한 안식처였지.”

    마루는 요새의 중앙에 서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뚫린 구멍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그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신호 같았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마루는 동굴 벽에 박힌 낡은 깃대 하나를 뽑아들었다. 깃대에는 이미 색이 바랜 천 조각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자신의 옷 한 조각을 찢어냈다. 그리고는 그 천을 낡은 깃대에 묶었다. 평범한 옷 조각이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그것은 새로운 반란의 깃발이 되었다.

    “우리는 약하지만, 더 이상 홀로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잘것없지만, 이 거대한 제국의 심장에 박힐 가시가 될 것입니다.” 마루의 목소리는 지하 공동에 울려 퍼졌다. “우리는 평범한 이들입니다. 하지만 이 평범한 이들의 분노가 언젠가 저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아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마루의 옆에 섰다. 현 노인과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맹렬한 투지와 희망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거대한 아스칼라 제국은 아직 알지 못했다. 회색산맥 깊은 곳, 바람의 보루에서 작은 불씨 하나가 타올랐다는 것을. 그 불씨가 언젠가 거대한 제국을 집어삼킬 들불이 될 것이라는 것을. 평범한 이들의 반란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잿빛 하늘 아래, 류 건은 낡은 방진 마스크 너머로 삭막한 풍경을 응시했다. 무너진 고층 빌딩의 뼈대만이 흉물스럽게 솟아 있었고, 바람은 녹슨 철근 사이를 휘돌며 기괴한 비명 소리를 토해냈다. 사방을 뒤덮은 먼지는 한때 번성했던 문명의 흔적을 집어삼킨 지 오래였다.

    사흘째였다. ‘강철 벽 마을’을 나선 지. 먹을 것이라곤 오래 전 폐기된 군용 식량 몇 조각과 말라 비틀어진 열매뿐이었다. 기름때 낀 장갑으로 녹슨 철골을 짚고 올라선 순간, 류 건의 눈에 섬광이 스쳤다. 저 멀리, 허물어져 가는 송신탑의 잔해 한가운데서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길을 재촉했다. 이런 황무지에서 전원이 들어오는 물건이라니, 드문 일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빛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기적처럼 전원을 유지하고 있는, 빛바랜 홀로그램 화면이었다. 지직거리는 노이즈 속에서, 흐릿한 글자들이 떠올랐다.

    — 천하를 건 무예 대전.
    — 승자에게 세상의 핵이 주어지리라.
    — 참가 자격: 살아남은 모든 이.
    — 개최일: 한 달 뒤, 황금 사막 중앙.

    세상의 핵? 류 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금 사막은 이곳에서 수천 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곳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여정이었다. 화면은 곧 잔상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피폐한 세상에서 이런 대전이라니. 무슨 의미가 있을까.

    **

    강철 벽 마을은 이름처럼 거대한 철판과 폐차량들로 쌓아 올린 장벽 뒤에 숨어 있었다. 녹슨 강철문은 스산한 소리를 내며 열렸고, 문지기가 류 건을 발견하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젠장, 또 너였나. 류 건. 살아 돌아올 줄 알았지만, 매번 불안하게 만든단 말이지.”

    류 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흙먼지와 사람 냄새가 뒤섞인 공기. 그게 삶의 냄새였다. 장터에는 몇 안 되는 상인들이 물물교환을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흙바닥에서 재롱을 피웠다. 이곳은 대재앙 이후, 인류가 겨우 명맥을 잇고 있는 작은 오아시스였다.

    그는 가장 먼저 촌장 막사를 향했다. 마을의 어르신이자 유일하게 옛 문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막사 문을 열자, 담뱃대 연기가 자욱했다. 백발이 성성한 촌장 심운이 구부정한 허리로 앉아 약초를 다듬고 있었다.

    “어르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류 건의 말에 심운 촌장이 고개를 들었다.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형형한 눈빛이 빛났다.

    “돌아왔군. 무사해서 다행이다. 또 어디서 희한한 것을 주워왔나?”

    “희한하다기보단… 심상치 않은 것입니다.”

    류 건은 자신이 발견한 홀로그램 메시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심운 촌장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윽고 촌장은 담뱃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의 핵이라… 그게 아직 존재했다니.”

    촌장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르신, 세상의 핵이 무엇입니까?”

    심운 촌장은 류 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회한과 우려가 교차했다.

    “핵은 말이다… 우리 선조들이 대재앙을 막기 위해 봉인했던 힘의 원천이자, 동시에 대재앙을 일으킬 수도 있는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었어. 세상의 모든 기운을 응축한 결정체. 그걸 손에 넣는 자는… 이 황폐한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고, 남은 모든 것을 소멸시킬 수도 있지.”

    류 건은 묵묵히 들었다. 그제야 무예 대전의 의미가 조금씩 가슴에 와닿았다.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었다. 남은 인류의 존망이 걸린 일이었다.

    “하지만 왜 지금에서야…?” 류 건이 물었다.

    “아마도 봉인이 약해진 게지. 혹은… 세상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신호일 수도 있고.” 심운 촌장이 고개를 저었다. “무림 고수들이 들끓겠군. 세상이 이 모양이 되었어도, 아직 살아남은 괴물들이 많지.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의 핵을 차지하려 들 거야.”

    류 건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수없이 단련하고 상처 입었던 손. 이 손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은 고작 자신과 마을의 작은 울타리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황폐해진 세상에서 살아남은 자로서, 그리고 마을의 유일한 무인으로서, 그는 묵묵히 싸워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밤이 깊어지자, 강철 벽 마을에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촌장이 홀로그램 메시지의 내용을 공개한 것이다. 술렁이는 사람들, 공포와 기대가 뒤섞인 시선들. 어떤 이들은 무모한 짓이라며 반대했고, 어떤 이들은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다며 흥분했다.

    그날 밤, 류 건은 자신의 오두막에서 홀로 검을 닦았다. 검신은 낡고, 손잡이는 닳아 있었지만, 검날만큼은 밤하늘의 달빛을 머금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과거를 떠올렸다. 폐허 속에서 홀로 살아남아 검을 잡았던 순간. 스승을 잃고 홀로 강호의 파편 속을 헤매던 나날들. 그때의 고통과 절망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

    “류 건아.”

    오두막 문이 열리고 심운 촌장이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단단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너밖에 없다. 이 마을에서, 아니… 어쩌면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 핵의 힘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이는.”

    류 건은 촌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텅 빈 눈동자에 날카로운 의지가 서렸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이 길을 택했다. 고독한 무인의 길을.

    “어르신,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류 건은 낡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한때 모든 것을 잃었던 상실감과, 다시는 소중한 것을 잃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이 휘몰아쳤다. 세상의 운명을 건 대전. 류 건은 그 거대한 파도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한 달 뒤, 황금 사막으로.

  • 스페이스 오페라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어둠이 시작되는 곳의 그림자

    아스트룸 마법 학원의 하늘은 언제나 별빛으로 가득했다. 거대한 수정 돔 아래 펼쳐진 제1성운 강의실. 투명한 천장 너머로는 은하의 띠가 유려하게 흘렀고, 그 아래에선 수백 명의 학생이 저마다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곳은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마법의 정점, 우주를 가로지르는 마법 문명의 심장이었다. 하지만 이아란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버거웠다.

    “아란, 집중해. 오늘은 ‘성운 도약’의 기초 실습이야. 자칫하면 차원 오류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옆자리에서 유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속삭였다. 그녀는 언제나 활기차고 매사에 거침없는 아이였지만, 마법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진지했다.

    “알아, 유진. 너무 긴장돼서 그래. 내 코어는 왜 이렇게 늘 출력이 약할까.”

    아란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마법 코어, 즉 마력을 저장하고 방출하는 신체 기관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코어는 늘 섬세하고 미약했다. 타고난 마법 재능은 분명 있었지만, 폭발적인 힘보다는 미세한 감각에 특화된 종류였다.

    강단에 선 레오나르도 교수는 은회색 머리를 쓸어 올리며 홀로그램 지도를 펼쳤다. 거대한 성운 하나가 강의실 중앙에 떠올랐고, 수십 개의 점성 이동 경로가 빛의 선으로 표시되었다.

    “자, 제군들. 성운 도약은 마법진과 정신 집중, 그리고 코어의 안정적인 출력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목표 지점을 설정하고, 마력의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하라. 첫 목표는 저, 작은 소행성이다.”

    교수의 지시에 따라 모두가 지팡이를 들었다. 아란도 심호흡을 하며 손안에 감긴 보급형 마법 지팡이를 쥐었다. 은은한 빛이 지팡이 끝에서 피어올랐고, 그녀의 의지에 따라 마법진이 허공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성운 도약: 초소형.’**

    작은 소행성 하나를 목표로 삼아 마력을 불어넣었다. 미약하지만 꾸준한 힘. 아란의 마법진은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간신히 형태를 유지했다. 주변에서 ‘쉬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학생들이 목표 지점으로 순간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성공한 학생들은 환호했고, 실패한 학생들은 아쉬움에 탄식했다.

    아란은 마력을 더 끌어올리려 애썼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지팡이 끝에서 빛이 뻗어 나가는 순간, 갑자기 강의실 전체를 뒤흔드는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찌지직—!**

    마법진의 안정성이 깨지고, 아란의 시야가 일그러졌다. 평소라면 단순한 마법 출력 오류로 끝났을 상황이었지만, 오늘따라 뭔가 달랐다. 진동은 마치 거대한 기계가 지하 깊은 곳에서 울부짖는 듯한, 으스스한 공명음과 함께 찾아왔다. 찰나의 순간, 아란은 자신의 시야 한구석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붉은색, 아니, 피와도 같은 검붉은 기운이 마치 거대한 거미줄처럼 공간을 가로지르는 환영이었다.

    “아란? 괜찮아? 왜 이렇게 얼굴이 창백해?”

    유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진동은 사라졌고, 다른 학생들은 대부분 자신의 마법 오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레오나르도 교수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이상하군. 오늘따라 마력 흐름이 불안정하네.”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란은 겨우 몸을 가다듬고 마법진을 다시 그렸다. 이번에는 성공했지만, 방금 보았던 그 환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너무나 선명했고, 너무나 불길했다.

    점심시간, 아란은 식당에서 유진과 나란히 앉아 샐러드 우주식을 깨작거렸다. 화려한 식당 홀은 각양각색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아란, 아까 그 진동 말이야. 너도 느꼈지? 뭔가 이상했어. 평범한 마력 오류는 아니었다고.” 유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응. 난 뭔가 섬광 같은 걸 봤어. 피 같은 붉은색… 엄청 불길했어.”

    유진은 눈을 크게 떴다. “피 같은 붉은색? 난 그냥 공간 왜곡 같았는데. 흐음… 어쩌면 마력 흐름이 불안정해서 다들 환각을 본 걸 수도 있어. 레오나르도 교수님도 그냥 불안정하다고만 하셨잖아.”

    “하지만… 뭔가 너무 생생했어. 마치…” 아란은 말을 흐렸다.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 거대한 존재의 꿈틀거림 같았다.

    그때, 등 뒤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몇몇 선배들의 대화가 아란의 귀에 들어왔다.

    “어제도 그랬다며? 지하 7층에서 또 감지되었다는 소문이 돌던데.”

    “쉿, 세리나 선배! 그거 함부로 입 밖에 내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애초에 그 구역에 얼씬도 하지 말았어야지. 대체 그게 뭐길래 이 난리람?”

    아란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아스트룸 학원의 고학년 선배들로, 다들 얼굴에 불안과 호기심이 뒤섞인 표정을 띠고 있었다. 특히 ‘세리나 선배’라고 불린 여학생은 검은 머리를 단정히 묶고 차분한 인상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 자신들의 대화를 듣는 것을 눈치챈 듯, 아란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다들 식사해.” 세리나 선배는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주변은 순간 정적이 흘렀다.

    유진은 아란의 팔꿈치를 툭 쳤다. “뭐야, 왜 저래? 설마 우리한테 하는 소리야?”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자기들끼리 하는 이야기 같은데… 근데 지하 7층? 아스트룸 학원에 그런 곳이 있었어?”

    유진은 눈을 깜빡였다. “글쎄? 지하라고 해봐야 훈련장이나 마법 연구실 같은 곳 아닌가? 7층까지는 못 들어본 것 같은데. 아마 그냥 소문이겠지.”

    하지만 아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까의 진동, 환영, 그리고 선배들의 대화까지. 모든 것이 불길하게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아란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학원 생활의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안했다. 잠시 바람이라도 쐴 겸, 생활관을 나섰다. 복도는 늦은 시간이라 고요했고, 밤하늘의 별빛이 투명한 창문을 통해 실내를 은은하게 밝혔다.

    무심코 발걸음이 향한 곳은 학원의 오래된 도서관이었다. 첨단 기술로 유지되는 아스트룸 학원에도, 과거의 지식이 담긴 서고는 종이책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곳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넓은 열람실을 지나 가장 깊은 서고로 향했다.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곳. 그녀는 고대 마법이나 학원 역사에 관한 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손에 잡힌 낡은 책 한 권. 표지에는 아무런 제목도 없었고, 마치 손때가 닳아 없어진 듯 희미했다.

    아란은 조심스럽게 책을 펼쳤다. 안에는 낯선 고대어로 쓰인 글자들이 가득했고, 이해할 수 없는 도형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한 페이지에서 그녀의 시선이 멈췄다. 거대한 학원 건물 도면 같은 그림이었는데, 지하층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아란이 알던 학원의 지하층은 지하 3층까지만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했다. 4층부터는 고위 교수진만 접근할 수 있는 극비 구역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이 도면에는… 지하 7층, 아니, 그 너머까지 이어지는 미지의 공간이 그려져 있었다. 특히 지하 7층의 한 구역은 다른 곳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로, 마치 거대한 봉인처럼 겹겹이 잠겨 있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봉인의 한가운데에는, 그녀가 낮에 보았던 그 불길한 붉은색 기운과 흡사한 문양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심장박동처럼 묵직하고 규칙적인 진동이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아란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이 미세하게 떨렸다. 진동은 점점 강해졌고, 공기 중에는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기묘한 마력이 감돌았다. 낮에 느꼈던 그 불길한 기운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녀는 책을 가슴에 품고 숨을 죽였다. 진동은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것처럼, 살아있는 무언가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기운은, 지하 7층의 봉인된 구역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아란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이 아스트룸 마법 학원의 지하에는, 단순한 연구실이나 훈련장이 아닌, 훨씬 더 거대하고 끔찍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곳으로 이끌리는 듯한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낮에 보았던 그 붉은 환영, 선배들의 속삭임, 그리고 이 오래된 책이 가리키는 곳.

    아스트룸 마법 학원의 화려한 별빛 아래, 어둠이 깊어지는 곳에서, 금기의 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아란은, 그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그림자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학원의 지하에는, 세상이 알면 안 될 끔찍한 비밀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비밀이 이제,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 크툴루 신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엘데론 마법학원.

    그 이름은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는 마법사들의 요람이자, 동시에 수백 년의 비밀을 품고 침묵하는 거대한 미궁이었다. 첨탑은 구름을 뚫고 솟아 있었고, 교정을 감싸 안은 마나의 물결은 밤하늘에 푸른 오로라를 수놓았다. 그러나 서하준의 시선은 늘, 이 화려한 전경 너머, 햇볕 한 조각 들지 않는 대도서관의 심연으로 향했다.

    그는 천재였다. 마법 이론과 고대 언어 해석에 있어선 학원 내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때로 타인과의 벽을 만들었다. 그는 현실의 경쾌한 마법보다, 먼지 쌓인 고문서 속에서 잠든 진실을 탐하는 것에 몰두했다. 그리고 오늘, 그가 파고들던 고대 주술학의 권위자, 멜키오르 교수가 드물게 그를 불렀다.

    “하준, 자네의 논문은 언제나 탁월하지만… 이번 연구는 너무 과감해.” 멜키오르 교수는 돋보기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다. “잊혀진 공간 마법에 대한 자네의 가설은 흥미롭지만, 이론은 이론일 뿐이야. 실체 없는 것을 쫓는 건 위험한 일이지.”

    하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실체 없는 것이라 단정하기엔, 고대 기록에 너무나 많은 암시가 있습니다. 학원 지하에 거대한 미지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내용도 끊임없이 등장하고요.”

    멜키오르 교수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건 그저 어린 학자들이 즐겨하는 공상에 불과해. 아니면 고대의 건축 양식에 대한 은유이거나.” 그는 한숨을 쉬더니 책상 서랍에서 낡은 양피지 한 조각을 꺼냈다. “이건… 자네 할아버님의 유품이야. 자네가 입학하던 해에 내게 맡기셨지. 그분도 자네처럼 이상한 것에 집착하셨던 모양이야.”

    양피지에는 알 수 없는 기호와 희미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학원 대도서관의 배치도처럼 보였지만, 지하 구역이 상상할 수 없는 깊이로 뻗어 내려가고, 그 끝에는 거대한 원형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대체…?” 하준의 손이 떨렸다.

    “금기로 알려진 것들을 연구하는 건 자네의 자유다. 하지만, 그 대가를 감당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이 지도는 그저 낡은 종이 한 장에 불과하지만, 자네의 어리석은 호기심을 부추길까 염려되는군.” 멜키오르 교수의 목소리는 경고이자 동시에 체념에 가까웠다.

    그날 밤, 하준은 대도서관 제7구역에 숨어들었다. ‘고문서 보관실 제7구역’. 학원 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숙하며, 가장 먼지 쌓인 곳. 마나의 흐름이 불안정해 접근 자체가 권장되지 않는 곳이었다. 벽에 늘어선 낡은 서가들은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종이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멜키오르 교수에게 받은 양피지 지도를 따라, 특정 서가 뒤편의 벽을 조사했다. 지도는 특정 구간에서 ‘고요한 울림’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의 손이 낡은 석벽을 스쳤을 때, 손바닥 아래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일반적인 마나 흐름과는 다른, 아주 오래되고 잊혀진 마법의 잔향이었다.

    그는 벽에 손을 대고 집중했다. 그의 마나가 벽 속으로 스며들자, 거대한 석벽 전체가 천천히,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육중한 마찰음이 낡은 공간을 가득 채웠고, 곧 그의 앞에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기는 차갑고 습했으며, 흙과 돌 냄새 너머로, 이전에 맡아본 적 없는 묘한 비린 향이 섞여 있었다.

    “정말… 이런 곳이 있었단 말이야.”

    하준은 작은 마나석 램프를 꺼내 들었다. 램프가 어둠을 밝혔다. 통로는 좁고 굽이쳤다. 거친 돌벽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기호들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그 형상들은 어떤 동물이나 식물도 아닌, 비현실적인, 이질적인 도형의 연속이었다. 그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서 불쾌한 비명이 울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통로는 한없이 아래로 이어졌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시간 감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램프의 희미한 불빛은 통로 양옆으로 난 작은 석실들을 잠깐씩 비췄다. 석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어딘가 비틀리고 어긋난 것 같은 이상한 공기가 맴돌 뿐이었다.

    마침내, 통로는 거대한 지하 공간으로 이어졌다. 하준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공간은 상상 이상으로 넓었고, 램프의 불빛으로는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었다. 축축한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 속에서 알 수 없는 존재의 시선이 그를 꿰뚫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 전신을 덮쳤다.

    발아래의 땅은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그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의 제단이 놓여 있었다. 제단은 새까만 돌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표면에는 통로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기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문양들은 흡사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그의 눈이 그것들을 좇는 순간, 알 수 없는 현기증이 몰려왔다.

    하준은 숨을 멈추고 제단으로 다가갔다. 제단 위에 놓인 것은, 그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검은색 오라가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주먹만 한 크기의 광물 조각. 광물은 기하학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 어떤 결정 구조도 떠올릴 수 없는, 완벽하게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그의 마나를 뒤흔들고, 그의 정신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 광물에 시선을 고정한 순간, 하준의 뇌리에 수많은 이미지와 소리가 폭풍처럼 밀려들어 왔다.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차원의 비명, 우주적 심연의 냉혹한 광경, 그리고 거대한 촉수가 별들을 휘감는 환영…. 그의 정신은 한없이 약해지는 얇은 유리 조각처럼 흔들렸다.

    그때, 제단 뒤편의 거대한 벽면이 희미한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빛은 점점 강렬해지며, 벽에 새겨진 거대한 그림을 드러냈다. 그림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존재를 묘사하고 있었다. 뒤틀린 형상의 거대한 촉수들이 심연 속에서 솟아나, 하늘을 가리고 별들을 삼키고 있었다. 그 존재의 중심에는 형언할 수 없는 눈들이 수없이 박혀 있었고, 그 눈들은 하준을 직접 응시하는 듯했다.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기록이었다. 존재의 본질을 담은 문.

    그 순간, 하준은 깨달았다. 학원의 지하에 숨겨진 것은 단순한 고대 유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원 너머의 공포, 이성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진실로 향하는 문이었다. 그리고 그 문은 지금, 그의 눈앞에서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그의 눈은 공포와 경외감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보았다. 벽의 그림 너머에서,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거대한 그림자가 심연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숨을 들이쉬려 했으나, 폐는 거부했다.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은 굳어버렸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그는 금기를 보았다. 그리고 금기는 그를 보았다.
    차갑고 거대한 그림자가 그의 발치에 드리워졌다. 그는 심연의 바닥에 서 있었다.
    그리고 심연은 그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 사이버펑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폐기물 속의 조약돌

    메가시티의 7구역은 늘 젖어 있었다. 천장처럼 드리워진 상층부 고층 빌딩들의 불빛이 아래로 쏟아지는 인공 비와 공해와 뒤섞여 알록달록한 기름때처럼 반사되는 곳. 류진은 그 눅눅한 공기를 후드 안으로 밀어 넣으며 습관처럼 낡은 작업복 소매로 사이버네틱 안구를 닦았다. 왼쪽 눈꺼풀 아래로 심어진 싸구려 임플란트는 늘 노이즈로 가득했고, 그 덕에 세상은 언제나 저해상도 송출 영상처럼 지직거렸다.

    “젠장, 또.”

    그의 신세 한탄을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그저 노후화된 부품의 한계인지, 작업실 벽에 설치된 낡은 환풍기가 삐걱거리며 멈춰 섰다. 퀴퀴한 금속과 전자 폐기물 특유의 곰팡내, 그리고 저렴한 인스턴트 식품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더욱 탁해졌다. 류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철 더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작업실 겸 거주지는 도시의 가장 밑바닥, 폐기물 처리 구역과 맞닿아 있었다. 상층부에서 버려진 온갖 쓰레기들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내려오면, 그중 쓸만한 부품을 골라내어 팔거나 재조립하는 것이 그의 생계였다. 도시의 하층민들이 ‘고물상’이라 부르는 직업. 하지만 류진은 자신을 ‘리퍼’, 즉 죽은 기계에서 생명을 뜯어내는 자라고 자조적으로 불렀다.

    “오늘도 건질 게 없네.”

    눈앞에 쌓인 고철 더미를 대충 발로 휘저었다. 망가진 드론의 날개, 액정이 깨진 휴대 단말기, 녹슨 신경 접속기, 그리고 정체불명의 플라스틱 조각들. 전부 한물간 것들, 버려진 것들뿐이었다. 그의 지직거리는 사이버네틱 안구는 늘 그랬듯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날카롭게 ‘가치’를 찾아내려 애썼지만, 오늘은 영 아니었다.

    그때였다. 뭉툭한 발끝에 채인 작은 물체가 고철 더미 아래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굴러나온 것은 흔한 금속 조각도, 플라스틱 파편도 아니었다. 손바닥 절반만 한 크기의, 매끄럽고 검은 돌멩이.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머금고 있는, 그런 돌멩이였다.

    류진은 호기심에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차가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손바닥에 닿는 감촉은 묘하게 미지근했다. 그리고 돌멩이 표면에는 그 어떤 인공적인 자국도 없었다. 마모된 흔적도, 공장에서 찍어낸 패턴도, 하다못해 바코드조차 없었다. 너무나도 완벽하게 ‘자연’의 일부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이 메가시티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이게 뭐야? 돌멩이?”

    고철 속에서 돌멩이라니. 쓸모없는 것에 불과했지만, 류진은 왠지 모르게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어쩌면 상층부의 어느 부자가 고급 조약돌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시시한 상상을 하며, 그는 그것을 작업복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적어도 다른 고철들처럼 날카롭거나 기름지지 않아서 괜찮았다.

    밤은 깊어지고, 밖은 여전히 비가 내렸다. 류진은 며칠째 손대고 있던 망가진 서보암 드론을 수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품의 노후화가 심해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신경 접속기를 통해 드론의 회로와 연결하려 했지만, 그의 낡은 접속기는 신호를 자꾸 놓쳤다.

    “망할. 오늘도 실패인가.”

    그는 신경질적으로 접속기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검은 돌멩이가 묘하게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저 체온 때문이겠거니 생각하며, 그는 무심코 돌멩이를 꺼내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손바닥에 닿는 매끄러운 감촉이 의외로 편안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사이버네틱 안구에서 지직거리던 노이즈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세상이 잠시, 아주 잠시 선명해졌다. 탁자 위에 놓인 드론의 작은 나사 머리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류진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안구의 노이즈는 다시 돌아왔다.

    “뭐지?”

    환각인가? 아니면 낡은 임플란트가 잠시 제정신을 차린 건가? 그는 다시 돌멩이를 꽉 쥐었다.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그저 평범한 돌멩이. 하지만 왠지 모를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다시 드론 수리에 집중했다. 망할 드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손에 쥔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며, 애써 드론의 전원 단자에 집중했다. ‘켜져라. 제발 켜져라.’ 평소처럼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듯 빌었다.

    그 순간, 그의 손 안의 돌멩이에서 희미한 빛이 터져 나왔다. 검은 표면에 새겨진 것 같지 않던 문양들이 은은한 에메랄드빛으로 번쩍였다. 동시에 드론의 전원 단자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었고, 드론의 작은 LED 전조등이 번쩍! 하고 강렬하게 점멸했다.

    류진은 손에서 돌멩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돌멩이에서 빛이 났다고? 그리고 드론이 반응했다고? 단순한 고장이 아니었다. 드론은 평소 그가 수리하던 방식으로 고쳐진 것이 아니었다. 마치 그의 염원이, 그 작은 돌멩이를 통해 드론에 직접 전달된 것처럼.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 돌멩이는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평범한 검은 돌멩이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여전히 북을 치듯 울렸다.

    류진은 다시 돌멩이를 쥐고 드론을 노려봤다. 조금 전처럼, 아니 훨씬 더 강렬하게 집중했다. 드론이 움직이길 바랐다. 다시 한번, 돌멩이 표면에 에메랄드빛 문양이 번뜩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드론의 프로펠러가 느리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끽끽거리는 낡은 모터 소리와 함께, 드론은 지면에서 한 뼘 정도 떠올랐다가, 이내 전원이 나간 듯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게… 뭐야?”

    류진의 눈은 경악으로 커졌다. 마법? 그는 한 번도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던, 그저 낡은 데이터 칩에서나 볼 법한 허무맹랑한 이야기 속의 ‘마법’이 그의 손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은 돌멩이. 이 폐기물 더미 속에서 발견된 이 작은 조약돌이, 메가시티의 모든 기술적 지식을 거부하는 어떤 고대의 힘을 품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것은 위험한 것인가? 아니면, 이 지독한 7구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일까? 류진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드론과 돌멩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사이버네틱 안구는 다시 지직거리는 노이즈로 가득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새로운,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직감했다. 그의 삶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