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심연의 틈새를 가로질렀다. 거대한 종유석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친 암흑 동굴, 그 가장 깊숙한 곳에서 겨우 살아남은 우리 다섯 명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전 쓰러뜨린 ‘심연의 포식자’의 시체가 발밑에 축 늘어져 있었다. 녀석의 끈적한 피가 발린 검은 칼날에서 스멀스멀 김이 피어올랐다.
“젠장, 드디어 끝났네….”
동시에 무너져 내린 전사 윤아는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거대한 양손검은 여전히 전율하고 있었다. 마법사 지혜는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고, 궁수 민혁은 활시위를 느슨하게 풀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옆에 선 현우. 그는 늘 그렇듯 침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수고했어, 다들. 역시 준호 너의 방패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현우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은 나를 향한 변함없는 신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말에 다른 동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피범벅이 된 방패를 내려놓고 피식 웃었다.
“네 지휘가 워낙 완벽했어야지. 나 혼자 뭘 할 수 있다고.”
우리는 어릴 적부터 함께 이 던전을 누볐다. 현우는 언제나 명석한 두뇌로 파티의 전략을 짰고, 나는 그의 지시에 따라 누구보다 먼저 적진에 뛰어들어 방패로 길을 열었다. 우리 둘은 서로의 존재를 숨 쉬듯 당연하게 여겼고, 서로를 절대적으로 믿었다. 이 빌어먹을 심연의 틈새에서 수없이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우리가 파티를 깨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오직 그 굳건한 신뢰 때문이었다.
심연의 포식자를 처치한 보상은 실로 엄청났다. 동굴 안쪽, 기묘한 빛을 내는 거대한 광맥이 드러났다. 심연석. 던전 탐험가들이 꿈에도 그리던, 마나를 응축하는 희귀 광물이었다. 그 양은 우리가 이제껏 발견했던 모든 심연석을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
“이 정도면… 우리 꿈을 이룰 수 있겠어.”
윤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파티원 모두의 눈에 욕망과 희망이 뒤섞인 빛이 번뜩였다. 현우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훨씬 깊고 날카로웠다. 우리는 이 심연석으로 우리만의 길드 거점을 마련하고,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던전을 정복하자는 꿈을 꾸었다.
채굴 작업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심연의 포식자가 지키고 있던 곳이라 다른 몬스터는 없었다. 광물을 캐내는 동안에도 현우는 끊임없이 우리를 격려했다.
“조금만 더 힘내자. 이걸로 우리 모두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어.”
그의 말에 우리는 더욱 힘을 냈다. 특히 나는 현우의 목소리에서 더 큰 동기부여를 얻었다. 그와 함께라면, 그 어떤 역경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거의 모든 심연석을 캐냈을 때였다. 마지막 거대한 심연석 덩어리를 떼어내려던 순간, 땅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앙! 콰과광!
천장에서 거대한 암석 조각들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동굴 전체가 무너지는 듯한 충격에 우리는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야?!” 민혁이 당황하며 외쳤다.
“지진인가? 아니, 던전 붕괴인가!” 지혜가 마법 방어막을 급히 올렸지만, 쏟아지는 암석의 양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가장 큰 돌덩이들을 방패로 막아냈다. 그때였다. 천장의 가장 거대한 종유석이 파티원들을 향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피해! 모두 피해!”
하지만 이미 늦었다. 종유석은 파티원들의 퇴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현우! 민혁! 지혜! 윤아! 내가 막을 테니 먼저 저쪽으로 빠져나가!”
나는 있는 힘껏 방패를 치켜들고 종유석 아래로 뛰어들었다. 콰앙! 엄청난 충격과 함께 나의 몸이 지면으로 파고들었다. 온몸의 뼈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버텼다. 내가 무너지면 모두가 위험했으니까.
“준호!”
윤아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버티며 그들에게 손짓했다.
“어서! 나가! 내가 시간을 벌게!”
동료들은 내 희생에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현우가 소리쳤다.
“준호의 말을 들어! 어서 대피해!”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확신에 차 있었다. 동료들은 현우의 지시에 따라 빠르게 동굴 밖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했다. 이제 나도 이 암석 더미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내 방패는 완전히 찌그러졌고, 왼쪽 다리에서는 뼈가 부러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현우…! 현우야! 나 좀 도와줘…!”
나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현우를 불렀다. 그는 동굴 입구 근처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침착했다. 내 눈에는 그의 얼굴에 어딘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늘 냉정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날 걱정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준호, 괜찮아? 움직일 수 있겠어?”
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나는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아. 당장 못 움직여. 나 좀 끌어내 줘…!”
그는 내 손을 잡았다. 굳건한 그의 손은 내게 안도감을 주었다. 역시 현우였다. 그는 나를 절대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모든 걸 맡겼다.
“응, 물론이지, 준호.”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차갑게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현우의 다른 손에 들린 것은 심연석을 채굴할 때 쓰던 뾰족한 곡괭이였다. 그리고 그 곡괭이가 망설임 없이 내 왼쪽 손등을 내리찍었다.
“크아악!”
나는 비명을 질렀다. 내 손뼈가 박살나는 소리가 끔찍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현우가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았다.
“현우…! 이게 무슨 짓이야…!”
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신뢰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얼음처럼 냉정했고, 그 안에는 섬뜩할 정도로 뜨거운 욕망이 일렁였다.
“미안하다, 준호.”
그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동굴 붕괴로 인해 발생한 연기가 그의 주변에서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그의 모습이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
“미안하지만, 넌 여기까지다.”
“무슨… 무슨 소리야…!”
그가 곡괭이로 내 뒤편에 있는 암석을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겨우 버티고 있던 지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가 서 있던 곳이, 사실은 얕은 동굴이 아니라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구멍 위에 놓여 있던 것이었다. 종유석이 나를 구멍 가장자리에 박아 넣었던 것이다.
“네놈 때문에 이 정도 가치를 가진 심연석을 늘 다른 놈들과 나눠야 했지.”
그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경멸이 서려 있었다.
“네놈의 그 정의감, 그 병신 같은 동료애. 넌 항상 발목을 잡았어. 늘! 항상!”
현우가 비릿하게 웃었다.
“이젠 그럴 일 없을 거야. 이 심연석은 온전히 내 것이 될 테니까. 아니, 정확히는… 나 혼자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몫이지. 다른 놈들은 어차피 이 정도까진 오지도 못해. 다들 저 위에서 다른 보상을 노리고 있겠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번개라도 맞은 듯한 충격이 스쳐 지나갔다.
윤아, 민혁, 지혜… 그들은 현우의 공범이 아니었다. 그들은 현우가 나를 함정에 빠트리고, 모든 것을 독차지하려는 술수에 이용당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 현우가 던전 붕괴를 유도했고, 나를 미끼로 삼아 종유석 아래로 뛰어들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를 이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려는 계획까지도.
“현우… 너… 너 설마… 처음부터…!”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섬뜩한 깨달음이 온몸을 마비시켰다. 나는 믿었던 친구에게, 내 목숨을 맡겼던 유일한 존재에게 철저히 배신당한 것이었다.
“잘 가라, 강준호. 네 방패는 이제 쓸모없어.”
그의 얼굴은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발을 뻗어, 내가 겨우 걸치고 있던 암석 조각을 발로 찼다.
아아아아아!
몸이 중력에 이끌려 추락했다. 암흑만이 존재하는 심연 속으로.
내려가는 동안, 나는 현우의 마지막 말을 똑똑히 들었다.
“세상은 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곳이야. 네 그 멍청한 신념은… 이곳에서 사라져 버려라.”
차가운 바람이 내 뺨을 스쳤다. 추락하는 몸은 한없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통증도, 비명도, 절망도, 이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감정만이 내 영혼 깊숙이 뿌리내렸다.
증오.
오직 그 지독한 증오만이 나를 잠식했다.
현우… 이현우…
나는 살아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너의 심연석을, 너의 꿈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네가 나를 배신한 이 순간보다 더 잔혹하게.
반드시.
내 몸은 끝없는 어둠 속으로 계속해서 추락했다.
나락의 끝에서, 검은 맹세가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