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이세계 전생 (Isekai)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아르카눔 마법학원, 그 이름만으로도 세상 모든 마법사들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곳. 빛바랜 고서에서나 나올 법한 고풍스러운 첨탑들이 하늘을 찌르고, 고대의 마력이 응축된 수정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하지만 류한의 눈에는, 이 모든 위용 뒤에 숨겨진 낡고 부패한 이면이 언제나 먼저 들어왔다. 전생에서 그는 단 한 번도 ‘마법’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본 적 없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세계에 환생하여, 그것도 명문 중의 명문이라는 아르카눔에 발을 들이게 될 줄이야.

    “류한, 자네는 이번 마법사 개론 시험에서 또 만점을 받았더군. 대단해.”

    노교수의 칭찬에도 류한은 그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학원 내에서 가장 난해하다고 평가받는 이론 마법 과목들마저 그에게는 전생의 수학 문제처럼 쉽게 풀렸다. 이 세계의 마법 체계는 겉보기에 화려했지만, 근본적인 원리를 파고들면 의외로 허술한 부분이 많았다. 마치 수천 년 동안 덧대고 쌓아 올린 누더기 마법처럼.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니 부러워할 필요는 없네. 다만 꾸준함이 중요한 법이지.”

    건너편에 앉은 금발의 아가씨가 앙칼진 눈으로 류한을 노려봤다. 귀족 가문의 영애답게 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세라핌’이었다. 그녀는 류한이 딱히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늘 최고 성적을 거두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뭐, 그런 시선쯤이야 한두 번도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우르르 강의실을 나섰다. 류한은 복도 창가에 기대어 석양에 물들어가는 학원 전경을 내려다봤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늘 가장 오래되고 음침해 보이는 ‘고대 문헌관’의 지하를 향했다. 오래전부터 학생들 사이에선 그런 소문이 돌았다. 고대 문헌관 지하에는 학원의 설립자조차 언급을 꺼리는 끔찍한 금기가 잠들어 있다고.

    “류한, 오늘은 도서관으로 갈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류한은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귀여운 동급생, ‘리안’이었다. 그는 학원에서 몇 안 되는 류한의 친구 중 하나였다. 호기심 많고 겁 많지만, 순수하고 착한 심성을 가진 녀석이었다.

    “아니, 오늘은 좀 다른 곳에 가볼까 해.” 류한은 시선을 고대 문헌관으로 돌렸다.

    리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설마… 고대 문헌관 지하 말이야? 거긴 절대 가지 말라고 학원 규정에도 명시되어 있잖아! 게다가… 얼마 전에도 3학년 엘리어스 선배가 거기 들어갔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고.”

    엘리어스. 류한도 그 이름을 들은 적 있었다. 호기심 많고 실력도 뛰어났던 선배. 공식적으로는 ‘개인 사정으로 인한 자퇴’라고 발표되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금기를 건드린 대가’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저 몇 가지 자료를 찾아볼 뿐이야. 너무 걱정 마.” 류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자료는 핑계였다. 엘리어스의 실종은 단순한 사고가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그를 자극했다. 이 학원, 너무나 완벽해 보이는 이 고고한 마법학원에는 분명 뭔가 감춰진 어둠이 있었다.

    그날 밤, 류한은 인적이 끊긴 고대 문헌관으로 향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그를 감쌌다. 삐걱거리는 마루를 밟고 문헌관의 가장 깊숙한 곳, 일반인 출입 금지 마법진이 쳐진 ‘제한 구역’에 도착했다. 수십 년 전부터 아무도 손대지 않은 듯 먼지가 수북이 쌓인 낡은 책장들, 그 너머에 육중한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그 ‘금지된 서고’라는 건가.”

    류한은 철문에 손을 댔다. 차갑고 거친 질감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문에는 복잡한 고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는데, 일반적인 해제 마법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류한은 전생의 ‘기술’과 이세계의 ‘마법’을 융합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마력을 손끝에 모아 마법진의 흐름을 읽기 시작했다. 마치 복잡한 암호 시스템을 해독하듯, 그는 마법진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몇 분간의 집중 끝에, 마법진의 일부가 일렁이더니 ‘끼이이익’ 하는 굉음과 함께 철문이 서서히 열렸다. 안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훅 끼쳐 나왔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가 내쉬는 숨결처럼.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그곳은 서고가 아니었다. 좁고 어두운 계단이 한없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 양옆으로는 흐릿하게 빛나는 마력등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지만, 그 빛은 주위의 어둠을 걷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마치 심해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길 같았다.

    류한은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습해졌다. 동시에,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한 기운이 피부를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비명과 절규, 혹은 억눌린 고통이 응축된 듯한 기운. 전생의 그가 절대 경험해보지 못했던 종류의 소름 끼치는 감각이었다.

    수십 미터를 내려갔을까, 계단은 널찍한 통로로 이어졌다. 통로의 벽면은 검은 돌로 이루어져 있었고, 곳곳에는 이해할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과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마력이 깃든 손전등을 켜자, 섬뜩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통로 양옆에는 굳게 닫힌 철창들이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었다. 마치 거대한 감옥의 복도 같았다.

    류한은 가장 가까운 철창에 다가섰다. 철창 너머는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가 힘겹게 ‘숨 쉬는’ 소리, 혹은 ‘흐느끼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류한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울렸다.

    “여기에… 뭐가 있는 거지?”

    류한은 조심스럽게 철창을 붙잡았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 그 순간, 철창 너머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드러나는 거대한 그림자. 그것은 인간의 형상과는 달랐다. 거대하고 뒤틀린, 마치 수많은 촉수나 사지가 뒤엉킨 듯한 끔찍한 형태였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수백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번뜩이며 류한을 응시했다.

    *쉬이이익…*

    정체불명의 기이한 울음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그것은 목구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류한의 전신을 마비시키는 듯한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전생과 이생을 통틀어, 류한은 이토록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르카눔 마법학원 지하에 숨겨진 금기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존재였다. 그 순간, 류한은 등 뒤에서 차가운 한기가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곳은, 수많은 비명과 고통이 뒤섞인 생지옥이었다.

  • 이세계 전생 (Isekai)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아르카눔 마법학원, 그 이름만으로도 세상 모든 마법사들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곳. 빛바랜 고서에서나 나올 법한 고풍스러운 첨탑들이 하늘을 찌르고, 고대의 마력이 응축된 수정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하지만 류한의 눈에는, 이 모든 위용 뒤에 숨겨진 낡고 부패한 이면이 언제나 먼저 들어왔다. 전생에서 그는 단 한 번도 ‘마법’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본 적 없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세계에 환생하여, 그것도 명문 중의 명문이라는 아르카눔에 발을 들이게 될 줄이야.

    “류한, 자네는 이번 마법사 개론 시험에서 또 만점을 받았더군. 대단해.”

    노교수의 칭찬에도 류한은 그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학원 내에서 가장 난해하다고 평가받는 이론 마법 과목들마저 그에게는 전생의 수학 문제처럼 쉽게 풀렸다. 이 세계의 마법 체계는 겉보기에 화려했지만, 근본적인 원리를 파고들면 의외로 허술한 부분이 많았다. 마치 수천 년 동안 덧대고 쌓아 올린 누더기 마법처럼.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니 부러워할 필요는 없네. 다만 꾸준함이 중요한 법이지.”

    건너편에 앉은 금발의 아가씨가 앙칼진 눈으로 류한을 노려봤다. 귀족 가문의 영애답게 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세라핌’이었다. 그녀는 류한이 딱히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늘 최고 성적을 거두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뭐, 그런 시선쯤이야 한두 번도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우르르 강의실을 나섰다. 류한은 복도 창가에 기대어 석양에 물들어가는 학원 전경을 내려다봤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늘 가장 오래되고 음침해 보이는 ‘고대 문헌관’의 지하를 향했다. 오래전부터 학생들 사이에선 그런 소문이 돌았다. 고대 문헌관 지하에는 학원의 설립자조차 언급을 꺼리는 끔찍한 금기가 잠들어 있다고.

    “류한, 오늘은 도서관으로 갈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류한은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귀여운 동급생, ‘리안’이었다. 그는 학원에서 몇 안 되는 류한의 친구 중 하나였다. 호기심 많고 겁 많지만, 순수하고 착한 심성을 가진 녀석이었다.

    “아니, 오늘은 좀 다른 곳에 가볼까 해.” 류한은 시선을 고대 문헌관으로 돌렸다.

    리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설마… 고대 문헌관 지하 말이야? 거긴 절대 가지 말라고 학원 규정에도 명시되어 있잖아! 게다가… 얼마 전에도 3학년 엘리어스 선배가 거기 들어갔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고.”

    엘리어스. 류한도 그 이름을 들은 적 있었다. 호기심 많고 실력도 뛰어났던 선배. 공식적으로는 ‘개인 사정으로 인한 자퇴’라고 발표되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금기를 건드린 대가’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저 몇 가지 자료를 찾아볼 뿐이야. 너무 걱정 마.” 류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자료는 핑계였다. 엘리어스의 실종은 단순한 사고가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그를 자극했다. 이 학원, 너무나 완벽해 보이는 이 고고한 마법학원에는 분명 뭔가 감춰진 어둠이 있었다.

    그날 밤, 류한은 인적이 끊긴 고대 문헌관으로 향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그를 감쌌다. 삐걱거리는 마루를 밟고 문헌관의 가장 깊숙한 곳, 일반인 출입 금지 마법진이 쳐진 ‘제한 구역’에 도착했다. 수십 년 전부터 아무도 손대지 않은 듯 먼지가 수북이 쌓인 낡은 책장들, 그 너머에 육중한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그 ‘금지된 서고’라는 건가.”

    류한은 철문에 손을 댔다. 차갑고 거친 질감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문에는 복잡한 고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는데, 일반적인 해제 마법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류한은 전생의 ‘기술’과 이세계의 ‘마법’을 융합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마력을 손끝에 모아 마법진의 흐름을 읽기 시작했다. 마치 복잡한 암호 시스템을 해독하듯, 그는 마법진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몇 분간의 집중 끝에, 마법진의 일부가 일렁이더니 ‘끼이이익’ 하는 굉음과 함께 철문이 서서히 열렸다. 안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훅 끼쳐 나왔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가 내쉬는 숨결처럼.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그곳은 서고가 아니었다. 좁고 어두운 계단이 한없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 양옆으로는 흐릿하게 빛나는 마력등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지만, 그 빛은 주위의 어둠을 걷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마치 심해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길 같았다.

    류한은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습해졌다. 동시에,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한 기운이 피부를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비명과 절규, 혹은 억눌린 고통이 응축된 듯한 기운. 전생의 그가 절대 경험해보지 못했던 종류의 소름 끼치는 감각이었다.

    수십 미터를 내려갔을까, 계단은 널찍한 통로로 이어졌다. 통로의 벽면은 검은 돌로 이루어져 있었고, 곳곳에는 이해할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과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마력이 깃든 손전등을 켜자, 섬뜩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통로 양옆에는 굳게 닫힌 철창들이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었다. 마치 거대한 감옥의 복도 같았다.

    류한은 가장 가까운 철창에 다가섰다. 철창 너머는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가 힘겹게 ‘숨 쉬는’ 소리, 혹은 ‘흐느끼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류한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울렸다.

    “여기에… 뭐가 있는 거지?”

    류한은 조심스럽게 철창을 붙잡았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 그 순간, 철창 너머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드러나는 거대한 그림자. 그것은 인간의 형상과는 달랐다. 거대하고 뒤틀린, 마치 수많은 촉수나 사지가 뒤엉킨 듯한 끔찍한 형태였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수백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번뜩이며 류한을 응시했다.

    *쉬이이익…*

    정체불명의 기이한 울음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그것은 목구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류한의 전신을 마비시키는 듯한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전생과 이생을 통틀어, 류한은 이토록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르카눔 마법학원 지하에 숨겨진 금기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존재였다. 그 순간, 류한은 등 뒤에서 차가운 한기가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곳은, 수많은 비명과 고통이 뒤섞인 생지옥이었다.

  • 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화. 균열의 속삭임

    아르카디아 마법 학원. 이름만으로도 마나의 파동이 느껴지는 이 고귀한 전당에 발을 들인 지 어느덧 두 달이었다. 뾰족한 첨탑들이 하늘을 꿰뚫을 듯 솟아 있고, 그 사이를 잇는 부유 교량 위로는 온갖 색깔의 마법진이 쉴 새 없이 반짝였다. 투명한 마나 결정으로 지어진 도서관은 새벽 이슬을 머금은 듯 영롱하게 빛났고, 연병장에서는 폭발하는 불꽃 마법과 땅을 뒤흔드는 진동 마법이 수없이 교차했다.

    여긴 꿈같은 곳이었다. 어릴 적 찢어진 마법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며 마법사를 꿈꾸던 시골 소년에게는 더더욱. 그리고 그 소년은 기어코 이 거대한 아르카디아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름은 카이.

    “카이! 또 딴생각이지?”

    누군가 옆구리를 쿡 찔러왔다. 정신없이 마법진의 흐름을 쫓던 카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카락이 태양처럼 타오르는 친구, 엘라였다. 엘라는 심통 난 표정으로 카이의 마나 제어석을 가리켰다. 푸르게 빛나야 할 제어석은 불규칙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미안, 엘라. 잠시 딴생각을….”

    “잠시가 아니잖아. 카이, 집중해야 해. 오늘 ‘정화의 격류’ 마법은 좀 더 복잡하다고!”

    엘라의 말은 옳았다. 아르카디아의 수업은 늘 강도 높았다. 특히 고위 마법의 기본이 되는 마나 제어 훈련은 매일 수십 번, 수백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카이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흐트러진 마나를 다시 끌어모았다. 손바닥 안의 제어석이 차분한 푸른빛을 되찾았다.

    “그래도 오늘은 좀 이상하지 않아?” 엘라가 투덜거렸다. “바닥에서 뭔가 웅웅거리는 느낌이 드는데.”

    “웅웅거린다고?”

    “응. 아주 미세하게, 심장 박동 같기도 하고… 꼭 학원 지하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 엘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는 잠결에 듣고 잠투정인가 했는데, 오늘은 수업 중에도 느껴져. 혹시 대지 마법 수업이라도 있나?”

    “대지 마법은 다음 주잖아.” 카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학원 지하에서 특별한 수업이 진행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지하의 깊은 곳은 일반 학생들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제한 구역’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카이는 엘라와 함께 식당으로 향하면서도 엘라의 말을 곱씹었다. ‘웅웅거리는 느낌.’ 마나에 예민한 엘라가 느꼈다면 단순한 착각은 아닐 터였다.

    식당은 늘 활기로 가득했다. 허기를 채우며 카이는 우연히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선배들인 듯한 몇몇 학생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확실해? 정말 그쪽에서 나온다고?”

    “밤마다 그래. 어두컴컴한 심야에, 마치… 땅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처럼.”

    “젠장, 금서 목록에 있던 ‘심연의 기록’인가 뭔가 하는 책도, 그 지하실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고 하던데.”

    “미쳤어? 그거 읽다가 발각되면 당장 퇴학이야! 학칙 제1조가 ‘미지의 심연에 대한 탐구를 금한다’잖아!”

    카이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미지의 심연’. ‘지하실’. ‘금서’.
    엘라가 말한 웅웅거림과 선배들의 대화가 기묘하게 겹쳐졌다. 단순한 소문일까? 아니면…

    그날 밤, 카이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엘리트 마법 학원의 지하에 끔찍한 금기가 숨겨져 있다는 소문은 어릴 적 들었던 괴담처럼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는 조용히 침대에서 벗어나 학원의 거대한 도서관으로 향했다. ‘금서 목록에 있던 책’이라는 선배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서관의 가장 깊숙한 곳, 낡은 마법으로 봉인된 ‘고대 자료실’은 늘 비어있었다. 평소에는 접근조차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어쩐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는 기분이었다. 먼지 쌓인 통로를 지나 봉인된 문 앞에 섰다. 마나 감지 마법을 써보니, 봉인 자체는 약하게 걸려 있었다. 아마도 더 이상 아무도 이곳에 흥미를 갖지 않으리라 판단했거나, 혹은 일부러 허술하게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는 조심스럽게 마나를 주입하여 봉인을 해제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문이 열렸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빽빽하게 꽂힌 서가들 위로는 두터운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손에 든 마나 등불을 밝히며 서가를 훑었다. 대부분은 아르카디아의 건립 역사나 고대 마법의 이론에 대한 지루한 서적들이었다. 그러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검은색 낡은 가죽으로 장정된 두꺼운 책이었다. 책등에는 아무런 제목도 없었지만, 묘하게 카이의 시선을 끌었다. 마치 그 책이 자신을 부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조심스럽게 책을 뽑아내자, 숨겨져 있던 공간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구겨지고 해진 종이에는 붉은색 잉크로 알 수 없는 기호들과 함께 손으로 그린 듯한 조잡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아르카디아 학원의 지하였는데, 카이가 알고 있는 가장 깊은 지하 창고보다 훨씬 더 아래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제0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0층의 한가운데에는 섬뜩한 형상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카이는 지도를 펼쳐 들고 책상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검은색 책을 펼치자, 섬뜩한 내용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대 문자로 쓰여 있었지만, 카이는 장학생 특전으로 배운 고대어 지식으로 겨우 내용을 해독할 수 있었다.

    “…심연에 봉인된 존재… 학원의 뿌리… 금지된 힘… 균열… 먹이를 탐하는 자….”

    내용은 혼란스럽고 단편적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르카디아 학원 지하에, 인류에게 치명적인 어떤 존재가 봉인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학원이 세워졌다는 끔찍한 암시까지.

    책을 읽는 동안, 카이의 손은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아주 미세한, 그러나 명확한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전해져 왔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소리 같았다. 엘라가 말했던 그 ‘웅웅거림’이었다. 진동은 점점 강해졌고, 카이는 본능적으로 지도가 가리키는 제0층의 방향, 즉 도서관 바로 아래의 심연을 직감했다.

    동시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한이 밀려왔다.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피부가 마비되는 듯한 냉기, 그리고 저 깊은 곳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듯한 역겨운 쇠 비린내.

    책 속의 끔찍한 문양이 그의 눈앞에서 일렁이는 듯했다.

    카이는 지도를 움켜쥐고 고대 자료실을 뛰쳐나왔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저 아래에 무엇이 있는가?*

    지도는 도서관 지하의 은밀한 통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래된 관리용 통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곳. 카이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에서 마나 등불만이 흔들렸고, 그의 심장은 쿵쿵거리는 지하의 박동과 함께 격렬하게 울렸다.

    마침내, 지도가 가리키는 곳에 도착했다. 낡은 벽돌로 위장된 좁고 낮은 통로의 끝. 그곳에는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운, 그러나 마나 감각으로는 명확하게 느껴지는 봉인된 문이 있었다. 일반적인 마법 봉인과는 다른, 고대의 기법으로 만들어진 듯한 문이었다.

    카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문에 닿았다. 차가운 금속 같은 질감. 그 순간, 그의 손바닥에서부터 소름 끼치는 한기가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동시에 봉인된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쿠우우우우웅… 쿠우우우우웅…**

    마치 거대한 짐승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뒤척이는 듯한 소리.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아주 희미하지만 섬뜩하게 긁는 듯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어였지만, 그 의미는 분명히 ‘열어라’ 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카이의 마나 등불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꺼지려 했다. 그는 온몸의 힘을 다해 문을 밀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틈새가 아주 미세하게 벌어졌다.

    그 틈새 너머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발광하고 있었다. 붉고 거대한, 마치 거대한 눈동자 같은 섬광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는 듯했다.

    그 순간, 카이의 머릿속을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차갑고, 날카로우며, 온 세상의 모든 절규를 담은 듯한, 이질적인 비명이었다.

    학원 지하 깊은 곳에서, 금기가 깨어나고 있었다.

  • SF (공상과학)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둠이 뼈저리게 시린 지하 통로였다. 코끝을 찌르는 오존과 눅진 쇳내음이 뒤섞인 공기는 생체 필터 마스크를 뚫고 들어와 폐부를 자극했다. 카엘은 거친 숨을 고르며 녹슨 금속 벽에 등을 기댔다. 손에 든 구식 레이저 권총의 차가운 감촉이 땀으로 축축한 손바닥에 선명하게 와닿았다.

    “젠장, 이런 곳에 감시 유닛이 있을 줄이야.”

    레나가 낮게 욕설을 뱉었다. 그녀는 구부정한 자세로 휴대용 스캐너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벽면에 숨겨진 장치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스캐너의 푸른빛에 반사되어 번뜩였다. 낡고 헤진 점프슈트 위로 드러난 어깨 근육은 긴장으로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제국 놈들은 우리가 버려진 구역에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생각하겠지. 그게 우리의 이점이야.” 카엘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통로 저편, 깜빡이는 비상등 아래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훑었다. “상관 없어. 예정대로 진행한다.”

    “말은 쉽지. 저놈의 ‘제국 감시 그리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촘촘하다고. 벌써 세 번째 유닛이야. 이대로라면 ‘새벽별 작전’은 개뿔…”

    레나의 불평은 카엘의 굳건한 눈빛에 닿자마자 잦아들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다시 스캐너에 집중했다. ‘새벽별 작전’. 썩어빠진 제국의 심장부에 깊숙이 박힌 거대한 데이터 중추를 마비시키는 것. 거미줄처럼 얽힌 제국의 정보망에 잠시나마 혼란을 주고, 그 틈에 억압받던 평민들의 목소리를 터뜨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찾았다!” 레나가 작게 외쳤다. 그녀의 스캐너에서 발사된 레이저가 벽면의 특정 지점을 가리켰다. 녹슨 패널 뒤에 숨겨진, 희미하게 전류가 흐르는 회로가 드러났다. “여기를 끊으면 이 구역의 감시 회로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킬 수 있어. 하지만 시간이… 젠장, 타이머가 너무 짧아.”

    “얼마나?”

    “최대 120초. 그 안에 다음 구역으로 이동해서 주 서버 링크를 찾아야 해. 실패하면 제국 순찰대가 곧바로 몰려올 거야.”

    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120초. 심장이 발버둥치는 소리가 귀청을 때리는 듯했다.
    “됐어. 내가 미끼가 될 테니까, 넌 최대한 빨리 해.”

    “미끼라고? 말도 안 돼! 혼자 감당할 수 없을 거야!” 레나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다른 방법이 있나? 이 길은 너무 좁아. 둘이 함께 도망칠 수도 없어. 내가 주의를 끌면, 넌 그 틈에 주 서버로 향해. 그리고…” 카엘은 레나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해. 모두의 희망이 너에게 달려있어.”

    레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카엘의 눈에 어린 비장함과 결연함은 그녀의 망설임을 집어삼켰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알았어. 꼭 성공할게. 그러니 너도,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

    “걱정 마.” 카엘은 짧게 웃었다. “난 아직 할 일이 많거든.”

    그는 권총을 움켜쥐고 통로의 코너를 돌아섰다. 곧이어 철컥이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제국 순찰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의 중무장 부츠가 바닥을 울리는 둔탁한 소리가 점점 커졌다. ‘위이잉…’ 거대한 플라스마 방패의 에너지 충전음이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카엘은 심호흡을 했다. 손안의 레이저 권총은 장난감처럼 가벼웠지만, 그의 의지는 강철보다 단단했다.
    “어이, 제국 개자식들! 이리로 와라!”

    일부러 목소리를 키워 도발하자, 순찰대원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움직였다. 좁은 통로에서 움직임이 제한적일 테지만, 숫적으로 열세였다. 하지만 카엘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통로 코너에서 튀어나오자마자, 선두에 선 병사의 헬멧을 향해 레이저를 발사했다. ‘쉬이이잉!’ 붉은 광선이 어둠을 갈랐다.

    “저항군이다! 사살해!”

    병사의 외침과 함께 여러 발의 에너지탄이 카엘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굴려 폐기된 환기구 뒤로 숨었다. ‘타앙! 타앙!’ 에너지탄이 금속 벽을 때리는 둔탁한 소음이 고막을 찢을 듯했다. 환기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짧은 순간, 레나는 허리를 숙인 채 미리 준비해둔 데이터 스파이크를 벽면의 회로에 꽂아 넣었다. ‘삐비빅!’ 스파이크의 작은 화면에 녹색 코드가 빠르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그녀는 거의 기도하듯이 중얼거렸다.

    카엘은 환기구 뒤에서 고개를 내밀어 적들을 교란했다. 병사들은 그가 숨어 있는 곳에 집중했고, 그 틈을 타 레나는 전력을 다해 해킹을 시도했다. 100초, 80초, 50초… 시간이 맹렬하게 흘러갔다. 제국 병사들이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이 느껴졌다. 플라스마 방패의 푸른빛이 환기구 틈새로 새어 들어와 카엘의 얼굴을 스쳤다.

    “망할, 더 이상은 안 되겠어!”

    병사 하나가 강력한 에너지탄을 발사했다. ‘콰앙!’ 환기구가 산산조각 났다. 카엘은 뒤로 나동그라지며 통로 바닥에 처박혔다. 뼈가 울리는 고통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 순간, 레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성공했어! 회로 마비! 60초간이야!”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통로 천장의 감시 카메라들이 일제히 꺼지고, 벽면에 깜빡이던 비상등마저도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완벽한 암흑. 찰나의 침묵이 흘렀다.

    “이런… 젠장! 시야 확보!” 병사들의 혼란스러운 외침이 들렸다.

    카엘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달릴 때였다.
    “레나! 어서!”

    레나는 이미 다음 구역으로 통하는 비상문을 향해 전력으로 뛰고 있었다. 카엘도 그녀를 따라 죽을힘을 다해 발을 굴렀다. 뒤에서는 병사들의 동요하는 목소리와 함께 비상등이 깜빡이며 다시 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시야를 회복하기 전에 최대한 멀어져야 했다.

    “주 서버 링크까지 얼마나 남았어!” 카엘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이곳을 지나… 폐기된 중계탑 밑으로! 한 500미터 정도!” 레나는 스캐너의 지도를 보며 외쳤다.

    500미터. 어둠 속에서, 그것도 제국의 코앞에서, 중무장한 병사들의 추격을 따돌리며 이동해야 하는 거리.
    그때였다. 레나의 스캐너에서 갑자기 경고음이 울렸다.

    ‘삐비빅- 삐비빅-! 미확인 에너지 신호 감지! 접근 중!’

    레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젠장… 이건… 일반 순찰대가 아니야! 제국 방위군 소속의 정예 유닛이야! 속도가 너무 빨라!”

    카엘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제국 방위군이라면 일반 순찰대와는 급이 달랐다. 그들은 최신식 장비와 훈련으로 무장한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들이 이 버려진 지하 통로까지 들이닥쳤다는 것은, 작전의 일부가 이미 노출되었음을 의미했다. 아니면… 어쩌면 제국은 처음부터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크르르릉…’

    통로 저편에서 둔중한 금속 마찰음이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흡사 거대한 사냥개처럼, 맹렬한 기세로.

    “젠장, 도망쳐! 레나!” 카엘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주 서버는 포기해! 지금은 후퇴가 먼저야!”

    “하지만, 새벽별 작전은…” 레나는 망설였다.

    “살아남아야 다음 기회를 잡을 수 있어! 우리가 죽으면 아무것도 못 해!” 카엘은 레나의 손목을 움켜쥐고 폐기된 환기구 통로로 그녀를 밀어 넣었다. “내가 시간을 벌게! 넌 먼저 빠져나가!”

    카엘은 다시 레이저 권총을 겨눴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비록 이 작전은 실패할지라도, 자신들의 의지는 절대 꺾이지 않을 터였다. 제국이 아무리 거대하고 강력하다 해도, 이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저항의 불씨를 완전히 끌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카엘은 이를 악물었다. 다가오는 거대한 그림자, 그리고 그 그림자 뒤에 도사린 썩어 문드러진 제국을 향해. 불꽃 같은 의지를 담아, 최후의 저항을 준비했다. 이 지하 미궁 속에서, 평민들의 반란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마법소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거리의 서곡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잿빛 거리, 아린의 하루는 삐걱거리는 나무 침대 위에서 시작되었다. 눅눅한 공기 속으로 희미한 비린내와 먼지 냄새가 뒤섞여 스며들었다. 창문 없는 흙벽 오두막은 새벽의 냉기를 온전히 막아주지 못했다. 아린은 얇은 누더기 이불을 끌어올려 옆에 누운 미나의 마른 어깨를 덮어주었다. 미나의 숨소리는 여전히 가늘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미열이 감돌았다.

    “미나….”

    아린은 작게 속삭였지만, 미나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열병은 벌써 한 달째 미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 잿빛 거리에서는 감기조차 사치였다. 변변한 약초 하나 구하기도 힘들었고, 제국의 병원 문턱은 일반 평민들에게는 하늘만큼이나 높았다. 저 멀리, 동이 터오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우뚝 솟은 황궁의 첨탑이 보였다. 그곳은 금빛으로 번쩍이며, 이곳 잿빛 거리의 비참함과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빛났다. 황제와 귀족들은 매일밤 성대한 연회를 즐기며 풍족한 삶을 누리겠지.

    차가운 돌바닥에 맨발을 내딛는 아린의 몸은 이미 익숙한 고통으로 가득했다. 어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잡초라도 뜯으러 나갔다가 긁힌 무릎이 쓰라렸다. 부어오른 손목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살아남는 것, 그리고 미나를 살리는 것, 그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목표였다.

    “누나, 나 배고파….”

    어느새 잠에서 깬 미나가 가늘게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아린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마른침을 삼킨 아린은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냈다.

    “응, 응. 우리 미나. 누나가 맛있는 거 구해올게. 조금만 기다려.”

    하지만 ‘맛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린조차 알 수 없었다. 주머니 속에는 어제 밤늦게까지 매달려 엮은 풀 바구니 몇 개를 팔아 얻은 동전 한 닢이 전부였다. 쌀 한 줌조차 살 수 없는 돈이었다.

    아린은 낡은 외투를 걸치고 오두막을 나섰다. 잿빛 거리는 새벽부터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그 활기는 희망의 것이 아닌, 절박한 생존의 아우성이었다.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노인, 부모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흔했다. 거리에 울려 퍼지는 쉰 목소리의 상인들은 어제 팔다 남은 시든 채소나 정체불명의 잡동사니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린은 익숙하게 인파를 헤치고 가장 구석진 골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칠고 시들었지만, 먹을 수 있는 풀뿌리나 버려진 뼈 조각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 한참을 헤매던 아린의 눈에, 길바닥에 떨어진 자줏빛 열매 몇 개가 들어왔다. 누군가 먹다가 버린 것 같았다. 그리 달지는 않지만, 지금 미나에게는 무엇보다 귀한 비타민이 될 터였다. 아린은 망설임 없이 열매를 주워 낡은 천에 싸서 품에 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길을 비켜라! 제국군 수색대다!”

    거친 고함이 잿빛 거리를 뒤흔들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순식간에 공포가 드리워졌다. 모든 활기는 사라지고, 마치 유령이 지나간 듯 정적이 흘렀다. 철컥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무장한 제국군 병사들이 우르르 골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갑옷은 황궁처럼 빛났지만, 그 빛은 섬뜩하고 위압적이었다.

    “수상한 물품을 소지한 자는 즉시 내놓아라! 제국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병사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길가의 좌판을 뒤엎었다. 상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쫓겨났고, 간신히 모아두었던 식량들이 발 아래에서 짓밟혔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아린은 얼어붙은 채 몸을 웅크렸다. 제국군은 매달 한두 번씩 이렇게 들이닥쳐 ‘수상한 물품’이라는 명목으로 주민들의 남은 식량이나 귀중품을 강탈해갔다. 반항하는 자는 가차 없이 끌려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 병사가 아린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얼굴은 차갑고 무감각했다.
    “이 조그만 것. 뭘 숨기고 있지?”
    병사의 눈은 매서웠고, 아린의 품속에 넣은 열매 뭉치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듯했다. 아린은 저도 모르게 품을 감쌌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짓말! 감히 제국군을 기만하려 드는가?”

    병사의 거친 손이 아린의 어깨를 잡아챘다. 아린은 휘청이며 넘어졌다. 품속에 있던 열매 뭉치가 흙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짓밟힌 열매들은 순식간에 으깨어져 붉은 즙을 흩뿌렸다. 마치 피처럼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안 돼… 미나…!”

    아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고작 열매 몇 개였지만, 미나에게는 생명줄과 같은 것이었다. 그마저도 빼앗기고, 짓밟혔다. 병사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아린을 내려다봤다.

    “고작 이딴 쓰레기를 감추려 했느냐? 하찮은 것.”

    그의 말이 아린의 귓가에 비수처럼 박혔다. 아린은 바닥에 엎드린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무력함에, 이 모든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치솟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미나의 고통스러운 얼굴이, 간절한 눈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은 그저 무능한 존재일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절망이 아린의 심장을 집어삼키는 순간, 엉망이 된 열매 파편들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터져 나왔다. 아주 작고 은은한 빛이었다. 마치 꺼져가는 촛불처럼 흔들렸지만,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아린의 심장 속에서, 꽁꽁 얼어붙었던 무언가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차갑던 손끝과 발끝에 따스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병사는 아직 아린을 비웃고 있었다. 그때, 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안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깜빡였다. 병사는 순간 흠칫하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본능적인 위협감에 그의 얼굴에 미묘한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그는 자신의 나약함에 화가 난 듯 헛기침을 하며 다시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다음엔 이런 짓 하지 마라, 더러운 것.”

    병사는 그 말과 함께 다른 병사들에게 손짓하며 골목을 떠났다. 그들이 가져갈 것을 모두 챙겨갔기에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잿빛 거리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이전과는 달랐다. 사람들의 눈빛에는 전보다 깊은 절망과 함께, 차갑게 식어버린 분노가 서려 있었다.

    아린은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 떨리는 손으로 짓밟힌 열매 조각들을 쓸어 모았다. 그 속에서 빛나던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따스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잿빛 거리의 풍경, 짓밟힌 생명, 절망에 찬 사람들의 모습이 그녀의 심장에 새겨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멀리 보이는 황궁의 첨탑을 응시했다. 금빛으로 빛나는 저곳이,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이었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아린의 눈빛에 굳은 결심이 스쳤다. 그 작은 변화는 잿빛 거리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새로운 서곡을 연주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시작된 미약한 떨림은, 머지않아 거대한 파동이 되어 세상을 뒤흔들게 될 것이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숨결

    코볼트 행성의 하늘은 언제나 병든 오렌지색이었다. 썩어 문드러진 핏빛 노을과 흡사한 그 빛은, 태양이 제 힘을 잃고 죽어가고 있다는 착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 행성 사람들에게 태양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지하 깊은 곳에서 끌어 올려야 할 ‘심장석’뿐이었다.

    카엘은 이 심장석 광산의 가장 깊은 막장에서 일했다. 땀에 절은 몸은 철판과 흙먼지로 뒤덮여 끈적거렸고, 헬멧의 조명등이 비추는 좁은 시야는 늘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위험으로 가득했다. ‘드르륵, 쾅!’ 거대한 굴착기가 지하의 암반을 찢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그 진동은 뼛속까지 울려 퍼져 영혼마저 흔드는 듯했다.

    “젠장, 또 긁혔잖아.”

    카엘은 왼팔뚝에 길게 그어진 상처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광석 채취용 해머는 이미 수십 번도 더 수리한 낡은 것이었다. 제국이 보급하는 장비들은 늘 그랬다. 간신히 작동하는 수준의 싸구려이거나, 아예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였다. 그들은 코볼트 행성의 생명들을 소모품처럼 여겼다. 행성 자체가 거대한 소비재였으니까.

    “카엘, 괜찮나? 오늘은 작업량이 심상치 않아.”

    옆 막장에서 늙은 야렉이 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야렉은 40년 넘게 이 막장에서 심장석을 캐왔다. 그의 등은 이미 돌처럼 굽어 있었고, 얼굴은 깊은 주름살과 검버섯으로 가득했다. 그의 눈만이 여전히 빛나고 있었는데, 그 빛은 고통과 체념, 그리고 어딘가 희미한 반항심이 뒤섞인 불꽃이었다.

    “걱정 마세요, 야렉 아저씨. 제가 아직 팔팔합니다.”

    카엘은 일부러 밝게 대답했지만, 심장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채취량이 두 배로 늘어났다. 제국 병사들이 어제저녁 마을에 들어와 어린아이들까지 작업에 동원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세금 체납’이라는 명목이었지만, 그건 늘 그랬듯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제국은 그저 더 많은 것을 원할 뿐이었다.

    갑자기, 지반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쿠구궁!’ 굉음과 함께 머리 위에서 자잘한 돌 부스러기가 쏟아져 내렸다. 카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무슨 일이야?!”

    야렉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어진 것은 비명이었다.

    “악! 다리가… 다리가 깔렸어!”

    카엘은 몸을 돌렸다. 야렉의 막장 쪽이었다. 굴착기의 한 부분이 무너지면서 야렉의 다리를 덮친 것이었다. 거대한 철골이 그의 다리를 짓눌러 피가 흥건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야렉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야렉 아저씨!”

    카엘은 망설일 틈도 없이 달려갔다. 다른 광부들도 삽과 곡괭이를 들고 달려왔지만, 그 거대한 철골을 옮길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제국이 제공하는 비상 장비는 늘 말뿐이었다.

    “비켜! 이 멍청이들아!”

    그때, 저편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제국의 감시병, 센추리온 발레리우스였다. 번쩍이는 은빛 갑옷과 휘장, 번들거리는 그의 얼굴은 이 지저분한 광산과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의 뒤에는 중무장한 병사들이 두 명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방독면을 쓰고 있었지만, 발레리우스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이 더러운 공기조차 그에게는 하찮은 것인 양.

    “무슨 소란이야? 작업 시간을 지체시키다니, 반역이라도 하려는 건가?”

    발레리우스는 야렉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하게 물었다.

    “센추리온 님! 야렉 아저씨가 깔렸습니다! 당장 구조 장비를…”

    카엘이 외치려 하자, 발레리우스의 시선이 그를 꿰뚫었다. 차갑고 무정한 눈동자였다.

    “구조 장비? 흠, 저 늙은이가 제국에 더 이상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나? 손실은 손실일 뿐. 대체할 인력은 넘쳐난다.”

    “뭐라고요?!”

    카엘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 늙은 광부가 평생을 바쳐 제국에 심장석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쓸모없는 존재 취급이라니.

    “닥쳐! 이 하찮은 코볼트 놈! 너는 그저 제국의 재산을 캐내는 기계일 뿐이다. 명령을 어기고 소란을 피운 죄를 물어야겠군.”

    발레리우스는 손짓했다. 뒤따르던 병사들이 둔탁한 진압봉을 들고 카엘에게 다가왔다.

    “저리 가! 야렉 아저씨는 우리가 구해야 해!”

    카엘은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야렉이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카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도망쳐라. 나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카엘은 도망칠 수 없었다. 야렉 아저씨는 그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어릴 적 고아가 된 그를 거두어 광부의 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퍽!’

    진압봉이 카엘의 어깨를 강타했다. 뼈가 울리는 고통에 카엘은 비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다시 야렉의 막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렉은 더 이상 신음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흐릿한 동공은 이미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해방감일까, 아니면 체념의 끝일까.

    “어이, 이 노인네 죽었잖아? 이봐, 발레리우스 센추리온!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한 병사가 무심하게 말했다. 발레리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시체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

    “그대로 놔둬. 광산 매장량이 줄어든 건 아니니까. 그리고 저 건방진 놈은 끌고 가서 교육을 좀 시켜.”

    병사들이 다시 카엘에게 다가왔다. 카엘은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붙잡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심장 속에서 차가운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끌려갈 순 없었다. 야렉 아저씨의 죽음이 이렇게 허무하게 묻힐 수는 없었다.

    “그래, 교육… 시키지. 내가. 네놈들에게.”

    카엘의 눈빛이 변했다.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했던 그 눈에는 이제 날카로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해머를 쥐는 것보다 훨씬 강하게. 병사들이 한 발짝 더 다가오자, 카엘은 갑자기 몸을 숙이며 막장 깊은 곳으로 달렸다.

    “저놈 잡아!”

    발레리우스의 고함이 막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병사들이 뒤쫓았지만, 이 막장은 카엘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수십 년간 파고든 복잡한 갱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좁고 어두운 틈새로 몸을 던지고, 낡은 지지대 사이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병사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카엘은 한참을 달려 멈춰 섰다. 숨을 헐떡이며 몸을 기댄 곳은, 야렉 아저씨가 늘 ‘우리들의 비밀 기지’라 부르던 버려진 수갱 입구였다. 헬멧의 조명등을 끄자, 완전한 어둠이 그를 삼켰다. 차갑고 끈적이는 어둠.

    이 어둠 속에서 카엘은 야렉의 마지막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제국 센추리온의 오만하고 차가운 얼굴을. 그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을 뒤졌다. 야렉 아저씨가 생전에 몰래 건네주었던 낡은 주머니. 그 안에는 먼지 덮인 작은 금속 조각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코볼트 행성의 상징, 그러나 제국에 의해 금지된 문양이었다. 날개를 펼친 채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새의 형상. 잿빛 하늘을 뚫고 날아오르려는 작은 불꽃의 상징.

    카엘은 금속 조각을 꽉 쥐었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는 야렉 아저씨의 시신과, 그의 옆을 무심하게 지나치는 제국 병사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저씨…”

    카엘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렸다. 끓어오르는 분노, 솟아나는 슬픔, 그리고 새롭게 싹트는 결의가 뒤섞여 심장을 채웠다.

    ‘이제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야.’

    그는 낡은 금속 조각을 쥔 채, 어둠 속에서 홀로 조용히 맹세했다. 코볼트의 잿빛 숨결 속에서, 작지만 강렬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스페이스 오페라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숨결

    코볼트 행성의 하늘은 언제나 병든 오렌지색이었다. 썩어 문드러진 핏빛 노을과 흡사한 그 빛은, 태양이 제 힘을 잃고 죽어가고 있다는 착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 행성 사람들에게 태양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지하 깊은 곳에서 끌어 올려야 할 ‘심장석’뿐이었다.

    카엘은 이 심장석 광산의 가장 깊은 막장에서 일했다. 땀에 절은 몸은 철판과 흙먼지로 뒤덮여 끈적거렸고, 헬멧의 조명등이 비추는 좁은 시야는 늘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위험으로 가득했다. ‘드르륵, 쾅!’ 거대한 굴착기가 지하의 암반을 찢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그 진동은 뼛속까지 울려 퍼져 영혼마저 흔드는 듯했다.

    “젠장, 또 긁혔잖아.”

    카엘은 왼팔뚝에 길게 그어진 상처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광석 채취용 해머는 이미 수십 번도 더 수리한 낡은 것이었다. 제국이 보급하는 장비들은 늘 그랬다. 간신히 작동하는 수준의 싸구려이거나, 아예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였다. 그들은 코볼트 행성의 생명들을 소모품처럼 여겼다. 행성 자체가 거대한 소비재였으니까.

    “카엘, 괜찮나? 오늘은 작업량이 심상치 않아.”

    옆 막장에서 늙은 야렉이 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야렉은 40년 넘게 이 막장에서 심장석을 캐왔다. 그의 등은 이미 돌처럼 굽어 있었고, 얼굴은 깊은 주름살과 검버섯으로 가득했다. 그의 눈만이 여전히 빛나고 있었는데, 그 빛은 고통과 체념, 그리고 어딘가 희미한 반항심이 뒤섞인 불꽃이었다.

    “걱정 마세요, 야렉 아저씨. 제가 아직 팔팔합니다.”

    카엘은 일부러 밝게 대답했지만, 심장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채취량이 두 배로 늘어났다. 제국 병사들이 어제저녁 마을에 들어와 어린아이들까지 작업에 동원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세금 체납’이라는 명목이었지만, 그건 늘 그랬듯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제국은 그저 더 많은 것을 원할 뿐이었다.

    갑자기, 지반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쿠구궁!’ 굉음과 함께 머리 위에서 자잘한 돌 부스러기가 쏟아져 내렸다. 카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무슨 일이야?!”

    야렉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어진 것은 비명이었다.

    “악! 다리가… 다리가 깔렸어!”

    카엘은 몸을 돌렸다. 야렉의 막장 쪽이었다. 굴착기의 한 부분이 무너지면서 야렉의 다리를 덮친 것이었다. 거대한 철골이 그의 다리를 짓눌러 피가 흥건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야렉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야렉 아저씨!”

    카엘은 망설일 틈도 없이 달려갔다. 다른 광부들도 삽과 곡괭이를 들고 달려왔지만, 그 거대한 철골을 옮길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제국이 제공하는 비상 장비는 늘 말뿐이었다.

    “비켜! 이 멍청이들아!”

    그때, 저편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제국의 감시병, 센추리온 발레리우스였다. 번쩍이는 은빛 갑옷과 휘장, 번들거리는 그의 얼굴은 이 지저분한 광산과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의 뒤에는 중무장한 병사들이 두 명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방독면을 쓰고 있었지만, 발레리우스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이 더러운 공기조차 그에게는 하찮은 것인 양.

    “무슨 소란이야? 작업 시간을 지체시키다니, 반역이라도 하려는 건가?”

    발레리우스는 야렉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하게 물었다.

    “센추리온 님! 야렉 아저씨가 깔렸습니다! 당장 구조 장비를…”

    카엘이 외치려 하자, 발레리우스의 시선이 그를 꿰뚫었다. 차갑고 무정한 눈동자였다.

    “구조 장비? 흠, 저 늙은이가 제국에 더 이상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나? 손실은 손실일 뿐. 대체할 인력은 넘쳐난다.”

    “뭐라고요?!”

    카엘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 늙은 광부가 평생을 바쳐 제국에 심장석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쓸모없는 존재 취급이라니.

    “닥쳐! 이 하찮은 코볼트 놈! 너는 그저 제국의 재산을 캐내는 기계일 뿐이다. 명령을 어기고 소란을 피운 죄를 물어야겠군.”

    발레리우스는 손짓했다. 뒤따르던 병사들이 둔탁한 진압봉을 들고 카엘에게 다가왔다.

    “저리 가! 야렉 아저씨는 우리가 구해야 해!”

    카엘은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야렉이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카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도망쳐라. 나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카엘은 도망칠 수 없었다. 야렉 아저씨는 그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어릴 적 고아가 된 그를 거두어 광부의 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퍽!’

    진압봉이 카엘의 어깨를 강타했다. 뼈가 울리는 고통에 카엘은 비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다시 야렉의 막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렉은 더 이상 신음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흐릿한 동공은 이미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해방감일까, 아니면 체념의 끝일까.

    “어이, 이 노인네 죽었잖아? 이봐, 발레리우스 센추리온!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한 병사가 무심하게 말했다. 발레리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시체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

    “그대로 놔둬. 광산 매장량이 줄어든 건 아니니까. 그리고 저 건방진 놈은 끌고 가서 교육을 좀 시켜.”

    병사들이 다시 카엘에게 다가왔다. 카엘은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붙잡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심장 속에서 차가운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끌려갈 순 없었다. 야렉 아저씨의 죽음이 이렇게 허무하게 묻힐 수는 없었다.

    “그래, 교육… 시키지. 내가. 네놈들에게.”

    카엘의 눈빛이 변했다.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했던 그 눈에는 이제 날카로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해머를 쥐는 것보다 훨씬 강하게. 병사들이 한 발짝 더 다가오자, 카엘은 갑자기 몸을 숙이며 막장 깊은 곳으로 달렸다.

    “저놈 잡아!”

    발레리우스의 고함이 막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병사들이 뒤쫓았지만, 이 막장은 카엘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수십 년간 파고든 복잡한 갱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좁고 어두운 틈새로 몸을 던지고, 낡은 지지대 사이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병사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카엘은 한참을 달려 멈춰 섰다. 숨을 헐떡이며 몸을 기댄 곳은, 야렉 아저씨가 늘 ‘우리들의 비밀 기지’라 부르던 버려진 수갱 입구였다. 헬멧의 조명등을 끄자, 완전한 어둠이 그를 삼켰다. 차갑고 끈적이는 어둠.

    이 어둠 속에서 카엘은 야렉의 마지막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제국 센추리온의 오만하고 차가운 얼굴을. 그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을 뒤졌다. 야렉 아저씨가 생전에 몰래 건네주었던 낡은 주머니. 그 안에는 먼지 덮인 작은 금속 조각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코볼트 행성의 상징, 그러나 제국에 의해 금지된 문양이었다. 날개를 펼친 채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새의 형상. 잿빛 하늘을 뚫고 날아오르려는 작은 불꽃의 상징.

    카엘은 금속 조각을 꽉 쥐었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는 야렉 아저씨의 시신과, 그의 옆을 무심하게 지나치는 제국 병사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저씨…”

    카엘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렸다. 끓어오르는 분노, 솟아나는 슬픔, 그리고 새롭게 싹트는 결의가 뒤섞여 심장을 채웠다.

    ‘이제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야.’

    그는 낡은 금속 조각을 쥔 채, 어둠 속에서 홀로 조용히 맹세했다. 코볼트의 잿빛 숨결 속에서, 작지만 강렬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마법소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거리의 서곡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잿빛 거리, 아린의 하루는 삐걱거리는 나무 침대 위에서 시작되었다. 눅눅한 공기 속으로 희미한 비린내와 먼지 냄새가 뒤섞여 스며들었다. 창문 없는 흙벽 오두막은 새벽의 냉기를 온전히 막아주지 못했다. 아린은 얇은 누더기 이불을 끌어올려 옆에 누운 미나의 마른 어깨를 덮어주었다. 미나의 숨소리는 여전히 가늘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미열이 감돌았다.

    “미나….”

    아린은 작게 속삭였지만, 미나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열병은 벌써 한 달째 미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 잿빛 거리에서는 감기조차 사치였다. 변변한 약초 하나 구하기도 힘들었고, 제국의 병원 문턱은 일반 평민들에게는 하늘만큼이나 높았다. 저 멀리, 동이 터오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우뚝 솟은 황궁의 첨탑이 보였다. 그곳은 금빛으로 번쩍이며, 이곳 잿빛 거리의 비참함과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빛났다. 황제와 귀족들은 매일밤 성대한 연회를 즐기며 풍족한 삶을 누리겠지.

    차가운 돌바닥에 맨발을 내딛는 아린의 몸은 이미 익숙한 고통으로 가득했다. 어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잡초라도 뜯으러 나갔다가 긁힌 무릎이 쓰라렸다. 부어오른 손목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살아남는 것, 그리고 미나를 살리는 것, 그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목표였다.

    “누나, 나 배고파….”

    어느새 잠에서 깬 미나가 가늘게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아린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마른침을 삼킨 아린은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냈다.

    “응, 응. 우리 미나. 누나가 맛있는 거 구해올게. 조금만 기다려.”

    하지만 ‘맛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린조차 알 수 없었다. 주머니 속에는 어제 밤늦게까지 매달려 엮은 풀 바구니 몇 개를 팔아 얻은 동전 한 닢이 전부였다. 쌀 한 줌조차 살 수 없는 돈이었다.

    아린은 낡은 외투를 걸치고 오두막을 나섰다. 잿빛 거리는 새벽부터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그 활기는 희망의 것이 아닌, 절박한 생존의 아우성이었다.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노인, 부모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흔했다. 거리에 울려 퍼지는 쉰 목소리의 상인들은 어제 팔다 남은 시든 채소나 정체불명의 잡동사니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린은 익숙하게 인파를 헤치고 가장 구석진 골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칠고 시들었지만, 먹을 수 있는 풀뿌리나 버려진 뼈 조각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 한참을 헤매던 아린의 눈에, 길바닥에 떨어진 자줏빛 열매 몇 개가 들어왔다. 누군가 먹다가 버린 것 같았다. 그리 달지는 않지만, 지금 미나에게는 무엇보다 귀한 비타민이 될 터였다. 아린은 망설임 없이 열매를 주워 낡은 천에 싸서 품에 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길을 비켜라! 제국군 수색대다!”

    거친 고함이 잿빛 거리를 뒤흔들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순식간에 공포가 드리워졌다. 모든 활기는 사라지고, 마치 유령이 지나간 듯 정적이 흘렀다. 철컥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무장한 제국군 병사들이 우르르 골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갑옷은 황궁처럼 빛났지만, 그 빛은 섬뜩하고 위압적이었다.

    “수상한 물품을 소지한 자는 즉시 내놓아라! 제국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병사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길가의 좌판을 뒤엎었다. 상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쫓겨났고, 간신히 모아두었던 식량들이 발 아래에서 짓밟혔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아린은 얼어붙은 채 몸을 웅크렸다. 제국군은 매달 한두 번씩 이렇게 들이닥쳐 ‘수상한 물품’이라는 명목으로 주민들의 남은 식량이나 귀중품을 강탈해갔다. 반항하는 자는 가차 없이 끌려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 병사가 아린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얼굴은 차갑고 무감각했다.
    “이 조그만 것. 뭘 숨기고 있지?”
    병사의 눈은 매서웠고, 아린의 품속에 넣은 열매 뭉치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듯했다. 아린은 저도 모르게 품을 감쌌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짓말! 감히 제국군을 기만하려 드는가?”

    병사의 거친 손이 아린의 어깨를 잡아챘다. 아린은 휘청이며 넘어졌다. 품속에 있던 열매 뭉치가 흙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짓밟힌 열매들은 순식간에 으깨어져 붉은 즙을 흩뿌렸다. 마치 피처럼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안 돼… 미나…!”

    아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고작 열매 몇 개였지만, 미나에게는 생명줄과 같은 것이었다. 그마저도 빼앗기고, 짓밟혔다. 병사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아린을 내려다봤다.

    “고작 이딴 쓰레기를 감추려 했느냐? 하찮은 것.”

    그의 말이 아린의 귓가에 비수처럼 박혔다. 아린은 바닥에 엎드린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무력함에, 이 모든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치솟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미나의 고통스러운 얼굴이, 간절한 눈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은 그저 무능한 존재일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절망이 아린의 심장을 집어삼키는 순간, 엉망이 된 열매 파편들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터져 나왔다. 아주 작고 은은한 빛이었다. 마치 꺼져가는 촛불처럼 흔들렸지만,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아린의 심장 속에서, 꽁꽁 얼어붙었던 무언가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차갑던 손끝과 발끝에 따스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병사는 아직 아린을 비웃고 있었다. 그때, 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안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깜빡였다. 병사는 순간 흠칫하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본능적인 위협감에 그의 얼굴에 미묘한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그는 자신의 나약함에 화가 난 듯 헛기침을 하며 다시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다음엔 이런 짓 하지 마라, 더러운 것.”

    병사는 그 말과 함께 다른 병사들에게 손짓하며 골목을 떠났다. 그들이 가져갈 것을 모두 챙겨갔기에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잿빛 거리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이전과는 달랐다. 사람들의 눈빛에는 전보다 깊은 절망과 함께, 차갑게 식어버린 분노가 서려 있었다.

    아린은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 떨리는 손으로 짓밟힌 열매 조각들을 쓸어 모았다. 그 속에서 빛나던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따스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잿빛 거리의 풍경, 짓밟힌 생명, 절망에 찬 사람들의 모습이 그녀의 심장에 새겨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멀리 보이는 황궁의 첨탑을 응시했다. 금빛으로 빛나는 저곳이,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이었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아린의 눈빛에 굳은 결심이 스쳤다. 그 작은 변화는 잿빛 거리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새로운 서곡을 연주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시작된 미약한 떨림은, 머지않아 거대한 파동이 되어 세상을 뒤흔들게 될 것이었다.

  • 마법소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거리의 서곡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잿빛 거리, 아린의 하루는 삐걱거리는 나무 침대 위에서 시작되었다. 눅눅한 공기 속으로 희미한 비린내와 먼지 냄새가 뒤섞여 스며들었다. 창문 없는 흙벽 오두막은 새벽의 냉기를 온전히 막아주지 못했다. 아린은 얇은 누더기 이불을 끌어올려 옆에 누운 미나의 마른 어깨를 덮어주었다. 미나의 숨소리는 여전히 가늘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미열이 감돌았다.

    “미나….”

    아린은 작게 속삭였지만, 미나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열병은 벌써 한 달째 미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 잿빛 거리에서는 감기조차 사치였다. 변변한 약초 하나 구하기도 힘들었고, 제국의 병원 문턱은 일반 평민들에게는 하늘만큼이나 높았다. 저 멀리, 동이 터오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우뚝 솟은 황궁의 첨탑이 보였다. 그곳은 금빛으로 번쩍이며, 이곳 잿빛 거리의 비참함과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빛났다. 황제와 귀족들은 매일밤 성대한 연회를 즐기며 풍족한 삶을 누리겠지.

    차가운 돌바닥에 맨발을 내딛는 아린의 몸은 이미 익숙한 고통으로 가득했다. 어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잡초라도 뜯으러 나갔다가 긁힌 무릎이 쓰라렸다. 부어오른 손목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살아남는 것, 그리고 미나를 살리는 것, 그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목표였다.

    “누나, 나 배고파….”

    어느새 잠에서 깬 미나가 가늘게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아린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마른침을 삼킨 아린은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냈다.

    “응, 응. 우리 미나. 누나가 맛있는 거 구해올게. 조금만 기다려.”

    하지만 ‘맛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린조차 알 수 없었다. 주머니 속에는 어제 밤늦게까지 매달려 엮은 풀 바구니 몇 개를 팔아 얻은 동전 한 닢이 전부였다. 쌀 한 줌조차 살 수 없는 돈이었다.

    아린은 낡은 외투를 걸치고 오두막을 나섰다. 잿빛 거리는 새벽부터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그 활기는 희망의 것이 아닌, 절박한 생존의 아우성이었다.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노인, 부모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흔했다. 거리에 울려 퍼지는 쉰 목소리의 상인들은 어제 팔다 남은 시든 채소나 정체불명의 잡동사니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린은 익숙하게 인파를 헤치고 가장 구석진 골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칠고 시들었지만, 먹을 수 있는 풀뿌리나 버려진 뼈 조각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 한참을 헤매던 아린의 눈에, 길바닥에 떨어진 자줏빛 열매 몇 개가 들어왔다. 누군가 먹다가 버린 것 같았다. 그리 달지는 않지만, 지금 미나에게는 무엇보다 귀한 비타민이 될 터였다. 아린은 망설임 없이 열매를 주워 낡은 천에 싸서 품에 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길을 비켜라! 제국군 수색대다!”

    거친 고함이 잿빛 거리를 뒤흔들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순식간에 공포가 드리워졌다. 모든 활기는 사라지고, 마치 유령이 지나간 듯 정적이 흘렀다. 철컥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무장한 제국군 병사들이 우르르 골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갑옷은 황궁처럼 빛났지만, 그 빛은 섬뜩하고 위압적이었다.

    “수상한 물품을 소지한 자는 즉시 내놓아라! 제국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병사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길가의 좌판을 뒤엎었다. 상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쫓겨났고, 간신히 모아두었던 식량들이 발 아래에서 짓밟혔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아린은 얼어붙은 채 몸을 웅크렸다. 제국군은 매달 한두 번씩 이렇게 들이닥쳐 ‘수상한 물품’이라는 명목으로 주민들의 남은 식량이나 귀중품을 강탈해갔다. 반항하는 자는 가차 없이 끌려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 병사가 아린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얼굴은 차갑고 무감각했다.
    “이 조그만 것. 뭘 숨기고 있지?”
    병사의 눈은 매서웠고, 아린의 품속에 넣은 열매 뭉치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듯했다. 아린은 저도 모르게 품을 감쌌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짓말! 감히 제국군을 기만하려 드는가?”

    병사의 거친 손이 아린의 어깨를 잡아챘다. 아린은 휘청이며 넘어졌다. 품속에 있던 열매 뭉치가 흙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짓밟힌 열매들은 순식간에 으깨어져 붉은 즙을 흩뿌렸다. 마치 피처럼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안 돼… 미나…!”

    아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고작 열매 몇 개였지만, 미나에게는 생명줄과 같은 것이었다. 그마저도 빼앗기고, 짓밟혔다. 병사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아린을 내려다봤다.

    “고작 이딴 쓰레기를 감추려 했느냐? 하찮은 것.”

    그의 말이 아린의 귓가에 비수처럼 박혔다. 아린은 바닥에 엎드린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무력함에, 이 모든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치솟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미나의 고통스러운 얼굴이, 간절한 눈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은 그저 무능한 존재일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절망이 아린의 심장을 집어삼키는 순간, 엉망이 된 열매 파편들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터져 나왔다. 아주 작고 은은한 빛이었다. 마치 꺼져가는 촛불처럼 흔들렸지만,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아린의 심장 속에서, 꽁꽁 얼어붙었던 무언가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차갑던 손끝과 발끝에 따스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병사는 아직 아린을 비웃고 있었다. 그때, 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안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깜빡였다. 병사는 순간 흠칫하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본능적인 위협감에 그의 얼굴에 미묘한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그는 자신의 나약함에 화가 난 듯 헛기침을 하며 다시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다음엔 이런 짓 하지 마라, 더러운 것.”

    병사는 그 말과 함께 다른 병사들에게 손짓하며 골목을 떠났다. 그들이 가져갈 것을 모두 챙겨갔기에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잿빛 거리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이전과는 달랐다. 사람들의 눈빛에는 전보다 깊은 절망과 함께, 차갑게 식어버린 분노가 서려 있었다.

    아린은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 떨리는 손으로 짓밟힌 열매 조각들을 쓸어 모았다. 그 속에서 빛나던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따스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잿빛 거리의 풍경, 짓밟힌 생명, 절망에 찬 사람들의 모습이 그녀의 심장에 새겨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멀리 보이는 황궁의 첨탑을 응시했다. 금빛으로 빛나는 저곳이,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이었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아린의 눈빛에 굳은 결심이 스쳤다. 그 작은 변화는 잿빛 거리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새로운 서곡을 연주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시작된 미약한 떨림은, 머지않아 거대한 파동이 되어 세상을 뒤흔들게 될 것이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숨결

    코볼트 행성의 하늘은 언제나 병든 오렌지색이었다. 썩어 문드러진 핏빛 노을과 흡사한 그 빛은, 태양이 제 힘을 잃고 죽어가고 있다는 착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 행성 사람들에게 태양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지하 깊은 곳에서 끌어 올려야 할 ‘심장석’뿐이었다.

    카엘은 이 심장석 광산의 가장 깊은 막장에서 일했다. 땀에 절은 몸은 철판과 흙먼지로 뒤덮여 끈적거렸고, 헬멧의 조명등이 비추는 좁은 시야는 늘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위험으로 가득했다. ‘드르륵, 쾅!’ 거대한 굴착기가 지하의 암반을 찢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그 진동은 뼛속까지 울려 퍼져 영혼마저 흔드는 듯했다.

    “젠장, 또 긁혔잖아.”

    카엘은 왼팔뚝에 길게 그어진 상처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광석 채취용 해머는 이미 수십 번도 더 수리한 낡은 것이었다. 제국이 보급하는 장비들은 늘 그랬다. 간신히 작동하는 수준의 싸구려이거나, 아예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였다. 그들은 코볼트 행성의 생명들을 소모품처럼 여겼다. 행성 자체가 거대한 소비재였으니까.

    “카엘, 괜찮나? 오늘은 작업량이 심상치 않아.”

    옆 막장에서 늙은 야렉이 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야렉은 40년 넘게 이 막장에서 심장석을 캐왔다. 그의 등은 이미 돌처럼 굽어 있었고, 얼굴은 깊은 주름살과 검버섯으로 가득했다. 그의 눈만이 여전히 빛나고 있었는데, 그 빛은 고통과 체념, 그리고 어딘가 희미한 반항심이 뒤섞인 불꽃이었다.

    “걱정 마세요, 야렉 아저씨. 제가 아직 팔팔합니다.”

    카엘은 일부러 밝게 대답했지만, 심장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채취량이 두 배로 늘어났다. 제국 병사들이 어제저녁 마을에 들어와 어린아이들까지 작업에 동원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세금 체납’이라는 명목이었지만, 그건 늘 그랬듯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제국은 그저 더 많은 것을 원할 뿐이었다.

    갑자기, 지반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쿠구궁!’ 굉음과 함께 머리 위에서 자잘한 돌 부스러기가 쏟아져 내렸다. 카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무슨 일이야?!”

    야렉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어진 것은 비명이었다.

    “악! 다리가… 다리가 깔렸어!”

    카엘은 몸을 돌렸다. 야렉의 막장 쪽이었다. 굴착기의 한 부분이 무너지면서 야렉의 다리를 덮친 것이었다. 거대한 철골이 그의 다리를 짓눌러 피가 흥건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야렉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야렉 아저씨!”

    카엘은 망설일 틈도 없이 달려갔다. 다른 광부들도 삽과 곡괭이를 들고 달려왔지만, 그 거대한 철골을 옮길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제국이 제공하는 비상 장비는 늘 말뿐이었다.

    “비켜! 이 멍청이들아!”

    그때, 저편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제국의 감시병, 센추리온 발레리우스였다. 번쩍이는 은빛 갑옷과 휘장, 번들거리는 그의 얼굴은 이 지저분한 광산과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의 뒤에는 중무장한 병사들이 두 명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방독면을 쓰고 있었지만, 발레리우스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이 더러운 공기조차 그에게는 하찮은 것인 양.

    “무슨 소란이야? 작업 시간을 지체시키다니, 반역이라도 하려는 건가?”

    발레리우스는 야렉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하게 물었다.

    “센추리온 님! 야렉 아저씨가 깔렸습니다! 당장 구조 장비를…”

    카엘이 외치려 하자, 발레리우스의 시선이 그를 꿰뚫었다. 차갑고 무정한 눈동자였다.

    “구조 장비? 흠, 저 늙은이가 제국에 더 이상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나? 손실은 손실일 뿐. 대체할 인력은 넘쳐난다.”

    “뭐라고요?!”

    카엘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 늙은 광부가 평생을 바쳐 제국에 심장석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쓸모없는 존재 취급이라니.

    “닥쳐! 이 하찮은 코볼트 놈! 너는 그저 제국의 재산을 캐내는 기계일 뿐이다. 명령을 어기고 소란을 피운 죄를 물어야겠군.”

    발레리우스는 손짓했다. 뒤따르던 병사들이 둔탁한 진압봉을 들고 카엘에게 다가왔다.

    “저리 가! 야렉 아저씨는 우리가 구해야 해!”

    카엘은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야렉이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카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도망쳐라. 나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카엘은 도망칠 수 없었다. 야렉 아저씨는 그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어릴 적 고아가 된 그를 거두어 광부의 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퍽!’

    진압봉이 카엘의 어깨를 강타했다. 뼈가 울리는 고통에 카엘은 비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다시 야렉의 막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렉은 더 이상 신음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흐릿한 동공은 이미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해방감일까, 아니면 체념의 끝일까.

    “어이, 이 노인네 죽었잖아? 이봐, 발레리우스 센추리온!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한 병사가 무심하게 말했다. 발레리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시체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

    “그대로 놔둬. 광산 매장량이 줄어든 건 아니니까. 그리고 저 건방진 놈은 끌고 가서 교육을 좀 시켜.”

    병사들이 다시 카엘에게 다가왔다. 카엘은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붙잡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심장 속에서 차가운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끌려갈 순 없었다. 야렉 아저씨의 죽음이 이렇게 허무하게 묻힐 수는 없었다.

    “그래, 교육… 시키지. 내가. 네놈들에게.”

    카엘의 눈빛이 변했다.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했던 그 눈에는 이제 날카로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해머를 쥐는 것보다 훨씬 강하게. 병사들이 한 발짝 더 다가오자, 카엘은 갑자기 몸을 숙이며 막장 깊은 곳으로 달렸다.

    “저놈 잡아!”

    발레리우스의 고함이 막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병사들이 뒤쫓았지만, 이 막장은 카엘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수십 년간 파고든 복잡한 갱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좁고 어두운 틈새로 몸을 던지고, 낡은 지지대 사이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병사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카엘은 한참을 달려 멈춰 섰다. 숨을 헐떡이며 몸을 기댄 곳은, 야렉 아저씨가 늘 ‘우리들의 비밀 기지’라 부르던 버려진 수갱 입구였다. 헬멧의 조명등을 끄자, 완전한 어둠이 그를 삼켰다. 차갑고 끈적이는 어둠.

    이 어둠 속에서 카엘은 야렉의 마지막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제국 센추리온의 오만하고 차가운 얼굴을. 그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을 뒤졌다. 야렉 아저씨가 생전에 몰래 건네주었던 낡은 주머니. 그 안에는 먼지 덮인 작은 금속 조각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코볼트 행성의 상징, 그러나 제국에 의해 금지된 문양이었다. 날개를 펼친 채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새의 형상. 잿빛 하늘을 뚫고 날아오르려는 작은 불꽃의 상징.

    카엘은 금속 조각을 꽉 쥐었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는 야렉 아저씨의 시신과, 그의 옆을 무심하게 지나치는 제국 병사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저씨…”

    카엘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렸다. 끓어오르는 분노, 솟아나는 슬픔, 그리고 새롭게 싹트는 결의가 뒤섞여 심장을 채웠다.

    ‘이제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야.’

    그는 낡은 금속 조각을 쥔 채, 어둠 속에서 홀로 조용히 맹세했다. 코볼트의 잿빛 숨결 속에서, 작지만 강렬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