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대본: 그림자 속 속삭임

    **장르:**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로맨스

    **제목:** 잿빛 낙원

    ### 에피소드 1: 폐허의 메아리

    **[프롤로그]**

    **#1. 폐허가 된 도시 외곽 – 해질녘**

    * **배경:** 한때 번성했을 도시의 잔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앙상한 철근 구조물들이 뼈대처럼 솟아 있고, 깨진 유리창들은 핏빛 노을을 반사하며 섬뜩하게 빛난다. 길가에는 이름 모를 넝쿨 식물들이 콘크리트를 집어삼키고, 눅눅한 흙먼지 냄새가 공중에 가득하다.
    * **인물:** 리안 (20대 후반, 날카로운 눈매와 다부진 체격. 검게 그을린 가죽 재킷과 낡은 전투화 차림. 한쪽 어깨에는 낡은 배낭, 다른 손에는 녹슨 철근을 개조한 칼을 들고 있다.)
    * **음향:** 바람이 텅 빈 건물 사이를 휘젓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울음소리 (변종의 소리).

    **리안 (내레이션)**
    > 세상은 한 순간에 끝났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변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를 경계했고, 밤은 낮보다 더 많은 것을 숨겼다.

    * 리안은 조심스럽게 무너진 상점가를 걷는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 그녀의 시선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핀다.
    * 낡은 선반 위에서 먼지 쌓인 통조림 캔 하나를 발견한다. 내용물은 알 수 없지만, 귀한 식량이다. 그녀는 캔을 배낭에 넣는다.
    *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콰앙!’ 하는 굉음이 들린다. 땅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건물 잔해 일부가 무너져 내린다.
    * 리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그녀는 즉시 몸을 낮은 벽 뒤로 숨기고 칼을 단단히 쥔다.

    **리안 (속삭이듯)**
    >…놈들인가. 벌써 여기까지 왔다고?

    *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짐승 같기도 하고, 인간 같기도 한 기괴한 실루엣. ‘변종’들 중에서도 크고 위험한 개체인 듯하다.
    * 리안은 숨을 죽인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녀는 익숙하게 위험에 대처하고 있지만, 여전히 생존은 위태롭다.
    * 그녀는 괴생명체가 멀어지기를 기다리다, 기척이 사라지자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이동한다.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한다.

    **[본 에피소드]**

    **#2. 지하 폐쇄 통로 – 밤**

    * **배경:** 무너진 도시의 지하로 이어진 좁고 어두운 통로.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흙냄새가 진동한다. 리안이 들고 있는 작은 손전등 불빛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 **음향:** 물 떨어지는 소리, 리안의 조심스러운 발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변종들의 낮은 울음소리.

    **리안 (내레이션)**
    > 지하 통로는 언제나 마지막 선택지였다. 그곳엔 빛이 없고, 무엇이 숨어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밖은 더 위험했다.

    * 리안은 통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어딘가 익숙한 길인 듯, 망설임 없이 나아간다.
    * 갑자기, 그녀의 손전등 불빛이 통로 한쪽 벽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를 스친다. 리안은 순간 몸을 굳힌다.
    *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고,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동자가 섬광처럼 빛난다. 짙은 밤색, 혹은 보랏빛에 가까운, 인간의 것이 아닌 눈빛.

    **리안**
    >…누구야?

    * 그림자 속에서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 **인물:** 카이 (20대 후반 추정. 인간과 흡사한 형태지만, 피부는 미묘하게 비늘 같은 패턴이 느껴지고, 손가락은 일반 인간보다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 있다. 옷은 넝마 같은 차림이지만, 그의 몸은 단단한 근육질이며 민첩해 보인다. 그의 눈은 여전히 리안에게 고정되어 있다.)
    * 리안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칼을 치켜든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그녀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함께 미묘한 동요가 스친다.

    **리안**
    >…카이. 네가 왜 여기 있어? 인간 정착지 근처엔 얼씬도 말랬잖아.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면…

    **카이**
    > (낮고 쉰 목소리.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떨림이 있지만, 단호하다.)
    > 나도 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너도.

    * 카이는 리안에게 한 발짝 다가선다. 리안은 뒷걸음질 치지 않지만, 칼끝은 여전히 그를 향해 있다.
    * 카이의 시선은 리안의 얼굴에 머문다. 그의 눈빛에는 경계심보다, 어떤 깊은 연민과 익숙함이 서려 있다.

    **리안**
    > (조금 낮아진 목소리)
    > 넌… 너희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해. 여기에 있으면 위험해.

    **카이**
    > 위험한 건 너도 마찬가지야. 저 밖의 ‘사냥꾼’들이… 점점 여기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어.

    * ‘사냥꾼’이라는 말에 리안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들은 일반 변종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지능적인 괴생명체들이다.

    **리안**
    >…그들은 너희 같은 변종들도 사냥하잖아.

    **카이**
    > 우리는 인간의 기준으로 ‘변종’일 뿐. 그들에게는 그저 먹잇감일 뿐이야. 너희와 다를 바 없어.

    *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흐른다. 이 침묵 속에는 과거의 어떤 기억들이 얽혀 있는 듯하다.

    **#3. 지하 통로 – 계속**

    * **배경:** 여전히 어둡고 습한 지하 통로.
    * **음향:** 멀리서 들리던 변종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바닥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한두 마리가 아닌 듯, 여러 발소리가 섞여 있다.

    **리안**
    > (카이에게 눈짓하며)
    > 저 소리… 심상치 않아. 사냥꾼들이야.

    * 카이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난다. 그의 몸에서 긴장감이 느껴진다.
    * 천장에서 흙먼지가 떨어지고, 통로 입구 쪽에서 굵고 끈적한 촉수 같은 것이 꿈틀거리는 그림자가 비친다.

    **카이**
    > (낮게 으르렁거리듯)
    > 숫자가 너무 많아. 이대로는…

    * 리안은 칼을 단단히 쥐고, 등 뒤에 있던 소형 권총을 뽑아든다. 그녀의 얼굴에는 결의가 서려 있다.

    **리안**
    > 흩어져서 유인해야 해. 한쪽으로 몰리면… 끝이야.

    **카이**
    > (리안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 내가 양동할게. 넌 이쪽으로.

    * 카이는 망설임 없이 촉수 괴생명체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간다. 그의 움직임은 그림자처럼 빠르고 유연하다. 그는 벽을 타고 오르거나, 무너진 잔해 사이를 빠르게 통과하며 사냥꾼들의 주의를 끈다.
    * ‘크아악!’ 하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통로를 가득 채운다.
    * 리안은 반대편, 좀 더 좁은 통로로 몸을 숨긴다. 그녀는 카이가 유인한 괴생명체들이 카이를 쫓아가는 것을 확인한 후, 권총을 꺼내 조준한다.
    * ‘탕! 탕! 탕!’ 총성이 어둠을 찢는다. 그녀의 사격은 정확했고, 괴생명체 몇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 하지만 사냥꾼들은 계속해서 몰려온다. 그들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리안을 향해 돌진한다.
    * 리안은 칼을 뽑아든다. 그녀는 능숙하게 근접전을 벌인다. 날카로운 칼날이 괴생명체들의 약점을 파고든다.
    * 그때, 리안의 등 뒤에서 또 다른 사냥꾼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 그녀는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팔을 베이고 만다.
    * ‘윽!’ 리안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온다. 팔에서는 시뻘건 피가 솟구친다.
    * 바로 그 순간, 그림자처럼 나타난 카이가 그 사냥꾼의 등 뒤로 뛰어올라 목을 움켜쥔다. 카이의 손톱이 괴생명체의 목을 깊이 파고든다. ‘끄으윽…’ 소리를 내며 사냥꾼이 축 늘어진다.
    * 카이는 재빨리 리안에게 달려와 그녀의 팔을 확인한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역력하다.

    **카이**
    > 괜찮아? 상처가 깊어.

    **리안**
    > (이를 악물고)
    > 괜찮아… 젠장, 피가 너무 많이 나.

    * 사냥꾼들의 수가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 몇 마리가 주변에 남아 으르렁거리고 있다.
    * 카이는 리안의 팔을 붙잡고, 그녀를 더 깊은 통로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그가 입고 있던 넝마 같은 옷을 찢어 리안의 상처를 임시로 지혈한다.
    * 둘은 좁은 틈새에 몸을 숨긴다. 흙먼지와 부패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4. 좁은 틈새 – 계속**

    * **배경:** 거의 빛이 들지 않는 좁은 틈새. 두 사람의 몸이 바싹 붙어 있다. 카이의 거친 숨소리와 리안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섞인다.
    * **음향:** 멀리서 들리는 사냥꾼들의 경계성 울음소리, 두 사람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소리.

    * 카이는 리안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낸다. 그의 손은 인간의 것보다 거칠고, 미묘하게 차가운 감촉이다. 하지만 그 손이 자신을 구했고, 지금은 상처를 지혈하고 있었다.
    * 리안은 그의 손을 잠시 바라본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손. 동시에 자신을 구하고 있는 손.

    **리안**
    >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왜 그랬어? 그냥 날 버리고 도망쳤어도 됐을 텐데.

    **카이**
    > (리안의 눈을 응시한다. 그의 눈동자에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보랏빛이 맴돈다.)
    > 널… 혼자 둘 수 없었어.

    * 그의 짧은 말 속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들이 실려 있었다. 리안은 그의 눈빛 속에서 연민과 함께, 자신과 똑같은 외로움과 갈망을 본다.
    * 둘 사이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좁은 공간, 목숨을 건 싸움, 그리고 금기된 감정들이 뒤섞인다.

    **리안**
    >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본다. 목소리가 떨린다.)
    > 우린… 달라. 알아야 해. 너희 부족 사람들은 인간을 경계하고, 인간들은 너희를… 괴물로 봐. 내가 널 도왔다는 걸 알면… 아니, 네가 여기 있었다는 걸 알면… 모두가 위험해져.

    **카이**
    > (그녀의 턱을 잡아 부드럽게 자신을 보게 한다.)
    > 달라? 적어도… 나한테는 달라.

    * 카이의 눈빛이 리안의 마음에 깊숙이 박힌다. 그 속에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무언가, 인간과 변종이라는 종족의 경계를 허물려는 강렬한 끌림이 담겨 있다.
    * 리안은 그의 눈을 피할 수 없다. 그녀의 심장이 더욱 격렬하게 뛰어오른다.

    * 시간이 흐르고, 사냥꾼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위험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이다.
    * 카이는 틈새에서 조심스럽게 나와 주변을 살핀다.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지만, 잠시 몸을 피할 정도는 된다.

    **카이**
    > 가야 해. 이 이상은 위험해. 내가… 인간 정착지 근처까지 데려다줄게.

    **리안**
    > (고개를 젓는다)
    > 아니. 여기서 헤어지자. 널 인간 구역 근처에서 봤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모두가 널 쫓을 거야.

    * 그녀의 말은 현실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 카이는 리안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한다. 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운다.

    **카이**
    >…알겠어.

    * 둘은 통로의 갈림길에 선다. 한쪽은 인간 정착지로 향하는 길, 다른 한쪽은 더 깊은 폐허, 변종들이 주로 서식하는 곳으로 이어진다.
    * 리안은 카이를 향해 돌아선다. 그녀의 표정은 복잡하다.

    **리안**
    > (애써 차갑게 말한다)
    > 다음에 또 마주치면… 그때는 널 죽일지도 몰라.

    * 카이는 그녀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짓는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리안에게 고정되어 있다.

    **카이**
    >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알아. 하지만… 너는 아닐 거야.

    * 카이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 그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 리안은 홀로 남겨진 채, 카이가 사라진 어둠 속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 그녀의 아픈 팔을 만져본다. 카이의 거칠었던 손길이 아직 피부에 남아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리안 (내레이션)**
    > 금지된 만남. 알아야 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왜 자꾸만 너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걸까.

    * 리안의 시선이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체념과 함께, 어쩔 수 없는 이끌림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다음 화 예고]**
    * 폐허를 걷는 리안의 뒷모습.
    * 인간 정착지의 경계를 지키는 생존자들의 모습.
    *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응시하는 카이의 눈빛.

    **다음 화: ‘경계 너머의 그림자’**

  • 이세계 전생 (Isekai)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에피소드 1: 밀실의 메아리

    **[장면 1: 현자의 탑, 비극의 시작]**

    * **#1-1. 현자의 탑 외경**
    * 어둑한 새벽하늘 아래, 거대한 석조 탑이 위용을 자랑한다. 탑의 꼭대기에서는 푸른빛의 마나 장막이 아스라이 흔들린다. 신비롭고 고요하지만, 어딘가 음침한 기운이 감돈다.
    * **내레이션 (한비):** “이세계에서의 삶은 언제나 예측 불허의 연속이었다. 때로는 웅장한 마법과 기사들의 용맹함에 감탄했고, 때로는… 인간 본연의 어두운 그림자에 절망했다. 특히, ‘불가능’이라 불리는 사건 앞에서는, 더더욱.”

    * **#1-2. 탑 입구, 긴장감**
    * 탑 입구에 병사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고, 몇몇 마법사들이 주변을 살피고 있다. 굳은 얼굴의 기사단장 레온이 서 있고, 그의 옆에는 젊은 견습 마법사 엘리안이 울상이 되어 창백한 얼굴로 서 있다.
    * **기사단장 레온:**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젠장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누가 이 마법 장벽을 뚫고 들어갔단 말인가!”
    * **엘리안:** (흐느끼며, 목소리가 떨린다) “아니에요! 기사단장님, 장벽은 멀쩡했어요. 제가 처음 발견했을 때도, 지금도… 외부 침입의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 **내레이션 (한비):** “그리고 오늘도, 그 ‘불가능’이 나를 찾아왔다. ─ 대현자 크로노스 살인 사건. 이세계로 넘어온 지 3년, 난 이제 ‘이세계의 명탐정’으로 불리고 있었다.”

    * **#1-3. 한비 등장**
    * 한비가 병사들의 틈을 비집고 천천히 걸어온다. 현대적인 감각과 이세계 복식이 묘하게 어우러진 차림. 그의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차분하고 날카롭다. 그는 주변의 혼란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 **한비:** (탑 꼭대기의 마나 장막을 올려다보며) “불가능이란 말은, 아직 진실을 찾지 못했다는 뜻에 불과하죠. 제가 보기엔, 저 탑의 마력 장벽은 평소와 다름없이 견고해 보이는데.”
    * **레온:** (한비를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린다) “자네가… 소문으로만 듣던 ‘이세계의 명탐정’이라는 자인가? 젠장, 이런 애송이가 뭘 할 수 있다고.”
    * **엘리안:** (레온의 팔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단장님! 이분은… 대공 전하께서 직접 보내신 분입니다! 그래도 한 번 믿어보시죠…”
    * **한비:**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애송이든 아니든, 사건은 이미 벌어졌고, 당신들의 마법도, 무력도 이 ‘밀실 살인’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모양이네요.”
    * **레온:** (이를 갈며 주먹을 꽉 쥔다) “감히…! 좋다. 그럼 직접 보시지. 대현자님의 서재는 마치 견고한 요새 같았다. 그 안에서 사람이 죽었는데도, 털끝 하나 손상된 곳이 없어! 미친 짓이야!”

    **[장면 2: 밀실 안으로, 첫 번째 관찰]**

    * **#2-1. 서재 입구**
    * 레온이 직접 마법으로 봉인된 서재 문을 조심스럽게 연다. 문이 열리자마자 차가운 공기와 함께 퀴퀴한 종이 냄새, 그리고 희미하지만 압도적인 마력의 잔향이 밀려나온다. 서재 안은 어둡고 무겁다.
    * **레온:** (낮은 목소리로) “여기입니다. 대현자님의 서재. 이 문은… 대현자님께서 직접 마법으로 봉인하셨습니다. 외부에서는 어떤 마법으로도 열 수 없고, 내부에서만 특정한 의식을 통해 해제 가능했죠.”
    * **엘리안:** “제가 아침에 보고를 위해 찾아왔을 때,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어요. 여러 번 불러도 대답이 없으셔서… 결국 기사단장님께 연락드렸죠. 설마… 이런 일이…”

    * **#2-2. 서재 내부, 크로노스의 시신**
    * 서재 내부는 온갖 고문서와 마법 장치들로 가득하다. 책상 위에는 복잡한 마법진과 미완성된 마법 약품들이 놓여있다. 그 중앙에, 대현자 크로노스가 책상에 엎드린 채 미동도 없다. 그의 등에는 작고 정교한 원형의 검은 반점 같은 상처가 선명하다. 이미 주변 마법사들이 시신을 대략적으로 검사한 모양이다.
    * **한비:** (천천히 방을 둘러보며, 눈을 가늘게 뜬다) “음… 완벽한 밀실이군요. 창문은 두꺼운 마법 강화 유리로 덧대어져 있고, 벽면에도 강력한 마력장이 느껴집니다. 그 어떤 생명체도, 마법도 이곳을 뚫고 들어오긴 어렵겠네요.”
    * **레온:** “그렇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살펴보시죠. 외부 침입 흔적은 고사하고, 저 상처 외엔 아무런 외상도 없습니다. 마치… 마법에 의해 증발이라도 한 듯이.”
    * **한비:** (크로노스의 시신 가까이 다가간다. 옆에 놓인 부러진 깃펜을 조심스럽게 집어 든다. 끝부분이 날카롭게 부러져 있고, 미세한 검은 그을음이 묻어있다) “이 깃펜… 흔한 물건은 아니군요. 마력을 담는 데 사용되었을 법한 재질입니다.”
    * **엘리안:** “그건 대현자님께서 늘 아끼시던 ‘별빛 깃펜’이에요. 특별한 마법을 기록하거나, 정교한 마법진을 그릴 때만 사용하셨죠.”

    * **#2-3. 한비의 관찰**
    * 한비가 서재 내부를 꼼꼼히 살핀다. 바닥의 먼지, 책장의 배열, 책상 위의 흐트러진 종이들, 미세한 균열 하나까지. 그의 눈이 번뜩인다. 그는 시신 주변의 바닥을 특히 유심히 본다.
    * **한비:** (시신 주변의 바닥을 유심히 보며) “이 먼지… 서재 안의 일반적인 먼지는 아닌 것 같군요. 아주 미세한, 결정화된 형태입니다. 마치, 특정한 마법 반응으로 인해 발생한 입자 같아요. 이질적입니다.”
    * **엘리안:** “그건… 대현자님께서 최근 연구하시던 ‘시간의 메아리’ 마법의 부산물일 수 있어요. 과거의 흔적을 재현해서 현재에 구현하는 마법이죠.”
    * **한비:** (고개를 끄덕인다) “시간의 메아리… 흥미롭군요. 그리고 이 서재는… 보통의 방이 아닙니다. 대현자님은 자신의 마력을 이용해 이 방 자체를 일종의 마력 증폭기로 사용하셨겠죠. 외부의 기운을 완벽히 차단하고, 내부의 마력을 극대화하는 형태로요.”
    * **레온:** “그래서 외부에서는 접근이 불가능했던 겁니다! 그러니 범인은… 유령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 **한비:** (작게 웃는다) “유령은 증거를 남기지 않죠. 하지만 이 서재는 수많은 증거를 남겼습니다. 문제는, 그 증거들이 너무나도 완벽하게 ‘밀실 살인’을 가리키도록 위장되었다는 점이겠군요.”

    **[장면 3: 단서를 꿰맞추다]**

    * **#3-1. 한비의 심문**
    * 한비가 서재를 나와 복도에서 엘리안과 레온을 마주본다. 그의 표정은 이미 무언가를 찾아낸 듯 차분하다.
    * **한비:** “엘리안님, 크로노스 대현자님께서는 최근 어떤 연구에 몰두하고 계셨나요?”
    * **엘리안:** “주로 ‘시간의 메아리’를 이용한 마법이었어요. 특정 시점의 마력 잔향을 복제해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 잔향의 힘을 빌리는 연구였죠. 마치… 과거의 자신을 불러내는 것처럼요.”
    * **한비:** “그렇다면, 그 마법이 실제로 사용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 **엘리안:** “네. 대현자님은 자신의 마력 서명을 복제해서 서재의 마력 장벽을 시험하는 데 사용하시곤 했어요. 외부에서 자신의 ‘시간의 메아리’를 투영해서 문을 열 수 있는지 테스트하셨죠. 물론, 실패하셨지만요. 마력 서명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아서… 문은 절대 열리지 않았어요.”
    * **한비:** (미소 짓는다) “실패… 확실합니까? 아니면, 그렇게 ‘보이게’ 만드셨던 걸까요?”
    * **레온:**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 **한비:** “상관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하죠. 대현자님은, 이 서재에 드나들 때 늘 똑같은 절차를 밟으셨습니까?”
    * **엘리안:** “네. 늘 똑같았어요. 먼저 외부에서 ‘접근 인증’ 마법을 시전하시고, 내부에서 ‘해제’ 마법을 연결하는 방식이었죠. 두 단계 모두 대현자님 본인의 마력 서명이 필요했고요.”

    * **#3-2. 한비의 추리**
    * 한비가 복도 바닥에 서서 눈을 감고, 서재 내부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린다. 부러진 깃펜, 미세한 먼지, 크로노스의 상처, 그리고 ‘시간의 메아리’ 마법. 모든 조각들이 한비의 머릿속에서 맞춰지고 있었다.
    * **한비 (독백):** “대현자 크로노스는 완벽주의자였다. 자신의 서재를 침입자로부터 철저히 보호하고자 했겠지. 외부에서 접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오직 자신의 마력 서명만이 마법 장벽을 해제할 수 있도록. 그런데, 그 ‘시간의 메아리’ 마법… 과연 ‘실패’했던 것일까? 엘리안은 실패했다고 했지만, 그건 어쩌면…”
    * **한비 (독백):** “아니, 실패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 마법은 완벽하게 성공했고, 대현자는 그것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을 뿐이다. 외부에서 자신의 마력 서명을 투영하여, ‘내부에서 해제’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내는 마법. 즉, 원격으로 문을 여는 마법…!”

    * **#3-3. 결정적인 단서**
    * 한비의 눈이 번쩍 뜨인다. 그는 다시 서재 문을 바라본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모두의 시선이 한비에게로 향한다.
    * **한비:** “레온 단장님, 이 서재의 마력 장벽은 대현자님께서 직접 시동을 걸 때만 완벽하게 작동하는 것이었습니까?”
    * **레온:**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현자님은 결코 자신의 마력 서명을 남에게 넘겨주거나, 타인이 모방하게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마법사들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 **한비:**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마력 서명을 ‘복제’하는 것은 가능했겠죠. 그리고 그 복제된 서명으로 문을 여는 것도. 대현자님은 그 마법이 ‘실패’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완벽하게 성공했던 겁니다. 단지, 완벽한 복제가 너무나 위험했기에 그 사실을 숨겼을 뿐.”

    **[장면 4: 밀실의 진실, 밝혀지다]**

    * **#4-1. 한비의 설명 시작**
    * 한비가 엘리안과 레온을 서재 문 앞에 세워두고, 담담하게 설명을 시작한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 **한비:** “범인은 이 서재에 침입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침입’하지는 않았죠. 이 서재는 완벽한 밀실이 아니었습니다. 완벽한 마법적 트릭으로 위장된 밀실이었을 뿐.”
    * **엘리안:** (당황하며) “그럼… 그럼 어떻게 된 거죠? 대현자님은 분명히 안에서 돌아가셨는데!”
    * **한비:** “대현자 크로노스께서는 ‘시간의 메아리’ 마법을 통해 자신의 마력 서명을 완벽하게 복제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은밀히 숨기셨죠. 왜냐하면, 그 마법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위험했으니까요. 외부에서 자신의 마력 서명을 투영해, 서재의 마법 장벽을 해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요.”

    * **#4-2. 트릭의 재구성**
    * 한비가 한 손을 들어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는 시늉을 한다. 그의 설명에 따라, 마치 눈앞에 사건이 재구성되는 듯한 착각이 든다.
    * **한비:** “범인은 대현자님께서 이 ‘시간의 메아리’ 마법을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가 테스트를 위해 자신의 마력 서명을 외부로 투영할 때를 노렸겠죠. 바로 그때가 유일한 기회였으니까.”
    * **레온:** “그렇다면, 범인이 대현자님의 마력 서명을 훔쳐냈단 말인가? 말도 안 돼! 아무도 대현자님의 마력 서명을 복제할 수 없어!”
    * **한비:** “훔친 것이 아닙니다. 활용한 것이죠. 대현자님께서 서재 안에서 ‘시간의 메아리’를 이용해 자신의 마력 서명을 외부로 투영했을 때, 범인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순간적으로 그 마력의 ‘잔향’을 포획하고, 그것을 이용해 서재의 문을 ‘외부에서 열었던’ 겁니다.”
    * **엘리안:** “하지만… 대현자님은 실패했다고 하셨는데요…? 제가 직접 봤어요!”
    * **한비:**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완벽한 성공이었죠. 다만, 그 마법이 너무나 완벽해서, 외부에서 접근하는 모든 시도가 대현자님 자신의 것으로 착각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숨겼을 뿐입니다. 범인은 그 비밀스러운 ‘성공’의 순간을 노린 겁니다.”

    * **#4-3. 살인 과정의 설명**
    * **한비:** “범인은 대현자님께서 자신의 마법을 시험하는 찰나의 순간을 노렸습니다. 외부에서 대현자님의 ‘시간의 메아리’를 이용해 마법 장벽을 해제하고, 서재 안으로 재빨리 침입했습니다. 그리고 대현자님을 살해했죠. 시신의 상처는, 마력을 담아 공격할 수 있는 도구, 이를테면… 부러진 ‘별빛 깃펜’ 같은 것으로 급소를 찔러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 **레온:** (눈을 휘둥그레 뜨며) “부러진 깃펜…? 설마, 대현자님의 깃펜으로 대현자님을…?”
    * **한비:** “네. 그 깃펜에는 대현자님의 마력이 여전히 남아있었을 겁니다. 범인은 그 마력을 역이용해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죠. 그리고 살해 후… 다시 대현자님의 마력 서명을 재현하여, 서재 문을 안에서 잠갔습니다. 마침 서재는 대현자님의 마력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요. 모든 증거는 완벽하게 ‘밀실’을 가리키도록 위장된 겁니다. 바닥의 결정화된 먼지는, 범인이 ‘시간의 메아리’를 포획하고 이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산물이겠죠.”
    * **엘리안:** “말도 안 돼… 그럼 범인은 대현자님의 마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란 뜻인가요? 게다가 그 테스트 시간까지…?”
    * **한비:** “그렇습니다. ‘시간의 메아리’ 마법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역이용할 수 있는 지식과 기회를 가진 사람. 그리고… 대현자님의 연구 일정과 습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만이 가능한 범행입니다.”

    **[장면 5: 범인의 윤곽]**

    * **#5-1. 마무리 설명**
    * 한비가 서재 문을 응시한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레온과 엘리안은 충격과 경외심이 뒤섞인 얼굴로 한비를 바라본다.
    * **한비:** “밀실은 없었습니다. 완벽한 마법적 트릭이 있었을 뿐이죠. 대현자님의 ‘시간의 메아리’ 마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잠시 동안 존재하게 만드는 마법입니다. 범인은 바로 그 점을 노렸습니다. 대현자님 자신의 마력으로, 스스로의 서재를 열고, 스스로의 깃펜으로, 스스로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처럼 꾸며진 겁니다.”
    * **레온:** (머리를 감싸 쥐며,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이럴 수가… 이런 복잡한 수법이라니. 범인은 도대체 누굽니까?!”
    * **한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범인은… 대현자님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을 겁니다. 그의 연구를 이해하고, 그의 일상을 꿰뚫고 있었던 자. 그의 그림자는, 이제 더 이상 감춰질 수 없을 겁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그림자를 찾아내는 일 뿐이죠.”
    * **내레이션 (한비):** “이세계의 밤은 깊어지고, 또 다른 진실이 그림자 속에서 고개를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의 임무는, 그 진실을 햇빛 아래로 끌어내는 것. 어떤 ‘불가능’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에피소드 종료]**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대본: 그림자 속 속삭임

    **장르:**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로맨스

    **제목:** 잿빛 낙원

    ### 에피소드 1: 폐허의 메아리

    **[프롤로그]**

    **#1. 폐허가 된 도시 외곽 – 해질녘**

    * **배경:** 한때 번성했을 도시의 잔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앙상한 철근 구조물들이 뼈대처럼 솟아 있고, 깨진 유리창들은 핏빛 노을을 반사하며 섬뜩하게 빛난다. 길가에는 이름 모를 넝쿨 식물들이 콘크리트를 집어삼키고, 눅눅한 흙먼지 냄새가 공중에 가득하다.
    * **인물:** 리안 (20대 후반, 날카로운 눈매와 다부진 체격. 검게 그을린 가죽 재킷과 낡은 전투화 차림. 한쪽 어깨에는 낡은 배낭, 다른 손에는 녹슨 철근을 개조한 칼을 들고 있다.)
    * **음향:** 바람이 텅 빈 건물 사이를 휘젓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울음소리 (변종의 소리).

    **리안 (내레이션)**
    > 세상은 한 순간에 끝났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변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를 경계했고, 밤은 낮보다 더 많은 것을 숨겼다.

    * 리안은 조심스럽게 무너진 상점가를 걷는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 그녀의 시선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핀다.
    * 낡은 선반 위에서 먼지 쌓인 통조림 캔 하나를 발견한다. 내용물은 알 수 없지만, 귀한 식량이다. 그녀는 캔을 배낭에 넣는다.
    *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콰앙!’ 하는 굉음이 들린다. 땅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건물 잔해 일부가 무너져 내린다.
    * 리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그녀는 즉시 몸을 낮은 벽 뒤로 숨기고 칼을 단단히 쥔다.

    **리안 (속삭이듯)**
    >…놈들인가. 벌써 여기까지 왔다고?

    *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짐승 같기도 하고, 인간 같기도 한 기괴한 실루엣. ‘변종’들 중에서도 크고 위험한 개체인 듯하다.
    * 리안은 숨을 죽인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녀는 익숙하게 위험에 대처하고 있지만, 여전히 생존은 위태롭다.
    * 그녀는 괴생명체가 멀어지기를 기다리다, 기척이 사라지자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이동한다.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한다.

    **[본 에피소드]**

    **#2. 지하 폐쇄 통로 – 밤**

    * **배경:** 무너진 도시의 지하로 이어진 좁고 어두운 통로.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흙냄새가 진동한다. 리안이 들고 있는 작은 손전등 불빛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 **음향:** 물 떨어지는 소리, 리안의 조심스러운 발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변종들의 낮은 울음소리.

    **리안 (내레이션)**
    > 지하 통로는 언제나 마지막 선택지였다. 그곳엔 빛이 없고, 무엇이 숨어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밖은 더 위험했다.

    * 리안은 통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어딘가 익숙한 길인 듯, 망설임 없이 나아간다.
    * 갑자기, 그녀의 손전등 불빛이 통로 한쪽 벽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를 스친다. 리안은 순간 몸을 굳힌다.
    *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고,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동자가 섬광처럼 빛난다. 짙은 밤색, 혹은 보랏빛에 가까운, 인간의 것이 아닌 눈빛.

    **리안**
    >…누구야?

    * 그림자 속에서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 **인물:** 카이 (20대 후반 추정. 인간과 흡사한 형태지만, 피부는 미묘하게 비늘 같은 패턴이 느껴지고, 손가락은 일반 인간보다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 있다. 옷은 넝마 같은 차림이지만, 그의 몸은 단단한 근육질이며 민첩해 보인다. 그의 눈은 여전히 리안에게 고정되어 있다.)
    * 리안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칼을 치켜든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그녀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함께 미묘한 동요가 스친다.

    **리안**
    >…카이. 네가 왜 여기 있어? 인간 정착지 근처엔 얼씬도 말랬잖아.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면…

    **카이**
    > (낮고 쉰 목소리.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떨림이 있지만, 단호하다.)
    > 나도 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너도.

    * 카이는 리안에게 한 발짝 다가선다. 리안은 뒷걸음질 치지 않지만, 칼끝은 여전히 그를 향해 있다.
    * 카이의 시선은 리안의 얼굴에 머문다. 그의 눈빛에는 경계심보다, 어떤 깊은 연민과 익숙함이 서려 있다.

    **리안**
    > (조금 낮아진 목소리)
    > 넌… 너희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해. 여기에 있으면 위험해.

    **카이**
    > 위험한 건 너도 마찬가지야. 저 밖의 ‘사냥꾼’들이… 점점 여기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어.

    * ‘사냥꾼’이라는 말에 리안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들은 일반 변종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지능적인 괴생명체들이다.

    **리안**
    >…그들은 너희 같은 변종들도 사냥하잖아.

    **카이**
    > 우리는 인간의 기준으로 ‘변종’일 뿐. 그들에게는 그저 먹잇감일 뿐이야. 너희와 다를 바 없어.

    *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흐른다. 이 침묵 속에는 과거의 어떤 기억들이 얽혀 있는 듯하다.

    **#3. 지하 통로 – 계속**

    * **배경:** 여전히 어둡고 습한 지하 통로.
    * **음향:** 멀리서 들리던 변종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바닥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한두 마리가 아닌 듯, 여러 발소리가 섞여 있다.

    **리안**
    > (카이에게 눈짓하며)
    > 저 소리… 심상치 않아. 사냥꾼들이야.

    * 카이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난다. 그의 몸에서 긴장감이 느껴진다.
    * 천장에서 흙먼지가 떨어지고, 통로 입구 쪽에서 굵고 끈적한 촉수 같은 것이 꿈틀거리는 그림자가 비친다.

    **카이**
    > (낮게 으르렁거리듯)
    > 숫자가 너무 많아. 이대로는…

    * 리안은 칼을 단단히 쥐고, 등 뒤에 있던 소형 권총을 뽑아든다. 그녀의 얼굴에는 결의가 서려 있다.

    **리안**
    > 흩어져서 유인해야 해. 한쪽으로 몰리면… 끝이야.

    **카이**
    > (리안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 내가 양동할게. 넌 이쪽으로.

    * 카이는 망설임 없이 촉수 괴생명체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간다. 그의 움직임은 그림자처럼 빠르고 유연하다. 그는 벽을 타고 오르거나, 무너진 잔해 사이를 빠르게 통과하며 사냥꾼들의 주의를 끈다.
    * ‘크아악!’ 하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통로를 가득 채운다.
    * 리안은 반대편, 좀 더 좁은 통로로 몸을 숨긴다. 그녀는 카이가 유인한 괴생명체들이 카이를 쫓아가는 것을 확인한 후, 권총을 꺼내 조준한다.
    * ‘탕! 탕! 탕!’ 총성이 어둠을 찢는다. 그녀의 사격은 정확했고, 괴생명체 몇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 하지만 사냥꾼들은 계속해서 몰려온다. 그들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리안을 향해 돌진한다.
    * 리안은 칼을 뽑아든다. 그녀는 능숙하게 근접전을 벌인다. 날카로운 칼날이 괴생명체들의 약점을 파고든다.
    * 그때, 리안의 등 뒤에서 또 다른 사냥꾼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 그녀는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팔을 베이고 만다.
    * ‘윽!’ 리안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온다. 팔에서는 시뻘건 피가 솟구친다.
    * 바로 그 순간, 그림자처럼 나타난 카이가 그 사냥꾼의 등 뒤로 뛰어올라 목을 움켜쥔다. 카이의 손톱이 괴생명체의 목을 깊이 파고든다. ‘끄으윽…’ 소리를 내며 사냥꾼이 축 늘어진다.
    * 카이는 재빨리 리안에게 달려와 그녀의 팔을 확인한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역력하다.

    **카이**
    > 괜찮아? 상처가 깊어.

    **리안**
    > (이를 악물고)
    > 괜찮아… 젠장, 피가 너무 많이 나.

    * 사냥꾼들의 수가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 몇 마리가 주변에 남아 으르렁거리고 있다.
    * 카이는 리안의 팔을 붙잡고, 그녀를 더 깊은 통로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그가 입고 있던 넝마 같은 옷을 찢어 리안의 상처를 임시로 지혈한다.
    * 둘은 좁은 틈새에 몸을 숨긴다. 흙먼지와 부패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4. 좁은 틈새 – 계속**

    * **배경:** 거의 빛이 들지 않는 좁은 틈새. 두 사람의 몸이 바싹 붙어 있다. 카이의 거친 숨소리와 리안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섞인다.
    * **음향:** 멀리서 들리는 사냥꾼들의 경계성 울음소리, 두 사람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소리.

    * 카이는 리안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낸다. 그의 손은 인간의 것보다 거칠고, 미묘하게 차가운 감촉이다. 하지만 그 손이 자신을 구했고, 지금은 상처를 지혈하고 있었다.
    * 리안은 그의 손을 잠시 바라본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손. 동시에 자신을 구하고 있는 손.

    **리안**
    >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왜 그랬어? 그냥 날 버리고 도망쳤어도 됐을 텐데.

    **카이**
    > (리안의 눈을 응시한다. 그의 눈동자에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보랏빛이 맴돈다.)
    > 널… 혼자 둘 수 없었어.

    * 그의 짧은 말 속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들이 실려 있었다. 리안은 그의 눈빛 속에서 연민과 함께, 자신과 똑같은 외로움과 갈망을 본다.
    * 둘 사이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좁은 공간, 목숨을 건 싸움, 그리고 금기된 감정들이 뒤섞인다.

    **리안**
    >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본다. 목소리가 떨린다.)
    > 우린… 달라. 알아야 해. 너희 부족 사람들은 인간을 경계하고, 인간들은 너희를… 괴물로 봐. 내가 널 도왔다는 걸 알면… 아니, 네가 여기 있었다는 걸 알면… 모두가 위험해져.

    **카이**
    > (그녀의 턱을 잡아 부드럽게 자신을 보게 한다.)
    > 달라? 적어도… 나한테는 달라.

    * 카이의 눈빛이 리안의 마음에 깊숙이 박힌다. 그 속에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무언가, 인간과 변종이라는 종족의 경계를 허물려는 강렬한 끌림이 담겨 있다.
    * 리안은 그의 눈을 피할 수 없다. 그녀의 심장이 더욱 격렬하게 뛰어오른다.

    * 시간이 흐르고, 사냥꾼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위험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이다.
    * 카이는 틈새에서 조심스럽게 나와 주변을 살핀다.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지만, 잠시 몸을 피할 정도는 된다.

    **카이**
    > 가야 해. 이 이상은 위험해. 내가… 인간 정착지 근처까지 데려다줄게.

    **리안**
    > (고개를 젓는다)
    > 아니. 여기서 헤어지자. 널 인간 구역 근처에서 봤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모두가 널 쫓을 거야.

    * 그녀의 말은 현실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 카이는 리안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한다. 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운다.

    **카이**
    >…알겠어.

    * 둘은 통로의 갈림길에 선다. 한쪽은 인간 정착지로 향하는 길, 다른 한쪽은 더 깊은 폐허, 변종들이 주로 서식하는 곳으로 이어진다.
    * 리안은 카이를 향해 돌아선다. 그녀의 표정은 복잡하다.

    **리안**
    > (애써 차갑게 말한다)
    > 다음에 또 마주치면… 그때는 널 죽일지도 몰라.

    * 카이는 그녀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짓는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리안에게 고정되어 있다.

    **카이**
    >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알아. 하지만… 너는 아닐 거야.

    * 카이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 그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 리안은 홀로 남겨진 채, 카이가 사라진 어둠 속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 그녀의 아픈 팔을 만져본다. 카이의 거칠었던 손길이 아직 피부에 남아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리안 (내레이션)**
    > 금지된 만남. 알아야 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왜 자꾸만 너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걸까.

    * 리안의 시선이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체념과 함께, 어쩔 수 없는 이끌림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다음 화 예고]**
    * 폐허를 걷는 리안의 뒷모습.
    * 인간 정착지의 경계를 지키는 생존자들의 모습.
    *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응시하는 카이의 눈빛.

    **다음 화: ‘경계 너머의 그림자’**

  • SF (공상과학)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성계무도대회, 천외천(天外天) 경기장.

    무한히 뻗어 나가는 오색찬란한 홀로그램 빛이 거대한 돔형 천장을 수놓았다. 수백 개의 성계에서 모여든 관중들의 함성은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찰나의 순간, 그 모든 소음은 일제히 정지했다. 거대한 링을 감싸는 불투명한 에너지 필드가 서서히 투명해지며, 그 안의 두 인영을 드러냈다.

    나는 관중석 가장 높은 곳, 차가운 금속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숨을 죽였다. 내 차례는 아직 멀었지만, 오늘 이 대결이 이번 대회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링 중앙에 선 두 고수의 기운은 극명하게 달랐다.

    한쪽은 ‘강철룡’이라는 이명답게 온몸을 기계화된 근육과 사이버네틱 코어로 감싼 진이었다. 그의 강철빛 피부는 전신을 뒤덮은 인공장기 네트워크를 통해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었고, 팔다리는 최첨단 합금으로 이루어진 강화 골격이었다. 등 뒤에는 소형 플라즈마 추진기가 내장되어 있어 공중 도약 시 엄청난 가속을 더해줄 터였다. 그는 마치 살아있는 전함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붉은 섬광을 띠며 상대방을 꿰뚫어 볼 듯 번득였다.

    “흥, 계집이라니. 한시라도 빨리 끝내주마.”

    진의 목소리는 금속성 잡음이 섞여 거칠게 울렸다. 조롱 섞인 말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오직 승리에 대한 확신만이 가득했다.

    그의 맞은편에 선 것은 ‘영자 권사’ 린이었다. 그녀는 진과는 대조적으로 가볍고 유연한 무복을 입고 있었다. 몸을 감싼 것은 첨단 섬유였지만, 그 아래로 느껴지는 것은 순수한 육체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영자 에너지의 기운이었다. 푸른색 영자(靈子)의 아우라가 그녀의 주위를 옅게 감싸고 있었고, 손끝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무성한 흑발은 링의 미풍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입만 살아있는 자는, 언제나 먼저 쓰러지더군.”

    린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호했다. 진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표정은 마치 고요한 호수 같았다. 하지만 그 심연에는 폭풍 같은 집중력이 잠재되어 있음을 나는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영자 권법은 예측 불가능한 변칙과 파괴력을 겸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경기장 상공에 거대한 홀로그램 타이머가 떠올랐다. ‘카운트다운: 5, 4, 3, 2, 1…’

    ‘파이팅!’이라는 기계음과 함께 타이머가 사라지자, 먼저 움직인 것은 강철룡 진이었다.

    콰아앙!

    그의 육중한 몸이 링 바닥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등 뒤의 플라즈마 추진기가 맹렬한 불꽃을 뿜어내며 그를 일순간 린의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린을 덮쳤고, 진의 주먹은 마치 운석처럼 그녀를 향해 내리꽂혔다. 그 속도와 질량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하찮은 잔재주로는 내 강철을 뚫을 수 없다!” 진이 포효했다.

    하지만 린은 허둥대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푸른빛 영자 에너지가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증폭하며, 링 바닥에 거대한 영자 문양을 새겼다. 동시에 그녀의 몸은 마치 액체처럼 유연하게 흐느적거리며 진의 일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진의 주먹이 닿은 링 바닥에서는 거대한 충격파가 울려 퍼졌고, 특수 합금으로 이루어진 바닥이 움푹 파였다.

    린은 진의 옆구리를 노리고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 영자 권기가 번개처럼 뻗어 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타래가 진의 옆구리를 칭칭 감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진은 비웃었다. “어림없는 수작!”

    그의 사이버네틱 골격은 영자 권기를 느끼자마자 즉각적으로 방어 에너지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린의 권기가 진의 옆구리에 닿는 순간, 쨍강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진의 몸은 살짝 밀려났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역공을 준비했다.

    “겨우 이 정도인가! 실망스럽군!”

    진은 뒤로 물러서며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팔뚝에 내장된 대포형 플라즈마 캐논이 빠르게 충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윙- 지잉-! 푸른 플라즈마 에너지가 포구에 응축되기 시작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초반부터 저런 무기를 사용하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은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전략을 즐겨 썼지만, 린의 영자 권법이 생각보다 더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강철룡의 ‘멸신포’다!” 관중석에서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멸신포는 전술 병기급 위력을 가진 진의 필살기 중 하나였다. 어지간한 보호막은 한 방에 꿰뚫어 버리는 파괴력을 자랑했다. 린의 영자 방어가 버틸 수 있을까?

    린은 진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두 눈은 푸른빛으로 더욱 깊게 물들었다. 마치 우주를 담은 듯한 눈동자였다. 그녀의 발밑 영자 문양이 더욱 선명해지며, 링 전체가 그녀의 기운에 휩싸이는 듯했다.

    “크하하! 네년의 잘난 영자도 이 파괴력 앞에선 먼지가 될 뿐!”

    진이 발사 버튼을 누르자, 두 개의 푸른 플라즈마 광선이 린을 향해 미사일처럼 날아갔다. 엄청난 열기와 속도로 링의 공기가 일그러졌다.

    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양손이 허공에서 느릿하게 원을 그렸다. 그러자 링 바닥에 새겨졌던 영자 문양이 빛을 발하며 거대한 보호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영자 방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다중 영자 파동을 이용한, 눈에 보이지 않는 거울 같았다.

    콰아아앙!

    플라즈마 광선이 보호막에 부딪혔다. 예상과는 달리 폭발음은 작았다. 대신, 광선은 마치 투명한 벽에 튕겨 나간 것처럼 원래의 궤적을 벗어나 좌우로 흩어졌다. 린이 형성한 다중 영자 파동 보호막은 플라즈마 광선의 에너지를 왜곡시켜 그 방향을 전환시킨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진은 경악했다. 자신의 필살기가 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휘어지는 것을 본 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쳤다.

    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영자 권법은 상대의 빈틈을 파고드는 데 탁월했다. 진이 잠시 당황하여 자세를 흐트러뜨린 찰나, 린은 한 발짝 앞으로 내딛었다.

    이 한 발짝은 평범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이 일순간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며, 마치 여러 개의 잔상이 동시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듯했다. 영자 순간이동, 혹은 육체를 영자화하여 공간을 건너뛰는 고유의 비술이었다.

    진은 뒤늦게 섬뜩한 기척을 느꼈다. 쿵! 그의 등 뒤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린이 진의 등 뒤에 나타나 그의 사이버네틱 코어를 향해 손바닥을 내리쳤던 것이다.

    “영자… 파동권!”

    린의 손바닥에서 푸른 영자 에너지가 격렬하게 진동하며 진의 강철빛 몸속으로 침투했다. 강철룡의 몸이 거대한 충격에 휘청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빨간 에러 메시지가 번쩍였다. 사이버네틱 코어의 방어막이 한계를 넘어섰다는 경고였다.

    “커헉!”

    진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내부의 충격에 신음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린의 영자 파동은 그의 내부 에너지 회로를 교란하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돌려 린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훨씬 느려지고 둔해져 있었다.

    린은 빙글 돌며 진의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영자 파동을 모아 진의 가슴팍을 향해 권을 뻗었다. 이번에는 더욱 강력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이게 끝이 아니다!”

    진은 악에 받친 표정으로 오른팔의 사이버네틱 골격을 최대로 확장했다. 그의 팔이 기계적으로 변형되며 거대한 보호막을 형성했다. 동시에 내부에서 비축된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마지막 반격을 준비하는 듯했다. 그의 붉은 눈이 광기에 번뜩였다.

    린의 권이 진의 확장된 팔 보호막에 정통으로 부딪혔다.

    콰아아앙!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폭발음이 링을 뒤흔들었다. 강렬한 푸른빛과 붉은빛이 뒤섞이며, 링 전체가 거대한 에너지의 격류에 휩싸였다.

    관중들의 탄성과 비명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에어 커튼이 링 위로 펼쳐지며 에너지를 흡수했지만, 나는 링 안의 섬광을 뚫고 두 고수의 결말을 보려 애썼다.

    섬광이 걷히고, 링 위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그 안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릎을 꿇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진이었다. 그의 강철빛 몸은 곳곳이 일그러지고 금이 가 있었으며, 사이버네틱 코어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필살기마저 뚫어낸 린의 영자 파동은 그의 모든 방어 체계를 파괴한 듯했다.

    하지만 린 역시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진에게 등을 돌린 채 서 있었지만,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푸른 영자 아우라는 거의 사라졌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마지막 일격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듯, 그녀의 기운은 크게 소진되어 있었다.

    나는 침묵했다. 누가 이긴 것인가? 혹은, 누가 버틴 것인가?

    그때였다. 진의 몸에서 갑자기 붉은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의 사이버네틱 코어가 비정상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폭의 징조였다.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모두 폭발시켜 상대를 함께 끌고 가려는 강철룡의 광기 어린 선택이었다.

    “크아아악! 네년만은… 절대 혼자 살려두지 않아!”

    진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의 몸이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린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예상치 못한 광기였다. 그녀의 몸은 이미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한 상태였다. 이 거대한 자폭 에너지를 막아낼 힘이 그녀에게 남아있을까?

    경기장 전체에 정적이 흘렀다. 관중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이 충격적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형 홀로그램 화면은 진의 코어가 과부하되는 모습을 확대해서 보여주었다. 시한폭탄이 폭발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린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힘겹게 마지막 영자 에너지를 끌어모았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아주 작은, 하지만 응축된 푸른빛 구슬이 생성되었다. 그것은 흡사 별 하나의 잔해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모든 것을 걸겠다는 비장함이 떠올랐다.

    그 순간, 링 주변을 감싸고 있던 불투명한 에너지 필드가 갑자기 강도를 최대로 끌어올리며 더욱 강력한 보호막을 형성했다. 동시에 링 바닥에서 비상 탈출용 격벽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대회 주최 측에서 강철룡의 자폭을 감지하고 개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격벽이 완전히 솟아오르기 전에, 진의 코어가 한계에 다다랐다.

    콰아아아아아앙!!!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링 중앙에서 거대한 에너지 폭발이 터져 나왔다. 붉은 섬광이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았고, 에어 커튼과 비상 보호막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링 전체가 엄청난 충격파에 휘감기며 지축을 뒤흔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듯했다. 이대로 린이 무사할 수 있을까? 대회는? 천하의 운명을 건 이 대결은, 이대로 파국을 맞이하는 것인가?

    연기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잿빛 연기 속에서, 하나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서 있었다. 겨우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잔상이었다.

    과연 누가 살아남은 것인가?

    이어진 정적은 모든 관중들의 숨통을 조였다. 이 대결의 승자는, 그리고 생존자는 과연 누구일까. 이 대회의 운명은, 그리고 천하의 운명은, 지금 이 순간 결정될 터였다.

  • SF (공상과학)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성계무도대회, 천외천(天外天) 경기장.

    무한히 뻗어 나가는 오색찬란한 홀로그램 빛이 거대한 돔형 천장을 수놓았다. 수백 개의 성계에서 모여든 관중들의 함성은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찰나의 순간, 그 모든 소음은 일제히 정지했다. 거대한 링을 감싸는 불투명한 에너지 필드가 서서히 투명해지며, 그 안의 두 인영을 드러냈다.

    나는 관중석 가장 높은 곳, 차가운 금속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숨을 죽였다. 내 차례는 아직 멀었지만, 오늘 이 대결이 이번 대회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링 중앙에 선 두 고수의 기운은 극명하게 달랐다.

    한쪽은 ‘강철룡’이라는 이명답게 온몸을 기계화된 근육과 사이버네틱 코어로 감싼 진이었다. 그의 강철빛 피부는 전신을 뒤덮은 인공장기 네트워크를 통해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었고, 팔다리는 최첨단 합금으로 이루어진 강화 골격이었다. 등 뒤에는 소형 플라즈마 추진기가 내장되어 있어 공중 도약 시 엄청난 가속을 더해줄 터였다. 그는 마치 살아있는 전함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붉은 섬광을 띠며 상대방을 꿰뚫어 볼 듯 번득였다.

    “흥, 계집이라니. 한시라도 빨리 끝내주마.”

    진의 목소리는 금속성 잡음이 섞여 거칠게 울렸다. 조롱 섞인 말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오직 승리에 대한 확신만이 가득했다.

    그의 맞은편에 선 것은 ‘영자 권사’ 린이었다. 그녀는 진과는 대조적으로 가볍고 유연한 무복을 입고 있었다. 몸을 감싼 것은 첨단 섬유였지만, 그 아래로 느껴지는 것은 순수한 육체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영자 에너지의 기운이었다. 푸른색 영자(靈子)의 아우라가 그녀의 주위를 옅게 감싸고 있었고, 손끝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무성한 흑발은 링의 미풍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입만 살아있는 자는, 언제나 먼저 쓰러지더군.”

    린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호했다. 진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표정은 마치 고요한 호수 같았다. 하지만 그 심연에는 폭풍 같은 집중력이 잠재되어 있음을 나는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영자 권법은 예측 불가능한 변칙과 파괴력을 겸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경기장 상공에 거대한 홀로그램 타이머가 떠올랐다. ‘카운트다운: 5, 4, 3, 2, 1…’

    ‘파이팅!’이라는 기계음과 함께 타이머가 사라지자, 먼저 움직인 것은 강철룡 진이었다.

    콰아앙!

    그의 육중한 몸이 링 바닥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등 뒤의 플라즈마 추진기가 맹렬한 불꽃을 뿜어내며 그를 일순간 린의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린을 덮쳤고, 진의 주먹은 마치 운석처럼 그녀를 향해 내리꽂혔다. 그 속도와 질량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하찮은 잔재주로는 내 강철을 뚫을 수 없다!” 진이 포효했다.

    하지만 린은 허둥대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푸른빛 영자 에너지가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증폭하며, 링 바닥에 거대한 영자 문양을 새겼다. 동시에 그녀의 몸은 마치 액체처럼 유연하게 흐느적거리며 진의 일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진의 주먹이 닿은 링 바닥에서는 거대한 충격파가 울려 퍼졌고, 특수 합금으로 이루어진 바닥이 움푹 파였다.

    린은 진의 옆구리를 노리고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 영자 권기가 번개처럼 뻗어 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타래가 진의 옆구리를 칭칭 감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진은 비웃었다. “어림없는 수작!”

    그의 사이버네틱 골격은 영자 권기를 느끼자마자 즉각적으로 방어 에너지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린의 권기가 진의 옆구리에 닿는 순간, 쨍강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진의 몸은 살짝 밀려났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역공을 준비했다.

    “겨우 이 정도인가! 실망스럽군!”

    진은 뒤로 물러서며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팔뚝에 내장된 대포형 플라즈마 캐논이 빠르게 충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윙- 지잉-! 푸른 플라즈마 에너지가 포구에 응축되기 시작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초반부터 저런 무기를 사용하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은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전략을 즐겨 썼지만, 린의 영자 권법이 생각보다 더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강철룡의 ‘멸신포’다!” 관중석에서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멸신포는 전술 병기급 위력을 가진 진의 필살기 중 하나였다. 어지간한 보호막은 한 방에 꿰뚫어 버리는 파괴력을 자랑했다. 린의 영자 방어가 버틸 수 있을까?

    린은 진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두 눈은 푸른빛으로 더욱 깊게 물들었다. 마치 우주를 담은 듯한 눈동자였다. 그녀의 발밑 영자 문양이 더욱 선명해지며, 링 전체가 그녀의 기운에 휩싸이는 듯했다.

    “크하하! 네년의 잘난 영자도 이 파괴력 앞에선 먼지가 될 뿐!”

    진이 발사 버튼을 누르자, 두 개의 푸른 플라즈마 광선이 린을 향해 미사일처럼 날아갔다. 엄청난 열기와 속도로 링의 공기가 일그러졌다.

    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양손이 허공에서 느릿하게 원을 그렸다. 그러자 링 바닥에 새겨졌던 영자 문양이 빛을 발하며 거대한 보호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영자 방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다중 영자 파동을 이용한, 눈에 보이지 않는 거울 같았다.

    콰아아앙!

    플라즈마 광선이 보호막에 부딪혔다. 예상과는 달리 폭발음은 작았다. 대신, 광선은 마치 투명한 벽에 튕겨 나간 것처럼 원래의 궤적을 벗어나 좌우로 흩어졌다. 린이 형성한 다중 영자 파동 보호막은 플라즈마 광선의 에너지를 왜곡시켜 그 방향을 전환시킨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진은 경악했다. 자신의 필살기가 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휘어지는 것을 본 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쳤다.

    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영자 권법은 상대의 빈틈을 파고드는 데 탁월했다. 진이 잠시 당황하여 자세를 흐트러뜨린 찰나, 린은 한 발짝 앞으로 내딛었다.

    이 한 발짝은 평범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이 일순간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며, 마치 여러 개의 잔상이 동시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듯했다. 영자 순간이동, 혹은 육체를 영자화하여 공간을 건너뛰는 고유의 비술이었다.

    진은 뒤늦게 섬뜩한 기척을 느꼈다. 쿵! 그의 등 뒤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린이 진의 등 뒤에 나타나 그의 사이버네틱 코어를 향해 손바닥을 내리쳤던 것이다.

    “영자… 파동권!”

    린의 손바닥에서 푸른 영자 에너지가 격렬하게 진동하며 진의 강철빛 몸속으로 침투했다. 강철룡의 몸이 거대한 충격에 휘청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빨간 에러 메시지가 번쩍였다. 사이버네틱 코어의 방어막이 한계를 넘어섰다는 경고였다.

    “커헉!”

    진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내부의 충격에 신음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린의 영자 파동은 그의 내부 에너지 회로를 교란하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돌려 린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훨씬 느려지고 둔해져 있었다.

    린은 빙글 돌며 진의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영자 파동을 모아 진의 가슴팍을 향해 권을 뻗었다. 이번에는 더욱 강력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이게 끝이 아니다!”

    진은 악에 받친 표정으로 오른팔의 사이버네틱 골격을 최대로 확장했다. 그의 팔이 기계적으로 변형되며 거대한 보호막을 형성했다. 동시에 내부에서 비축된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마지막 반격을 준비하는 듯했다. 그의 붉은 눈이 광기에 번뜩였다.

    린의 권이 진의 확장된 팔 보호막에 정통으로 부딪혔다.

    콰아아앙!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폭발음이 링을 뒤흔들었다. 강렬한 푸른빛과 붉은빛이 뒤섞이며, 링 전체가 거대한 에너지의 격류에 휩싸였다.

    관중들의 탄성과 비명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에어 커튼이 링 위로 펼쳐지며 에너지를 흡수했지만, 나는 링 안의 섬광을 뚫고 두 고수의 결말을 보려 애썼다.

    섬광이 걷히고, 링 위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그 안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릎을 꿇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진이었다. 그의 강철빛 몸은 곳곳이 일그러지고 금이 가 있었으며, 사이버네틱 코어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필살기마저 뚫어낸 린의 영자 파동은 그의 모든 방어 체계를 파괴한 듯했다.

    하지만 린 역시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진에게 등을 돌린 채 서 있었지만,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푸른 영자 아우라는 거의 사라졌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마지막 일격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듯, 그녀의 기운은 크게 소진되어 있었다.

    나는 침묵했다. 누가 이긴 것인가? 혹은, 누가 버틴 것인가?

    그때였다. 진의 몸에서 갑자기 붉은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의 사이버네틱 코어가 비정상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폭의 징조였다.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모두 폭발시켜 상대를 함께 끌고 가려는 강철룡의 광기 어린 선택이었다.

    “크아아악! 네년만은… 절대 혼자 살려두지 않아!”

    진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의 몸이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린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예상치 못한 광기였다. 그녀의 몸은 이미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한 상태였다. 이 거대한 자폭 에너지를 막아낼 힘이 그녀에게 남아있을까?

    경기장 전체에 정적이 흘렀다. 관중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이 충격적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형 홀로그램 화면은 진의 코어가 과부하되는 모습을 확대해서 보여주었다. 시한폭탄이 폭발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린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힘겹게 마지막 영자 에너지를 끌어모았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아주 작은, 하지만 응축된 푸른빛 구슬이 생성되었다. 그것은 흡사 별 하나의 잔해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모든 것을 걸겠다는 비장함이 떠올랐다.

    그 순간, 링 주변을 감싸고 있던 불투명한 에너지 필드가 갑자기 강도를 최대로 끌어올리며 더욱 강력한 보호막을 형성했다. 동시에 링 바닥에서 비상 탈출용 격벽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대회 주최 측에서 강철룡의 자폭을 감지하고 개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격벽이 완전히 솟아오르기 전에, 진의 코어가 한계에 다다랐다.

    콰아아아아아앙!!!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링 중앙에서 거대한 에너지 폭발이 터져 나왔다. 붉은 섬광이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았고, 에어 커튼과 비상 보호막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링 전체가 엄청난 충격파에 휘감기며 지축을 뒤흔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듯했다. 이대로 린이 무사할 수 있을까? 대회는? 천하의 운명을 건 이 대결은, 이대로 파국을 맞이하는 것인가?

    연기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잿빛 연기 속에서, 하나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서 있었다. 겨우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잔상이었다.

    과연 누가 살아남은 것인가?

    이어진 정적은 모든 관중들의 숨통을 조였다. 이 대결의 승자는, 그리고 생존자는 과연 누구일까. 이 대회의 운명은, 그리고 천하의 운명은, 지금 이 순간 결정될 터였다.

  • 사이버펑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망각의 흔적

    심연.

    아크튜러스 호의 함교 통창 너머로 펼쳐진 우주는 그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검은 절망과도 같았다. 닿을 수 없는 저 멀리, 은하의 성운들이 아스라한 물감처럼 번져 있었지만, 이곳은 그조차 삼켜버린 암흑의 한복판이었다. 캡틴 서윤은 비스듬히 함장석에 몸을 기댄 채, 검푸른 빛을 내는 홀로그램 패드를 느릿하게 스크롤했다.

    “이상 없음. 여전히 이상 없음. 뭐, 이상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이지만.”

    파일럿 류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왼쪽 눈을 덮고 있는 인공 홍채 렌즈와 함께 푸른빛으로 깜빡였고, 손가락은 조종간 위에서 리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신경계는 아크튜러스 호의 비행 시스템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기에, 지루함은 더욱 증폭되는 듯했다. 이 드넓은 우주에서, 류에게 가장 큰 적은 언제나 지루함이었다.

    “너무 평화로운 것도 문제죠. 이 광활한 빈 공간에서 혼자 떠다니다 보면, 내가 정말 존재하는 건가 싶고.”

    서윤이 짧게 웃었다. 그녀의 오른팔에는 얇은 금속 피부가 정교하게 덮여 있었는데, 과거 어떤 사고로 잃어버린 팔을 대체한 것이었다. 그 금속 피부 아래로는 함선의 모든 정보가 실시간으로 흐르는 미세 회로가 박혀 있어, 그녀의 시야에 직접 투사되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텅 빈 에너지 수치와 항로 데이터만이 의미 없이 깜빡일 뿐이었다.

    “그럼 자네는 뭔가 특이한 거라도 발견하고 싶은 건가? 저 너머에서 우리를 환영할 알 수 없는 지성체라도?”

    엔지니어 강이 뒤쪽 작업대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기름때와 땀으로 번들거렸고, 낡은 작업복은 곳곳이 헤져 있었다. 강은 사이버네틱스 의수족 덕분에 온갖 위험천만한 작업을 능숙하게 해낼 수 있었지만, 그의 손은 늘 무언가를 만지고 뜯고 조립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지성체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아주 작고 예쁜 유성이라도 하나 지나갔으면 좋겠다고요.” 류가 투덜거렸다.

    “그럼 저기 과학부 지혁에게 부탁해 봐. 자네가 원하는 유성 하나쯤은 어디선가 스캔해 줄지도 모르지.” 서윤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때였다.
    함교 전체를 감싸던 잔잔한 기계음이 순간적으로 높아졌다. 모니터마다 비상 알림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뭔가 잡혔습니다! 비정상적인 에너지 패턴. 일반적인 항성 물질과는 다른데요.”

    과학 담당 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혁은 검은색 안경 너머로 잔뜩 상기된 눈을 빛내며 자신의 콘솔을 조작하고 있었다. 그의 얇은 손가락은 홀로그램 키보드 위를 춤추듯 오갔고, 팔목에 이식된 데이터 포트에서는 녹색 빛이 연신 뿜어져 나왔다.

    “지혁, 무슨 일이야?” 서윤이 자세를 바로 하며 물었다.

    “캡틴, 저희가 예상 항로를 벗어나긴 했지만… 이 구역은 관측된 적 없는 미개척 영역입니다. 그런데, 아주 특이한 에너지 서명을 포착했습니다.”

    메인 스크린에 낯선 그래프와 숫자들이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보통 우주에서 발견되는 자연 현상과는 확연히 다른, 불규칙하면서도 동시에 정교한 파형이었다.

    “인위적인 것 같다는 건가?” 서윤의 목소리에 미묘한 긴장감이 실렸다.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자연 현상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질서 정연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무질서합니다. 패턴이 있지만,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혁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학구적인 호기심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거리가 얼마나 되지?”

    “초속 1.5광년 속도로 이동 중인 것으로 보아… 약 3시간 안에 시각 범위에 들어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에너지는 매우 강합니다. 너무 강해서, 저희 센서가 왜곡되는 것 같아요.”

    “왜곡?” 류가 조종간을 고쳐 잡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데?”

    “음… 마치 주위 공간 자체가 일렁이는 것 같달까요. 제가 가진 데이터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마치 센서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데이터를 거부해요. 하지만 에너지는… 존재합니다.”

    서윤은 잠시 침묵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 광대한 공허 속에서, 그들은 그저 오래된 계약에 따라 미개척 성계를 탐사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임무도 없었다. 우주력 2650년. 인류가 이 암흑 우주에 발을 내디딘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외계 문명’의 흔적을 발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인류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의 문명을 찾지 못했다.

    “강, 엔진 출력 점검해. 비상 상황 대비해서 모든 시스템 스캔하고.” 서윤이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캡틴. 하지만… 이런 상황은 매뉴얼에 없었는데요.” 강이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서둘러 자신의 콘솔로 돌아갔다. 그의 사이버네틱스 의수가 정교하게 패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류, 진로 수정. 최저 항속으로 접근한다. 접근 코드는 ‘은하의 속삭임’으로.”

    “최저 항속이라니… 설마 직접 보시겠다는 겁니까, 캡틴?” 류의 목소리에 경외감이 섞였다.

    “그래. 이건 우리가 이 항해를 시작한 이유일지도 모르니까.” 서윤의 시선이 메인 스크린에 고정되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심연 속, 알 수 없는 에너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크튜러스 호의 함교에는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센서의 왜곡 현상은 더욱 심해졌고, 지혁은 연신 미간을 찌푸린 채 새로운 데이터를 해석하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지휘부와 연락은?” 서윤이 물었다.

    “외부 통신망 역시 심하게 교란되고 있습니다, 캡틴. 간신히 비상 신호는 보냈지만, 답신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통신 담당 유진이 대답했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귀 뒤에는 작은 커뮤니케이션 임플란트가 빛나고 있었다.

    “알았다.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서윤의 시선은 다시 통창 너머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검은 심연의 저편에서 무언가가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희미한 얼룩 같았다. 하지만 아크튜러스 호가 한 걸음, 한 걸음 더 다가갈수록, 그 얼룩은 점차 선명한 윤곽을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떤 건물도, 우주선도, 자연의 암석도 아니었다.
    거대한 검은색의… 결정체였다.
    표면은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빛을 흡수해버리는 듯, 주변의 별빛조차 왜곡되어 보였다. 완벽한 다각형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 배열은 기하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복잡성을 띠고 있었다. 육안으로도 감지되는 강렬한 에너지가 결정체의 표면에서 꿈틀거리는 듯했다.

    “이게… 대체…?” 류의 목소리가 떨렸다.

    “센서가… 먹통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아요. 질량, 구성 원소, 에너지 수치… 모두 ‘측정 불가’입니다.” 지혁은 거의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공포에 질려 커져 있었다.

    아크튜러스 호가 그 거대한 결정체에 약 100킬로미터까지 접근하자, 함선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함교의 홀로그램 패드들이 일제히 깜빡였고, 몇몇 보조 스크린은 지지직거리는 노이즈를 뿜어냈다.

    “캡틴, 메인 동력 불안정! 보조 시스템 가동 중이지만, 알 수 없는 에너지 간섭입니다!” 강이 소리쳤다. 그의 이식된 팔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에러 메시지가 깜빡였다.

    서윤은 팔에 박힌 금속 피부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정보에 집중했다. 함선 시스템의 모든 경고가 붉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직 저 검은 결정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순간, 거대한 결정체의 한가운데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일반적인 빛이 아니었다. 어떤 색깔로도 정의할 수 없는, 너무나도 순수하고 압도적인 빛이었다. 그 빛은 우주 공간을 찢어발기는 듯, 아크튜러스 호의 통창 너머로 그대로 쏟아져 들어왔다.

    “모든 시스템 비상 정지! 선체 방어막 최대 출력!” 서윤이 절규하듯 외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빛은 아크튜러스 호의 방어막을 뚫고 함교 내부로 파고들었다. 눈을 가릴 틈도 없이, 승무원들의 시야는 순식간에 압도적인 빛으로 뒤덮였다. 그 빛은 고통스럽게 망막을 꿰뚫는 동시에,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듯한 알 수 없는 전율을 선사했다.

    그리고, 침묵.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함선의 기계음도, 승무원들의 숨소리도.

    서윤의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그녀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무수히 많은 별들, 생명의 시작, 그리고… 끝.
    형언할 수 없는 존재들의 그림자.
    미지의 언어로 속삭이는 듯한, 고통과 경외가 뒤섞인 목소리들.

    정신을 차렸을 때, 서윤은 함장석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된 듯 굳어 있었고,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눈앞의 메인 스크린은 여전히 꺼져 있었고, 함교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눈앞, 메인 콘솔 위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색 조각이 놓여 있었다.
    거대한 결정체와 완벽하게 똑같은 재질과 형태.
    주변의 빛을 모두 흡수하는 듯한, 완벽한 어둠을 품은 조각.

    서윤은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그 조각을 만지는 순간, 손끝에서부터 전율이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새로운 영상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검은 공간 속에서, 무수히 많은 눈동자들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의 기억이자,
    모든 것의 시작이며,
    모든 것의 끝이었다.

    “캡틴… 괜찮으십니까?”

    류의 떨리는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서윤은 숨을 들이켰다.
    손안의 검은 조각은 차갑도록 싸늘했다.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서, 알 수 없는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아니.”
    서윤은 낮게 읊조렸다.
    “우리는… 괜찮지 않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통창 너머의 거대한 검은 결정체를 향했다.
    그것은 여전히 그곳에 존재했지만, 어딘가 달라진 듯했다.
    아니, 달라진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이것은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진정한 미지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망각된 우주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말 그대로 ‘흔적’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이제, 그들 안에 새겨졌다.

  • 사이버펑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망각의 흔적

    심연.

    아크튜러스 호의 함교 통창 너머로 펼쳐진 우주는 그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검은 절망과도 같았다. 닿을 수 없는 저 멀리, 은하의 성운들이 아스라한 물감처럼 번져 있었지만, 이곳은 그조차 삼켜버린 암흑의 한복판이었다. 캡틴 서윤은 비스듬히 함장석에 몸을 기댄 채, 검푸른 빛을 내는 홀로그램 패드를 느릿하게 스크롤했다.

    “이상 없음. 여전히 이상 없음. 뭐, 이상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이지만.”

    파일럿 류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왼쪽 눈을 덮고 있는 인공 홍채 렌즈와 함께 푸른빛으로 깜빡였고, 손가락은 조종간 위에서 리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신경계는 아크튜러스 호의 비행 시스템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기에, 지루함은 더욱 증폭되는 듯했다. 이 드넓은 우주에서, 류에게 가장 큰 적은 언제나 지루함이었다.

    “너무 평화로운 것도 문제죠. 이 광활한 빈 공간에서 혼자 떠다니다 보면, 내가 정말 존재하는 건가 싶고.”

    서윤이 짧게 웃었다. 그녀의 오른팔에는 얇은 금속 피부가 정교하게 덮여 있었는데, 과거 어떤 사고로 잃어버린 팔을 대체한 것이었다. 그 금속 피부 아래로는 함선의 모든 정보가 실시간으로 흐르는 미세 회로가 박혀 있어, 그녀의 시야에 직접 투사되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텅 빈 에너지 수치와 항로 데이터만이 의미 없이 깜빡일 뿐이었다.

    “그럼 자네는 뭔가 특이한 거라도 발견하고 싶은 건가? 저 너머에서 우리를 환영할 알 수 없는 지성체라도?”

    엔지니어 강이 뒤쪽 작업대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기름때와 땀으로 번들거렸고, 낡은 작업복은 곳곳이 헤져 있었다. 강은 사이버네틱스 의수족 덕분에 온갖 위험천만한 작업을 능숙하게 해낼 수 있었지만, 그의 손은 늘 무언가를 만지고 뜯고 조립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지성체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아주 작고 예쁜 유성이라도 하나 지나갔으면 좋겠다고요.” 류가 투덜거렸다.

    “그럼 저기 과학부 지혁에게 부탁해 봐. 자네가 원하는 유성 하나쯤은 어디선가 스캔해 줄지도 모르지.” 서윤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때였다.
    함교 전체를 감싸던 잔잔한 기계음이 순간적으로 높아졌다. 모니터마다 비상 알림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뭔가 잡혔습니다! 비정상적인 에너지 패턴. 일반적인 항성 물질과는 다른데요.”

    과학 담당 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혁은 검은색 안경 너머로 잔뜩 상기된 눈을 빛내며 자신의 콘솔을 조작하고 있었다. 그의 얇은 손가락은 홀로그램 키보드 위를 춤추듯 오갔고, 팔목에 이식된 데이터 포트에서는 녹색 빛이 연신 뿜어져 나왔다.

    “지혁, 무슨 일이야?” 서윤이 자세를 바로 하며 물었다.

    “캡틴, 저희가 예상 항로를 벗어나긴 했지만… 이 구역은 관측된 적 없는 미개척 영역입니다. 그런데, 아주 특이한 에너지 서명을 포착했습니다.”

    메인 스크린에 낯선 그래프와 숫자들이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보통 우주에서 발견되는 자연 현상과는 확연히 다른, 불규칙하면서도 동시에 정교한 파형이었다.

    “인위적인 것 같다는 건가?” 서윤의 목소리에 미묘한 긴장감이 실렸다.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자연 현상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질서 정연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무질서합니다. 패턴이 있지만,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혁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학구적인 호기심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거리가 얼마나 되지?”

    “초속 1.5광년 속도로 이동 중인 것으로 보아… 약 3시간 안에 시각 범위에 들어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에너지는 매우 강합니다. 너무 강해서, 저희 센서가 왜곡되는 것 같아요.”

    “왜곡?” 류가 조종간을 고쳐 잡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데?”

    “음… 마치 주위 공간 자체가 일렁이는 것 같달까요. 제가 가진 데이터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마치 센서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데이터를 거부해요. 하지만 에너지는… 존재합니다.”

    서윤은 잠시 침묵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 광대한 공허 속에서, 그들은 그저 오래된 계약에 따라 미개척 성계를 탐사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임무도 없었다. 우주력 2650년. 인류가 이 암흑 우주에 발을 내디딘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외계 문명’의 흔적을 발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인류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의 문명을 찾지 못했다.

    “강, 엔진 출력 점검해. 비상 상황 대비해서 모든 시스템 스캔하고.” 서윤이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캡틴. 하지만… 이런 상황은 매뉴얼에 없었는데요.” 강이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서둘러 자신의 콘솔로 돌아갔다. 그의 사이버네틱스 의수가 정교하게 패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류, 진로 수정. 최저 항속으로 접근한다. 접근 코드는 ‘은하의 속삭임’으로.”

    “최저 항속이라니… 설마 직접 보시겠다는 겁니까, 캡틴?” 류의 목소리에 경외감이 섞였다.

    “그래. 이건 우리가 이 항해를 시작한 이유일지도 모르니까.” 서윤의 시선이 메인 스크린에 고정되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심연 속, 알 수 없는 에너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크튜러스 호의 함교에는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센서의 왜곡 현상은 더욱 심해졌고, 지혁은 연신 미간을 찌푸린 채 새로운 데이터를 해석하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지휘부와 연락은?” 서윤이 물었다.

    “외부 통신망 역시 심하게 교란되고 있습니다, 캡틴. 간신히 비상 신호는 보냈지만, 답신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통신 담당 유진이 대답했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귀 뒤에는 작은 커뮤니케이션 임플란트가 빛나고 있었다.

    “알았다.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서윤의 시선은 다시 통창 너머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검은 심연의 저편에서 무언가가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희미한 얼룩 같았다. 하지만 아크튜러스 호가 한 걸음, 한 걸음 더 다가갈수록, 그 얼룩은 점차 선명한 윤곽을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떤 건물도, 우주선도, 자연의 암석도 아니었다.
    거대한 검은색의… 결정체였다.
    표면은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빛을 흡수해버리는 듯, 주변의 별빛조차 왜곡되어 보였다. 완벽한 다각형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 배열은 기하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복잡성을 띠고 있었다. 육안으로도 감지되는 강렬한 에너지가 결정체의 표면에서 꿈틀거리는 듯했다.

    “이게… 대체…?” 류의 목소리가 떨렸다.

    “센서가… 먹통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아요. 질량, 구성 원소, 에너지 수치… 모두 ‘측정 불가’입니다.” 지혁은 거의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공포에 질려 커져 있었다.

    아크튜러스 호가 그 거대한 결정체에 약 100킬로미터까지 접근하자, 함선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함교의 홀로그램 패드들이 일제히 깜빡였고, 몇몇 보조 스크린은 지지직거리는 노이즈를 뿜어냈다.

    “캡틴, 메인 동력 불안정! 보조 시스템 가동 중이지만, 알 수 없는 에너지 간섭입니다!” 강이 소리쳤다. 그의 이식된 팔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에러 메시지가 깜빡였다.

    서윤은 팔에 박힌 금속 피부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정보에 집중했다. 함선 시스템의 모든 경고가 붉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직 저 검은 결정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순간, 거대한 결정체의 한가운데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일반적인 빛이 아니었다. 어떤 색깔로도 정의할 수 없는, 너무나도 순수하고 압도적인 빛이었다. 그 빛은 우주 공간을 찢어발기는 듯, 아크튜러스 호의 통창 너머로 그대로 쏟아져 들어왔다.

    “모든 시스템 비상 정지! 선체 방어막 최대 출력!” 서윤이 절규하듯 외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빛은 아크튜러스 호의 방어막을 뚫고 함교 내부로 파고들었다. 눈을 가릴 틈도 없이, 승무원들의 시야는 순식간에 압도적인 빛으로 뒤덮였다. 그 빛은 고통스럽게 망막을 꿰뚫는 동시에,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듯한 알 수 없는 전율을 선사했다.

    그리고, 침묵.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함선의 기계음도, 승무원들의 숨소리도.

    서윤의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그녀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무수히 많은 별들, 생명의 시작, 그리고… 끝.
    형언할 수 없는 존재들의 그림자.
    미지의 언어로 속삭이는 듯한, 고통과 경외가 뒤섞인 목소리들.

    정신을 차렸을 때, 서윤은 함장석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된 듯 굳어 있었고,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눈앞의 메인 스크린은 여전히 꺼져 있었고, 함교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눈앞, 메인 콘솔 위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색 조각이 놓여 있었다.
    거대한 결정체와 완벽하게 똑같은 재질과 형태.
    주변의 빛을 모두 흡수하는 듯한, 완벽한 어둠을 품은 조각.

    서윤은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그 조각을 만지는 순간, 손끝에서부터 전율이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새로운 영상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검은 공간 속에서, 무수히 많은 눈동자들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의 기억이자,
    모든 것의 시작이며,
    모든 것의 끝이었다.

    “캡틴… 괜찮으십니까?”

    류의 떨리는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서윤은 숨을 들이켰다.
    손안의 검은 조각은 차갑도록 싸늘했다.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서, 알 수 없는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아니.”
    서윤은 낮게 읊조렸다.
    “우리는… 괜찮지 않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통창 너머의 거대한 검은 결정체를 향했다.
    그것은 여전히 그곳에 존재했지만, 어딘가 달라진 듯했다.
    아니, 달라진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이것은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진정한 미지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망각된 우주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말 그대로 ‘흔적’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이제, 그들 안에 새겨졌다.

  • 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제3화. 참치캔 한 조각의 대의명분**

    “망할, 이놈의 먼지는 씻어도 씻어도 끝이 없네.”

    유나는 콧잔등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쓱 닦아냈다. 반투명한 방진 마스크 너머로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삭아가는 철근의 비릿한 향이 뒤섞여 들어왔다. 여기가 한때 ‘에브리데이 마트’라는 번지르르한 이름으로 불리던 곳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뼈대만 남은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일 뿐이었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햇살이 무너진 천장 틈새로 겨우 스며들어 거미줄과 먼지 가득한 공간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보급품 목록에 참치캔이 우선순위 1번이었어, 유나 씨. 집중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지훈의 목소리는 이런 지옥 같은 폐허에서도 묘하게 차분했다. 언제나 평온한 저 목소리가 유나는 가끔 짜증이 났다. 저 평온함은 타고난 건지, 아니면 이 모든 상황에 이미 무감각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은 하루하루가 서바이벌 게임의 최종 라운드 같았는데 말이다.

    “알았다고, 알았어. 그놈의 참치캔 참치캔…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게 참치캔이지, 안 그래?”

    유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손전등을 휘휘 저으며 잔해 속을 헤집었다. 녹슨 선반 틈새, 널브러진 상자 더미, 썩어 문드러진 의류들 사이를 헤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시야는 온통 폐허의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쪽은 통조림 코너였던 것 같은데? 어, 봐봐! 참치캔이다!”

    녹슨 선반 틈새로 겨우 빛이 닿는 곳에 찌그러진 참치캔 몇 개가 보였다. 어쩌면 녹이 슬고 찌그러졌을지언정, 안의 내용물은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희망의 상징들이었다.

    유나가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지훈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섣부르게 움직이지 마.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났어.”

    지훈은 손전등을 끈 채 벽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어둠 속 저편을 향해 있었다.

    “소리? 쥐새끼겠지. 여기 쥐떼는 전성기 홍대 클럽보다 많을 걸.”

    유나는 피식 웃었다. 쥐는 이 폐허 세상의 가장 흔하고도 짜증 나는 동반자였다. 비록 가끔은 사람의 손가락만 한 녀석들이 나타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쥐는 쥐였다.

    “아니, 뭔가 달라. 발소리가… 좀 더 무거워.”

    지훈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유나는 그의 말에 어딘가 모르게 으스스함을 느꼈다. 지훈은 어지간해서는 동요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가 ‘뭔가 다르다’고 말할 정도면, 정말 뭔가 다른 것이 나타났을 수도 있었다.

    쿠구궁!

    천장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먼지가 후드득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썩은 나무판자가 삐걱이며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쿵, 쿵, 쿵. 마치 둔탁한 심장 소리처럼 울렸다.

    “젠장, 쥐새끼 치고는 몸무게가 꽤 나가네?”

    유나는 허리춤의 나이프를 만지작거렸다. 이빨 빠진 나이프였지만, 최소한의 호신용으로는 충분했다. 적어도 평범한 쥐떼에게는 말이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며 나타난 것은… 쥐는 쥐인데, 좀 많이 이상한 쥐였다.

    송아지만큼 거대한 몸집, 털은 군데군데 빠져나가 흉측한 피부가 드러나 있었고, 이빨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삐죽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코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마트의 어둠 속에서 녀석의 실루엣은 악마처럼 보였다.

    “돌연변이 쥐…”

    유나가 이를 악물었다. 한때 귀여운 마스코트였을 이 동물들이 세상이 뒤집힌 후 어떻게 변이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선 이 기괴한 존재들을 피하거나, 싸워서 이겨야 했다.

    “네가 말한 ‘뭔가 다른’ 게 이거였냐?”

    유나가 잔뜩 날 선 목소리로 지훈에게 쏘아붙였다. 지훈은 여전히 벽에 바싹 붙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니까 섣부르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들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아니, 이 상황에 지금 나한테 잔소리를 할 타이밍이야? 저 녀석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눈을 번뜩이고 있다고!”

    돌연변이 쥐가 으르렁거리며 좁은 통로를 막아섰다. 녀석의 덩치에 비해 움직임은 민첩했다. 거대한 앞발을 번쩍 들어 올리자, 날카로운 발톱이 공기를 갈랐다. 녀석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분명 자신들의 냄새를 맡은 것이었다.

    “어쩌지? 저 녀석… 냄새를 맡은 것 같아.”

    지훈이 중얼거렸다.

    “네 입에서 나는 통조림 냄새겠지! 아니면 며칠째 안 씻은 우리 냄새거나! 젠장, 저 녀석은 아무리 봐도 한 방에 보내기 힘든 상대라고!”

    유나는 나이프를 꽉 움켜쥐었다. 정면승부는 무리였다. 저 거대한 덩치를 상대로는 그녀의 나이프는 겨우 이쑤시개 수준이었다.

    그때, 지훈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한쪽을 응시했다.

    “유나 씨, 저기 저 선반!”

    그가 가리킨 곳은 삐걱거리는 녹슨 선반 위에 위태롭게 놓인 낡은 카트였다. 한때는 쇼핑객의 짐을 싣고 매장을 누볐을 카트가 이제는 언제 떨어질지 모를 흉기로 변해 있었다.

    “지금 그걸…?”

    유나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 지훈의 머리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항상 기상천외한 방법을 찾아내곤 했다. 잔소리가 많고 깐깐한 건 인정하지만, 위기 대처 능력만큼은 최고였다.

    “좋아, 네 머리 쓰는 건 인정해 줄게. 하지만 실패하면 네가 저 녀석 밥이다!”

    “하나, 둘, 셋!”

    지훈의 신호와 동시에 유나가 재빠르게 선반을 발로 걷어찼다. 콰당! 무너지는 선반과 함께 카트가 엄청난 소음을 내며 돌연변이 쥐에게로 굴러떨어졌다. 쥐는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잠시 주춤했다. 거대한 카트가 녀석의 앞발을 덮쳤는지, 녀석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굴렀다.

    “지금이야! 빨리!”

    지훈이 유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들은 미친 듯이 달렸다. 쥐의 기괴한 비명 소리가 뒤에서 따라오는 듯했지만, 다행히 카트와 무너진 선반이 잠시 시간을 벌어주었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건물 밖으로 나와 햇볕 아래 섰을 때,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잿빛 먼지로 뒤덮인 건물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 황폐한 거리.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은 지친 몸을 더욱 피로하게 만들었다.

    “하아… 하아… 진짜 미쳤냐? 카트 하나로 저 덩치를 막을 생각을 하다니.”

    유나가 손으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심장이 여전히 발광하듯 뛰어댔다.

    “성공했잖아.”

    지훈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작은 흙먼지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그의 옷은 여전히 비교적 깨끗했다. 저 완벽주의는 이 세상에서 대체 어떻게 유지되는 건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나 아니었으면 참치캔만 보다가 쥐 밥이 됐을 걸.”

    “흥! 내 나이프 실력을 못 봐서 하는 소리겠지. 네가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했을 거라고!”

    유나는 발끈했지만, 사실 지훈의 기지가 없었다면 꽤나 고전했을 것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돌연변이 쥐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찌그러진 참치캔 세 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수확은 나쁘지 않네. 이 황폐한 세상에서 참치캔이라니, 꽤 괜찮은 보급품이야.”

    지훈이 묵묵히 캔 하나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캔을 유심히 보더니 중얼거렸다.

    “유통기한이… 2년 지났네. 괜찮을까?”

    유나는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야, 이 세상에 유통기한 따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냥 살아있으면 감사한 거지.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 거야. 네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치캔’이라는 이름으로 이만큼의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고!”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흙먼지 가득한 길을 앞서 걷기 시작했다. 지훈은 그런 유나의 뒷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따라 나섰다.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그래도 방금 전에는 꽤 멋있었다고, 인정해 줄게.”

    유나가 뒤돌아보지 않고 툭 던지듯 말했다.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인정의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지훈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유나의 뒤를 따랐다. 붉게 물드는 황폐한 노을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가끔은 이렇게 피식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 어쩌면 작은 희망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희망은 엉뚱하게도, 으르렁거리는 돌연변이 쥐떼와 2년 지난 참치캔 속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 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제3화. 참치캔 한 조각의 대의명분**

    “망할, 이놈의 먼지는 씻어도 씻어도 끝이 없네.”

    유나는 콧잔등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쓱 닦아냈다. 반투명한 방진 마스크 너머로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삭아가는 철근의 비릿한 향이 뒤섞여 들어왔다. 여기가 한때 ‘에브리데이 마트’라는 번지르르한 이름으로 불리던 곳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뼈대만 남은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일 뿐이었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햇살이 무너진 천장 틈새로 겨우 스며들어 거미줄과 먼지 가득한 공간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보급품 목록에 참치캔이 우선순위 1번이었어, 유나 씨. 집중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지훈의 목소리는 이런 지옥 같은 폐허에서도 묘하게 차분했다. 언제나 평온한 저 목소리가 유나는 가끔 짜증이 났다. 저 평온함은 타고난 건지, 아니면 이 모든 상황에 이미 무감각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은 하루하루가 서바이벌 게임의 최종 라운드 같았는데 말이다.

    “알았다고, 알았어. 그놈의 참치캔 참치캔…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게 참치캔이지, 안 그래?”

    유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손전등을 휘휘 저으며 잔해 속을 헤집었다. 녹슨 선반 틈새, 널브러진 상자 더미, 썩어 문드러진 의류들 사이를 헤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시야는 온통 폐허의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쪽은 통조림 코너였던 것 같은데? 어, 봐봐! 참치캔이다!”

    녹슨 선반 틈새로 겨우 빛이 닿는 곳에 찌그러진 참치캔 몇 개가 보였다. 어쩌면 녹이 슬고 찌그러졌을지언정, 안의 내용물은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희망의 상징들이었다.

    유나가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지훈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섣부르게 움직이지 마.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났어.”

    지훈은 손전등을 끈 채 벽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어둠 속 저편을 향해 있었다.

    “소리? 쥐새끼겠지. 여기 쥐떼는 전성기 홍대 클럽보다 많을 걸.”

    유나는 피식 웃었다. 쥐는 이 폐허 세상의 가장 흔하고도 짜증 나는 동반자였다. 비록 가끔은 사람의 손가락만 한 녀석들이 나타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쥐는 쥐였다.

    “아니, 뭔가 달라. 발소리가… 좀 더 무거워.”

    지훈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유나는 그의 말에 어딘가 모르게 으스스함을 느꼈다. 지훈은 어지간해서는 동요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가 ‘뭔가 다르다’고 말할 정도면, 정말 뭔가 다른 것이 나타났을 수도 있었다.

    쿠구궁!

    천장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먼지가 후드득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썩은 나무판자가 삐걱이며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쿵, 쿵, 쿵. 마치 둔탁한 심장 소리처럼 울렸다.

    “젠장, 쥐새끼 치고는 몸무게가 꽤 나가네?”

    유나는 허리춤의 나이프를 만지작거렸다. 이빨 빠진 나이프였지만, 최소한의 호신용으로는 충분했다. 적어도 평범한 쥐떼에게는 말이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며 나타난 것은… 쥐는 쥐인데, 좀 많이 이상한 쥐였다.

    송아지만큼 거대한 몸집, 털은 군데군데 빠져나가 흉측한 피부가 드러나 있었고, 이빨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삐죽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코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마트의 어둠 속에서 녀석의 실루엣은 악마처럼 보였다.

    “돌연변이 쥐…”

    유나가 이를 악물었다. 한때 귀여운 마스코트였을 이 동물들이 세상이 뒤집힌 후 어떻게 변이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선 이 기괴한 존재들을 피하거나, 싸워서 이겨야 했다.

    “네가 말한 ‘뭔가 다른’ 게 이거였냐?”

    유나가 잔뜩 날 선 목소리로 지훈에게 쏘아붙였다. 지훈은 여전히 벽에 바싹 붙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니까 섣부르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들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아니, 이 상황에 지금 나한테 잔소리를 할 타이밍이야? 저 녀석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눈을 번뜩이고 있다고!”

    돌연변이 쥐가 으르렁거리며 좁은 통로를 막아섰다. 녀석의 덩치에 비해 움직임은 민첩했다. 거대한 앞발을 번쩍 들어 올리자, 날카로운 발톱이 공기를 갈랐다. 녀석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분명 자신들의 냄새를 맡은 것이었다.

    “어쩌지? 저 녀석… 냄새를 맡은 것 같아.”

    지훈이 중얼거렸다.

    “네 입에서 나는 통조림 냄새겠지! 아니면 며칠째 안 씻은 우리 냄새거나! 젠장, 저 녀석은 아무리 봐도 한 방에 보내기 힘든 상대라고!”

    유나는 나이프를 꽉 움켜쥐었다. 정면승부는 무리였다. 저 거대한 덩치를 상대로는 그녀의 나이프는 겨우 이쑤시개 수준이었다.

    그때, 지훈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한쪽을 응시했다.

    “유나 씨, 저기 저 선반!”

    그가 가리킨 곳은 삐걱거리는 녹슨 선반 위에 위태롭게 놓인 낡은 카트였다. 한때는 쇼핑객의 짐을 싣고 매장을 누볐을 카트가 이제는 언제 떨어질지 모를 흉기로 변해 있었다.

    “지금 그걸…?”

    유나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 지훈의 머리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항상 기상천외한 방법을 찾아내곤 했다. 잔소리가 많고 깐깐한 건 인정하지만, 위기 대처 능력만큼은 최고였다.

    “좋아, 네 머리 쓰는 건 인정해 줄게. 하지만 실패하면 네가 저 녀석 밥이다!”

    “하나, 둘, 셋!”

    지훈의 신호와 동시에 유나가 재빠르게 선반을 발로 걷어찼다. 콰당! 무너지는 선반과 함께 카트가 엄청난 소음을 내며 돌연변이 쥐에게로 굴러떨어졌다. 쥐는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잠시 주춤했다. 거대한 카트가 녀석의 앞발을 덮쳤는지, 녀석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굴렀다.

    “지금이야! 빨리!”

    지훈이 유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들은 미친 듯이 달렸다. 쥐의 기괴한 비명 소리가 뒤에서 따라오는 듯했지만, 다행히 카트와 무너진 선반이 잠시 시간을 벌어주었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건물 밖으로 나와 햇볕 아래 섰을 때,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잿빛 먼지로 뒤덮인 건물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 황폐한 거리.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은 지친 몸을 더욱 피로하게 만들었다.

    “하아… 하아… 진짜 미쳤냐? 카트 하나로 저 덩치를 막을 생각을 하다니.”

    유나가 손으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심장이 여전히 발광하듯 뛰어댔다.

    “성공했잖아.”

    지훈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작은 흙먼지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그의 옷은 여전히 비교적 깨끗했다. 저 완벽주의는 이 세상에서 대체 어떻게 유지되는 건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나 아니었으면 참치캔만 보다가 쥐 밥이 됐을 걸.”

    “흥! 내 나이프 실력을 못 봐서 하는 소리겠지. 네가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했을 거라고!”

    유나는 발끈했지만, 사실 지훈의 기지가 없었다면 꽤나 고전했을 것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돌연변이 쥐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찌그러진 참치캔 세 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수확은 나쁘지 않네. 이 황폐한 세상에서 참치캔이라니, 꽤 괜찮은 보급품이야.”

    지훈이 묵묵히 캔 하나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캔을 유심히 보더니 중얼거렸다.

    “유통기한이… 2년 지났네. 괜찮을까?”

    유나는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야, 이 세상에 유통기한 따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냥 살아있으면 감사한 거지.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 거야. 네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치캔’이라는 이름으로 이만큼의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고!”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흙먼지 가득한 길을 앞서 걷기 시작했다. 지훈은 그런 유나의 뒷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따라 나섰다.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그래도 방금 전에는 꽤 멋있었다고, 인정해 줄게.”

    유나가 뒤돌아보지 않고 툭 던지듯 말했다.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인정의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지훈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유나의 뒤를 따랐다. 붉게 물드는 황폐한 노을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가끔은 이렇게 피식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 어쩌면 작은 희망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희망은 엉뚱하게도, 으르렁거리는 돌연변이 쥐떼와 2년 지난 참치캔 속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1장. 심해의 검은 심장**

    무한의 어둠이 펼쳐진 우주, 그 심연을 가르며 ‘프론티어’ 호는 묵묵히 전진하고 있었다. 은하의 변방, 인류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을 탐사하는 것이 이 낡았지만 견고한 우주선의 임무였다. 함교는 희미한 제어판 불빛과 나직한 기계음으로 가득했고, 그 속에서 승무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임무에 몰두하고 있었다.

    “함장님, 제2외곽성단 통과 지점 3분 전입니다.”

    항해사 박준영의 차분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이현우 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 화면을 응시했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오로지 별들의 은하수와, 그 사이에 스며든 듯한 압도적인 검은 공간뿐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항해는 언제나 함장의 가슴을 조이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기대감을 품게 했다. 인류의 역사를 새로 쓸 수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그의 심장을 뛰게 했다.

    “그래, 준영. 특이사항은?”

    “현재까지는 없습니다. 모든 시스템 정상… 잠시만요.”

    박준영의 목소리가 순간 멈칫했다. 그의 손가락이 빠르게 홀로그램 키패드를 스쳤고, 주 화면에 푸른빛 경고창이 깜빡였다.

    “미확인 에너지 반응 감지. 좌표 델타-79201. 근원 불명. 감지 범위는… 현재 500만 킬로미터 이내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함교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500만 킬로미터는 심우주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혀지는 거리였다.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에너지 패턴은? 혹시 인공물 가능성은?” 이현우 함장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긴장감이 서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크린 앞으로 다가섰다.

    “패턴 분석 불가합니다. 기존 데이터베이스에 일치하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인공물 여부도…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단순한 성간 먼지나 유성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중력 왜곡도 감지됩니다.” 박준영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함장님!” 그때 과학장교 강은하 박사가 자신의 콘솔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안경 너머 눈은 흥분과 경외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미지의 현상은 그녀를 가장 들뜨게 하는 요소였다. “에너지 반응이 기묘해요.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한 형태입니다. 시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는 것 같은데요!”

    “회피 기동 준비해, 준영. 그리고 전 함선 비상 태세 전환. 에너지 보호막 최고치로 올려!” 이현우 함장은 즉각적으로 명령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경계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저 미지의 존재가 인류에게 우호적일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박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너무 가깝습니다, 함장님. 회피 기동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충돌 궤도는 아니지만, 거의 스쳐 지나갈 겁니다. 게다가… 방금 속도가 줄었습니다.”

    “속도가 줄었다고?” 이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스스로 속도를 제어한다는 건가?” 그 말에 함교에 있던 모든 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주 화면의 경고창이 더 크게 울렸다. 그리고 곧,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단순히 빛을 흡수하는 검은 공백처럼 보였다. 하지만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 공백은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세상에…” 기관장 최민석이 넋 나간 듯 중얼거렸다. 그의 손은 제어판 위에 멈춰 있었다. 그의 거칠기로 유명한 성격조차 압도당한 듯 보였다.

    그것은 완벽한 정육면체였다. 그러나 그 어떤 알려진 광물이나 금속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빛을 반사하기는커녕, 주변의 모든 빛을 삼키는 듯한 모습이었다. 표면은 한없이 매끄러웠고, 그 위에 새겨진 문양 같은 것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고대의 미스터리가 잔뜩 응축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크기는… ‘프론티어’ 호보다도 거대했다. 어쩌면 수십 킬로미터에 달할지도 모른다.

    “이게… 대체 뭡니까?” 박준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강은하 박사는 이미 자신의 콘솔을 떠나 주 화면 앞에 바짝 다가서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이건… 인류가 접촉한 적 없는 고대 문명의 유물입니다. 아니, 유물이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완벽해요. 중력 왜곡이… 중력 왜곡이 극심합니다. 주변 공간이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있어요!” 그녀는 흥분에 겨워 손을 들어 허공에 대고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했다.

    ‘프론티어’ 호는 거대한 검은 정육면체 옆을 지나고 있었다. 200만 킬로미터… 100만 킬로미터… 그리고 불과 몇만 킬로미터 앞까지 다가갔을 때였다.

    **’웅——-‘**

    함선 전체를 뒤흔드는 깊고 낮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승무원들은 휘청거렸고, 천장의 조명등이 깜빡였다. 함교를 가득 채웠던 기계음이 불안정한 굉음으로 바뀌었다.

    “함선 전체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립니다!” 최민석 기관장이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에너지 보호막이… 불안정합니다! 출력 저하가 감지됩니다!”

    “젠장! 무슨 일이야?” 이현우 함장이 스크린을 노려봤다. 스크린 속 검은 정육면체는 여전히 고요하고 웅장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검은 정육면체의 완벽한 표면에 희미한 빛의 선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마치 심연 속에서 깨어나는 거대한 눈동자처럼,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느릿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차갑고 푸른색이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따스함을 내포한 듯했다. 그리고 그 빛은 단순히 발광하는 것이 아니라, 함선의 에너지 보호막을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프론티어’ 호의 방어막을 뜯어내는 것처럼.

    “함장님! 에너지 보호막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기관실도 제어 불능 상태!” 최민석의 절규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패닉이 섞여 있었다.

    ‘프론티어’ 호는 무방비 상태로 거대한 유물 앞에 노출되었다. 하지만 유물은 공격적인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빛나는 문양들이 그려진 정육면체의 한 면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블랙홀이 입을 벌리는 것처럼, 어둠 속의 또 다른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은 측정 불가능한 깊이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건… 입구인가요?” 강은하 박사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건가요?”

    그녀의 말과 동시에, 유물의 내부에서 푸른빛이 희미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차갑고도 신비로웠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가 움직이는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것은 너무나 거대해서 형체를 특정하기 어려웠지만, 분명 살아있는, 혹은 살아있었던 존재의 흔적 같았다.

    “함장님, 우리가… 완전히 멈췄습니다.” 박준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자율 제어가 불가능합니다. 유물의 중력장에 붙잡힌 것 같습니다.”

    이현우 함장은 꽉 쥔 주먹을 풀지 못했다. 그의 눈은 검은 유물의 열린 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인류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지식이, 아니면 거대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 알 수 없는 존재는 그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모든 통신 채널 개방. 외부 탐색기 발사 준비. 전 대원 전투 태세… 아니.” 이현우 함장은 마지막 명령을 내리려다 멈췄다. 전투 태세는 의미가 없었다. 무방비로 붙잡힌 상태에서 무의미한 저항은 오히려 더 큰 화를 부를지도 모른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나직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떨림 대신 굳건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준영, 함선 내부 시스템 복구 시도해. 은하 박사, 저 유물에 대한 모든 분석 데이터를 확보해. 민석, 기관실에 가서 직접 상황 파악하고 수동으로라도 통제할 방법 찾아봐.”

    그리고 그는 주 화면의 검은 유물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눈 속에는 공포 대신, 거부할 수 없는 탐험가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만남이었다.

    “우리는 지금부터… 미지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그의 목소리는 누구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라기보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맹세와도 같았다. 우주선 ‘프론티어’ 호는, 이제 단순한 탐사선을 넘어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었다. 심해의 검은 심장이 비로소 그 속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그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