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고 넘치는 박수와 환호성이 천장 없는 경기장을 메웠다. 거대한 돌기둥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이곳, 천하제일무술대회의 8강전 첫 경기가 막을 내린 참이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중앙 무대 위에는 떡하니, 마치 방금 산책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의 강진우가 서 있었다.

    “흐음… 싱겁군.”

    그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는 쩌렁쩌렁 울리는 장내에서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지루함으로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무대를 뒤흔들던 흑호권(黑虎拳)의 맹주, ‘철갑맹수(鐵甲猛獸)’ 오만식은 지금 무대 한쪽 구석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전신을 강철처럼 단련했다는 그의 육체는 강진우의 발끝 한 번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것도, 강진우가 하품을 참으며 왼발 뒤꿈치로 대충 바닥을 긁는 척하다가 오만식의 발목을 ‘우연히’ 걸어 넘어뜨린 결과였다.

    “크으… 역시 저 양반이야.”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었어. 저리 힘을 빼고 싸우는데도…”
    “하지만 저건 좀 너무했지 않나? 하품을 하다가 이기다니.”

    관중석에서는 경외와 함께 이해할 수 없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강진우는 그런 시선들을 한데 묶어 대충 훑어보더니, 심판의 승리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집으로 퇴근하는 직장인처럼 무덤덤하게 경기장을 가로질러 나갔다.

    “야, 강진우!”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통로 어귀에서 한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그 특유의 낭랑한 기세를 타고 강진우의 고막을 때렸다. 강진우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불꽃 같은 붉은색 도복을 입고, 허리춤에 늘 차고 다니는 검집의 은장식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한소희가 서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와 앙다문 입술은 마치 방금 맹수라도 사냥하고 온 듯한 기세였다.

    “네놈은 정말… 무림 고수라는 자각이 있긴 한 거냐?”

    한소희는 혀를 차며 그의 뒤통수를 향해 쏘아붙였다. 강진우는 그녀를 향해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글쎄, 무림 고수는 잠시 낮잠도 못 자는 모양이지? 난 방금 그 양반 맹호권을 쓰길래, 지루해서 하품하다가 그만… 실수로 걸려 넘어진 줄 알았는데.”
    “실수? 그게 네놈 필살기냐? ‘하품 걸려 넘어뜨리기’?”

    한소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강진우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코앞에 섰다. 강진우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한소희도 한 기세 하는지라 전혀 위축되지 않고 그를 올려다봤다. 팽팽한 긴장감, 아니, 팽팽한 싸움닭 두 마리가 마주 선 듯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그나저나, 네 녀석은 벌써 다음 경기 준비라도 마쳤나? 벌써부터 그렇게 험악한 인상으로 서 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 옆에서 감히 숨이라도 쉬면 당장 베어버릴 기세로군.” 강진우가 삐딱하게 말했다.
    “흥! 다음 경기 상대는 듣보잡이지만, 난 언제나 만전을 기한다. 네놈처럼 대충 시간이나 때우려고 나온 불량배와는 다르지.”
    “불량배라… 허허, 네 녀석의 입은 여전하군. 독설로 천하제일이 되려는 모양이지?”

    강진우가 콧웃음을 쳤다. 그때였다. 경기장 한쪽에서 난데없이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웅장한 종소리는 두 사람의 말싸움을 끊었고, 이내 낭랑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제군들, 잠시 주목해주시게!”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무대 중앙에 나타난 천하제일무술대회의 총관, 백발의 노인 청풍대사를 바라봤다. 청풍대사는 늘 평온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는 뭔가 곤란하다는 듯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8강전에 예기치 않은 변고가 생겼네.”

    변고? 강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소희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청풍대사를 주시했다. 무림의 고수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대체 무슨 변고란 말인가.

    “대회 경기장이 위치한 이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어젯밤부터 기이한 기운이 맴돌고 있어. 그 기운이 워낙 강성하여, 경기장 내부의 기의 흐름이 불안정해지고 있네. 특히 선수 대기실과 숙소 쪽은 아예 기의 흐름이 뒤틀려, 잠시 동안은 고수들이 편안히 수련하거나 휴식을 취하기 어려운 상황일세.”

    장내가 술렁거렸다. 무림 고수들에게 기의 흐름은 곧 생명과도 같은 것. 수련에 방해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전투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회 본부에서는 고심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네!”

    청풍대사가 손을 들어 장내를 진정시켰다. 그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강진우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옆에 선 한소희도 침을 꿀꺽 삼켰다.

    “남아있는 8강 진출자들은, 지금부터 경기 종료 시까지… 임시로 마련된 ‘합숙소’에서 지내야 할 것이네!”

    합숙소?
    강진우는 제 귀를 의심했다. 무림 고수들이 다 큰 어른이 되어서… 합숙?

    “더욱이, 기의 흐름 안정화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공간이므로, 각 방에는… 두 명의 고수가 함께 머물러야 하네! 이건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이니만큼, 제군들이 너른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리라 믿네.”

    청풍대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내는 폭발하듯 시끄러워졌다. 합숙이라니! 그것도 모르는 이와 한 방을 쓰라니! 무림 고수들의 자존심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처사였다.

    “대체 누가 누구와 함께 쓴다는 겁니까?!”

    어느 문파의 장로가 소리쳤다.
    청풍대사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두루마리를 펼쳤다.

    “자, 그럼 방 배정을 발표하겠네!”

    강진우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서 있던 한소희 역시 왠지 모를 불안감에 눈을 깜빡였다.

    “첫 번째 방! 운무도(雲霧島)의 비검사(飛劍士) 이정환 군과… 사자후(獅子吼)의 계승자 무광 스님!”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검과 주먹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청풍대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름을 불렀다.
    강진우의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었다. 설마… 설마…

    “마지막으로…”

    청풍대사의 시선이 강진우와 한소희에게 닿았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불길한 확신에 휩싸였다.

    “‘태극검화(太極劍花)’ 한소희 양과… ‘만사태평(萬事太平)’ 강진우 군!”

    정적이 흘렀다.
    이어지는 억눌린 웃음소리와 탄식, 그리고 경악의 목소리들.

    “뭐, 뭐요?!” 한소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강진우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젠장, 만사태평? 누가 나를 만사태평이라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혀 태평할 수가 없잖아!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배정입니까, 대사님! 저, 저 불량배랑 저를 한방에 넣다니요?!”
    “불량배? 네 녀석은 입에서 나오는 게 다 욕설뿐이냐? 나는 이 나이에 계집애랑 한 방을 쓰면 잠이나 제대로 잘지 모르겠군.”

    두 사람은 격렬하게 서로를 노려봤다. 이글거리는 한소희의 눈빛과, 귀찮다는 듯 살짝 찌푸려진 강진우의 미간.

    “제군들, 이것은 대회의 엄숙한 결정일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네!” 청풍대사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못을 박았다.

    잠시 후, 털썩이는 소리와 함께 강진우와 한소희는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한옥 방 문턱에 도착했다. 방문 앞에는 ‘한소희-강진우’라고 단정하게 쓰인 팻말이 걸려 있었다.
    방 안은 넓지 않았다. 작은 상이 놓여 있고, 양옆으로 요 두 채가 깔려 있었다. 방 중앙을 기준으로 왼쪽은 한소희의, 오른쪽은 강진우의 공간인 듯했다.

    “젠장, 대체 이게 무슨…!”

    한소희가 씩씩대며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강진우는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보자마자 자신의 요가 깔린 곳에 허리춤의 검을 팽개치듯 던졌다. 강진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찼다.

    “검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던지는 게 어디 있나. 검은 검사의 혼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 혼을 어찌하든 네놈이 상관할 바 아니다! 너나 네 혼 잘 간수해!”

    한소희는 뾰족하게 받아쳤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강진우의 짐… 아니,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손에 들린 작은 보따리에 닿았다.

    “그게 다 네 짐이냐?”
    “그럼. 옷 몇 벌하고 칫솔, 그리고 내 꿀단지 하나면 충분하다.”
    “꿀단지?! 네놈은 그렇게 대충 살아서 이 대회에 참가한 거냐? 기껏해야 사탕이나 빨아먹으러 온 아이놈도 아니고!”

    한소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강진우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의 요 위에 보따리를 던져 놓았다. 그리고는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휴우…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서 낮잠이나 자고 싶군.”

    그가 눈을 감고 팔베개를 하려는 순간, 한소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때렸다.

    “야! 아직 밤도 안 됐는데 벌써 잘 생각이야? 방금 온 사람이 그렇게 누워도 되는 거냐? 최소한의 예의도 없어?!”
    “피곤한데 뭐 어떠냐. 넌 잠도 안 자고 수행만 하는 로봇이냐? 그럼 넌 거기 서서 밤새도록 수행이나 하든가.”

    강진우는 눈을 살짝 뜨며 한소희를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 좁디좁은 방 안에서,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에 출전한 두 고수는 마치 원수라도 만난 듯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합숙 생활은, 과연 평화로울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이 두 사람은 과연 하룻밤이라도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창밖으로는 아직 해가 쨍쨍했지만, 이 방 안에는 왠지 모를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 크툴루 신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뒤틀린 각인

    이서준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눅눅한 자취방 공기조차 비명처럼 느껴지는 밤이었다. 잠은 사치였다. 며칠째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알 수 없는 형체들이 기어 다니는 환영에 시달렸고, 눈을 뜨면 벽면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조차 섬뜩한 괴물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조롱하듯 그의 이성을 갉아먹는 기분이었다.

    그 빌어먹을 두루마리를 발견한 이후로, 단 한 순간도 편안한 적이 없었다.

    대학 도서관 지하 서고에서, 먼지와 곰팡이에 뒤덮인 채 잊혔던 낡은 나무 상자. 호기심으로 열어본 상자 안에는 보물 대신,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다고는 믿기 힘든 고문서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건조하고 바싹 마른 양피지처럼 보였지만, 손끝에 닿는 순간 오싹한 한기가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문서 위에는 어떤 학파에서도 본 적 없는 기묘한 상형문자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단순한 문자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벌레처럼, 혹은 심해의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에는 그저 피로와 스트레스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날마다 심해지는 두통과, 귓가에 맴도는 낮고 쉰 목소리의 속삭임은 더 이상 단순한 환청이 아니었다. 어젯밤에는 잠결에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희미한 달빛 아래 방구석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이 마치 거대한 유기체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터질 듯 울렸다. 공포가 목구멍을 틀어막았고, 그는 그저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아침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서준은 몸을 웅크린 채 침대 구석에 등을 기댔다. 벽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마저 날카로운 송곳처럼 귀를 찔렀다. 그의 눈은 방 한가운데 놓인 낡은 배낭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안에, 서준은 문제의 고문서를 숨겨두었다. 아무도 찾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아니,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두루마리는 숨겨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낭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일까? 서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방 안의 공기가 점점 차갑고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심해저의 압력이 그의 좁은 방을 짓누르는 듯했다. 오래된 금속 냄새와 함께,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젠장….”

    낮게 욕설을 내뱉었지만,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맨발로 차가운 바닥을 밟았다. 배낭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심장이 더욱 격렬하게 울렸다. 미칠 것 같은 공포와 동시에, 알 수 없는 이끌림이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부할 수 없는, 너무나도 강렬한 충동이었다.

    마침내 배낭 앞에 섰다. 쭈그려 앉아 떨리는 손으로 지퍼를 열었다. 그 순간, 배낭 안에서 음습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고문서가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그 기이한 상형문자들이 마치 어둠 속의 이빨처럼 드러났다.

    서준은 숨을 멈췄다. 그의 눈이 광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번뜩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두루마리를 꺼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모든 정적을 깨뜨렸다. 고문서가 손에 닿는 순간, 차가운 전율이 온몸을 휩쓸었다. 이번에는 한기뿐만이 아니었다. 뇌 속에서 번개가 치는 듯한 강렬한 통증과 함께, 그의 의식 속으로 무언가가 쏟아져 들어왔다.

    환영이었다.

    눈앞의 자취방이 일그러졌다. 벽지가 찢어지고, 벽돌이 무너져 내리는가 싶더니, 이내 거대한 돌기둥들이 솟아오르는 신전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 신전은 인간의 건축 양식이 아니었다. 수직과 수평의 개념이 뒤틀리고, 불가능한 각도로 꺾인 기둥들이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아 있었다. 천장은 없었고, 그 위로는 검붉은 성운이 소용돌이치며 끊임없이 변형하는 거대한 눈동자들을 품고 있었다.

    그 눈동자들은 서준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수백, 수천 개의 눈동자에서 동시에 쏟아지는 시선은 그의 영혼을 발가벗기는 듯한 끔찍한 감각이었다. 귓가에는 아까의 속삭임보다 훨씬 거대하고 웅장한, 수십만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읊조리는 듯한 주문이 메아리쳤다. 그 소리는 어떤 언어로도 번역할 수 없었지만, 그 의미는 강렬하게 그의 뇌리에 박혔다.

    *‘깨어나라… 너의 문이 열렸노라….’*

    서준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현실과 환영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두루마리를 든 손을 내려다보았다. 고문서 위에 새겨진 상형문자들이 붉은색으로 섬광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이 그의 손을 타고 올라와 팔뚝에, 가슴에, 그리고 마침내 그의 이마에 기이한 문양을 새겨 넣는 듯한 환각에 사로잡혔다. 피부가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방 한쪽 벽에 걸려 있던 낡은 거울. 환영 속에서는 거울이 없었지만, 현실의 거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더 이상 서준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서준은 눈동자가 검은 심연으로 변해 있었고, 얼굴에는 그 고문서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기이한 문양들이 핏줄처럼 돋아나 있었다. 그의 입술은 비정상적으로 길게 찢어져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귓가에는 수많은 촉수 같은 것들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리고 거울 속의 그 ‘서준’이 손을 들어, 천천히 자신을 향해 팔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서 검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이제… 너는 우리와 하나가 될 것이다.’*

    속삭임이 그의 뇌리 깊숙이 박혔다. 거울 속의 손이 현실의 거울 표면을 뚫고 튀어나오려는 듯, 거울 전체가 끔찍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유리 표면에 비정상적인 파동이 일었고, 날카로운 금이 가더니, 거울 속의 검은 손이 서준의 목을 향해 뻗어왔다.

    서준은 그제야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두루마리를 떨어뜨렸다. 고문서는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섬광처럼 빛나더니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사라졌다. 동시에 환영도, 뒤틀린 거울도 사라지고, 그의 자취방은 다시 눅눅한 정적 속에 놓였다.

    하지만 목을 움켜쥔 손아귀의 감각만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서준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고,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분명 환상이었을 텐데, 목덜미에는 차가운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아직도 검은 심연으로 변한 자신의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그때, 사라졌던 두루마리가 있던 자리에서, 바닥의 마루 틈새로 검붉은 액체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피와 기름을 섞어 놓은 듯한 끈적하고 불길한 액체였다. 그것은 서서히 퍼져나가더니, 이내 문양을 그리듯 바닥에 기괴한 형체를 만들어냈다. 마치 거대한 눈알이 깜빡이는 듯한 형체였다.

    그리고 그 형체 한가운데에서, 낮고 쉰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 이상 속삭임이 아니었다. 온 방을 뒤흔들고, 그의 영혼을 꿰뚫는 듯한 거대한 울림이었다.

    *“어서 와라, 나의 아이여.”*

    서준은 그 소리에 온몸이 마비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두려움과 절망, 그리고 알 수 없는 굴복감이 그의 의식을 잠식했다. 검붉은 액체로 이루어진 눈알은 서서히 눈꺼풀을 벌리더니, 그 안에서 아득한 심연의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그의 눈을 꿰뚫고, 그의 정신 속으로 파고들어 모든 저항을 부수어 버렸다.

    그의 시야는 암흑으로 뒤덮였다.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자신의 비명이 아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거대한 무언가의 웃음소리였다.

    **[계속]**

  • 크툴루 신화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작품명:** 벽 속의 메아리
    **장르:** 크툴루 신화, 도시 괴담
    **에피소드 제목:** 1화: 보금자리의 균열

    **등장인물:**

    * **지영 (Ji-young):** 20대 후반, 평범한 직장인. 새로 이사 온 아파트에서 기괴한 현상을 겪는 주인공.

    **장면 1**

    * **[컷 1: 햇살이 쏟아지는 아파트 거실. 새로 들인 가구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박스 몇 개가 보이고, 지영이 그중 하나를 정리하며 상기된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다.]**
    * **지영 (내레이션):** 길고 길었던 이사와의 전쟁 끝에, 드디어 나만의 보금자리가 생겼다. 낡은 원룸을 떠나 번듯한 아파트에 입성하다니. 솔직히, 좀 무리한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아. 이제부터 꽃길만 걸을 일만 남았으니까!

    * **[컷 2: 밤. 거실 창밖으로 도시의 현란한 불빛이 반짝인다. 지영이 새로 산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다. 피곤한 듯 연신 하품을 하지만, 눈은 초롱초롱하다.]**
    * **지영 (내레이션):** 이사 첫날밤. 온몸이 쑤시고 피곤함에 골아떨어질 것 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낯선 공간이 주는 설렘과, 미지의 불안감 같은 것이 뒤섞여서일까.

    * **[컷 3: 지영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불빛 가득한 고층 빌딩들 사이로, 유난히 어둡고 낡아 보이는, 층이 낮은 건물 하나가 멀리서 눈에 띈다. 지영은 별생각 없이 눈을 돌린다.]**
    * **[컷 4: 갑자기, 주방 쪽에서 ‘달그락’ 하는 작은 소리가 들린다. 금속끼리 부딪히는 듯한 소리. 지영이 고개를 돌려 주방을 응시한다.]**
    * **지영:** 뭐지?
    * **[컷 5: 주방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후드 위에 걸린 작은 주걱들이 어렴풋이 보일 뿐,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 **지영 (내레이션):** 잘못 들었겠지. 아니면… 새집이라 아직 적응이 안 돼서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가.
    * **[컷 6: 다시 휴대폰을 보는 지영. 그러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고, 시선은 여전히 주방 쪽을 향하고 있다.]**

    **장면 2**

    * **[컷 7: 며칠 후. 해 질 녘. 지영이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신발을 벗으려고 몸을 숙이는 순간,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열쇠 꾸러미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
    * **지영:** 어? 내가 어디다 뒀더라…
    * **[컷 8: 지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열쇠를 줍는다. 분명히 퇴근 직전에 테이블 위에 잘 뒀던 기억인데.]**
    * **지영 (내레이션):** 벌써 치매인가…

    * **[컷 9: 밤. 지영이 침대에 누워 잠이 들려는 참이다. 침대 머리맡 스탠드의 희미한 불빛만이 방을 밝히고 있고, 방문은 닫혀 있다.]**
    * **[컷 10: 밖에서 ‘끄으으으윽…’ 하는, 금속이 어딘가에 긁히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지영이 눈을 번쩍 뜬다. 소리는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 **지영:** (속삭임) 무슨 소리지? 윗집인가?

    * **[컷 11: 소리는 이내 잦아들지만, 이번에는 ‘투둑… 투둑…’ 하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천장 쪽에서.]**
    * **지영 (내레이션):** 윗집에서 물을 흘리나? 하지만 이건… 너무 규칙적인데? 마치 심장이 뛰는 소리처럼…
    * **[컷 12: 지영이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향해 다가간다.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저절로 스르륵 열린다. 문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다.]**

    * **[컷 13: 어두운 거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린다. 지영의 시선이 천장을 향한다. 공포에 질린 그녀의 눈이 크게 뜨인다.]**
    * **[컷 14: 천장의 한 부분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마치 천장이 스스로 숨 쉬듯 미세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 듯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젖은 자국이 점액처럼 번져있다.]**
    * **지영:** (두 눈을 비비며) 뭐… 뭐지? 착각인가?
    * **[컷 15: 지영이 한 발짝 다가가자, 천장의 젖은 부분이 ‘흐물’ 하고 한 번 더 크게 움직인다. 그 순간, 물방울 소리가 뚝 그친다. 방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 **[컷 16: 지영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친다. 그녀의 눈은 천장에 고정되어 있다.]**
    * **지영:** (떨리는 목소리로) 말도 안 돼…
    * **[컷 17: 천장의 젖은 부분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영은 얼어붙은 채 그곳을 응시한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장면 3**

    * **[컷 18: 다음 날 아침. 지영이 출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눈 밑에는 거뭇한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다.]**
    * **지영 (내레이션):** 어젯밤은 악몽 같았다. 천장이 움직였다고? 내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게 분명해. 그래, 분명 그럴 거야. 그럴 수밖에 없어.
    * **[컷 19: 욕실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는 지영. 거울 속 자신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초점 없이 흔들리는 듯하다. 낯선 불안감이 그녀의 내면을 잠식하고 있다.]**
    * **[컷 20: 갑자기, 거울 속 지영의 모습이 살짝 일그러진다. 마치 잔잔한 수면에 돌멩이가 던져진 것처럼. 얼굴의 윤곽이 미세하게 뒤틀린다.]**
    * **지영:** (눈을 가늘게 뜨고) 흐음…
    * **[컷 21: 거울 속의 왜곡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지영은 손으로 거울을 닦아보지만,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다. 다만, 그녀의 눈빛에 의심과 불안이 더 깊어진다.]**
    * **지영 (내레이션):** 대체 왜 이러지? 어제부터 자꾸 이상한 일만…

    **장면 4**

    * **[컷 22: 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지영.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싸늘하고 음습한 기운이 느껴진다. 마치 지하실에 들어선 것 같은 냉기다.]**
    * **지영:** (몸을 부르르 떨며) 에어컨을 켰었나? 누가 문을 열어뒀나?
    * **[컷 23: 거실에 들어선 지영의 시선이 주방에 있는 냉장고에 꽂힌다. 냉장고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 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온다.]**
    * **지영:** 냉장고 문이 왜… 내가 잠갔을 텐데.
    * **[컷 24: 지영이 냉장고로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안을 들여다본다. 멀쩡히 보관되어 있던 음료수 병 하나가 옆으로 비스듬히 넘어져 있고, 그 안의 내용물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다. 냉장고 내부의 공기마저 음습하게 느껴진다.]**
    * **[컷 25: 지영이 손을 뻗어 병을 바로 세우려고 하는 순간, 냉장고 문이 ‘쾅!’ 하고 저절로 닫힌다. 엄청난 소음과 함께, 아파트 전체가 울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진다.]**
    * **지영:** 꺄아악!
    * **[컷 26: 지영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치다 주저앉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다.]**
    * **지영:**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건… 이건 누가 장난치는 거야! 집주인! 아니면… 옆집!

    **장면 5**

    * **[컷 27: 지영이 방으로 달려가 문을 잠근다.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지만, 신호음만 갈 뿐 아무도 받지 않는다. 화면 속 친구의 이름이 희미하게 보인다.]**
    * **지영 (내레이션):** 그래… 이건 누가 나를 골탕 먹이는 거야. 분명 누군가…
    * **[컷 28: 침대에 몸을 웅크린 지영. 그때, 방문이 ‘툭… 툭…’ 하고 두드려지는 소리가 들린다. 매우 느리고 규칙적으로.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소리처럼.]**
    * **지영:** (숨을 죽이며) 누구… 누구세요?
    * **[컷 29: 대답이 없다. 그러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선명해지고, 더 가까워지는 듯하다.]**
    * **지영:** (떨리는 목소리로) 누구냐고!! 거기 누구 없어?!
    * **[컷 30: ‘쿵… 쿵… 쿵…’ 소리가 마치 문이 아닌, 방 안의 벽 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변한다. 지영의 심장이 덩달아 쿵쾅거린다.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짓누르는 듯하다.]**

    * **[컷 31: 벽의 한 부분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인다. 그 떨림은 마치 벽 안에서 살아있는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지영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 **지영:** (두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아니야… 환상이야… 잠시 후에 멈출 거야…
    * **[컷 32: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벽의 진동이 점점 더 강해진다. 방 안의 작은 물건들이 ‘달그락’ ‘쨍그랑’ 하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탁자 위 컵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 **[컷 33: 지영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벽을 바라본다. 그녀의 시선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액자를 향한다. 액자 속,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가족사진이 흔들리더니, 갑자기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난다.]**
    * **지영:** (비명) 으아아아악!!

    * **[컷 34: 벽의 진동이 최고조에 달한다. 벽지가 찢어지고, 그 아래 콘크리트 벽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 보인다. 균열 사이로 희미한 어둠이 스며 나온다. 그 어둠은 마치 심연처럼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하며, 알 수 없는 악취가 풍겨온다.]**
    * **지영 (내레이션):** 이건… 꿈이 아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내가 들어와서는 안 될 곳이었다. 이건… 이건… 이 세상의 것이 아니야…

    * **[컷 35: 균열이 점점 더 커지더니, 그 틈으로 축축하고 미끄러운, 불분명한 형태의 촉수 같은 것이 꿈틀거리며 튀어나오려고 한다. 벽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비명으로 변하는 듯하다.]**
    * **[컷 36: 지영이 공포에 질려 입을 벌리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다. 그녀의 눈동자는 광기로 가득 차 흔들린다. 화면은 암전.]**


    **1화 끝.**

  • SF (공상과학) 독립적인 단편 소설

    **아르테미스 호의 마지막 항해 기록**

    거대한 검은 망망대해. 그곳엔 끝없는 침묵만이 존재했고, 가끔 아주 드물게 죽어가는 별의 마지막 숨결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아르테미스 호는 그 침묵을 가로질러 수십 년째 항해 중이었다. 인류가 명명한 모든 성단을 지나, 미개척 우주의 심연을 탐사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진아 함장은 조용히 함교 의자에 몸을 기댔다. 눈앞의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별똥별 하나 없는 순수한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함장님, 특이사항 없습니다. 모든 시스템 정상 작동 중입니다.”
    최유리 항해사가 나른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지루함에 겨운 어조였다.
    “그래, 유리. 그게 늘 문제지.” 진아 함장이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게.”

    광활한 우주는 아름답지만, 동시에 압도적인 공허함을 선사했다. 때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이 거대한 중력처럼 승무원들을 짓누르기도 했다. 그때였다.

    삐빅- 삐이빅-!
    “함장님! 미확인 에너지 신호 감지되었습니다!” 유리의 목소리에 일순간 긴장감이 서렸다. 나른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위치, 규모, 특성 분석해.”
    “네, 함장님. 좌표는… 세타-3121, 페르세우스 팔 바깥 영역입니다. 규모는 행성급으로 보입니다만, 지금까지 관측된 어떤 천체와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홀로그램 스크린에 희미한 붉은 점 하나가 떠올랐다. 마치 우주의 검은 눈동자 속 동공처럼.

    김민준 박사가 과학 분석실에서 허둥지둥 함교로 달려왔다. 그의 안경은 늘 그렇듯 삐뚤어져 있었다.
    “함장님! 에너지 스펙트럼이… 제가 아는 모든 데이터베이스와 다릅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도, 인공적으로 발생할 수도 없는… 뭔가 완전히 다른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경외심이 뒤섞여 있었다.
    “태영 경비대장, 전투 태세 준비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진아 함장은 냉정하게 명령했다. 박태영 경비대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는 경계심이 역력했다.

    아르테미스 호는 미지의 신호를 향해 나아갔다. 수천 킬로미터를 더 비행했을 때, 스크린 속 붉은 점은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함장님, 시각 센서에 포착되었습니다.” 유리 항해사가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스크린에 나타난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완벽한 정육면체였다. 매끈하고, 완벽하게 검은 표면은 주변의 모든 빛을 흡수하는 듯했다. 별빛조차 그 검은 표면에서는 자취를 감췄다. 마치 우주의 어둠 그 자체를 조각해 놓은 듯한,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그 규모는 소행성 정도였지만, 정교함은 신의 손길이 닿은 듯했다.

    “세상에…!” 민준 박사가 탄성을 내질렀다. “저게… 저게 도대체 뭡니까? 어떻게 저런 형태가…!”
    “모든 센서, 저 물체의 표면을 분석해.” 진아 함장이 명령했다.
    “접근해, 유리. 최대한 조심스럽게.”

    아르테미스 호는 거대한 검은 정육면체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가까이 갈수록 그 완벽한 형태와 압도적인 존재감에 승무원들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함장님, 어떤 에너지 방출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생체 신호도, 기계적 반응도 없습니다. 완벽한… 침묵입니다.” 유리 항해사가 보고했다.
    “민준 박사, 표면 물질 분석 가능해?”
    “네, 함장님. 소형 탐사선을 보내겠습니다.”

    탐사선이 정육면체에 가까이 다가갔다. 로봇 팔이 뻗어져 나왔고, 정육면체의 검은 표면에 닿는 순간…
    ‘찌이잉-!’
    아르테미스 호 전체에 뇌를 관통하는 듯한 끔찍한 진동음이 울렸다. 승무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진동은 곧 멈췄지만, 그 여파는 심대했다.
    “함장님! 탐사선 신호 로스트! 모든 시스템에 원인 불명의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수석정비사! 강선우! 상황 보고해!”
    “모르겠습니다, 함장님! 갑작스러운 전력 서지가… 아니, 이건 전력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겁니다! 시스템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강선우 수석정비사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함장님, 제 정신이… 갑자기… 시야가 흐려집니다.” 유리 항해사가 비틀거렸다.
    진아 함장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두개골을 열고 뇌를 직접 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김민준 박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은 광기로 번뜩였다.
    “아니! 이건 오류가 아니야! 메시지야! 깨달음이라고!”
    “민준 박사! 진정해!” 태영 경비대장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민준 박사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경비대장을 밀쳐냈다.
    “닿아야 해…! 저것과 직접 닿아야만 해! 알 수 있어! 모든 것을!”
    그는 함교의 비상구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민준 박사, 멈춰!” 진아 함장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비상구는 외부로 나가는 통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태영 경비대장, 막아! 강제로라도!”
    “알겠습니다!” 태영 경비대장이 그를 쫓았다.

    잠시 후, 통신이 연결되었다.
    “함장님, 민준 박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저 물체에 직접 접촉해야 한다고, 그래야 인류가 진정한 진화를 할 수 있다고… 횡설수설합니다!” 태영 경비대장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함장님! 함선 시스템이… 외부의 영향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함선 자체가 저 물체에 이끌리는 것 같습니다!” 강선우 수석정비사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아르테미스 호는 마치 거대한 자석에 이끌리듯, 검은 정육면체를 향해 서서히 끌려가고 있었다.

    진아 함장은 이를 악물었다. 함선의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지만, 모든 시스템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마비된 듯했다. 스크린 속 정육면체는 점점 더 크게 다가왔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공포를 넘어 경외심마저 불러일으켰다.
    그 순간, 진아 함장의 뇌리에 이상한 감각이 스쳤다.
    차가운 표면. 우주의 심연.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침묵하던 존재의 목소리.
    그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이미지도 아니었다. 단지… 존재의 확장이었다.
    인류가 상상할 수 없는, 너무나 거대한 지성이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기분.
    그것이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아르테미스 호와 승무원들의 존재를 매개로.

    진아 함장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모든 승무원! 긴급 탈출선으로 이동하라! 명령이다!”
    “함장님! 하지만…” 유리 항해사가 망설였다.
    “지금 당장! 아르테미스 호는 포기한다! 살아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해!” 진아 함장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녀 자신도 온몸이 떨렸다. 하지만 이성만큼은 놓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함장님은…?” 태영 경비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지막까지 시스템을 정지시킬 것이다. 너희는 탈출선에 오르면 즉시 이탈해.”
    그녀는 함교의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다. 검은 정육면체는 이제 창문 바로 바깥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유리 항해사가 울먹이며 통신을 끊었다.
    “강선우! 함선 자폭 시스템 활성화할 수 있나!”
    “함장님… 불가능합니다! 모든 시스템이 저 물체와 연결되어… 아니! 오히려 동화되고 있습니다!”
    선우의 목소리도 절망적이었다.

    진아 함장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정육면체의 표면이 아르테미스 호의 창문을 통해 보였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검은 표면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심연이었다.
    그 순간, 함선 전체가 다시 한번 ‘찌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함선 내부의 모든 금속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리는 소리였다.
    “함장님! 민준 박사가… 탈출선에 오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 물체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태영 경비대장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내버려 둬…!” 진아 함장은 이를 악물었다. “그를 붙잡아봐야 소용없을 거야…!”
    이미 민준 박사는 그 물체에 의해 잠식당한 것과 다름없었다.

    정육면체는 이제 아르테미스 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함선의 전면부가 서서히 정육면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금속이 녹아내리는 듯한 끔찍한 소음이 들렸다.
    “함장님! 탈출선 이탈했습니다! 하지만… 함장님…” 유리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렸다.
    진아 함장은 홀로 남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정육면체의 존재는 그녀의 심장 박동과 함께 진동하는 듯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언어의 파편들이, 이미지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왔다.
    광대함. 고독함. 그리고… 깨어남.

    “그래…” 진아 함장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인류가 만나야 할 마지막이었다면…”
    그녀는 비로소 정육면체를 똑바로 응시했다.
    검은 표면 위로, 빛 한 줄기 없는 곳에서, 마치 그녀의 눈동자를 반영하듯,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였다.
    그것은 초대였다. 거부할 수 없는, 너무나 거대하고 오래된 초대.
    아르테미스 호는 천천히, 그리고 완전히, 미지의 검은 유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이 파괴였는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이었는지, 우주의 심연은 침묵할 뿐이었다.
    다만, 멀리 떨어진 탈출선 안에서, 살아남은 승무원들의 눈동자 속에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검은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도 알았다. 그들의 내면 어딘가, 저 정육면체의 일부가 이미 심어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는 다시 침묵했다. 다만, 이전과는 다른, 묘한 기대감과 함께.

  • SF (공상과학) 독립적인 단편 소설

    **아르테미스 호의 마지막 항해 기록**

    거대한 검은 망망대해. 그곳엔 끝없는 침묵만이 존재했고, 가끔 아주 드물게 죽어가는 별의 마지막 숨결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아르테미스 호는 그 침묵을 가로질러 수십 년째 항해 중이었다. 인류가 명명한 모든 성단을 지나, 미개척 우주의 심연을 탐사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진아 함장은 조용히 함교 의자에 몸을 기댔다. 눈앞의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별똥별 하나 없는 순수한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함장님, 특이사항 없습니다. 모든 시스템 정상 작동 중입니다.”
    최유리 항해사가 나른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지루함에 겨운 어조였다.
    “그래, 유리. 그게 늘 문제지.” 진아 함장이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게.”

    광활한 우주는 아름답지만, 동시에 압도적인 공허함을 선사했다. 때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이 거대한 중력처럼 승무원들을 짓누르기도 했다. 그때였다.

    삐빅- 삐이빅-!
    “함장님! 미확인 에너지 신호 감지되었습니다!” 유리의 목소리에 일순간 긴장감이 서렸다. 나른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위치, 규모, 특성 분석해.”
    “네, 함장님. 좌표는… 세타-3121, 페르세우스 팔 바깥 영역입니다. 규모는 행성급으로 보입니다만, 지금까지 관측된 어떤 천체와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홀로그램 스크린에 희미한 붉은 점 하나가 떠올랐다. 마치 우주의 검은 눈동자 속 동공처럼.

    김민준 박사가 과학 분석실에서 허둥지둥 함교로 달려왔다. 그의 안경은 늘 그렇듯 삐뚤어져 있었다.
    “함장님! 에너지 스펙트럼이… 제가 아는 모든 데이터베이스와 다릅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도, 인공적으로 발생할 수도 없는… 뭔가 완전히 다른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경외심이 뒤섞여 있었다.
    “태영 경비대장, 전투 태세 준비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진아 함장은 냉정하게 명령했다. 박태영 경비대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는 경계심이 역력했다.

    아르테미스 호는 미지의 신호를 향해 나아갔다. 수천 킬로미터를 더 비행했을 때, 스크린 속 붉은 점은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함장님, 시각 센서에 포착되었습니다.” 유리 항해사가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스크린에 나타난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완벽한 정육면체였다. 매끈하고, 완벽하게 검은 표면은 주변의 모든 빛을 흡수하는 듯했다. 별빛조차 그 검은 표면에서는 자취를 감췄다. 마치 우주의 어둠 그 자체를 조각해 놓은 듯한,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그 규모는 소행성 정도였지만, 정교함은 신의 손길이 닿은 듯했다.

    “세상에…!” 민준 박사가 탄성을 내질렀다. “저게… 저게 도대체 뭡니까? 어떻게 저런 형태가…!”
    “모든 센서, 저 물체의 표면을 분석해.” 진아 함장이 명령했다.
    “접근해, 유리. 최대한 조심스럽게.”

    아르테미스 호는 거대한 검은 정육면체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가까이 갈수록 그 완벽한 형태와 압도적인 존재감에 승무원들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함장님, 어떤 에너지 방출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생체 신호도, 기계적 반응도 없습니다. 완벽한… 침묵입니다.” 유리 항해사가 보고했다.
    “민준 박사, 표면 물질 분석 가능해?”
    “네, 함장님. 소형 탐사선을 보내겠습니다.”

    탐사선이 정육면체에 가까이 다가갔다. 로봇 팔이 뻗어져 나왔고, 정육면체의 검은 표면에 닿는 순간…
    ‘찌이잉-!’
    아르테미스 호 전체에 뇌를 관통하는 듯한 끔찍한 진동음이 울렸다. 승무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진동은 곧 멈췄지만, 그 여파는 심대했다.
    “함장님! 탐사선 신호 로스트! 모든 시스템에 원인 불명의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수석정비사! 강선우! 상황 보고해!”
    “모르겠습니다, 함장님! 갑작스러운 전력 서지가… 아니, 이건 전력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겁니다! 시스템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강선우 수석정비사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함장님, 제 정신이… 갑자기… 시야가 흐려집니다.” 유리 항해사가 비틀거렸다.
    진아 함장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두개골을 열고 뇌를 직접 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김민준 박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은 광기로 번뜩였다.
    “아니! 이건 오류가 아니야! 메시지야! 깨달음이라고!”
    “민준 박사! 진정해!” 태영 경비대장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민준 박사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경비대장을 밀쳐냈다.
    “닿아야 해…! 저것과 직접 닿아야만 해! 알 수 있어! 모든 것을!”
    그는 함교의 비상구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민준 박사, 멈춰!” 진아 함장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비상구는 외부로 나가는 통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태영 경비대장, 막아! 강제로라도!”
    “알겠습니다!” 태영 경비대장이 그를 쫓았다.

    잠시 후, 통신이 연결되었다.
    “함장님, 민준 박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저 물체에 직접 접촉해야 한다고, 그래야 인류가 진정한 진화를 할 수 있다고… 횡설수설합니다!” 태영 경비대장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함장님! 함선 시스템이… 외부의 영향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함선 자체가 저 물체에 이끌리는 것 같습니다!” 강선우 수석정비사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아르테미스 호는 마치 거대한 자석에 이끌리듯, 검은 정육면체를 향해 서서히 끌려가고 있었다.

    진아 함장은 이를 악물었다. 함선의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지만, 모든 시스템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마비된 듯했다. 스크린 속 정육면체는 점점 더 크게 다가왔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공포를 넘어 경외심마저 불러일으켰다.
    그 순간, 진아 함장의 뇌리에 이상한 감각이 스쳤다.
    차가운 표면. 우주의 심연.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침묵하던 존재의 목소리.
    그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이미지도 아니었다. 단지… 존재의 확장이었다.
    인류가 상상할 수 없는, 너무나 거대한 지성이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기분.
    그것이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아르테미스 호와 승무원들의 존재를 매개로.

    진아 함장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모든 승무원! 긴급 탈출선으로 이동하라! 명령이다!”
    “함장님! 하지만…” 유리 항해사가 망설였다.
    “지금 당장! 아르테미스 호는 포기한다! 살아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해!” 진아 함장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녀 자신도 온몸이 떨렸다. 하지만 이성만큼은 놓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함장님은…?” 태영 경비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지막까지 시스템을 정지시킬 것이다. 너희는 탈출선에 오르면 즉시 이탈해.”
    그녀는 함교의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다. 검은 정육면체는 이제 창문 바로 바깥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유리 항해사가 울먹이며 통신을 끊었다.
    “강선우! 함선 자폭 시스템 활성화할 수 있나!”
    “함장님… 불가능합니다! 모든 시스템이 저 물체와 연결되어… 아니! 오히려 동화되고 있습니다!”
    선우의 목소리도 절망적이었다.

    진아 함장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정육면체의 표면이 아르테미스 호의 창문을 통해 보였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검은 표면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심연이었다.
    그 순간, 함선 전체가 다시 한번 ‘찌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함선 내부의 모든 금속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리는 소리였다.
    “함장님! 민준 박사가… 탈출선에 오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 물체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태영 경비대장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내버려 둬…!” 진아 함장은 이를 악물었다. “그를 붙잡아봐야 소용없을 거야…!”
    이미 민준 박사는 그 물체에 의해 잠식당한 것과 다름없었다.

    정육면체는 이제 아르테미스 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함선의 전면부가 서서히 정육면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금속이 녹아내리는 듯한 끔찍한 소음이 들렸다.
    “함장님! 탈출선 이탈했습니다! 하지만… 함장님…” 유리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렸다.
    진아 함장은 홀로 남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정육면체의 존재는 그녀의 심장 박동과 함께 진동하는 듯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언어의 파편들이, 이미지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왔다.
    광대함. 고독함. 그리고… 깨어남.

    “그래…” 진아 함장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인류가 만나야 할 마지막이었다면…”
    그녀는 비로소 정육면체를 똑바로 응시했다.
    검은 표면 위로, 빛 한 줄기 없는 곳에서, 마치 그녀의 눈동자를 반영하듯,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였다.
    그것은 초대였다. 거부할 수 없는, 너무나 거대하고 오래된 초대.
    아르테미스 호는 천천히, 그리고 완전히, 미지의 검은 유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이 파괴였는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이었는지, 우주의 심연은 침묵할 뿐이었다.
    다만, 멀리 떨어진 탈출선 안에서, 살아남은 승무원들의 눈동자 속에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검은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도 알았다. 그들의 내면 어딘가, 저 정육면체의 일부가 이미 심어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는 다시 침묵했다. 다만, 이전과는 다른, 묘한 기대감과 함께.

  • 타임슬립 (시간여행) 독립적인 단편 소설

    산은 거대한 파도처럼 구름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풍경 속, 이진우는 낡은 배낭을 고쳐 메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손에 든 것은 낡은 지도 조각과 닳아 빠진 가죽으로 감싼 금속 조각 하나. 학계에서는 그를 ‘이단아’라 불렀고, 그의 연구를 ‘망상’이라 치부했다. 그러나 진우는 확신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분명, 모든 기록에서 지워진 고대 문명, ‘아스라’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그의 연구는 수년 전, 우연히 발견된 정체불명의 금속 조각에서 시작되었다. 비바람에도 부식되지 않고, 어떤 분석 장비로도 그 성분을 명확히 밝혀낼 수 없었던 신비한 물질. 그 위에 새겨진 문양은 그 어떤 고대 문자의 데이터베이스에도 없었다. 그러나 진우는 직감했다. 이것이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집념은 결국 수많은 고문헌과 신화 속에서, 금속 조각의 문양과 유사한 형태를 지닌 ‘아스라의 별’이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 별이 ‘고룡산 심장부의 푸른 심장’과 연결된다는 흐릿한 기록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몇 달간의 고된 추적 끝에 진우는 드디어 고룡산 깊숙한 곳, 지도에도 없는 샛길을 따라 이어진 거대한 암벽 앞에서 멈춰 섰다. 무성한 덩굴과 이끼로 뒤덮여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위장된 곳.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인위적으로 다듬어진 흔적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드디어….”

    메마른 손으로 덩굴을 헤치자, 거대한 동굴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진우는 헤드랜턴을 켜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축축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발밑은 미끄러웠고, 간간이 기분 나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수천 년 전,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문명의 심장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동굴은 예상보다 훨씬 길었다. 굽이진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을까, 갑자기 그의 눈앞에 거대한 공간이 펼쳐졌다. 랜턴 불빛이 닿는 곳마다, 깎아지른 듯 정교하게 다듬어진 벽면과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석상들이 드러났다. 단순한 석재가 아니었다. 옅은 회색빛을 띠는 매끄러운 표면은 마치 첨단 소재로 만들어진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진짜였어….” 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학자들에게는 망상이었던 그의 연구가, 지금 그의 눈앞에서 실체가 되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유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곳곳에 알 수 없는 장치들이 멈춘 채 잠들어 있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진우는 직감적으로 가장 깊은 곳을 향해 걸었다. 그곳에 모든 비밀이 잠들어 있을 터였다.

    마침내, 그는 거대한 원형 홀에 도착했다. 홀의 중앙에는 푸른빛을 희미하게 내뿜는 거대한 수정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주기적으로 깜빡이는 푸른빛은 홀 전체를 환상적인 분위기로 물들였다. 바로 그것이었다. ‘고룡산 심장부의 푸른 별’이 의미하는 것. ‘아스라의 별’이었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수정체에 다가갔다.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진동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 기분 좋은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손에 쥔 금속 조각을 수정체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금속 조각이 푸른빛을 발하며 수정체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점점 강렬해지더니, 진우의 시야를 완전히 뒤덮었다.

    세상이 일그러지는 듯한 기묘한 감각. 그의 몸은 압축되고 늘어나는 듯했고, 의식은 저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시간의 강물에 몸을 맡긴 채, 그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밀려 가고 있었다.

    ***

    진우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찬란했다.

    거대한 건축물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반투명한 물질로 만들어진 듯한 비행체들이 소리 없이 공중을 가로질렀다. 거리는 빛나는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들의 얼굴에는 평화로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마치 SF 영화 세트장에 들어선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현실이었다.

    “아스라… 문명….”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과거의 아스라 문명임을 직감했다. 놀랍게도, 그는 주위 사람들의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별의 심장’이 그의 뇌에 그들의 언어를 직접 각인시킨 것일까?

    진우는 거리를 거닐며 그들의 삶을 탐색했다. 아스라인들은 자연과 기술이 완벽하게 조화된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사이에는 거대한 생체 발광 식물들이 자리했고, 그 에너지를 이용해 도시 전체가 운영되는 듯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이 도시에서, 진우는 어딘가 모를 불안감을 감지했다. 사람들의 표정에는 미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거리 곳곳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경고 문구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거대한 중앙 도서관으로 보이는 건물로 향했다. 그곳에 진실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도서관 내부는 첨단 홀로그램 장치와 함께 고대 문자로 쓰인 방대한 기록들로 가득했다. 진우는 이 모든 것이 ‘별의 심장’을 통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손에 든 금속 조각을 이용해 홀로그램 기록을 활성화시켰다.

    기록들은 놀라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아스라 문명은 단순한 고대 문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간을 다루는 기술까지 보유했던 초월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별의 심장’은 단순한 시간 여행 장치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 자체를 조작하고 기록하며, 심지어는 현실의 차원까지 왜곡할 수 있는 궁극의 장치였다.

    그러나 그들의 기술은 너무나도 강력했고, 그 힘을 제어하려는 오만은 결국 재앙을 불러왔다. 기록에는 ‘대붕괴’라 불리는 사건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아스라 문명은 인류에게 다가올 거대한 재앙, 별의 충돌을 막기 위해 ‘별의 심장’을 이용해 시간을 되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시간을 뒤틀어 더 큰 차원 붕괴를 일으켰고, 결국 문명 전체가 시간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지는 비극을 맞았다.

    그들은 멸망 직전, 마지막 희망으로 ‘별의 심장’을 이용해 자신들의 모든 지식과, 비극의 원인, 그리고 인류에게 보내는 경고를 미래의 특정 시점에 고룡산 지하 유적에 봉인했다. 그리고 그 유적은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 영원히 존재하도록 설계되었다. 미래의 누군가가 그들의 메시지를 발견하여,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절규와도 같은 유언이었다.

    진우는 기록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는 순간, 다시금 강렬한 빛에 휩싸였다. 이번에는 어둠 속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빛이 그를 감싸 안으며 익숙한 공간으로 되돌려 놓았다.

    ***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익숙한 어둠 속, 현재의 폐허가 된 아스라 유적 한가운데 서 있었다. ‘별의 심장’은 더 이상 푸른빛을 띠지 않았다. 대신, 은은한 백색광을 내뿜으며 진우의 손끝에 온기를 전하고 있었다. 손에 쥐었던 금속 조각은 수정체 속으로 완전히 흡수되어 사라진 뒤였다.

    진우는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 아스라 문명은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중요한 경고를 남기기 위해 스스로를 봉인한 것이었다. 그들의 폐허가 된 유적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울려 퍼지는 경고의 메아리였다.

    그는 유적을 둘러보았다. 모든 벽화와 상형문자들이 이제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과거에는 단순한 미스터리였던 것들이, 이제는 선명한 언어로 그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외로운 연구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사라진 문명의 마지막 증인이자, 미래를 위한 파수꾼이 되었다.

    그의 심장은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새로운 사명감으로 가득 찼다. 그는 이 위대한 유산을, 그 안에 담긴 경고의 메시지를 세상에 알려야 했다. 학자들이 그를 또다시 비웃을지라도, 그는 이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아스라 문명의 비극이 다시는 인류에게 반복되지 않도록, 그는 고대 문명이 남긴 마지막 절규를 세상에 전할 것이다.

    진우는 조용히 유적의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는 이제 더 이상 낡은 지도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인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거대한 비밀의 무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은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도시의 삭막한 스카이라인 위로 불그스름한 노을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아르테미스 팰리스’의 최상층 펜트하우스. 최첨단 보안 시스템과 두터운 벽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마치 도시 속 요새 같았다. 하지만 그 요새 안에서,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이 벌어졌다.

    “강진우 씨, 제발 이번만이라도 제 전화 좀 받아주시죠.”

    유은서 경위는 땀으로 축축한 손으로 휴대폰을 쥐었다. 벌써 열 번째 시도였다. 수화기 너머로 지루한 연결음만 계속될 뿐이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온통 혼란과 절망으로 가득 찬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박 회장의 서재.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모든 단서가 살인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박 회장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목덜미에는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붉은 점 하나가 선명했다.

    드디어, 연결음이 멈추고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 경위님,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군. 또 사람 죽었습니까?”
    진우는 늘 이런 식이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예감이 아니라, 지금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박 회장입니다. 밀실 살인이에요. 박 회장님이 돌아가셨어요. 목에… 아주 작은 흔적이 있습니다만, 도저히 범인을 특정할 수가 없어요.”
    “밀실이군. 재미있겠네.”
    “재미있다니요!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십니까? 경찰은 손발이 다 묶였어요. 현장에선 어떤 침입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고, CCTV도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었어요. 이건 마치 유령이… 유령이 저지른 일 같다고요!”
    “유령은 존재하지 않아, 유 경위님.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림자가 있을 뿐이지. 위치 보내요. 지루한 오후였는데 잘됐네.”

    퉁명스러운 대답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은서는 한숨을 쉬었지만,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강진우. 그 천재적인 괴짜만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는 평범한 탐정이 아니었다. 때로는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리거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언가를 감지하는 듯한 기이한 행동을 보였지만, 그의 예리한 통찰력은 늘 범죄의 본질을 꿰뚫었다. 사람들은 그를 ‘영능력자’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진우 본인은 그저 ‘미세한 흐름’을 읽을 뿐이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진우가 현장에 도착했다. 늘 그렇듯 후줄근한 트렌치코트에 헝클어진 머리,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의 눈빛만이 차가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유 경위님, 여전하군. 스트레스에 찌든 얼굴이 안쓰럽네.”
    “괜찮습니다. 어서 현장으로 가시죠.”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진우는 제일 먼저 공기 중의 미묘한 떨림을 감지하려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은서는 그의 행동에 익숙했지만, 함께 온 형사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진우를 바라봤다.
    “음….” 진우가 낮게 읊조렸다. “여기, 흥미로운 그림자가 있군.”
    그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시신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책상 모서리, 서가, 벽지, 심지어 천장의 미세한 균열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보이고 있는 듯했다.

    “창문은 어때요?” 진우가 물었다.
    “완벽하게 잠겨 있었습니다. 방충망과 방탄유리 모두 그대로였고요. 외부 침입은 불가능합니다.” 은서가 설명했다.
    진우는 창가로 다가가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쓸었다. 그는 창틀 가장자리의 먼지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어진 금속 마감재를 발견했다.
    “여긴…” 진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색의 ‘잔상’이 보였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다 사라진 무언가의 흔적이었다.
    “무언가 빠른 속도로 여기를 통과했군. 아주 작고, 아주 날카로운 것.”
    “무슨 말씀이세요?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 형사 중 한 명이 의아하게 물었다.
    “닫혀 있었겠지. 하지만 아주 미세한 틈은 있었을 거야.” 진우는 손전등을 들어 창틀과 벽 사이의 간극을 비췄다. “아르테미스 팰리스의 건축 공법은 완벽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완벽한 건축물은 세상에 없어. 여기, 이 아주 작은 틈새.”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육안으로는 거의 인식하기 어려운, 머리카락 한 가닥이 겨우 지나갈 법한 작은 틈이었다.
    “저 틈으로 뭔가가 들어왔다는 건가요? 불가능합니다. 저긴 공기조차 제대로 통하기 힘들어요.” 은서가 반박했다.
    “공기는 통하겠지. 충분한 힘이 실린다면.” 진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시 시신으로 돌아와 박 회장의 목덜미를 살폈다. 작은 붉은 점.
    “이건 칼자국이 아니야. 그렇다고 총상도 아니고. 무언가 아주 미세하고 강한 것이 고속으로 충돌한 흔적이지.”
    진우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시야에 희미하게 박 회장의 서재를 감싸고 있던 ‘흐름’들이 나타났다. 사건 직전의 불안정한 감정,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의 압도적인 ‘힘’의 흐름. 그 흐름은 창밖에서 시작되어 그 작은 틈을 통과하고, 박 회장에게 도달한 뒤, 다시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범인은 밖에 있었군.” 진우가 눈을 떴다.
    “밖에요? 그럼 저격수라도 있었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펜트하우스는 주변 건물보다 훨씬 높은데…”
    “아니. 멀리서 저격한 게 아니야. 아주 가까운 곳, 바로 옆 건물.” 진우는 창밖을 가리켰다. 박 회장의 펜트하우스와 불과 20여 미터 떨어진 옆 건물 옥상. “저기에서 시작된 흐름이 가장 선명해.”

    모두의 시선이 옆 건물로 향했다. 그곳은 같은 아파트 단지의 다른 동이었다.
    “설마, 저기 옥상에서 이쪽으로 뭔가를 날렸다는 말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 작은 틈으로 정확히 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저격총으로도 불가능한 거리와 정확도예요.” 은서가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세상에 ‘평범한 것’만 있는 건 아니잖아?” 진우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범인은 기류를 조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 아주 미세한 공기의 흐름을 제어해서, 마치 보이지 않는 실처럼 무언가를 조종한 거야.”

    경찰은 혼란스러웠다. 기류 조작?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진우의 통찰력은 늘 그런 비현실적인 가정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럼, 뭘 날린 겁니까?” 은서가 물었다.
    “사라지는 것.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진우는 곰곰이 생각했다. “아이스 픽 같은 모양의 아주 작은 얼음 조각. 특수한 기술로 압축된 얼음이라면 고속으로 날아가 표적을 꿰뚫고, 그 자리에서 녹아 사라지겠지.”
    그의 눈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잔상’이 보였다. 얼음 조각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와 박 회장의 목을 꿰뚫고, 순식간에 녹아내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잔상. 그 잔상 주변으로 미세하게 뒤틀린 공기의 흐름이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범인의 흔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은서가 재차 물었다.
    “범인은 옆 건물 옥상에서 능력을 사용했어. 하지만 옥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 테고, 결정적인 증거는 남기지 않았을 거야. 대신, 이 펜트하우스 안에서 범인과 연결된 다른 흔적이 보였어.”
    진우는 다시 서재 한구석에 있는 공기청정기를 가리켰다.
    “공기청정기. 여기 주변의 ‘흐름’이 이상해. 마치 누군가 아주 오랫동안 이 근처에 머물렀던 것처럼 복잡하게 엉켜있어.”
    그리고는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봤다. 박 회장의 책상 위, 고급스러운 명패 옆에 놓인 작은 은색 액자. 그 액자 속에는 박 회장과 젊은 비서, 최 비서가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최 비서….” 은서가 중얼거렸다. 최 비서는 박 회장의 오랜 측근이었고, 누구보다 회장을 충실히 보필하는 사람이었다.

    “최 비서가… 이곳에 오래 머물렀다는 흔적과, 범인이 기류를 조작했다는 가설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죠?” 은서가 혼란스러워했다.
    진우는 미소 지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진 듯했다.
    “밀실 트릭은 늘 뻔한 곳에서 시작돼.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 혹은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 최 비서는 단순한 비서가 아니었어. 그녀 역시 나와 같은 능력을 지녔을 거야. 혹은, 나보다 훨씬 강력한 기류 조작 능력자였겠지.”
    진우는 공기청정기 옆에 놓인 작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 탁자 위, 어딘가에… 아주 미세한 지문 하나쯤은 남아있겠지. 그리고 최 비서의 옷에서 얼음 조각이 녹아내린 물방울 흔적이 발견된다면, 그게 결정적인 증거가 될 거야.”

    은서는 진우의 말에 따라 탁자를 꼼꼼히 살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물자국.
    “강진우 씨, 그럼 최 비서가 직접 저 옥상에 가서…?”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능력을 이용해 옆 건물 옥상에서 얼음 조각을 생성하고, 기류를 조작해 그 조각을 저 작은 틈으로 정확히 날려 보낸 거야. 아주 정교하고 치밀하게. 그녀는 그저 이 방 안, 이 공기청정기 옆에서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지.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공기청정기를 틀고, 남은 얼음 흔적마저 없애려 했을 거야.”
    “하지만 왜요? 최 비서가 박 회장을 살해할 이유가…”
    “그건 유 경위님이 밝혀내야 할 부분이지.” 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퍼즐을 맞출 뿐이야. 보이지 않는 그림자의 궤적을 쫓아서.”

    그 순간, 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전화를 받은 진우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예상대로였어. 최 비서가 자백했군. 박 회장의 비자금 횡령을 알고 있었다는군. 그리고 회장이 자신을 해고하려 하자… 범행을 저질렀다고.”
    은서는 충격에 휩싸였다. 상상도 못 할 반전이었다. 늘 온화하고 충직했던 최 비서가 살인자라니.
    진우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봐, 유 경위님. 유령은 없다고 했잖아? 그저 우리가 보지 못하는 ‘흐름’이 있을 뿐이야. 그리고 그 흐름을 읽을 수 있다면, 아무리 완벽한 밀실이라도 진실의 문은 열리게 마련이지.”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진우는 서재를 벗어나기 전, 다시 한번 창밖의 야경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도시를 감싸는 수많은 ‘흐름’들이 보였다. 그 흐름 속에서 또 어떤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을지,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고, 은서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천재 탐정 강진우의 그림자는 그렇게, 도시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 무협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흑림(黑林)의 안개는 언제나 끈적했다.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그 가지마다 덕지덕지 매달린 검은 이끼들은 으스스한 기운을 더욱 진하게 풍겼다. 인간과 마(魔)의 영역을 가르는 거대한 경계, 흑림은 무림인들에게는 금기의 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룡문의 소사(少師) 류진(柳眞)은 기어코 이곳까지 발걸음을 했다.

    “쯧, 마기가 진동하는군.”

    류진은 콧등을 찌르는 비릿하고 역한 기운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품에서 묵직한 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검집마저도 검은 현철로 단련된 ‘묵룡검(墨龍劍)’. 검은 그의 손에 쥐이자마자 미약한 진동을 시작했다. 흑림의 마기에 대한 검의 경고였다.

    이번 임무는 단순했다. 최근 흑림 주변에서 마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첩보가 들어왔고, 그 선봉에 선 것이 류진이었다. 스승님은 늘 그에게 ‘무리하지 마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류진은 언제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자였다.

    숲은 침묵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함은 오히려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류진은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어둡고 뒤틀린 나무들뿐, 그러나 그의 예리한 감각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그때였다. 숲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빛줄기가 번뜩였다. 일반적인 마기의 기운과는 다른, 맑고도 신비로운 기운. 류진은 본능적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숲은 점차 기괴한 형태로 변했다. 나무들은 더욱 뒤틀렸고, 바닥에는 이름 모를 보랏빛 꽃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피어 있었다. 빛의 근원지는 숲 한가운데 자리 잡은 작은 웅덩이였다. 그러나 웅덩이는 평범하지 않았다. 맑은 물 위로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기이한 꽃들이 수를 놓았고, 그 중앙에 한 여인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고고하게 누워 있었다. 짙은 밤색 머리칼은 물결 따라 일렁였고, 백옥 같은 피부는 달빛 아래 더욱 신비롭게 빛났다. 무엇보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듯한 비현실적인 자태였다.

    류진은 저도 모르게 묵룡검의 손잡이를 놓칠 뻔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경고음처럼 그의 심장을 울렸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녀는 과연 마족인가? 아니면 길을 잃은 요정인가?

    류진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한 발, 또 한 발. 웅덩이 가장자리에 이르러 그는 무릎을 굽히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연꽃 같은 눈이 서서히 열렸다.

    맑고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 그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류진을 빨아들였다. 순간, 류진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마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강렬하고, 원초적인 기운이었다.

    “……누구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흑림의 으스스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목소리 같았다.

    류진은 얼어붙었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알 수 없는 기운에 압도되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

    “천룡문 류진입니다.” 그는 간신히 자신을 소개했다. “이곳은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곳에…….”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웅덩이 주변의 보랏빛 꽃들이 더욱 진하게 빛나는 듯했다.

    “위험한 곳이라……. 저에게는 익숙한 곳이에요.”

    그녀의 눈빛이 스쳐 지나가듯 류진의 묵룡검에 닿았다. 순간, 묵룡검에서 미약한 ‘칭-‘ 하는 소리가 울렸다. 검은 그녀의 존재를 경고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족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마족이 아니었다.

    류진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의 이성은 그녀를 경계하라 속삭였지만, 그의 시선은 그녀의 눈동자에 갇혀 헤어날 줄 몰랐다.

    “당신은…… 마족입니까?” 류진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녀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그 미소와 함께,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아홉 개의 꼬리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색의 털로 뒤덮인 아홉 개의 꼬리, 그 끝자락에서는 섬광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구미호. 요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험하다는 전설 속 존재였다.

    “이제야 아셨나요?”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물방울 하나 없이 마른 몸은 마치 환영처럼 느껴졌다. “저는 연화(蓮花)라고 합니다.”

    연화. 연꽃. 이름마저도 그녀의 고고한 자태와 어울렸다.

    “마족은 인간의 영역에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흑림은 경계 지역…….” 류진은 말을 이으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그의 모든 이성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제가 왜 이곳에 있는지, 굳이 아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연화는 류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당신은, 어째서 저를 해치지 않으시나요?”

    그녀의 질문에 류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왜일까. 그의 본능은 분명 그녀를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천룡문의 가르침에 따르면 마족은 인간의 적, 무림의 공적이었다. 마땅히 검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묵룡검은 여전히 검집 속에 잠들어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류진은 나직이 대답했다. “다만, 당신에게서 마족 특유의 악취가 느껴지지 않을 뿐입니다.”

    그 말에 연화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맑은 종소리처럼 흑림에 울려 퍼졌다.

    “흥미롭군요.” 연화가 천천히 류진에게로 다가왔다. 발소리 하나 없이, 그녀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했다. “인간들은 늘 제가 아름다운 외양 뒤에 악독한 마음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당신은 저의 악취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그녀가 손을 뻗어 류진의 뺨에 닿으려 했다. 류진은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뺨에 닿기 직전, 숲 저편에서 날카로운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기 있다! 저 요물! 류 소사님, 어서 그 요물을 베십시오!”

    세 명의 무림인이 흑림을 가르고 달려왔다. 그들의 눈에는 연화를 향한 맹렬한 증오가 가득했다. 그들은 흑림 주변에서 마족의 준동을 감시하던 천룡문의 제자들이었다.

    류진은 순간 망설였다. 그들 역시 마족을 발견하면 즉시 처단하라는 명을 받은 터였다. 그러나 류진의 시선은 아직도 연화의 보랏빛 눈동자에 갇혀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들 같으니.” 연화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녀의 눈빛에 깃든 신비로운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을…….”

    그녀의 아홉 꼬리가 일렁이며 류진의 몸을 감쌌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류진은 그녀에게 안긴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연화의 보랏빛 눈동자가 무림인들을 향하자, 그녀의 등 뒤에 있던 아홉 꼬리 중 하나가 섬광처럼 뻗어 나갔다. 흑림의 나무들이 일순간 진동하고, 마치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간 듯 무림인들은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땅으로 고꾸라졌다.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할 압도적인 힘이었다.

    “저는 이만 가봐야겠군요.” 연화가 류진을 놓아주었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그를 향하고 있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아마 적이 되어 있겠지요.”

    그녀의 몸이 서서히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홉 개의 꼬리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렬하게 섬광을 뿜어내더니, 이내 연화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류진은 홀로 흑림의 웅덩이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연화가 앉았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보랏빛 꽃잎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다음에 만날 때는, 아마 적이 되어 있겠지요.’

    적. 인간과 마족은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은 무림의 철칙이었다. 하지만 류진의 심장은 그 철칙을 거부하듯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흑림의 깊숙한 곳, 연화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금지된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꽃은, 흑림의 안개처럼 끈적하고, 보랏빛 꽃처럼 치명적이었다.

  • 에픽 하이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잊혀진 별의 조각

    **제12화. 균열**

    아레스 호의 함교는 죽음처럼 고요했다. 계기판의 불빛만이 창백하게 깜빡일 뿐, 평소 활기 넘치던 승무원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캡틴 강태준은 사령관석에 앉아 전방의 칠흑 같은 우주를 응시했다. 시야 밖, 화물칸 깊숙한 곳에 봉인된 ‘그것’이 함선 전체를 서서히 잠식하고 있음을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발견 직후의 전율은 이제 공포로 변색되어 모두의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

    “함장님, 통신 기록입니다.”

    옆에서 부함장 이서하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전례 없는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다. 단정한 제복 차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위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읽어봐.” 강태준은 거친 목소리로 답했다.

    “어제 22시 03분, 화물칸 보안 프로토콜 무단 해제 시도 감지. 자동 차단되었습니다. 00시 17분, 의료실의 김지아 박사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선임 기술병 하승우 일병이 원인 불명의 극심한 환각 증세를 보였습니다. 지금은 안정 상태입니다만… 불안정합니다.”

    강태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하승우 일병. 마지막 임무가 뭐였지?”

    “제3 탐사팀 소속으로, 3일 전… 유물을 처음으로 육안 관측했습니다.” 서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유물. 그들은 애써 ‘블랙 모노리스’ 혹은 ‘특이점’ 같은 무미건조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마음속 깊이 그것은 이미 미지의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심우주를 떠돌다 발견한, 거대한 흑요석 같은 육면체. 어떤 장비로도 뚫을 수 없는 불투명한 벽. 하지만 그 표면에 새겨진 고대의 상형문자와, 내부에서 희미하게 비쳐 나오던 보랏빛 섬광은 그것이 단순한 돌덩이가 아님을 명확히 말해주고 있었다.

    강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하 부함장, 보안 상태를 최고 수준으로 올려. 추가 인원 배치는 없다. 당분간 함선 내 이동은 최소화하고, 모든 탐사팀은 해체한다.”

    “하지만… 아직 유물의 기능도, 안전성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건 동의하지만, 추가 조사를 완전히 중단하는 건—” 서하가 반대하려 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강태준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더 이상 가까이 갔다가는 더 많은 것을 잃을 뿐이야. 안전이 최우선이다.”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냉정했다. 하지만 서하는 그 차가운 시선 속에 드리워진 깊은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무언가 더 알고 있었다. 아니,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함교의 메인 스크린에 경고음이 울렸다. 통신 보안이 격렬하게 흔들리는 그래프가 나타났다.

    “함장님! 미확인 암호 패턴이 함선 네트워크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기술장교 박선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춤추듯 오갔다. “출처를 알 수 없습니다! 외부가 아닙니다! 함선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내부라고?!” 강태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모든 내부 통신을 차단하고, 격벽을 봉쇄해! 바이러스 검사 프로토콜을 가동해!”

    하지만 박선우의 손은 이미 굳어버린 듯 멈춰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공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안 됩니다… 접근이… 안 됩니다… 모든 시스템이… 먹통이 되어갑니다…”

    스크린의 그래프는 미친 듯이 치솟았고, 이내 전체 함교 시스템이 깜빡거리며 멈춰 버렸다. 불이 일제히 꺼지고, 비상등이 붉은빛을 토해냈다.

    완벽한 침묵 속에,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였다. 마치 수백 개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속삭이는 듯한, 혹은 거대한 존재가 숨 쉬는 듯한 낮은 울림이었다. 소리는 점점 선명해졌고, 어딘가 익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강태준은 번개처럼 몸을 돌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명확했다.

    “화물칸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유물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임을 깨달았다. 단순한 음파가 아니었다. 뇌리 깊숙이 파고들어, 오래전 잊었던 기억을 끄집어내는 듯한… 섬뜩하고도 매혹적인 선율이었다.

    “모든 보안병력, 화물칸으로 집결! 비상 프로토콜 ‘격리’를 발동한다! 누구든 유물에 접근하는 자는… 즉시 제압한다!” 강태준은 비상 호출기로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냉철했지만, 손에 쥔 비상 호출기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화물칸으로 향하는 복도는 미로처럼 느껴졌다. 비상등의 붉은빛이 깜빡이며 공포를 증폭시켰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이한 속삭임이 복도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강태준은 옆에서 총을 든 보안장교 최민준을 흘끗 보았다. 민준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그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대장님, 유물에서 나오는 소리 같습니다.” 민준이 헐떡이며 말했다.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소리는 확실히 커지고 있었다. 이제는 단순한 속삭임을 넘어, 웅장한 합창처럼 들렸다. 언어가 없는 합창이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우주의 신비와 함께, 알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듣는 이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소리였다.

    마침내 화물칸의 봉쇄된 문에 도착했다. 육중한 강철 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보랏빛 섬광이 문틈을 비집고 나왔다.

    “문 열어!” 강태준이 명령했다.

    보안팀원들이 코드를 입력하고, 강제로 문을 열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문이 서서히 열리자, 압도적인 기운이 복도 전체를 덮쳤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화물칸 중앙에는 거대한 흑요석 유물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보랏빛 섬광은 더욱 강렬해져, 마치 유물 자체가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된 듯 보였다. 그리고 그 유물의 표면에 새겨진 고대의 상형문자들이, 지금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문자가 빛을 발하며 공중으로 떠오르고, 서로 연결되어 알 수 없는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유물 앞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박선우…!” 강태준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금 전 함교에서 정신을 잃었던 박선우 기술장교였다. 그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유물 앞에 서서, 두 팔을 유물을 향해 뻗고 있었다. 그의 눈은 완전히 뒤집혀 흰자위만 보였고, 입술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는, 유물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희미한 보랏빛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유물의 꿈틀거리는 상형문자들이 선우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선우! 당장 거기서 떨어져!” 강태준이 소리쳤다.

    하지만 선우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유물에 손을 뻗어, 검은 표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의 손끝이 유물에 닿자마자, 유물에서 섬뜩한 파장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선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보랏빛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그때, 선우의 등 뒤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뜨거운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듯, 선우의 등 뒤 허공이 일렁였다. 작은 균열이 생겨나더니, 그 균열 사이로 칠흑 같은 어둠이 스며 나왔다. 어둠은 순식간에 커져, 검은 장막처럼 선우의 등 뒤를 뒤덮었다.

    균열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듯한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은하의 모습, 알 수 없는 행성들의 풍경,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듯한 무한한 공허함. 한순간 모든 승무원들이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의 눈동자를 마주한 듯한 전율을 느꼈다.

    “저게… 뭐야…?” 민준의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갈라졌다.

    균열은 점점 커져,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크기가 되었다. 균열 너머에서 알 수 없는 존재의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균열의 가장자리에서, 마치 검은 촉수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서서히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강태준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유물은 그저 고대의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원의 문이었다. 그리고 박선우는… 그 문을 열고 있었다.

    “사격 준비! 선우를 보호하면서… 저 촉수를 막아!” 강태준은 절규하듯 외쳤다. 그의 명령은 총소리에 묻혀버렸다.

    최민준을 비롯한 보안팀원들이 즉시 사격 자세를 취했다. 플라즈마 소총에서 발사된 광선이 검은 촉수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촉수는 마치 허깨비처럼 광선을 뚫고 지나갈 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오히려 촉수는 속도를 더해, 박선우의 등 뒤를 완전히 감싸기 시작했다.

    촉수가 선우의 어깨를 스치자, 선우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더 이상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아니었다.

    “*…그가 온다… 오래된 자… 심연의 군주… 문이 열렸다…*”

    그의 목소리는 박선우의 것이 아니었다. 수천, 수만 개의 목소리가 겹쳐진 듯한, 섬뜩하고도 장엄한 울림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 끝에, 화물칸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균열은 완전히 열렸고, 그 안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레스 호의 모든 비상등이 꺼졌다.
    침묵과 어둠이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 침묵은, 우주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포효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포효 속에서, 고대부터 잊혔던 존재의 이름이, 별들의 심연에서 메아리쳐 울리는 듯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 에픽 하이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잊혀진 별의 조각

    **제12화. 균열**

    아레스 호의 함교는 죽음처럼 고요했다. 계기판의 불빛만이 창백하게 깜빡일 뿐, 평소 활기 넘치던 승무원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캡틴 강태준은 사령관석에 앉아 전방의 칠흑 같은 우주를 응시했다. 시야 밖, 화물칸 깊숙한 곳에 봉인된 ‘그것’이 함선 전체를 서서히 잠식하고 있음을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발견 직후의 전율은 이제 공포로 변색되어 모두의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

    “함장님, 통신 기록입니다.”

    옆에서 부함장 이서하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전례 없는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다. 단정한 제복 차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위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읽어봐.” 강태준은 거친 목소리로 답했다.

    “어제 22시 03분, 화물칸 보안 프로토콜 무단 해제 시도 감지. 자동 차단되었습니다. 00시 17분, 의료실의 김지아 박사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선임 기술병 하승우 일병이 원인 불명의 극심한 환각 증세를 보였습니다. 지금은 안정 상태입니다만… 불안정합니다.”

    강태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하승우 일병. 마지막 임무가 뭐였지?”

    “제3 탐사팀 소속으로, 3일 전… 유물을 처음으로 육안 관측했습니다.” 서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유물. 그들은 애써 ‘블랙 모노리스’ 혹은 ‘특이점’ 같은 무미건조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마음속 깊이 그것은 이미 미지의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심우주를 떠돌다 발견한, 거대한 흑요석 같은 육면체. 어떤 장비로도 뚫을 수 없는 불투명한 벽. 하지만 그 표면에 새겨진 고대의 상형문자와, 내부에서 희미하게 비쳐 나오던 보랏빛 섬광은 그것이 단순한 돌덩이가 아님을 명확히 말해주고 있었다.

    강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하 부함장, 보안 상태를 최고 수준으로 올려. 추가 인원 배치는 없다. 당분간 함선 내 이동은 최소화하고, 모든 탐사팀은 해체한다.”

    “하지만… 아직 유물의 기능도, 안전성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건 동의하지만, 추가 조사를 완전히 중단하는 건—” 서하가 반대하려 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강태준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더 이상 가까이 갔다가는 더 많은 것을 잃을 뿐이야. 안전이 최우선이다.”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냉정했다. 하지만 서하는 그 차가운 시선 속에 드리워진 깊은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무언가 더 알고 있었다. 아니,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함교의 메인 스크린에 경고음이 울렸다. 통신 보안이 격렬하게 흔들리는 그래프가 나타났다.

    “함장님! 미확인 암호 패턴이 함선 네트워크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기술장교 박선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춤추듯 오갔다. “출처를 알 수 없습니다! 외부가 아닙니다! 함선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내부라고?!” 강태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모든 내부 통신을 차단하고, 격벽을 봉쇄해! 바이러스 검사 프로토콜을 가동해!”

    하지만 박선우의 손은 이미 굳어버린 듯 멈춰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공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안 됩니다… 접근이… 안 됩니다… 모든 시스템이… 먹통이 되어갑니다…”

    스크린의 그래프는 미친 듯이 치솟았고, 이내 전체 함교 시스템이 깜빡거리며 멈춰 버렸다. 불이 일제히 꺼지고, 비상등이 붉은빛을 토해냈다.

    완벽한 침묵 속에,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였다. 마치 수백 개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속삭이는 듯한, 혹은 거대한 존재가 숨 쉬는 듯한 낮은 울림이었다. 소리는 점점 선명해졌고, 어딘가 익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강태준은 번개처럼 몸을 돌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명확했다.

    “화물칸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유물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임을 깨달았다. 단순한 음파가 아니었다. 뇌리 깊숙이 파고들어, 오래전 잊었던 기억을 끄집어내는 듯한… 섬뜩하고도 매혹적인 선율이었다.

    “모든 보안병력, 화물칸으로 집결! 비상 프로토콜 ‘격리’를 발동한다! 누구든 유물에 접근하는 자는… 즉시 제압한다!” 강태준은 비상 호출기로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냉철했지만, 손에 쥔 비상 호출기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화물칸으로 향하는 복도는 미로처럼 느껴졌다. 비상등의 붉은빛이 깜빡이며 공포를 증폭시켰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이한 속삭임이 복도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강태준은 옆에서 총을 든 보안장교 최민준을 흘끗 보았다. 민준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그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대장님, 유물에서 나오는 소리 같습니다.” 민준이 헐떡이며 말했다.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소리는 확실히 커지고 있었다. 이제는 단순한 속삭임을 넘어, 웅장한 합창처럼 들렸다. 언어가 없는 합창이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우주의 신비와 함께, 알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듣는 이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소리였다.

    마침내 화물칸의 봉쇄된 문에 도착했다. 육중한 강철 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보랏빛 섬광이 문틈을 비집고 나왔다.

    “문 열어!” 강태준이 명령했다.

    보안팀원들이 코드를 입력하고, 강제로 문을 열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문이 서서히 열리자, 압도적인 기운이 복도 전체를 덮쳤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화물칸 중앙에는 거대한 흑요석 유물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보랏빛 섬광은 더욱 강렬해져, 마치 유물 자체가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된 듯 보였다. 그리고 그 유물의 표면에 새겨진 고대의 상형문자들이, 지금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문자가 빛을 발하며 공중으로 떠오르고, 서로 연결되어 알 수 없는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유물 앞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박선우…!” 강태준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금 전 함교에서 정신을 잃었던 박선우 기술장교였다. 그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유물 앞에 서서, 두 팔을 유물을 향해 뻗고 있었다. 그의 눈은 완전히 뒤집혀 흰자위만 보였고, 입술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는, 유물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희미한 보랏빛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유물의 꿈틀거리는 상형문자들이 선우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선우! 당장 거기서 떨어져!” 강태준이 소리쳤다.

    하지만 선우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유물에 손을 뻗어, 검은 표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의 손끝이 유물에 닿자마자, 유물에서 섬뜩한 파장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선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보랏빛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그때, 선우의 등 뒤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뜨거운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듯, 선우의 등 뒤 허공이 일렁였다. 작은 균열이 생겨나더니, 그 균열 사이로 칠흑 같은 어둠이 스며 나왔다. 어둠은 순식간에 커져, 검은 장막처럼 선우의 등 뒤를 뒤덮었다.

    균열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듯한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은하의 모습, 알 수 없는 행성들의 풍경,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듯한 무한한 공허함. 한순간 모든 승무원들이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의 눈동자를 마주한 듯한 전율을 느꼈다.

    “저게… 뭐야…?” 민준의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갈라졌다.

    균열은 점점 커져,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크기가 되었다. 균열 너머에서 알 수 없는 존재의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균열의 가장자리에서, 마치 검은 촉수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서서히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강태준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유물은 그저 고대의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원의 문이었다. 그리고 박선우는… 그 문을 열고 있었다.

    “사격 준비! 선우를 보호하면서… 저 촉수를 막아!” 강태준은 절규하듯 외쳤다. 그의 명령은 총소리에 묻혀버렸다.

    최민준을 비롯한 보안팀원들이 즉시 사격 자세를 취했다. 플라즈마 소총에서 발사된 광선이 검은 촉수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촉수는 마치 허깨비처럼 광선을 뚫고 지나갈 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오히려 촉수는 속도를 더해, 박선우의 등 뒤를 완전히 감싸기 시작했다.

    촉수가 선우의 어깨를 스치자, 선우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더 이상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아니었다.

    “*…그가 온다… 오래된 자… 심연의 군주… 문이 열렸다…*”

    그의 목소리는 박선우의 것이 아니었다. 수천, 수만 개의 목소리가 겹쳐진 듯한, 섬뜩하고도 장엄한 울림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 끝에, 화물칸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균열은 완전히 열렸고, 그 안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레스 호의 모든 비상등이 꺼졌다.
    침묵과 어둠이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 침묵은, 우주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포효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포효 속에서, 고대부터 잊혔던 존재의 이름이, 별들의 심연에서 메아리쳐 울리는 듯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