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에픽 하이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백금탑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새벽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고요한 아르카디아 북부 산맥의 정상, 수천 년의 역사를 품은 거대한 탑은 마치 하늘을 꿰뚫는 은빛 송곳니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그 웅장함과는 대조적으로, 탑 전체를 휘감고 있는 것은 한기 어린 침묵이었다. 대연금술사 엘라하드의 죽음. 그 단 하나의 소식이, 백금탑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탑의 가장 높은 곳, 현자의 방. 그곳은 침묵의 성역이었다. 방금까지 엘라하드의 생명으로 가득 찼던 공간은 이제 차가운 죽음만이 맴돌았다. 방 안에는 경비대장 아르토르와 그의 정예 대원들, 그리고 이 기이한 밀실 살인을 해결하기 위해 초대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카이로스는 방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엘라하드의 시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은빛 머리카락이 흩어진 얼굴은 평온했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 손은 웅크린 채 가슴에 얹혀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옆으로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탁자 위에는 마개가 열린 채 놓인 작은 유리병 하나. 수면 유도 마법약으로 추정되는 액체가 바닥에 몇 방울 흘러 있었다.

    “경비대장,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카이로스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마치 연극의 막이 오르기 전, 조율을 하는 현악기 소리 같았다. “이 방은 엘라하드 경께서 직접 안에서 잠그셨고,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봉인의 마법진 역시 온전히 활성화되어 있었고, 창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밀폐된 공간. 오직 이 강철문만이 유일한 출입구였다. 맞습니까?”

    아르토르 경비대장의 굵직한 목소리가 답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카이로스 경. 저희는 탑 전체를 밤새도록 수색했습니다. 외부인이 침입할 수 있는 경로는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었고, 이 현자의 방으로 통하는 통로 역시 저희가 철저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떤 마법적인 간섭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이 방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엘라하드 경께서는 홀로 계셨습니다.”

    카이로스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은빛 머리카락이 조명 아래서 미묘하게 빛났다. 그의 시선은 방을 느릿하게 훑었다. 방은 대연금술사의 작업실답게 각종 연금술 기구와 희귀한 시약병들로 가득했다. 은은한 광택을 내는 증류기와 오색 빛깔의 수정구, 알 수 없는 고문서들이 늘어선 서가. 이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과연, 혼자 남겨진 방이었다.

    카이로스는 먼저 강철문으로 다가갔다. 표면은 매끄러웠고, 마력 강화 처리된 강철은 흠집 하나 없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문틀을 조심스럽게 쓸어 올렸다. 잠시 후, 그의 검은 눈동자가 문 하단 가장자리의 아주 미세한, 실오라기 같은 긁힌 자국에 멈췄다.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손톱만큼도 안 되는 길이의 가는 선.

    “이건…” 아르토르가 의아하다는 듯 몸을 숙여 보려 했지만, 카이로스는 고개를 저어 제지했다.

    “나중에 보시죠. 지금은 어떤 것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카이로스는 다시 엘라하드의 시신 앞으로 돌아왔다. 그는 무릎을 꿇고 시신을 자세히 살폈다. 시신의 자세, 손의 위치, 그리고 그의 코끝에서 희미하게 감지되는 독특한 냄새. 흙비린내 같기도 하고, 금속 같기도 한, 하지만 연금술 실험에서 흔히 나는 유황이나 오존 냄새와는 다른, 낯선 향기였다. 마치 깨끗하게 세탁된 비단에 스며든 먼지처럼,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냄새.

    “부검을 진행할 예정입니까?” 카이로스가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다만 독극물의 흔적은 감지되지 않았고, 외상 또한 없습니다. 의사들은 심장마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아르토르의 목소리에는 불확실성이 묻어났다.

    “그렇다면, 이 수면 유도 마법약은 왜 탁자 위에 놓여 있었을까요?” 카이로스는 손가락으로 유리병을 가리켰다. “엘라하드 경이 불면증에 시달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며칠 밤낮을 새워 새로운 비약을 연구 중이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르토르가 한숨을 쉬었다. “수석 제자인 미라가 그리 말했습니다. 그녀는 경께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연구에 몰두하고 계셨다고 증언했습니다.”

    카이로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는 언제나 수수께끼 같아서,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탁자 위, 유리병 옆에 있는 작은 흑요석 조각을 치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르토르가 조심스럽게 흑요석 조각을 들어 올리자, 그 아래에서 더 작은 무언가가 드러났다. 손톱만 한 크기의, 말라붙은 투명한 실오라기 조각이었다. 마치 얇은 비단실 같기도 하고, 마력을 응축시킨 섬유 같기도 했다.

    “이것은…?” 아르토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시신을 움직이지 마십시오.” 카이로스는 나직이 경고한 뒤, 엘라하드의 웅크린 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같은 종류의 섬유 조각이 발견되었다. 방금 탁자 위에서 발견된 것보다 훨씬 작았지만, 분명 같은 물질이었다.

    “엘라하드 경께서 사망 직전까지 쥐고 있던 것입니다.” 카이로스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탁자 위의 것은 범인이 증거를 은폐하려다가 미처 치우지 못한 흔적이고, 이 조각은… 엘라하드 경께서 마지막 순간에 쥐고 있던 것이겠지요.”

    카이로스는 방 한쪽 구석에 놓인, 평범해 보이는 연금술 디퓨저에 시선을 고정했다. 엘라하드가 최근에 개발 중이던 공기 정화용 장치였다. 그는 디퓨저 주변의 바닥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가에 희미한 만족감이 번졌다.

    “이 디퓨저를 마지막으로 작동시킨 사람은 누구입니까?” 카이로스가 물었다.

    아르토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특별히 작동시킬 이유는 없었을 겁니다. 공기 정화는 이 방의 마법진으로 충분합니다. 엘라하드 경께서 단순한 호기심으로 직접 만지셨을 수도 있겠지요.”

    “아니요.” 카이로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엘라하드 경은 이 디퓨저를 작동시킨 적이 없습니다. 작동시킨 사람은 다른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 인물은 이 방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방 안에 있던 경비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르토르 경비대장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스쳤다.

    “하지만… 어떻게? 이 방은 완전히 밀폐되어 있었고, 어떤 침입의 흔적도…”

    “침입의 흔적은 없습니다. 그 누구도 이 방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카이로스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살인은 저질러졌습니다. 그 말은 즉, 범인은 이 방 안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디퓨저 주변의 바닥에 남은 희미한 분말 자국을 가리켰다. 그것은 평범한 먼지가 아니었다. 마치 정교하게 가공된 광물 가루 같기도 하고, 특정 마법 재료의 부산물 같기도 한 미세한 흔적이었다.

    “이것은 엘라하드 경이 최근 연구 중이던 신형 연금술 시약의 잔여물입니다.” 카이로스는 나직이 설명했다. “아마도 이 디퓨저를 통해 살인에 이용되었겠죠. 이 디퓨저는 공기 정화기가 아니라, 독가스 살포기로 개조된 것입니다.”

    아르토르가 경악하여 디퓨저를 바라보았다. “독가스… 하지만 저희는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특정 주파수의 마력을 통해 활성화될 때만 그 독성을 발휘하며, 극도로 미세하여 공기 중에 빠르게 희석되는 종류의 독입니다.” 카이로스는 엘라하드의 손에 쥐여 있던 투명한 섬유 조각을 집어 들었다. “범인은 이 섬유를 이용했습니다. 아주 미세하고 강한 이 실을 문 아래 틈으로 밀어 넣은 뒤, 디퓨저에 연결했습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특정 마법 장치를 이용해 이 실을 통해 마력을 주입하여 디퓨저를 작동시켰던 것이죠.”

    그의 시선이 다시 문 하단의 미세한 긁힌 자국으로 향했다.

    “그 긁힌 자국은 이 실이 드나들면서 생긴 흔적입니다. 그리고 엘라하드 경은 사망 직전, 자신의 눈앞에서 작동하는 디퓨저와 문 아래의 실을 보았을 겁니다. 아마도 마지막 순간, 저지하려 했겠지요. 하지만 그 독은 너무나 빠르고 치명적이었습니다.”

    아르토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렇다면… 수면 유도 마법약은?”

    “교란책이죠.” 카이로스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엘라하드 경이 스스로 마법약을 마시고 잠들었다가 사망한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혹은 다른 독극물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착각을 유도하기 위한 잔꾀입니다. 하지만 엘라하드 경은 그 약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병은 너무나 깨끗했고, 흘러내린 양도 적었습니다. 그저 누가 보아도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놓여’ 있었을 뿐입니다.”

    카이로스는 방 안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엘라하드의 연구 흔적, 희미한 약품 냄새, 그리고 죽음의 침묵.

    “이제 남은 것은 누가 엘라하드 경의 연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백금탑의 방어 시스템을 우회하여 외부에서 디퓨저를 조작할 수 있는 인물인지 밝히는 일 뿐입니다.”

    그는 허리를 펴고 방 한가운데 선 채, 경비대장 아르토르를 똑바로 응시했다.

    “범인은 이 탑 안에 있습니다. 엘라하드 경의 가장 가까운 곳에.”

    카이로스의 눈동자 속에는 이미 진실의 형체가 선명하게 떠오른 듯했다. 아르카디아 북부 산맥의 백금탑은, 이제 더 이상 고결한 연구의 전당이 아니었다. 그곳은 치밀한 살인과 배신, 그리고 명석한 탐정의 추리가 교차하는 거대한 무대였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이제 그 범인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잠긴 방의 잔향

    도시의 심장부, 오래된 시간을 품고 있는 듯한 낡은 저택 앞은 이미 수십 대의 경찰차와 앰뷸런스,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비좁은 골목길 어귀에서 내린 서은율은 웅성거리는 인파와 경광등의 붉은 섬광 속을 한 마리 그림자처럼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번잡한 주변을 훑었지만, 그 어떤 것도 그의 평온을 깨뜨리지 못했다. 언제나처럼, 그의 주된 관심사는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었다.

    저택의 육중한 철제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왁자지껄했던 바깥과는 확연히 다른,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그를 감쌌다. 경찰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공통적으로 절망과 혼란이 깃들어 있었다. 현장 책임자인 김민준 형사가 멀리서 그를 발견하고는 거친 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서은율 군, 이쪽입니다.” 김 형사의 목소리는 피로로 인해 잔뜩 쉬어 있었다. “정말이지, 이번엔 자네라도 진땀을 뺄 걸세. 이건…… 불가능해.”

    은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김 형사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앤티크 가구와 고급스러운 장식들이 즐비한 복도를 지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서재 앞에 섰다. 경찰 통제선이 쳐져 있었고, 문 앞에는 과학수사대 요원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피해자는 윤서희 씨입니다. 유명한 고대 유물 감정사이자 컬렉터죠. 이 저택은 그녀의 개인 수집품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김 형사가 설명을 이어갔다. “어젯밤 11시경, 마지막으로 비서와 통화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비서가 출근했다가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찾아왔고… 잠겨 있는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갔다가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현장은 보존되었습니까?” 은율이 나직이 물었다.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문제는… 잠겨 있었다는 겁니다.” 김 형사가 씁쓸하게 말했다. “문은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고, 창문은 모두 굳게 잠겨 있었으며, 철창까지 달린 상태였습니다. 침입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죠. 완전히 밀폐된 방이었어요.”

    은율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서재 문을 응시했다. 그는 자신의 안에서 맴도는 미약한 ‘울림’을 느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사건 현장마다 특유의 음파처럼 퍼져 있는 잔류 에너지였다. 살인 사건이 발생한 곳은 언제나 가장 짙은 혼돈의 파동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서재에서는, 그 파동이 섬뜩할 정도로 명료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은율은 망설임 없이 통제선을 넘어 문을 열었다.

    서재 안은 바깥과 확연히 다른, 싸늘하고 기묘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책장에는 고서들과 함께 낯선 문양이 새겨진 토기, 정교한 조각상 등 이국적인 유물들이 가득했다. 방 한가운데 놓인 오리엔탈풍 카펫 위에는 윤서희 씨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푸른색 실크 잠옷 차림이었고,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는 작고 깔끔한 상처가 나 있었다. 날카로운 흉기로 찔린 듯했지만, 주변에는 피 한 방울 튀어 있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흉기가 없었다.

    “보시다시피, 흉기는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김 형사가 들어서며 말했다. “사인은 심장 관통. 깔끔하게 한 번에 끝냈더군요. 그런데 칼은 흔적도 없어요. 방은 꼼꼼히 수색했지만, 숨길 만한 곳도 없습니다.”

    은율은 말없이 방을 천천히 훑었다. 그의 눈은 단순한 시야를 넘어, 공간에 스며든 미세한 에너지의 흐름을 읽어냈다. 카펫 위, 시신의 머리맡에는 얇은 금속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육안으로는 쉽게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았지만, 은율의 시선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조각을 집어 들었다. 평범한 금속 조각처럼 보였지만, 은율의 손끝에는 미약한 진동과 함께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마치 얼음이 녹으며 증발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게 뭔가요?” 김 형사가 의아한 듯 물었다.

    은율은 대답 없이 조각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금속의 표면에는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운, 아주 미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양은, 방 한쪽에 놓인 낡은 목각상에 새겨진 문양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그는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 창문으로 향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빗장도 걸려 있었다. 창틀에는 미세한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어,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은율은 무심코 창틀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리고 미세하게 묻어나는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아주 가는 입자의, 투명하지만 특정 각도에서만 희미하게 빛나는 먼지. 그것은 일반적인 먼지가 아니었다. 그의 감각은 그것이 단순한 흙이나 공기 중의 불순물이 아니라는 것을 경고했다. 마치… 아주 미약한 에너지의 잔해가 굳은 것처럼 느껴졌다.

    “김 형사님, 이 방에 특별히 관리되던 유물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은율이 시선을 창밖으로 던지며 물었다.

    “특별히 관리되는 거요? 글쎄… 윤서희 씨의 컬렉션은 전부 귀한 것들이라, 딱히 ‘특별히’라고 할 만한 건 없습니다. 전부 소중하게 다루어졌죠. 그래도 굳이 꼽자면, 저기 유리 진열장 안에 있던 ‘심연의 눈물’이라는 고대 부족의 수정구가 가장 아끼던 물건이라고 들었습니다.”

    은율은 김 형사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유리 진열장 안에는 텅 빈 받침대만이 놓여 있었다.

    “사라졌군요.” 은율이 읊조렸다. “피해자의 심장 관통상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사라진 것과 밀실 살인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범인이 그 수정구를 가지고 나갔다는 건데… 대체 어떻게 이 굳게 잠긴 방을 나갔단 말입니까?” 김 형사가 답답한 듯 벽을 노려보았다.

    은율은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손에 들린 금속 조각을 다시 한번 응시했다. 그리고 시신 주변의 카펫을 유심히 살폈다. 시신의 발치, 카펫의 미세한 섬유들이 아주 살짝, 다른 방향으로 꺾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무언가 아주 미세하고 빠르게 움직인 흔적 같았다. 동시에 그는 시신 주변을 감도는 옅은 ‘냉기’를 느꼈다. 평범한 시체에서 발생하는 냉기와는 다른, 마치 진공상태에서 나오는 듯한 섬뜩한 서늘함이었다.

    “이 방은 완벽하게 밀실이었습니다. 문도, 창문도, 그 어떤 틈새도 외부로 통하지 않았죠.” 은율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시선은 다시 한번 창틀의 미세한 먼지에 꽂혔다. “하지만… 밀실이 아니었던 순간이 존재했습니다.”

    김 형사가 의아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은율은 손을 뻗어 창틀에 남아있던 미세한 ‘먼지’를 조금 더 긁어냈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비춰보니, 미약하지만 확실한 빛이 반사되었다. 마치 아주 작은 수정 조각들이 부서진 듯한 느낌.

    “이 먼지는… ‘공간 왜곡’의 흔적입니다.” 은율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아주 순간적으로, 이 공간의 일부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흔적이죠.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남길 수 없는 것입니다.”

    김 형사의 얼굴은 혼란으로 물들었다. “공간 왜곡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SF 영화도 아니고…”

    “이 방이 완벽한 밀실인 것은 사실입니다.” 은율은 시선을 다시 시신에게로 돌렸다. “하지만 범인은 밀실을 뚫고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이 방 안에 있었죠. 아니, 이 방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김 형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범인은… 형태가 없는 존재였거나, 혹은 자신의 형태를 숨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라진 ‘심연의 눈물’이라는 수정구… 그게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었을 겁니다.”

    은율은 손에 든 작은 금속 조각을 쥐었다. 한기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사라진 흉기는…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형태로 변한 것이죠.”

    그의 눈빛이 방 한쪽의 낡은 목각상에 다시 머물렀다. 조각상에 새겨진 문양과 금속 조각의 문양이 겹쳐지는 순간, 은율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하나의 가설이 스쳐 지나갔다. 밀실은 완벽했다. 하지만 그 밀실 안에서 벌어진 일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방에는 범인의 흔적이 없습니다.” 은율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 방 자체가 범인의 도구였을지도 모르겠군요.”

    김 형사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은율의 말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방 자체가 도구라니요? 무슨… 마법이라도 썼단 말입니까?”

    은율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시신이 쓰러져 있던 카펫의 미세한 섬유 방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천천히, 방 안의 모든 유물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특히 사라진 수정구가 놓여있던 빈 받침대에 그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받침대 주변에는 아주 미세한 먼지조차 없이 깨끗했다. 마치 수정구가 사라진 직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미세한 존재들이 함께 빨려 들어간 것처럼.

    “아니요, 마법이 아닙니다.” 은율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학의 탈을 쓴 ‘이능’이죠. 이 방의 밀실 트릭은, 문이나 창문이 아닙니다. 사라진 흉기도 아니고요.”

    그는 방 한가운데 서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감각은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차가운 공기, 먼지의 냄새, 미약하게 진동하는 에너지의 흐름…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이 방 전체를 감싸고 있는 어딘가 뒤틀린 ‘시간의 흔적’이었다.

    “진정한 트릭은… ‘시간’에 있습니다.” 은율이 눈을 뜨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시신에게, 그리고 사라진 수정구의 빈자리에 꽂혔다. “살인자는 방을 나가거나, 흉기를 감춘 것이 아닙니다. 살인자는… 살인을 저지른 후, 그 시간 자체를 이 방에서 지워버린 것입니다.”

    김 형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시간을… 지웠다고요?”

    은율은 대답 대신, 손에 든 금속 조각을 힘껏 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한기는 점점 더 짙어졌다. 그것은 마치 존재해서는 안 될 과거의 조각처럼 느껴졌다. 이제, 이 ‘밀실’의 뒤틀린 진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흥미롭군요. 대체 이 방에 무엇이 숨겨져 있던 겁니까, 윤서희 씨.”
    밀실은 깨지지 않았다. 다만, 밀실이 존재했던 시간 자체가 뒤틀렸을 뿐. 은율은 이제, 그 뒤틀린 시간의 흐름을 되돌려야 했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메마른 들판에 부는 바람

    ### **프롤로그: 별안마을의 저녁 노을**

    **1. (1컷) 별안마을 전경**
    – 푸른 산자락 아래 아담하게 자리 잡은 별안마을. 흙벽돌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강물이 반짝인다. 저녁 노을이 마을을 붉게 물들이며 평화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 아이들이 마을 어귀에서 뛰어놀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2. (2컷) 아란의 약초밭**
    – 아란(20대 초반, 단정한 땋은 머리에 차분한 눈빛)이 약초밭에서 조심스럽게 풀을 고르고 있다.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지만, 표정은 평온하다.
    – **아란 (독백):** (작게) 또 이렇게 하루가 저무는구나.
    – **SFX:** (바람 스치는 소리) 스스슥…

    **3. (3컷) 할머니와 아이들**
    – 마을회관 앞 너른 마당. 할머니(백발의 인자한 표정)가 아이들 몇 명을 모아 놓고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할머니를 올려다본다.
    – **할머니:** …그래서 말이다, 그때는 하늘에 별이 어찌나 많았던지, 눈을 감았다 뜨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지.
    – **아이1:** 우와! 그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어요?
    – **할머니:** 그럼! 지금은 제국 놈들이 하늘마저 가려버리려 하는 게지. 쯧쯧.
    – **SFX:** (아이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헤헤헷!

    **4. (4컷) 찬의 대장간**
    – 마을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대장간. 찬(20대 중반, 듬직한 체구)이 붉게 달궈진 쇠를 망치로 두드리고 있다. 그의 얼굴은 그을렸지만,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장인의 자세가 느껴진다.
    – **SFX:** (쇠망치 소리) 쾅! 쾅! 쾅!

    **5. (5컷) 아란, 강가에서 물 긷는 모습**
    – 물동이를 이고 강가로 향하는 아란.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 **아란 (독백):** 모두들 말한다. 이 작은 마을에서 뭘 할 수 있겠냐고. 하지만… 이대로는 안 돼.

    ### **1. 들이닥친 폭풍**

    **6. (1컷) 별안마을 입구**
    –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마을 입구에 거대한 제국 마차 한 대가 멈춰 선다. 황금 독수리 문양이 박힌 깃발이 위압적으로 펄럭인다.
    – **SFX:** (말발굽 소리) 타그닥타그닥! (멈추는 소리) 끼이이익-!

    **7. (2컷) 제국 관리의 하차**
    – 마차에서 제국 관리(화려하고 오만한 복장, 날카로운 눈매)가 내린다. 그의 뒤로 무장한 제국 병사들이 도열한다. 병사들의 표정은 굳어 있고, 손에는 창이 들려 있다.
    – 마을 사람들이 일순간 굳어선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멎는다.
    – **촌장님 (늙고 왜소한 몸짓):** (떨리는 목소리)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8. (3컷) 제국 관리의 오만한 태도**
    – 관리가 콧웃음을 치며 촌장님을 내려다본다. 병사들은 창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듯 자세를 취한다.
    – **제국 관리:** 별안마을 촌장인가? 흠. 늙고 초라하기 그지없군. 제국에서 공문이 내려왔으니 똑똑히 들어라.

    **9. (4컷) 공문 낭독**
    – 병사 한 명이 두루마리를 펼치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공문을 읽는다.
    – **병사:** “태양 제국의 번영을 위해, 별안마을은 황혼초 천 근, 은화 삼백 닢을 매월 십오일 전까지 상납할 것을 명한다. 기한을 어길 시, 마을의 모든 수확물은 몰수되며, 남자들은 강제 징집, 여자들과 아이들은 제국의 노예로 편입될 것이다.”
    – **SFX:** (사람들의 술렁거림) 웅성웅성…

    **10. (5컷) 마을 사람들의 경악**
    –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황혼초 천 근이라니! 이 작은 마을에서 감당할 수 없는 양이다. 은화 삼백 닢 또한 마찬가지.
    – **찬:**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말도 안 돼…
    – **아란:** (창백한 얼굴로 주먹을 꽉 쥔다)

    **11. (6컷) 촌장님의 애원**
    – 촌장님이 무릎을 꿇고 애원한다.
    – **촌장님:** (울먹이며) 나으리! 황공하오나, 그 양은 저희 마을에서는 도저히… 황혼초는 이맘때쯤 채취하기 어렵고, 은화도… 저희는 그저 보리농사나 짓는 작은 마을입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2. (7컷) 제국 관리의 냉소적인 웃음**
    – 관리는 촌장님의 애원을 비웃듯 코웃음을 친다.
    – **제국 관리:** 자비? 하! 이 늙은이. 제국의 명령에 토를 다는 것이냐? 너희 따위 미천한 백성들이 제국에 바쳐야 할 것은 오직 순종뿐이다. 명심해라. 다음 달 십오일, 황혼초와 은화를 들고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섬뜩한 미소) 별안마을은 지도에서 사라질 것이야.
    – **SFX:** (말발굽 소리) 타그닥타그닥!

    **13. (8컷) 마차와 병사들의 퇴장**
    – 제국 관리와 병사들이 탄 마차가 다시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진다. 마을에는 싸늘한 침묵과 절망감만 남는다.
    – **SFX:** (고요함) …

    ### **2. 메마른 절망**

    **14. (1컷) 마을회관 안**
    – 밤이 깊었다. 마을회관 안에는 촛불이 희미하게 타오르고, 마을 어른들이 모여 있다. 모두의 얼굴에 깊은 절망감이 드리워져 있다. 아란과 찬도 함께 앉아 있다.
    – **촌장님:** (목소리가 잠겨 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황혼초 천 근이라니. 우리 마을 약초꾼들 다 합쳐도 한 달에 오십 근도 채 못 캐는데… 은화는 또 어떻고…

    **15. (2컷) 한숨 쉬는 마을 사람1**
    – 나이 든 마을 주민 한 명이 한숨을 푹 내쉰다.
    – **주민1:** 어차피 제국 놈들이 다 가져갈 거… 뭘 해도 안 될 거요. 그냥 포기하는 게…

    **16. (3컷) 찬의 분노**
    – 찬이 거친 숨을 내쉬며 벌떡 일어선다. 그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린다.
    – **찬:** 포기라니요! 포기하면 우리 아이들은 어찌됩니까? 제국 노예로 끌려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으란 말입니까?

    **17. (4컷) 주민2의 냉소적인 대꾸**
    – 또 다른 주민이 찬을 향해 냉소적으로 말한다.
    – **주민2:** 그럼 뭘 어쩌란 말이냐!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 저 거대한 태양 제국에 대항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우리 같은 미약한 존재들이? 다 죽자는 소리밖에 더 돼?

    **18. (5컷) 할머니의 침묵**
    – 모두가 할머니의 지혜로운 말 한마디를 기다리는 듯 할머니를 바라보지만, 할머니는 그저 말없이 촛불만 응시하고 있다.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더해져 있다.
    – **SFX:** (어색한 침묵)

    **19. (6컷) 아란의 회상**
    – 아란은 약초밭에서 풀을 고르던 때를 회상한다. 평화로웠던 그 순간이 꿈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저녁 노을 아래 아이들이 뛰어놀던 모습…
    – **아란 (독백):** (내면의 목소리) 아니야… 포기할 수 없어.

    **20. (7컷) 촛불에 비친 아란의 눈동자**
    – 촛불이 아란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린다. 그 안에는 두려움과 함께 단단한 결심이 피어오르고 있다.
    – **아란 (독백):** 제국은 우리를 부서뜨리려 하지만, 우리는… 우리는 아직 부서지지 않았어.

    ### **3. 작은 불씨**

    **21. (1컷) 다음 날 아침, 마을 공동 우물**
    – 다음 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절망감에 휩싸여 있지만, 일상은 이어져야 한다. 몇몇 아낙네들이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다.
    – **아낙1:** 어제 밤새 한숨도 못 잤어. 우리 애들 어떡해…
    – **아낙2:** 나도 그래. 정말 끝인가 봐.

    **22. (2컷) 아란의 등장**
    – 아란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다가온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지만, 표정에는 굳은 의지가 서려 있다.
    – **아란:** (단호하게) 끝이 아니에요.

    **23. (3컷) 아낙네들의 놀란 표정**
    – 아낙네들이 아란을 돌아본다.
    – **아낙1:** 아란아… 무슨 소리냐.
    – **아란:**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있어요. 다음 달 십오일. 그 전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해요.

    **24. (4컷) 할머니와 아란의 대화**
    –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우물가로 나온다. 아란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 **할머니:** (조용히) 그래, 아란아. 너는 그리 생각하는 게로구나.
    – **아란:** 할머니… 어제 말씀하셨잖아요. 별이 많았던 옛날 이야기… 제국이 하늘마저 가리려 한다고요. 그럼 우리가 하늘을 다시 보여줘야죠.

    **25. (5컷) 찬의 대장간 앞**
    – 아란이 찬의 대장간으로 향한다. 찬은 여전히 침울한 얼굴로 쇠를 두드리고 있다.
    – **SFX:** (쇠망치 소리) 쾅! 쾅!

    **26. (6컷) 아란과 찬의 대화**
    – 아란이 대장간 문을 두드린다. 찬이 망치를 내려놓고 아란을 바라본다.
    – **아란:** 찬 오빠. 우리… 뭔가 해야 해요.
    – **찬:** (말없이 아란을 응시한다)

    **27. (7컷) 아란의 제안**
    – 아란이 쭈뼛거리며 말을 꺼낸다.
    – **아란:** 이대로 끌려갈 순 없어요. 하다못해 황혼초 천 근을 다 모으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야 한다고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 같이 힘을 모으면…
    – **찬:** (차가운 표정으로) 우리가 모아봤자 제국이 원하는 만큼은 안 될 거다.

    **28. (8컷) 아란의 간절한 표정**
    – 아란이 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 **아란:** 네. 어쩌면 안 될 수도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어요. 하다못해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가 끝까지 싸웠다는 기억이라도 남겨줘야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29. (9컷) 찬의 망설임과 결심**
    – 찬은 아란의 말에 깊이 생각한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다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단단해진다.
    – **찬:** …알았다. 뭘 하면 되는데?

    **30. (10컷) 아란의 미소**
    – 아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작은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는 순간이다.
    – **아란:** 일단… 마을 사람들을 다시 모아야겠어요. 다 같이 방법을 찾아야죠.

    **31. (11컷) 별안마을의 하늘**
    – 저녁 노을이 다시 별안마을을 물들인다. 어제와 같은 풍경이지만, 왠지 모르게 공기 중에는 미약하지만 새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다.
    – **아란 (독백):** 메마른 들판에도 언젠가 바람이 불어오면, 작은 씨앗들이 싹을 울 테니까. 아주 작은 씨앗이라도.

    **32. (12컷) 에필로그: 작은 불꽃**
    – 캄캄한 밤. 아란과 찬, 할머니가 다시 마을회관에 모여 앉아 작은 촛불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들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절망이 가득했던 어제 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비록 작은 불꽃이지만, 꺼지지 않을 희망의 불꽃처럼 보인다.


    **에피소드 끝.**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서울의 밤은 어스름한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네온사인과 가로등 불빛이 번쩍이는 도시의 심장부에서도, 낡은 골목길 깊숙이 자리한 ‘고요한 밤’ 카페는 홀로 침묵하는 섬 같았다. 자정 무렵이면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의 주인 이하준에게는 그때부터가 진짜 밤이었다. 그가 직접 내린 커피의 고소한 향기가 낡은 나무 테이블과 빛바랜 소파에 스며들어 아늑함을 더했다.

    하준은 갓 내린 에스프레소를 잔에 따르며 한숨을 쉬었다. 옅은 연기가 피어 오르는 잔 너머로 유리창 밖을 응시했다. 인적 드문 골목길을 비추는 가로등 아래,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매일 밤 같은 시각, 같은 자리. 그녀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고요하게 나타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서 오세요, 설 씨.”

    하준의 인사에 그녀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듯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마치 새벽하늘을 담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이름은 설. 하준은 그녀를 처음 보던 날부터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느꼈다.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그녀에게서는 늘 숲의 고요함이나 새벽 공기의 서늘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설은 늘 똑같은 자리에 앉았다. 창가 구석, 어둠이 가장 깊게 드리워진 곳. 그리고 늘 똑같은 음료를 주문했다. 얼음 동동 띄운 차가운 블랙 티. 한겨울에도 그녀는 얼음을 고집했다. 하준은 그녀에게 차를 가져다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요즘 날씨가 많이 춥죠? 따뜻한 차는 어떠세요?”

    설은 차가운 찻잔을 손으로 감싸 쥐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길고 가늘었지만,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 위로 푸른 혈관이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괜찮아요. 차가운 것이 좋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마치 물에 젖은 돌멩이가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같기도 했다. 하준은 그녀의 말간 눈동자를 보며 미묘한 이질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깊은 매력을 느꼈다.

    그녀는 언제나 홀로였다. 카페에 오래 머무르지도 않았다. 차를 다 마시면 말없이 사라졌다. 마치 그림자처럼. 하준은 그녀가 사라진 빈자리를 바라보며 괜스레 허탈함을 느꼈다.

    어느 비 오는 밤이었다. 빗줄기가 도시의 불빛을 길게 늘어뜨리는 자정. 설은 여느 때처럼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하지만 그날 밤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와 다른 기색이 엿보였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 그리고 평소보다 더 깊어진 눈 밑의 그림자.

    “설 씨, 무슨 일 있으세요?” 하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하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시선은 강렬하면서도 어딘가 아득한 슬픔을 담고 있었다.

    “오늘… 조금 불편한 일이 있었어요.”

    그녀는 말을 아꼈지만, 하준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설이 밤의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이 도시의 어둠 속에는 그녀와 같은 존재들이 숨어 산다는 것을. 어렴풋한 상상이었지만, 하준은 그녀에게서 평범한 인간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매일 밤 느껴왔다.

    하준은 그녀를 위해 특별한 블렌딩 커피를 내려주었다. 쓰디쓴 에스프레소에 달콤한 시럽을 넣고 우유 거품을 듬뿍 올린, 위로가 필요한 밤에 딱 어울리는 음료였다. 설은 조용히 커피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아주 희미했지만, 하준의 눈에는 그 어떤 빛보다 밝게 보였다.

    “따뜻하네요. 고마워요.”

    그날 밤, 설은 평소보다 오래 카페에 머물렀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하준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이야기는 별 것 없었다. 카페를 시작하게 된 계기, 좋아하는 음악, 어릴 적 꿈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설은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때때로 하준의 손끝이나 입술에 머물렀다. 마치 그에게서 온기를 찾으려는 듯이.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유대감이 생겨났다. 하준은 설에게 이끌렸고, 설 역시 하준에게서 외로움과 이해받고 싶은 마음을 읽은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자신과 하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그녀의 세계는 하준의 세계와 달랐고, 그 다름이 곧 위험이라는 것을 그녀는 늘 인지하고 있었다.

    어느 밤, 하준은 용기를 내어 설에게 물었다.

    “설 씨는… 대체 어떤 분이세요?”

    설의 눈동자가 깊게 흔들렸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창밖의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는… 그림자예요. 이 도시의 가장 깊은 곳, 인간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아가는 그림자 종족이죠.”

    하준은 그녀의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어렴풋이 짐작했던 사실이 확인되자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는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었다.

    “그럼…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건가요?”

    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슬픔이 어렸다.

    “저희 종족은 인간과 섞일 수 없어요. 그림자는 빛에 가까워질수록 희미해지고, 결국 사라지니까요. 인간의 감정, 욕망, 모든 것이 저희에게는 독이에요. 그리고… 저희가 인간 세상에 드러나는 것 또한 금지되어 있어요. 저희의 존재는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져야만 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설 씨.”

    하준의 고백에 설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천천히 하준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이 얽히자,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가 찾아왔다.

    “알아요… 하지만 안 돼요. 우리의 인연은 시작부터 금지된 것이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단호했다. 하준은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도, 이 감정을 멈출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설은 움찔했지만, 뿌리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하준의 온기는 그녀의 손에, 그리고 그녀의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나는 괜찮아요. 당신이 그림자든, 빛이든, 상관없어요. 그저 당신이 설이라는 것만 알아요.”

    그의 말에 설의 눈가에 투명한 물기가 맺혔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하준 씨… 당신은 너무 따뜻해요. 그 따뜻함이 저를 소멸시킬 수도 있어요.”

    “설 씨를 소멸시키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당신의 그림자를 더 선명하게 만들게요. 당신이 사라지지 않도록 내가 당신의 빛이 되어줄게요.”

    그 순간, 카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검은 망토를 두른 세 명의 인물이 그림자처럼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눈동자는 달빛처럼 차갑고, 설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그들의 등장에 카페 안의 공기는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설은 본능적으로 하준의 손을 놓았다. 그녀의 얼굴에 두려움과 체념이 스쳤다.

    “설. 너는 금기를 어겼다.”

    가장 앞에 선 인물이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설의 그것과 같았지만, 빛 한 조각 없는 깊은 어둠만을 담고 있었다.

    “그림자 종족은 인간과 교류할 수 없으며, 감정을 나누는 것은 더욱 금지된 일. 우리는 너의 일탈을 용납할 수 없다.”

    하준은 설을 감싸듯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설 씨는 그저….”

    “인간! 네가 알 바 아니다. 너의 존재 자체가 우리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그들의 시선은 하준을 꿰뚫을 듯 날카로웠다. 하준은 무언가에 짓눌리는 듯한 압력을 느꼈다. 그들은 인간의 언어를 쓰고 있었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인간과는 다른 차원의 힘을 내뿜고 있었다.

    설은 하준의 앞을 막아섰다.

    “제발… 그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마세요. 제가 책임질게요.”

    “책임? 너의 감정 따위가 우리 종족의 존속보다 중요하단 말이냐?”

    “저는… 그에게서 소멸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어요.” 설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의 온기가, 그림자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은 설의 말을 비웃듯이 차갑게 응시할 뿐이었다.

    “어리석은 착각이다. 너는 우리의 세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인간과의 접촉은 너를,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뿐이다.”

    그들의 그림자가 설을 향해 드리워졌다. 하준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발이 바닥에 묶인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설은 마지막으로 하준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눈물로 빛나고 있었지만, 슬픔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담고 있었다.

    “하준 씨…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검은 망토를 두른 인물들이 설을 에워쌌다. 그들의 몸에서 어둠이 뿜어져 나오며 설을 감쌌다. 설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지더니, 마치 연기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차가운 블랙 티 잔 하나와, 그녀의 희미한 잔향뿐이었다.

    밤은 다시 고요해졌다. 검은 망토의 인물들도 설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준은 텅 빈 카페에 홀로 남아, 차갑게 식어버린 블랙 티 잔을 바라보았다. 그의 심장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설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녀가 ‘소멸하지 않을 가능성’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어딘가에서 그의 온기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날 이후, 하준은 밤마다 여전히 ‘고요한 밤’ 카페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매일 밤, 그녀가 앉았던 창가 자리의 테이블 위에 차가운 블랙 티를 한 잔씩 올려두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는 변함없이 그녀를 기다렸다. 어쩌면 그림자 종족의 금기를 어긴 대가로 설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준은 믿었다. 언젠가 다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그녀가 나타나, 그의 온기를 찾아올 것이라고.

    그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멀리서 새벽을 알리는 희미한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빛 속에서 희미해지지만, 사라지기 직전 가장 선명해지기도 한다. 하준은 그 선명한 그림자가 다시 그의 삶에 스며들기를, 금지된 사랑이 언젠가 세상의 빛 속에서도 존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차가운 블랙 티 위에, 희미한 새벽빛이 부서져 내렸다. 어쩌면,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하준은 생각했다. 서로 다른 두 존재의, 영원히 이어질지도 모를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심연의 울림

    엘리시아 마법 학원. 이름만 들어도 아카데미의 위상과 역사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흑요석 외벽은 언제나 위압감을 뿜어냈고,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은빛 첨탑은 밤마다 마법적인 빛을 발하며 주변 도시를 비췄다. 이곳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세계 마법 협회의 심장부이자, 최고 권력자들을 배출하는 요람, 그리고… 끔찍한 비밀을 품고 있는 성역.

    강하율은 늘 그 ‘비밀’이라는 단어에 끌렸다. 고대 마법학을 전공하는 이유도 어쩌면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는 반짝이는 최신 마법 공학보다는, 먼지 쌓인 고문서 속에서 잊힌 지혜를 찾아 헤매는 것을 즐겼다. 엘리시아의 명문가 자제들이 고성능 마법 드론을 조종하고, 최신 마법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밤을 지새울 때, 그는 퀴퀴한 종이 냄새 가득한 고대 마법 기록 보관실에서 낡은 파피루스 조각을 복원하곤 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정, 모두가 잠든 시간. 거대한 학원의 심장부, 정확히는 잘 사용되지 않는 동관 지하에 위치한 고대 마법 기록 보관실. 하율은 습기와 냉기 가득한 그곳에서 마법진 도해를 복원하는 중이었다. 붓을 든 손끝에 섬세한 마력을 실어 닳아버린 고대 문양을 따라 그리는 일은 고되고 지루했지만, 그에게는 살아있는 과거와 대화하는 듯한 짜릿함을 주었다.

    그때였다. 보관실의 묵직한 정적을 깨고, 낮은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올라왔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규칙적이지만 불길한 박동이었다. 처음엔 밤늦게까지 가동되는 학원 시설의 소음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진동은 점차 강해졌고, 고서들이 꽂힌 서가마저 미세하게 흔들렸다. 잉크가 담긴 작은 잔 속의 액체가 파동을 일으키며 일렁였다.

    하율은 작업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이 진동은 명백히 ‘지하’에서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깊은 지하에서. 엘리시아 학원 지하에는 최첨단 마력 생산 시설과 비상 대피소, 그리고 극비 연구실들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진동은 처음이었다. 마치 거대한 존재가 땅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가 복원하던 마법진 도해가 갑자기 희미하게 빛났다. 그것은 고대 마법의 잔영이 담긴 탐지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이 무언가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그 빛이 향하는 곳은 서가 뒤쪽, 으레 낡은 벽이라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하율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을 짚었다. 차가운 석벽 아래로 미세한 틈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틈에서, 진동과 함께 희미한 어둠의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단순히 오래된 마법의 흔적이 아니었다. 불쾌하고, 위협적인,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기운이었다.

    그의 안에서 알 수 없는 충동이 솟아올랐다. 금기를 넘어선 호기심.
    손가락 끝에 미세한 마력을 모아 틈새에 불어넣었다. 그러자 틈은 ‘지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기이하게 확장되었다. 낡은 석벽이 서서히 옆으로 밀려나며, 그 안의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뻗은 나선형 계단이었다. 축축하고 어두운 계단은 끝없이 아래로 이어지는 듯했다. 진동과 어둠의 기운은 그 계단의 심연에서부터 솟아오르고 있었다.

    하율은 망설였다. 분명히 학원에서 금지하는 구역일 터였다. 학칙에는 ‘허가받지 않은 자의 비공개 구역 침입은 즉시 제적 처분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불안감이 그를 잡아끌었다. 그는 낡은 등불에 마력을 주입해 빛을 밝히고,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디뎠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차가워지고 습해졌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누군가의 끔찍한 신음 소리 같기도 했다. 심장은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격렬하게 뛰었다. 이 어둠 속에는 분명히 평범한 것이 아닌, 무언가 존재하고 있었다.

    한참을 내려가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 마법진들이 벽과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마법진은 고대의 것이었지만, 주기적으로 새로운 마력이 주입되는 듯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거대한 검은 수정이 박혀 있었다. 수정은 마치 거대한 심장처럼 규칙적으로 섬뜩한 빛을 발하며 진동하고 있었다. 진동의 근원은 바로 저 검은 수정이었다.

    수정 주변으로는 겹겹이 봉인 마법진이 둘러쳐져 있었지만, 마치 완벽하지 못한 것처럼,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은 봉인의 틈새를 비집고 나와 공간을 짓눌렀다. 하율은 그 기운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것은 순수한 악의도, 단순히 강대한 마력도 아니었다. 존재 그 자체로 주변을 오염시키고 뒤틀리게 하는, 미지의 불길한 기운이었다.

    그때, 하율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쉰, 그러나 강렬한 힘을 가진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아이를 깨울 때가 되었다. 엘리시아의 마지막 금기가, 드디어….”

    하율은 숨을 멈췄다. 아이? 금기? 목소리는 검은 수정 뒤편, 더욱 깊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분명 학원의 고위 교수진이거나, 최소한 그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 자일 터였다. 그는 몸을 바짝 웅크려 인기척을 숨겼다. 방금 들은 말은 단순한 비밀이 아니었다. 엘리시아 학원 전체를 뒤흔들 수도 있는, 끔찍한 진실의 조각이었다.

    검은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이 갑자기 거세졌다. 푸른 마법진들이 격렬하게 깜빡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무언가 조작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압도적인 마력의 파동이 온몸을 강타했다. 하율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도망쳐야 했다.

    뒤돌아서 도망치려던 찰나, 발밑에 있던 작은 돌멩이가 굴러가며 ‘달칵’ 소리를 냈다.

    정적이 흘렀다.
    방금까지 들리던 낮고 쉰 목소리가 뚝 끊겼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마법진들의 깜빡임도 멈췄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

    그리고 곧바로, “누구냐?!” 하는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강력한 마법 에너지의 파동이 그를 향해 덮쳐왔다.

    하율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그는 방금, 엘리시아 마법 학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끔찍한 ‘금기’의 실체를, 아주 잠깐이나마 엿본 것이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 마법소녀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에피소드 1: 속삭이는 유적의 문

    **제목:** 속삭이는 유적의 문 (The Whispering Gate of the Ruins)

    **등장인물:**
    * **시아:** 평범한 고등학생이지만, 사실은 마법소녀. 호기심 많고 정의로운 성격. ‘별의 수호자’로 변신한다.
    * **루나:** 시아의 파트너. 작은 요정의 형상을 한 정령. 고대의 지식에 해박하며, 종종 시아에게 조언과 잔소리를 한다.

    **[SCENE 1: 고요한 오후의 이변]**

    **# 컷 1:**
    * **배경:** 한적한 마을의 오래된 시계탑 광장. 햇살이 따스하게 쏟아지고, 비둘기 몇 마리가 한가롭게 모이를 줍고 있다. 시계탑 아래의 낡은 돌계단에 시아가 앉아 스케치북에 뭔가를 그리고 있다. 교복 위에 편안한 가디건을 걸쳤다.
    * **시아 (내레이션):** 평화로운 오후.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그런 날이었다. 적어도, 그 기묘한 진동이 느껴지기 전까진 말이다.

    **# 컷 2:**
    * **배경:** 시아의 손목에 차인, 별 모양 장식이 달린 팔찌가 미세하게 빛나며 진동한다. 시아는 깜짝 놀라 팔찌를 내려다본다.
    * **시아:** 으음? 이건… 무슨 진동이지?

    **# 컷 3:**
    * **배경:** 시아의 어깨 위로 작은 빛의 구체가 떠오르더니, 이내 반짝이는 날개를 가진 요정, 루나의 형상으로 변한다. 루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핀다.
    * **루나:** 시아! 이 기운은…! 단순한 마나 잔류가 아니야. 뭔가 아주 오래된 힘이 깨어나고 있어.

    **# 컷 4:**
    * **배경:** 시아가 스케치북을 덮고 벌떡 일어선다. 시계탑의 낡은 석상 중 하나를 뚫어지라 응시한다. 석상은 이끼가 낀 채 오랜 세월을 견딘 듯 보인다.
    * **시아:** 오래된 힘이라고? 설마… 이 마을에 전해지는 ‘잠자는 거인의 심장’ 전설이랑 관계 있는 건 아니겠지? 다들 그저 지어낸 이야기라고 했었는데…
    * **루나:** (시아의 뺨에 맴돌며) 거인의 심장이라… 흥미롭군. 이 석상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이곳의 마나 흐름을 뒤틀고 있어!

    **# 컷 5:**
    * **배경:** 시아가 석상 주변의 낡은 비석을 조심스럽게 살핀다. 비석에는 알아보기 힘든 고대 문자와 상형문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시아의 눈에 집중의 빛이 감돈다.
    * **시아:** 분명 어릴 적 읽었던 향토 역사책에, 이 석상 아래에 ‘잊혀진 자들의 문’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어. 아무도 찾지 못해서 그냥 전설로 치부되었지만…
    * **루나:** (코를 킁킁거리며) 그래, 맞아! 이 문양… 내가 기억하는 고대 ‘아틀레우스’ 왕조의 봉인 문양과 흡사해! 어쩌면 그 전설은… 진실일지도 몰라.

    **[SCENE 2: 숨겨진 입구를 찾아서]**

    **# 컷 6:**
    * **배경:** 시아와 루나가 석상 주위를 맴돌며 꼼꼼히 살핀다. 시아는 손가락으로 이끼 낀 돌 틈새를 훑어본다. 시아의 팔찌가 전보다 더 강하게 진동한다.
    * **시아:** 확실히 이 부근에서 기운이 제일 강하게 느껴져. 어디 보자… 이런 낡은 건축물엔 항상 숨겨진 장치가 있기 마련이지.
    * **효과음:** 쉬이익- (미세한 마나의 흐름)

    **# 컷 7:**
    * **배경:** 시아가 석상 기단부의 특정 문양을 손으로 짚자, 문양이 푸른빛으로 깜빡인다. 그리고 이내, 돌바닥의 한 부분이 삐걱이며 서서히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그 아래로 어둠이 깔린 계단이 드러난다.
    * **시아:** 찾았다! 역시…!
    * **루나:** (깜짝 놀라며) 이런 곳에 진짜로 입구가 있을 줄이야!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마법이 봉인을 스스로 풀어낸 것인가?

    **# 컷 8:**
    * **배경:**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낡은 계단을 내려다보는 시아의 얼굴. 호기심과 약간의 긴장감이 교차한다.
    * **시아:** 가보자, 루나. 이 어둠 속에 대체 뭐가 숨겨져 있는지.
    * **루나:** 조심해, 시아! 이 어둠… 그냥 어둠이 아니야. 뭔가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답답하고 끈적한 기운이 느껴져.

    **# 컷 9:**
    * **배경:** 시아가 계단을 한 발짝씩 내려간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천장에서 떨어진 먼지가 희미하게 공중에 흩날린다. 시아의 팔찌가 밝은 빛을 내기 시작한다.
    * **시아:** (나직하게) 별의 수호자, 시아! 어둠을 가르는 빛이여, 내게 길을 밝혀라!
    * **효과음:** 촤아악-! (밝은 마법 에너지 방출 소리)

    **# 컷 10:**
    * **배경:** 시아의 팔찌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어두웠던 계단을 환하게 비춘다. 계단은 생각보다 훨씬 깊고, 낡았지만 견고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벽면에는 희미한 고대 문양이 이따금씩 나타난다.
    * **루나:** (빛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며) 굉장해! 이 계단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내려가는 것 같아. 수천 년은 족히 되었을 거야.

    **[SCENE 3: 고대의 심장]**

    **# 컷 11:**
    * **배경:** 계단의 끝에 다다른 시아와 루나. 그들 앞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광대한 공간이 펼쳐진다. 원형의 거대한 홀. 중앙에는 거대한 수정 기둥이 솟아 있고, 사방의 벽면에는 신비로운 문양들이 희미하게 발광한다. 공기 중에는 맑고도 무거운 기운이 가득하다.
    * **시아:** (숨을 들이쉬며) 와아…! 여기는… 대체…!
    * **루나:** (경외심 어린 목소리로) 유적의 중심부… ‘고대의 심장’이야. 이렇게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을 줄이야! 알려진 어떤 문명보다도 오래된 것 같아.

    **# 컷 12:**
    * **배경:** 시아가 수정 기둥에 가까이 다가간다. 기둥 안에는 복잡한 회로 같은 것이 얽혀 있고, 그 안에서 푸른빛 에너지가 꿈틀거린다. 손을 뻗자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
    * **시아:** 이 기둥… 살아있는 것 같아.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져.
    * **루나:** (놀라며) 만지지 마, 시아! 저건… 에너지를 제어하는 봉인 장치일지도 몰라. 섣불리 건드렸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 컷 13:**
    * **배경:** 갑자기 시아와 루나의 앞을 투명한 막이 가로막는다. 손을 뻗어보니 단단한 벽처럼 만져진다. 막 위에는 기둥과 비슷한 문양이 떠오른다.
    * **시아:** 으앗! 뭐야, 갑자기 벽이 생겼어!
    * **루나:** 봉인이야! 저 기둥에 연결된 수호의 마법. 여기를 지나가려면 이 봉인을 풀어야 해. 이 문양은… ‘진실을 보는 자만이 길을 얻으리라’는 뜻의 고대 상형문자네.

    **# 컷 14:**
    * **배경:** 시아가 눈을 감고 자신의 마법 에너지를 끌어모은다. 시아의 몸 주변으로 별빛 같은 마나 입자들이 맴돌기 시작한다. 그녀의 이마에 빛나는 문양이 떠오른다.
    * **시아:** 진실을 보는 자… 내 안의 빛으로, 이 어둠을 꿰뚫어 보겠어!
    * **효과음:** 지이잉…! (마법 에너지 집중 소리)

    **# 컷 15:**
    * **배경:** 시아가 두 손을 모아 막을 향해 뻗자, 그녀의 손끝에서 순수한 별빛이 뿜어져 나온다. 별빛은 막에 닿아 스며들듯 퍼져나가고, 막 위의 문양이 점점 더 밝아지며 공명한다.
    * **효과음:** 파아아앙-! (봉인 해제 소리)

    **# 컷 16:**
    * **배경:** 투명한 막이 유리 파편처럼 부서지며 사라지고, 그 너머의 통로가 드러난다. 통로 저편에는 더욱 깊고 신비로운 공간이 이어지는 듯하다.
    * **루나:** 해냈어, 시아! 역시 네 순수한 마음의 마법이 통했어!

    **[SCENE 4: 속삭이는 벽화]**

    **# 컷 17:**
    * **배경:** 시아와 루나가 봉인이 풀린 통로를 따라 걸어간다. 통로의 벽면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벽화들이 연속해서 펼쳐진다. 오래되었지만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림들은 고대 문명의 생활상을 담고 있다.
    * **시아:** (벽화를 손으로 짚으며) 여기엔…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걸까? 이 문명은 왜 사라진 거지?
    * **루나:** 이건 단순한 생활상이 아니야, 시아. 이건 기록이야. 그들의 역사, 그리고… 그들의 비극.

    **# 컷 18:**
    * **배경:** 시아의 눈에 가장 거대하고 압도적인 벽화가 들어온다. 벽화 속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세상을 뒤덮으려는 듯 보이고, 그 아래에서 빛을 발하는 존재들이 그림자에 맞서 싸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벽화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보석 같은 것이 그려져 있고, 그 주위에 봉인 문양이 있다.
    * **시아:** (벽화를 올려다보며) 저건… 거대한 그림자? 그리고 저 빛나는 존재들은… 설마 마법사들일까?
    * **루나:** (벽화 속 보석을 가리키며) 저 보석… 저게 바로 ‘잠자는 거인의 심장’일 거야. 모든 마나의 근원이자, 동시에 모든 악한 힘을 봉인하는 장치였던 거지. 이 그림은… 과거의 대재앙과 그 봉인의 기록이야.

    **# 컷 19:**
    * **배경:** 시아가 벽화 속 ‘거인의 심장’이 그려진 부분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짚는다. 시아의 손끝에서 별빛이 희미하게 흘러나와 벽화 속 보석과 공명한다.
    * **효과음:** 징- (낮고 울리는 소리)

    **# 컷 20:**
    * **배경:** 시아가 손을 대자, 벽화 속 봉인 문양이 푸른빛으로 반짝이며 섬광을 일으킨다. 그리고 벽화에서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수많은 목소리가 겹쳐지는 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어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 **시아:** (놀란 표정으로) 이 소리는…!
    * **루나:** (떨리는 목소리로) 고대인의 영혼의 목소리… 그들의 절규와 경고가 담겨 있어. “다시… 열지 마라…”, “잊지 마라…”, “저주받은 어둠… 깨어나지 않도록…”

    **[SCENE 5: 미지의 존재]**

    **# 컷 21:**
    * **배경:** 벽화에서 흘러나오는 속삭임이 점점 커지더니, 갑자기 유적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벽면의 발광 문양들이 더 강렬하게 빛나고, 홀 중앙의 수정 기둥에서 푸른빛이 격렬하게 뿜어져 나온다.
    * **시아:** (몸의 균형을 잡으며) 유적이… 흔들려! 우리가 뭔가 잘못 건드린 거야?
    * **루나:** (시아의 어깨에 달라붙으며) 아니! 벽화에 봉인된 기운이 시아의 마법과 공명해서… 뭔가 깨어나고 있어!

    **# 컷 22:**
    * **배경:** 벽화 건너편의 어두웠던 통로 끝에서, 강렬한 검붉은 빛이 번뜩이며 뿜어져 나온다. 그 빛은 어둠을 머금은 듯 끈적하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다. 그곳에서 알 수 없는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 **효과음:** 콰아앙! (지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둔탁한 소리)
    * **시아:** (눈을 크게 뜨며) 저, 저건… 대체 뭐야?!

    **# 컷 23:**
    * **배경:** 검붉은 빛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꿈틀거린다. 형체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그 존재 자체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위압감과 사악한 기운이 시아와 루나를 덮친다. 유적 전체를 가득 채웠던 고요함이 깨지고, 불길한 존재의 심장 소리 같은 것이 울려 퍼진다.
    * **루나:** (겁에 질린 목소리로) 안 돼…! 이 기운은… 봉인되었던 ‘그림자의 파편’이야! 우리가 너무 일찍 깨워버렸어!
    * **시아:** (떨리는 목소리지만 결연한 눈빛으로) 그림자… 파편…? 설마 벽화에 있던 그 어둠의 존재가…?!

    **# 컷 24:**
    * **배경:** 시아와 루나가 서로를 바라본다. 시아의 눈에는 두려움 속에서도 고대 유적의 비밀을 밝혀내고 이 위협에 맞서야 한다는 결의가 담겨 있다. 검붉은 빛이 더욱 강렬하게 빛나며 그들의 존재를 위협한다.
    * **시아 (내레이션):** 잊혀진 지하 유적의 문을 연 순간, 우리는 단순히 과거의 흔적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미지의 존재와, 이 세계를 뒤흔들 거대한 비밀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 컷 25:**
    * **배경:** 검붉은 빛 속에서 불분명한 거대한 형체가 시아와 루나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습을 멀리서 비춘다. 유적의 벽화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 **효과음:** 으으으… (낮고 불길한 울림)
    * **끝.**

  • 마법소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2화: 잿빛 도시의 섬광

    메마른 먼지가 폐허가 된 도시의 핏빛 노을 속에서 춤을 추었다. 세라는 낡은 천 조각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망가진 건물 잔해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쳐나갔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그것’들이 활동을 시작할 테니, 그 전에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 며칠째 식량도, 물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갈증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그녀는 축 늘어진 어깨에 짊어진 낡은 배낭의 무게를 견뎠다. 배낭 안에는 낡은 인형 하나와 비상용 구급상자가 전부였다.

    “후으… 후으…”

    거친 숨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무너진 고가도로 아래, 뼈대만 남은 버스가 뒹굴고 있는 곳을 지나쳐 갈 때였다. 한때는 번화했을 거리가 이제는 죽음의 그림자로 가득했다. 콘크리트 조각과 뒤틀린 철근,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균류들이 회색빛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지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매 순간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특히 밤은 더욱 그러했다.

    그녀의 시선이 저 멀리, 무너진 고층 빌딩들 사이에서 홀로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작은 상점 건물에 닿았다. 녹슨 간판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지만, 적어도 외벽은 멀쩡해 보였다.
    ‘어쩌면… 어쩌면 저 안에 아직 쓸 만한 것이 남아있을지도 몰라.’
    세라는 일말의 희망을 붙잡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힘없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 속도를 높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곳은 한때 작은 편의점이었던 곳으로 보였다. 유리창은 깨져 나갔지만, 안쪽은 비교적 깨끗했다. 그녀는 부서진 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먼지가 자욱한 공기가 그녀를 맞았다. 부서진 선반들, 뒹구는 상품 잔해들. 약탈당한 흔적이 역력했지만, 깊숙한 곳 어딘가에는 아직 빛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그녀를 움직였다.

    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걷던 세라의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삐그덕. 얇은 금속판이 바닥에 떨어지며 작은 소음을 냈다. 순간, 세라의 온몸이 굳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 끔찍한 세상에서, 작은 소음 하나는 죽음을 부르는 징조가 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중얼거렸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그때였다. 천장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뜩이는 것이 포착되었다. 섬뜩한 붉은 안광. 거대한 몸집이 서서히 드러나며, 썩어가는 고기 덩어리 같은 형체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변이체…’

    세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편의점 내부의 어둠에 완벽하게 숨어 있던, 덩치 큰 변이체였다. 녀석의 몸에서는 불쾌한 악취가 풍겨왔고, 찢어진 입에서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나 있었다. 녀석은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젠장…!”

    세라는 급히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녀석의 속도는 예측을 뛰어넘었다. 거대한 앞발이 바닥을 짓밟으며 튀어나왔고, 천장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세라는 가까스로 몸을 날려 피했지만, 등 뒤로 섬뜩한 바람이 스쳤다.

    ‘이대로는 안 돼. 도망칠 곳이 없어.’

    좁은 편의점 안, 부서진 선반들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었다. 변이체는 그녀를 먹잇감으로 여기는 듯 집요하게 추격해왔다. 녀석의 날카로운 발톱이 벽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세라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낡은 배낭을 바닥에 내던지고, 주머니 속에서 작은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펜던트에는 조그마한 별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부디… 이번 한 번만 더…”

    그녀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법소녀로 변신하는 것은 강력한 힘을 주었지만, 그 대가는 항상 혹독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과 함께, 존재 자체가 마모되는 느낌. 그러나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변이체가 다시 한번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세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별이여… 속삭이는 빛이여… 저에게… 힘을!”

    그녀의 손에 쥐인 펜던트에서 희미한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빛은 점점 강렬해지며, 잿빛 공기를 가르고 그녀의 몸을 감쌌다. 빛의 폭풍 속에서 세라의 모습이 변해갔다. 낡은 옷은 순백의 드레스로 바뀌었고, 머리칼은 은은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등 뒤에는 투명한 날개 형상의 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고, 손에는 별 모양의 지팡이가 쥐어졌다.

    변이체는 순간 움찔했다. 예상치 못한 빛의 강렬함에 잠시 주춤한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세라—아니, 이제는 빛나는 마법소녀의 모습으로 변한 그녀가 재빨리 자세를 잡았다.

    “너 같은 어둠이… 이 세상을 더럽힐 수는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가녀린 음성보다 훨씬 또렷하고 강렬했다. 별 지팡이 끝에서 눈부신 빛의 구슬이 생성되었다. 그녀는 그 빛의 구슬을 변이체에게로 날렸다.

    콰아앙!

    빛의 구슬은 변이체의 거대한 몸에 정통으로 박혔고, 폭발과 함께 녀석의 비명소리가 편의점 안을 가득 채웠다. 녀석의 몸에서 썩어가는 살점들이 튀어 나갔고, 악취가 더욱 진해졌다. 변이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사납게 날뛰었다. 선반들을 부수고 벽을 때려 부쉈다.

    마법소녀는 숨을 고르며 다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변신은 그녀에게 힘을 주었지만, 동시에 무거운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온몸의 마력이 빠르게 소진되는 것을 느꼈다. 이 전투는 길어질수록 그녀에게 불리했다.

    “끝내야 해… 빨리!”

    그녀는 빛의 속도로 변이체에게 달려들었다.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검날이 녀석의 거대한 팔을 겨냥했다. 변이체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한 듯 몸을 틀었지만, 빛의 검날은 정확히 녀석의 팔을 꿰뚫었다.

    크아아아!

    변이체는 고통에 찬 포효를 지르며 마법소녀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녀를 덮쳤다. 마법소녀는 가까스로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녀석의 발톱 끝이 그녀의 순백 드레스 자락을 찢어 놓았다.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빛의 에너지를 모았다. 이제 마지막 일격을 날릴 시간이었다.

    “어둠을 꿰뚫는… 별의 섬광!”

    그녀의 지팡이 끝에서 황금빛 에너지가 회오리치며 모여들었다. 압축된 빛의 파동이 강력한 광선으로 변해 변이체를 향해 쏘아졌다. 광선은 어둠을 가르며 날아갔고, 녀석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키에에에엑!

    변이체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굳어버렸다. 녀석의 거대한 몸은 서서히 빛의 입자가 되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재와 악취뿐이었다.

    전투가 끝났다. 마법소녀는 지팡이를 짚은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몸을 감싸던 빛은 빠르게 사라지고, 그녀는 다시 낡은 옷을 입은 세라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극심한 피로가 그녀의 온몸을 덮쳤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투의 여파로 편의점 내부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녀가 처음 들어왔을 때 발견했던 작은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변이체가 부수지 못한 구석에 아직 남아있는 것들이었다.

    몸을 이끌고 상자로 다가갔다. 박스를 열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찌그러진 통조림 몇 개, 그리고 비닐봉지에 싸인 채 보존된 듯한 마른 과일 조각들. 그리고 가장 귀한 것, 작은 플라스틱 생수병 두 개.

    세라는 통조림 하나를 집어 들고 떨리는 손으로 따기 시작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얼마 만의 제대로 된 식량인가. 그녀는 한 모금 물을 마시고, 허겁지겁 통조림을 입에 넣었다. 짠맛과 비린 맛이 뒤섞였지만,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남은 식량과 물을 챙겨 배낭에 넣었다.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별조차 보이지 않는 먹구름이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이제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

    그녀는 편의점 한쪽 구석에 있는, 아직 천장이 무너지지 않은 작은 창고를 발견했다. 쓰러진 선반들을 밀어 문을 막고, 낡은 박스들을 끌어모아 작은 잠자리를 만들었다.

    배낭을 베개 삼아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오늘 밤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내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 언제까지 이렇게 싸워야 할까. 언제쯤 이 지옥 같은 생존이 끝날까.

    세라는 배낭 속에서 낡은 인형을 꺼내 품에 안았다. 때 묻고 낡았지만, 그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인형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버텨 줘, 세아.”

    그 순간, 창고 밖,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하나가 아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그것’들이 밤의 장막 아래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는 마치, 마법소녀의 빛이 이 도시의 어둠을 잠시나마 깨웠음을 조롱하는 듯 들렸다.

    세라는 인형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심장이 다시금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밤하늘을 수놓은 듯 멀리서 깜빡이는 붉은 안광들의 무리였다.

    새로운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 무협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에피소드 1: 붉은 실, 푸른 칼날

    **장면 1: 깊은 산, 푸른 밤의 조우**

    **배경:** 짙은 안개가 자욱한 깊은 산 속. 험준한 바위와 굵은 고목들이 엉켜 마치 살아있는 듯한 풍경을 이룬다. 달빛조차 뚫기 힘든 수풀 아래,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1컷:**
    (류진이 온몸에 검은 피를 흘리며 바위에 기대 쓰러져 있다. 그의 푸른색 도포는 찢어져 너덜거리고, 들고 있던 검 ‘청월(靑月)’은 옆에 박혀 빛을 잃었다. 그의 눈빛은 고통 속에서도 날카로운 경계를 잃지 않고 있다.)

    **류진 (내레이션):**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빌어먹을… 기어이 이 지경까지… 어둠의 기운이 이렇게 강할 줄이야…

    **2컷:**
    (류진의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늑대 발톱 자국. 깊게 패인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쉬지 않고 흘러나온다.)

    **류진 (내레이션):**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정파 무인의 명예가… 스승님의 가르침이…

    **3컷:**
    (류진의 곁에 쓰러져 있는 거대한 짐승의 시체. 검은 털과 붉은 눈을 가진 늑대 형상의 요수(妖獸)다. 그 요수의 목에는 류진의 검 ‘청월’이 깊숙이 박혀 있다.)

    **류진:** 쿨럭… (피를 토하며) 겨우… 한 놈을… 잡았건만… 남은 힘이…

    **4컷:**
    (어둠 속, 요수의 시체를 향해 느릿하게 다가오는 발걸음. 나뭇가지 밟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그림자 같은 움직임이다.)

    **류진:** (고개를 들려 애쓰며) 누구냐…!

    **5컷:**
    (짙은 안개와 그림자 속에서, 희미하게 한 여인의 형상이 드러난다. 온몸을 감싼 하얀 옷은 주변의 어둠과 대조되어 신비로운 기운을 발산한다. 그녀의 얼굴은 아직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

    **효과음:** 사르륵… (풀잎 스치는 소리)

    **6컷:**
    (여인의 시선이 쓰러진 류진에게 닿는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 마치 밤하늘의 별을 담은 듯 빛난다. 인간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투명하고 아득한 느낌을 준다.)

    **아린:** (아련하고 낮은 목소리로) 인간… 어찌하여 이 깊은 곳까지…

    **류진:**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힘이 없다) 너는… 요괴인가…! 이 사악한 기운의… 주인인가…!

    **7컷:**
    (여인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맑고 깨끗한 이마, 오뚝한 콧날, 옅은 붉은 기가 감도는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 보는 이를 홀릴 듯한 깊은 눈동자.)

    **아린:** (고개를 살짝 젓는다) 나는… 그저… 이 산의 일부일 뿐… 그대에게 해를 끼칠 마음은 없다.

    **8컷:**
    (여인이 류진에게 한 발짝 다가선다. 류진은 본능적으로 검을 잡으려 하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류진:** (경계하며) 다가오지 마라… 정파의 무인 류진이다… 요사스러운 술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9컷:**
    (여인은 류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손을 내민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색의 영롱한 빛이 피어오른다. 그 빛은 부드럽게 류진의 상처를 감싼다.)

    **효과음:** 스스스… (치유의 빛이 퍼지는 소리)

    **10컷:**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검붉은 피가 멎고,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류진의 얼굴에 미묘한 안도감이 스쳐 지나간다. 그의 눈은 놀라움과 혼란으로 가득하다.)

    **류진:** 이… 이것은… 대체…

    **아린:** (나직하게 읊조리듯) 그대의 기운이… 소멸될까 하여… 그리되면… 이 산도 슬퍼할 테니…

    **11컷:**
    (류진은 그녀의 손길이 닿은 상처에서 따뜻하고 편안한 기운이 퍼지는 것을 느낀다. 요사스러운 기운과는 전혀 다른, 순수하고 생명력 넘치는 기운이다.)

    **류진 (내레이션):** 요괴라기엔… 너무도… 따스하다. 이 산의 일부라니… 그렇다면… 설마…

    **장면 2: 고요한 동굴, 인간과 이종(異種)의 대화**

    **배경:** 산 중턱에 위치한 깊고 아늑한 동굴. 안에서는 신비로운 약초들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바깥의 차가운 밤공기와 대조되는 온기가 흐른다. 동굴 한쪽에는 작은 물웅덩이가 있어 맑은 물소리가 들린다.

    **1컷:**
    (류진이 동굴 안의 부드러운 풀잎 위에 누워있다. 그의 상처는 거의 아물어 검은 피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얼굴에는 편안함이 감돈다. 아린은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류진을 지켜보고 있다.)

    **류진:** (눈을 뜨며) …아침이… 왔나…

    **2컷:**
    (류진이 몸을 일으키자, 아린이 놀란 듯 살짝 뒷걸음질 친다.)

    **아린:** 몸은… 괜찮은가?

    **류진:** (자신의 몸을 살피며) 상처가… 모두 아물었다니… 믿을 수 없군. 보통의 치유술과는 차원이 달라… (아린을 똑바로 보며) 대체… 그대는 누구시오?

    **3컷:**
    (아린은 고개를 숙이며 잠시 망설이는 듯 보인다. 그녀의 하얀 옷자락이 신비롭게 일렁인다.)

    **아린:** (조용한 목소리로) 나의 이름은… 아린. 이 산의… 정령(精靈)이라 불리기도 하고… 가끔은… 구미호라 불리기도 한다.

    **4컷:**
    (류진의 눈이 크게 뜨인다. 구미호… 그 이름에 담긴 요사스러운 소문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눈앞의 그녀는 너무나 순수하다.)

    **류진:** 구미호… (혼란스러운 표정)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나를 구한 게냐? 정파의 무인인 나를?

    **5컷:**
    (아린이 조용히 류진을 올려다본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오랜 세월을 담고 있는 듯 깊고 슬프다.)

    **아린:** 그대의 기운은… 이 산의 생명과 이어진 듯 맑았다. 사악한 요수들에게 물들어가는 것을… 이 산이 슬퍼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6컷:**
    (류진은 그녀의 말에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요괴라 여겨지는 존재가 자신을 살렸고, 그 이유는 자신의 기운이 맑다는 이유 때문이라니.)

    **류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맑은 기운이라니… 정파의 무인으로서 당연한 것을. 허나… 내게는 그대가 더 맑아 보이는군.

    **7컷:**
    (아린의 얼굴에 희미한 홍조가 스친다. 인간의 칭찬에 익숙지 않은 듯 순수한 반응이다.)

    **아린:** 맑다니… 무엇인가? 나는 그저… 이 산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대로 살 뿐인데…

    **8컷:**
    (류진은 아린의 순수함에 점차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낀다. 무림에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너무나 다른, 오염되지 않은 영혼.)

    **류진:** (풀잎에 기대어 앉으며) 인간 세상은 복잡하오. 명예와 욕망, 권력 다툼으로 가득하지. 나는 그런 곳에서 평생 무예를 닦고, 불의를 척결하며 살아왔소.

    **9컷:**
    (아린은 류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그녀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아린:** (고개를 갸웃하며) 불의… 척결? 그것은… 무엇인가? 요수들이 산의 평화를 깨는 것과 같은 것인가?

    **10컷:**
    (류진은 그녀의 순수한 질문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오랜만에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류진:** (미소 지으며) 비슷하면서도 다르오. 인간의 불의는 때로 요수보다 더 교활하고 잔인하지.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우리 정파 무인의 소명이라오.

    **11컷:**
    (아린은 류진의 미소를 보며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녀의 시선은 류진의 입가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아린 (내레이션):** (속삭이듯) 인간의 웃음은… 이리도… 따스한 것인가… 산에서 피어나는 꽃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구나…

    **장면 3: 엇갈린 운명, 붉은 실의 예감**

    **배경:** 동굴 밖, 아침 햇살이 비추는 숲속 풍경. 안개가 걷히고 나무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푸른 하늘과 대비되는 류진의 푸른 도포.

    **1컷:**
    (류진이 동굴 밖으로 나서며 스트레칭을 한다.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고, 그의 눈빛에는 다시금 무인의 기개가 돌아왔다.)

    **류진:**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이만 가봐야겠소. 그동안 신세를 많이 졌군. 은혜는 잊지 않겠소.

    **2컷:**
    (아린은 동굴 입구에 서서 류진을 바라본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쉬움과 함께 알 수 없는 슬픔이 드리워져 있다.)

    **아린:** (작은 목소리로) 그리 빨리… 가는 것인가?

    **3컷:**
    (류진은 아린의 표정에서 아쉬움을 읽는다. 그 또한 그녀와의 짧은 만남이 아쉽게 느껴진다.)

    **류진:** (살짝 미소 지으며) 나도 더 머물고 싶지만… 나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소.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대 덕분에 살았으니,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살아야 하오.

    **4컷:**
    (아린이 천천히 류진에게 다가선다. 그녀의 눈빛은 류진의 심장을 꿰뚫는 듯 강렬하다.)

    **아린:** 그대의 길은… 험난할 것이다. 우리 같은 존재를 탐하는 자들이… 인간 세상에도 많으니…

    **5컷:**
    (류진은 그녀의 경고에 의아함을 느낀다. 자신을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에 묘한 감정이 인다.)

    **류진:** (담담하게) 나는 무인이오. 어떤 시련도 피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허리에 찬 검 ‘청월’을 가리키며) 이 청월이 닿는 곳이라면… 그 어떤 사악함도 베어낼 수 있소.

    **6컷:**
    (아린의 시선이 류진의 검으로 향한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푸른색과 함께 붉은색 섬광이 스쳐 지나간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류진은 그녀의 눈빛에서 인간을 넘어선 무언가를 직감한다.)

    **아린:** (류진의 손을 잡으려다 멈칫하며) 조심하라… 그대의 칼날이… 때로는 자신을 베게 될 수도 있으니…

    **7컷:**
    (류진은 그녀의 말에 담긴 깊은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진심 어린 걱정이 마음속 깊이 파고든다.)

    **류진:** (아린의 눈을 깊이 바라보며) 그대는… 마치 내 미래를 보는 듯 말하는군.

    **8컷:**
    (아린은 류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그 미소는 슬픔을 머금은 듯하다.)

    **아린:** (조용히 읊조린다)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이… 우리를 잇고 있는 듯하니…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는… 부디… 칼날 대신…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기를…

    **9컷:**
    (아린의 말에 류진은 알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을 느낀다. 붉은 실… 금지된 인연의 예감.)

    **류진:** (류진의 손이 무심코 아린의 손에 닿으려 한다. 그러나 아린은 그 순간 뒷걸음질 친다.)

    **아린:** (고개를 숙이며) 이만… 가시오. 더 이상 머무르면…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좋지 않으니…

    **10컷:**
    (류진은 아린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아쉬움과 혼란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의 간절함에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류진:** (돌아서며) 다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는… 그대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시오.

    **11컷:**
    (류진이 발걸음을 옮긴다. 그의 푸른 도포가 바람에 휘날린다. 아린은 류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이슬이 맺힌다.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희미하게 아홉 개의 꼬리가 스쳐 지나가는 듯 보인다.)

    **아린 (내레이션):** (속으로) 그때는… 어쩌면…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도… 나의 푸른 칼날이… 그대를 향하지 않기를…

    **12컷:**
    (류진의 뒷모습이 숲 속으로 사라진다. 아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허공을 응시한다. 그녀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슬픔과 함께, 류진과의 재회를 기다리는 듯한 희미한 희망이 서려 있다.)

    **류진 (내레이션):** (점점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 속에서) 붉은 실… 푸른 칼날… 대체…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에피소드 1. 끝**

  • 스팀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부유하는 폐허, 첫 번째 톱니바퀴

    세상은 숨을 멎었다. 적어도 아인이 기억하는 한, 늘 그랬다. 대지가 갈라지고 하늘이 비틀린 대재앙 이후, 푸른색이란 찾아볼 수 없는 잿빛 하늘 아래에서, 인류는 기계의 심장에 매달려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삐걱이는 톱니바퀴와 쉭쉭거리는 증기 소리가 도시의 유일한 활력이자, 동시에 생존을 위협하는 굉음이었다.

    “젠장, 또야.”

    아인은 마른 기침을 토하며 마스크 안의 공기 필터를 거칠게 두드렸다. 벌써 세 번째다. 폐허가 된 메트로폴리스의 서부 구역, 공중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철골 가교 위를 걷고 있던 그녀의 산소 마스크가 또다시 경고음을 울렸다. ‘에테르 재’라 불리는 잿빛 미립자들이 호흡기를 막는 건 일상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심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가시거리도 부옇게 변해, 한때 도시의 웅장함을 자랑했을 마천루들은 형태조차 알아보기 힘든 거대한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아인은 허리춤의 공구 주머니에서 소형 에어 브러시를 꺼내 필터 그릴에 쏘았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미세한 잿가루가 흩날렸다. 잠시 숨통이 트이는가 싶었지만, 경고음은 여전히 불안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녀의 증기 구동식 방독면이 완벽히 고장 나기 전에, 반드시 ‘에테르 응축기’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녀의 유일한 생존 보금자리인 지하 은신처의 공기 정화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핵심 부품인 응축기가 필요했다.

    고글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기묘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건물 사이를 잇는 부유 가교 역할을 하거나, 스스로 움직이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조립하고 해체하는 듯 보였다. 에테르 재앙 이후, 이 도시의 많은 기계들은 주인을 잃고도 제멋대로 돌아가며, 때로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위협으로 변모했다. 아인은 그 사이를 쥐처럼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낡고 녹슨 철골 구조물은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거렸고, 아래는 아득한 나락처럼 느껴졌다. 간혹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굉음을 내며 회전하는 모습도 보였다.

    “목표 지점까지, 약 50미터.”

    손목의 소형 기압계와 나침반을 확인하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어제 밤, 폐기된 정보 단말기에서 간신히 복원해낸 자료에 따르면, 이 폐허 구역 깊숙한 곳에 버려진 옛 ‘에테르 연구소’가 있었다. 그곳이라면 희귀한 부품인 응축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토록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는 생존자는 거의 없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발아래 금속판이 삐걱이며 균형을 잃을 뻔했다. 아인은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난간을 움켜쥐었다. 금속 장갑을 낀 손가락이 차가운 쇠붙이를 쓸었다. 난간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아찔했다. 거대한 증기 배관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그 사이로 자취를 알 수 없는 유독 가스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쉬이이익- 쿵!

    거대한 쇳덩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동은 가교 전체를 울렸고, 아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고글 너머로 주위를 살폈다. 부옇던 시야 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자가 포착되었다. 녹슨 강철 팔다리를 가진 짐승 같은 실루엣.

    “젠장, 고철 거미…!”

    고철 거미. 에테르 재앙 이후 오작동하며 생명체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폐기된 산업용 로봇이었다. 주로 지하 시설에서 활동했지만, 가끔 이렇게 지상으로 올라와 폐허를 배회하기도 했다. 그들은 한때 건설 현장에서 무거운 자재를 나르던 로봇이었으나, 지금은 날카로운 갈고리와 드릴을 이용해 무엇이든 부수는 파괴자가 되어 있었다.

    끼이이잉-!

    금속성 비명과 함께 거대한 고철 거미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섯 개의 다리가 톱니바퀴처럼 불규칙하게 움직이며 가교 위로 기어 올라왔다. 붉은 빛을 내는 광학 센서가 아인을 향해 번뜩였다. 그들의 동작은 비록 녹슬었지만,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다리 중 하나는 압력 실린더가 터져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일찍 만날 줄이야!”

    아인은 등 뒤에 맨 배낭에서 ‘압력 분사기’를 꺼냈다. 손잡이를 비틀자 작은 증기 엔진이 굉음을 내며 가열되기 시작했다. 이 소형 분사기는 고압의 증기를 발사하여 적을 잠시 무력화시키거나, 약한 금속을 녹일 수 있었다. 그녀의 유일한 무기였다.

    고철 거미는 거대한 몸체를 앞세워 돌진했다. 다리 하나가 마치 창처럼 휘둘러졌다. 아인은 아슬아슬하게 몸을 옆으로 피했다. 콰앙!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있던 철판이 깊게 찌그러졌다.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거미의 움직임은 느리고 예측 가능했다. 과거 이 로봇을 해체하고 조립했던 경험이 그녀의 직감을 날카롭게 했다.

    ‘약점은… 압력 실린더 아니면 구동 축이야!’

    아인은 분사기를 고철 거미의 녹슨 관절을 향해 겨눴다. 쉬이이익-!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갔다. 거미의 다리 관절 부분이 녹아내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뒤로 움찔거렸다. 하지만 완전히 무력화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거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동시에 두 다리를 휘두르며 그녀를 가교 밖으로 밀어내려 했다.

    “크윽!”

    아인은 급히 몸을 숙여 공격을 피하고, 그대로 거미의 아래로 파고들었다. 육중한 기계의 몸체 아래로 들어서자, 기름때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과열된 금속 냄새가 뒤섞여 그녀의 폐를 짓눌렀다. 이곳이라면 거미의 광학 센서가 그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인은 배낭에서 작은 ‘태엽식 충격 망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이 망치는 태엽의 힘을 이용해 강력한 충격을 전달하는 휴대용 공구였다. 그녀는 거미의 가장 취약한 부위, 즉 압력 실린더가 연결된 구동 축의 이음새를 발견했다.

    탕! 탕! 탕!

    망치를 내리찍을 때마다 금속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거미는 몸을 격렬하게 흔들며 아인을 털어내려 했다. 가교가 심하게 흔들리고, 발아래 금속판들이 뒤틀렸다. 아인은 온몸의 힘을 다해 망치를 휘둘렀다. 몇 번의 공격 끝에, 구동 축의 이음새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거대한 톱니바퀴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끼이이이이익- 쿠구궁!

    고철 거미는 비명을 지르며 한쪽 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균형을 잃은 거미는 결국 가교 위에서 비틀거리다 아래로 추락했다. 굉음과 함께 잿빛 연기가 아득한 아래쪽에서 피어올랐다.

    아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망치를 떨어뜨렸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다시 전방을 향해 걸었다. 폐허 깊숙한 곳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이제는 약간의 긴장감마저 섞여 있었다. 살아남았다. 또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눈앞에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녹슬었지만, 여전히 육중한 위용을 자랑하는 문이었다. 문 위에는 닳아버린 글씨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E.R.L. 001’. 에테르 연구소 001.

    “드디어….”

    아인은 문에 바싹 다가갔다. 희미한 냄새가 났다. 금속 특유의 냄새와 함께, 아주 오래된 전자 회로에서 나는 듯한 미약한 에테르의 기운. 문은 잠겨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이미 낡은 잠금장치의 구조가 그려졌다. 공구 주머니에서 소형 만능 렌치를 꺼내며,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아인의 발아래 금속판에서 섬뜩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폐허 너머의 잿빛 하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구름을 뚫고 나타난 그것은, 온몸에 녹슨 강철과 증기 기관을 달고 있는, 하늘을 나는 거대한 ‘요새’였다. 그것의 육중한 선체에서는 희미하게 붉은빛이 깜빡였다.

    아인의 마스크 안에서, 공기 필터 경고음이 더욱 격렬하게 울렸다.
    마치 거대한 공중 요새가,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은 한 조각의 깨끗한 공기마저 탐내듯.
    그녀의 눈동자에 불안과 함께, 새로운 미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더 깊은 폐허 속으로, 그녀는 과연 무엇을 마주하게 될 것인가.

  • 추리 미스터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잿빛 하늘은 여전히 찌푸린 얼굴이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쏟아낼 듯했지만, 아무것도 내리지 않았다. 재하는 낡은 건물 잔해 위를 조심스럽게 기어 올라갔다. 발아래 부스러지는 콘크리트 조각들이 위태로운 소리를 냈다. 뒤따르던 유리가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이쪽은 아닌 것 같아, 재하 오빠. 너무 위험해.”

    유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가늘게 떨렸다. 며칠 전 겪었던 일 때문이리라.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봤고,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재하는 뒤돌아보지 않고 낮게 말했다.

    “다른 길은 없어. 저 아래 놈들이 계속 쫓아오고 있어. 여기가 마지막이야.”

    그의 시선은 저 멀리, 폐허가 된 도시의 심장부를 향했다. 검은 흉터처럼 늘어선 고층 건물들 사이로, 유일하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거대한 돔형 구조물이 보였다.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인류 최후의 보루이자 미지의 장소, ‘안전 구역’. 하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지옥보다 더 끔찍했다.

    간신히 건물 옥상에 도달하자, 사방에서 불어오는 매캐한 바람이 폐부를 찔렀다. 재하는 주변을 살폈다. 낡은 창고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절반은 무너져 내렸지만, 지붕 일부는 간신히 남아 있었다.

    “저기. 저 안으로 들어가자.”

    유리가 주저하며 말했다. “저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차라리 이쪽으로 돌아가는 게….”

    “돌아갈 곳은 없어. 놈들은 우리가 가진 마지막 식량을 노리고 있어. 여기 아니면 끝장이야.”

    재하는 대답 대신 굳게 다문 입술로 창고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유리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이제 알았다. 이 지독한 세상에서 재하의 판단은 때로는 자신의 생존 본능보다 더 정확하다는 것을.

    창고 내부는 예상보다 넓고 어두웠다. 눅눅한 공기가 코를 찔렀고,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역겨움을 유발했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줄기 사이로 거미줄과 정체 모를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한때 무엇인가를 보관했던 선반들은 텅 비어 있거나, 녹슨 철골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 쓸 만한 건 전부 털어갔어.” 유리가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재하는 대답 없이 손전등을 켜 주위를 비췄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흩어진 낡은 상자 조각들과 벽면에 희미하게 남은 낙서들을 훑었다. 이곳은 단순한 창고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낯설면서도 기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떠난 듯, 모든 것이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때, 재하의 손전등 불빛이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장치에 닿았다.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지만, 언뜻 보기에도 복잡한 회로와 여러 개의 단자들이 박혀 있었다.

    “이건… 발전기인가?” 유리가 신기한 듯 다가갔다.

    재하는 장치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흙먼지 아래로 희미하게 빛나는 케이블들이 벽을 타고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케이블이 향하는 곳은, 창고 한쪽에 자리한 굳게 닫힌 강철 문이었다.

    “강철 문… 이건 예사롭지 않은데.” 재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전기에 손을 댔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감촉. 놀랍게도 먼지 아래로 보이는 제어판에는 전원 공급을 나타내는 작은 녹색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전력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이게 아직 작동하고 있다고?” 유리가 놀라 되물었다. “대체 누가… 언제부터?”

    재하는 아무 말 없이 강철 문으로 향했다. 손전등 빛이 문에 새겨진 마크를 비췄다. 낯선 문양이었다. 복잡하게 얽힌 나선형 무늬 안에, 중앙에는 삼각형이 박혀 있었다. 문 옆에는 낡은 키패드가 붙어 있었지만, 숫자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워져 있었다.

    “누군가 이걸 쓰고 있었어. 최근까지.” 재하는 문고리를 잡고 살짝 돌려보았다. 잠겨 있었다.

    유리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폐허가 된 이 세상에서, 인적이 끊긴 창고 안에 살아있는 발전기와 잠긴 강철 문이라니.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불길한 장면이었다.

    “오빠, 그냥 가지 않으면 안 될까? 여기 뭔가… 기분 나빠.”

    “기다려봐.” 재하는 발전기 쪽으로 돌아가서 제어판을 만졌다. 노련하게 몇 개의 버튼을 누르자, 발전기에서 낮고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 후, 강철 문 근처의 키패드에 붉은색 불빛이 들어왔다.

    “이런 오래된 기계를 아직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재하는 중얼거렸다.

    그는 키패드를 다시 한번 살폈다. 지워진 숫자들 사이에서, 특이하게 마모된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정 숫자 버튼만 반복적으로 눌린 흔적이었다. 재하는 기억을 더듬었다. 예전 도시의 보안 시스템에서 자주 쓰이던 방식이었다. 그는 마모가 심한 버튼들을 조합해 비밀번호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시도. 실패.
    두 번째 시도. 실패.
    세 번째 시도. 삑-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붉은 불빛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굳게 닫혔던 강철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스르륵 열렸다.

    문 안쪽은 또 다른 어둠이었다. 재하는 손전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유리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안은 생각보다 협소했다. 작은 복도가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는 또 다른 문이 보였다. 그 문을 열자, 마치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공간이 나타났다.

    컴퓨터 단말기와 모니터들이 놓인 작업 공간이었다. 먼지는 쌓여 있었지만, 모든 장비가 놀랍도록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한쪽 벽에는 세계 지도가 걸려 있었는데, 오래되어 색이 바래긴 했어도 여러 군데에 알 수 없는 표시들이 되어 있었다. 특히 ‘안전 구역’이라고 표시된 큰 원 주변에 작게 그려진 또 다른 상징이 재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삼각형과 나선형 무늬가 결합된, 문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기원지’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유리가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재하는 가장 큰 모니터가 놓인 단말기로 다가갔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잠시 깜빡이더니 이내 흐릿한 글자들이 나타났다. 오래된 운영체제였지만,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그는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스크린에 갑자기 알 수 없는 문자열이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외부에서 접근하려 시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거… 해킹당하는 건가?” 유리가 불안하게 물었다.

    “아니… 아니야.” 재하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건… 누군가 시스템에 접속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누군가 *안에서* 이걸 조작하고 있었어. 아니, 조작 *당하고* 있었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면에 새로운 창이 떴다. 암호로 잠겨 있는 데이터 파일 목록이었다. 그 중 가장 상단에 있는 파일의 이름은 ‘프로젝트_블랙_썬.log’였다.

    “블랙 선…?” 유리가 파일 이름을 읽었다.

    재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파일을 클릭했다. 비밀번호 입력 창이 떴지만, 재하는 망설이지 않고 아까 문을 열었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경고음과 함께 파일이 열렸다. 화면 가득히 알 수 없는 좌표와 보고서들이 빼곡히 채워졌다. 내용은 난해했지만, 마지막 부분에 날짜가 찍힌 짧은 메시지가 재하의 눈에 들어왔다.

    `…결과 예측 실패. 통제 불능. 모두에게 알린다. 기원지는… 안전 구역은… 그들은…`

    메시지는 거기서 끊겨 있었다. 미처 완성되지 못한 문장들이 혼란스럽게 이어졌다. 마지막 문장이 끝나지 않은 채로, 화면은 검게 변했다.

    “이게 뭐야? 대체 무슨 소리야?” 유리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였다.
    쿵. 쿵.
    아주 희미하게,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둔탁한 진동이 발아래로 전해졌다.

    재하는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그는 직감했다. 이건 단순한 폐허의 소음이 아니었다.

    쿵… 쿵…!
    진동이 훨씬 더 가까워졌다. 작업실 안의 낡은 의자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먼지가 천장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재하 오빠, 무슨 소리야?” 유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조용히 해….” 재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 소리는… 크고, 무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있는* 소리였다.

    쿵!! 쿵!! 쿵!!
    이제는 건물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강력한 진동이었다. 바로 옆방에서 들려오는 듯한 굉음에, 재하는 모니터에 연결된 낡은 USB 메모리 스틱을 거칠게 뽑아들었다. 지도를 찍은 사진과 함께 저장된 파일을 옮겨 담을 시간은 없었다.

    “뛰어, 유리! 빨리!”

    재하는 유리의 손목을 잡고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강철 문을 통과하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눅눅한 창고 안으로 나왔다.

    쿵!!!
    창고 바깥쪽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충격음. 창고 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쪽이야!” 재하는 무너진 창고 벽의 틈새로 몸을 던졌다. 유리가 비명처럼 재하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따랐다.

    그들이 폐허 바깥으로 겨우 몸을 빼냈을 때, 뒤에서는 거대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귀를 찢는 듯한 소리였다. 재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유리의 손을 더욱 꽉 잡고, 무너지는 잔해들과 먼지 구름 속을 뚫고 달렸다.

    그들은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겨우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바위 틈새에 몸을 숨겼을 때, 재하는 비로소 숨을 몰아쉬며 손에 쥔 USB를 내려다봤다.

    낡은 USB는 희미한 파란 불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가 급히 빼내느라 파일이 온전히 저장되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마지막 메시지, 그리고 지도에 찍힌 ‘기원지’라는 글자가 계속 맴돌았다.

    소문에 불과했던 ‘안전 구역’은 어쩌면 거대한 함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원지’는… 도대체 무엇의 시작점이라는 말인가?

    그때, 저 멀리 폐허 속에서 다시 한번 끔찍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재하는 눈을 감았다.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알 수 없는 미스터리의 끝은 어디일까?
    그리고 저 끔찍한 괴물들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