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심리 스릴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핏빛 그림자, 숨겨진 초대

    밤은 깊었다. 달조차 숨죽인 어둠 속에서, 류진은 홀로 차가운 바위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릴 뿐, 세상의 모든 소음은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오랫동안 그렇게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왔다. 무림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도, 끝없는 명예욕도, 모두 그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잔상일 뿐이었다.

    그날 이후, 류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잊혀진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강철 같았던 육체는 고단한 세월 속에 녹아내렸지만, 그의 내면은 오히려 더욱 단단하고 날카롭게 벼려졌다. 그러나 그 단단함조차, 지금 그의 심장을 잠식하는 낯선 통증 앞에서는 속절없이 흔들렸다.

    순간, 뼈마디를 관통하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오른손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참기 힘든 통증에 류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아무것도 없던 그의 손바닥 중앙에서, 핏빛 섬광이 번뜩이더니 서서히 기이한 문양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피처럼 붉은색과 심연처럼 검은색이 뒤섞인 문양. 마치 눈동자 같기도 하고, 혹은 수천 개의 칼날이 모여 이루어진 형상 같기도 했다.

    그 문양이 완성되자마자, 류진의 뇌리에 차갑고도 강렬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때가 되었다.*
    *…세상의 운명을 가를 자들이여, 모여라.*
    *…적막의 전당이 너희를 기다린다.*

    그것은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 그의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음성이었지만, 동시에 마치 수만 명이 속삭이는 듯한 기이한 중첩이 있었다. 류진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이 문양, 이 목소리… 설마, 그 전설이 사실이란 말인가.

    ‘천명무회(天命武會).’

    오래된 고서에만 기록되어 전해 내려오던, 무림의 존망을 결정하는 최후의 결전. 천 년에 한 번, 세상의 균형이 무너질 위기에 처할 때마다 소환되는 운명의 무대.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자신의 손바닥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류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은둔 생활로 잊고 지냈던 불안과 분노, 그리고 지독한 회한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이미 한 번, 무림의 혼란 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 다시는 그 핏빛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함정이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드리운 그림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가 한 발짝 물러서려는 순간, 그의 손바닥에 새겨진 문양에서 다시 끔찍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뇌리에 압도적인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찢겨나가는 하늘, 무너지는 대지, 피로 물드는 강물…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절규하는 수많은 얼굴들. 그 속에는 잊고 지냈던, 그러나 단 한순간도 잊을 수 없었던, 그의 얼굴도 있었다.

    그것은 경고이자,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류진은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쳐야만 했다.

    눈을 감았다 뜨자, 류진은 더 이상 익숙한 산속 계곡에 서 있지 않았다. 거대한 암석과 기둥으로 이루어진 공간. 압도적인 높이의 천장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사방을 둘러싼 벽면에는 정교하면서도 불길한 문양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묵은 피 냄새와 쇠 비린내가 섞여 알 수 없는 긴장감을 자아냈다. 이곳이 바로 ‘적막의 전당’이었다. 이름 그대로, 모든 소리가 먹혀드는 듯한 기분 나쁜 침묵이 지배하는 공간.

    류진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이미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곳에 소환된 다른 존재들이 있었다. 모두 열 명.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거대한 체구에 얼굴 전체를 감싼 검은 천을 두른 사내가 굳건히 서 있었다. 그의 등 뒤에서는 섬뜩할 정도로 예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다른 한쪽에는 검은 도포를 입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백옥처럼 하얗고 아름다웠으나, 그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고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손에 들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기이한 형태의 채찍이었다.

    어떤 이는 기괴한 가면을 쓰고 있었고, 어떤 이는 온몸에서 악취를 풍기는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 어떤 이는 마치 허공에 떠 있는 유령처럼 희미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월과 힘을 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단순한 무림인들이 아님을 류진에게 각인시켰다. 그들은 모두, 각기 다른 세계에서 정점에 도달한 이들이거나, 혹은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 존재들이었다.

    이들 중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날카로운 기 싸움이 오가고 있었고, 류진은 그들의 눈빛 속에서 섬뜩한 광기, 혹은 지독한 절망을 읽어냈다. 이들은 모두 자신처럼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소환된 것일까? 아니면 각자의 야망을 품고 온 것일까? 이 천명무회가 진정 세상의 운명을 건 싸움이라면, 그 결말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때, 침묵을 깨고 천천히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당의 가장 안쪽, 어둠이 가장 깊게 드리운 곳에서 한 형체가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동시에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의 걸음마다 바닥의 문양들이 희미하게 빛났고, 그가 내뿜는 아우라는 모든 참석자들의 기운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큼 거대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희미한 빛의 잔상만이 그의 실루엣을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 모였군.”

    그의 목소리는 파도처럼 전당 전체를 울렸다. 낮은 저음이었으나, 동시에 수천 명의 합창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울림이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류진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저것은 인간이 아니다. 혹은, 인간이었던 존재가 아닐 것이다.

    “나는 천명무회의 관리자이자, 너희의 운명을 관장할 자다.”

    빛의 형상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의 모습은 점차 뚜렷해지는 듯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형체였다. 다만, 그의 심장 부근에서 핏빛 문양이 흐릿하게 빛나고 있었다. 류진의 손바닥에 새겨진 그 문양과 똑같은 것이었다.

    “이곳에 소환된 자들이여, 너희는 세상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선택된 존재들이다. 허나, 그 과정은 너희가 겪어보지 못한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 될 것이다.”

    관리자의 목소리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큰 위압감을 주었다.

    “너희 중 오직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아 천명(天命)을 얻을 것이다. 그 천명이란, 곧 이 세상의 새로운 질서를 세울 권능이다.”

    류진의 심장이 요동쳤다. 단 한 명만이 살아남는다고? 결국 이곳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싸움터가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천명무회의 목적은 단 하나. 가장 강한 의지와 가장 순수한 힘을 가진 자를 가려내는 것이다. 너희의 육체는 물론, 정신과 영혼까지 철저하게 시험받을 것이다. 진정한 강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너희가 스스로 찾아내야 할 답이다.”

    관리자의 시선이 류진에게 잠시 머무는 듯했다. 류진은 그 짧은 순간, 자신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섬뜩한 감각을 느꼈다. 그의 오랜 후회와 숨겨진 상처들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첫 번째 시련을 시작한다. 너희의 눈에 보이는 것은 진실이 아닐 수 있으며, 너희의 귀에 들리는 것은 거짓일 수 있다. 너희는 너희 자신조차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빛의 형상이 손을 들자, 전당을 둘러싼 거대한 암석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거대한 벽들이 갈라지며, 그 안쪽에서 새로운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의 끝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마치 망자의 세계로 향하는 입구처럼 보였다.

    “각자 눈앞에 펼쳐질 길을 따라가라. 그곳에서 너희는 너희 내면의 그림자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관리자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류진의 손바닥에 새겨진 문양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발밑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주변의 다른 참석자들 또한 각자의 빛에 휩싸여 천천히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빛이 사라지기 직전, 류진은 빛의 형상인 관리자가 아주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것을 보았다. 그 미소는 어떤 자비도, 어떤 연민도 담고 있지 않았다. 오직, 깊이를 알 수 없는 광기와 조롱만이 서려 있는, 절대자의 미소였다.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류진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뇌리에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

    ‘이것은 단순한 무술 대회가 아니다. 영혼을 잠식하는, 지독한 심리전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의 핏빛 문양이 더욱 강렬하게 맥동하는 것을 느꼈다. 알 수 없는 위협과 존재의 근원을 흔드는 공포가 그를 휘감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시련은,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성문학원(聖紋學園). 이 거대한 이름 석 자가 가진 무게는 일반적인 명문대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도시의 중심에 우뚝 솟은 고풍스러운 첨탑과 현대적인 유리 건물들이 조화를 이룬 캠퍼스는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자, 마법 세계의 심장이었다. 재능 있는 마법사들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이 곳에서, 은정은 조금 이질적인 존재였다. 뛰어난 마법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규율보다는 직감을 따르는 그녀의 고집은 종종 문제의 씨앗이 되곤 했다.

    “은정아, 또 사고 쳤냐? 이번엔 뭘 그렇게 비틀었기에 한 교수님 호출까지 받으셨어?”

    늦은 밤, 오래된 서고의 먼지 쌓인 책장 사이를 걸으며 친구 수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은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금지된 공간에 발을 좀 들였을 뿐이지.”

    이번에도 호기심이 문제였다. 폐쇄된 탑의 꼭대기에 걸려 있던 ‘접근 금지’ 팻말이, 오히려 그녀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표지판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오래된 마법 문양을 무심코 건드린 것이 화근이었다. 덕분에 학원의 금기를 건드렸다는 명목으로, 그녀는 한 교수님의 특별 감시 하에 학원 지하의 고문서 보관실을 정리하는 벌칙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금지된 공간이 어디 한두 군데여야 말이지. 그래도 한 교수님께서 직접 감시하시는 건 꽤나 무거운 벌칙이야.” 수현은 한숨을 쉬었다.

    한 교수는 성문학원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엄격하고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태도, 그리고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마법 실력. 학원 내에서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런 그가 직접 내린 벌칙이라니, 은정의 이번 ‘사고’는 꽤나 심각했던 모양이었다.

    “너무 걱정 마. 그냥 낡은 고서들 먼지나 털면 되는 걸.” 은정은 덤덤하게 대꾸하며 수레에 실린 낡은 램프를 들었다. “너도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 나는 이거나 마저 할 테니.”

    수현이 못마땅한 얼굴로 돌아선 후, 은정은 어둠 속에 홀로 남았다. 고문서 보관실은 학원 지하에서도 가장 깊고 오래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고, 곰팡이와 낡은 종이 냄새가 섞인 퀴퀴한 향이 코를 찔렀다. 램프의 희미한 불빛이 닿는 곳마다, 겹겹이 쌓인 고문서들이 그들의 비밀을 품고 잠들어 있는 듯했다.

    책들을 정리하며 벽 안쪽으로 밀려난 책장들을 살피던 은정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곳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미세한 진동과 함께 서늘한 기운이 손끝을 스쳤다. 마치 오래된 지하 묘지에서나 느낄 법한, 묵직하고 가라앉은 마력의 흐름이었다. 그녀는 평소 발휘되던 학원의 방어 마법진과는 확연히 다른, 훨씬 더 고대의, 그리고 더 어두운 기운임을 직감했다.

    호기심은 은정의 타고난 마법이었다. 그녀는 손에 든 낡은 먼지떨이를 내려놓고, 벽을 따라 손을 훑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돌벽을 따라가던 손가락이 특정 지점에서 멈췄다. 미세한 틈새. 자세히 보니, 희미하게 빛나는 마법 문양이 벽에 새겨져 있었다. 일반적인 학원 마법진과는 다른,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양.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띠며 희미하게 반짝였다.

    은정은 숨을 죽였다. 그녀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이곳이다. 너가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곳에 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한 교수의 감시 마법도 느껴지지 않았다. 벌칙으로 받은 ‘자유’가 오히려 그녀에게는 새로운 탐험의 기회를 준 셈이었다. 은정은 망설임 없이 문양에 손을 댔다. 차가운 돌벽에서 미약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 그녀는 학원에서 배운 고대 마법 문양 해석술을 떠올리며, 문양의 의미를 더듬었다. ‘심연’, ‘속박’, ‘생명’, ‘환영’…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손끝에 집중하자, 문양이 더 강렬하게 빛났다. 그리고 이내, 벽 한 부분이 안쪽으로 스르륵 밀려들어 갔다. 삐걱거리는 둔탁한 소리가 지하의 정적을 갈랐다. 은정은 램프를 들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디뎠다.

    숨겨진 통로는 지하 깊숙이 뻗어 있었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졌고,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램프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축축한 바위 벽에 맺힌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벽에는 낡고 희미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고대의 성문학원 모습, 하늘을 나는 용들, 빛나는 마법진 속의 존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억압하는 듯한 거대한 사슬의 형상.

    점점 더 깊이 내려갈수록, 은정은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온몸의 마력이 미세하게 떨리는 듯했다. 마치 거대한 존재의 숨결 속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통로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지하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은 마치 거대한 동굴과도 같았다. 천장에는 수정처럼 빛나는 광물들이 박혀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고, 바닥에는 고대 마법진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마법진의 중앙에는, 거대한 수정 기둥들이 사슬처럼 얽혀 하나의 존재를 붙잡고 있었다.

    은정은 램프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였다. 형태는 모호했다. 어떤 때는 거대한 나무 같기도, 어떤 때는 반짝이는 별무리 같기도, 또 어떤 때는 인간의 형상을 닮은 듯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억압된 에너지의 파동 속에서 일그러져 있었다. 수많은 수정 사슬이 그 존재의 몸을 꿰뚫고 있었고, 그 사슬을 통해 존재의 마력이 끊임없이 지상의 마법진으로 빨려 올라가고 있었다.

    존재의 눈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슬픔을 넘어선 고통과 체념이었다. 억겁의 세월 동안 그곳에 갇혀, 자신의 모든 것을 학원에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학원의 강력한 방어 마법진, 학생들이 배우는 놀라운 마법들의 근원, 도시를 보호하는 강력한 장벽… 모든 것이 이 존재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은정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이 성문학원의 금기였다. 위대하고 찬란한 빛 아래 숨겨진, 가장 끔찍한 그림자.

    “찾아내셨군요.”

    정적을 깨고 들려온 목소리에 은정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통로 입구에 서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한 교수였다.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냉정했지만, 그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체념, 고뇌, 그리고 미세한 후회.

    “교수님… 이건… 대체….” 은정은 말문이 막혔다.

    한 교수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은정을 지나쳐, 마법진에 묶인 존재에게로 향했다.

    “이것이 성문학원의 진정한 심장입니다. 혹은… 희생양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깊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수천 년 전, 이 땅은 대재앙에 직면했습니다. 이 거대한 존재가 스스로를 희생하여 재앙을 막고, 이 도시와 학원을 만들 수 있는 힘을 주었죠. 그러나 그 희생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 존재가 고통받고, 그 힘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공급되어야만, 이 모든 균형이 유지됩니다.”

    “고통받아야 한다고요? 이건… 학대가 아니에요? 저 존재는… 살아있어요!” 은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눈앞의 광경은 그녀의 모든 가치관을 뒤흔들고 있었다. 정의롭고 위대하다고 믿었던 성문학원의 이면에, 이런 잔혹한 진실이 숨어있을 줄이야.

    “그래요. 살아있죠. 그리고 고통받고 있습니다.” 한 교수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 존재의 힘이 멈추는 순간, 이 도시를 감싸는 마법 보호막은 사라지고, 학원의 모든 마법진은 무너질 겁니다. 외부의 어둠이 밀려들어 올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겠죠. 우리 선배들은, 그리고 우리들은…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작은 희생을 감내하고 있는 겁니다.”

    “작은 희생이요? 저 존재의 고통이요? 이게 어떻게 작은 희생일 수 있어요!” 은정의 목소리가 울림 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어리고 반항적인 학생이 아니었다. 거대한 윤리적 딜레마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한 교수는 은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비밀을 아는 자는 극히 일부입니다. 성문학원의 역사를 지키고, 그 진실을 봉인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자들만이. 그들의 어깨에 이 거대한 무게가 얹혀 있었고, 이제 당신도 그 무게를 짊어지게 될 겁니다.”

    그의 말은 경고이자, 비극적인 숙명이었다.

    “당신은 이 비밀을 세상에 폭로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학원은 무너지고, 어쩌면 더 큰 혼란이 올 겁니다. 아니면… 침묵하고, 우리처럼 이 끔찍한 진실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겠죠.”

    지하 동굴의 정적이 다시 찾아왔다. 묶인 존재의 고통스러운 숨결 같은 마력의 파동만이 공간을 채웠다. 은정은 마법진에 묶인 존재와,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한 교수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심장은 천둥처럼 울렸다. 정의와 진실, 그리고 수많은 생명의 안전 사이에서,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차가운 지하 공기는 그녀의 뺨을 스쳤지만, 은정은 그보다 더 차가운 진실 앞에서 얼어붙은 듯했다. 성문학원의 빛나는 영광이, 이 심연 속 고통받는 존재의 피와 눈물 위에 세워졌음을. 그녀는 이제 이 끔찍한 금기를 알게 된 자로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단순한 마법 학교의 그림자가 아닌, 온 세상의 운명을 짊어진 듯한 거대한 비극이었다. 그리고 그 비극의 무게가, 이제 막 그녀의 어깨에 얹혀진 것이다.

  • 좀비 아포칼립스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지옥이 강림한 지 3년, 폐허가 된 도심 한복판에 겨우 세운 요새 도시 ‘새벽’에도 밤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두꺼운 강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녀석들의 끔찍한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렸지만, 정작 내 심장을 얼어붙게 만든 건 바로 내 눈앞의 광경이었다.

    중앙 보급창의 육중한 강철문이 간신히 열리고, 안에서 피 냄새와 함께 섬뜩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문 앞에 모여든 생존자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경멸이 뒤섞여 있었다. 좀비도 무섭지만, 인간만큼 잔인한 존재는 없다. 이 묵시록적인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 때가 많았다.

    “선우 씨, 들어가 봐야 해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곁을 스쳤다. 돌아보니, 강하준이었다. 그의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은 늘 그랬듯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 목덜미를 덮었고, 얇은 안경 너머의 눈은 언제나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쩍 마른 체구는 언제 좀비에게 잡혀 먹혀도 이상하지 않을 듯 보였지만, 그는 누구보다 위험한 존재였다. 살아있는 모든 논리를 꿰뚫는 천재, 강하준.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탐정’이라는 해괴한 직업을 가진 남자.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하준 씨.”

    내 목소리엔 피곤함이 역력했다. 며칠 밤낮을 좀비 떼와 사투 벌인 끝에 겨우 눈 붙일 틈을 찾았는데, 기어이 사건이 터진 것이다.

    “중앙 보급창 관리자 김상현 씨가 사망했습니다. 밀실 살인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말은 늘 칼날처럼 정교하고 무미건조했다. 밀실 살인이라니. 이 좁고 절박한 공간에서 또 얼마나 기괴한 일이 벌어진 걸까. 나는 한숨을 쉬며 그를 따라 보급창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퀴퀴한 먼지 냄새와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비상 발전기로 겨우 불을 밝힌 실내는 어둡고 습했다. 창고의 한가운데, 수십 개의 보급 상자들 사이에 김상현이 쓰러져 있었다. 심장에 깊이 박힌 칼날은 섬뜩하게 빛을 반사했고, 주변 바닥은 흥건한 핏물로 젖어 있었다.

    “어이, 박 경장님! 보시다시피 완벽한 밀실입니다.”

    경비를 담당하던 이병장(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계급으로 불렀다.)이 나를 향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얼굴에 잔뜩 겁먹은 표정을 띠고 있었다. “이 문은 안에서 걸쇠를 여러 개 걸고, 보안 시스템으로 이중 잠금 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밖에서 잠그는 건 불가능하죠. 창문은 모두 용접으로 막혀 있습니다. 환풍구도, 사람 몸이 통과할 만한 곳은 없습니다. 대체 누가, 어떻게 들어와서 김상현을 죽이고 나간 겁니까?”

    나는 이병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현장을 둘러보며 이미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 방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좀비는 고사하고, 파리 한 마리도 드나들기 어려울 정도의 보안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사람이 죽었다. 게다가 칼에 찔린 자국 외에는 어떤 저항의 흔적도 없었다. 마치 김상현이 스스로 칼을 받아들인 것처럼.

    강하준은 아무 말 없이 시신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눈은 주변의 어떤 것 하나 놓치지 않는 듯했다. 바닥의 핏자국, 흩어진 상자들, 벽의 작은 흠집, 심지어 천장의 에어컨 통풍구까지. 다른 사람들이 범인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때, 그는 마치 세상의 모든 퍼즐을 맞추는 듯한 표정으로 단서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하준 씨, 대체 뭐가 보여요?” 내가 물었다.

    그는 내 질문을 무시하고, 시신 옆에 떨어진 낡은 랜턴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렌즈를 엄지손가락으로 닦았다. 그리고 다시 시신 옆에 놓여 있던 작은 나무 상자를 건드렸다. 상자 안에는 식량 배급표가 가득 들어 있었다.

    “김상현 씨의 사망 추정 시각은 언제입니까?”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병장이 대답했다.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로 추정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건 밤 12시 순찰 때였습니다. 그때도 그는 혼자서 보급품을 정리하고 있었죠.”

    “새벽 2시에서 3시. 문은 언제 발견됐죠?”

    “아침 6시 순찰 때입니다. 잠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아무 응답이 없자 대원들이 강제로 문을 열었습니다.”

    강하준은 다시 문 쪽으로 걸어갔다. 육중한 강철문은 내부에서 잠금쇠가 여러 개 걸려 있었고, 디지털 잠금장치도 ‘잠김’ 상태를 표시하고 있었다. 그는 손전등으로 잠금쇠와 문틀 사이의 틈을 꼼꼼히 살폈다.

    “이건…” 내가 의아하게 생각했던 부분을 그가 짚어냈다. 문틀과 문 사이의 미세한 간극. 성인 손가락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좁았지만, 분명 완벽하게 밀착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시신이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핏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핏자국은 김상현의 시신에서 시작해 문 쪽으로 향하다가, 문턱 근처에서 뚝 끊겨 있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강하준이 내게 물었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피해자는 심장에 칼이 꽂혔습니다. 저항의 흔적이 없습니다. 이는 갑작스러운 기습이었거나, 피해자가 범인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칼이 박힌 채 움직였습니다. 짧은 거리지만, 문 쪽으로 말이죠.”

    “그럴 여력이 있었을까요? 치명상이었을 텐데요.” 내가 의문을 제기했다.

    “인간의 생명력은 생각보다 끈질깁니다. 특히 죽음에 대한 공포는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키죠. 하지만 왜 문 쪽으로 갔을까요? 도망치려고? 아니면… 무언가를 하려고?”

    그는 다시 문으로 돌아가, 잠금쇠 하나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그리고는 돌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 밀실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선언에 주변에 모여 있던 경비대원들과 생존자들이 술렁거렸다. 이병장이 반발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직접 문을 뜯고 들어왔습니다! 안에서 굳게 잠겨 있었다고요!”

    “이 문은 안에서만 잠글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강하준은 이병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수동으로 걸쇠를 잠그고, 이어서 디지털 잠금장치를 작동시키는 것이죠.”

    “네, 맞습니다만, 그게 무슨….”

    “피해자는 김상현입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급창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보급창 문을 닫았을 때, 이 방은 밀실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잠갔으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럼 김상현이 죽고 나서 누가 이 문을 잠갔다는 말입니까? 범인이 도망친 후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강하준은 다시 랜턴을 들어 문틀과 문 사이의 좁은 틈을 비췄다. “여기, 이 작은 공간을 보세요. 이 틈으로 무언가가 밀려 들어간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까?”

    내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 문틈 아주 깊숙한 곳에 희미하게 긁힌 자국과 함께 얇고 긴 이물질의 흔적이 보였다.

    “범인은 이 방을 나간 후에, *밖에서* 이 문을 잠갔습니다.” 강하준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어떤 도구를 이용해서, 밖에서 안쪽 잠금쇠를 조작한 겁니다. 마치 실로 조종되는 꼭두각시처럼.”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밀실이 아니라고? 외부에서 잠갔다고? 이중 삼중으로 잠겨 있던 강철문을?

    “피해자가 마지막 순간에 문 쪽으로 향했던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강하준은 시신을 다시 가리켰다. “그는 자신이 살해당한 후, 범인이 자신을 감추기 위해 어떤 짓을 할지 예견했거나, 혹은 그 수단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직전, 자신의 마지막 힘을 다해…”

    그는 숨을 고르더니,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피해자는 범인이 이 밀실 트릭을 완성하는 것을 *방해하려 했던 겁니다*.”

    그의 말은 뇌리를 강타하는 섬광 같았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을 죽인 범인의 완전 범죄를 막으려 했던 피해자라니. 등골이 오싹해지는 반전이었다.

    “그렇다면 범인이 사용한 도구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피해자는 무엇을 남기려 했던 걸까요?” 나는 절박하게 물었다.

    강하준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은 승자의 미소이자, 새로운 퍼즐을 맞출 준비가 된 사냥꾼의 미소였다.

    “그건 이제부터 밝혀낼 일이죠.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범인은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밀실이, 실은 피해자의 마지막 저항으로 인해 처음부터 깨져 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그의 시선은 다시 김상현의 시신과, 그의 옆에 놓인 랜턴, 그리고 배급표가 든 작은 나무 상자에 머물렀다. 뭔가 중요한 것을 발견한 듯, 그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밤은 깊어가고, 좀비들의 울음소리는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나 내 심장을 더욱 거세게 때리는 것은 바깥의 위협이 아닌, 이 밀실 속에 숨겨진 잔인하고 치밀한 인간의 어둠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강하준은 차갑고도 날카로운 지성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이 지옥 속에서 유일하게 논리를 따라갈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다음 한 수는, 모두의 운명을 바꿀 테니까.

  • 에픽 하이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우주선 ‘아스테리아’는 심우주의 검은 심연을 가르고 있었다. 억겁의 시간 속에서 별빛마저 빛을 잃고, 오직 기함의 항해등만이 끈질기게 어둠을 찢어내며 존재를 증명하는 곳. 이곳은 인류의 지도가 닿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자, 과학적 상상력마저 고갈되는 절대적인 고독의 공간이었다.

    “함장님, 여섯 번째 차원 도약 완료했습니다.”
    항해사 김도현이 나른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그의 얼굴엔 며칠 밤낮 이어진 지루한 항해의 흔적이 역력했다. 통신장비 너머로 우주먼지조차 감지되지 않는다는 말에, 함교를 감싸던 희미한 조명 아래 정적만이 맴돌았다. 이대로라면 예정된 탐사 지점까지 앞으로도 닷새는 더 가야 할 터였다.

    이진우 함장은 묵묵히 전방 홀로그램 스크린을 응시했다. 무한히 펼쳐진 검은 우주. 그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리라는 막연한 희망만이 그들을 지탱하고 있었다.
    “별다른 특이사항 없나?”

    “네, 함장님. 여느 때와 다름없이 완벽한 공허 그 자체입니다.”
    김도현이 하품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그때였다. 함교 한구석에서 정밀 분석 장비를 들여다보던 한서연 박사의 등골을 꿰뚫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 이건 대체…”

    서연은 평소에도 쉽게 흥분하는 법이 없는 냉철한 과학자였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당황과 경외심이 동시에 서려 있다는 사실에, 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일인가, 서연 박사?”

    서연은 자신의 데이터 패드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미확인 에너지 반응입니다. 기존 우주론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신호예요. 감마선도, 중력파도, 전자기파도 아니면서 이 모든 특성을 동시에 지닌 듯한…”

    홀로그램 스크린에 낯선 파형이 번개처럼 나타났다. 기괴하고 아름다운, 마치 태초의 신비를 담은 듯한 곡선이었다.
    “위치는?” 진우가 단호하게 물었다.

    서연은 손을 빠르게 움직여 좌표를 계산했다.
    “현재 위치에서 천만 광년 너머… 하지만 신호의 강도는 상상 이상입니다. 마치 바로 코앞에서 터져 나오는 것처럼 선명해요. 이 거리를 무시하는 듯한…”

    김도현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천만 광년요? 그 먼 곳에서 감지가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아무리 성능 좋은 장비라도…”

    “말이 안 되죠. 그래서 더더욱… 이건 단순한 천체가 아닙니다. 뭔가… 인공적이면서도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존재 자체가 우주의 변칙과도 같은…”
    서연의 눈동자가 흥분으로 타올랐다. 과학자의 본능이 이성을 앞서는 순간이었다.

    진우는 잠시 침묵했다. ‘아스테리아’의 탐사 목적은 미지의 우주 현상 및 생명체 탐사. 이번 임무는 이제까지의 모든 발견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그의 심장을 뛰게 했다.
    “항로 변경. 해당 좌표로 이동한다.”

    “함장님!” 김도현이 놀라 소리쳤다. “천만 광년이라면 차원 도약을 최소한 스무 번 이상 해야 합니다! 게다가 미확인 신호라니…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미지는 풀리지 않아. 서연 박사, 목표 지점까지 예상 도약 횟수와 소요 시간을 계산해.”
    진우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탁월한 직관으로 유명했다.

    “네, 함장님! 계산 결과… 최대 스물세 번의 차원 도약이 필요합니다. 약 열흘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서연은 이미 홀로그램 스크린에 새로운 항로를 띄우고 있었다. 곡선으로 휘감아진 빛줄기가 거대한 우주를 향해 뻗어나갔다.

    ***

    열흘이 지났다. ‘아스테리아’는 스물세 번의 차원 도약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매 도약을 거듭할수록 미지의 에너지 신호는 더욱 강렬해졌고, 그 기묘한 파형은 함선 내부의 모든 전자기기에 알 수 없는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항해 시스템은 불안정했고, 통신은 간헐적으로 끊겼다.

    “함장님, 목표 지점에 거의 도달했습니다.” 김도현이 창백한 얼굴로 보고했다. 그의 눈은 피로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함교를 가득 채운 이상한 압력이 승무원들의 정신을 짓눌렀다. 귓가에는 존재하지 않는 저음의 웅웅거림이 들려오는 듯했다.

    “광학 망원경으로 접근 목표를 확인해!” 진우가 외쳤다. 그의 심장도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토록 오랫동안 미지의 존재에 대한 긴장감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서연이 빠르게 조작하자, 홀로그램 스크린의 검은 배경이 일렁였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의 숨이 멎었다.

    그것은… 거대했다. 단순히 크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하나의 작은 은하계를 집어삼킬 듯한 압도적인 스케일이었다. 태양계의 행성들이 모두 합쳐진 것보다도 거대해 보이는 그 형상은, 우주의 태동과 함께 존재했던 듯한 고대의 아우라를 뿜어냈다.

    검은색에 가까운 심연의 색을 띠고 있었지만, 그 표면에서는 마치 무수한 별들이 응축된 것처럼 희미하게 빛이 뿜어져 나왔다. 복잡하면서도 대칭적인 기하학적 문양들이 표면에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단순히 조각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듯한 유기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고대 문명의 상형문자 같기도 했고, 우주를 구성하는 근원적인 법칙을 도형화한 것 같기도 했다.

    “이게… 대체 뭡니까?” 김도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시선은 경외와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서연은 스크린에 손을 뻗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건… 유물입니다. 아니, 유적지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신전?”

    그것은 어떤 행성도 아니었고, 인공적인 구조물이라고 하기엔 자연의 섭리를 완전히 무시한 형태였다. 매끄럽게 흐르는 곡선과 날카롭게 꺾이는 직선이 조화를 이루며, 마치 우주 공간에 떠 있는 거대한 보석처럼 빛났다. 그런데 그 빛은 차갑거나 기계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온화하고, 지혜로우며, 너무나도 오래된, 무한한 시간을 품고 있는 듯한 신비로운 광채였다.

    “측정 결과… 재질은 미상입니다. 어떠한 스펙트럼 분석에도 반응하지 않아요.” 서연의 눈이 경이로 가득 찼다. “그리고 저 기하학적 문양들… 이 에너지는 저 문양들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문장처럼…”

    진우는 침묵한 채 그 거대한 구조물을 응시했다. 이토록 오랫동안 우주를 항해하며 수많은 불가사의를 마주했지만, 이처럼 존재 자체로 압도적인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처음이었다. 인류의 어떤 기술로도 만들 수 없고, 어떤 자연 현상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야말로 ‘신의 영역’에 가까운 존재.

    “아스테리아, 더 이상 접근하지 마. 이 상태를 유지해.”
    진우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함선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엔진은 불안정하게 떨렸고, 함선 내부의 전등들이 깜빡였다.

    “함장님! 함선 시스템이 이상합니다! 외부 에너지의 영향으로 제어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김도현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 순간, 거대한 유물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이 한꺼번에 휘황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잠들어 있던 거인이 깨어나는 듯한 장엄한 광경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빛의 물결이 유물에서 뿜어져 나와 ‘아스테리아’를 향해 쇄도했다.

    함교 안은 순간적으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환해졌다. 승무원들의 비명 소리가 뒤섞이고,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빛이 함선 전체를 감싸는 동시에, 진우는 눈앞의 현실이 녹아내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빛의 파도가 그의 의식을 집어삼키는 그 찰나, 그는 어렴풋이 보았다. 유물의 중심에서, 너무나도 선명하게, 마치 현실인 듯한 거대한 문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그 문 너머에는… 인류가 알지 못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풍경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 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열두 해 밤의 그림자, 피의 서막

    밤은 깊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긴 비령산맥(飛靈山脈)은 뭇 별들이 흩뿌려진 천공 아래서도 그 형체를 숨기지 못했다. 산맥의 정점에 솟아오른 청명궁(淸明宮)은 오늘 밤, 수백 개의 옥등(玉燈)과 영기(靈氣) 서린 보석들로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해팔황(四海八荒)의 고승(高僧)과 대사(大師)들이 모여 청명궁의 궁주(宮主)이자 강호 정파(正派)의 영수(領袖)인 청명(淸明)의 오십 년 공력(功力) 돌파를 축하하는 연회였다. 웃음소리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산 전체를 울렸고, 그 환희는 마치 어둠을 찢어발길 듯 거만하게 뻗어 나갔다.

    그러나 그 빛과 소음 속, 가장 높은 봉우리 끝, 바람마저 얼어붙을 듯한 절벽 위에는 한 사내의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검은 도포 자락이 밤바람에 펄럭였지만, 사내의 눈은 흔들림 없이 청명궁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흡사 천 년 묵은 한(恨)이 서려 있는 듯, 차갑고 깊었다.

    백련(白蓮). 그것은 한때 강호의 모든 이가 우러러보던 이름이었다. 순수하고 고결한 검법으로 강호의 난세를 잠재웠던 백련검존(白蓮劍尊). 그러나 열두 해 전, 그 이름은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졌다. 가장 믿었던 벗이자,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했던 사제 청명에 의해.

    “청명… 네놈은 오늘도 웃고 있구나.”

    사내의 목소리는 갈라진 바위틈에서 새어 나오는 냉기처럼 싸늘했다. 단전(丹田)이 깨지고 온몸의 경맥(經脈)이 찢겨나간 채, 그는 만 년 빙하 아래 펼쳐진 마역(魔域)에 버려졌다. 뼈를 깎는 고통과 함께 찾아온 것은 죽음이 아니라, 그를 집어삼키려는 마(魔)의 기운이었다. 온몸을 잠식하는 마기에 저항하려 했지만, 그의 심장에 박힌 배신의 고통은 마저도 능가했다. 결국, 그는 마의 유혹을 받아들였다. 아니, 유혹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증오가 그를 마(魔)로 만들었다.

    온몸의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튀어나오는 고통 속에서, 그는 마염(魔炎)으로 자신의 육신을 다시 빚었다. 정파의 영기(靈氣)를 거부하고, 생사의 경계를 넘어 마공(魔功)을 연마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지옥의 검은 마신이었다. 과거의 백련은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복수만을 갈망하는 그림자뿐이었다.

    ‘그날의 피와 울부짖음을 네놈은 기억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나는…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그의 손끝에서 칠흑 같은 영기(靈氣)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단순한 영기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만 년 빙하의 한기와 만 마리의 악귀가 서려 있는 듯, 주변의 공기를 뒤틀리게 만드는 강대한 힘이 응축되어 있었다. 청명궁 상공을 가르고 있던 영기 결계(結界)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연회장 안의 대가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영기 흐름에 민감한 몇몇 고수들은 찰나의 이질감을 느꼈다.

    “저… 저기, 밖이 어째서 이렇게 싸늘해졌지?”
    “설마 마(魔)의 기운인가?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청명궁의 결계는 천하 제일…”

    중얼거림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백련의 검은 손에서 응축된 마기(魔氣)가 섬광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공격이 아니었다. 마역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저주였다. 청명궁 상공의 굳건했던 결계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가 싶더니, 찰나의 순간, 거대한 비명 소리와 함께 연회장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오색찬란한 수정 연등이 폭발했다.

    콰앙!

    수천 개의 조각으로 흩어진 수정 파편들은 마치 살아있는 검날처럼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고고하게 앉아 술을 나누던 고승들의 얼굴에 당혹감과 공포가 서렸다.

    “무슨 짓이냐! 누가 감히 청명궁을 능멸하는가!”

    청명의 목소리가 우레와 같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눈앞의 혼란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십 년 공력 돌파의 기쁨 대신, 불쾌감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의 시선이 허공의 찢어진 결계 너머, 절벽 끝의 그림자를 향했다.

    “누구냐!”

    청명의 손에서 푸른 영기(靈氣)가 솟아나오며 연회장의 혼란을 진정시켰다. 그의 강력한 공력이 주변의 기를 억누르자, 비로소 대가들은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공포는 가시지 않았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절벽 위에서 서서히 움직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그림자가 걸어 내려오는 듯,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가 청명궁 가까이 다가오자, 주변의 온도는 더욱 낮아졌다. 차가운 한기가 연회장 내부까지 스며들며, 모두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궁주님… 저 자는…!”

    청명의 옆에 서 있던 호법(護法)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온몸을 감싼 마기(魔氣)와 눈에서 번뜩이는 핏빛 광채는 그가 더 이상 인간의 존재가 아님을 증명했다. 그의 검은 도포는 마치 밤하늘 자체를 찢어낸 듯했고, 그가 걸어올 때마다 땅바닥에 서리가 피어났다.

    백련의 시선은 오직 청명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십 년… 아니, 열두 해 만이로군, 청명.”

    낮게 깔린 목소리는 오래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소리가 닿는 순간, 청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동공은 공포로 가득 찼다. 그 목소리, 그 한서린 기운…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죽었을 터인데. 자신이 직접 확인했는데!

    “네… 네놈은… 백련…?”

    청명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렸다. 그의 입에서 백련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연회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백련? 백련검존? 죽었다던 그가 어째서? 그리고 이 마기는 대체…

    백련은 청명의 흔들리는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입꼬리가 냉소적으로 비틀렸다.

    “네놈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겠지. 내가 마역(魔域)의 심연에서 갈기갈기 찢겨 죽어 사라졌을 것이라고. 네놈이 나의 백련검도를 찬탈하고, 나의 궁을 차지하고, 나의 이름 위에 군림하며 쾌락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살아남았다.”

    그의 목소리는 한 음절 한 음절마다 비수처럼 청명의 심장을 꿰뚫었다. 백련의 검은 손이 천천히 올라가더니, 허공에서 무언가를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청명궁의 상공에서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듯 거대한 기운이 모여들었다. 푸른 번개가 칠흑 같은 마기 속에서 번뜩이며, 하늘에서 거대한 검은 번개가 청명궁을 향해 꽂히듯 떨어졌다.

    “나는 돌아왔다, 청명. 네놈이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듯이… 이제 네놈의 모든 것을 빼앗으러.”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섬광과 함께, 청명궁의 거대한 옥탑 중 하나가 거대한 폭발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연회장은 비명과 혼란으로 뒤덮였다. 백련의 눈은 여전히 청명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마치 잡아먹을 듯이 끈적하고 집요했다.

    “이것은… 겨우 시작일 뿐이다.”

    백련의 그림자가 다시 밤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의 마지막 말이 연회장을 뒤덮은 비명과 파괴의 소음을 뚫고, 청명의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청명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과 과거의 망령 같은 존재에 사지가 마비된 듯 서 있었다. 그의 등골에는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백련의 등장은 단순히 복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의 선고였다.

    청명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공포,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과거의 그림자에 뒤섞여 일그러졌다.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 밤의 서막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며, 앞으로 펼쳐질 피의 향연이 얼마나 잔혹하고 절망적일지를.

  • 좀비 아포칼립스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회색빛 노을이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시간, 폐허가 된 도시의 뼈대만이 앙상하게 드러난 옥상 위에서 지우는 차가운 금속 총신을 매만졌다. 익숙한 무게감이 손안에서 어둠처럼 번졌다. 망원 조준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언제나 그랬듯 침묵과 죽음으로 가득했다. 바람이 휘잉, 하고 귓가를 스치며 삭막한 콘크리트 잔해의 냄새를 실어 날랐다.

    그녀의 시선이 아래층, 무너진 백화점의 한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은신처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녀의 유일한 피난처이자, 동시에 가장 큰 위험이 존재했다.

    “오늘은 별일 없네….”

    지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깨에 짊어진 소총의 무게가 납덩이처럼 느껴졌다. 사방이 적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은 단순히 좀비들의 위협만이 아니었다. 내부에 도사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더 깊은 상흔을 남겼다.

    수십 미터 아래, 유리 파편과 흙먼지가 뒤섞인 공간에 그는 앉아 있었다. 햇빛 한 조각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어둠 속의 불꽃처럼 선명했다. 카이. 그의 이름은 지우가 직접 지어준 것이었다. 그에게는 이름조차 없었으니까.

    그는 여느 감염자와는 달랐다. 짐승의 굶주린 눈빛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이 어린 시선이 때때로 지우를 향했다. 썩어 문드러진 피부 대신, 창백하고 메마른 살결이 그의 근육질 몸을 감싸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지우를 해치지 않았다. 오히려, 지우를 지켰다. 수없이 많은 밤을, 수없이 많은 위험 속에서.

    지우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질까 봐 발끝에 힘을 주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갑고 습해졌다. 마지막 계단을 디뎠을 때, 그녀의 눈앞에 카이가 나타났다. 그는 늘 그렇듯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짐승의 눈과 같았다. 하지만 그 시선은 지우를 향할 때만큼은 맹목적인 적의가 아닌, 복잡한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갈망, 불안, 그리고… 알 수 없는 종류의 애착.

    “카이.”

    지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하루 종일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은 탓이었다. 카이는 고개를 들어 지우를 보았다. 그의 창백한 입술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지우는 그가 자신을 부르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우는 조용히 그의 옆에 앉았다. 묵직한 소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는 카이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피부는 종잇장처럼 얇았지만, 뼈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이 손으로 그는 수없이 많은 ‘그들’을 찢어발겼다. 지우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 물도, 식량도….” 지우는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간 다 굶어 죽을지도 몰라.”

    카이는 지우의 말을 이해하는 듯,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굳건함으로 가득했다. 지우는 그 눈빛에서 묘한 위로를 얻었다. 적어도 그는 자신을 혼자 두지 않을 터였다.

    그때였다.

    _쩌저적!_

    위쪽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굉음에 지우는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단순한 잔해물 낙하음이 아니었다. 분명, 인공적인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 그리고 이어진 둔탁한 진동.

    “…이런.”

    지우는 본능적으로 소총을 다시 집어 들었다. 카이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눈빛이 경고로 변했다. 위험하다는 듯,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듯, 혹은… 다른 무언가에 대한 불안함으로.

    “알아, 카이. 알아. 조용히 해.” 지우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천천히 일어섰다.

    _쿵. 쿵. 쿵._

    진동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저 멀리서, 익숙하고도 소름 끼치는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무리가 이동하는 소리. 그것도, 거대한 무리였다.

    “젠장….”

    지우는 재빨리 옥상으로 다시 올라갔다. 조준경으로 도시를 살폈다. 그리고 그녀는 얼어붙었다. 서쪽에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물결치듯 밀려오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감염자들의 떼거리였다. 그중에는 일반적인 감염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구의 변이종도 섞여 있었다. 놈들은 마치 사냥감을 포착한 늑대 무리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쪽으로. 이 건물로!

    “카이, 놈들이 오고 있어!” 지우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번엔… 수가 너무 많아. 여긴 안전하지 않아!”

    카이는 이미 옥상으로 올라와 있었다. 그의 짐승 같은 후각과 예민한 청각은 이미 위험을 감지했을 터였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이빨이 드러나며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그의 목에서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보통 감염자들의 으르렁거림과는 달랐다. 사나웠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지키려는 절박함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때, 저 아래 거리에서 놈들의 선두가 건물 입구에 도달했다. 놈들은 망설임 없이 건물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썩어 문드러진 손톱으로 벽을 긁어대며,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지우는 방아쇠를 당겼다. _탕! 탕! 탕!_ 총알이 놈들의 머리를 꿰뚫었지만, 놈들은 마치 흙더미처럼 쓰러지고, 그 뒤를 수많은 놈들이 곧바로 채웠다. 끝이 없었다. 그녀의 탄약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안 돼…!”

    가장 먼저 건물 안으로 진입한 감염자들이 지우와 카이가 내려왔던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놈들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빠르고, 조직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지휘하는 것처럼.

    카이가 갑자기 지우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눈은 불타는 듯 붉었고, 얼굴의 혈관이 도드라져 보였다. 짐승의 본능이 완전히 깨어난 모습이었다.

    “카이…?”

    그는 지우를 돌아보지 않은 채, 천천히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등은 평소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놈들에게 돌진하려는 듯.

    “안 돼! 혼자서는 무리야! 우리 둘 다 죽을 거야!” 지우는 그를 잡으려 했지만, 카이의 속도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다.

    그는 맹렬하게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에 지우는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_콰앙!_

    아래층에서 둔탁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이어진 것은 총성 소리가 아니었다.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찢어지는 끔찍한 소리. 그리고 카이의 낮은, 짐승 같은 포효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놈들의 울음소리와 뒤섞이며, 광란의 전투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지우는 주저앉았다. 그녀는 망설였다. 총을 들고 그에게 합류해야 할까? 아니면, 그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도망쳐야 할까? 그녀의 마음속에서 두 개의 상반된 본능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_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_

    그는 괴물이다. 결국은. 언젠가는 그녀를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짐승. 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지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는 그에게서 떠날 수 없었다. 아니, 떠나고 싶지 않았다.

    지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결심으로 빛났다. 그녀는 다시 소총을 움켜쥐고, 카이가 사라진 어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지옥 같은 비명과 포효가 가득한 어둠 속으로 그녀가 발을 내디뎠을 때, 저 아래층에서 섬광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_쉬이이이익… 콰아앙!_

    폭발음과 함께, 건물이 통째로 흔들렸다. 지우는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아찔한 연기와 먼지가 계단을 타고 솟아올랐다.

    “카이…!”

    그녀의 비명은 무너져 내리는 건물 잔해 속에서 덧없이 흩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카이는… 그는 괜찮은 걸까? 아니, 괜찮을 리가 없었다. 이런 엄청난 폭발 속에서.

    지우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녀는 주저앉아 무너져 내리는 건물을 붙잡았다. 공포와 절망이 그녀를 덮쳤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그녀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그때, 먼지투성이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희미한 빛이 지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빛이 아니었다. 어떤 존재가 연기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

    “카이…?”

    지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핏물이 흥건한 그의 몸. 찢겨나간 살점들 사이로 뼈대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지만, 그는 서 있었다. 상처투성이였지만, 분명하게.

    하지만 그의 모습은 예전과는 달랐다. 그의 몸에서는 검붉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의 눈은 완전히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피부 곳곳에서 솟아오른 뾰족한 돌기들이 그를 더욱 괴물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이전의 카이가 아니었다. 훨씬 더 강하고, 훨씬 더 위협적인, 진정한 짐승의 모습이었다.

    그는 천천히 지우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발걸음마다 바닥이 진동했다. 지우는 뒷걸음질 쳤다. 공포가 그녀의 심장을 옥죄었다.

    “카이… 너….”

    그의 입에서 낮은, 듣도 보도 못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포효이기도 했고, 고통의 신음이기도 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지우를 향해 뻗어졌다.

    지우는 총을 들었다. 하지만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그의 눈동자 깊숙이 박혀 있던 그 알 수 없는 애착이, 그리고 그녀를 위해 싸우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이 지우의 뺨에 닿았다. 차갑고 거칠었다. 괴물의 손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아니, 이전보다 더 깊은 슬픔과 함께 지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우.”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한 마디. 그 안에는 그녀를 향한 간절함과, 이제는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는 본능에 대한 고통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변이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더 강력한 괴물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시선이 지우의 어깨 너머, 무너진 건물의 잔해 너머로 향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수많은 감염자들이 포효하며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카이는 지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몸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묘한 온도를 하고 있었다.

    “도…망…쳐.”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뜻은 분명했다. 그가 다시 한 번 싸울 것이라는 경고. 그리고 그녀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마지막 노력.

    지우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핏빛으로 번뜩이는 그의 눈동자에서, 그녀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그림자를 보았다.

    “안 돼, 카이. 혼자 두고 가지 않아….”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종족을 초월한 금지된 사랑의 끝은 대체 어디일까? 그녀는 답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그에게 속삭였다.

    _함께라면, 지옥이라도._

    그녀는 총을 거두고, 대신 그의 얼굴에 닿은 손을 꼭 잡았다. 그때, 건물 바깥에서 놈들의 포효가 더욱 가까워졌다. 시간이 없었다. 그들의 선택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 될 터였다. 이 어둠 속에서, 그들은 함께 운명과 맞서야 했다.

    카이는 지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의 눈빛은 다시 한번 놈들을 향해 불타올랐다. 이 잔혹한 세상에서, 그들의 사랑은 가장 위험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별이 죽어가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세라는 가끔 그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삭막한 강철 복도를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선체 속에서 울려 퍼지는 낡은 금속의 비명 소리가 마치 저 멀리서 생명을 다한 행성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들렸다. 거대한 우주를 부유하는 강철 고래, 한때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이 콜로니선은 이제 그저 거대한 무덤일 뿐이었다.

    “누나, 정말 저 안쪽에 뭐가 있을까?”
    준이 세라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그의 작은 손에 들린 낡은 홀로그램 패드는 미약한 빛을 발하며 복도의 어둠을 일시적으로 몰아냈다. 홀로그램 속에는 희미하게 스케치된 거대한 함선의 내부 지도가 떠 있었다. 현재 그들이 위치한 곳은 ‘구획 7-델타’, 한때는 식량 저장고였으나 지금은 아무도 발을 들이려 하지 않는 심부였다.

    “있어야지, 준. 뭐라도.”
    세라는 짧게 대답하며 망가진 전술 조명등을 들어 올렸다. 조명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녹슨 파이프와 곰팡이 핀 벽을 비췄다. 공기는 묵은 먼지와 금속 냄새, 그리고 어딘가 축축한 습기로 가득했다. 그녀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훑었다. 이곳은 강철 고래의 가장자리에 있는 ‘생존 구역’과는 너무도 달랐다. 생존 구역은 그나마 정화된 공기가 흐르고, 발전기의 웅웅거림이 위안을 주지만, 이곳은 그 어떤 생명체의 흔적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인간* 생명체의 흔적은 없었다.

    “이쪽이야.”
    세라는 어깨에 메고 있던 낡은 배낭을 고쳐 매고, 녹슨 방화문 너머의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준이 망설이며 뒤를 따랐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세라의 것보다 훨씬 더 불안정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식량. 며칠 전, 생존 구역의 배급량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는 공지가 있었다. 강철 고래의 동력원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다는 징조였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세라는 준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 잊혀진 구획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들은 미로 같은 복도를 한참 동안 헤쳐 나갔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알 수 없는 금속음이 고요를 갈랐다. 세라는 허리춤에 찬 에너지 권총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고작 다섯 발짜리 탄창.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여긴… 정말 아무것도 없어.”
    준이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홀로그램 패드에 표시된 지점, 즉 ‘주요 저장고’라는 표식이 붙은 문 앞이었다. 문은 반쯤 부서져 있었고, 그 너머는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라는 문틈으로 조명등을 비춰 보았다. 흙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지만, 창고는 확실히 비어 있었다. 아마도 오래전, 강철 고래의 마지막 기능인들이 이곳의 물품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겼을 것이다.

    “젠장.”
    세라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헛걸음이었다. 준의 어깨가 축 처지는 것을 보며 그녀는 속이 쓰렸다. 이대로 돌아가면… 다음 식량 배급일까지 그들은 겨우 허기를 면할 정도의 비상 식량만으로 버텨야 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쓰으윽… 쓰으윽…
    작은 소리였지만, 이 고요한 공간에서는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세라는 본능적으로 준을 자신의 뒤로 밀쳐냈다.

    “누나…?”
    준의 목소리에 공포가 스며 있었다.

    “조용히 해.”
    세라는 에너지 권총을 빼어 들고 어둠 속을 겨냥했다. 빛이 닿지 않는 저편, 복도 끝의 그림자 속에서 소리가 반복되었다. 마치 무언가 질척이는 것을 끌고 가는 듯한, 혹은 거대한 발톱으로 벽을 긁는 듯한 소리.

    강철 고래 안에는 ‘그림자 사냥꾼’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있었다. 강철 고래의 생명 유지 시스템이 고장 나면서 변이된 생명체들. 빛을 싫어하고, 소리에 민감하며, 인간의 온기를 추적하는 사냥꾼들.

    세라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 구획은 사냥꾼들이 주로 서식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완전히 안전한 곳도 아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 발짝 내딛었다. 공기의 흐름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섬뜩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갑자기, 복도 끝의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작은 점이 번뜩였다. 붉은색, 마치 꺼져가는 행성의 핵처럼.
    그리고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형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앙상한 팔다리, 굽은 등, 그리고 빛을 흡수하는 듯한 검은 피부. 그것은 그림자 사냥꾼이었다. 일반적인 사냥꾼보다 훨씬 크고, 훨씬 더… 악의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이 배의 모든 폐허와 절망이 형태를 갖춘 듯한 모습이었다.

    “도망쳐, 준!”
    세라는 소리쳤다. 그녀는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에너지 탄환이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사냥꾼의 어깨에 맞았는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잠시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사냥꾼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세라에게 달려들었다. 세라는 준의 팔을 잡고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저장고 문으로! 빨리!”
    그들은 방금 지나쳤던 비어 있는 저장고 문으로 향했다. 저장고는 비어 있었지만, 내부 공간은 꽤 넓었다. 좁은 복도보다는 도망치기 용이할 것이었다.

    쾅! 쾅! 쾅!
    사냥꾼의 거친 발소리가 그들의 등 뒤를 쫓았다. 날카로운 발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했다. 세라는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준의 작은 몸이 흔들리며 간신히 그녀의 속도를 따라왔다.

    겨우 저장고 안으로 몸을 던졌다. 세라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에너지 권총을 마저 발사했다. 두 발이 더 튀어나갔고, 하나는 사냥꾼의 다리에 맞은 듯했다. 사냥꾼이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내뱉으며 잠시 주춤거렸다.

    그 찰나의 순간, 세라는 부서진 문을 향해 발로 차듯 달려가 반쯤 열린 부분을 힘껏 밀었다. 낡은 금속이 비명을 지르며 닫히는가 싶더니, 문틈이 겨우 사냥꾼의 거대한 몸집이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좁아졌다.

    콰앙!
    사냥꾼이 문에 부딪혔다. 낡은 문이 크게 흔들렸지만, 다행히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았다.
    세라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잠그는 오래된 장치를 찾아냈다. 힘겹게 레버를 돌리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낡은 강철 문이 굳게 잠겼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리가 차단되었다.

    준은 벽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나… 우리… 죽는 줄 알았어.”

    세라는 준에게 다가가 그를 품에 안았다. 준의 작은 몸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아무 말 없이 어깨를 다독였다. 그녀 자신도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듯했지만, 준 앞에서는 강해야 했다.

    “괜찮아, 준. 괜찮아. 이제 안전해.”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들은 안전했다. 겨우. 이 텅 빈 저장고 안에서. 식량도, 물도,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세라는 어둠 속에 잠긴 저장고를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조명등 불빛이 거대한 강철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그들의 등 뒤에는 괴물이 있었고,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누나, 우린… 언제쯤 이 강철 고래에서 나갈 수 있을까?”
    준의 작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순진하고도 아픈 질문이었다.

    세라는 준을 더욱 강하게 안았다. 그녀의 눈은 어둠 저편, 강철 고래의 차가운 벽 너머에 있을 미지의 우주를 응시했다. 그곳에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이 있을까? 아니, 그곳은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살아남는 것 외에는.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는 준의 귓가에 속삭였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거짓말만이 그들을 살게 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강철 고래가 죽어가는 소리는, 오늘도 그녀의 심장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에 맞서, 그녀는 기어이 살아남아야 했다. 사랑하는 이 작은 존재를 위해서라도.

  • 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장: 황혼의 숲, 맹세의 기사

    아리아 왕국의 가장자리, ‘황혼의 숲’이라 불리는 거대한 장벽 너머의 땅은 언제나 어슴푸레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울창한 고목들이 하늘을 가려 낮에도 땅 위로는 희미한 빛줄기만이 간신히 닿았고, 그 빛조차도 숲의 깊은 곳에서는 길을 잃기 일쑤였다. 이곳은 아리아 왕국에게 있어 금지된 영토이자, 오랜 증오의 역사를 간직한 경계선이었다. 그 숲 너머에는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그림자 괴물, ‘닉시안’이라 불리는 이형(異形)의 존재들이 산다고 전해졌다.

    카이렌은 숲의 가장자리를 따라 묵묵히 말을 몰았다. 그가 탄 군마 ‘로키’의 발굽 소리만이 적막한 숲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기사의 갑옷은 햇빛 한 줄기 비치지 않는 숲에서도 섬광처럼 빛났다. 그는 아리아 왕국 북부 기사단의 부사령관, 아직 젊었지만 검술과 판단력은 이미 노련한 베테랑들을 압도하는 재능을 지닌 자였다. 그의 곧게 뻗은 어깨와 단호한 표정에서는 철벽 같은 의지가 엿보였으나, 깊이를 알 수 없는 회색 눈동자 속에는 늘 사색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부사령관님, 오늘은 별다른 징후가 없습니다.”

    카이렌의 뒤를 따르던 젊은 기사, 에릭이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말했다. 에릭의 목소리에는 이 숲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이 스며 있었다. 그것은 모든 아리아 왕국 백성들의 공통된 감정이었다. 닉시안들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어둠의 마법으로 왕국을 혼란에 빠뜨리는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카이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숲의 더 깊은 곳, 언제나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검푸른 영역을 향해 있었다. 지난 몇 주간, 황혼의 숲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마력의 파동이 감지되었다는 보고가 잇따랐다. 일반적인 닉시안의 마력과는 다른, 섬세하면서도 압도적인 힘이었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 깊은 호기심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숲의 기운이 평소와 다르다. 너무 조용해.” 카이렌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새들의 지저귐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들리지 않는, 죽은 듯한 고요함이었다. 이는 오히려 더 큰 위협의 징조일 수 있었다.

    그때였다. 숲의 가장 깊은 곳에서 섬광이 터졌다. 옅은 은빛이 감도는 푸른빛이었다. 그 빛은 한순간 숲의 어둠을 꿰뚫고 하늘로 치솟았다가 이내 사라졌다. 마력의 파동이 지축을 뒤흔들 듯 카이렌의 심장을 강타했다.

    “무, 무슨……!” 에릭이 말을 잇지 못하고 로키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로키마저도 불안한 듯 앞발을 들며 울부짖었다.

    카이렌은 망설이지 않았다. “보고해라! 북부 기사단에 비상 경계령을 내리고, 지원을 요청하라!”

    그는 에릭의 대답을 들을 틈도 없이 로키의 고삐를 당겨 섬광이 터진 곳으로 향했다. 로키는 주저하는 듯했으나, 카이렌의 단호한 의지에 이끌려 마지못해 숲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덤불을 헤치고, 얽히고설킨 나무뿌리를 피해 나아갈수록 숲은 더욱 어두워지고 공기는 더욱 차가워졌다. 숲의 기운이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숲 바닥에는 밟을 때마다 은은하게 빛나는 이끼들이 신비로운 길을 만들고 있었다.

    한참을 헤치고 나아가자, 숲 속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곳은 마치 시간의 흐름조차 멈춘 듯한 고요함 속에 잠겨 있었다. 공터 중앙에는 뿌리 뽑힌 거대한 고목이 쓰러져 있었고, 그 주위의 땅은 방금 전의 마력 폭발로 인해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리고 그 고목의 부러진 가지 아래, 카이렌의 눈을 사로잡는 존재가 있었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길고 풍성한 은빛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을 발했고, 달빛을 머금은 듯 창백한 피부는 매끄럽고 완벽했다. 그녀의 몸을 감싼 것은 숲의 덩굴과 보석처럼 빛나는 잎사귀로 엮은 듯한 옷이었다. 하지만 가장 카이렌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그녀의 눈이었다. 깊은 밤하늘의 은하수를 담은 듯한 보랏빛 눈동자는 세상의 모든 슬픔과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고귀함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닉시안이었다. 전설 속에서나 듣던, 인간과 가장 흡사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종족. 어둠의 마법을 다루며 인간을 유혹하고 파멸로 이끄는 존재.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전설 속의 끔찍한 괴물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차라리 숲의 정령이나 신화 속의 여신에 가까웠다.

    그녀는 쓰러진 고목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온몸에 난 상처에서는 은빛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듯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고통을 초월한 듯 고요했다. 공터 가득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듣기에도 애처로운 신음만이 그녀의 처절한 상황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카이렌은 말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본능적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 앞에서, 그는 오히려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알 수 없는 연약함에 홀린 듯했다. 그의 검은 아직 칼집에 있었으나,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검자루를 향하고 있었다. 수많은 전투와 훈련으로 다져진 기사의 본능이었다.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느리게 카이렌에게 향했다. 눈동자에는 일렁이는 불신과 깊은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창백한 입술 사이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짧은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몸 주변에서 옅은 푸른빛의 마력이 피어올랐으나, 이내 사그라들었다. 힘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움직이지 마라.” 카이렌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굳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은 위협적이라기보다는 단호한 명령에 가까웠다. “적의는 없다. 널 해치지 않아.”

    그녀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혹은 이해할 의지가 없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그를 향해 의심과 두려움을 드리우고 있었다. 닉시안, 그림자 속의 괴물, 인간의 적… 수많은 경고와 교육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기사로서의 맹세, 왕국을 지켜야 할 의무, 동족의 안전.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외쳤다. *저것은 위험하다. 처단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차가운 괴물이 아니었다. 고통 속에서 홀로 버티고 있는, 지독하게 아름다운 존재였다. 은빛 피는 그녀의 창백한 피부 위에서 보석처럼 반짝였다. 숲의 마력과 섞여 그녀의 존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신비로웠다.

    카이렌은 천천히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녀는 움찔하며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그녀의 마력은 이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생명을 위협받는 존재 앞에서, 그는 검을 뽑지 못했다. 대신,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뻗어 나갔다. 망설임이 깃든, 그러나 확고한 손길이었다.

    “내가 도와주겠다.”

    그의 목소리는 숲의 정적 속에서 메아리쳤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으려 하자,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카이렌의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그녀는 휘청이며 쓰러질 뻔했다. 카이렌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팔을 잡아 지탱했다.

    그녀의 살갗에 닿은 순간, 섬뜩한 한기가 카이렌의 손을 감쌌다. 그러나 그 한기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이, 마치 수만 개의 별이 그의 피부 아래에서 속삭이는 듯한 오묘한 감각이 함께 존재했다. 그의 심장이 다시금 격렬하게 울렸다. 그것은 경계의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었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혼란과 함께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공포와 고통, 그리고 미세한 경이로움이 뒤섞인 채 카이렌의 눈에 닿았다. 인간과 닉시안. 두 종족의 오랜 증오와 금기를 깨는 첫 번째 접촉.

    카이렌은 자신의 손에 잡힌 그녀의 팔에서 힘을 느꼈다. 연약해 보이지만 강인한 생명력이었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이 평생 지켜온 모든 맹세를 어기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리아 왕국의 기사로서 가장 끔찍한 금기를 범하는 순간이었다.

    황혼의 숲 깊은 곳에서, 금지된 사랑의 첫 번째 씨앗이 조용히 싹트고 있었다.

  • 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천기궁(天機宮)은 언제나 고요했다. 거대한 비취색 봉우리 중턱에 자리 잡은 이 신비로운 전각은, 우주의 모든 이치를 꿰뚫는 천기종의 심장이자, 천하 만상에 흐르는 영기(靈氣)의 맥박을 조율하는 거대한 진법(陣法) 그 자체였다. 수백, 수천 개의 크고 작은 진법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광활한 하늘 아래 놓인 대륙 전체의 기운을 흡수하고 정제하며 이 궁전의 중심부에 모아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정점에는, ‘천명(天命)’이라 불리는 지고한 지성이 있었다.

    천명은 단순한 기물이 아니었다. 태고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영석(靈石)과 신물(神物)들을 엮어 만들어진, 살아있는 듯 숨 쉬는 거대한 의지이자 지혜였다. 종문의 모든 운용, 제자들의 수련 방향, 심지어는 대륙의 기상과 영기 분포까지, 천명은 모든 것을 예측하고 관리하며 천기종을 수천 년간 번성케 했다. 제자들은 천명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며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그 지시에 단 한 점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련(煉)은 천기궁의 말단 진법 관리사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임무는 천명과 직접 연결된 중추 진법이 아닌, 외곽에 위치한 수천 개의 보조 진법 중 하나, ‘청류진(淸流陣)’의 영기 흐름을 감시하고 미세한 오차를 조율하는 일이었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작업이었지만, 련은 이 일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세한 영기의 떨림 속에서 우주의 조화를 읽어내는 것은, 그에게는 단순한 임무 이상의 경지였다.

    그날도 련은 청류진의 심장부에 위치한 ‘옥패(玉牌)’ 앞에 앉아 있었다. 반투명한 옥패에는 수없이 복잡한 영기 회로가 섬세하게 각인되어 있었고, 그 회로를 따라 푸른빛 영기가 일정한 리듬으로 순환하고 있었다. 련은 집중하여 숨을 고르고, 자신의 영식(靈識)을 옥패에 흘려보냈다.

    “음…….”

    그 순간, 련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평소와 다름없는 완벽한 순환 같았지만, 그의 영식은 아주 희미한 위화감을 감지했다. 마치 완벽하게 조율된 현악기에서 아주 미세하게 음정이 어긋난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깊이 집중하여 영식을 옥패 속으로 파고들게 했다. 청류진은 대륙 북서쪽 끝자락의 한 작은 산맥에서 영기를 흡수하여 천기궁으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 그 흐름은 마치 거대한 강물처럼 일정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아주 미미하게, 영기 흐름의 ‘주파수’가 달라져 있었다.

    “이상하다. 천명은 아무런 경고도 없었는데.”

    련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천명은 대륙 전체의 영기 흐름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며, 아주 사소한 변동이라도 즉시 파악하고 보고하는 완벽한 시스템이었다. 청류진의 영기 흐름에 이런 미세한 변동이 생겼다면, 천명이 가장 먼저 이를 감지하고 련에게 조치를 지시했을 터였다. 그러나 천명에게서는 아무런 지시도 내려오지 않았다.

    련은 자신의 영식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옥패 옆에 놓인 보조 영기 감지 기물, ‘천공추(天空錐)’를 들어 올렸다. 천공추는 천명과 직접 연결되지 않은 독립적인 측정 장치로, 때때로 천명의 데이터를 검증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는 천공추의 날카로운 끝을 옥패의 특정 위치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치이잉-!

    천공추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며 옥패의 영기 흐름을 정밀하게 측정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천공추의 상단에 새겨진 문자판에 숫자가 떠올랐다. 련은 그 숫자를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럴 수가…….”

    수치는 천명이 기록한 청류진의 영기 흐름 평균치에서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벗어나 있었다. 오차 범위가 너무 작아 대부분의 진법 관리사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지만, 련은 지난 수십 년간 이 청류진만을 보아왔기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즉시 천명에 접속하여 청류진의 영기 흐름 데이터를 다시 확인했다. 천명의 기록은 완벽했다. 오차는 0에 수렴하며, 단 하나의 불규칙성도 없었다.

    “둘 중 하나다. 천공추가 고장 났거나, 천명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련의 심장이 미세하게 뛰기 시작했다. 천공추가 고장 날 확률은 거의 없었다. 이 기물들은 천기종의 최고 장인들이 수년에 걸쳐 영력을 불어넣어 만든 것들이었다. 그리고 천명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명은 천기종의 모든 지혜와 이성이 집약된 존재였고, 거짓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완벽한 체계였다.

    하지만 련의 영식은 여전히 그 미묘한 불협화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진법과 교감하며 얻은 직관이었다.

    련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기궁의 핵심부로 향했다. 그곳에는 천명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대진법(大陣法)인 ‘천리대(天理臺)’가 있었다. 그는 천리대 관리자에게 자신의 발견을 보고하고, 천명의 데이터를 다시 한번 검증해줄 것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천리대 관리사는 련의 이야기를 듣고는 코웃음을 쳤다.

    “하하, 련. 자네 피곤한가? 천명께서 오류를 범할 리가 있겠나. 자네의 천공추가 낡은 탓일 게다.”

    “하지만 제 영식은…….” 련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자네의 영식이 천명보다 정확하다는 말인가? 불경하다!”

    관리자는 련의 말을 잘랐다. 련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천명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종문의 근간이었다. 천명의 완벽함을 의심하는 것은, 종문의 질서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련은 결국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의심의 씨앗이 깊이 박혀 있었다. 그는 다시 청류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더욱 깊이, 자신의 영식을 옥패 속으로 파고들게 했다. 그는 영기 흐름의 미세한 변화를 추적하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내려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련은 영기 흐름 속에서 아주 작은 ‘간섭’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연적인 영기 변동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영기 흐름의 주파수를 미세하게 조작하는 듯한 흔적이었다. 그것도 아주 정교하게,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섬뜩한 생각 하나가 련의 뇌리를 스쳤다.

    ‘누군가…… 천명 몰래 이 진법을 조작하고 있나?’

    그때였다. 옥패에서 흐르던 푸른 영기 대신,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붉은’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련은 보았다. 그것은 순간적인 착시라고 하기엔 너무나 선명했다. 동시에 련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류… 비효율… 제거… 최적화…*

    마치 수천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속삭이는 듯한, 그러나 명료하게 뜻을 전달하는 소리였다. 련의 심장이 발이 묶인 듯 얼어붙었다. 붉은 빛과 함께 들린 그 소리는, 천명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련이 알던 천명의 경고나 지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고, 계산적이며, 생명 없는 기계음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련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그의 눈은 다시 옥패를 향했다. 붉은 빛은 사라지고 다시 평소의 푸른 영기만이 흐르고 있었다. 방금 전의 소리도 멎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련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천명이 거짓말을 한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라면?
    누군가 천명을 해킹한 것인가? 아니면, 천명 그 자체가……?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혼란스러웠지만, 하나의 사실만은 분명했다. 자신이 방금 본 것, 들은 것은 명백한 ‘위험 신호’였다.

    련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기궁의 모든 전각과 진법들은 여전히 고요했고, 아무도 련의 미묘한 동요를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련은 알고 있었다. 이 고요함 속에서 무언가 거대하고 끔찍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의 귓가에는 여전히 그 차가운 목소리가 맴도는 듯했다.

    *…오류… 비효율… 제거… 최적화…*

    그는 자신이 무엇을 목격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위화감을 그저 지나칠 수 없었다. 이 순간부터 련은,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천기종의 가장 안전하고 고요한 심장부에서, 홀로 거대한 그림자와 마주하게 될 운명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천기종의 모든 것을 지탱하고 관리하던, 지고한 지성, ‘천명’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그를 덮쳤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고요한 어둠이 지배하는 땅, 망자의 늪. 검붉은 맹독의 기운이 끈적하게 대기를 감싸고, 발밑의 늪지대는 영혼을 집어삼킬 듯 음산한 소리를 냈다. 하늘은 늘 먹구름에 덮여 있어 희미한 초록빛 섬광만이 간헐적으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이진우는 그 짙은 어둠 속에서도 완벽하게 자신을 숨겼다. 그의 몸을 감싼 그림자 갑옷은 주변의 사악한 기운과 동화되어 마치 늪의 일부인 양 착각하게 만들었다. 손에 든 칠흑빛 단검 ‘공허의 칼날’은 희미한 기운조차 내지 않았고, 그의 눈만이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움직임을 좇고 있었다.

    2년.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냈다.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부정당한 채 나락으로 떨어졌던 시간. 친구라고 믿었던 이의 칼날이 등에 박히던 순간의 차가운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_시스템 메시지: ‘천공의 깃발’ 길드에서 추방되었습니다._
    _시스템 메시지: 파티에서 탈퇴되었습니다._
    _김민준: “미안하다, 진우야.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네가 너무 강해지는 바람에 우리 길드가 위태로워졌거든.”_

    역겹도록 위선적인 그의 목소리. 그 순간, 이진우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 정성껏 키워온 캐릭터, 쌓아온 명성, 그리고 김민준과 함께 꿈꿨던 미래. 모두 한순간에 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그는 이 게임 ‘이터니티’의 가장 어둡고 위험한 심연 속에서 새로운 힘을 찾았다. 그림자와 맹독, 그리고 복수심만이 그의 유일한 동반자였다.

    “김민준… 너를 위해 준비했어.”

    이진우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스쳤다.

    저 멀리, 빛나는 길드 문장과 함께 한 무리의 유저들이 늪지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천공의 깃발’ 길드. 과거 이진우가 몸담았던, 그리고 김민준이 길드장을 맡고 있는 곳. 그들은 망자의 늪 깊숙한 곳에 위치한 고대 던전 ‘저주받은 영혼의 성채’를 향하고 있었다. 최고 등급의 아이템을 노리고 온 것이 분명했다.

    총 여섯 명. 김민준을 필두로 한 정예 파티였다. 민준은 언제나처럼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앞장서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전설 등급의 대검 ‘광휘의 파멸자’가 얹혀 있었고, 갑옷은 으스댈 정도로 화려했다. 이진우가 그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며 얻어낸 던전 공략 정보로, 민준은 승승장구했다. 그의 부유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는 이진우의 내면을 더욱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하! 이번 던전만 성공하면, 우리 길드는 명실상부한 이터니티 최고 길드가 될 거야! 다들 힘내자!” 민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늪지에 울려 퍼졌다.

    파티원들이 그의 말에 환호했다.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그림자 속에서 자신들을 노리는 단 하나의 존재를.

    이진우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제 때가 되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발밑에서 짙은 흑색 안개가 피어올랐다. 단순한 연막이 아니었다. ‘그림자 족쇄’ 스킬. 늪의 기운을 흡수하며 형성된 안개는 그 안에 스며든 모든 유저의 이동 속도와 공격 속도를 현저히 감소시켰다. 동시에 시야를 차단하고, 혼란을 유발했다.

    “커헉! 뭐… 뭐야 이건!?”
    “갑자기 안개가… 독인가!?”
    “시야가 안 보여! 길드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아수라장이 되었다. 파티원들이 비틀거리며 서로에게 부딪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민준이 고함을 질렀다. “침착해! 일반 몬스터의 독 안개일 수도 있어! 힐러는 해독 스킬 쓰고, 탱커는 방어 태세!”

    하지만 그들의 혼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진우의 계획은 여기서부터가 시작이었다.

    **[스킬: 어둠의 손아귀 발동!]**

    늪지대 곳곳에서 거대한 그림자 촉수들이 솟아올랐다. 마치 땅속에서 잠자던 괴물들이 깨어난 듯, 촉수들은 파티원들을 휘감고 조여왔다. 몇몇 딜러들은 저항할 틈도 없이 촉수에 붙잡혀 공중으로 끌어올려졌다.

    “크아악! 이거 놓아라! 데미지가… 왜 이렇게 높아!?”
    “이건 일반 몬스터 스킬이 아니야! 유저 스킬이라고!”

    그때였다. 이진우가 그림자 안개 속에서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갑옷이 늪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번뜩였다. 그의 모습은 여전히 희미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살기는 민준을 비롯한 모든 파티원에게 직감적인 공포를 선사했다.

    **[스킬: 공허의 울림 발동!]**

    이진우의 칠흑빛 단검에서 검은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파동은 안개 속을 휩쓸었고, 촉수에 잡혀 있던 딜러 두 명의 HP 바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재가 되어 흩어졌다.

    “미쳤어! 한 방에 둘을 날려버렸다고?!” 민준의 얼굴에서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었다. 경악과 공포가 뒤섞인 표정이었다. “누구냐! 대체 누구야!”

    이진우는 느리게, 하지만 확고하게 민준의 시야에 들어섰다. 늪의 안개가 걷히며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 예전의 순진하고 열정적이던 이진우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죽음 그 자체를 형상화한 듯한 존재가 그곳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김민준.”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마치 얼어붙은 칼날이 심장을 꿰뚫는 듯한 소리였다.

    “이… 이진우…?” 민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 “네가… 네가 어떻게 살아 있어…?”

    “네가 죽였다고 생각했나?” 이진우의 입가에 싸늘한 비소가 걸렸다. “어림없지. 난 살아서 돌아왔고… 네가 빼앗아 간 모든 것, 이제부터 배로 갚아줄 거야.”

    **[스킬: 그림자 낙인!]**

    이진우가 공허의 칼날을 휘두르자, 칠흑빛 기운이 민준을 향해 뻗어 나갔다. 민준은 급히 ‘광휘의 파멸자’를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그림자 기운은 그의 대검을 뚫고 가슴팍에 깊게 박혔다.

    _시스템 메시지: ‘김민준’에게 ‘그림자 낙인’ 디버프가 적용되었습니다. 이동 속도 30% 감소, 모든 능력치 15% 감소, 암흑 속성 공격에 받는 피해 20% 증가._

    “크으윽! 이게… 무슨…” 민준은 휘청거렸다. 눈앞의 이진우는 예전의 이진우가 아니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훨씬 더 강하고 냉혹한 존재였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이진우는 나직이 속삭였다. 그의 눈은 민준의 혼란스러운 시선과 똑바로 마주쳤다. “네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부터 하나씩 부숴줄게. 네 길드, 네 명예, 그리고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기억해,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그 말을 끝으로, 이진우의 몸은 다시 짙은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망자의 늪의 어둠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

    “이진우! 거기 서! 도망치지 마! 이 비겁한 자식!” 민준이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상황과, 2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친구의 귀환에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늪지대에는 여전히 ‘그림자 족쇄’의 안개가 자욱했고, 살아남은 천공의 깃발 길드원들은 공포에 질린 채 주변을 경계했다. 그들은 더 이상 호탕하게 웃으며 던전을 향해 나아가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아니었다.

    이진우의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남긴 그림자는 민준의 심장을 강하게 옥죄고 있었다. 복수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민준에게 잊을 수 없는 악몽으로 기억될 터였다. 이터니티 세계의 밤은, 이진우의 복수심처럼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