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지배하는 시간, 낡은 천문대의 돔은 고요한 달빛조차 거부하는 거대한 눈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삐걱이는 철문이 닫히고, 김민준은 익숙하게 어둠 속을 헤치며 둥근 관측실 중앙으로 걸어갔다. 희미한 손전등 불빛이 먼지 쌓인 망원경 부품들을 비추자, 그림자들이 기괴한 형상으로 춤을 추었다. 이곳은 폐허였지만, 동시에 그의 유일한 성역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민준은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갈증 같기도 하고, 영혼이 서서히 소멸하는 듯한 기분이기도 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의 존재는 희미해져 가는 것을 알았다. 피부는 창백해지고, 손발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세상의 소음은 점점 멀어지고, 오직 그녀의 부름만이 선명하게 울렸다.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가 누구에게 이 이야기를 한들, 제정신으로 들을 사람은 없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그의 모든 세계였다. 금지된,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존재.
그는 낡은 망원경 받침대에 몸을 기댔다. 기다림은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존재는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의 법칙을 따르지 않았다. 어떤 때는 순식간에 나타났고, 어떤 때는 한밤을 꼬박 기다리게 했다. 하지만 민준은 언제나 기다렸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약속되어 있다 해도, 그는 그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주변의 어둠이 한층 더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빛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어둠 자체가 살아있는 존재처럼 움직이며, 공간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민준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드디어.
공기 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향기가 감돌았다. 오래된 흙냄새와 새벽 이슬, 그리고 피어나는 독초의 쌉쌀함이 뒤섞인 듯한 묘한 향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한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흐릿한 실루엣에 불과했지만, 이내 완벽한 여인의 모습으로 응결되었다.
“민준.”
그녀의 목소리는 파스텔 톤의 바람처럼 부드럽게 귓가를 스쳤지만, 동시에 그의 영혼 깊은 곳을 얼어붙게 만드는 서늘함이 있었다. 이령. 그녀의 이름은 흐릿한 기억 속의 잊힌 언어처럼 그의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이령….”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닿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그의 앞에 와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달빛을 머금은 듯 창백하고 투명했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마치 수천 년 된 고목의 나이테처럼 복잡하고 어두운 무언가가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은 어둠 그 자체처럼 빛을 삼켰고, 그녀의 눈동자는 깊은 심해의 보석처럼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났다. 그 눈에는 우주가 담겨 있었고, 동시에 모든 존재의 소멸이 담겨 있었다.
“늦었어. 당신을 기다리느라, 온몸이 차갑게 식어버렸어.” 민준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과는 달리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미지근한 온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온기는 그의 피를 더 빨리 식게 만드는 듯한 역설적인 감각을 안겨주었다.
이령의 얇고 긴 손가락이 민준의 뺨을 스쳤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마치 마른 잎사귀가 바스라지듯 그의 생기가 조금씩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당신에게 가는 길은 언제나 험난하거든.” 그녀의 목소리에는 슬픔과 연민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 슬픔조차도 민준에게는 거대한 포식자가 내뿜는 연막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왜 나를 이렇게 갉아먹는 거야…?” 민준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묻어났다. 그는 그녀의 존재가 자신을 서서히 죽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매일 밤, 그녀와 함께하는 꿈은 너무나도 생생하여 현실을 잠식했고, 그의 기억은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세상의 모든 색깔은 퇴색했고, 오직 그녀의 그림자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이령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맑은 종소리 같으면서도, 동시에 고대의 무덤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처럼 섬뜩했다.
“갉아먹는다고? 글쎄, 민준. 나는 당신이 나에게 오고 싶어 하는 열망을 먹는 것뿐이야. 당신의 갈증이, 나의 양식이 되고 있는 걸.” 그녀의 눈동자가 민준의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마치 그의 영혼 깊은 곳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거짓말….”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이 관계는, 일방적인 게 아니잖아?”
“사랑이라니.” 이령은 차가운 손으로 민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섬뜩한 정기를 품고 있었다. “인간의 사랑이란 참으로 나약해. 결국은 자신을 위한 것. 하지만 나는… 달라.”
그녀는 민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피부에 닿을 듯 말 듯 간지러웠다. “나는 당신의 존재 자체를 원해. 당신의 모든 기억, 모든 감정, 당신이 빛나던 순간들까지도… 전부 나의 일부가 되는 것을 원하지.”
그 순간, 민준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녀에게서 느끼는 것은 사랑만이 아니었다. 경외심, 두려움,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전율.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은 그를 파멸로 이끌 존재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놓을 수 없어.” 민준은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그녀의 몸은 놀랍도록 차갑고 가벼웠다. 마치 공기를 안는 것 같았다.
이령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섬뜩한 푸른빛이 일렁였다. 돔 천장의 먼지 쌓인 유리창 너머로, 희미한 별들이 보였다. 그러나 이령의 눈동자에 비친 별들은 더욱 차갑고 멀었다.
“놓을 수 없을 거야. 당신은 이미 너무 깊이 나에게 얽혀들었으니까.”
그녀의 손이 민준의 가슴을 감쌌다. 얇고 긴 손가락 끝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어, 심장으로 파고드는 것을 민준은 느꼈다. 고통은 아니었다. 오히려 몽롱하고 황홀한 기분이었다. 마치 생명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자리마다, 새로운 쾌락이 채워지는 듯했다.
그때였다. 천문대 돔의 어두운 벽면에 드리워진 이령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림자는 이령의 모습과 똑같지 않았다. 끝없이 꿈틀거리는 촉수 같기도 하고,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난 기괴한 짐승 같기도 한 형상이 잠시 비쳤다.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민준의 뇌리에 깊은 공포를 새겼다.
“당신은… 무엇이야?” 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령은 다시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웃음 속에 명백한 조롱이 섞여 있었다. “나는 당신이 찾던 모든 것이자, 동시에 당신을 파괴할 모든 것이지.”
그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낡은 천문대 돔 안의 어둠이 일순간 춤을 추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벽에 걸린 낡은 장비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먼지들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민준의 시야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천문대 돔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희미한 별들이 갑자기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불꽃들이 밤하늘을 수놓으며, 마치 우주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수많은 형상들이 기어 나왔다. 그것들은 그림자였지만,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뒤틀리고 일그러진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민준을 향해 손짓하며,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그의 영혼을 찢어발기는 듯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민준은 그녀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이령의 손이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압력은 보이지 않는 족쇄처럼 그를 묶었다.
“나의 세상이 당신의 세계를 침범하고 있는 거야.” 이령의 눈동자는 이제 순수한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금지된 사랑의 대가랄까. 당신의 세상은 이제 더 이상 평온할 수 없어. 나와 당신이 이어지는 한, 나의 그림자가 당신의 모든 것을 물들일 거야.”
그녀는 민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차가운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는 순간, 민준은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린 시절의 행복한 순간들,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 처음으로 그림을 그렸던 기억들… 모든 것이 그녀의 입술을 통해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아니,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그녀의 몸속으로 흡수되어, 그녀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그의 존재가 지워지고, 그녀의 존재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는 듯했다.
민준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몸은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시야가 흐려지고, 세상은 붉은 불꽃과 뒤틀린 그림자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
“이제 당신은 나의 일부가 되는 거야, 민준.”
이령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것은 승리의 선언이자, 동시에 그의 소멸을 알리는 만가(輓歌)였다. 민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더 이상 천문대의 어둠이 아니었다. 무한한 심연,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듯한 거대한 눈동자들.
“아아….” 마지막으로 내뱉은 숨결과 함께, 그의 의식은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의 심장은 고요해졌고, 그의 몸은 이령의 품에서 차갑게 식어갔다.
그러나 이령의 눈은 어떤 슬픔도, 망설임도 담고 있지 않았다. 오직 만족감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서서히 민준의 차가워진 몸을 놓았다. 그의 몸은 이제 영혼 없는 껍데기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그 몸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리고는 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붉게 타오르던 별들은 사라지고, 대신 검은 균열들이 밤하늘을 갈랐다. 그 균열 너머에서, 무수히 많은 눈동자들이 이 천문대, 그리고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인간의 사랑을 탐한 존재의 비극적인 연극이. 그리고 이제, 그녀의 세계가 서서히, 이 세계를 침식해 들어갈 차례였다. 그녀의 손에서 섬뜩한 푸른빛이 피어올랐다. 이령은 그 빛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침묵 속에, 고대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