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7화. 폐허의 파트너와 한 조각 소시지

    “크으으윽… 이런 젠장. 아무것도 없어.”

    서준은 녹슨 철근이 뼈대만 남은 마트 선반을 발로 툭 찼다. 먼지가 풀썩 솟구치며 희미한 햇빛 아래 반짝였다. 멸망 후 3년. 지긋지긋하게 봐온 풍경이었다. 모든 게 바스러지고, 텅 비고, 죽어 있었다.

    “서준 씨, 여기는 정말 끝물인가 봐요. 고작 썩은 비스킷 조각이라니….”

    뒤이어 들어온 하나가 눅눅한 비스킷 조각을 들고 혀를 쯧쯧 찼다. 그녀의 얼굴에 묻은 검댕과 땀방울이 햇살에 반짝였다. 어두운 폐허 속에서도 저리 반짝이는 얼굴이라니. 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괜히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끝물이라니, 여기 온 게 실수지. 이제 이 도시에서 건질 건 오직 잔해뿐이야.”

    서준은 이죽거리며 구석에 널브러진 카트를 발로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삭막한 공간에 울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반짝이는 게 있을지도!”

    하나는 낙천적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황폐한 세상에서 저런 무모한 긍정을 유지하는 게 용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잡동사니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오래된 인형의 팔, 찢어진 잡지, 유리 조각들.

    “하늘에서 황금이라도 떨어질 줄 알아? 시간 낭비하지 말고 밖으로 나갈 준비나 해. 날 어두워지면 귀찮은 것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할 테니까.”

    “아, 잠깐만요! 어? 이게 뭐지?”

    하나는 뭔가를 발견한 듯 손을 멈췄다. 작은 철제 상자.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서준은 눈썹을 치켜떴다. 저런 건 보통 빈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가끔은 예상치 못한 횡재를 안겨주기도 했다.

    하나는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실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예요? 낡은 종이랑… 이상한 병 조각?”

    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뭘 기대했다고.”

    그가 돌아서려 할 때, 하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서… 서준 씨. 저기, 저거 보세요.”

    하나는 상자 깊숙한 곳에서 발견한 얇은 캔 하나를 들어 올렸다. 먼지가 잔뜩 앉아 있었지만, 캔 특유의 반짝이는 재질은 숨길 수 없었다. 그리고 캔 옆면에 새겨진 글자. ‘프리미엄 소시지’.

    서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세상이 멸망하고 제일 먼저 사라진 것 중 하나가 가공육이었다. 이제는 전설처럼 회자되는, 꿈에서나 나올 법한 음식.

    “말도 안 돼… 그게 아직 유통기한이 남아있을 리가 없어.”

    “아니요! 보세요! 찌그러지지도 않았고, 심지어 캔따개도 붙어있어요!”

    하나는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로 캔을 서준에게 내밀었다. 서준은 망설였다.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과, 또 다른 실망을 맛볼 거라는 비관적인 예감이 충돌했다. 하지만 하나가 건네는 캔의 온기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가 캔을 받아든 순간, *쿵!* 둔중한 소리와 함께 건물이 흔들렸다. 천장에서 먼지가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뭐야?!”

    “놈들이야!”

    서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지고 날카로운 경계심이 스쳤다. 그는 반사적으로 하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쪽이야! 빨리!”

    그들이 발걸음을 재촉하자, 건물의 외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르르릉!* 먼지구름이 그들을 뒤쫓아왔다.

    “어디로 가요, 서준 씨?”

    “뒷문! 저쪽이 제일 안전해!”

    서준은 지형을 빠르게 파악하며 하나를 이끌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하나는 그의 뒤를 바싹 따랐다.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놈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젠장, 수가 좀 많은데?”

    서준은 뒤를 흘긋 보았다. 폐허의 어둠 속에서 솟아난 그림자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하나는 숨을 헐떡이며 낡은 선반 사이를 몸을 웅크린 채 지나갔다.

    갑자기, 그녀의 발이 삐끗했다. 균형을 잃은 하나가 휘청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으악!”

    “하나 씨!”

    서준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발목이 낡은 철골에 걸렸다. 둘은 속절없이 넘어졌다. 하나의 머리가 서준의 가슴에 부딪혔고, 팔다리가 뒤엉켰다. 넘어진 충격으로 캔 소시지가 손에서 미끄러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으… 아파!”

    “쉬잇! 움직이지 마!”

    서준은 넘어진 자세 그대로 하나를 끌어안아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그녀의 몸이 그의 아래에 완전히 깔렸다. 허둥지둥 넘어지면서도 그녀의 머리를 팔로 감싸 보호한 건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바로 코앞까지 놈들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끈적하고 역겨운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놈들의 시선이 그들이 숨어있는 선반 뒤를 스쳐 지나갔다. 서준은 하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움직이지 마. 숨도 제대로 쉬지 마.”

    하나의 심장 박동이 그의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 심장인지 그녀의 심장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너무 가까웠다. 그녀의 숨결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이상하게도,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의 정신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생각보다 더 작네…’

    놈들은 한참을 그들 주위를 맴돌았다. 시체를 찾으려는 건지,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건지. 그들의 짐승 같은 후각이 언제든 그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준은 숨을 멈추고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손에 땀이 흥건했지만, 하나를 감싼 팔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몇 분이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정적 끝에, 놈들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간 것 같아요.”

    하나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서준은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동시에, 그들의 민망한 자세가 의식되기 시작했다. 하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뺨을 간질이고, 그녀의 숨결이 그의 턱 밑에 닿아 있었다. 심지어 놈들의 위협보다 더 당황스러운 뜨거운 열기가 얼굴로 몰려왔다.

    “하나 씨, 이제 일어나세요.”

    서준은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하나가 그의 말에 스르륵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서준의 무릎이 삐끗하며 균형을 잃었다. *쿵!* 다시 둘은 바닥에 완전히 붙어버렸다. 이번에는 하나가 서준의 얼굴을 그대로 덮쳐버린 꼴이 되었다.

    “으… 으읍?!”

    하나의 입술이 서준의 입술에 닿았다. 맙소사. 이 상황에서 키스라니. 그것도 본의 아니게, 아주 퍽퍽한 먼지 맛이 나는. 서준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하나의 얼굴은 완전히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둘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멸망한 세상의 폐허 한가운데에서, 땀과 먼지로 뒤범벅된 채, 어색하고 민망한 침묵만이 흘렀다.

    “저… 저기… 서준 씨…!”

    하나는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얼른 자신의 입술을 손등으로 쓱쓱 닦아냈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양. 서준은 그 모습에 괜히 속이 상했다.

    “왜요! 제가 그렇게 더럽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 그게… 아흐흐흑.”

    하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만 잔뜩 붉혔다. 서준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로맨틱 코미디를 찍고 있는 자신들의 운명이 기가 막혔다.

    그때, 하나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서준 씨, 저거 봐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 그들이 엉망진창으로 뒹굴었던 자리 옆, 먼지투성이 바닥에 캔 소시지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놓여 있었다. 찌그러지지도 않고, 여전히 캔따개가 붙은 채로.

    서준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모든 소동과 민망함 끝에 살아남은 건, 고작 캔 하나라니.

    “하아… 결국 이거 하나 건지겠다고 난리를 친 꼴이 됐네요.”

    그가 캔을 주워들었다. 묵직하고 단단한 감촉. 이 멸망한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귀한 전리품이었다.

    “그래도… 배고파서 죽을 뻔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하나가 민망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준은 캔을 든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나눠 먹죠, 뭐.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니.”

    하나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구사일생이요? 그게 저 때문이에요?”

    “그럼 누구 때문인데요? 당신이 비스킷 조각 찾겠다고 안 헤매고, 캔 소시지 안 찾았으면 애초에 여기에 안 왔을 거고. 그럼 위험에 빠질 일도 없었겠죠.”

    그는 투덜거렸지만, 캔따개를 딸깍 열었다. 고소한 냄새가 폐허 가득 퍼졌다. 묵직한 소시지가 모습을 드러내자 하나의 눈이 반짝였다.

    “와… 진짜 소시지다!”

    하나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서준은 그 모습에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세상이 멸망하고, 삶이 매일매일 지옥 같은 날들의 연속인데도, 그녀는 여전히 이렇게 작은 것에 기뻐할 줄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이 황량한 세상에서 그녀를 파트너로 택한 이유가.

    “자, 어서 한 입 드세요. 기운 차려야지, 이 난리통에 살아남으려면.”

    서준은 소시지 한 조각을 떼어 하나에게 건넸다. 하나는 조심스럽게 소시지를 받아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가 서준의 가슴 한켠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평화도 잠시, 서준의 시선이 폐허 너머의 하늘로 향했다. 해는 이미 지평선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멀리서 희미한 연기 기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젠장. 또 뭔가 시작될 모양이군.”

    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 겨우 숨을 돌렸건만, 이 황폐한 세상은 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을 예고하는 듯했다. 하나는 소시지를 든 채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녀의 얼굴에도 다시금 긴장감이 스쳤다.

    “…이번엔 또 뭘까요, 서준 씨?”

    하나는 물었지만, 서준은 대답 대신 남은 소시지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이 폐허의 세상에서, 매일매일 이어지는 삶은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미지의 길을, 그들은 함께 걸어가야 했다. 그것이 이 엉터리 같은 세상에서 그들이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그때, 하나의 얼굴에 다시 한번 생기가 돌았다.

    “그래도, 소시지는 맛있네요! 이거 먹고 힘내요, 서준 씨!”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서준은 그런 하나를 보며 픽 웃었다. 그래, 이 망할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런 웃음이라도 필요할 터였다. 그는 하나에게 손짓했다.

    “가자. 이번엔 어디로 가든, 저 연기 기둥 쪽만 아니면 돼.”

    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준의 뒤를 따랐다. 비록 발걸음은 지치고, 앞날은 불투명했지만, 그들의 폐허 속 여정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서로에게 의지한 채, 그리고 이따금 터져 나오는 엉터리 같은 웃음과 함께.

  • 선협 (신선)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청룡호(青龍號)가 심우주를 가로지르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욕망, 즉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고자 하는 염원의 발현과도 같았다. 수천, 수만 광년을 넘어선 이 광막한 어둠 속에서, 함장 현우는 통신으로 들어오는 규칙적인 기계음 외에는 어떤 생명의 흔적도 감지할 수 없었다. 은하계의 가장자리를 벗어나, 오직 희미한 성운과 먼지 구름만이 펼쳐진 이 잊혀진 공간은, 모든 상상력을 집어삼킬 듯 고요했다.

    “함장님, 장기 항해로 인한 승무원들의 정신 건강에 이상 징후는 없습니다.” 부함장 강찬이 딱딱한 어조로 보고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군더더기 없이 정확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이 광활함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우리는 그저 먼지 한 톨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별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자들이기도 하니.”

    그때였다. 조타수 민준의 좌석에서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함장님! 미확인 물체 감지! 좌표는… 이전에 기록된 어떤 것도 아닙니다!”

    현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모든 시스템 점검! 충돌 경로는 아니지?”

    “아닙니다! 하지만… 엄청난 크기입니다. 기존 망원경으로는 형체를 온전히 담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물질로 구성된 듯합니다!” 민준의 목소리에 당황과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분석실에 있던 고고학자 겸 과학 담당 아라가 스크린으로 몸을 바싹 기울였다. “이건… 저희가 아는 어떤 문명의 흔적도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물체도 아니고요. 형태가… 너무나도 정교합니다.”

    청룡호는 조심스럽게 미확인 물체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수백 킬로미터 거리에 다다랐을 때, 메인 스크린에 그 압도적인 자태가 드러났다.

    “세상에…” 아라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거대한 오각 기둥이었다.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매끄러운 표면은 오색찬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에 박힌 보석처럼, 혹은 태초의 에너지를 응축한 듯한 신비로운 광채를 내뿜었다. 어떤 면은 옥처럼 투명했고, 어떤 면은 금속처럼 단단해 보였으며, 또 어떤 면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듯했다.

    “에너지 파장 분석 결과는?” 현우가 침착하게 물었다.

    민준이 당황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측정 불능입니다, 함장님. 저희가 가진 어떤 센서로도 파장을 읽어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변 공간의 에너지가 비정상적으로 높습니다. 마치 중심부에 거대한 발전기가 있는 것처럼요.”

    “무기일 수도 있습니다, 함장님.” 강찬이 경고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은 늘 경계해야 합니다.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 전술 방어막을 최대로 올리십시오.”

    현우는 잠시 침묵하며 거대한 오각 기둥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단순한 기계적 분석을 넘어, 본능적인 경외감을 담고 있었다. “아니, 강찬. 저건 무기가 아니야. 적어도 우리가 아는 형태의 무기는 아니야. 저건… 어떠한 존재의 흔적이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의 흔적.”

    “함장님, 저기요!” 아라가 스크린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기둥의 한 면에… 문양 같은 것이 있습니다! 흐릿하지만, 뭔가가 새겨져 있는 것 같아요!”

    청룡호는 더욱 가까이 접근했다. 오각 기둥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잡한 기호들의 조합이자, 동시에 살아 숨 쉬는 듯한 에너지를 머금고 있었다. 문양 하나하나에서 미세한 빛이 깜빡이며, 마치 고대의 언어로 속삭이는 듯한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근접 스캔 실시! 함선 외부 팔을 이용해 샘플 채취를 시도한다.” 현우가 명령했다.

    “위험합니다, 함장님!” 강찬이 다시 반대했지만, 현우는 이미 결심한 듯했다.

    “강찬, 인류가 여기까지 온 건 위험을 감수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외계 유물이 아니야. 내 직감이 말하고 있어. 이건… 우리의 운명을 바꿀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청룡호의 로봇 팔이 조심스럽게 기둥에 접근했다. 팔 끝의 고성능 드릴이 회전하며 기둥 표면에 닿자마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드릴의 초고열 날이 기둥에 닿는 순간, 거대한 오각 기둥 전체가 더욱 강렬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선명한 푸른색, 황금색, 은백색의 빛이 뒤섞여 춤추며, 청룡호의 함교 내부를 환하게 비췄다.

    “에너지 수치 급상승! 함장님, 모든 계측기가 오작동 중입니다!” 민준이 외쳤다. “선체에 미약한 진동이 느껴집니다!”

    “드릴은 어때?!” 아라가 다급하게 물었다.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드릴이… 녹고 있어요!”

    그 순간, 거대한 오각 기둥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파도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파장은 물질을 꿰뚫고 청룡호 내부로 침투했다. 기계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오류를 뿜어냈고, 함교 내부의 조명은 깜빡였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승무원들의 반응이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아라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이건… 이건 단순히 에너지가 아니에요… 정보가… 제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와요!”

    현우 또한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격렬한 진동을 느꼈다. 그의 심장이 거대한 종처럼 울리고, 폐부 깊숙이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눈앞이 흐릿해지며, 수천 년의 시간이 압축된 듯한 광경이 그의 의식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황량한 대지 위에 홀로 빛나는 거대한 오각 기둥, 그 주변으로 모여들어 기둥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들이마시는 고대의 존재들. 그들은 육신을 초월한 듯 보였고, 그들의 손짓 한 번에 별들이 움직이며 은하가 휘감기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들의 모습은 인간의 형상과 닮았지만, 동시에 신과 같은 위엄과 아득한 선인(仙人)들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허공에 앉아 명상하며, 기둥에서 흘러나오는 무언가를 흡수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민준이 측정한 ‘에너지’가 아니었다. 태초의 기운, 생명의 근원, 우주의 섭리를 담고 있는 ‘선기(仙氣)’와도 같은 것이었다.

    “함장님!” 강찬의 외침이 현우의 환각을 깨뜨렸다. 강찬은 강렬한 에너지 파장에도 끄떡없이 중심을 잡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함장님, 괜찮으십니까? 정신을 차리십시오!”

    현우는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강찬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혼란과 경외, 그리고 알 수 없는 깨달음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손가락 끝에서 미약하게나마 영롱한 기운이 맴도는 것을 느꼈다. 착각이 아니었다.

    오각 기둥은 여전히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처음의 폭주만큼은 아니었다. 마치 청룡호, 아니, 청룡호의 승무원들에게 메시지를 전한 후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현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유물이 아니야. 이건… 우주 영석(宇宙靈石)이야.”

    “영석이요?” 아라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경외심으로 가득했다. “그건… 고대 전설에 나오는… 수련자들이 기를 흡수하는…?”

    현우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각 기둥, 즉 우주 영석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의식 속에서 방금 스쳐 지나간 고대의 존재들과 그들이 행했던 수련의 방식이, 이제는 막연한 환각이 아닌, 실재하는 가능성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청룡호는 더 이상 단순한 탐사선이 아니었다. 이 심우주에 떠 있는 우주선은 이제, 태고의 선기(仙氣)를 품은 거대한 수련장이자, 인류가 잊었던, 혹은 미처 알지 못했던 초월의 문을 연 열쇠가 될 터였다. 이 광활한 어둠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조용히 열리고 있었다.

  • 좀비 아포칼립스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서울은, 아니, 세상은 언제부턴가 거대한 폐허가 되어버렸다. 높이 솟았던 빌딩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고, 거리에는 검게 타거나 녹슨 차량들이 마치 거대한 곤충들의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파괴의 상징들 사이를, 이제는 ‘것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배회했다. 녀석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갈망하는 끔찍한 괴물들이었다.

    지훈은 낡고 녹슨 철제 셔터 아래로 몸을 숙여 겨우 비집고 들어갔다.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이제는 익숙한 냄새였다. 뒤따라 들어온 유진은 낡은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위를 밝혔다. 희미한 불꽃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지독한 농담처럼 흔들렸다.

    “또 빈털터리 아니겠지?” 유진이 투덜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지쳐 있었다. 지난 며칠간 아무것도 건진 게 없었다. 식량은 바닥을 드러냈고, 물은 바싹 말라 있었다.

    “어딘가에는… 뭔가 있겠지.” 지훈은 대답했지만, 그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희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감정인지 뼈저리게 느끼는 나날이었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한때 대형 서점이었던 모양이었다. 퀴퀴한 종이 냄새와 함께 바닥에 뒹구는 찢어진 책들이 과거의 영광을 초라하게 전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찾는 것은 지식도, 예술도 아니었다. 그저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썩지 않은 통조림 하나, 목을 축일 수 있는 물 한 모금, 혹은 ‘것들’에게서 자신들을 지켜줄 최소한의 무기라도 좋았다.

    “이곳도 이미 한 번 휩쓸고 간 것 같네.” 유진이 책꽂이 사이를 헤치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라이터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아니면 애초에 사람들이 이런 곳까지는 안 왔거나. 책에 관심 있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

    “그럴 수도.” 지훈은 찢겨나간 벽지 사이로 드러난 콘크리트 벽을 훑어보았다. 무너져 내린 천장 때문에 건물 자체가 위태로웠다. 자칫하면 자신들이 이 안에 갇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 유진이 멈칫했다. “잠깐만, 지훈아. 저기 봐.”

    그녀가 가리킨 곳은 서점의 가장 안쪽, 무너진 벽 너머였다. 원래는 창고나 직원 통로였을 법한 곳이었는데, 그 너머로 어둠에 잠긴 공간이 어렴풋이 보였다. 특이한 건 그곳만은 건물 잔해나 부서진 집기들로 막혀 있지 않고, 비교적 온전히 보존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는 것이다.

    “저긴 뭐야?” 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서점 창고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게도, 그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스며 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었다. 유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아직 아무도 못 들어간 곳 아닐까?” 그녀의 목소리에 희망과 함께 미미한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미지의 공간은 항상 위험을 동반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손대지 않은 곳에는 귀한 것이 있을 가능성도 높았다.

    지훈은 한동안 망설였다. 본능이 경고음을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이끌림이 그를 그곳으로 향하게 했다. 결국 그는 낡은 칼자루를 고쳐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자. 어차피 이대로 죽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그들은 조심스럽게 무너진 벽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자,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서점의 한 부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었다. 작고 둥근 방이었는데, 벽은 오래된 돌로 마감되어 있었고, 천장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먼지는 있었지만, 마치 누군가 주기적으로 청소라도 한 듯, 바깥의 폐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낮은 돌제단 위에 하나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책이었다.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고대의 책이었다. 가죽으로 엮은 듯한 표지는 짙은 녹색을 띠고 있었고, 그 위에는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오래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마치 방금 인쇄라도 한 듯 선명했다. 그리고 유진이 아까 느꼈던 희미한 빛은 바로 이 책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미세하게 깜빡이며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유진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은 경이로움과 두려움으로 동시에 흔들렸다.

    지훈은 책에 홀린 듯 천천히 다가갔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이 책은 평범한 책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확신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책의 표면을 만졌다.

    그 순간,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강렬한 충격이 휘몰아쳤다. 눈앞이 번쩍하며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그의 뇌리에는 수많은 이미지와 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고대의 언어들이 폭풍처럼 밀려들어왔다. 그것들은 너무나 생생하고 강렬해서 마치 그가 고대 세계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숨겨진 힘… 고대의 계약… 깨어날 자…’

    정신을 차렸을 때, 지훈은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몸은 후들거렸지만, 묘한 감각이 전신을 감돌았다. 마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난 듯한, 설명할 수 없는 충만함이었다. 그의 손에 닿았던 책은 더 이상 희미한 빛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빛이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든 듯했다.

    “지훈아! 괜찮아? 뭐 하는 거야?” 유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지훈을 붙잡았다.

    지훈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몰라… 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뭔가… 이상해…”

    그때였다. 귓가에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것들’의 울음소리였다.

    *크아아악!*

    그들의 울음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의 ‘것들’이 이 폐허 건물 주변으로 몰려오는 소리였다. 지훈이 책을 만진 순간 퍼져나간 알 수 없는 힘이 ‘것들’을 자극한 것이 분명했다.

    “젠장! 몰려와! 당장 도망쳐야 해!” 유진이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하지만 지훈은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동시에 그의 심장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감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시야가 달라졌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공간 사이사이에 흐릿하게 보였다. 그리고 귓가에 끊임없이 고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힘을 믿어라… 깨어난 자여…’

    밖에서는 쿵, 쿵,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것들’이 문을 부수려는 듯 벽과 문을 들이받는 소리였다. 이대로라면 오래 버틸 수 없을 터였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책이 있던 제단을 돌아보았다. 책은 사라진 듯했지만, 그의 손바닥에는 검은색 상형문자 문신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치 책의 표지가 그의 피부로 옮겨온 듯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제단의 돌 틈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은 제단 위의 돌멩이 하나를 띄워 올렸다. 공중으로 떠오른 돌멩이는 마치 지훈의 의지에 반응이라도 하듯, 느릿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이건… 대체…” 유진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공중에 떠오른 돌멩이와 지훈의 손바닥을 번갈아 보며 경악에 물들어 있었다.

    *콰아앙!*

    바깥 문이 완전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것들’이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훈은 공중에 떠오른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이 힘은… 자신을 지켜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부서진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 새겨진 상형문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빛에 반응하듯, 공중에 떠오른 돌멩이가 마치 발사된 탄환처럼 빠른 속도로 문을 향해 날아갔다.

    *크아아악!*

    문밖에서 ‘것들’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비명이었다. 지훈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자신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고대의 마법이었다. 이제, 이 알 수 없는 힘과 함께, 그들의 생존을 건 싸움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과연, 이 힘은 그들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또 다른 저주일까.

    지훈은 고개를 돌려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아직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한 줄기 새로운 희망의 빛이 서려 있었다.

  • 무협 독립적인 단편 소설

    강철 도시의 기이한 파문

    강호인. 그는 이름 그대로 강호인이었다. 한때 무림에서 그의 이름 석 자가 회오리처럼 몰아치면 천하가 숨을 죽였고, 그의 검 끝이 향하는 곳에선 피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 모든 과거를 뒤로하고, 서울 한복판의 낡은 고층 아파트 17층에서 평범한 가장으로 살고 있었다. 새벽녘, 아파트 단지 뒤편의 작은 동산에서 태극권을 수련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의 일상은 그저 고요한 물과 같았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른 새벽 공기를 가르며 육체를 단련했다. 마지막 동작을 마친 후,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찬 도시를 내려다봤다. 거대한 콘크리트 숲 속에서 그의 내공은 잠자고 있었지만, 감각만큼은 여전히 살아 숨 쉬었다. 도시의 소음, 사람들의 기운, 그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거대한 파동을 이루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데, 미묘한 위화감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식탁 위에 놓인 찻잔이 아주 미세하게, 마치 누가 건드린 듯이 움직이는 것을 목격했다. 강호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고개를 저었다.

    며칠 후, 이상한 일들은 더욱 잦아졌다. 늦은 밤, 거실에서 홀로 앉아 무협지를 읽던 그의 귀에 알 수 없는 속삭임이 들렸다. 바람 소리인가 싶었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다음 날에는 분명 제자리에 두었던 안경이 뜬금없이 침대 밑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밤마다 희미하게,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한 알 수 없는 진동이 그의 수련으로 단련된 예민한 감각을 자극했다.

    “이것 참… 꽤나 흥미로운데.”

    강호인은 더 이상 단순한 착각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평생을 살기로 가득한 무림 속에서 살아왔던 그는, 비록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무엇’을 감지하는 데 탁월했다. 이것은 귀신이라기보다는, 어떤 뒤틀린 기운의 흐름에 가까웠다. 그는 거실 중앙에 앉아 정좌하고 눈을 감았다. 평소에는 봉인해두었던 내공을 아주 미세하게 개방하여 주변의 기운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의 정신은 거미줄처럼 뻗어나가 아파트 구석구석을 훑었다.

    아파트의 기운은 본래 고요해야 할 강물처럼 혼란스러웠다. 곳곳에서 미약한 기운의 파장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곳, 거실 벽의 특정 지점에서 유독 강하고 불안정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 땅속 깊이 묻혔던 흉검(凶劍)이 스스로 깨어나는 것과 같은 감각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현상은 더욱 격렬해졌다. TV가 스스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주방에서는 냄비와 프라이팬이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냉장고 문이 쾅 하고 열렸다 닫히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가 이 아파트를 놀이터 삼아 난동을 부리는 것 같았다.

    “이 무례한 기운 같으니.”

    강호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조용히 서랍을 열어, 과거의 자신을 상징하던 검은 도포를 꺼내 입었다. 핏빛이 감도는 어두운 실크 천이 그의 몸에 닿자,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혈맥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는 거실 중앙으로 걸어갔다. 주먹을 쥐었다 펴자, 그의 손에서 옅은 푸른빛 기운이 피어났다. 현무신공(玄武神功), 그의 문파에서 전해 내려오는 심오한 내공심법이었다. 이 기운은 만물을 감싸고 조화롭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감히 이런 세속의 공간에서 난동을 부리다니. 너의 근원이 무엇이든, 이제 잠잠해질 때가 되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벽에서 더욱 강렬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벽지가 찢어지고, 그 안에서 희미한 빛을 발하는 손바닥만 한 쇠 조각이 드러났다. 낡고 녹슬어 보이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태산을 뒤흔들 만큼 강력했다. 쇠 조각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그것은 분명, 무림의 전설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알려진 어떤 이물(異物)이었다. 아마도 아파트 공사 당시,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이 우연히 발견되어 벽 속에 박히게 된 모양이었다.

    쇠 조각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강호인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그의 정신을 교란하고, 그의 내공을 흩트리려는 듯 사나웠다. 공중에 떠 있던 가구들이 한꺼번에 그에게 날아들었다. 강호인은 가볍게 몸을 피하며,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으로 날아드는 물건들을 쳐내거나 방향을 틀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물 위를 걷는 듯 가벼웠고, 날아드는 탁자와 의자들은 그의 주변에서 허공을 가르다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진정한 싸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강호인의 내공은 쇠 조각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악한 기운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쇠 조각의 기운은 파괴적이고 혼란스러웠지만, 강호인의 현무신공은 견고하고 조화로웠다. 그는 싸운다기보다, 마치 폭주하는 야수를 온몸으로 감싸 안아 진정시키려는 듯이 기운을 펼쳐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쇠 조각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현무진경(玄武眞經)의 정수를 발휘하여, 혼란스러운 기운을 조금씩 정화해나갔다. 이 과정은 강렬한 힘의 대결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섬세한 조율의 과정이었다. 마치 거대한 바다에서 폭풍을 잠재우는 선원처럼, 그는 자신의 모든 정신력과 내공을 쏟아부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납게 요동치던 쇠 조각의 기운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공중을 떠다니던 모든 물건들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졌다. TV는 완전히 꺼졌고, 주방의 냉장고 문도 조용히 닫혔다. 모든 소란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강호인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의 몸은 마치 천 개의 바위를 짊어진 듯 무거웠지만, 그의 눈빛은 맑고 평온했다. 벽 속에 박혀 있던 쇠 조각은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았다. 푸석한 회색빛을 띤 채, 벽에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그것을 주워 올렸다. 차가웠지만, 더 이상 위협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낡고 평범한 금속 조각에 불과했다.

    그는 조용히 쇠 조각을 주머니에 넣었다. 엉망이 된 거실을 둘러봤다. 파손된 가구, 찢겨진 벽지, 깨진 유리 파편들. 마치 거대한 폭풍이 할퀴고 지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상하리만치 평화로운 고요가 찾아와 있었다.

    창밖의 도시는 여전히 빛을 발하며 고요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잠들어 있거나, 혹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터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강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림의 이치와 기운은, 그가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결국 그를 따라오는 듯했다. 이 강철과 콘크리트의 도시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기운들은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쇠 조각을 안전한 곳에 보관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지러워진 거실을 정리하며, 그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진정한 무림은 특정 장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곳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자신은, 그 흐름 속에서 여전히 작은 파문 하나를 일으키는 존재일 뿐이라고. 그의 손은 조용히 찢겨진 벽지를 쓸어내렸다. 고층 아파트 17층, 깊은 밤의 고요 속으로, 또 다른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 심리 스릴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밤 11시 47분.
    수진은 찌뿌둥한 어깨를 돌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희미하게 번지는 복도등은 언제나 그랬듯 차가웠고, 그녀의 그림자는 문턱을 넘어 거실 한가운데까지 길게 늘어섰다. 탁한 공기 속에서 하루의 피로가 비로소 제 무게를 드러내는 시간. 익숙한 도시의 소음조차 이 시간만큼은 아파트 벽면에 부딪혀 고요한 절규처럼 들렸다.

    “하아….”

    작은 한숨과 함께 스위치를 눌렀지만, 형광등은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찰나의 깜빡임 후 이내 어둠 속에 갇혔다.

    “뭐야, 또 나갔어?”

    지난달에 갈았는데. 수진은 혀를 차며 휴대폰 손전등을 켰다. 좁은 거실은 빛에 따라 움찔거리는 그림자를 토해냈고, 그 그림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벽면을 기어 다녔다. 폰 불빛에 의지해 비틀거리며 침실로 향했다.

    “오늘은 진짜 그냥 잘래….”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침실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낡은 마루바닥에서 ‘삐걱’ 하는 소리가 울렸다. 거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수진은 순간 멈칫했다. 누가 들어왔나? 하는 생각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방범창은 굳게 닫혀 있었다. 늦은 시간, 피곤에 지친 착각이리라. 수진은 애써 생각을 지우고 침실 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벗어둔 옷가지들이 보였다. 어제 분명히 세탁 바구니에 넣었던 것 같은데, 왜 여기 있지? 피곤한 탓에 기억이 뒤섞인 걸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옷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손끝에 닿는 섬뜩한 한기. 훅, 하고 끼쳐오는 싸늘한 기운에 몸서리가 쳐졌다. 보일러를 약하게 틀어뒀는데도 방안은 으스스하게 추웠다. 에어컨을 켰던가? 아니, 그럴 리 없었다. 한겨울이었다.

    “추워….”

    옷을 바구니에 던져 넣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차가운 이불이 뺨에 닿았다. 이상했다. 이불은 분명 실내에 있었는데, 마치 바깥에 내놓았던 것처럼 싸늘했다. 신경이 곤두서는 불쾌감에 몸을 뒤척였다. 이대로 잠들 수 있을까.

    **

    새벽 3시 12분.
    잠결에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에 수진은 눈을 번쩍 떴다.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혹은 흐느끼는 듯한 희미한 소리.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또렷해지는 소리는 꿈이 아니었다.

    ‘흐윽… 흐윽….’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울음을 참는 듯한, 혹은 숨넘어가기 직전의 노인이 내뱉는 듯한 기이한 소리. 소름이 쫙 돋았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 눈을 부릅떴다.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바로 코앞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했다.

    ‘쉬이… 흐읍….’

    소리는 침대 발치에서부터 시작되어 머리맡으로 기어 올라오는 듯했다. 수진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에 휩싸였다. 눈을 감았다 떴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소리는 그녀의 귓가를 맴돌며 뼈 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누구… 누구세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침대 옆 협탁에 놓여있던 작은 유리 화병이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들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났다.
    수진은 숨도 쉬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팔로 머리를 감싸 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누가 봐도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화병은 협탁 가장 안쪽에 놓여 있었고, 그녀의 잠버릇이 아무리 험해도 손에 닿을 거리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대신 섬뜩한 존재감이 침실을 가득 채웠다. 마치 누군가 숨죽여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 그녀의 살갗을 스치는 싸늘한 기운이 등골을 훑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몇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두려움에 떨던 수진은 용기를 내어 휴대폰 손전등을 켰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불빛이 침실을 비췄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화병이 깨진 것은 분명했지만, 침실 안에 그녀 외에 다른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맨발에 차가운 유리 파편이 닿을까 조심하며 거실로 향했다. 혹시나 거실에 누군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거실은 침실보다 훨씬 추웠다. 손전등 빛이 닿는 곳마다 희미한 그림자들이 흔들렸다. 벽에 걸린 액자들이 미묘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아침에는 분명히 똑바로 걸려 있었는데.
    그녀의 시선이 거실 창문으로 향했다. 창밖은 어두웠고, 도시는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창문에 김이 서려 있었다.
    마치 누군가 창문에 대고 숨을 크게 내쉬기라도 한 것처럼, 동그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수진은 소름이 끼쳐 뒷걸음질 쳤다. 실내 온도가 이렇게 낮은데, 창문에 김이 서릴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저렇게 특정 형태로.

    그녀가 창문에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 폰 불빛을 비추었다.
    창문에 서린 김 위에, 손가락으로 쓰인 듯한 글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나…’

    그녀는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걸까? 아니었다. 분명히 ‘나’라는 글자였다.
    그때, 뒤에서 ‘쾅!’ 하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수진은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봤다.
    부엌이었다. 싱크대 위에 놓여있던 접시들이 산산조각 나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깨진 접시들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붉은 액체가 흥건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핏자국처럼, 섬뜩하게.

    “아악!”

    수진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거실 천장의 형광등이 ‘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켜졌다.
    환하게 밝아진 거실. 하지만 그 밝음은 오히려 공포를 증폭시켰다.
    싱크대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액체는 바닥을 타고 거실 한가운데까지 번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액체 위로, 그녀가 어제 입고 벗어둔 옷가지들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아까 침대 위에 있던 그 옷이었다.

    문득, 수진의 발밑에 뭔가 밟히는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것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는 깨진 유리 화병 조각들 사이로, 검고 축축한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길게 늘어진 그것은, 마치 머리카락 같았다.
    아니, 머리카락이었다.
    아주 긴, 검은 머리카락 다발이 화병 조각들 위를 기어가는 듯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수진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깨진 접시들 사이로 선명하게 드러난 검붉은 액체 위에 흩뿌려진 흰색 조각들이었다.
    마치… 사람의 이빨 조각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춥다….’

    귓가에, 바로 귓가에 차가운 목소리가 속삭였다.
    수진은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감각에 온몸이 마비되었다.
    그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는 눈을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켜진 형광등은 다시 ‘지직-‘ 거리며 깜빡였다.
    그리고 그 불빛 속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그림자가 보였다.
    수진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림자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듯했다.

    “누… 누구세요….”

    그녀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그림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은 그녀를 향해 뻗어오는 듯했다.
    그리고 그 손가락 끝에서, 검붉은 액체 한 방울이 뚝,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진은 눈을 감았다. 살려달라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그녀를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것처럼, 강한 힘으로.

    ‘…나와 함께….’

    다시 한번, 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수진은 이를 악물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112를 누르려는 순간.
    갑자기, 아파트 전체의 전기가 나간 듯, 모든 불빛이 꺼졌다.
    주변은 순식간에 암흑으로 변했다.
    창밖의 도시 불빛조차 침묵한 듯, 완벽한 어둠.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수진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온기가.
    누군가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듯했다.
    차갑고 축축한 기운이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

    ‘…찾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등 뒤에 있는 존재가 희미하게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가까이서.
    마치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이제는… 같이 갈 시간이야….’

    수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마치 거대한 존재에게 먹히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몸부림치고 싶었지만, 사슬에 묶인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아파트의 고요는 이제 더 이상 침묵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를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어둠의 심장이었다.
    그리고 그 심장이, 지금 그녀의 바로 뒤에서 뛰고 있었다.
    아주 차갑고, 아주 느리게.
    그녀의 모든 감각이 비명을 지르며 마지막 경고를 보냈다.
    이곳은 더 이상 그녀의 집이 아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마법소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27화: 심연의 울림

    어둠이 검은 벨벳처럼 온 공간을 뒤덮고 있었다. 빛나와 가람, 그리고 빛나의 어깨 위에서 작게 웅얼거리는 아루는 거대한 원형의 석실 중앙에 서 있었다. 그들이 방금 넘어온 통로의 입구는 이미 희미한 잔광만 남긴 채 닫혀버린 듯했다.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고개를 들어도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손전등 불빛이 닿는 벽면에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고대의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것은 날개를 펼친 새의 형상이었고, 어떤 것은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도형들의 연속이었다. 마치 살아있는 듯 희미하게 빛을 머금고 있었지만, 그 빛은 따뜻하기보다는 섬뜩했다.

    바닥은 매끄러운 검은 돌로 되어 있었고, 그 위에 빽빽하게 새겨진 문양들이 복잡한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중심에는 지름이 족히 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원형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단 표면은 닳아 해진 듯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미세한 균열 사이로 희미한 마력이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대체… 무슨 마법진일까?” 가람이 낮게 읊조리며 제단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공기 중에 떠도는 묘한 압력과 오래된 마력의 냄새는 그녀의 본능적인 경계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마력의 흐름이 보통이 아니야. 뭔가… 거대한 것을 봉인했거나, 아니면… 깨우고 있는 건지도.”

    빛나는 제단 주변을 맴돌며 시선을 내렸다. “봉인… 깨운다니?”

    “이런 규모의 마법진은 그냥 장식일 리 없어.” 가람은 손전등으로 제단의 표면을 비췄다. 손전등 불빛이 닿는 부분마다, 제단의 검은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이 한층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심해의 생물들이 자극을 받아 발광하는 것처럼, 희미한 푸른색과 보랏빛이 깜빡였다.

    아루는 빛나의 어깨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크으… 위험해… 이상한 기운이야…”

    빛나는 아루의 말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제단 중앙, 다른 문양들과는 확연히 다른, 깊게 파인 둥근 홈을 발견했다. 마치 무언가를 끼워 넣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빛나는 홀린 듯 그 홈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아루가 날카롭게 외쳤다. “안 돼! 빛나!”

    아루의 경고와 동시에, 석실 전체가 둔탁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하는 저음의 진동이 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벽면의 고대 문양들이 일제히 격렬하게 붉은빛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그 빛은 점멸하며 눈을 현혹했다.

    “무슨 일이야?!” 가람이 외쳤다.

    제단 중앙의 문양들이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격렬하게 박동했다. 그 빛은 점점 강렬해지더니, 이내 제단의 둥근 홈에서 검은 그림자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액체처럼 끓어오르던 그림자는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집, 날카로운 발톱과 뿔. 그것은 돌과 어둠이 뒤섞여 만들어진 듯한 기괴한 형상의 존재였다. 얼굴은 없었지만, 붉게 타오르는 두 개의 눈은 사악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석실 전체를 압도하는 존재감에 빛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수호자…!” 아루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거대한 수호자가 맹렬한 포효와 함께 공격해왔다. 그 거대한 돌팔이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지자, 석실의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안 돼! 물러서, 빛나!” 가람이 몸을 날려 빛나를 옆으로 밀쳤다. 수호자의 팔이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강타했고, 바닥의 검은 돌이 산산조각 났다.

    “우린… 마법소녀잖아!” 빛나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별빛이여, 나의 이름을 속삭여라! 빛의 수호자, 세레스나!”

    가람도 빛나의 옆에 서서 외쳤다. “강물이여, 나의 영혼을 감싸라! 물의 수호자, 리베아!”

    찬란한 빛과 부드러운 물의 파동이 그들을 감쌌다. 빛나는 순백의 드레스와 빛나는 날개를 가진 ‘세레스나’로, 가람은 푸른색 물결무늬 갑옷과 물결치는 장발을 가진 ‘리베아’로 변신했다. 그들의 손에는 각각 빛나는 스태프와 은빛 활이 들려 있었다.

    “아루, 분석해줘! 약점은?” 세레스나가 외쳤다.

    “크으… 온몸이 마력의 결정이야… 약점이 보이지 않아!” 아루가 빛나의 어깨에서 날아올라 석실을 재빠르게 한 바퀴 돌았다.

    수호자는 아랑곳없이 다시 공격해왔다. 거대한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물리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세레스나가 빛의 방어막을 펼쳤지만, 수호자의 주먹이 닿자 방어막이 금이 가는 소리를 냈다.

    “이대로는 안 돼! 리베아, 묶어!”

    “알았어!” 리베아가 활시위를 당기자 푸른 물의 화살이 수호자를 향해 날아갔다. 화살은 수호자의 몸에 닿자마자 물줄기로 변해 밧줄처럼 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수호자는 꿈쩍도 하지 않고 어둠의 기운을 내뿜어 물의 밧줄을 찢어버렸다.

    “안 통하잖아?!” 리베아가 당황했다.

    수호자의 붉은 눈이 세레스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수호자의 손에서 검은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어둠의 번개는 피할 틈도 없이 세레스나를 강타했다.

    “크악!” 세레스나는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변신한 몸에서 빛이 희미해졌다.

    “빛나!” 리베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괜찮아… 콜록… 이 정도는…” 세레스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온몸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때, 아루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세레스나! 심장 부분! 뭔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어!”

    세레스나는 아루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수호자의 거대한 흉갑처럼 보이는 부분에 아주 희미하게, 다른 문양들과는 다른 별 모양의 문양이 깜빡이고 있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빛이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했다.

    “저게 약점인가?!” 세레스나가 이를 악물었다. “리베아! 다시 한번 묶어줘! 이번엔 내가 길을 열게!”

    “좋아!” 리베아는 망설임 없이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이번에는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었다. 그녀의 마력이 활에 집중되자, 활촉에서 뿜어져 나온 물이 얼음 칼날처럼 변했다.

    “성스러운 파도!” 리베아가 외치자, 거대한 물의 파도가 수호자를 향해 돌진했다. 파도는 수호자의 움직임을 잠시 둔화시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세레스나가 스태프를 높이 들어 올렸다. “별의 심판!”

    그녀의 스태프 끝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마치 작열하는 태양처럼 응축되었다. 압도적인 빛의 에너지가 수호자의 약점인 별 문양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콰앙!

    굉음과 함께 섬광이 석실을 뒤덮었다. 수호자는 고통스러운 울부짖음과 함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검은 몸체에 별 문양을 중심으로 거대한 금이 생겨났고, 이내 온몸이 조각나며 무너져 내렸다. 돌과 어둠으로 이루어진 몸은 산산조각 나더니, 이내 검은 연기처럼 허공으로 사라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변신이 풀린 빛나와 가람은 서로를 부축했다. 수호자가 사라진 자리, 제단 중앙의 움푹 파인 홈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빛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게… 뭐지?” 빛나는 조심스럽게 그 빛에 손을 뻗었다.

    빛이 그녀의 손에 닿자, 제단 전체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고대어로 된 홀로그램 메시지가 솟아올랐다. 형형색색의 빛으로 이루어진 문자들이 공중에 떠다녔다.

    “이건… 고대어잖아?” 가람이 눈을 크게 떴다. “해석하기 어려운데…”

    아루가 빛나의 어깨에 앉아 홀로그램 메시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크으… 보인다… 일부만… ‘재앙… 봉인… 진실… 태양의 아이…’”

    “재앙? 봉인? 태양의 아이?” 빛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메시지는 불완전했고, 더 많은 질문을 남겼다.

    그때, 갑자기 석실 전체가 다시 한번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더욱 거칠고 불규칙한 진동이었다. 천장에서 작은 돌멩이들과 흙먼지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안 돼! 수호자가 사라지자마자 유적이 붕괴하기 시작했어!” 가람이 다급하게 외쳤다. “빨리 나가야 해!”

    홀로그램 메시지는 서서히 희미해져갔다. 빛나는 메시지가 사라지기 직전, 그 빛 속에서 작은 조각 하나를 움켜쥐었다. 손안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그녀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중요성을 느꼈다.

    “이쪽이야!” 아루가 외치며 석실의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통로를 가리켰다.

    두 소녀는 아루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유적의 일부를 뒤로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거대한 석벽이 굉음과 함께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빛나의 손안에 쥐어진 작은 조각은 그녀의 맥박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작은 조각이 이 거대한 유적의, 혹은 그 이상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예감이 그녀의 심장을 강하게 울렸다.

    그들은 미지의 심연 속으로, 다음 진실을 찾아 달리고 있었다.

  • 심리 스릴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망각의 심연: 일곱 번째 균열

    한지훈 박사의 숨결은 차갑고 축축한 지하 공기 속에서 하얗게 부서져 흩어졌다. 손전등 불빛이 가느다란 춤을 추며 거대한 석벽 위를 스쳤다. 벽돌 한 장 한 장이 수만 년의 세월을 짊어진 듯, 눅눅한 이끼와 알 수 없는 광물질로 얼룩져 있었다. 이곳은 ‘어둠의 심장’이라 불리는 미지의 지하 유적 가장 깊숙한 곳. 마지막 탐사대가 모두 실종된 후, 그 혼자 남겨진 곳이었다.

    “젠장… 이건 말도 안 돼.”

    그의 중얼거림은 메아리가 되어 멀리 어딘가로 사라졌다. 미세한 떨림이 손끝에서 시작되어 온몸으로 번졌다. 벌써 사흘째다. 통신은 끊겼고, 식량은 바닥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 유적이 품고 있는 비밀이, 사라진 동료들의 흔적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계속해서 이끌던 섬뜩한 끌림이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이제껏 발견된 적 없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석판이 서 있었다. 흡사 거대한 문 같기도 했고, 정교한 퍼즐 조각 같기도 했다. 다른 벽에 새겨진 문양들은 얼핏 기하학적 형태를 띠었지만, 이 석판의 문양은 달랐다. 살아있는 생물의 뇌 주름 같기도, 복잡한 신경망 같기도 한 형태들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마치 끊임없이 진동하는 파장을 시각화한 듯한 모습이었다.

    지훈은 땀으로 축축한 손으로 석판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은 차가웠지만, 어딘가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착각인가? 그는 손전등 불빛을 가까이 대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문양 사이사이, 아주 미세하게 빛을 반사하는 틈새들이 보였다. 흡사 정교하게 깎아 만든 실금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이루고 있는 듯했다.

    “이게… 정말 문이라고?”

    그는 등 뒤에 멘 배낭에서 스캐너를 꺼냈다. 배터리가 거의 방전 상태였지만,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며 희미한 작동음을 냈다. 스캐너를 석판에 가져다 대자, 액정 화면에 알 수 없는 파형들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암석에서는 나올 수 없는 복잡하고 불규칙한 파동. 마치 거대한 기계 장치가 살아 숨 쉬는 듯한 파동이었다.

    “알파파… 세타파… 감마파? 이건… 뇌파잖아?”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공포와 전율이 뒤섞인 감각이 전신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뇌파와 유사한 패턴이라니. 이 유적을 만든 고대인들은 대체 무엇을 숭배하고, 무엇을 추구했던 걸까?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고고학적 지식이 뿌리째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툭. 툭.*
    지훈은 몸을 굳혔다. 스캐너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조차 천둥처럼 들릴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 소리는 달랐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소리. 마치 누군가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듯했다.

    “누구… 누구 없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흔들렸다.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직 침묵만이 그의 물음에 답했다. 그리고 *툭. 툭.* 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이번에는 분명 발소리였다. 습기 찬 바닥에 닿는 무거운 발소리.

    지훈은 재빨리 몸을 돌려 손전등을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비췄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은 속절없이 흩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느꼈다. 어둠 속에 *무언가* 있었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다시 석판 쪽으로 몸이 향했다. 그 순간, 석판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뇌파 문양들이 아주 미세하게, 맥박처럼 깜빡이는 듯했다.

    환영인가? 아니, 분명히 봤다. 그 빛은 점차 강해지며 석판 전체를 감쌌다. 칙칙했던 회색 석판은 이제 푸른빛을 띠며 고동치기 시작했다. 문양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이럴 수가…”

    지훈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석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췄다. 마치 거대한 전자기기가 전원을 켠 듯,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유적 전체에 울려 퍼졌다.

    *위이잉…*

    그리고 그 웅웅거림 사이로, 아주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겹쳐지는 듯한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그 속삭임은 직접 뇌를 파고드는 것처럼 생생했다. 잊어버린 기억, 잃어버린 이름들이 뒤섞여 그의 정신을 흔들었다.

    *…도망쳐…*
    *…그것은… 너희의…*
    *…심연…*

    속삭임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강렬해졌다. 두통이 머리를 깨부술 듯이 덮쳐왔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빛을 내던 석판의 문양들이 괴이한 형상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의 동료들이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환영이 스쳤다.

    “아악!”

    지훈은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환영은 더욱 선명해졌다. 피로 얼룩진 동료들의 얼굴, 절규하는 입술. 그리고 그들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과 똑같은 공포.

    *…그것은… 너희를…*

    속삭임은 더 이상 외부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뇌 속에서 직접 울리는 듯했다. 혼란 속에서 그는 깨달았다. 이 석판은 단순한 문이 아니었다. 이 유적은 그저 고대인의 건축물이 아니었다.

    이것은 살아있는 거대한 정신이었다. 수만 년 동안 지하 깊숙한 곳에서 잠들어 있던, 광대하고 기이한 의식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그 잠을 깨웠다.

    석판의 푸른 빛은 이제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문양들은 더 이상 단순한 기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미지의 우주 지도를 보는 것 같았다. 수많은 별들이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하는 생명의 순환이, 혹은 존재하지 않는 차원의 풍경이 그의 정신을 강렬하게 휘감았다.

    *…다시… 오고 있다…*

    지훈의 발밑이 흔들렸다. 유적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석벽에서 작은 돌멩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천장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먼지가 비 오듯 쏟아졌다.

    그는 절규하듯 외쳤다. “이게… 대체… 무슨…”

    그 순간, 석판의 중앙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그 빛은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색이었다. 빛의 기둥은 천장을 뚫고 무한히 솟아나는 듯했다.

    지훈은 그 빛을 직시했다. 눈이 멀 것처럼 강렬했지만, 그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빛 속에서 무언가 형체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흐릿했지만, 거대한 촉수 같기도, 끝없는 그림자 같기도 한 형상.

    그 형상이 빛의 기둥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자, 그의 뇌 속에서 속삭이던 목소리가 거대한 외침으로 변했다.

    *…환영이 아니다… 그것은… 진실이다…*

    지훈의 정신이 조각나는 것 같았다. 그가 찾던 고대 유적의 비밀은, 고대 문명의 잃어버린 지식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광기였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냉기가 심장을 파고들었다. 지훈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손전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그 형체의 일부를 보았다. 그것은 눈이었다. 수천, 수만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심해의 괴물이 어둠 속에서 깨어나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섬뜩한 시선이었다.

    그 눈동자 속에서, 지훈은 자신의 존재가 먼지처럼 하찮게 느껴지는 끔찍한 진실을 보았다.

    유적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석판은 이제 완전히 빛을 내뿜으며, 그 뒤에 숨겨져 있던 미지의 공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공간은 무한한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것을 보았다.

    지훈은 주저앉았다. 몸의 모든 기능이 멈춘 듯했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로 가득 차, 빛의 기둥 속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는 거대한 존재를 응시했다.

    그것은 단순한 유적의 비밀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의 종말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 문을 열었다.

  • SF (공상과학)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아크투루스호의 그림자

    시공간의 잔물결도 쉬어가는 심연, 아크투루스호는 그 검은 바다 위를 유영하는 한 조각 낙엽 같았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 오직 항성들의 희미한 불빛만이 먼 은하의 존재를 알릴 뿐, 이곳은 인간의 문명 지도가 닿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아크투루스호는 인류의 최전선을 넘어, 미지의 우주를 탐사하는 몇 안 되는 선구자 중 하나였다.

    “선우, 전방 궤도 이상 없음. 속도 유지해.”

    함교 중앙, 홀로그램 성도 앞에 선 강태호 선장의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그의 눈은 나이테처럼 깊어진 주름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푸른빛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열정으로 번뜩였다. 그는 20년 넘게 우주를 떠돌며 수많은 기적과 절망을 목격한 베테랑이었다.

    “예, 캡틴. 현 속도 0.35광속계, 항로 이탈률 0.0001% 미만입니다.”

    조종석에 앉아 있던 박선우가 능숙하게 답했다. 그는 20대 후반의 젊은 항해사로, 타고난 공간 지각 능력과 비상한 반사 신경으로 아크투루스호의 좁은 조종석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터치패널 위를 경쾌하게 미끄러졌다.

    그때였다. 함교 한편, 각종 스캔 데이터를 분석하던 과학 책임자 이지은 박사의 자리에서 날카로운 알림음이 울렸다.

    “캡틴, 이상 신호 감지!”

    차분하던 이지은 박사의 목소리가 조금 격앙되어 있었다. 짙은 눈썹이 일자로 굳게 접힌 강태호 선장이 한 걸음 만에 그녀의 콘솔 앞으로 다가섰다.

    “어떤 신호인가?”

    “미상 에너지원입니다. 분류되지 않는 스펙트럼이에요. 자연 현상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일관적이고, 강력합니다.”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에 알 수 없는 패턴의 그래프가 번개처럼 튀어 올랐다. 이지은 박사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하며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녀의 눈빛은 호기심과 경계심으로 동시에 빛났다.

    “거리와 예상 크기는?” 강태호 선장이 물었다.

    “현재 약 5천만 킬로미터 지점. 예상 크기는… 직경 최소 100킬로미터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오차 범위가 너무 커요. 마치 스캔을 방해하는 듯한 간섭이 있습니다.”

    100킬로미터. 소행성 하나보다 훨씬 거대한 미지 개체라는 뜻이었다. 박선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정도로 거대한 미상 물체가 아무런 사전 감지 없이 갑자기 나타났다고요? 말도 안 돼…”

    “스텔스 기능인가… 아니면, 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건가.” 강태호 선장의 턱수염을 쓸었다. “지은 박사, 에너지원 재분석해 봐. 민준, 통신 연결 시도해보고.”

    선장석 뒷편, 거대한 서버 랙과 연결된 복잡한 인터페이스 앞에서 씨름하던 김민준 기술 책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크투루스호의 모든 기계 장치를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는 선실의 브레인이었다.

    “통신 주파수 대역 전체 스캔 중입니다, 캡틴.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간섭은 더 심해졌습니다.”

    몇 분의 정적이 흘렀다. 우주선 내부의 웅웅거리는 기계음만이 이들의 긴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캡틴, 스캔 데이터 업데이트입니다. 예상 진로를 재계산해보니… 이 미상 물체는 정지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 중력장에도 미세한 왜곡이 감지됩니다.” 이지은 박사의 목소리에 전율이 담겼다. “자연적인 천체가 아니에요. 틀림없이 인공 구조물입니다.”

    인공 구조물. 그 단어는 아크투루스호 함교의 모든 승무원들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인류가 아닌, 다른 지적 생명체가 만든 물체. 그것도 이렇게 먼 심우주에서, 인류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로.

    “선우, 궤도 수정. 해당 물체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한다. 안전거리 확보하고, 관측 모드로 전환.” 강태호 선장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맹렬한 호기심과 깊은 경계심으로 타올랐다.

    “네? 캡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저게 뭔지도 모르는데…” 박선우가 반사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가까이 가야 해. 인류는 미지를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미지를 탐험하며 발전했네.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지.” 강태호 선장의 시선은 오직 홀로그램 속 미지 개체를 향했다. “아크투루스호는 정찰 임무를 수행 중이다. 미확인 개체 발견 시 접근, 정보 수집은 최우선 사항이야.”

    “알겠습니다, 캡틴. 추진기관 출력 상승, 항로 수정합니다.” 박선우는 선장의 결단에 따랐다. 웅장한 아크투루스호는 방향을 틀어 미지의 개체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수만 킬로미터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외부 카메라에서 전송되는 영상이 메인 디스플레이에 실시간으로 펼쳐졌다. 처음에는 검은 배경 속에서 미세한 점으로 보이던 것이, 점차 그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김민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지은 박사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믿을 수 없어… 이게 정말….”

    화면에 잡힌 물체는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검은색 다면체였다. 마치 수많은 육면체가 불규칙하게 이어붙여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 표면은 어떤 빛도 반사하지 않았다. 그냥 존재 자체로 주변의 빛을 흡수하는 듯, 짙은 어둠 그 자체였다. 흡사 우주에 떠 있는 거대한 구멍 같았다. 그 크기는 소행성대 하나를 통째로 삼킬 것 같았다.

    “젠장… 저게 정말 인공물이라고?” 박선우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외감과 함께 공포가 서려 있었다.

    “표면 스펙트럼 분석 결과… 우리가 아는 어떤 물질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금속도, 암석도, 플라즈마도 아니에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보입니다.” 이지은 박사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니, 그보다 더 이상해요.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요. 시각 센서가 제대로 기능을 못 합니다.”

    아크투루스호가 약 5천 킬로미터 지점까지 근접했다. 대형 디스플레이를 가득 채운 검은 다면체는 묵묵히 그 거대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 어떤 인공적인 흔적도, 문양도, 연결 부위도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민무늬의 검은 표면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에너지원 재분석, 지은 박사.” 강태호 선장이 명령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경계심이 아닌,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복잡한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재분석 결과… 감지되던 에너지원이 사라졌습니다!” 이지은 박사의 목소리가 상기되었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에요. 오히려… 아크투루스호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어요! 선체 에너지 레벨이 미세하게 하락 중입니다!”

    “뭐라고?” 김민준이 경악하며 시스템 패널을 확인했다. “정말입니다! 주 엔진 출력이 0.001% 감소하고 있습니다! 흡수율이 미세하지만, 계속 증가하고 있어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면 가득 펼쳐진 검은 다면체의 한 지점에서, 마치 검은 잉크가 번지듯 희미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균열 속에서, 우주의 모든 빛을 집어삼킬 듯한 짙은 어둠이… 오히려 희미한 푸른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거대한 다면체의 표면을 따라, 푸른빛의 선들이 거미줄처럼 뻗어나갔다.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던 거대한 존재가 눈을 뜨는 듯한 모습이었다.

    함교 전체에 섬뜩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아크투루스호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젠장, 저게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박선우가 소리쳤다.

    “쉴드 출력 최대로 올려! 모든 시스템 비상 모드 전환!” 강태호 선장의 목소리가 함교에 울려 퍼졌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경험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푸른빛이 번뜩이던 다면체의 균열 속에서, 희미한 뇌파 신호가 감지되었다는 알림음이 이지은 박사의 콘솔에서 울려 퍼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데이터를 확인했다.

    “캡틴… 미확인 뇌파 신호 감지… 패턴은… 패턴이…” 이지은 박사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녀의 눈은 충격으로 크게 뜨여 있었다.

    “어떤 패턴이지?” 강태호 선장이 다급하게 물었다.

    이지은 박사는 홀린 듯 화면을 가리켰다.

    “저건… 저건 단순한 신호가 아니에요. 우리 우주선 승무원들의… 뇌파 패턴을 그대로 복사하고 있습니다!”

    함교의 모든 시선이 메인 디스플레이를 가득 채운, 푸른빛이 번뜩이는 거대한 검은 다면체를 향했다. 어둠 속에서 깨어난 미지의 존재는, 아크투루스호의 그림자처럼 그들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것을 흡수하려는 듯,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명멸했다.

    강태호 선장의 뇌리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았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건드린 거지?*

  • 무협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삭풍에 갇힌 진실

    핏빛 노을이 진 서산 너머로 마지막 햇살이 뼈아프게 스러지고 있었다. 청풍문(清風門)의 웅장한 기와지붕 위로 검푸른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자, 평소 같으면 검결을 익히는 문도들의 기합 소리로 가득했을 본산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공기 중에는 스산한 찬 기운과 함께 묵직한 절망감이 내려앉아 있었다.

    한 나절 전, 강호 무림에서 덕망 높기로 이름난 청풍문의 문주, 이강(李剛)이 자신의 서재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 서재가 안팎으로 완벽하게 걸어 잠긴 밀실이었다는 사실이다.

    강호에는 그림자 진실을 꿰뚫는 자, ‘설무진(雪無塵)’이라는 이름이 떠돌았다. 그는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종종 출현하여, 보통 사람의 지혜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기묘한 사건들을 명쾌하게 해결하곤 했다. 그의 행적은 눈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고, 누구도 그의 본거지를 알지 못했다. 오직 사건의 실마리를 쫓아 그를 수소문할 뿐이었다.

    청풍문은 한때 문주 이강의 지혜와 무력으로 강호에 우뚝 선 명문이었다. 그런 청풍문이 문주의 죽음 앞에서 혼란에 빠지자, 문주를 따르던 장로들은 결국 설무진의 도움을 청하기로 결의했다. 급히 전서구를 띄우고, 전령을 파견한 지 꼬박 하루 만에, 그들은 그림자처럼 나타난 설무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설무진은 예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우아하고 맑은 푸른색 도포를 걸치고 있었지만, 거창한 무인의 풍모는 아니었다. 마른 체격에 길게 뻗은 손가락, 그리고 안개처럼 흐릿한 인상 속에 빛나는 두 눈동자만이 그의 비범함을 짐작케 했다. 그의 눈은 마치 세상의 모든 혼란을 꿰뚫어보는 듯, 깊고 차분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청풍문 대전 앞에 섰다가, 곧바로 시신이 있는 서재로 향했다. 그를 따르는 이들의 발걸음이 조심스럽고 무거웠다.

    문주의 서재는 청풍문 본당의 가장 깊숙한 곳,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고요한 공간이었다. 높은 누각의 층계참을 지나 마주한 그곳은 이미 살기를 뿜어내는 듯 서늘했다. 육십 줄에 들어선 장로 ‘백무건’이 입을 열었다.

    “설 진사(進士)… 아니, 설 대사(大師). 소인, 백무건입니다. 문주님의 시신은 아직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다만, 문이 굳게 잠겨 있어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하게 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무건의 목소리에는 깊은 자책감이 배어 있었다. 설무진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부서진 문짝 너머, 어둠 속에 잠긴 서재 안으로 향했다.

    문은 묵직한 오동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내부에서 걸어 잠근 빗장은 쇠로 단단히 보강되어 있었다. 백무건이 이끄는 대로 안으로 들어서자, 서재는 차가운 공기로 가득했다. 방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목재 책상 위로, 문주 이강이 고개를 숙인 채 쓰러져 있었다. 그의 등에는 맑고 예리한 검이 박혀 있었는데, 칼자루만이 밖으로 나와 있을 뿐, 칼날은 완전히 몸속으로 사라져 있었다. 피는 이미 굳어 검붉은 흔적을 남겼고,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신은 참혹했다.

    설무진은 방의 입구에 선 채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시신에 고정된 듯했으나, 실제로는 서재의 모든 구석을 훑는 듯했다. 흙먼지 하나, 책 한 권의 기울기, 탁자 위의 찻잔 위치,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의 작은 흠집까지.

    “발견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설무진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으나, 서재의 냉기를 가르는 듯 명료했다.

    백무건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 “예. 매일 아침 문주께 차를 올리는 문도 운비(雲飛)가 발견했습니다. 어제 저녁 문주께서 서재로 드신 후로 아무도 뵙지 못했고, 오늘 아침 운비가 차를 들고 왔으나 문이 안에서 굳게 잠겨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주를 아무리 불러도 답이 없자, 급히 제게 알렸고… 제가 다른 장로들과 함께 문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문이 안에서 잠겨 있었다… 그 문을 부수기 전에는, 창문 등 다른 통로를 확인하셨습니까?” 설무진이 물었다.

    “당연합니다! 이 누각의 창들은 모두 쇠창살로 굳게 막혀 있고, 창밖은 아득한 천 길 낭떠러지입니다.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게다가 문주께서는 늘 서재에 드시면 안에서 빗장을 걸어 잠그시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범인이 문주를 해한 후 사라졌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서재는 완벽한 밀실이었습니다!” 백무건의 목소리에 답답함과 분노가 뒤섞였다.

    설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서재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소리는 먼지 한 톨 깨우지 않을 듯 가벼웠다. 그는 먼저 문주 이강의 시신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검상 외에는 그 어떤 저항의 흔적도 없었다. 주변의 물건들은 흐트러짐 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문주가 마지막까지 읽던 듯한 고서가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맑은 차가 담긴 찻잔이 놓여 있었다.

    “문주님의 검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설무진이 찻잔을 보며 물었다.

    “문주께서는 늘 호신용으로 옆에 검을 두셨습니다만… 시신 발견 당시에는 검집이 책상 옆에 기대어 있었을 뿐, 검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백무건이 답했다.

    설무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서재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바닥의 삐걱거리는 마루, 천장의 틈, 그리고 벽의 미세한 균열까지 놓치지 않았다. 특히 그의 눈길이 오래 머문 곳은 책상 뒤쪽 벽이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산수화가 걸려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였다.

    “이 그림은…” 설무진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문주께서 생전에 아끼시던 그림입니다. 강호의 명인, 운묵(雲墨) 대가의 작품으로…” 백무건이 설명하려 했지만, 설무진은 이미 그림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림의 가장자리를 가볍게 쓸어보았다.

    “문주님의 검은 분명 이 안에 있을 겁니다.” 설무진의 말이 서재 안에 메아리쳤다.

    백무건을 비롯한 장로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이지 않는데…”

    설무진은 시신에 박힌 검을 가리켰다. “문주님의 시신에 박힌 검은… 이 그림 속에 감춰진 칼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범인은…”

    그는 시선을 돌려 다시 부서진 문을 바라보았다. “범인은 이 문으로 당당히 걸어 나갔습니다.”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모두가 경악했다. 완벽한 밀실에서 범인이 문을 열고 나갔다니,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장로들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설무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지혜는 폭풍우처럼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밀실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완벽해 보였을 뿐이죠.” 설무진은 그림에 가려진 벽의 미세한 흔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진실은 항상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 숨어 있는 법이니.”

    그의 말은 거대한 파문처럼 서재를 뒤흔들었다. 모두의 눈은 설무진이 가리킨 벽으로 향했지만, 여전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범인이 문을 열고 나갔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의문은, 이제부터 그들이 풀어야 할 거대한 미스터리의 서막에 불과했다.

  • 무협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천하쟁패전

    **1. 개막**

    천하의 모든 기운이 한 곳으로 모여드는 듯했다.
    곤륜산맥의 최정상, 그마저도 인간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비경에 자리한 ‘무천각(武天閣)’. 본래는 삼천 년 전, 태고의 무신(武神)이 강림하여 천하의 기운을 다스렸다는 전설 속 장소였으나, 지금은 대지를 뒤덮는 거대한 결계와 함께 무림 고수들의 함성으로 들끓고 있었다.

    한 달 뒤면, 이곳에서 천하의 운명을 건 대결, ‘천하쟁패전(天下爭覇戰)’이 막을 올린다.

    비류(飛流)는 수십 길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서, 아래 펼쳐진 장관을 묵묵히 응시했다. 수많은 문파의 깃발이 오색찬란하게 나부꼈고, 그 아래로 명망 높은 고수들과 젊은 혈기가 넘치는 신예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대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내공과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여, 이번에도 구경꾼 노릇이냐?”

    뒤에서 들려오는 능글맞은 목소리에 비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나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빛바랜 도포를 걸친 남궁진(南宮震)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장난기로 가득했지만, 그 깊이에는 천고의 세월을 담은 듯한 지혜가 서려 있었다.

    “스승님, 이 지루한 구경을 벌써 몇 번째 하시는 겁니까? 어차피 우승자는 정해져 있는 거 아니었나요?”

    비류의 시선은 다시 아래를 향했다. 그의 시선 끝에 닿은 것은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비석이었다. 그 비석에는 붉은 글씨로 단 하나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혼돈의 그림자가 대지를 덮으리니, 오직 천하를 통일할 패자만이 멸망을 막으리라.」*

    몇 해 전부터 천하 각지에서 기이한 현상이 속출했다. 대지에 깊은 균열이 생기고, 그 안에서 기괴한 마물들이 솟아났으며, 하늘에는 핏빛 기운이 감돌았다. 무림맹과 정파, 사파, 마교까지 모든 세력이 이 이상 징후에 경악했지만, 원인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천기성(天機星)의 예언자들이 고대 문헌에서 저 비석의 문구를 찾아냈고, 그것이 바로 ‘천하쟁패전’의 시작이었다.

    승자는 ‘무림맹주’의 자리에 올라, 모든 무림 세력을 통솔하며 다가오는 혼돈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것은 영광이 아닌,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막중한 책임이었다.

    “정해져 있기는. 세상일은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남궁진이 혀를 쯧쯧 차며 비류의 어깨를 툭 쳤다. “특히 이번엔 달라. 오랜 침묵을 깨고 나타난 괴물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네가 아는 그 뻔한 강자들만 참가하는 게 아니야.”

    비류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괴물이라뇨?”

    “어허, 저기 보거라.” 남궁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무천각 동쪽 끝자락이었다. 다른 문파들이 저마다의 화려한 복장과 위풍당당한 기세로 위용을 뽐내는 와중에도, 그곳의 무인들은 검은 도포를 두른 채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그들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주변 공기마저 압도하는 듯한 서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어. 그들의 내공은 그 어떤 명문정파의 장로에게도 뒤지지 않을 테고, 그 기세는 마교의 고수들을 능가하는 듯 보이는군.”

    “흥, 그래서요? 누가 오든 저곳의 고수를 이길 수는 없을 텐데요.” 비류의 시선은 무천각 중앙, 가장 높은 단상에 앉아 있는 한 인물에게 고정되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지만, 그의 등에서는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웅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다름 아닌, 현재 무림맹의 실질적인 수장이자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 불리는, 현 무림맹주 ‘천뢰대협(天雷大俠)’이었다.

    천뢰대협은 오 년 전, 마교의 거두들을 홀로 상대하며 그들의 준동을 막아냈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그의 ‘천뢰신공(天雷神功)’은 단 한 번의 격발로 산을 무너뜨리고 강을 뒤집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남궁진은 비류의 엉덩이를 툭 차며 놀렸다.
    “야, 야. 이번엔 천뢰대협이 참가하는 게 아니잖냐. 그는 심판으로 온 것이지. 너무 큰바위 얼굴만 쳐다보고 있지 말고, 네 코앞을 보거라.”

    비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때, 정교하게 다듬어진 비석 위로 거대한 인영이 드리워졌다. 검은 도포 자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그 아래로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안광이 번뜩였다. 그는 무림의 신성(新星), ‘흑룡검(黑龍劍)’이라 불리는 젊은 무인이었다. 마교의 잔존 세력을 궤멸시킨 공으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의 등장에 아래에서 들끓던 무인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흑룡검이라. 저 자는 확실히 강하죠.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아 이미 일류 고수의 반열에 올랐으니.” 비류가 중얼거렸다.

    “일류 고수? 흥, 이제 막 강호에 이름을 알렸을 뿐이다. 물론 저 정도 실력이면 십 년 안에 천하를 뒤흔들 재목임은 분명하겠지.” 남궁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번 천하쟁패전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야. 혼돈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고, 그것에 맞서기 위해선 단순히 검술이 뛰어난 것만으로는 부족할 걸세.”

    그때였다.
    하늘을 찢을 듯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그 소리가 무천각 전체를 뒤흔들며 모든 무인의 심장을 울렸다.
    천뢰대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육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무천각 전체를 휘감았고, 순식간에 모든 소란이 잠잠해졌다.

    “강호의 모든 영웅들이여, 이 자리에 모인 것을 환영한다!”

    천뢰대협의 목소리는 우렁찼지만, 기이하게도 모든 이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명료하게 들려왔다. 그의 기운이 실린 목소리였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듯이, 천하는 지금 거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륙을 덮치는 혼돈의 기운은 단순한 마교의 잔재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집어삼킬 태고의 재앙이다.”

    무인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비류 역시 주먹을 꽉 쥐었다. 그 혼돈의 힘을 직접 마주한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 재앙의 끔찍함은 이미 소문으로 파다했다.

    “이에, 무림맹은 모든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교까지… 천하의 모든 무림 세력의 동의하에 ‘천하쟁패전’을 개최한다!”

    천뢰대협의 말이 끝나자, 무천각 아래에서 또다시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기대와 흥분,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뒤섞인 함성이었다.

    “이 대전의 승자는, 더 이상 단순히 한 문파의 수장이나 한 세력의 맹주가 아닐 것이다. 그는 천하의 무림을 통일하고, 혼돈에 맞서 싸울 대리인이 될 것이다!”

    천뢰대협은 비석을 등지고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모든 참가자들을 훑었다. 마치 그들의 내면에 숨겨진 기운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눈빛이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때까지 대결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명심하라. 너희의 적은 서로가 아니다. 진정한 적은 우리를 삼키려 드는 저 혼돈의 그림자다. 그러니, 이 대결에서 너희의 모든 것을 보여주되, 명예를 잃지 마라!”

    비류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이 메아리쳤다.
    *「강호에 발을 들였으면, 너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역사가 되도록 살아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는 남기지 말거라.」*

    비류는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지루함이나 냉소가 없었다. 대신, 깊은 투지와 알 수 없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어쩌면, 자신은 이 지루한 구경꾼의 자리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그의 발걸음이 무천각 아래를 향했다. 수많은 군중 속으로, 또 다른 하나의 존재가 되어.
    이제 막, 천하의 운명을 건 거대한 서막이 올랐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