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폐허의 파트너와 한 조각 소시지
“크으으윽… 이런 젠장. 아무것도 없어.”
서준은 녹슨 철근이 뼈대만 남은 마트 선반을 발로 툭 찼다. 먼지가 풀썩 솟구치며 희미한 햇빛 아래 반짝였다. 멸망 후 3년. 지긋지긋하게 봐온 풍경이었다. 모든 게 바스러지고, 텅 비고, 죽어 있었다.
“서준 씨, 여기는 정말 끝물인가 봐요. 고작 썩은 비스킷 조각이라니….”
뒤이어 들어온 하나가 눅눅한 비스킷 조각을 들고 혀를 쯧쯧 찼다. 그녀의 얼굴에 묻은 검댕과 땀방울이 햇살에 반짝였다. 어두운 폐허 속에서도 저리 반짝이는 얼굴이라니. 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괜히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끝물이라니, 여기 온 게 실수지. 이제 이 도시에서 건질 건 오직 잔해뿐이야.”
서준은 이죽거리며 구석에 널브러진 카트를 발로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삭막한 공간에 울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반짝이는 게 있을지도!”
하나는 낙천적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황폐한 세상에서 저런 무모한 긍정을 유지하는 게 용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잡동사니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오래된 인형의 팔, 찢어진 잡지, 유리 조각들.
“하늘에서 황금이라도 떨어질 줄 알아? 시간 낭비하지 말고 밖으로 나갈 준비나 해. 날 어두워지면 귀찮은 것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할 테니까.”
“아, 잠깐만요! 어? 이게 뭐지?”
하나는 뭔가를 발견한 듯 손을 멈췄다. 작은 철제 상자.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서준은 눈썹을 치켜떴다. 저런 건 보통 빈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가끔은 예상치 못한 횡재를 안겨주기도 했다.
하나는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실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예요? 낡은 종이랑… 이상한 병 조각?”
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뭘 기대했다고.”
그가 돌아서려 할 때, 하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서… 서준 씨. 저기, 저거 보세요.”
하나는 상자 깊숙한 곳에서 발견한 얇은 캔 하나를 들어 올렸다. 먼지가 잔뜩 앉아 있었지만, 캔 특유의 반짝이는 재질은 숨길 수 없었다. 그리고 캔 옆면에 새겨진 글자. ‘프리미엄 소시지’.
서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세상이 멸망하고 제일 먼저 사라진 것 중 하나가 가공육이었다. 이제는 전설처럼 회자되는, 꿈에서나 나올 법한 음식.
“말도 안 돼… 그게 아직 유통기한이 남아있을 리가 없어.”
“아니요! 보세요! 찌그러지지도 않았고, 심지어 캔따개도 붙어있어요!”
하나는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로 캔을 서준에게 내밀었다. 서준은 망설였다.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과, 또 다른 실망을 맛볼 거라는 비관적인 예감이 충돌했다. 하지만 하나가 건네는 캔의 온기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가 캔을 받아든 순간, *쿵!* 둔중한 소리와 함께 건물이 흔들렸다. 천장에서 먼지가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뭐야?!”
“놈들이야!”
서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지고 날카로운 경계심이 스쳤다. 그는 반사적으로 하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쪽이야! 빨리!”
그들이 발걸음을 재촉하자, 건물의 외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르르릉!* 먼지구름이 그들을 뒤쫓아왔다.
“어디로 가요, 서준 씨?”
“뒷문! 저쪽이 제일 안전해!”
서준은 지형을 빠르게 파악하며 하나를 이끌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하나는 그의 뒤를 바싹 따랐다.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놈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젠장, 수가 좀 많은데?”
서준은 뒤를 흘긋 보았다. 폐허의 어둠 속에서 솟아난 그림자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하나는 숨을 헐떡이며 낡은 선반 사이를 몸을 웅크린 채 지나갔다.
갑자기, 그녀의 발이 삐끗했다. 균형을 잃은 하나가 휘청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으악!”
“하나 씨!”
서준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발목이 낡은 철골에 걸렸다. 둘은 속절없이 넘어졌다. 하나의 머리가 서준의 가슴에 부딪혔고, 팔다리가 뒤엉켰다. 넘어진 충격으로 캔 소시지가 손에서 미끄러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으… 아파!”
“쉬잇! 움직이지 마!”
서준은 넘어진 자세 그대로 하나를 끌어안아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그녀의 몸이 그의 아래에 완전히 깔렸다. 허둥지둥 넘어지면서도 그녀의 머리를 팔로 감싸 보호한 건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바로 코앞까지 놈들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끈적하고 역겨운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놈들의 시선이 그들이 숨어있는 선반 뒤를 스쳐 지나갔다. 서준은 하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움직이지 마. 숨도 제대로 쉬지 마.”
하나의 심장 박동이 그의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 심장인지 그녀의 심장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너무 가까웠다. 그녀의 숨결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이상하게도,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의 정신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생각보다 더 작네…’
놈들은 한참을 그들 주위를 맴돌았다. 시체를 찾으려는 건지,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건지. 그들의 짐승 같은 후각이 언제든 그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준은 숨을 멈추고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손에 땀이 흥건했지만, 하나를 감싼 팔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몇 분이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정적 끝에, 놈들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간 것 같아요.”
하나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서준은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동시에, 그들의 민망한 자세가 의식되기 시작했다. 하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뺨을 간질이고, 그녀의 숨결이 그의 턱 밑에 닿아 있었다. 심지어 놈들의 위협보다 더 당황스러운 뜨거운 열기가 얼굴로 몰려왔다.
“하나 씨, 이제 일어나세요.”
서준은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하나가 그의 말에 스르륵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서준의 무릎이 삐끗하며 균형을 잃었다. *쿵!* 다시 둘은 바닥에 완전히 붙어버렸다. 이번에는 하나가 서준의 얼굴을 그대로 덮쳐버린 꼴이 되었다.
“으… 으읍?!”
하나의 입술이 서준의 입술에 닿았다. 맙소사. 이 상황에서 키스라니. 그것도 본의 아니게, 아주 퍽퍽한 먼지 맛이 나는. 서준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하나의 얼굴은 완전히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둘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멸망한 세상의 폐허 한가운데에서, 땀과 먼지로 뒤범벅된 채, 어색하고 민망한 침묵만이 흘렀다.
“저… 저기… 서준 씨…!”
하나는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얼른 자신의 입술을 손등으로 쓱쓱 닦아냈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양. 서준은 그 모습에 괜히 속이 상했다.
“왜요! 제가 그렇게 더럽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 그게… 아흐흐흑.”
하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만 잔뜩 붉혔다. 서준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로맨틱 코미디를 찍고 있는 자신들의 운명이 기가 막혔다.
그때, 하나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서준 씨, 저거 봐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 그들이 엉망진창으로 뒹굴었던 자리 옆, 먼지투성이 바닥에 캔 소시지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놓여 있었다. 찌그러지지도 않고, 여전히 캔따개가 붙은 채로.
서준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모든 소동과 민망함 끝에 살아남은 건, 고작 캔 하나라니.
“하아… 결국 이거 하나 건지겠다고 난리를 친 꼴이 됐네요.”
그가 캔을 주워들었다. 묵직하고 단단한 감촉. 이 멸망한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귀한 전리품이었다.
“그래도… 배고파서 죽을 뻔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하나가 민망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준은 캔을 든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나눠 먹죠, 뭐.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니.”
하나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구사일생이요? 그게 저 때문이에요?”
“그럼 누구 때문인데요? 당신이 비스킷 조각 찾겠다고 안 헤매고, 캔 소시지 안 찾았으면 애초에 여기에 안 왔을 거고. 그럼 위험에 빠질 일도 없었겠죠.”
그는 투덜거렸지만, 캔따개를 딸깍 열었다. 고소한 냄새가 폐허 가득 퍼졌다. 묵직한 소시지가 모습을 드러내자 하나의 눈이 반짝였다.
“와… 진짜 소시지다!”
하나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서준은 그 모습에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세상이 멸망하고, 삶이 매일매일 지옥 같은 날들의 연속인데도, 그녀는 여전히 이렇게 작은 것에 기뻐할 줄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이 황량한 세상에서 그녀를 파트너로 택한 이유가.
“자, 어서 한 입 드세요. 기운 차려야지, 이 난리통에 살아남으려면.”
서준은 소시지 한 조각을 떼어 하나에게 건넸다. 하나는 조심스럽게 소시지를 받아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가 서준의 가슴 한켠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평화도 잠시, 서준의 시선이 폐허 너머의 하늘로 향했다. 해는 이미 지평선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멀리서 희미한 연기 기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젠장. 또 뭔가 시작될 모양이군.”
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 겨우 숨을 돌렸건만, 이 황폐한 세상은 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을 예고하는 듯했다. 하나는 소시지를 든 채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녀의 얼굴에도 다시금 긴장감이 스쳤다.
“…이번엔 또 뭘까요, 서준 씨?”
하나는 물었지만, 서준은 대답 대신 남은 소시지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이 폐허의 세상에서, 매일매일 이어지는 삶은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미지의 길을, 그들은 함께 걸어가야 했다. 그것이 이 엉터리 같은 세상에서 그들이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그때, 하나의 얼굴에 다시 한번 생기가 돌았다.
“그래도, 소시지는 맛있네요! 이거 먹고 힘내요, 서준 씨!”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서준은 그런 하나를 보며 픽 웃었다. 그래, 이 망할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런 웃음이라도 필요할 터였다. 그는 하나에게 손짓했다.
“가자. 이번엔 어디로 가든, 저 연기 기둥 쪽만 아니면 돼.”
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준의 뒤를 따랐다. 비록 발걸음은 지치고, 앞날은 불투명했지만, 그들의 폐허 속 여정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서로에게 의지한 채, 그리고 이따금 터져 나오는 엉터리 같은 웃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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