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이 희건

  • 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398화

    기억의 틈새를 찾아 헤매다

    이안은 차가운 금속성 탁자 위에 놓인 오래된 손목시계를 응시했다. 초침은 멈춰 있었고, 유리판에는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평범하다면 평범했을 이 시계가, 낯선 시공간의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이안에게는 심장을 짓누르는 무게로 다가왔다.

    이건… 어디서 온 거지?

    며칠 전, 잊혀진 문명국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이 시계는 이안의 손에 닿는 순간, 마치 얼어붙은 시간의 강물에 작은 파문이라도 일듯, 희미한 잔상을 일으켰다. 한순간, 강렬한 햇빛 아래 반짝이던 누군가의 미소와, 귓가에 속삭이던 다정한 목소리가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그랬듯, 붙잡으려 하면 잡히지 않는 물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안은 천천히 손을 뻗어 시계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이상하리만큼 익숙했다. 손가락이 시계 뒷면의 각인을 따라 움직였다. 흐릿한 글자들. 마치 모래 위에 쓰였다가 파도에 지워진 글씨처럼, 형태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희미한 윤곽 속에서, 하나의 글자가 섬광처럼 뇌리를 스쳤다.

    ‘별.’

    그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아픔이 밀려왔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상처가 다시 터져버린 듯, 숨쉬기조차 버거웠다. 이안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별빛 쏟아지는 밤하늘과, 그 아래 서 있는 자신의 뒷모습만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그러나 그 옆에 서 있어야 할 누군가의 모습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별… 별이… 무슨 의미인 거지?”

    이안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수많은 시간의 파편 속을 떠돌면서, 자신을 잃어버린 채 허둥대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매번 희망의 조각을 찾았다 싶으면, 그것은 다시 손아귀에서 부서져 버리곤 했다. 이 지독한 순환의 고리는 과연 어디에서 끝날 것인가.

    “또다시, 또다시… 고작 이 정도인가.”

    허탈감에 젖은 이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시계는 여전히 침묵했고, 그의 마음속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와 같았다.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찾는 여정은 한없이 길고 고통스러웠다. 때로는 자신이 영원히 이 미로 속을 헤맬 것만 같다는 절망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잊혀진 과거 속 어딘가에, 반드시 자신이 찾아야 할 이유, 그리고 돌아가야 할 곳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갑자기 연구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오래된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노학자, 아셀 박사가 들어섰다. 그는 이안의 옆에 멈춰 서서, 탁자 위 시계와 그 시계를 쥔 이안의 떨리는 손을 번갈아 보았다.

    “이안, 무언가 찾은 건가?”

    아셀 박사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은근한 기대와 연민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이안의 유일한 조력자이자, 동시에 이안의 존재 자체를 연구하는 자였다.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눈물이 그렁거렸다. “이 시계… ‘별’이라는 글자가 느껴져요. 하지만 그것뿐이에요.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셀 박사는 이안의 어깨를 조용히 다독였다. “좌절하지 마라, 이안. 수많은 별들 중에서도 유독 빛나는 별이 있지 않겠나. 그 하나의 단서가 모든 것을 밝혀줄 열쇠가 될 수도 있다.”

    박사의 말은 이안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 위로는, 곧 밀려올 더 큰 고통의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이안은 시계를 꽉 쥐었다. 별. 그 한 글자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자신을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이 손목시계가 품고 있는 멈춰버린 시간이, 언젠가 다시 움직여 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 순간, 연구실의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시간 이동 장치가 희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셀 박사의 눈이 커졌다. “이건… 예상치 못한 시공간의 교란이군. 누가… 아니면 무엇이… 이곳을 흔들고 있는 거지?”

    이안은 놀란 눈으로 시계와 장치를 번갈아 보았다. 설마, 이 시계가 반응한 것인가? 혹은, ‘별’이라는 단서가 또 다른 거대한 흐름을 불러온 것인가? 미지의 힘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안은, 그 힘의 중심에 자신이 서 있음을 직감했다.

    그들의 기억을 잃은 시간 여행자의 여정은, 다시 한번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밤기차에서 만난 낯선 인연 – 제397화

    지우는 창밖으로 쏟아지는 도시의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희뿌연 유리창 너머로 빛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아득하게 흔들렸다. 마치 오래전 그 밤기차 안에서 스쳐 지나가던 낯선 풍경들처럼. 그녀는 무릎 위에 놓인 봉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얇은 종이 한 장이 담고 있는 무게는 어둠 속을 헤매던 기차의 진동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벌써 몇 번째 밤인지 모른다. 잠 못 이루는 밤마다 그녀는 오래된 필름처럼 그날의 기억을 되감았다. 흔들리는 객차 안, 처음 마주했던 현수의 눈빛. 그 눈빛 속에 담겨 있던 알 수 없는 쓸쓸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끌렸던 묘한 온기. 그 인연이 지금 이 모든 것을 시작하게 했으니, 어쩌면 이 모든 고통의 시작도 그날 밤이었는지 모른다고 지우는 생각했다. 사랑은 늘 그렇게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몰고 왔다.

    “괜찮아, 지우야. 다 괜찮아질 거야.”

    현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틀 전,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무너져 내린 자신을 품에 안고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 그의 온기만큼이나 단단한 다짐이 지우의 심장을 다시 한번 아프게 쥐어짰다. 괜찮지 않았다. 그가 알면 괜찮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 진실을 그에게서 숨기고 싶었다. 그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그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삶을 위해.

    봉투 속의 진단서는 차갑고 명확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 이 사실을 현수에게 말하는 순간, 그의 모든 계획이 틀어질 것이 자명했다. 그녀는 그의 곁에 남아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현수를 위한 유일한 길임을, 지우는 밤새도록 자신을 설득했다. 하지만 마음은 기어이 저항했다. 처음 그를 만났던 기차의 진동처럼, 가슴속 깊은 곳에서 거부의 파동이 일었다.

    “지우야, 어디 있어?”

    현수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단정한 글자 속에서 그의 걱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우는 간절히 바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현수가 지금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찾기를. 함께 나눌 수 없는 짐을 홀로 짊어진 채, 멀리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손에 쥔 봉투를 가슴에 꾸욱 안았다. 그날 밤, 낯선 이와의 짧은 인연이 인생의 전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그 인연이 지금, 가장 혹독한 시련의 한가운데에 서게 할 줄도. 지우는 결심했다. 이 어둠 속에서 오직 자신만이 걸어 나갈 수 있는 길을. 현수의 삶에 드리워질 그림자를 걷어낼 유일한 방법을.

    휴대폰을 들고 답장을 써내려갔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지만, 그녀는 글자 하나하나에 굳은 결심을 담았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어둠 속을 질주하던 밤기차처럼, 그녀의 인생도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속도로 다음 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396화

    밤의 속삭임, 은하의 눈빛

    창밖은 고요했다. 길고 긴 여름밤의 끝자락, 바람 한 점 없는 공기마저 무겁게 느껴지는 그런 밤이었다. 지수는 늘 앉던 낡은 의자에 기댄 채, 흐릿한 달빛 아래 그림자처럼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멀리, 어둠 속에 잠긴 도시의 불빛들을 응시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생각의 무게에 짓눌려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털 한 올 흐트러짐 없이 그녀의 다리에 스르륵 몸을 기댄 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지수는 비로소 시선을 거두었다. 익숙한 은빛 털, 별처럼 빛나는 두 눈. 은하.

    “또 밤늦게까지 있었구나.” 지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손을 들어 은하의 보드라운 등을 쓰다듬자, 고양이는 만족스러운 듯 몸을 비비며 나직이 골골거렸다. 그 진동이 그녀의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수많은 계절을 함께 보낸 만큼, 서로의 침묵은 그 어떤 대화보다 깊고 풍요로웠다.

    은하가 고개를 들어 지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투명한 눈동자 속에서 지수는 알 수 없는 깊은 질문을 읽었다. 무엇이 너를 이리도 붙잡고 있느냐, 나의 오랜 동반자여?

    지수는 희미하게 웃었다. “글쎄, 은하야. 나이가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봐. 가끔은 내가 짊어진 모든 것들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르고,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무는 것 같아.”

    은하는 대답 대신, 지수의 손등에 코를 비볐다. 그 작은 행동에서 그녀는 무언의 위로를 느꼈다. 너는 제자리에 머물지 않아. 모든 순간, 너는 너의 길을 걷고 있어.

    “정말 그럴까? 가끔은 이 모든 것이 끝없이 반복되는 꿈만 같아. 좋았던 순간들도, 아팠던 기억들도… 어느새 다시 찾아와 나를 흔들어 놓거든.” 지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너머의 어둠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을 터였다. 마치 은하가 지닌 비밀의 깊이처럼.

    은하는 지수의 무릎 위로 가볍게 뛰어올라 몸을 웅크렸다. 그녀의 가슴 위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는 지수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리고 은하의 맑은 눈빛은 끈질기게 지수를 응시했다. 마치 말하듯이. 잊지 마.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의 너를 만들었어. 그리고 나는 늘 여기, 너의 곁에 있었다는 것을.

    지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수백 번의 밤을 함께하며 은하와 나누었던 무언의 대화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도, 가장 외로웠던 순간에도, 은하는 늘 그렇게 조용히 그녀의 곁을 지켰었다. 마치 그녀의 그림자이자, 동시에 그녀를 비추는 등불처럼.

    “그래, 은하야.” 지수는 은하를 품에 안고 가만히 토닥였다. “네가 있어 다행이야. 정말로…”

    은하는 지수의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 속에 파묻힌 지수는 비로소 마음속의 무거움을 조금 내려놓는 듯했다. 밤은 깊어졌지만, 더 이상 차갑거나 외롭지 않았다. 은하가 전하는 무언의 위로 속에서, 지수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것 같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 밤처럼 끝없이 이어질 터였다. 때로는 고요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하지만 언제나 함께.

  • 산모퉁이 작은 빵집의 기적 – 제395화

    새벽 공기를 가르고 산모퉁이 작은 빵집의 문이 열렸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 오븐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빵 굽는 냄새가 차가운 새벽 공기와 섞여 포근한 장막을 쳤다. 김사장님은 땀방울을 닦으며 갓 나온 식빵들을 조심스레 진열대에 올렸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갓 구운 빵들의 윤기를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빵집 안을 가득 채웠다. 바로 어제부터 준비한 특별한 호박 크림치즈 빵 때문이었다. 평소 단 것을 즐기지 않던 박순자 할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옛날에 먹던 호박떡 맛이 그립다’ 하셨던 것을 김사장님이 흘려듣지 않고 기억해두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이 빵집의 가장 오래된 단골 중 한 분이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딸랑, 하고 문이 열렸다. 예상대로 박순자 할머니였다. 늘 단정한 한복 차림에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으셨지만, 요새 들어 부쩍 야위고 기운이 없어 보이셨다. 눈가에 드리운 그림자는 깊었고, 세상 모든 근심을 짊어진 듯 쓸쓸한 기운이 할머니를 감싸고 있었다. 할머니는 말없이 늘 앉던 창가 자리로 향하셨다. 창밖으로 보이는 흐린 산등성이가 할머니의 뒷모습처럼 쓸쓸해 보였다.

    “할머니, 오셨어요? 오늘은 일찍 나오셨네요.” 김사장님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네. 잠이 안 와서….” 할머니의 목소리는 파도에 깎인 조약돌처럼 마르고 작았다. “여기, 할머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예요. 호박 크림치즈 빵인데, 옛날 호박떡 맛이 좀 나실까 해서요.” 김사장님은 따뜻하게 데운 빵과 함께 구수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빵을 물끄러미 바라보셨지만, 좀처럼 손대지 않으셨다.

    창밖을 응시하던 할머니의 눈빛은 먼 과거를 헤매는 듯했다. 김사장님은 조용히 할머니를 지켜봤다. 어쩌면 빵 한 조각보다 더 필요한 것은, 그저 잠시 기댈 수 있는 따뜻한 공간과 아무 말 없이 건네는 위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할머니, 이 빵 맛있는 냄새 나요!” 맑고 티 없는 아이의 목소리가 빵집의 정적을 깨뜨렸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들어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할머니의 테이블을 쳐다보고 있었다. 빵집에 처음 온 아이인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한 듯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아이는 할머니가 드시지 않은 호박 크림치즈 빵에 시선을 고정했다.

    엄마가 민망한 듯 아이를 제지하려 했지만, 아이는 이미 한 걸음 더 다가가 할머니 앞에 섰다. “할머니, 이거 호박 빵이에요? 제가 호박 엄청 좋아하는데!” 아이는 작은 손가락으로 빵을 가리키며 해맑게 웃었다. 그 순간, 할머니의 메말랐던 눈빛에 아주 미세한 떨림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샘물처럼, 어렴풋한 온기가 할머니의 표정에 감돌았다.

    할머니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을 들어 호박 크림치즈 빵 한 조각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내밀었다. “아가, 이거 먹어 볼래? 따뜻하단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는 빵의 따뜻함보다 더 깊었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빵을 받아들었고, 한입 베어 물고는 “우와! 진짜 맛있다! 할머니도 드셔보세요!” 하며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는 아이의 해맑은 웃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도 빵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호박 크림치즈의 맛이 할머니의 입안 가득 퍼졌다. 그리고 그 맛과 함께, 잊고 지냈던 따뜻한 추억 하나가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듯했다. 아이와 할머니,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작은 빵집을 채웠다. 김사장님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빵 하나가, 아니, 그 빵을 매개로 한 작은 인연이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빵집 창밖으로, 비로소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둡던 산모퉁이가 환한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394화

    밤은 깊었고, 오래된 일기장의 눅진한 종이 냄새가 지영의 코끝을 맴돌았다. 페이지마다 스며든 할머니의 숨결 같았다. 394번째 장에 도달했을 때, 지영은 숨을 멈췄다. 지난 밤의 궁금증이 오늘 밤 해소될 차례였다. 할머니가 ‘그해 여름’이라 부르던 시절,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뒤틀렸던 그때의 이야기가 드디어 펼쳐지고 있었다.

    할머니의 글씨체는 평소보다 더 가늘고 떨렸다. 마치 그 순간의 고통이 펜 끝을 타고 흐른 것처럼.

    “1957년 7월 20일. 서진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날부터 서진의 삶은 거친 파도에 휩쓸렸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했고, 어린 서진은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짊어져야 했다.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그의 가족을 외면할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내 미래를 걸고 있었다. 서울 유학, 그림에 대한 꿈, 약혼자의 따뜻한 미소. 그 모든 것이 내 눈앞에 선명했다.”

    지영은 눈을 감았다. 할머니, 은혜. 젊은 할머니의 삶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웠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는지 그녀는 일기장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늘 “나는 꿈이 없었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아니, 꿈을 포기한 것이었다.

    다시 눈을 뜨자, 다음 문장이 지영의 가슴을 꿰뚫었다.

    “서진은 절망의 끝에서 나를 찾아왔다. 그의 눈에 비친 불안과 공포를 나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읍내 객줏집에서 들려온 소문은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서진이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에, 서진이 위험한 선택을 하려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빚을 대신 갚아준다면, 서진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했다. 대신 그 대가로,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지영의 손이 떨렸다. 할머니가 무엇을 포기했다는 말인가. 서울 유학? 약혼? 그 찬란했던 미래를?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나는 알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서울 유학을 포기하겠노라고. 약혼자와의 혼약도 파기하겠노라고. 어머니의 눈에서 흐른 눈물은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서진을 살려야 했다. 그의 삶이 나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지영은 일기장을 든 채 털썩 주저앉았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할머니는 그 모든 것을, 그 찬란했던 꿈을, 그 약속된 미래를, 단 한 사람을 위해 내려놓았던 것이다. 서진. 그는 누구였을까. 그 이름이 지영의 기억 속에는 없었다. 가족 누구도 서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할머니가 그토록 깊이 묻어둔 비밀이었던 걸까.

    가슴이 먹먹했다. 할머니가 평생을 무덤덤하게 살아왔던 이유, 단 한 번도 자신의 젊은 시절을 미화하지 않았던 이유, 늘 타인의 행복을 먼저 생각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자신의 꿈을 짓밟고 일어선 자리에서, 그녀는 다른 이들을 위한 희망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다음 글은 더 이상 날짜가 적혀있지 않았다. 그저 벅차오르는 감정만이 문장 속에 녹아 있었다.

    “서진은 떠났다. 내가 준 돈으로 빚을 갚고, 새벽녘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났다. 그는 나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그저 그가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날 이후, 나는 내 그림을 다시는 그리지 않았다. 붓을 들 때마다, 포기한 꿈이 눈물처럼 번졌으니까.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서진의 환한 미소가 내 삶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서진의 환한 미소? 지영은 고개를 들었다. 문득 어릴 적 할머니 방에 걸려 있던 낡은 풍경화 한 점이 떠올랐다. 평범한 시골 풍경이었지만, 그 그림 속에는 유독 빛나는 소년의 뒷모습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할머니의 손길은 늘 단정했지만, 그 소년의 뒷모습만은 왠지 모르게 애틋함이 묻어 있었다.

    그것이 서진이었을까? 할머니의 유일한 낙이자, 평생의 상처이자,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었던 존재. 그 그림은 할머니가 평생 간직했던 단 하나의 증거였다. 서진은 어떻게 되었을까? 할머니는 그 후로 그를 만났을까? 묵직한 돌덩이가 지영의 가슴을 짓눌렀다. 수십 년의 세월을 넘어, 할머니의 아픈 사랑과 희생이 지영의 현재에 생생하게 다가왔다.

    일기장의 마지막 문장은 옅게 번져 있었지만, 지영은 그 속에서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덮지만,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는 법. 네가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나는 아마도 자유로워졌겠지. 그리고 너는, 나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내 사랑하는 지영아.”

    할머니는 지영이 이 모든 것을 알게 될 날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처럼 희생하며 살지 않기를 바랐다. 지영은 일기장을 가슴에 품었다. 그녀는 이제 할머니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할머니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서진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분명 어딘가에, 이어진 이야기가 있을 터였다. 지영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393화

    오래된 책갈피

    하진은 낡은 가죽 수첩을 닫았다. 창밖으로는 해 질 녘의 붉은 노을이 도시를 물들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그가 지난 며칠 밤낮으로 들여다보았던 빛바랜 사진 한 장과, 손때 묻은 한 권의 시집이 놓여 있었다. 서연이 가장 아끼던, 그리고 그에게 선물했던 시집이었다. 수첩에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소식을 전해준 익명의 제보자가 언급했던 작은 단서가 적혀 있었다. ‘미술과 책의 숲’.

    “미술과 책의 숲이라니….” 하진은 중얼거렸다. 지난 20여 년간 서연의 흔적을 쫓으며 수없이 많은 단서를 파헤쳤지만, 그녀의 행방은 늘 안개처럼 흩어졌다. 어쩌면 이번도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피로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동시에, 심장 깊은 곳에서는 억누를 수 없는 희미한 기대가 차올랐다. 그녀를 향한 그의 감정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결코 스러지지 않는,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과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시집을 펼쳤다. ‘바람이 스치는 들판에 서서’라는 시의 한 구절에 서연이 직접 그려 넣었을 법한 작은 새 그림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손길이 닿은 흔적들은 하진의 마음을 아련한 과거로 이끌었다. 열여덟 살의 서연은, 마치 이 작은 새처럼 자유롭고 순수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햇살 같았고, 그녀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그 시절의 모든 순간이 생생하게 하진의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서연아…”

    그때 시집에서 얇은 책갈피 하나가 스르륵 떨어졌다. 하진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본 적 없는 책갈피였다. 아니, 정확히는 어딘가 낯익은 듯하면서도 이 시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종이로 만들어진 평범한 책갈피였지만, 한쪽 귀퉁이에 아주 작고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이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하지만 숙련된 화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붓 터치였다. 한적한 시골 풍경 속 작은 오두막과 그 오두막을 둘러싼 울창한 숲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림 아래에는 알아보기 힘든 필체로 ‘미술과 책의 숲’이라는 문구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하진의 눈이 커졌다. 수첩에 적힌 단서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문구였다.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책갈피를 시집 안에 넣어둔 것일까? 서연의 물건을 정리하던 중 발견된 시집이었기에, 이 책갈피가 후대에 삽입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서연의 흔적일까? 아니면 그녀의 딸, 혹은 아들이 그린 것일까?

    그는 책갈피를 든 손을 들어 올려 노을빛에 비춰보았다. 종이의 질감, 색감… 모든 것이 묘한 이끌림으로 다가왔다. 그림 속 오두막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한 듯했다. 어린 시절 서연과 함께 놀러 갔던 외할머니 댁 근처의 작은 별장과 닮아 있었다. 그 별장은 이미 오래전에 폐허가 되었을 터인데….

    하진은 황급히 돋보기를 찾아 책갈피를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오두막 문 옆에 아주 희미하게,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오래된 주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조그만 원형의 마크가 찍혀 있었다. 그는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을 붙잡았다.

    그것은 서연이 학창 시절 미술 수업 때 만들었던 작은 도장과 같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졸업 후 잠시 일했던, 지금은 사라진 작은 화방의 로고와도 닮아 있었다.

    “이럴 수가…” 하진은 숨을 들이켰다. 393화에 이르러서야, 그는 비로소 잃어버린 실타래의 한 끝을 잡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책갈피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혹은 자신에게 보내는 암호와 같은 것이었다. 마치 서연이 남긴 마지막 지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 별장의 주소는, 어쩌면 그녀가 지금 머무는 곳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진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제보자가 말했던 ‘미술과 책의 숲’이라는 의미를 곱씹으며 낡은 수첩에 적힌 주소를 찾아 지도 앱을 켜기 시작했다.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그는 20여 년간의 긴 여정의 끝이 정말로 눈앞에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긴 기다림 끝에 마주할 현실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여전히 그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일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첫사랑은 여전히 그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지도의 목적지가 반짝이는 순간, 하진의 눈빛은 결연하게 빛났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단서일지도 모른다. 그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 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392화

    저무는 강가의 속삭임

    창밖으로 드리운 어둠은 언제나처럼 침묵으로 가득했다. 낮의 소란스러운 잔해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오직 차가운 공기만이 창틈으로 스며들어 뺨을 스쳤다. 지영은 작은 나무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 아래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을 응시했다. 계절이 깊어갈수록, 잎사귀들은 생생한 초록을 잃고 붉고 노란빛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덧없이 땅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지영의 마음 한구석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창틀에 톡,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지영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어둠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두 눈, 그리고 윤기 흐르는 검은 털이 있었다. 길고양이, 별이. 언제나처럼 조용히 나타나 제 존재를 알리는 법이 없었다. 마치 지영의 마음속 외로운 그림자를 읽기라도 한 듯, 그저 말없이 앉아 지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별이야, 왔어?” 지영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별이는 작게 ‘야옹’ 하고 대답하며 창턱으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지영의 손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여전히 그 깊은 눈빛으로 지영을 주시했다.

    “밤이 길어지고, 나뭇잎들은 다 떨어지고… 시간은 참 빠르게도 흐른다, 그렇지?” 지영은 손가락으로 차가운 유리창을 더듬었다. “가끔은 이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리는 것 같아서, 붙잡고 싶어질 때가 있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랄까.”

    별이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나지막하고도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영아, 너는 흐르는 강물도 붙잡으려 하는구나. 강물은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영은 별이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붙잡을 수 없으니까 더 아쉬운 걸지도 몰라.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흐르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일 뿐이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지만, 그 물방울 하나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 않니.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땅으로 돌아오고, 또다시 강이 되어 흐르듯. 모든 것은 순환하는 법이다.”

    별이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설득력 있었다. 지영은 그 목소리 속에서 알 수 없는 위로를 느꼈다.

    “하지만 사라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져버린 꽃잎처럼, 흘러간 시간처럼…”

    “꽃잎은 떨어져 흙이 되고, 그 흙은 다시 새싹을 틔운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그 시간 속에 네가 얻었던 경험과 감정들은 너의 일부가 되어 사라지지 않아. 오히려 너를 더 단단하고 풍요롭게 만들지.” 별이는 가만히 지영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네가 아쉬워하는 것은 사라진 순간들이 아니라,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었던 너의 마음일 뿐이다.”

    지영은 별이의 말에 가슴이 저릿해졌다. 정말 그랬다. 그녀가 아쉬워했던 것은 순간 자체가 아니라, 그 순간에 느꼈던 따스함, 행복, 그리고 함께 했던 기억들이었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 추억들이 희미해질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그럼, 너와 내가 이렇게 마주 보는 이 순간도…” 지영은 말끝을 흐렸다.

    “이 순간은 그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게 하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별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우리는 함께 흐르는 강물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돌멩이와 같다. 강물은 변해도, 돌멩이는 그 자리에 있어 서로를 기억한다.”

    지영은 더 이상 쓸쓸하지 않았다. 밖은 여전히 차가운 밤이었지만, 별이의 존재와 그 말들이 마음속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도 영원히 남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별이는 늘 이렇게 일깨워주곤 했다. 이 작고 검은 그림자가, 어쩌면 세상의 모든 지혜를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영은 조용히 손을 뻗어 별이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별이는 그 손길을 피하지 않고, 아주 작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강물은 계속 흘러갈 것이고, 계절은 또 변할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창가에 함께 앉아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지영과 별이의 이야기는, 그 어떤 시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이어질 것이었다. 지영은 그렇게 믿었다.

  •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391화

    멈추지 않는 꽃

    미영은 작업실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캔버스 위에 그려진 그림들은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했다. 몇 달간 밤낮없이 매달렸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시선과 냉정한 평가뿐이었다. ‘재능이 부족한 걸까’, ‘이 길이 정말 내 길이 맞는 걸까.’ 자문하며 들었던 수많은 밤의 질문들이 오늘의 미영을 질식시켰다. 이 모든 것을 멈춰야 할 때가 온 것만 같았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작업실에서, 미영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낡은 나무 상자 안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늘 그녀에게 위안과 지혜를 주었던 할머니의 일기장이 고이 잠들어 있었다. 표지는 세월의 흔적으로 바래고 닳아 있었지만, 그 안의 글씨들은 여전히 할머니의 온기를 전하는 듯했다. 미영은 조심스럽게 일기장을 펼쳤다. 아무 페이지나 좋았다. 그저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이다.

    손가락 끝으로 더듬거리며 넘기던 페이지에서 멈췄다. 붉은색 펜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진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의 펜 끝에서 흘러나온 그 날의 이야기는, 놀랍게도 미영의 가슴에 와닿았다.

    “1957년 4월 15일, 봄이지만 봄 같지 않은 날이었다. 겨울의 매서움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마음속에도 온통 잿빛 바람이 불었다. 그날도 나는 마당 한 귀퉁이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희망이란 단어가 어딘가 낯설게 느껴질 만큼, 모든 것이 버겁고 의미 없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미영은 할머니의 글씨를 따라 읽으며 눈을 감았다. 할머니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던 순간들. 미영은 다시 눈을 뜨고 다음 문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였다. 낡은 돌담 벽 틈새, 누군가 고의로 심어 놓은 것 같지도 않은 아주 작은 꽃 한 송이가 보였다. 이름 모를 들꽃이었다. 비좁은 틈새에서, 콘크리트의 냉정함을 뚫고 솟아난 그 작고 여린 줄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지만, 다시 제자리를 찾아 고개를 들었다. 그 꽃잎은 누군가의 시선을 받으려 애쓰는 법 없이, 그저 자신만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었다.”

    할머니의 글은 계속되었다.

    “나는 한참을 그 꽃을 바라보았다. 저 작고 연약한 존재조차도 이토록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데, 나는 무엇을 그리도 쉽게 포기하려 했던가. 세상이 정한 아름다움의 기준, 성공의 척도 따위는 저 꽃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피어날 뿐. 그날, 나는 깨달았다. 가장 큰 힘은 화려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는 작은 용기 속에 있음을. 나의 삶도, 나의 노력도, 저 꽃과 같아야 한다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피어나면 그만이다.”

    미영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할머니는 그저 한 송이 작은 들꽃을 통해 삶의 가장 큰 지혜를 얻었던 것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이름조차 알 수 없어도,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꽃. 마치 자신의 그림과 같았다. 거대한 화폭에 강렬한 색채를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 섬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림들.

    지금까지 미영은 늘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갇혀 있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감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일기장은 그녀에게 속삭였다. 괜찮다고. 너의 그림은 너만의 방식으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굳이 모두의 시선을 끌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저 꾸준히, 끈질기게, 너의 색깔로 피어나면 된다고.

    미영은 일기장을 가슴에 품었다. 작업실 창문 너머로 아침 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캔버스가 희미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포기하려 했던 그림들 속에서, 작은 들꽃의 강인한 생명력이 보였다. 그녀의 손은 다시 붓을 향했다. 이번에는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닌, 오직 자신만을 위한 그림을 그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멈추지 않는 꽃처럼, 그녀도 다시 피어날 것이다. 그녀만의 방식으로.

  • 시간이 멈춘 골동품 가게 – 제390화

    햇살조차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듯 희미하게 스며드는 시간의 골동품 가게. 지우는 먼지 앉은 고서들 사이에서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시계 초침 소리마저 존재를 잊은 듯,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멈춘 채, 혹은 영원히 흐르는 채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오늘따라 가게 한구석, 낡은 마호가니 진열장 위 작은 오르골이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금속 장식은 빛을 잃었고, 자개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며칠 전 경매에서 가져온 물건이었다. 다른 골동품들과 달리, 이 오르골은 왠지 모르게 지우의 마음을 긁었다. 만질 때마다 손끝에 전해지는 묘한 떨림, 마치 아직 끝나지 않은 선율이 내부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지우가 조심스럽게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과 닳아버린 나무의 감촉이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태엽을 감는 손잡이는 뻑뻑했지만, 이내 ‘딸깍’ 소리와 함께 작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하지만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아련한 음률. 아주 단순하고 반복적인 음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율은 지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가게 안의 모든 색이 바래고, 그림자는 더욱 깊어지는 듯했다. 오르골의 멜로디가 공간을 가득 채우자,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주위에 있던 먼지 입자들이 공중에 정지하고, 창밖을 스쳐 지나던 그림자조차 멈췄다. 지우의 눈앞에 흐릿한 풍경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오래된 비디오테이프처럼 지글거리는 영상이었다.

    어린 시절의 지우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밝게 웃고 있는 은하가 있었다. 그들의 작은 손에 들린 것이 바로 이 오르골이었다. 어린 은하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났고,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오빠, 약속해. 이 오르골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린 언제나 함께야.” 은하의 맑은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울렸다. 그 약속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기에, 지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영원하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고, 세상이 변하듯, 은하도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오르골의 멜로디처럼 반복되는 그리움만 남긴 채. 지우는 그 후로 수많은 골동품을 모으고, 멈춘 시간을 붙잡으려 애썼다. 잊혀진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 헤매며, 혹시라도 그 안에 은하의 흔적이 있을까 하여.

    환영이 사라지고, 지우는 거친 숨을 내쉬며 현실로 돌아왔다. 오르골은 여전히 그의 손에 들려 있었고, 낡은 멜로디는 아득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주변의 먼지는 다시 유유히 춤추기 시작했고, 창밖의 그림자도 제 갈 길을 갔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지우의 세상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린 듯했다.

    오르골의 밑바닥을 더듬던 지우의 손가락에 무언가 걸렸다. 작게 튀어나온 부분을 누르자, 희미한 ‘딸깍’ 소리와 함께 오르골의 옆면이 열렸다. 그 안에는 바싹 마른 작고 노란 꽃잎 하나와, 빛바랜 종이 조각이 들어 있었다. 종이 조각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오빠, 내가 돌아오면 이 오르골이 길을 안내해 줄 거야. 약속.’

    그것은 은하의 필체였다. 지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혹은 억지로 잊으려 했던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오르골은 단순히 과거의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은하가 남긴 메시지였고, 그들의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오르골의 멜로디는 이제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희미한 속삭임처럼 들렸다. 지우는 오르골을 가슴에 품었다. 수십 년 만에 비로소, 그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듯했다.

  • 밤기차에서 만난 낯선 인연 – 제389화

    차가운 달빛 아래서

    지훈은 작은 아파트의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식어버린 커피잔은 더 이상 온기를 뿜지 않았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몇 시간 전, 수아에게서 온 짧은 문자 한 통.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 세 마디가 밤새도록 그의 심장을 조여왔다.

    창밖은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고요한 밤거리는 차가운 달빛 아래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가끔씩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이 이 도시가 잠들지 않았음을 알렸다. 그 기적 소리는 늘 그랬듯, 처음 수아를 만났던 그 밤기차의 기억을 소환했다. 우연처럼 다가와 운명이 된 인연. 그 인연이 지금, 다시 시험대에 오르려는 것만 같았다.

    초인종 소리가 고요를 갈랐다. 지훈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문간에 서 있는 수아의 얼굴은 달빛처럼 창백했다. 얇은 코트 차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왔어?” 지훈의 목소리는 제법 차분했지만, 그의 눈은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수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시선은 지훈을 피한 채, 방 한편을 맴돌았다.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오늘의 공기는 낯설고 무거웠다.

    “앉아.” 지훈은 소파를 가리켰다. 수아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앉았지만,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할 이야기가 뭐라고 했지?” 지훈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수아는 손을 살짝 거두었다. 그 작은 행동에 지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아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정말 미안해, 지훈아.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전에 말했던 내 가족 문제, 기억나지?”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아의 가족은 오래전부터 그녀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그녀의 과거와 얽힌 그림자. 지훈은 그 그림자가 언젠가 이들을 덮칠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짐작해왔다.

    “그쪽에서… 결국 나를 찾아냈어.” 수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나 봐.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거고. 이번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어.”

    지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선택? 무슨 소리야, 수아. 괜찮아, 내가 있잖아. 혼자 감당하지 마.”

    수아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엔 달라. 너무 복잡하고, 위험해. 내가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너를 놓아야 해. 너와 함께 있으면, 너까지 위험해질 거야.”

    그 말에 지훈은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수아의 과거가 그들의 미래를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지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지 알아? 그 밤기차에서부터 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을 이겨냈는데. 이제 와서 너를 놓으라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수아는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없이 울었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너를 지키려면… 이게 최선이야.”

    지훈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차갑게 식었던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차가운 그녀의 손과는 달리 그의 손은 뜨거웠다.

    “나는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수아. 네가 없는 안전 따위, 나에게는 의미 없어.” 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다시 한번 함께 버텨보자. 나를 믿어줘. 우리가 함께라면, 어떤 어둠도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

    수아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눈은 지훈의 깊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들의 시선이 얽히는 순간, 밖에서는 다시 한번 깊고 긴 기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그들의 흔들리는 운명을 재촉하는 듯, 혹은 그들에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있음을 알리는 듯했다. 차가운 달빛은 그들의 어깨를 감쌌지만, 서로를 마주보는 두 사람의 눈빛 속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