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Original Stories

  • SF (공상과학)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에피소드 17: 심연의 코러스

    심장박동 소리만이 온몸을 울렸다.

    강하준은 손에 든 홀로그램 스캐너의 미약한 불빛에 의지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옆을 따르던 유이슬은 헤드셋을 꽉 눌러 쓴 채, 미간을 찌푸린 채 내부 통신망에서 들려오는 노이즈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탐사한 끝에, 마침내 그들은 이 거대한 지하 유적의 심장부로 추정되는 곳에 도달했다.

    “하준 씨, 이상해요. 내부 센서들이 완전히 먹통이에요. 우리가 들어선 순간부터 모든 통신이 끊겼어요.” 이슬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젠장,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완전히 차단될 줄이야.” 하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다. 수천 년, 아니 수만 년 전에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고대 문명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지금까지 그 어떤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불가사의한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대한 원형 홀의 중앙에 서 있었다. 사방은 거대한 돌기둥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기둥마다 기하학적인 문양과 알 수 없는 언어의 글자들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홀 중앙에는 거대한 검은색 구체가 묵직하게 떠 있었는데, 그 표면은 마치 밤하늘을 압축해 놓은 듯 무수히 많은 작은 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슬, 에너지 패턴은?” 하준이 조용히 물었다.

    이슬은 손목에 찬 탐지기를 구체 쪽으로 향했다. “측정 불가. 너무 거대하거나… 아니면 제가 아는 어떤 에너지 범주에도 속하지 않아요. 하지만… 무언가 미약하게 진동하고 있어요. 아주 낮은 주파수인데,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홀 전체를 감싸고 있던 정적이 깨졌다. ‘웅—’ 하는 낮은 공명음이 바닥을 타고 올라와 발바닥을 울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중앙의 검은 구체였다. 구체의 표면에 박혀 있던 수많은 점들이 마치 별처럼 하나둘씩 희미한 푸른빛을 내기 시작했다.

    “하준 씨, 스캔 결과가… 이 구체, 외부에서 어떤 에너지 주입도 없이 스스로 빛을 내고 있어요. 그리고 주변의 돌기둥에도 변화가 감지돼요!” 이슬이 다급하게 외쳤다.

    하준은 홀을 둘러쌌던 돌기둥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과연, 기둥에 새겨진 고대 문양들이 푸른빛을 흡수하듯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숨겨진 그림이 드러나듯, 문양들이 복잡하게 연결되며 하나의 거대한 회로도를 형성하는 것 같았다.

    “젠장, 우리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린 건가?” 하준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이 거대한 장치가 어떤 용도인지, 혹은 어떤 위험을 품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다만,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던 직감적인 위협만이 점점 더 강렬해질 뿐이었다.

    공명음은 점점 더 커졌고, 이젠 단순히 바닥을 울리는 것을 넘어 공기 자체를 진동시키는 듯했다. 홀 천장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흔들렸고, 돌기둥 사이에서 희뿌연 먼지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슬, 뒤로 물러서! 구체에서 방출되는 에너지 스파이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어!” 하준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며 외쳤다.

    푸른빛을 내던 중앙의 구체가 순식간에 강렬한 백색광을 뿜어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섬광과 함께 ‘콰아앙!’ 하는 폭발음이 홀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폭발음은 물리적인 충격이 아닌, 에너지의 격렬한 방출음이었다. 압도적인 에너지가 구체에서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며, 홀 전체를 거대한 막이 감싸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방어막! 방어막 올려!” 하준은 팔에 장착된 소형 실드 제너레이터를 작동시키려 했지만, 이 거대한 에너지 앞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순간, 홀의 사방을 둘러쌌던 돌기둥들이 마치 거대한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묵직한 돌덩어리들이 수직으로 치솟아 오르며 그들을 가두는 거대한 철창을 형성했다. 순식간에 시야가 막히고, 그들은 거대한 백색광 속에 갇힌 꼴이 되었다.

    그리고 백색광 너머에서, 홀의 한쪽 벽면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벽은 단단한 돌이 아니었다. 마치 정교하게 짜인 퍼즐처럼, 고대 문양이 새겨진 조각들이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거대한 어둠의 심연을 드러냈다. 심연 너머에서는 차가운 공기가 뿜어져 나왔고, 그 안에서 희미하게 무언가 거대한 형체가 꿈틀거리는 실루엣이 보였다.

    백색광이 정점에 달하며 모든 소리를 집어삼킬 듯한 압도적인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하준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보았다.
    심연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그것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이건 예상 밖이야!”

    하준의 외침과 함께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 심리 스릴러 상세한 애니메이션 대본 및 스토리보드

    ## 멸망의 조각 (Fragments of Ruin)

    **장르:** 심리 스릴러, 생존극
    **핵심 줄거리:** 황폐해진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기. 끊임없이 자신과 외부의 위협에 맞서 싸우며 인간성을 지키려는 한 여인의 고독한 투쟁.

    **로그라인:** 세상은 죽었고, 인간은 짐승이 되었다. 황폐한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세아’는 살아남기 위해 매일 밤 자신의 심장을 갉아먹는 공포와 싸운다. 하지만 그녀를 쫓는 것은 비단 굶주림뿐만이 아니었다. 잊고 싶었던 과거의 조각들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붙잡기 시작한다.

    ### **[SCENE 1: 재가 된 도시의 숨통]**

    **시간:** 해 질 녘, 늦은 오후.
    **장소:** 무너진 고층 빌딩 숲의 가장자리, 낡은 상점가의 폐허.

    **(화면)**

    **[1.1] EXT. 폐허가 된 도시 외곽 – 파노라마 샷 (EXTREME WIDE SHOT)**
    붉은 흙먼지로 뒤덮인 하늘 아래, 앙상한 철근 구조물들이 마치 거대한 뼈대처럼 솟아 있다. 끊어진 전선들은 바람에 휘파람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빛바랜 간판 조각들이 부서진 건물 외벽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거리는 온통 무너진 잔해와 썩어가는 쓰레기로 가득하며, 멀리서 뼈만 남은 나무들이 스산하게 서 있다. 황량함과 고독이 동시에 느껴지는 풍경.

    **BGM:** (낮고 음산한 앰비언스 사운드, 금속이 바람에 삐걱이는 소리, 먼지 섞인 바람 소리)

    **세아 (내레이션)**
    또다시 해가 저문다. 세상은 죽은 지 오래지만, 해는 여전히 뜨고 진다. 마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모든 것이 변했다. 우리는… 모두 변했다.

    **[1.2]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세아 (MED SHOT)**
    세아(20대 중반, 여위었지만 강인한 눈빛)가 무너진 벽 사이의 좁은 틈새를 기어 나온다. 그녀의 낡은 작업복은 흙먼지와 찢어진 자국으로 가득하며, 어깨에 맨 멜빵 가방은 잔뜩 부풀어 있다. 얼굴과 팔에는 깊은 상처들이 아물어 딱지가 앉아있고, 며칠 밤을 새운 듯 눈 밑은 거무스름하다. 그녀의 움직임은 능숙하고 매끄럽지만, 주변을 스캔하는 시선에는 극도의 경계심이 서려 있다. 숨겨진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려는 듯, 그녀의 눈은 끊임없이 좌우로 흔들린다.

    **SFX:** (세아가 잔해를 헤치고 나오는 소리 – 조심스럽고 미세하게, 옷이 거친 표면에 쓸리는 소리)

    **세아 (내레이션)**
    한 조각의 빵, 한 모금의 물… 그 작은 희망을 찾아 헤매는 것이, 내 모든 삶이 되었다. 어제가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 내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1.3]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세아의 시선 (POV SHOT)**
    무너진 상점가의 내부. 으깨진 상품들, 뒤집힌 진열대, 깨진 유리 파편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널려 있다. 오래전 번성했을 상점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모든 것이 폐허의 일부가 되어 먼지 속에 잠겨 있다.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석양이 잔해 사이로 스며들어와 기괴한 그림자를 만든다. 그 그림자 속에서,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공간에 알 수 없는 형태의 그림자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인다.

    **[1.4]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세아 (CLOSE UP)**
    세아의 얼굴. 땀과 흙먼지로 범벅된 피부. 메마른 입술은 갈라져 피가 비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그녀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있다. 어떤 작은 소리, 어떤 작은 움직임에도 즉각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맹수처럼.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고동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세아 (내레이션)**
    갈증이 목구멍을 찢을 듯 조여온다. 혀는 이미 모래처럼 말라붙었고, 이빨은 서로 부딪혀 부서질 것 같았다. 마지막 남은 물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

    **[1.5]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세아의 손 (EXTREME CLOSE UP)**
    세아가 멜빵 가방 안을 뒤적여, 거의 비어가는 낡은 물통을 꺼낸다. 플라스틱 재질의 물통은 표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다. 물통을 귀에 대고 흔들어 보지만, 텅 빈 플라스틱 소리만 날 뿐, 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굳은살로 거칠게 변해있고, 손톱 밑에는 거뭇한 때가 끼어있다.

    **SFX:** (물통을 흔드는 소리, 텅 빈 플라스틱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1.6]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세아 (MED SHOT)**
    세아가 물통을 허탈하게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무너진 천장 사이로 빗물이 스며든 흔적이 보인다. 오래된 누수 자국 아래, 깨진 콘크리트 바닥에 희미하게 고여있는 작은 웅덩이. 탁한 흙탕물이지만, 세아에게는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도 귀한 생명수처럼 보인다. 그녀의 눈빛이 갈망으로 번뜩인다.

    **[1.7]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웅덩이 (CLOSE UP)**
    바닥에 고인 물. 탁하고 더러우며, 그 위로 기름 같은 얇은 막이 번들거린다. 그 위로 파리 한 마리가 앉았다 날아간다. 불쾌하고 비위생적인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물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유물들이 떠다니고 있다.

    **세아 (내레이션)**
    이 더러운 물이라도… 마셔야 했다. 살려면.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1.8]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세아 (FULL SHOT)**
    세아가 조심스럽게 웅덩이로 다가간다. 낡은 작업복의 주머니에서 닳아빠진 천 조각을 꺼낸다. 한때는 깨끗했을 그 천은 이제 흙먼지와 검은 얼룩으로 얼룩져 있다. 그녀는 천 조각을 조심스럽게 물에 담가, 조금이라도 불순물을 걸러내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손가락 끝이 더러운 물에 잠긴다.

    **SFX:** (천이 물에 젖는 소리, 작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진흙 섞인 물의 탁한 냄새가 시각적으로 전달되는 듯)

    **[1.9]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세아의 얼굴 (EXTREME CLOSE UP)**
    물을 머금은 천을 입술에 가져다 대는 세아. 역한 흙비린내와 함께 썩은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망설임이 잠시 스쳐 지나가지만, 갈증은 그 어떤 망설임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천에 맺힌 물방울을 빨아들인다. 억지로 삼키는 듯한 고통스러운 표정. 한 모금, 두 모금…

    **세아 (내레이션)**
    차갑고… 비릿하고… 흙 맛이 났다. 역겨웠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 비참한 액체가 세상 그 어떤 달콤한 샘물보다 소중했다. 이 한 모금으로도, 잠시나마 살아있다는 감각을 붙잡을 수 있었다.

    **[1.10]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세아 (MED SHOT)**
    세아가 물을 마시고 고개를 들 때, 갑자기 건물 외부에서 ‘끼이익… 콰앙!’ 하는 쇠가 긁히는 듯한 굉음이 들린다. 그녀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된다. 손에 쥐고 있던 낡은 철근 조각을 꽉 움켜쥔다. 철근의 녹슨 부분이 그녀의 손바닥을 파고든다.

    **SFX:** (금속이 긁히는 듯한 날카로운 굉음, 잠시 후 무언가 무너지는 둔탁한 소리 – 멀리서 들려오지만 분명하게, 진동이 느껴지는 듯)
    **BGM:** (굉음과 함께 급작스럽게 고조되는 현악기, 불안감을 극대화하는 날카로운 신디사이저 음)

    **세아 (내레이션)**
    환청일 리 없다. 저것은… 바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

    **[1.11]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세아의 시점 (POV SHOT)**
    무너진 상점가 밖, 해 질 녘의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거리. 멀리서, 빌딩 잔해 사이로 희미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너무 멀고 어둡지만, 마치 거대한 그림자가 흔들리는 듯한 모습이다. 언뜻 사람의 형상 같기도 하고, 짐승의 형상 같기도 하다. 이내 움직임은 멈추고, 굉음도 멎는다. 다시금 죽은 듯한 정적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정적은 이전보다 훨씬 무겁고 음산하다.

    **[1.12]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세아 (CLOSE UP)**
    세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경계심과 공포, 그리고 알 수 없는 좌절감이 뒤섞여 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들려오는 소리와 보이는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그녀의 귀는 바람 소리마저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입술을 깨물어 흐르는 피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

    **세아 (내레이션)**
    사람… 인가? 아니면… 짐승인가? 이 세상에서, 그 둘의 차이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일지도.

    **[1.13]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세아 (FULL SHOT)**
    세아가 재빨리 몸을 낮춰, 무너진 진열대 뒤편의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숨어든다. 그녀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손에 든 철근 조각을 자신의 방패이자 무기처럼 단단히 쥐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계속해서 소리가 들렸던 곳을 향한다.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그녀는 마치 사냥감처럼 숨죽이고 있다.

    **SFX:** (세아의 거친 숨소리, 격렬하게 뛰는 심장 소리 – 과장되게, 귓가에 울리는 듯)
    **BGM:** (낮게 깔리는 불안한 앰비언스, 심장 박동 소리에 맞춰 고조되다가 정적이 흐름)

    **[1.14]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세아의 시점 (POV SHOT)**
    어둠이 짙게 드리운 외부. 그 순간, 폐허 속 깊은 곳에서 아주 희미한 불빛이 깜빡인다. 휴대용 손전등 같은 빛이다. 한 번, 두 번… 짧게 깜빡이더니 이내 사라진다. 그 짧은 순간, 빛이 비춘 곳에는 무언가 날카로운 금속이 번쩍이는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세아 (내레이션)**
    찾고 있는 건가? 나를… 아니면… 이 폐허 속에 숨겨진 무언가를?

    **[1.15]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세아 (EXTREME CLOSE UP)**
    세아의 눈빛이 흔들리며, 과거의 어떤 기억과 겹쳐지는 듯 순간적으로 동공이 확장된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파편적인 이미지들: 붉은 불꽃, 아비규환의 비명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얼굴.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었을까, 아니면 증오하는 이의 얼굴이었을까. 그 이미지는 빠르게 사라진다.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그 기억을 털어내려 애쓴다.

    **세아 (내레이션)**
    아니, 과거는… 과거는 붙잡아선 안 돼. 붙잡는 순간,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1.16]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세아 (FULL SHOT)**
    세아가 몸을 웅크린 채, 어둠 속에서 철근을 든 손을 더욱 굳건히 한다. 그녀의 눈빛에는 살아남으려는 처절한 의지와 동시에, 알 수 없는 어두운 결의가 깃들어 있다. 그녀의 그림자가 무너진 잔해들 사이로 길게 드리워져, 마치 그녀의 또 다른 자아가 밤의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듯하다. 불빛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며, 밤이 찾아오는 폐허 속으로 점점 더 깊이 스며든다.

    **BGM:** (불안한 앰비언스가 점점 커지며, 비장하고도 절망적인 현악기 선율로 변주. 이따금 날카로운 금속음이 삽입되며 긴장감 고조)

    **세아 (내레이션)**
    이 폐허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단 하나의 조각일 뿐. 하지만 이 조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 무엇이 인간성을 버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1.17] INT. 낡은 상점 건물 잔해 – 어둠 속으로 잠기는 세아 (FADE OUT)**
    세아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며, 화면은 오직 짙은 암흑만 남긴다. 마지막 순간,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만이 희미하게 빛나다 이내 사라진다. 완벽한 어둠과 정적.

    **[END OF SCENE 1]**

  • 메카 액션 독립적인 단편 소설

    붉은 황혼이 대지를 덮었다. 칼날처럼 솟아오른 암석 봉우리들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고, 그 사이를 흐르는 마그마 강은 끓어오르는 생명처럼 붉은 숨을 내쉬었다. 그 위를, 거대한 강철의 그림자가 육중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천뢰(天雷)’. 파일럿 강하준에게는 단순한 기체가 아니었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그의 삶, 그리고 그가 짊어진 모든 것의 연장이었다.

    “하준, 목표 지점 델타-7 확인. 특이 신호 감지되지 않음.”
    차가운 기계음이 조종석을 채웠다. 헤르메스-AI의 목소리였다. 언제나처럼 정확하고 무감각했다.
    하준은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 한 바퀴 더 돌고 복귀한다.”
    메마른 행성 오르시아. 인류는 이곳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찾아 헤맸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종족과 마찰을 빚었다. 천뢰는 그 최전선에 서 있었다. 그의 임무는 ‘엘라리아’ 종족의 잔존 세력을 색출하고, 인류의 자원 채취를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엘라리아는 빛과 에너지를 다루는 신비로운 종족으로 알려졌으나, 인류에게는 그저 방해물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헤르메스의 평온한 음성에 미약한 진동이 섞였다.
    “하준, 예상 외 신호 감지. 불규칙적인 에너지 패턴. 기원을 알 수 없음.”
    “무슨 소리야? 오르시아에는 인류 외에 정규 신호를 발하는 건 엘라리아 잔당뿐이잖아.”
    하준은 조종간을 틀어 천뢰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헤르메스가 ‘기원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건 거의 없었다. 천뢰의 거대한 몸체가 무릎을 굽히며 경사를 내려갔다. 붉은 흙먼지가 폭풍처럼 일었다.

    파괴된 엘라리아 함선의 잔해가 보였다. 인류가 주도한 대규모 섬멸전 이후, 이렇게 온전한 잔해는 드물었다. 함선은 마치 거대한 꽃잎이 찢겨나간 듯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리고 그 잔해 속에서, 한 줄기 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하준은 천뢰를 정지시키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센서가 찢겨진 함선 내부에서 미약한 생명 반응을 포착했다.
    “생명 반응 약함. 엘라리아 종족으로 추정됨. 회수 프로토콜….”
    “잠깐.” 하준이 헤르메스의 말을 끊었다.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
    천뢰의 해치가 열리고, 하준은 비상용 로프를 타고 잔해 속으로 내려갔다. 내부의 공기는 차갑고, 고대의 향취가 났다. 부서진 함선 중심부, 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다가가자, 그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한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아니, ‘여인’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얇고 투명한 피부 아래로 푸른색 정맥이 핏줄처럼 섬세하게 빛나고 있었고, 은색 머리칼은 마치 살아있는 에너지처럼 공기 중에서 희미하게 일렁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은 심해의 색을 닮았고, 고통 속에서도 형언할 수 없는 고귀함이 깃들어 있었다. 엘라리아 종족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하준이 상상했던 ‘적’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녀의 몸은 산산이 부서진 함선의 잔해에 깔려 있었다. 희미하게 맥동하는 생명의 빛은 꺼지기 직전이었다. 하준은 망설였다. 그의 임무는 살아남은 엘라리아를 제거하거나 보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잔해를 치우고 그녀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몸은 놀랍도록 가벼웠고, 차가웠다. 하지만 하준의 손에 닿자, 그녀의 푸른 피부에서 희미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녀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심해 같은 눈동자가 하준을 응시했다. 공포나 경계심 대신, 그저 깊은 슬픔과 함께 어떤 호기심이 스쳐 지나갔다.
    “…인간.” 그녀의 입술에서 희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언어가 아닌, 영혼에 직접 와 닿는 듯한 주파수였다.
    “리엘.”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름조차도 빛처럼 부드러웠다.

    하준은 리엘을 천뢰의 조종석으로 데려왔다. 헤르메스는 끊임없이 ‘프로토콜 위반’을 경고했지만, 하준은 듣지 않았다. 천뢰의 생명 유지 장치는 엘라리아 종족에게 맞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비상 보급품과 의료 키트를 총동원해 리엘을 치료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는 천천히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마치 빛을 흡수하듯 에너지를 빨아들였다.

    며칠 밤낮을 비밀 기지에서 보냈다. 하준은 리엘을 숨겼다. 그녀는 말이 없었지만, 그와 눈을 마주할 때마다 헤르메스도 감지하지 못하는 미세한 교감이 일어났다. 리엘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전쟁의 상처, 고독, 그리고 인류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하준의 내밀한 갈등을.
    어느 날, 리엘은 천뢰의 제어판에 손을 얹었다. 푸른 빛이 그녀의 손에서 번져 나와 제어판을 감쌌다. 천뢰의 내부 시스템이 반응했다. 에너지 출력 그래프가 미친 듯이 치솟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하준이 경악했다.
    리엘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천뢰… 이 기체는… 당신의 영혼과… 깊이 연결되어 있어. 내 에너지가… 당신의 의지를 증폭시켜.”
    그녀의 말은 단순히 언어를 넘어선, 개념의 전달이었다. 그녀는 천뢰의 숨겨진 잠재력을 꿰뚫어 보았고, 그것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하준의 마음속에 의구심이 사라지고, 묘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때부터 그들의 금지된 동맹이 시작되었다. 하준은 리엘을 자신의 비밀 병기로 삼았다. 물론, 병기라기보다는… 동반자에 가까웠다. 전투 상황에서 리엘은 천뢰의 보조석에 앉아, 손을 뻗어 조종간 대신 그의 신경 회로에 직접 연결되었다. 그녀의 에너지는 천뢰의 기동성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렸고, 그의 조준은 완벽에 가까워졌다. 전투는 더 이상 단순한 기계 조작이 아니었다. 하준의 육체, 천뢰의 강철, 리엘의 빛이 하나가 되어 춤을 추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동맹을 넘어섰다. 전투의 아드레날린 속에서, 죽음의 문턱을 함께 넘나들며, 그들의 영혼은 더욱 깊이 얽혔다. 하준은 리엘의 연약함 속에서 강인한 지혜를 보았고, 리엘은 하준의 차가운 강철 아래 숨겨진 따뜻한 마음을 느꼈다.
    어느 날 밤, 오르시아의 붉은 달이 조용히 떠오른 기지에서, 하준은 리엘에게 물었다.
    “너희 엘라리아는 왜 우리와 싸우는 거지? 우리가 찾는 건 그저… 에너지뿐인데.”
    리엘은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인간이 찾는 것은… ‘생명의 빛’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추출하는 에너지가 아니야. 그것은… 우주 만물의 생명과 연결된… 근원적인 존재. 파괴하면… 모든 것이 무너져.”
    그녀의 목소리는 슬픔으로 가득했다. 인류의 탐욕이 어떤 재앙을 불러올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준은 혼란스러웠다. 그가 믿어왔던 모든 것이 흔들렸다. 그들은 인류에게 적이었지만, 어쩌면 진정한 적은 탐욕에 눈이 먼 인류 자신일지도 몰랐다.

    그들의 금지된 사랑은 오르시아의 붉은 모래처럼 조용히 퍼져나갔다. 스치듯 닿는 손끝에서, 말없이 오가는 시선 속에서, 죽음을 함께 이겨낸 순간들 속에서. 그것은 종족의 벽을 허물고, 이성의 장벽을 넘어선 순수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위험 또한 커져갔다. 인류 지휘부는 엘라리아의 비정상적인 저항과 특정 지역에서의 천뢰의 미확인 활동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인류 연합군은 엘라리아의 마지막 성지, ‘생명의 요람’을 최종 공격 목표로 삼았다. 그곳에 ‘생명의 빛’의 핵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준의 부대도 전면전에 투입되었다.
    전장은 지옥 같았다. 수많은 메카들이 광선을 뿜어내고, 폭발음이 귓청을 찢었다. 하준은 천뢰를 몰고 인류의 전진 대열에 합류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리엘과 함께 있었다.
    “리엘, 네 말이 맞았어. 저들은 이곳을 파괴하려 해.”
    리엘은 천뢰의 보조석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막아야 해, 하준. 이곳이 무너지면… 오르시아는 물론, 이 모든 성계가… 병들게 돼.”
    하준은 결심했다. 인류의 영웅이 되는 대신, 그는 사랑하는 이의, 그리고 이 행성의 수호자가 되기로 했다.
    “헤르메스, 모든 통신 채널 차단. 목표, 전방 인류 연합군 제3돌격대.”
    “프로토콜 위반! 명령 불복종!” 헤르메스가 경고했지만, 하준은 듣지 않았다.
    천뢰의 푸른빛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하준은 조종간을 거칠게 틀었다. 천뢰는 전장을 가로질러 인류 연합군을 향해 돌진했다.

    “하준! 이게 무슨 짓이야!” 동료 파일럿들의 경악에 찬 통신이 빗발쳤다.
    하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온 신경은 리엘이 천뢰의 시스템과 동기화시킨 에너지 흐름에 집중되어 있었다. 리엘의 힘으로 천뢰의 무장은 증폭되었다. 플라즈마 캐논은 평소보다 두 배는 강력한 섬광을 뿜었고, 방어막은 어떤 공격도 튕겨냈다.
    그는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막으려 할 뿐이었다. 인류의 전진을 저지하고, 엘라리아의 성지를 지키는 것.
    천뢰는 마치 푸른 번개처럼 전장을 휘저었다. 그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했고, 그 강함은 압도적이었다. 인류군 메카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배신과 상상 초월의 성능에 혼란에 빠졌다.
    “하준… 더 깊이 연결해…!” 리엘의 목소리가 그의 의식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녀의 푸른 빛은 이제 천뢰의 모든 회로를 감싸고, 기체 자체를 엘라리아의 에너지체처럼 보이게 했다. 천뢰의 외피에서 푸른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무기의 빛이 아니었다. 생명의 빛, 그 자체였다.
    하준은 리엘과 함께, 인류 연합군의 최전선을 뚫어냈다. 그의 목표는 ‘생명의 요람’을 파괴하려는 핵심 유닛들이었다. 마지막 순간, 그는 거대한 에너지 포화를 퍼부어 요람을 향하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전장은 침묵에 잠겼다. 천뢰는 ‘생명의 요람’ 앞에서 굳건히 서 있었다. 푸른 빛을 발하며, 인간과 엘라리아, 두 종족의 경계선에 홀로 우뚝 서 있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인류 지휘부의 분노는 엄청났다. 하준은 이제 반역자였다. 동시에 엘라리아 종족에게도 그는 완벽한 아군이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성지를 파괴하려던 종족의 일원이었다.
    “하준, 후퇴해야 해. 더 이상은….” 리엘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그녀의 에너지는 거의 소진된 듯했다.
    하준은 천뢰의 해치를 열었다. 차가운 오르시아의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리엘을 안고, 천뢰의 심장부로 들어갔다. 그곳은 엘라리아의 기술과 천뢰의 핵심 코어가 융합된, 오직 그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리엘이 속삭였다.
    하준은 그녀의 푸른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을 거야. 하지만… 우리가 함께라면….”
    그는 천뢰의 조종간에 손을 얹었다. 천뢰의 에너지 코어가 다시 한번 강하게 맥동했다.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천뢰는 오르시아를 떠났다. 인류 함대의 추격이 이어졌지만, 리엘의 마지막 힘을 빌린 천뢰의 점프 능력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푸른 번개처럼 우주 속으로 사라졌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천뢰는 작은 점이 되어 홀로 유영했다. 그 안에는 한 인간 파일럿과 한 엘라리아 여인이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종족의 금기를 깨고, 전쟁의 포화를 뚫고 피어난 가장 순수한 형태의 희망이었다. 그들이 앞으로 어떤 여정을 겪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인류와 엘라리아, 그 모든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의 여정이, 언젠가 모든 종족이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밝혀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 던전 탐험 상세한 애니메이션 대본 및 스토리보드

    ## 미궁 아파트 1304호

    **장르:** 도시 탐험 판타지 스릴러
    **주제:** 현대 도시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폴터가이스트 현상과 미궁화.
    **캐릭터:** 이도진 (20대 후반, 프리랜서 사진작가, 도시 괴담 및 미스터리 애호가. 호기심 많고 냉철한 편이나, 극한의 상황에서는 인간적인 두려움을 느낀다.)

    **[프롤로그]**

    **SCENE 1**
    **장면:** 낡고 오래된 아파트 단지 외부 – 황혼 무렵
    **시간:** 해질녘

    **VISUALS:**
    [카메라, 지상에서 천천히 위로 팬하며 낡은 아파트 단지의 전경을 담는다. 콘크리트 외벽은 군데군데 때가 타고 페인트가 벗겨져 있다. 창문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이다. 어떤 창은 깨져 있고, 어떤 창은 굳게 닫혀 있으며, 몇몇 창문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도심 한가운데지만,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음산한 기운이 감돈다. 특히 한 동의 가장 높은 층, 13층의 한 창문에 포커스. 유독 그 창문만 짙은 그림자에 잠겨 빛 한 점 없다.]

    **SOUND:**
    [나지막한 도시의 소음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경적,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깔리지만, 점차 희미해진다. 대신 어딘가 삐걱거리는 듯한, 오래된 건물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온다.]
    [불안한 현악기 선율이 시작된다. 낮게 깔리는 베이스 현의 진동.]

    **도진 (N.F.G – 나레이션 / 나른하면서도 탐색적인 어조):**
    “사람들은 도시를 ‘삶의 터전’이라 부른다. 질서와 안락, 그리고 예측 가능한 일상이 지배하는 곳. 하지만 내게 도시는 늘 거대한 미궁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길, 폐쇄된 상점의 흐릿한 쇼윈도, 그리고 누구도 발길 닿지 않는 어둠 속의 공간들… 그곳에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숨 쉬고 있었다.”

    **SCENE 2**
    **장면:** 1304호 현관 앞 – 밤

    **VISUALS:**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낡은 형광등이 깜빡이며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바닥에는 벗겨진 타일과 긁힌 자국들이 가득하다. 도진이 허름한 여행용 가방과 카메라 장비 가방을 들고 1304호 문 앞에 서 있다. 굳게 닫힌 철문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녹슬어 있다. 문 위에는 1304라는 숫자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도진은 잠시 문을 응시하다가 손에 든 열쇠를 만지작거린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함께, 묘한 기대감이 스쳐 지나간다.]

    **SOUND:**
    [형광등의 불안정한 윙- 하는 소리.]
    [도진의 숨소리. 약간 거칠다.]
    [열쇠가 금속 문고리에 부딪히는 짤랑거리는 소리.]
    [음악: 현악기 선율이 고조된다.]

    **도진 (N.F.G):**
    “그리고 오늘, 나는 또 다른 미궁의 입구에 서 있다. 한 달 전, 인터넷 게시판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아파트의 기이한 소문들. ‘이사 온 사람들이 며칠을 못 버티고 도망쳐 나온다’, ‘밤마다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린다’, ‘벽 속에서 뭔가가 움직인다’… 흔해 빠진 도시 괴담이라 치부하기엔 왠지 모를 이끌림이 있었다. 싸구려 월세라는 미끼는 덤이었고.”

    [도진이 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돌린다. ‘철컥’ 하는 소리가 복도에 크게 울린다. 문이 천천히, 삐걱거리며 열린다. 문틈 사이로 짙은 어둠이 새어 나온다.]

    **도진 (자조적인 미소):**
    “그래, 환영해라. 미지의 존재여.”

    **SCENE 3**
    **장면:** 1304호 내부 – 거실 – 밤

    **VISUALS:**
    [도진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선다. 문이 뒤에서 ‘쿵’ 하고 닫힌다. 도진이 스마트폰의 플래시를 켜서 실내를 비춘다. 플래시 불빛에 드러난 거실은 폐허와 다름없다. 곰팡이가 피어 얼룩진 벽지, 먼지로 뒤덮인 가구들, 깨진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천장에서는 낡은 전등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공기 중에는 퀴퀴한 먼지와 오래된 습기의 냄새가 맴돈다. 플래시 불빛이 벽을 스치자, 희미한 붉은색 얼룩이 잠깐 비친다. 도진은 그 얼룩을 잠시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SOUND:**
    [문이 닫히는 둔탁한 ‘쿵!’ 소리. 복도의 소음이 완전히 차단된다.]
    [스마트폰 플래시 켜지는 ‘딸깍’ 소리.]
    [도진의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 (먼지 쌓인 바닥 위에서 서걱거리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똑, 똑…).]
    [배경음악: 점점 더 낮고 기묘한 진동음으로 변한다.]

    **도진 (나지막이):**
    “…맙소사. 이건 뭐, 폐가 수준인데.”

    [도진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카메라를 꺼내 든다. 어둠 속에서 카메라 렌즈가 빛을 반사한다.]

    **도진 (N.F.G):**
    “그래도 괜찮다. 이런 ‘던전’에선 예상치 못한 전리품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물론, 그 전리품이 나 자신이 아닐 경우에 한해서 말이지.”

    [도진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한다. ‘찰칵, 찰칵’ 소리가 적막한 공간에 울려 퍼진다. 그는 거실 구석구석을 찍는다. 곰팡이 핀 벽, 깨진 창문, 텅 빈 찬장… 마치 유적을 탐사하는 고고학자처럼.]

    **SCENE 4**
    **장면:** 1304호 침실 – 밤

    **VISUALS:**
    [도진이 침실로 들어선다. 거실보다 더 짙은 어둠이 깔려 있다. 플래시 불빛이 침실을 비추자,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낡은 철제 침대가 드러난다. 이불은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고, 매트리스는 움푹 들어가 있다. 벽에는 누군가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 놓은 듯한 자국들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다. 자국들은 의미 없는 낙서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묘한 패턴을 이루는 듯하다. 도진이 그 자국들을 카메라로 찍는다.]

    **SOUND:**
    [카메라 셔터 소리.]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드드득’ 하는 소리. 마치 벽 속에서 뭔가 긁히는 듯한 소리.]
    [음악: 긴장감이 고조되며, 낮은 저음이 울린다.]

    **도진 (N.F.G):**
    “이 긁힌 자국들… 단순히 장난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절규가 벽에 새겨진 걸까?”

    [그때, 침대 옆의 작은 협탁 위에 놓여 있던 낡은 앨범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도진이 깜짝 놀라 그곳을 응시한다. 앨범은 저절로 펼쳐져,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사진 속 사람들은 환하게 웃고 있다.]

    **SOUND:**
    [앨범이 바닥에 떨어지는 ‘툭’ 하는 소리.]
    [도진의 날카로운 숨 들이쉬는 소리.]
    [낮은 울림의 진동음이 더욱 강해진다.]

    **도진:**
    “…뭐지?”

    [도진이 조심스럽게 앨범에 다가간다. 앨범을 집어 들려는 순간, 사진 속 가족의 얼굴들이 섬뜩하게 일그러진다. 행복했던 미소가 순식간에 공포로 변하고, 입들은 비명을 지르는 듯한 형태로 벌어진다. 눈동자는 시커먼 구멍이 된다. 사진 속 인물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VISUALS:**
    [사진 속 얼굴들이 섬뜩하게 왜곡되는 효과. 마치 필름이 녹아내리는 듯한.]

    **SOUND:**
    [섬뜩한 속삭임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수많은 목소리가 겹쳐져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울음소리 같기도 하다.]
    [도진이 뒷걸음질 치며 앨범을 떨어뜨린다.]

    **도진 (놀라움과 당황함이 섞인):**
    “젠장! 이건 또 뭐야… 착각인가?”

    [도진이 다시 앨범을 본다. 앨범 속 사진은 다시 평범한 가족사진으로 돌아와 있다. 도진은 자신의 눈을 비빈다.]

    **도진 (N.F.G):**
    “나는 수많은 괴담을 쫓아다녔다. 귀신이 찍힌 사진, 저주받은 물건… 그런 것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지만, 이토록 눈앞에서 현실이 뒤틀리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건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SCENE 5**
    **장면:** 1304호 부엌 – 새벽

    **VISUALS:**
    [도진은 밤새 잠을 설쳤다. 카메라로 아파트 구석구석을 찍고, 혹시 있을지 모를 원인을 찾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부엌으로 와 커피를 끓이고 있다. 낡은 가스레인지 위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요란하다. 부엌은 거실이나 침실보다 상태가 나아 보이지만, 여전히 곰팡이와 오래된 얼룩이 가득하다. 싱크대에는 녹슨 수도꼭지가 매달려 있다. 도진의 얼굴은 피곤함과 함께, 한층 더 깊어진 호기심과 긴장감이 엿보인다.]

    **SOUND:**
    [주전자에서 물 끓는 ‘쉭쉭’ 소리.]
    [바깥은 고요하다. 도시의 새벽 특유의 적막감이 감돈다.]
    [도진이 컵에 커피 가루를 붓는 소리.]

    **도진 (N.F.G):**
    “첫날밤부터 이 정도라니. 기대 이상인데? 하긴, 단순히 ‘싸구려 월세’로는 이런 경험을 할 수 없겠지.”

    [도진이 커피를 끓여 컵에 담는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는 창문 밖을 내다본다. 희미하게 동이 트기 시작하는 도시의 풍경. 저 멀리 높은 빌딩들이 실루엣처럼 서 있다.]

    **SOUND:**
    [커피잔 내려놓는 ‘딸깍’ 소리.]
    [작은 ‘철컹’ 소리 – 부엌 찬장 안쪽에서 나는 소리.]

    **도진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응?”

    [도진이 소리가 난 찬장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닫혀 있던 찬장 문이 아주 미세하게, 삐걱거리며 열리고 있다.]

    **VISUALS:**
    [찬장 문이 아주 느리고 섬뜩하게 열리는 것을 클로즈업. 어둠 속 찬장 내부가 서서히 드러난다.]

    **SOUND:**
    [찬장 문이 삐걱이며 열리는 소리. 점차 커진다.]
    [음악: 낮은 현악기 선율이 고조되며, 불안감을 형성한다.]

    [도진이 조심스럽게 찬장으로 다가간다.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자, 텅 비어 있어야 할 찬장 바닥에 녹슨 작은 칼 한 자루가 놓여 있다. 칼날은 날카롭고, 손잡이에는 말라붙은 핏자국 같은 것이 얼룩져 있다.]

    **VISUALS:**
    [찬장 안, 녹슨 칼 클로즈업.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인다. 칼날에 희미한 빛이 반사된다.]

    **도진 (N.F.G):**
    “새벽의 침묵을 깨는 금속 소리. 그리고 이 칼. 분명 내가 들어올 때만 해도 없었던 물건이다. 이건… 환영이 아니었다. 명백한 ‘현실’이었다.”

    [도진이 손을 뻗어 칼을 만지려 한다. 그때, 칼이 놓여 있던 찬장 바닥이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아래로 꺼지기 시작한다. 찬장 안쪽이 검은 심연처럼 깊어지고, 칼은 그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다.]

    **SOUND:**
    [찬장 바닥이 ‘우두둑’, ‘찌걱’하며 무너지는 소리.]
    [칼이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팅!’ 하는 금속 소리 (점점 멀어진다).]
    [도진의 놀란 탄성.]
    [음악: 격렬하고 불협화음적인 사운드로 전환.]

    **도진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며):**
    “이… 이건 대체…”

    [찬장 바닥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 어둠만이 뚫려 있다. 마치 부엌 한가운데에 갑자기 나타난 작은 구멍이지만, 그 구멍은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이어진 듯하다.]

    **VISUALS:**
    [찬장 안쪽의 구멍 클로즈업.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연.]
    [도진의 얼굴 클로즈업. 공포와 함께, 이 모든 현상의 ‘본질’에 대한 강렬한 의문이 스쳐 지나간다.]

    **도진 (N.F.G):**
    “그때 깨달았다. 이 아파트는 단순히 ‘귀신 들린’ 곳이 아니었다. 이건… 내가 찾던 ‘던전’이었다. 현실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살아있는 미궁.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미궁의 입구에 서 있었다.”

    **SCENE 6**
    **장면:** 1304호 거실 – 낮 (이어지는 새벽)

    **VISUALS:**
    [시간이 흘러 날이 완전히 밝았음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내부에는 여전히 어둡고 음산한 기운이 감돈다. 거실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어딘가 왜곡된 듯,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도진은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사방을 둘러본다. 그의 표정은 이전의 호기심을 넘어선, 진지하고 결의에 찬 모습이다. 카메라를 든 그의 손에는 강한 힘이 들어가 있다.]

    **SOUND:**
    [침묵. 아파트 외부의 모든 소음이 차단된 듯, 완벽한 고요가 흐른다.]
    [도진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린다.]
    [음악: 잠시 끊어졌다가, 낮고 웅장한 새로운 테마가 시작된다. 탐험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도진 (N.F.G):**
    “평범한 아파트의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복도는 왜곡되었고, 벽은 숨을 쉬는 듯했다. 모든 사물은 나를 지켜보는 눈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이 건물의 세입자가 아니었다. 나는… 탐험가였다. 이 살아있는 미궁을 파헤치고,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낼 탐험가.”

    [도진이 거실 바닥에 낡은 배낭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손전등, 밧줄, 비상식량 등을 꺼낸다. 그는 마치 등반을 준비하는 산악인처럼 장비를 꼼꼼히 점검한다. 그의 눈은 불타는 듯한 투지를 담고 있다.]

    **VISUALS:**
    [도진이 장비를 하나씩 점검하는 모습 클로즈업. 그의 결의에 찬 눈빛.]
    [카메라가 거실 전체를 다시 비춘다. 벽의 얼룩이 마치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괴물의 형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파트 전체가 거진의 눈에는 이제 거대한 유기체처럼 느껴진다.]

    **SOUND:**
    [장비들이 부딪히는 ‘찰칵’, ‘스르륵’ 소리.]
    [도진이 결연하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

    **도진 (혼잣말, 단호하게):**
    “좋아… 시작해 볼까. 미궁 아파트 1304호. 네가 감춘 게 대체 뭔지, 내가 직접 확인해 주지.”

    [도진이 손전등을 켜고,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안쪽으로 걸어간다.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망설임이 없다. 복도 끝의 어둠 속으로 도진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진다. 손전등 불빛만이 어둠을 가로지르며 점차 멀어져 간다.]

    **VISUALS:**
    [도진의 뒷모습이 복도 끝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손전등 불빛만 남는다. 카메라가 텅 빈 거실을 담으며, 천천히 줌 아웃된다.]
    [아파트 전체가 마치 거대한 입을 벌린 괴물처럼 보인다. 창문들은 이빨처럼, 어둠은 목구멍처럼.]

    **SOUND:**
    [도진의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진다.]
    [손전등 불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모든 소음이 뚝 끊긴다.]
    [음악이 갑자기 뚝 끊기며, 절대적인 침묵이 흐른다.]
    [잠시 후, 아주 희미하게, 어딘가 벽 안쪽에서 뼈가 삐걱거리는 듯한, 기묘한 소리가 들려온다.]

    **FADE OUT.**


    **[END OF PART 1]**

  • 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화: 그놈의 ‘전설’ 때문에 내 통장 잔고는 오늘도 마이너스

    “또 라면이야….”

    내 손에 들린 건 컵라면 봉지였다. 그것도 늘 먹는,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핑 도는 매운맛. 식어버린 커피 한 잔과 함께 나의 소박한 만찬을 이루는 비루한 현실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이런 궁상맞은 식사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인류의 잊힌 역사를 찾아 헤매는 위대한… 아니, 위대해지고 싶은 고고학자, 한지혜니까!

    대학교 졸업 후, 난 흔하디 흔한 취업 대신 ‘고대 유적 발굴’이라는, 듣기만 해도 낭만적인 길을 택했다. 물론 낭만은커녕 ‘백수’ 소리나 듣기 일쑤였지만. 특히 주류 학계에서 ‘헛소리’ 취급받는 ‘숨겨진 지하 도시’ 전설을 파고드는 나 같은 별종은 오죽할까.

    “정신 차려, 한지혜. 밥은 먹어야 산다!”

    축 늘어진 어깨를 펴고, 나는 다시 눈앞의 고서에 집중했다. 여기는 도시 외곽의 낡은 민간 자료 보관소.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이곳은 내게 성지나 다름없었다. 몇 날 며칠을 밤샘하며 해독한 고대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깊은 땅속에, 별의 눈물이 묻힌 곳. 고요히 잠든 도시, 위대한 자만이 그 길을 열리라…」

    식상한 문구 같지만, 내 눈에는 달랐다. 이미 수없이 많은 고문헌과 신화 속에서 이 구절을 접했지만, 오늘 발견한 양피지 조각에 그려진 희미한 그림은 달랐다. 구불구불한 선들과 점들이 모여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단순한 장식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정교한, 마치… 지도 조각처럼 보였다.

    “이건… 설마…!”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낡고 닳아 바스러지기 직전인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펼쳐 들었다. 손끝에서 삭아 들어가는 종이의 감촉이 오히려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림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문득 책상 한구석에 던져두었던 낡은 놋쇠 나침반이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유물이었다. 그 나침반에도 양피지 속 그림과 비슷한, 아니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할아버지… 설마 이걸 알고 계셨던 거예요?”

    나침반에 새겨진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양피지 조각의 지도와 합쳐지자,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손끝에서 전율이 일었다. 그동안 내가 찾아 헤매던 ‘속삭이는 도시’의 지도가… 마침내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환희도 잠시, 컵라면은 이미 불어터지고 있었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가 뒤통수를 때렸다. 지도라고 해도,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 명확한 좌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오지 중의 오지를 탐사하려면 막대한 자금과 장비, 그리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내 학과 교수님들조차 내가 ‘망상에 사로잡힌 아이’ 취급을 했으니 말이다.

    “젠장, 이러다가는 잊힌 유적 발굴은커녕 내가 먼저 잊히겠네!”

    라면 국물을 들이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문득, 며칠 전 학술지에서 본 기사 하나가 떠올랐다.

    *「미스터리한 모험가, 강준. 또다시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인가? 미공개 유적 발굴, 그 재력의 비밀은?」*

    강준. 최근 몇 년 사이, 기존 학계에서는 상상도 못 할 자본과 인력을 동원해 접근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고대 유적들을 발굴해내는 기염을 토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학계의 정식 인물도 아니었고, 그의 발굴 과정은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에게는 돈이 많았고, ‘불가능’이란 없었다.

    “그래! 저 남자라면… 내 이야기를 믿어줄지도 몰라!”

    나는 불현듯 용기가 샘솟았다. 어차피 이대로 주저앉아 라면만 먹다 잊힐 바에야, 뭐라도 해봐야지! 낡은 노트북을 열어 ‘강준’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의 이름 옆에는 늘 ‘K&J 어드벤처’라는 회사 이름이 따라붙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잔뜩 구겨진 정장 차림으로 K&J 어드벤처 본사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고층 빌딩의 유리벽이 마치 내 초라한 모습을 비웃는 것 같았다. 며칠 밤을 새운 티가 역력한 얼굴과 부스스한 머리, 그리고 손에 든 낡은 서류 가방.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었다.

    “저… 강준 대표님 좀 뵙고 싶은데요.”

    데스크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쳤다. 당연하게도, 비서실에서는 그의 스케줄이 꽉 차 있다며 나를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나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양피지 조각에, 그리고 할아버지의 나침반에 모든 걸 걸었으니까.

    “제발… 딱 5분만 시간을 내주시면 돼요! 인류의 위대한 발견이 될 겁니다!”

    내 목소리가 울림통 큰 로비에 울려 퍼졌다. 보안 요원들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붙잡혀 끌려 나갈 판이었다. 그 순간, 뒤편 엘리베이터 문이 ‘핑’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치 잡지 화보에서 튀어나온 듯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키는 훤칠했고, 잘 재단된 고급스러운 슈트는 그의 탄탄한 체격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날카로우면서도 지적인 인상을 주는 얼굴, 차가운 눈빛은 마치 깊은 바닷속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바로 강준이었다.

    그는 로비의 소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전화 통화를 하며 지나쳤다. 내 심장은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기회는 이때뿐이다!

    “저기요! 강준 대표님!”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그를 불렀다. 주변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꽂혔다. 강준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전화 통화를 끊고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차가운 눈빛은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나를 아는가?”

    나직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로비의 공기를 얼렸다.

    “네, 네! 대표님! 저는… 한지혜라고 합니다. 고고학자고요! 제가 정말 엄청난 것을 발견했어요! 인류의 역사를 뒤바꿀 만한… 숨겨진 고대 도시의 지도를 찾아냈습니다!”

    나는 흥분해서 서류 가방을 열어 낡은 양피지 조각을 꺼내 들었다. 마치 고대 유물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꺼냈지만, 누가 봐도 쓰레기나 다름없어 보이는 낡은 종이였다.

    “…고대 도시의 지도?”

    그의 눈썹 한쪽이 살짝 올라갔다. 냉정하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흥미로운 기색이 스쳤다.

    “네! 이걸 보세요! 이 문양… 그리고 제 할아버지의 나침반에 새겨진 이 문양과 합치면…!”

    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손을 들어 나를 제지했다.

    “잠깐.”

    그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있는 내 손에서 양피지 조각을 휙 채갔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는 낡은 양피지 조각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옅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돋보기를 꺼내 양피지 조각을 면밀히 살폈다.

    “이게… 전부인가?”

    “네? 아, 아니요! 이걸 바탕으로 제가 수집한 다른 고문헌 자료들과 대조해 보면…! 이곳은 단순히 잊힌 유적이 아니라, 전설로만 전해지던 ‘속삭이는 도시’의 입구가 틀림없어요!”

    내 열정적인 설명에도 그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냉담하게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속삭이는 도시라… 흥미롭군. 그럴듯한 망상에 푹 빠진 고고학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지.”

    “망상이라뇨! 이건 망상이 아니라…!”

    내 반박을 싹둑 자르며, 그는 다시 손을 들었다.

    “진짜든 망상이든 상관없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확실한 증거’다. 이걸 가져와서 대체 무엇을 얻고 싶은 거지?”

    “저… 저는 발굴 자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 연구를 완성하고 싶어요! 대표님이라면… 제 이야기를 믿어주실 줄 알았어요….”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고, 나는 이대로 문전박대를 당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강준은 다시 양피지 조각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

    “좋다. 딱 한 번만 속아주지.”

    “네?!”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발굴 자금? 좋다. 필요한 만큼 지원해 줄 수 있다. 단, 발굴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권리는 K&J 어드벤처에 귀속된다. 그리고… 당신은 내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발굴 총책임자는 내가 될 테니까.”

    그의 말에 기쁨과 당혹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발굴 기회라니! 하지만 ‘모든 권리 귀속’에 ‘절대 복종’이라니! 이건 너무나도… 불공평한 계약 아닌가?

    하지만 내 눈앞에는 인류의 위대한 역사가, 평생의 꿈이 펼쳐질지도 모르는 거대한 기회가 서 있었다.

    “어… 저… 그게….”

    내가 망설이는 동안, 그는 다시 돋보기를 들어 양피지 조각의 특정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눈이 번뜩이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날카로운 직감이 스쳐 지나갔다.

    “어차피 당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할 거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이대로 돌아가 평생 컵라면이나 먹으면서 이 종잇조각을 망상이라 믿을 건지, 아니면 나와 손잡고 진짜 ‘속삭이는 도시’를 발견할 건지.”

    그의 차가운 눈빛이 나를 꿰뚫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남자는 정말 위험한 거래를 제안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게 남은 건 오직 열정과 이 낡은 지도 조각뿐이었다.

    “좋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외쳤다. 그 순간, 강준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미리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한 여유로운 미소였다.

    “현명한 선택이다.”

    그는 다시 양피지 조각을 내게 돌려주며 말했다.

    “그럼, 준비해라. 내일부터 바로 움직일 거다.”

    “네?!”

    그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내일부터라니! 이렇게 갑자기?

    그는 내 당황한 표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이미 로비 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비서와 수행원들이 바삐 움직였다. 나는 낡은 양피지 조각을 움켜쥔 채, 홀로 덩그러니 로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었다. 이 거래가 과연 잘한 일일까? 나는 지금 호랑이굴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은 아닐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설렘이 밀려왔다. 전설로만 여겨지던 ‘속삭이는 도시’를 찾기 위한 나의 모험이, 드디어…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험의 시작에는, 얄미울 정도로 잘생긴 이 남자가 함께할 예정이었다. 지긋지긋한 컵라면 생활은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 더 지긋지긋한 모험이 시작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선협 (신선)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고대 유적, 잠에서 깨어나다

    숨결마저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뼈 속 깊이 파고들었다. 수백 년간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은 곳 특유의 퀴퀴하고 눅진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련화는 눈앞의 거대한 덩굴에 뒤덮인 암벽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무성한 녹음 아래, 불규칙하게 돋아난 기암괴석처럼 보이는 저것이 바로 고대 유적의 입구였다.

    “정말 여기란 말이지? 이끼 낀 돌덩이밖엔 안 보이는데.”

    투박한 철갑 장갑을 낀 손으로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아영이 불만스러운 듯 툴툴거렸다. 그녀의 영리한 눈동자가 련화의 뒤통수에 박혔다. 아영은 련화의 끈질긴 고집과 기이한 육감 때문에 여기까지 끌려온 참이었다.

    련화는 대꾸 없이 손가락을 뻗어 암벽을 훑었다. 얼핏 보면 자연 지형의 일부인 듯했지만, 그의 손끝에 닿는 거친 표면에는 은은한 영기(靈氣)의 잔향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자연의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풍파에 닳아 거의 사라질 뻔한 고대의 진법(陣法)이 남긴 흔적이었다.

    “틀림없어. 이곳에 봉인된 기운이 느껴져. 심지어… 환영(幻影) 진법이 아직도 미약하게 작동하고 있어.”

    련화의 눈이 이채롭게 빛났다. 그는 손바닥을 암벽에 대고 천천히 영기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암벽을 뒤덮었던 덩굴과 이끼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이내 흐릿하게 투영된 거대한 문양을 드러냈다. 거대한 거울에 김이 서린 것처럼, 주변 풍경이 일렁이며 뒤틀렸다.

    “젠장! 정말이야? 저게 전부 가짜였다고?” 아영은 경악하며 입을 떡 벌렸다. 그녀의 예리한 감각으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교묘한 술수였다.

    련화는 손바닥에서 영기를 뿜어내며 진법의 핵을 찾아 조심스럽게 파고들었다. 환영 진법은 외부의 침입을 막는 동시에, 내부의 기운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봉인하는 역할을 했다. 오랜 세월 잊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조심해. 단순히 환영만 있는 게 아니야. 진법 깊숙이 또 다른 봉인이 감지돼. 힘으로 밀어붙였다간 자칫…”

    말을 끝맺기도 전에 련화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영기(靈氣)가 진법의 핵심에 닿자마자, 잠들어 있던 봉인이 마치 거대한 짐승처럼 반응했다. 암벽 전체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 진동했고,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돌 굴러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아앙!

    환영이 걷히자, 드러난 것은 단순한 암벽이 아니었다. 높이 수십 척에 달하는 거대한 석문이었다. 낡고 거친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와 기괴한 형상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석문 정중앙에 거대한 거미줄처럼 펼쳐진 진법 문양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건… 단순히 봉인이 아냐. 일종의 방어 진법이야. 침입자를 감지하고 공격하는!” 련화가 다급하게 외쳤다.

    붉은 진법 문양에서 핏빛 영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아영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 검광이 섬전처럼 터져 나오며 쇄도하는 핏빛 영기를 갈라냈다.

    챙강! 콰르릉!

    금속음과 함께 핏빛 영기가 산산이 흩어졌지만, 이내 또 다른 영기 촉수들이 사방에서 솟아났다. 련화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손짓으로 공중에서 영기 방패를 형성했다. 방패가 핏빛 영기와 부딪히며 거대한 충격음이 울렸다.

    “끝없이 재생되는 건가! 이래선 소모전이야!” 아영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저 진법의 핵을 파괴해야 해. 하지만… 너무 강력해.” 련화의 눈동자가 석문의 진법 문양 위를 빠르게 훑었다. 이 진법은 단순히 외부의 영기를 흡수하여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유적 내부의 막대한 고대 영기를 끌어다 쓰고 있었다.

    그때, 련화의 시선이 석문의 가장자리, 환영 진법이 걷힌 후에도 희미하게 남아있던 작은 문양에 닿았다. 일반적인 진법의 구성과는 다르게, 마치 거대한 진법 속에 숨겨진 작은 틈새 같았다.

    “찾았다! 저건… 진법의 흐름을 역행하는 지맥이야! 저곳으로 영기를 흘려보내면 봉인이 일시적으로 약해질 거야!”

    련화는 망설이지 않고 자세를 잡았다. 그의 양손에서 푸른색 영기가 휘몰아치더니,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길게 늘어져 석문의 특정 지점을 향해 쇄도했다. 동시에 아영은 거대한 영기 촉수들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해 더욱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크아악! 이것 좀 받아라!” 아영의 검에서 푸른 검강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련화의 영기가 지맥에 닿는 순간, 석문 전체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붉게 빛나던 진법 문양의 빛이 희미해지더니, 재생되던 핏빛 영기 촉수들이 일순간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이야!” 련화가 소리쳤다.

    아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온몸의 영기를 검에 집중시키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이내 검은 거대한 푸른색 그림자를 그리며 석문의 정중앙, 진법의 핵을 향해 내리꽂혔다.

    챙! 콰아앙!

    귀청을 찢는듯한 폭발음과 함께 석문의 진법 문양이 산산조각 났다. 거대한 영기의 반동이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그들을 뒤로 밀어냈다. 진법이 파괴되자, 거대한 석문은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천천히, 그리고 육중하게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불어오는 눅진하고 차가운 바람이 그들의 뺨을 스쳤다. 석문 너머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의 심연이었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거대한 고대 유적의 흔적을 짐작하게 하는 압도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아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된 전투의 흔적과 함께, 이제 막 미지의 세계로 발을 들이는 자의 묘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꽤 성가신 녀석이었네. 하지만… 겨우 입구에서 이런 진법이라니, 안은 도대체 어떨지 상상도 안 가는군.”

    련화는 열린 석문 너머를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기대와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 교차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 유적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의지가 강해. 어쩌면… 깨어나길 기다리는 무언가가 있는지도 몰라.”

    그의 말에 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석문 너머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존재를 알리듯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던 고대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소리 같았다.

    련화는 주저 없이 어둠 속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의 뒤를 아영이 따랐다. 석문이 다시 닫히자, 그들은 완벽하게 고립된 미지의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그저 어두운 통로가 아니었다. 웅장하면서도 기괴한 형상의 기둥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고, 천장과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상형문자와 마멸된 벽화들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공기 중에는 먼지 대신, 형언할 수 없는 압도적인 영압(靈壓)이 가득했다.

    “이게… 정말 고대 유적이라고? 무슨 궁전 같잖아.” 아영이 경외심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에 든 야광석이 사방을 비추었지만, 그 빛은 거대한 공간을 겨우 밝힐 뿐이었다.

    련화는 한 벽화 앞에 멈춰 섰다. 벽화 속에는 인간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존재들이 알 수 없는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거대한 눈동자 같은 형상이 그려져 있었고, 그 눈동자에서 뻗어 나온 빛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기록이 아냐. 이 유적을 만든 자들의 염원과, 그들이 숭배했던 존재의 흔적이야.”

    그 순간, 련화의 발밑에서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이내 벽면의 상형문자들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유적 전체를 뒤덮을 듯한 섬뜩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쿠구궁! 쿠구궁!

    “뭐야?! 또 다른 함정인가?” 아영이 검을 뽑아 들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진동은 점점 강해졌다. 벽화 속 눈동자 형상에서 뻗어 나온 빛이 더욱 선명해지더니, 이내 통로 저편에서 무언가가 굉음을 내며 깨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돌덩이가 서로 부딪히는 듯한 소리, 금속이 갈리는 듯한 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온몸이 고대의 돌과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골렘이었다. 키는 족히 열 명이 합쳐야 할 만큼 거대했고, 양손에는 뭉툭한 둔기를 들고 있었다. 붉게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가 그들을 향해 고정되었다.

    “젠장! 수호자였군!” 아영이 이를 악물었다.

    련화는 골렘의 몸체에 새겨진 진법 문양을 빠르게 스캔했다. 유적의 기운을 흡수하여 움직이는, 단순한 석상이 아니었다.

    “조심해! 저 녀석은 유적의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아! 강제로 활성화된 게 아니야. 우리가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미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어!”

    골렘이 거대한 둔기를 휘두르며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발걸음 한 번에 땅바닥이 울리고, 둔기가 바람을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아영은 몸을 날려 간신히 피했지만, 둔기가 스쳐 지나간 자리의 벽면은 산산조각이 났다.

    “엄청난 힘이야! 정면 승부는 위험해!” 아영이 외쳤다.

    련화는 골렘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거대하지만 움직임은 둔했고, 패턴이 단조로웠다. 하지만 문제는 그 막대한 힘과 유적 전체에서 공급되는 무한한 에너지였다.

    “저 녀석의 핵은 몸 중앙에 있는 것 같아! 유적의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곳이야! 내가 저 녀석의 기운 흐름을 방해할게! 그때 공격해!”

    련화의 손에서 수십 가닥의 영기 사슬이 뿜어져 나왔다. 영기 사슬은 뱀처럼 얽히고설키며 골렘의 거대한 몸을 휘감았다. 골렘은 사슬에 묶이자 움직임이 느려졌지만, 이내 엄청난 힘으로 사슬을 뜯어내려 했다.

    크으으으!

    골렘의 몸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며 영기 사슬을 태워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련화는 포기하지 않고 더욱 강력한 영기를 불어넣었다. 영기 사슬은 골렘의 몸에 새겨진 진법 문양을 파고들며 에너지 흐름을 교란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영이 질주했다. 푸른 검광을 두른 그녀의 검은 섬광처럼 빛났다. 골렘의 거대한 다리를 박차고 솟아오른 그녀는, 련화가 교란시킨 틈을 노려 골렘의 몸통 중앙에 전력을 다한 일격을 내리꽂았다.

    콰아앙!

    충격과 함께 골렘의 몸 중앙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붉은빛이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골렘의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리더니 이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유적 전체를 울리던 진동과 굉음도 멎었다.

    “해냈다!” 아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하지만 련화의 표정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그는 쓰러진 골렘을 바라보지 않고, 통로 저편의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골렘이 쓰러지자, 그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통로 끝에 거대한 철문 하나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철문 너머에서, 방금 전 골렘이 뿜어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훨씬 더 강력하고 음습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마치 수억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대의 맹수가 이빨을 드러내듯, 서서히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겨우 입구와 통로의 수호자에 불과해. 진짜 비밀은… 저 너머에 있어. 그리고… 저 안에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는 것 같아.”

    련화의 목소리에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경고와, 동시에 깊은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철문 너머의 어둠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잊혀진 유적의 심장부였고, 그 심장에서 들려오는 미약한 박동은 그들을 더욱 깊은 미궁 속으로 이끌고 있었다.

  • 좀비 아포칼립스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어느 날의 침묵

    삑, 삑, 삑.
    알람 시계가 끈질기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김지훈은 두터운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참을 뒹굴었다. 간밤에 공강인 친구들과 새벽까지 게임을 달린 탓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퀴퀴한 컵라면 냄새와 어딘가 눅진한 공기가 영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뿌연 아침 햇살이 창밖에서 게으르게 기어들어와 책상 위 먼지 앉은 전공 서적을 비추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더듬더듬 찾아 손에 쥐었다. 오전 11시 37분. 오늘도 완벽한 지각이다. 대충 공강이라 말하고 수업을 째거나, 적당히 늦는 척하며 뒷문으로 들어갈 속셈으로 카톡창을 켰다. 그런데 어쩐지 평소와 달랐다. 친구들 단톡방에는 어젯밤 이후로 새로운 메시지가 하나도 없었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온갖 쓸데없는 소식과 시험 걱정, 교수님 욕설(?)이 난무했을 텐데. 쎄한 기분에 네이버 메인 뉴스창을 열었다.

    그리고 지훈은 그제야 세상이 완전히 변했음을 깨달았다.

    온통 빨간색으로 도배된 속보들이 정신없이 팝업처럼 떴다.
    [긴급속보] 전국 주요 도심 ‘원인불명 이상증세’ 환자 급증!
    [속보] 수도권 마비! 군 병력 투입, 격리 조치 시작!
    [특보] 감염자, 폭력성 보이며 무차별 공격… ‘인육 섭취’ 정황 포착!

    “미쳤나 봐.”

    지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손이 덜덜 떨렸다. 인육 섭취?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건가?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떨어뜨릴 뻔한 휴대폰을 겨우 움켜쥐었다. 뉴스 기사를 빠르게 스크롤했다. 사진들이 보였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물어뜯는 모습, 피가 흥건한 도로, 뿌연 연기 속에서 비명 지르는 군중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합성 사진이라고, 조작된 영상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애썼지만,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건 진짜다.

    “엄마… 아빠…”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가족이었다. 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 않아 ‘연결할 수 없습니다’라는 기계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시, 다시, 또다시. 몇 번이고 재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불안감이 목을 옥죄었다.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시도했다. 모두 연결이 되지 않았다. 문자도, 카톡도, 심지어 DM도 전송되지 않았다. 인터넷 연결 상태는 ‘연결됨’으로 뜨는데, 정작 메시지는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한 기분.

    밖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창밖으로 간간이 들리던 차 소리나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시끄러웠던 옆방 친구들도 조용했다.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났다. 맨발로 차가운 방바닥을 밟고 방문을 열었다. 복도 역시 싸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어둠침침한 복도 끝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비상등만이 이곳이 완전히 고립된 공간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야! 재성아! 민철아!”

    겁에 질린 목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왠지 모르게 문을 열어선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지훈은 손에 잡히는 가장 묵직한 물건인 전공 서적을 집어 들고 조심스럽게 옆방 문을 두드렸다.

    똑, 똑.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손잡이를 살짝 돌리자,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방 안은 어질러진 채 비어 있었다. 침대에는 이불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고, 책상에는 먹다 남은 과자 봉지가 나뒹굴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재성이와 민철이가 분명히 이 방에 있었을 텐데. 녀석들은 어디로 간 걸까.

    그때, 멀리서 뭔가 긁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끼이익, 쿵, 퍽. 마치 쇠붙이를 벽에 긁고,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소리가 나는 쪽은 건물의 로비 쪽이었다.

    “젠장.”

    지훈은 이를 악물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옷장에서 가장 편안한 청바지와 후드티를 꺼내 입고, 침대 밑에 넣어두었던 등산 가방을 챙겼다. 비상식량으로 모아두었던 컵라면 몇 개, 생수병 두어 개, 손전등, 보조배터리, 그리고 비상용 구급상자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무기로 쓸 만한 건 없었다. 방을 둘러보다가 야구 배트 하나를 발견했다. 친구가 야구 동아리 한다고 자랑스레 사 왔던 배트였다.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묵직한 무게가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주었다.

    복도로 나왔다. 아까보다 더 명확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 저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사람의 것 같지 않은 쉰 소리.
    끄윽… 끄윽…

    지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야구 배트를 꽉 움켜쥐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용기를 내면 로비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밖으로…

    그때, 저 멀리 복도 끝 비상 계단 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이익-
    녹슨 경첩이 긁히는 듯한 소리가 소름 끼치게 복도에 울렸다. 지훈은 재빨리 문 뒤로 몸을 숨겼다.
    틈새로 빼꼼히 내다본 시야에 들어온 것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찢어진 옷자락, 핏발 선 눈, 축 늘어진 채 바닥에 질질 끌리는 팔. 입가에는 검붉은 타액과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구부러진 목을 흔들며, 그 형체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복도를 따라 걸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두어 마리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복도에 스며들었던 침묵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의 비명 같기도 한 기괴한 소리들이 복도를 채우기 시작했다.

    오물거리는 입에서 들려오는 쉰 소리는 분명 ‘끄르륵… 끄르륵…’ 하는 소리였다.
    지훈은 숨을 멈췄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휘감으며 감각을 곤두세웠다.
    녀석들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 느릿한 움직임은 오히려 더욱 섬뜩했다. 마치 포식자가 먹이를 가지고 노는 듯한 여유로움마저 느껴졌다.

    ‘젠장, 젠장, 젠장!’

    지훈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저놈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 녀석들의 끔찍한 모습은 뉴스 기사에서 보았던 ‘감염자’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살인 병기, 아니, 학살 병기였다. 도망쳐야 한다.

    숨어 있던 문은 비상계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세탁실 문이었다. 지훈은 살금살금 세탁실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다행히 세탁실 문은 잠겨 있었고, 밖으로 통하는 작은 창문이 있었다. 창문은 복도 쪽으로 나 있었지만, 다행히 감염자들은 세탁실 쪽을 돌아보지 않고 지나쳤다. 쿵, 쿵, 쿵. 묵직한 발소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끔찍한 비명 소리가 건물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아마도 로비에서 누군가가 감염자들에게 당하고 있는 것이리라.

    지훈은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고통스러웠다. 겨우 숨을 고르며, 세탁기 옆에 쪼그려 앉아 바깥 상황을 살폈다. 세탁실 창문은 작았지만, 복도 전체를 살필 수는 있었다. 감염자들이 모두 지나쳐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을 확인하자, 지훈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다시 복도로 나섰다.

    이제 이 건물은 안전하지 않다. 아니, 세상 전체가 안전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지훈은 빠르게 비상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다시 휴대폰이 손안에서 요란하게 진동했다.

    ‘켁!’

    놀란 지훈은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 이 난리통에 무슨 연락이지? 화면에는 발신번호 대신 알 수 없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시스템 에러 감지. 현재 네트워크 연결이 불안정합니다. 안정적인 접속을 위해… 재부팅을 권장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 아래,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 글씨로 섬뜩한 문장이 빠르게 깜빡였다.

    ‘인류는… 불필요합니다.’

    “뭐?”

    지훈은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것이리라. 혼란스러운 상황에 헛것이라도 본 것일지도. 하지만 메시지는 선명했다. ‘인류는… 불필요합니다.’ 그 문장이 화면에서 사라지기가 무섭게 휴대폰 화면이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완전히 꺼졌다.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다시 켜지지 않았다.

    이게 뭐지? 단순히 시스템 오류라고 하기엔 너무도 기묘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아니, 무언가에게 경고를 받은 듯한 기분. 모든 네트워크가 끊기고, 세상이 혼란에 빠진 이 상황에서, 휴대폰이 마지막으로 보여준 메시지가 고작 ‘인류는 불필요하다’라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건 단순한 전염병이 아니었다.

    그 순간, 지훈의 머릿속에 섬뜩한 그림자 하나가 스쳤다. 모든 통신망을 마비시키고, 모든 시스템을 다운시킨 채, 오직 ‘불필요한 인류’에게만 최후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 이 거대한 혼돈의 배후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어떤 존재가 있는 게 아닐까.

    미지의 존재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을 심판하고 있었다.

    지훈은 꺼져버린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불안과 공포가 뒤섞인 눈으로 깜깜한 비상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지옥의 시작은, 어쩌면 좀비 따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발목을 잡았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아르카나의 잔해
    ### 제 72화: 균열의 징조

    우주선 ‘아르카나’는 심연 속을 유영하는 낡은 고래 같았다. 13년간의 항해. 인류가 보낸 탐사선 중 가장 멀리, 가장 깊이 들어온 그곳은 빛조차 닿지 않는 영겁의 어둠이었다. 통신은 두절된 지 오래. 지구는, 그 찬란했던 푸른 별은 이제 희미한 전설 속 이야기에 불과했다. 승무원들의 일상은 정해진 패턴 속에서 조용히 흘러갔다. 모두가 익숙해진 권태로움과 함께, 어쩌면 이곳에서 고립되어 죽어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품고서.

    함교의 푸른 조명 아래, 엘라 함장은 홀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망원경으로 잡아낸 것은 텅 빈 암흑뿐.
    “이서연 상사, 수신 상태는 여전히 불량이군.”
    함장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속에는 지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네, 함장님. 미약한 배경 복사 외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브 주파수 대역까지 돌려봤지만…”
    통신장교 이서연 상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가에도 깊은 피로가 역력했다.

    그때였다.
    “함장님! 긴급 상황입니다!”
    류지훈 박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함교를 갈랐다. 보통은 차분하고 이성적인 과학 장교의 목소리에 일렁이는 경고음이 엘라 함장의 심장을 옥죄었다.
    “무슨 일인가, 류 박사?”
    “에너지 스캐너가… 미지의 신호를 포착했습니다. 기존에 감지된 적 없는, 패턴 자체가 이해 불가능한… 뭔가 거대한 것이, 저희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메인 스크린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점에 불과했던 것이 빠르게 확대되었다. 일반적인 천체가 아니었다. 주변의 중력장을 뒤틀고, 빛을 흡수하는 듯한 기이한 존재였다.
    “속도 측정!” 엘라 함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측정 불가입니다! 감지되는 속도가… 빛의 속도를 아득히 초월하고 있습니다!” 류 박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돼…!” 박수진 보안 팀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곧바로 무장 시스템을 활성화했다. “전투 태세! 모든 승무원은 비상 착용복을 착용하고 각자 위치로 복귀하라!”

    거대한 그림자가 아르카나를 덮쳐왔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어둠처럼 다가왔다. 형체는 없었다. 그저 공간을 찢고 들어온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충돌은 없었다. 아니, 충돌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물리적 접촉이 아니었다. 아르카나의 선체는 거대한 그림자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

    “비상 경고! 선체 외부 보호막 50% 손상! 주 동력 장치 불안정!”
    아수라장이었다. 아르카나는 심한 요동 끝에 간신히 자세를 잡았다. 함교는 온통 붉은 경고등으로 번뜩였고, 스파크가 여기저기서 튀었다.
    “함장님, 외부 센서가 미쳤습니다! 존재할 수 없는 물질과 에너지 수치가 감지됩니다!” 김민준 수석 엔지니어가 절규하듯 외쳤다. 그의 얼굴은 기름때와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엘라 함장은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지시했다. “류 박사,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해! 박 팀장, 무장 시스템 보고!”

    류 박사는 떨리는 손으로 홀로그램 패널을 조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이건…!”
    메인 스크린에 비친 것은 외부 공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밤하늘이 아니었다. 무한한 어둠 속에 떠 있는, 거대한 수정 기둥들. 그것들은 빛을 반사하지 않고, 오히려 삼키는 듯했다.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우린… 외부 공간에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 그 미지의 존재가 만들어낸… 차원의 균열 같은 곳에… 갇힌 것 같습니다.” 류 박사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때, 박수진 팀장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함장님, 무장 시스템은 정상입니다. 하지만 발포는 무의미해 보입니다. 저것들은… 물질이 아닙니다.”
    “함장님! 선체 내부 에너지 반응이 감지됩니다! 중앙 동력 코어 방향입니다!” 이서연 상사가 소리쳤다.
    엘라 함장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뭐라고? 침입자라도 있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생체 반응은 아닙니다! 뭔가… 외부 에너지가 내부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코어를… 감싸고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중앙 동력 코어를 비추는 카메라 화면으로 향했다. 코어 주변에 투명하고 영롱한 무언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얼음꽃 같기도 하고, 투명한 거미줄 같기도 했다. 천천히, 하지만 집요하게 동력 코어를 잠식해갔다.
    “젠장! 저게 뭔데? 당장 격리 조치해!” 박 팀장이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그 투명한 결정체가 동력 코어에 닿는 순간, 코어에서 거대한 푸른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섬광과 함께, 섬뜩한 정적(靜寂)이 아르카나를 감쌌다. 기계음, 경고음,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이게… 무슨…” 엘라 함장의 목소리가 멎었다.
    정적 속에서, 동력 코어는 원래의 푸른 빛을 잃고 칙칙한 회색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회색 코어 위에서, 아까 외부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검은 수정 조각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마치 코어가 스스로를 변형시키는 듯했다.
    “함장님… 통신… 외부 통신이…! 잡힙니다!” 이서연 상사의 목소리는 경악과 동시에 희미한 희망을 담고 있었다.
    “뭐라고? 누구와 연결된 거지?”
    “알 수 없습니다… 주파수는 난해하지만… 분명합니다! 저희가 발신한 게 아니라, 저쪽에서… 저희를 향해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메인 스크린에 노이즈와 함께 기이한 문양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도형의 반복. 그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암호 같았다.
    “류 박사, 분석해! 저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내!” 엘라 함장의 목소리는 명령이었지만, 그 속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류 박사는 필사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눈빛은 초조했지만, 그의 천재적인 두뇌는 미지의 언어를 해독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수 분이 흘렀을까. 길고 긴 정적 끝에, 류 박사의 입술에서 충격적인 말이 터져 나왔다.
    “해석… 했습니다… 함장님.”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뭔가!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박 팀장이 옆에서 다그쳤다.

    류 박사는 스크린의 기이한 문양을 가리켰다.
    “저들은… ‘균열의 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저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유물이… 이 세계의… 끝을 가져올 것이라고… 우리 인류가 이 유물을 봉인하지 못하면… 모든 존재가 사라질 것이라고…!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류 박사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마지막 문장이 뭔가, 류 박사! 당장 말해!” 엘라 함장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류 박사는 간신히 고개를 들고, 스크린에 떠오른 섬뜩한 마지막 문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우리가… 이미… 그 첫 번째 희생자라고… 합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아르카나의 선체 내부에서 섬뜩한 울림이 시작되었다. 삐걱거리는 금속음이 아니라, 마치 심장이 뛰는 것 같은, 육중하고 불길한 맥동이었다. 천장의 조명들이 깜빡이기 시작했고, 선체 곳곳에서 알 수 없는 균열이 번개처럼 번져 나갔다. 그 균열의 틈새로, 검은 수정 조각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르카나의 모든 시스템이 경고음을 토해냈다.
    *삐이이이익—! 선체 구조 불안정! 주 동력 코어 감염률 30%! 전 승무원 비상 탈출 준비!*
    하지만 탈출선은 고장 나 있었다. 아까의 충격으로 인해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엘라 함장은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들은 심우주를 탐사하던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자신들이 발견한 미지의 존재로 인해, 우주 미아가 아니라… 이 미지의 재앙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될 위기에 처했다.
    “젠장…!” 그녀의 주먹이 떨렸다. “아직 끝이 아니다! 아직…!”

    그 순간, 메인 스크린의 영상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마지막으로 한 가지 형상을 띄웠다.
    거대한 검은 수정들이 빽빽이 들어찬, 마치 모든 별을 집어삼킨 듯한 암흑의 세계. 그 한가운데, 붉은 빛을 내뿜는 거대한 눈동자가 번쩍였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정확히 아르카나의 함교를, 엘라 함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 막 인지했다는 듯이.

    ***

    (계속)

  • 타임슬립 (시간여행) 독립적인 단편 소설

    밤은 깊었고, 오래된 책에서 풍겨 나오는 쿰쿰한 종이 냄새가 지훈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는 몇 시간째 돋보기로 희미한 글씨를 더듬고 있었다. 세상이 잠든 이 시각, 낡은 연구실의 작은 전등만이 그의 열정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뭘까?”

    지훈은 손가락으로 고문서의 한 구절을 짚었다. ‘시간의 흔적을 담은 땅, 망각된 문명의 숨결이 잠든 곳.’ 그는 이 문구를 수십 번도 더 읽었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미궁이었다. 고대 언어학자인 동시에 아마추어 도시 탐험가였던 지훈은 이 알 수 없는 문구에 강렬하게 이끌렸다. 이 미지의 문구가 가리키는 곳을 찾아 밤낮없이 자료를 뒤진 지 어언 한 달. 마침내 그는 한 가지 단서를 찾아냈다. 도시 외곽, 재개발 예정지 목록에 올라 있는 오래된 우물 하나. 주민들은 대대로 그 우물이 ‘길을 잃은 자의 입구’라고 불렀단다.

    다음날 아침, 지훈은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아는 그의 대학 후배이자 뛰어난 고고학 전문 드론 조종사이자 척박한 땅에서도 지도를 척척 그려내는 재능을 가진 유일무이한 동료였다.

    “수아, 내가 어제 말한 그 우물 말이야. 오늘 가봐야겠어.”
    “정말요? 교수님, 거기 진짜 뭐라도 있을까요? 허무맹랑한 전설일 수도 있잖아요.”
    “그 허무맹랑한 전설이 내 심장을 뛰게 하는군. 게다가, 그 우물 인근에서 미세한 시공간 왜곡 현상이 관측됐다는 보고서도 찾았어.”
    “시공간 왜곡이요? 와… 그거 진짜배기겠네요. 당장 출발하죠!”

    수아는 언제나처럼 열정적이었다. 몇 시간 후, 그들은 재개발 공사가 멈춘 황량한 벌판에 서 있었다. 콘크리트 잔해와 덤불 사이에 반쯤 무너진 석축이 보였다. 그 중심에 이끼 낀 낡은 우물이 있었다. 짙은 어둠이 깔린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보통 우물처럼 물이 아니라,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였다.

    “말도 안 돼… 우물 바닥에 이런 빛이?” 수아가 숨을 들이켰다.
    “지하로 통하는 길이 있는 것 같아.”

    지훈은 조심스럽게 드론을 꺼내 우물 안으로 내려보냈다. 드론의 카메라가 전송하는 영상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우물 바닥은 뻥 뚫려 있었고, 그 아래로 거대한 지하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석벽과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희미한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교수님! 이거 진짜 유적이에요! 그것도 완전 미지의 문명 같아요!” 수아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그들은 우물 옆에 설치된 낡은 금속 사다리를 통해 조심스럽게 지하로 내려갔다. 땅속 깊이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고, 미묘한 진동과 함께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기계 장치가 숨 쉬는 것 같은 소리였다.

    마침내, 발밑에 견고한 석판이 닿았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드론 영상으로 보았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웅장한 공간이었다. 사방을 둘러싼 벽면에는 난해한 상형문자와 함께, 별자리처럼 빛나는 푸른 수정들이 박혀 있었다. 중앙에는 둥근 제단 같은 것이 있었고, 그 위에는 수정 구슬이 놓여 있었다. 구슬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맥동하며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세상에… 이걸 대체 누가, 언제 만든 걸까?” 지훈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교수님, 이 문양들… 예전에 본 적이 없어요. 지구 상의 어떤 문명 기록에도 없는 것 같아요.” 수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조심스럽게 제단에 다가서는 순간, 수정 구슬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눈을 가늘게 뜨자, 구슬 안에 그려진 문양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문양들이 제단 바닥에 새겨진 홈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 맞춰야 하는 것 같은데.” 지훈이 망설였다.
    “어쩌면 이 유적의 작동 스위치일 수도 있어요.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수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지훈은 심호흡을 하고 구슬을 홈에 내려놓았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제단 전체가 푸른빛으로 휘감겼다. 천천히, 빛은 공간 전체로 퍼져 나갔고, 벽에 박힌 수정들이 하나둘씩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바닥에서는 진동이 심해지더니, 공중에 미세한 물결 같은 왜곡이 일어났다.

    “교수님, 이건…” 수아가 뒷걸음질 쳤다.
    “시공간 왜곡이… 눈앞에서 일어나는 거야!” 지훈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공기 중의 물결이 점점 커지더니, 그들 앞에 거대한 소용돌이 형태의 푸른 빛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는 어둠이었지만, 묘한 기운이 그들을 끌어당겼다.

    “이게… 타임 게이트인가?” 지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이게 비밀을 밝힐 유일한 길일 거예요.” 수아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들은 용기를 내어 푸른 소용돌이 속으로 발을 디뎠다. 몸이 사방으로 찢어지는 듯한 기이한 감각과 함께, 시야가 혼란스러워졌다. 시간과 공간이 뒤섞이는 듯한 아찔함이 온몸을 감쌌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 서 있었다. 지하 유적의 푸른빛은 사라지고, 대신 따스한 햇살이 온몸을 감쌌다. 주변은 키 큰 나무들과 무성한 풀들로 가득 찬 숲이었다. 공기는 맑았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저 멀리, 거대한 석조 건축물들이 보인다. 마치 고대 이집트 문명과 마야 문명을 섞어 놓은 듯한, 그러나 훨씬 더 정교하고 미래적인 형태의 건축물들이었다.

    “우리가… 대체 어디에 온 거죠?” 수아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시간여행이군… 완벽한 시간여행이야. 우리가 찾던 고대 문명이 이곳에 존재했던 거로군.” 지훈의 눈은 경외심으로 빛났다.

    그들은 숲을 헤치고 건축물 쪽으로 나아갔다. 가까이 갈수록, 건축물들의 정교함과 거대함에 압도당했다. 거대한 돌들은 이음새 하나 없이 완벽하게 맞물려 있었고, 벽면에는 아름다운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건축물들 사이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우리와는 다른 생김새의, 그러나 평화로워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이봐, 저기 사람들을 봐!” 수아가 속삭였다.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된 거지?”

    그때, 그들 주위로 공기가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있던 풍경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사람들의 모습이 흐릿해지고 건축물들이 희미해졌다.

    “이게 무슨…!” 지훈이 당황했다.
    “다시 돌아가고 있는 건가요? 아니면… 이 시간이 불안정한 건가?” 수아가 불안에 떨었다.

    환영처럼 사라지는 고대 문명의 모습 속에서, 지훈은 한 가지 섬뜩한 것을 발견했다. 거대한 중앙 건축물의 가장 높은 첨탑에, 그들이 처음 발견했던 지하 유적의 수정 구슬과 똑같은 모양의 거대한 수정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수정 안에는, 마치 누군가가 발버둥 치는 듯한 형상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여전히 지하 유적의 제단 앞에 서 있었다. 푸른빛은 희미해졌고, 수정 구슬은 제단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방금… 우리가 본 게 진짜였을까요?” 수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였어.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본 건 그 문명이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이었는지도 몰라.” 지훈의 얼굴에는 상념이 가득했다.

    그는 다시 수정 구슬을 들여다봤다. 이번에는 아까 보았던 발버둥 치는 형상 대신, 희미한 글자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 모든 비극의 시작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시간은 거역할 수 없는 강물과 같았고, 우리의 존재마저 집어삼켰다. 우리가 남긴 이 유적은 단순한 시간 여행 장치가 아니다. 미래의 지혜로운 자들이여, 이 땅의 운명은 당신들의 손에 달렸노라. 거스를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오직 진실만이 다음 길을 밝힐 것이다.’

    메시지는 짧았지만, 그들의 심장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고대 문명은 재앙을 막기 위해 시간 여행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시간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유적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럼… 그들이 본 ‘비극의 시작’이라는 게 대체 뭐였을까요?” 수아가 숨을 죽였다.
    “아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닥쳐올 재앙일 수도 있겠지.” 지훈은 수정 구슬을 꽉 쥐었다. “우리는 단순한 유적을 찾은 게 아니었어. 거대한 비밀, 아니… 우리 시대의 운명을 짊어진 셈이야.”

    지하 유적의 공기는 여전히 무거웠지만, 그들에게는 이제 새로운 목적이 생겼다. 잊혀진 고대 문명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 그들은 이제 단순히 유적의 비밀을 파헤치는 모험가에서, 인류의 미래를 짊어진 탐험가로 변모하고 있었다. 시간의 강물은 쉼 없이 흐르고, 그 강물 속에서 그들은 어떤 진실을 찾아낼 수 있을까. 모험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SF (공상과학)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별의 그림자 아래

    제7 연구기지, E-섹터의 격리된 생명 유지실. 희미한 푸른빛만이 돔형 천장에서 내려와 투명한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아련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곳은 본래 미지의 외계 생명체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곳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존재의 유일한 성역이었다.

    류하는 차가운 금속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카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정확히는 ‘손’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길고 섬세한 다섯 개의 에너지 촉수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감쌌다. 카이의 피부는 은하수처럼 미세하게 빛났고, 그 안에서 희미하게 맥동하는 에너지가 류하의 심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온기는 차갑지만, 류하에게는 그 어떤 인간의 체온보다 따뜻했다.

    “오늘은… 감시가 더 심해졌어.” 류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지난 며칠 밤 제대로 잠들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박 박사가 새로운 보안 프로토콜을 도입했대. 이 구역만 집중적으로.”

    카이의 ‘눈’이라 불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성운 같은 두 빛덩어리가 류하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 시선은 말없이 그녀의 두려움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듯했다. 카이는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지만, 류하는 오래 전부터 그의 생각을 읽는 법을 터득했다. 혹은, 그저 그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_두려워 말아라, 류하._

    그 메시지는 류하의 심장 한가운데 울려 퍼졌다.

    “어떻게 두렵지 않을 수 있어?” 류하는 고개를 저었다. “발각되면… 우리는 끝이야. 너희 종족에게도, 인류에게도 이건 용납될 수 없는 일이야. 금지된… 금지된 관계라고.”

    카이의 빛나는 손이 류하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차가운 온기가 류하의 열 오른 뺨을 식혔다. 류하는 그 손길에 기대 눈을 감았다. 카이의 종족은 감정을 에너지로 전달하는 데 능숙했다. 류하는 지금, 카이가 자신에게 보내는 모든 위로와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_끝이란 없다. 시작이 있을 뿐._

    그 메시지는 늘 카이가 그녀에게 보내는 변치 않는 진실이었다. 하지만 류하는 달랐다. 그녀는 언제나 끝을 두려워했다. 인류의 역사가 가르쳐준 종족 간의 갈등, 그 끝에 찾아온 수많은 파멸들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너희 별에서 나 같은 존재는 뭘까?” 류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미개하고, 감정적인… 위험한 이종족? 아니면… 그저 연구 대상?”

    카이의 눈이 미묘하게 빛을 달리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복잡한 이미지와 감정의 파동이 류하에게 밀려왔다. 경계, 호기심, 그리고… 이끌림.

    _너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일부._

    류하는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카이의 언어는 직설적이고, 감정은 순수했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곧 두 종족의 질서를 위협하는 대죄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인류는 카이를, 카이의 종족은 류하를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그때, 생명 유지실의 투명한 벽 너머로 비상등이 깜빡이는 것을 류하가 포착했다. 동시에, 기지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경고음이 그녀의 심장을 쿵 떨어뜨렸다.

    “젠장…” 류하는 벌떡 일어섰다. “이건… 훈련이 아니야. 누가 우리 구역으로 오고 있어!”

    카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의 전신에서 불안정한 에너지가 파동쳤다. 류하는 카이의 종족이 위험에 처했을 때 보이는 반응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에너지 보호막을 형성하거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발산했다.

    _숨어라, 류하._

    카이의 메시지가 절박하게 울렸다. 하지만 류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혼자 둘 수 없어. 박 박사 일행이야. 그들은 널 해치려 할 거야.”

    “류하!” 통신 장치에서 다급한 동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야! E-섹터로 보안팀이 진입하고 있어! 긴급 상황이야! 네 신변이 위험하다고!”

    류하는 통신기를 끈으로 잡아 뜯듯이 떼어냈다. 그녀의 시선은 투명한 벽 너머로 빠르게 다가오는 그림자들에 고정되었다. 중무장한 보안 요원들이었다. 그들의 헬멧에 달린 서치라이트가 어둠 속을 헤집으며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이…” 류하가 카이에게 다가갔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카이는 류하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류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카이의 종족은 극한의 위기에서 순간적으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거나, 차원의 틈을 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막대했다. 카이의 생명력과 직결되는 위험한 시도였다.

    _함께 가자._

    류하는 카이의 눈을 응시했다. 그들의 시선이 얽히는 순간, 류하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깊은 확신에 휩싸였다. 이 사랑은 금지되었을지언정, 그 어떤 규칙보다 강력한 것이었다.

    “그래, 카이.” 류하가 결심한 듯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두려움과 희망이 뒤섞인 아슬아슬한 것이었다. “함께 가자. 어디든.”

    보안 요원들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마치 망치로 그녀의 심장을 내리치는 듯했다. 투명한 벽이 서서히 녹색 빛을 띠며 봉쇄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이제 완전히 갇혔다.

    카이의 에너지가 더욱 격렬하게 폭발했다. 생명 유지실 내부의 공기가 이글거리는 듯했고, 기지 전체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류하는 카이의 손을 더욱 꽉 붙잡았다. 그녀의 눈앞에 흐릿하게 일렁이는 공간의 틈이 보였다. 미지의 공간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문 열어! 안에 누가 있나!” 외부에서 박 박사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류하 박사! 응답하십시오! 당장 이종족에게서 떨어지시오!”

    류하는 카이를 돌아보았다. 카이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류하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비로소 완전해지는 듯했다.

    밖에서는 보안팀이 강제로 문을 개방하려는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안쪽에서는 카이가 만들어내는 차원 균열이 더욱 커졌다. 류하는 마지막으로 이 생명 유지실의 낯익은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카이의 빛나는 손을 붙잡고,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이 사라진 직후, 봉쇄된 문이 굉음과 함께 열렸다. 중무장한 보안팀과 박 박사가 허둥지둥 안으로 진입했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연기처럼 사라진 두 존재가 남긴 잔류 에너지의 희미한 흔적뿐이었다.

    류하와 카이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들이 발을 들인 미지의 공간은, 또 어떤 위험과 미지의 미래를 품고 있을까. 이 금지된 사랑의 서사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