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챕터: 재와 굶주림의 노래**
찬 바람이 부서진 유리창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먼지 섞인 바람은 낡은 철골 구조물 사이를 휘돌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몇 번이고 재앙이 휩쓸고 간 도시의 잔해는 폐허가 아닌, 거대한 뼈대처럼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이 거대한 유골의 틈새를 비집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름 없는 자들 중 하나였다. 내 이름은 진호. 스무 해를 겨우 넘긴 나는, 한때 번성했을 거대한 도시의 잿더미 속에서 겨우 한 뼘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늘도 빈 속을 움켜쥐고 무너진 빌딩의 지하를 탐색했다. 한때 정보의 바다였을 ‘도서관’의 흔적을 발견하고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종이는 이제 불쏘시개나 귀한 물물교환품일 뿐이었다. 내가 찾는 건 낡은 책장이 아니라, 부식된 통조림 캔 하나, 아니면 단단한 마른빵 조각이라도 좋았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흙먼지가 코를 찔렀지만, 나는 익숙하게 폐허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둠은 내 오랜 친구이자 때로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끼이익,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였다. 어둠 속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이봐, 뭐가 그렇게 급해?”
거친 목소리가 들리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쿵,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익숙한 상황이었다.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때로는 더 큰 약탈자가 되기도 했다.
“젠장, 아무것도 없잖아!”
욕설과 함께 낡은 나무 상자가 걷어차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나와 같은 폐허촌의 주민들이었다.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서로의 목덜미를 물고 뜯어야만 하는 세상. 이 모든 불행의 정점에는 ‘강철 제국’이 있었다.
그들의 존재는 마치 피할 수 없는 중력처럼, 우리의 삶을 짓눌렀다. 대재앙 이후, 강철 제국은 혼돈 속에서 가장 먼저 힘을 키웠고, 남은 자원과 기술을 독점하며 거대한 권력을 구축했다. 그들은 질서와 안전을 약속했지만, 그 질서는 오직 제국에 복종하는 자들에게만 허락되었고, 그 안전은 제국의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했다. 우리가 사는 폐허촌은 제국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버려진 땅이었다.
한참을 더 폐허 속을 헤매었지만, 오늘 수확은 보잘것없었다. 눅눅한 천 조각과 녹슨 나사 몇 개가 전부였다. 저녁 식사는 또다시 풀뿌리와 끓인 물로 때워야 할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앙상한 빌딩 숲 사이를 걸었다. 멀리서 폐허촌의 희미한 불빛이 반딧불처럼 깜빡였다. 그 불빛은 유일한 희망이자 동시에 덫이었다.
폐허촌 어귀에 다다르자, 익숙한 광경이 나를 맞았다. 강철 제국의 병사들, 그들의 번쩍이는 갑옷은 이 잿빛 세상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존재였다. 삐걱거리는 철문 앞에 늘어선 사람들의 줄은 길었고, 병사들은 무심한 얼굴로 그들의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세금 징수’라는 명목 아래 이루어지는 약탈이었다. 그들의 굳건한 표정과 손에 들린 제식 소총은 감히 불평 한마디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게 전부요? 늙은이가 이런 걸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한 병사가 늙은 여인의 손에 들린 쭈글쭈글한 감자 두어 개를 빼앗아 바닥에 던졌다. 감자는 먼지 낀 땅바닥을 몇 번 구르다 멈췄다. 여인의 얼굴에는 체념과 함께 억울함이 서려 있었다.
“제발… 이건 제가 손주 주려고 아껴둔 건데…”
“닥쳐! 이거나 받아.”
병사는 낡은 천 주머니를 발로 차며 말했다. 그 안에는 고작 몇 줌의 말라비틀어진 콩알이 들어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저들의 잔혹함은 매일매일 나의 심장에 못을 박았다. 저들은 우리가 가진 작은 희망마저 짓밟았다.
내 차례가 다가왔다. 차가운 금속성 냄새를 풍기는 병사들이 나를 훑어봤다.
“뭘 숨기고 있나, 어리지만 제법 건장해 보이는군.”
한 병사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나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겨우 찾아낸 녹슨 나사 몇 개를 내밀었다.
“이게 전부입니다.”
“흥, 고철 쓰레기군. 먹을 건 없나?”
그는 내 허리춤을 뒤졌다. 가슴 안쪽에 숨겨둔 마른 육포 조각이 들킬까 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건 오늘 아침, 폐허 깊숙한 곳에서 겨우 찾아낸 귀한 것이었다. 동생, 미나에게 주려던 것이었다.
다행히 병사의 손은 육포 조각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혀를 쯧쯧 차더니, 나를 밀쳐냈다.
“가라. 쓸모없는 놈.”
나는 휘청이며 폐허촌 안으로 들어섰다. 쌀쌀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동생에게 줄 육포는 지켜냈지만, 나는 또다시 그들에게 무력함을 느꼈다.
폐허촌 안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군데군데 피어오른 모닥불만이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익숙한 냄새가 코를 스쳤다. 마른 잎사귀 타는 냄새, 흙먼지 냄새, 그리고 사람 냄새.
미나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낡은 나무판자와 찢어진 천막으로 겨우 만든 비좁은 공간이었다. 미나는 몸집이 작고 창백했다. 몇 년 전 대재앙 이후 부모님을 잃고 홀로 남겨진 미나는 내게 유일한 가족이었다.
오두막 문을 열자, 모닥불 앞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미나가 보였다. 그녀의 작은 손에는 오래된 나무 인형이 들려 있었다.
“오빠!”
미나가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이 모든 재앙 속에서도 내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왔어, 미나.”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품속 깊이 숨겨두었던 육포 조각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 먹어.”
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육포 조각을 받아들고는 작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번지는 행복은 내가 오늘 겪은 모든 수모를 잊게 할 만큼 값진 것이었다.
“오빠는?”
미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괜찮아. 아까 먹었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미나는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가 육포를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렇게 작은 조각 하나에 기뻐하는 미나를 볼 때마다, 이 세상의 부조리함이 더욱더 가슴을 짓눌렀다. 강철 제국의 병사들은 매일같이 풍족한 식사를 하고, 비단옷을 입고, 따뜻한 잠자리에 들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으면서도,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밤은 깊어지고, 폐허촌에는 어둠과 침묵만이 감돌았다. 미나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조용히 오두막을 나섰다. 밤하늘에는 뿌연 먼지 때문에 별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멀리, 제국의 심장부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거대한 불빛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불빛은 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절망의 등대였다.
나는 폐허촌의 가장 높은 곳, 부서진 빌딩의 옥상으로 향했다. 차가운 바람이 내 몸을 할퀴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옥상 한구석에는 몇몇 그림자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나와 같은 처지의 젊은이들이었다. 우리의 눈빛에는 절망과 함께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오늘도 제국 놈들이 쥐새끼들처럼 폐허촌을 뒤졌다지.”
누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들을 몰아내야 할 텐데…”
“말만 해서 뭐가 달라지나? 저들의 총알이 우리를 뚫어버릴 텐데.”
회의적인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눈빛에서 똑같은 염원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 꽉 쥐고 있던, 오늘 발견한 녹슨 나사 몇 개를 만지작거렸다. 보잘것없는 고철이었지만, 내 손에서는 마치 날카로운 무기처럼 느껴졌다.
“이대로는 안 돼.”
나는 낮게 읊조렸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미나는 언제까지 풀뿌리나 씹어야 할까? 언제까지 제국 놈들의 발 밑에서 살아야 할까?”
내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지만, 그 안에는 굳은 결심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 가진 것이 없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걸 수 있어.”
고요함 속에서 누군가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제국은 거대하지만, 그들의 심장도 결국 피로 굴러가는 것이야. 우리가 피를 흘려야 한다면, 그 피가 헛되지 않게 할 것이다.”
나는 제국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을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
“더 이상 숨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눈을 들어 어둠 속의 동료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눈동자 속에서 희망의 불꽃이 다시금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작은 불씨였지만, 이 불씨들이 모여 언젠가 강철 제국의 심장을 태워버릴 불길이 될 것이라 믿었다.
잿빛 세상에, 굶주린 이들의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고통스러운 절규에 가까울지라도, 언젠가는 제국을 뒤흔들 반란의 멜로디가 될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