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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버펑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황량한 우주, 빛조차 삼켜버릴 듯한 암흑 속을 ‘카론’ 호는 묵묵히 가르고 있었다. 낡고 투박한 외형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견뎌온 탐사선이었다. 함교의 메인 스크린에는 차갑고 무감한 별들의 행렬만이 펼쳐져 있었다.

    “함장님, 예상 경로 이탈 없습니다.”

    항해사 키이라가 무릎 위로 늘어뜨린 홀로그램 패드를 보며 나른하게 보고했다. 그녀의 쨍한 푸른 머리카락이 희미한 조명 아래서 번뜩였다.

    “그래, 키이라. 항로 유지.”

    유진 함장은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지쳐 보였지만, 그의 굳게 다문 입술은 긴장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곳은 미지의 영역, 인류의 발길이 닿지 않은 심우주였다. 몇 달째 계속되는 항해는 승무원들을 지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미지의 발견에 대한 묘한 기대감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때였다.

    “함장님! 미확인 에너지 반응! 북서쪽 델타 섹터에서 감지되었습니다!”

    키이라의 목소리에 섞인 흥분은 나른함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유진은 순간적으로 눈을 떴다. 피로에 절어 있던 그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반복해. 미확인 에너지 반응?”

    “네! 단일 개체로 추정됩니다. 규모는… 어마어마합니다. 기존 탐사선 데이터베이스에는 없는 패턴이에요!”

    메인 스크린의 차가운 파란색 배경 위로 붉은색 점이 섬광처럼 깜빡였다. 주변의 모든 별들을 압도할 듯한 거대한 에너지 펄스가 차트 위로 요동쳤다.

    “이게… 대체 뭡니까?”

    생체학자 시안이 옆에서 화면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자연 현상은 아닌 것 같아요. 너무 규칙적이에요.”

    “인공 구조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도 아주… 아주 오래된.” 키이라가 흥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키이라, 탐사선 방향 전환. 저곳으로. 렉스, 탐사대장 류, 시안 박사, 즉시 함교로 소집.”

    “알겠습니다, 함장님!”

    ***

    ‘카론’ 호는 조용히 방향을 틀었다. 엔진의 희미한 굉음이 정적을 깼다. 불과 몇 분 만에 함교에는 탐사대장 류와 보안관 렉스가 도착했다. 류는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렉스는 거대한 체구로 한쪽에 버티고 서 있었다.

    “보고해.” 유진이 냉정하게 명령했다.

    “초고밀도 에너지 시그널입니다. 기존에 알려진 어떤 물질에서도 나올 수 없는 패턴입니다.” 키이라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우주선 자체의 스캐너로는 내부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외부 장벽이 너무 두껍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차원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차원의 물질이라니.” 렉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얼굴에 불신이 스쳤다.

    “어쨌든, 이건 단순한 암석 덩어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시안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리고 이 진동 패턴… 마치 무언가가 ‘숨 쉬는’ 것 같아요.”

    유진은 메인 스크린에 떠오른 붉은 점을 응시했다. ‘카론’ 호는 빠르게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여전히 암흑뿐이었지만, 스캐너는 거대한 존재가 코앞에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충격에 대비해.” 유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 순간, ‘카론’ 호의 전면 뷰포트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별이 아니었다. 행성도 아니었다.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검은색 구조물이었다. 불규칙하면서도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기묘한 형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자신만의 존재감을 뿜어내는 듯했다. 표면은 늙고 거친 암석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매끄럽고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불규칙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떤 빛도 반사하지 않고, 모든 것을 흡수하는 듯한 검은색이었다.

    “세상에… 이건….” 시안의 입에서 넋 나간 탄성이 터져 나왔다.

    키이라의 얼굴도 경이로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 정도 규모의 인공 구조물은 인류 역사상 기록된 적이 없습니다. 언제 만들어진 거죠? 누가…?”

    류는 말이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렉스마저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 거대한 형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근접 스캔 실시.” 유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밀 분석 시작해, 키이라.”

    키이라가 정신을 차리고 콘솔을 조작했다. ‘카론’ 호는 이제 그 거대한 검은 구조물 바로 옆에 멈춰 서 있었다. 마치 거대한 고래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물고기 같았다.

    삑- 삑- 삑-

    스캐너가 필사적으로 정보를 모으려 애썼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습니다. 함장님. 표면 물질은 저희가 아는 어떤 원소도 아닙니다. 그리고… 저 에너지는… 이 구조물 자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뛰고 있어요.”

    키이라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마치… 거대한 심장 같습니다.”

    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을까? 아니,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인류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

    “탐사팀 꾸린다. 류, 렉스, 시안 박사.” 유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표면 탐사 및 샘플 채취. 그리고… 접근 가능한 입구를 찾아.”

    “함장님, 너무 위험합니다.” 렉스가 반대했다. “저 미확인 구조물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합니다. 정찰 드론부터 보내는 게….”

    “드론은 이미 몇 대 보냈지만, 이 물질의 특성상 내부까지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두 먹통이 됐어.” 유진이 렉스의 말을 잘랐다. “직접 확인해야 한다. 인류의 운명을 바꿀지도 모르는 발견이야.”

    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결의가 스쳐 지나갔다. 시안은 이미 흥분으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렉스는 불만스럽게 숨을 들이켰지만,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함장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

    탐사 셔틀 ‘하데스’ 호는 ‘카론’ 호의 도킹 베이를 벗어나 거대한 검은 구조물로 향했다. 셔틀 안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표면은 예상했던 대로, 어떤 스캔도 통하지 않습니다.” 류가 개인 단말기를 확인하며 말했다. “이 재질… 도대체 뭘로 만들어졌을까요?”

    시안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셔틀 창밖을 내다봤다. “아마 우주 공간에 떠돌던 미세 입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응집된 물질일 거예요. 하지만 그 형성 원리는….”

    “재질 연구는 나중에 하시고, 지금은 적대적인 반응이 있는지 확인하는 데 집중하십시오.” 렉스가 으르렁거렸다. 그의 라이플은 이미 장전되어 있었다.

    셔틀은 거대한 구조물의 표면을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지독한 어둠 속에서 셔틀의 헤드라이트만이 길을 밝혔다. 불규칙하게 솟아오른 기암괴석 같은 표면,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새겨진 이해할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들. 그것은 고대의 유적이자 동시에 첨단 기술의 정수처럼 보였다.

    “저기… 뭔가가 있습니다!” 시안이 외쳤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다른 표면과 확연히 구분되는 매끄러운 부분이 있었다. 거대한 직사각형 모양의 틈. 마치 거대한 문이 닫혀 있는 듯했다.

    “인공 구조물입니다.” 류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마… 저게 입구일 겁니다.”

    셔틀은 조심스럽게 그 문 앞에 정지했다. 문은 수십 미터 높이로 솟아 있었고, 어떤 이음새나 틈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벽에 자연적으로 생긴 균열 같았다.

    “접근합니다.” 류가 조종사에게 지시했다. “문 근처에서 정지.”

    셔틀이 문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주변의 어둠이 진동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희미한 웅웅거리는 소리가 셔틀 내부를 채웠다.

    “이 진동… 에너지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시안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문 안쪽에 뭔가 있는 것 같아요.”

    렉스는 라이플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때였다.

    거대한 문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서서히 안쪽으로 미끄러져 열리기 시작했다. 돌과 금속이 긁히는 듯한 소음조차 나지 않았다. 오직 침묵 속에서, 칠흑 같은 어둠이 더욱 깊어진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은 빛 한 점 없는 심연이었다.

    “함장님, 문이 열렸습니다!” 류가 ‘카론’ 호에 보고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알았다. 조심해. 렉스, 시안 박사, 진입 준비.”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렉스가 말했다.

    “아니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류가 렉스를 제지했다. “제 전문입니다.”

    둘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이 스쳤지만, 류의 단호한 눈빛에 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셔틀에서 내려, 미지의 존재가 만들어낸 심연의 입구 앞에 섰다. 각자의 슈트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찢었지만, 그 빛은 거대한 공간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묵은 먼지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금속성 향이 코끝을 스쳤다.

    “스캐너, 전혀 작동하지 않습니다.” 류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전해졌다. “완벽한 암흑입니다.”

    시안의 눈빛은 빛났다. “놀랍군요! 이렇게 완벽하게 에너지를 차단하다니!”

    “조용히 해, 시안 박사.” 렉스가 경고했다. 그의 라이플이 앞을 향했다.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세 사람은 발걸음을 멈췄다.

    어둠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세한 마찰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슥- 슥-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바닥을 긁으며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세 사람의 슈트 안에서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대체… 저 안에는 뭐가 있는 거야….” 시안이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어둠은 짙었고, 침묵은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류의 헤드라이트가 저 멀리 어둠 속에 잠긴 어떤 형체를 비추었다.

    그것은…

    …그것은 거대한 해골 형상의 구조물이었다. 불길하게 솟아오른 뿔, 텅 빈 눈구멍. 마치 거대한 짐승의 두개골처럼 보이는 그것은, 자신들을 노려보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표면에는 미세한 틈새들이 있었고, 그 틈새들 사이로 희미하게 붉은빛이 깜빡거렸다.

    그 붉은빛은 마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섬뜩한 경고였다.

    “이게… 대체….”

    류의 목소리가 멎었다. 슈트 내부의 산소는 차갑게 느껴졌다.

    그것은 단순한 해골 형상이 아니었다. 해골의 텅 빈 눈구멍 안에서, 섬뜩한 붉은빛이 서서히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곳은, 미지의 존재가 만든 거대한 무덤인가? 아니면…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다음 화에 계속.

  • 스페이스 오페라 독립적인 단편 소설

    # 경계의 연가

    차디찬 진공이 헬멧 유리를 감쌌다. 카엘은 망막에 펼쳐진 성간 지도를 응시하며 고독한 한숨을 쉬었다. 그의 우주선, ‘나이트호크’는 인류 연합의 최전선, 일명 ‘장막’이라 불리는 성운 경계 지대를 순회 중이었다. 이곳은 인류와 미지의 종족, 닉시안(Nyxian)의 영역이 맞닿아 있는 곳. 수십 년간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깊은 불신과 경계심이 우주를 떠다녔다. 닉시안은 성운의 심연에서 살아가는 존재들. 그들의 모습은 희미한 빛의 잔상 같다고 알려져 있었고,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방사능 환경에서만 생존한다고 했다. 그들은 괴물이었다. 적이었다. 그렇게 교육받았다.

    “사령부, 알파-7 섹터 이상 없음. 일상적 성운 활동만 감지됩니다.”

    카엘의 보고에 통신망 너머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수신 확인, 카엘 대위. 정규 순찰을 계속하라.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말고.”

    “알겠습니다.”

    카엘은 조종간을 미세하게 움직였다. ‘나이트호크’는 거대한 우주를 유영하는 한 마리 고래 같았다. 임무는 지루했지만, 동시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닉시안의 함대는 한 번도 인류의 기술로 포착된 적이 없었다. 그들이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강력한지 아무도 몰랐다. 그저 막연한 두려움만이 수십 년간 이 경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였다.

    경고음이 선실을 가득 채웠다. 붉은 비상등이 깜빡이기 시작했고, 우주선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무슨 일이지?!” 카엘은 당황하여 계기판을 확인했다. ‘나이트호크’의 에너지 코어가 불안정하게 펄스 치고 있었다. 외부 충격 감지는 없었다. 내부 시스템 오작동? 이럴 리가 없는데!

    “메인 엔진 출력 저하! 보조 엔진도 작동 불능! 방어막 해제!”

    비상 경고가 끊임없이 울렸다. 우주선은 중력에 이끌린 돌멩이처럼 맹렬하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행성도 아닌, 이름 없는 소행성군 사이의 미지의 행성이었다. 성운의 푸른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대기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갔다. 여긴 ‘장막’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어선 곳이었다. 닉시안의 영역에 거의 다다른 지점.

    “이런, 젠장!”

    카엘은 죽음을 직감했다. 비상 착륙 시스템을 가동했지만, 이미 통제 불능이었다.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고, 시야가 암전되었다.

    ***

    의식이 돌아왔을 때, 카엘은 폐허가 된 조종석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온몸의 뼈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헬멧 유리가 깨져버린 탓에 차가운 미지의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독가스는 아닌 모양이다. 주변을 둘러보자 ‘나이트호크’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잔해들이 행성의 붉은 흙 위에 불시착한 채 연기를 뿜고 있었다.

    그때,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카엘은 고통을 참으며 허리에 찬 블래스터에 손을 뻗었다. 거대한 바위 뒤에서 무언가 나타났다. 인간과는 너무도 다른 실루엣. 빛의 입자로 이루어진 듯한 흐릿한 형체였다. 몸 전체가 미묘하게 발광하고 있었고, 푸른빛과 보랏빛이 끊임없이 일렁였다. 눈은 검은 심연 같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닉시안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빛의 종족.

    괴물이라 배웠던 존재는 예상보다 훨씬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다는 단어를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닉시안은 천천히 다가왔다. 카엘은 블래스터를 겨눴다. “움직이지 마! 더 가까이 오면 쏜다!”

    닉시안은 알아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엘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카엘은 경고 사격을 가했다. 블래스터 빔이 닉시안의 발치에 꽂히며 흙을 튀겼다.

    그러자 닉시안은 놀란 듯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묘한 소리를 냈다.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치 별빛이 부서지는 듯한 영롱한 음색이었다.

    그들은 적이었다. 죽여야 했다. 아니면 그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다.
    카엘은 블래스터를 다시 겨누었다. 하지만 그 순간, 닉시안은 손을 들어 올렸다. 빛으로 이루어진 듯한 손가락이 천천히 그의 이마를 향했다. 본능적인 공포에 카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고통이나 공격은 없었다.

    대신, 그의 머릿속에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 *그대는… 고통받고 있군.*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었고, 동시에 수많은 별들이 속삭이는 듯했다.

    카엘은 눈을 떴다. 닉시안은 여전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의 손은 그의 이마에 닿아 있지 않았다. 그저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누… 누구냐…”

    — *나는 라이라. 이 성운의 감시자.*

    텔레파시였다. 그녀는 카엘의 언어를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 그의 ‘생각’을 이해하고 있었다.

    “감시자…? 너희 닉시안은… 왜 내게 접근하는 거지?”

    — *그대는… 위험에 처해 있다. 이 행성은… 그대의 종족에게는 유해하다.*

    그녀의 말에 카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행성의 공기는 그에게 아직 견딜 만했지만, 그의 생체 모니터는 이미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깨진 헬멧 유리가 문제였다. 방사선 수치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젠장… 산소 필터가 망가졌어…”

    카엘은 고통스럽게 숨을 쉬었다. 그의 폐가 타들어 가는 듯했다.

    — *내가…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그대는 나를 신뢰해야 한다.*

    라이라는 천천히 다가와 카엘의 블래스터를 내려놓게 했다. 그리고는 그의 상처를 보더니, 발광하는 손을 그의 흉부에 가져다 댔다. 카엘은 움찔했다. 과거의 모든 교육이 그녀를 거부하라고 외쳤다. 적이었다. 괴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몸은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미묘한 진동과 따스함에 반응하고 있었다. 고통이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너… 뭘 하는 거야?”

    — *치료. 나의 방식대로.*

    그녀의 빛나는 손이 그의 상처 위를 지나가자, 놀랍게도 상처 부위의 통증이 완화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그의 세포를 진정시키는 것 같았다.

    며칠 밤낮을 그녀와 함께 보냈다. 라이라는 그를 ‘나이트호크’의 잔해 속에서 꺼내주었고, 성운 에너지를 응축한 액체를 먹여주었다. 카엘의 몸은 서서히 회복되었지만, 그의 우주선은 손 쓸 수 없었다. 라이라는 그를 자신의 거처로 데려갔다. 행성 깊숙한 곳에 숨겨진, 푸른 크리스털과 발광하는 식물들로 가득 찬 동굴이었다. 이곳은 인류에게는 치명적인 방사선으로 가득했지만, 그녀에게는 생명의 근원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카엘의 심장을 이상하게도 평화롭게 만들었다. 그들은 대화했다. 텔레파시로, 그리고 어색한 손짓으로. 라이라는 인류 연합이 닉시안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오해와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알려주었다. 닉시안은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이며, 성운의 에너지를 지키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다. 인간은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괴물’로 치부해버린 것이었다.

    카엘은 그녀를 통해 닉시안의 역사를 들었다. 그들의 고요한 지혜, 우주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그녀는 카엘의 이야기도 경청했다. 지구의 푸른 하늘, 웃음과 사랑, 그리고 전쟁의 슬픔.

    어느 날 밤, 동굴의 크리스털이 더욱 밝게 빛나던 때였다. 카엘은 라이라의 발광하는 손을 잡았다. 그녀의 피부는 차갑고 매끄러웠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온기는 어떤 인간의 손보다도 따뜻했다.

    “라이라…” 카엘의 목소리가 떨렸다.

    — *카엘.*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어. 너의 모든 것을…”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발광하는 몸이 더욱 선명한 푸른빛을 띠었다.

    — *그것은… 금지된 것이다. 우리의 종족은… 너무나 다르다. 서로에게… 위험할 수 있다.*

    “위험해? 너는 나를 살렸어. 너는 나에게 이곳이 괴물이 사는 곳이 아니라는 걸 알려줬어. 나는… 너를 믿어.”

    카엘은 그녀의 빛나는 얼굴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피부는 만질 수 없는 듯 흐릿했지만, 그의 손바닥은 그녀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하고 불가사의한 감각이었다.

    라이라의 눈이 깊은 우주처럼 흔들렸다.

    — *카엘… 나는… 너를 볼 때마다… 새로운 별을 보는 것 같아.*

    그녀의 손이 카엘의 뺨에 닿았다. 빛의 에너지가 그의 피부를 간질였다. 금지된 접촉. 종족을 뛰어넘는, 그 어떤 연합의 법률로도, 닉시안의 고대 금기로도 설명할 수 없는 끌림. 그것은 차가운 우주의 진공 속에서 피어난 가장 뜨거운 불꽃이었다.

    둘의 거리가 좁혀졌다. 카엘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그녀의 입술은 빛의 잔상 같았지만, 닿는 순간 그의 모든 감각을 자극했다. 마치 우주가 그들 주변에서 노래하는 것 같았다. 별들이 춤을 추고, 성운이 숨을 쉬는 듯한 환희가 밀려왔다.

    ***

    그들의 사랑은 성운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비밀스러운 꽃과 같았다. 하지만 영원히 숨겨둘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동굴 입구에서 강렬한 탐지 신호가 울렸다. 인류 연합의 수색대였다.

    “카엘! 응답하라! 카엘 대위, 응답하라!”

    카엘은 몸을 일으켰다. “제길… 결국 찾아냈군.”

    라이라는 그의 옆에서 불안하게 빛났다.

    — *그들은… 너를 찾아왔다. 나를… 발견하면… 공격할 것이다.*

    “널 두고 갈 수는 없어.”

    카엘은 블래스터를 다시 들었다. 녹슬었지만 여전히 위력적인 무기였다.

    “내가 막을게. 넌 도망쳐.”

    — *아니. 나는…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동굴 입구에서 발포 소리가 들렸다. 수색대는 이미 동굴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카엘은 라이라의 손을 잡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우리는… 이대로 잡힐 수는 없어.”

    — *탈출구는… 있다. 아주 오래된… 성간 통로가 이 근처에 있다. 하지만… 그곳은…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디든 괜찮아. 너와 함께라면.”

    그들은 동굴 깊숙한 곳으로 달렸다. 인류 수색대의 외침과 발포 소리가 뒤따라왔다. 그들의 블래스터 빔이 동굴의 크리스털을 스쳐 지나가며 파편을 튀겼다.

    “이쪽이야!” 라이라가 손짓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어두운 통로를 밝혔다.

    통로 끝에는 거대한 에너지 포털이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고대 닉시안 문명에서 사용하던 성간 이동 장치라고 했다. 미개한 인류에게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뒤에서 수색대원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카엘 대위! 항복하라! 닉시안 괴물과 함께 붙잡히고 싶은가!”

    카엘은 라이라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결의가 공존했다.

    “준비됐어?” 카엘이 물었다.

    — *너와 함께라면.*

    그들은 서로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불확실한 미래로 향하는 에너지 포털 속으로 뛰어들었다. 포털이 닫히며, 그들의 모습은 성운의 빛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인류 연합의 수색대는 텅 빈 동굴의 에너지 포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들은 알 수 없는 기술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카엘 대위는 실종 처리되었다. 닉시안 종족에게 세뇌당했거나, 혹은 무참히 살해당했다고 결론 내려졌다.

    하지만 카엘과 라이라는 살아 있었다. 미지의 성간 통로를 넘어선 우주의 저편에서, 그들은 서로의 존재에 의지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들의 사랑은 연합의 법률과 종족의 금기를 뛰어넘어, 광활한 우주 속에 피어난 단 하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 두 심장이 서로에게 이끌려 새로운 우주를 창조했다. 그들은 더 이상 어느 종족에도 속하지 않는, 오직 서로에게만 속한 존재들이었다. 경계는 사라지고, 오직 사랑만이 남았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아르카나 마법 학원, 그 웅장한 첨탑들이 석양 아래 검은 실루엣을 드리울 때면, 나는 언제나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마법의 전당은 언제나 완벽하고 고요한 모습으로 학생들을 맞이했지만, 며칠 전부터 미세한 균열이 그 완벽함에 생겨난 듯했다.

    지하 3층의 오래된 마법 실험실. 낡은 마법진들이 벽에 흐릿하게 새겨진 이곳에서 나는 홀로 늦은 시간까지 남아있었다. 오늘의 과제는 기초 마력 응용이었지만, 내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며칠 전부터 내 마력이 이상하게 들끓었다. 마치 거대한 용광로 옆에 선 철 조각처럼,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내 존재를 흔들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마력 과부하인가 싶었지만, 그 진동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너무나도… 차가웠다.

    “젠장, 또 시작이네.”

    왼손바닥에서부터 시작된 따끔거림이 점차 팔 전체로 퍼져 나갔다. 마치 피부 아래에서 수천 개의 미세한 바늘이 춤을 추는 듯했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마력 증폭 수정구를 움켜쥐었다. 투명한 수정구 속에서 미약하지만 분명한 파동이 감지됐다. 이건 내 마력이 아니었다. 내 마력은 푸른빛을 띠었지만, 수정구 속에서 흔들리는 것은 검푸른, 어둡고 끈적이는 빛이었다.

    “대체… 뭐야?”

    이런 기이한 현상은 최근 들어 부쩍 심해졌다. 처음엔 나만 느끼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제, 엠버와 복도를 걷던 중 잠시 휘청거린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저 피곤하다고 했지만, 나는 보았다. 그녀의 마력이 일렁이는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간 희미한 공포를. 그리고 그 공포의 근원이 내가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리라 짐작했다.

    문제는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학원 규율 중 가장 엄격한 것은 ‘학원 내부에서 발생하는 미확인 마력 현상에 대한 임의적인 탐색 금지’였다. 위반 시 강제 퇴학은 물론, 심하면 마법 사용 권한 박탈까지 이어질 수 있는 조항이었다. 하지만 이건 임의적인 탐색이 아니었다. 내 몸이, 내 마력이 직접 반응하고 있었다.

    나는 수정구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발이 향하는 곳은 명확했다. 지하 3층에서 더 아래로 내려가는 오래된 복도. 평소에는 굳게 닫혀있고, 어떤 교수도 그곳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곳. 그저 ‘유지 보수 구역’이라는 팻말만이 덩그러니 박혀 있는 곳. 하지만 내 몸속을 진동시키는 그 불길한 파동의 근원은 분명 그곳에서 오고 있었다.

    복도 끝의 낡은 철문 앞에 섰다. 차갑고 녹슨 철문은 흡사 거대한 괴수의 입처럼 느껴졌다. 문고리를 잡아보니 예상대로 잠겨 있었다. 일반적인 자물쇠였다면 내 마력으로 충분히 열 수 있었겠지만, 이 문은 달랐다. 강력한 마법 봉인으로 잠겨 있었다. 학원 내에서 이 정도 봉인이 걸린 곳은 도서관의 금서 보관고 외에는 없었다. 그만큼 이곳이 중요하다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멈출 수 없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몸속의 검푸른 마력 파동이 점점 더 강해졌다. 이대로 두면 내가 먼저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는 허리에 찬 마력 단검을 뽑아 들었다. 단검 날에 푸른 마력을 집중시키자 희미하게 빛이 났다. 그리고 그 빛을 봉인된 문에 갖다 댔다.

    쉬이이익-

    문에서 김이 새는 듯한 소리가 나며 봉인 마법진이 일렁였다. 끈질기게 저항하는 봉인의 힘에 단검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금기를 깨는 행위였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 행위였다. 하지만 이 현상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면, 결국 나는 미쳐버리거나, 아니면 더 끔찍한 일에 휘말릴 것이라는 직감이 나를 채찍질했다.

    “젠장, 열려라!”

    나는 단검에 더 많은 마력을 쏟아부었다. 내 푸른 마력이 검푸른 파동과 뒤섞이며 봉인 마법진을 잠식해 들어갔다. 철문 전체가 파르르 떨리더니, 마침내 ‘딸칵’하는 소리와 함께 봉인 마법이 해제되었다.

    끼이이익-

    오랜 세월 동안 닫혀 있던 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문 너머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마치 수백 년 된 무덤의 뚜껑이 열린 것 같았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는 곰팡이와 흙냄새, 그리고 무언가 썩어가는 듯한 역겨운 비린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내 마력으로 만든 작은 광구가 어둠을 밝혔다. 복도는 아래로 경사져 있었고, 벽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있었다.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발밑의 돌바닥은 미끄러웠고, 간간이 부러진 뼈 조각 같은 것이 밟히는 느낌이었다. 뼈… 기분 탓이겠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광구의 빛이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벽에는 고대 상형문자 같은 것들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학원에서 배운 어떤 마법 언어와도 달랐다. 비정형적이고, 기괴하며, 섬뜩한 느낌을 주는 문자였다.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형상이었다.

    점점 더 깊숙이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가워지고, 내 몸속의 검푸른 파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이제는 단순히 진동하는 것을 넘어, 내 혈관을 따라 흐르는 듯한 생생한 감각을 주었다. 마치 내 몸의 일부가 그 어둠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복도의 끝은 거대한 지하 공간으로 이어져 있었다. 광구를 높이 들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경악 그 자체였다. 거대한 원형 공간의 중앙에는 거대한 검은 돌 제단이 솟아 있었다. 그 제단 위에는 거대한 쇠사슬이 얽히고설켜 있었고, 그 쇠사슬들은 제단 아래로 뻗어 내려가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묶어놓기 위한 것처럼.

    그리고 제단 주변의 벽면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마법진들이 새겨져 있었다. 학원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강력한 봉인 마법진들이었다. 그 마법진들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빛이 주는 느낌은 보호가 아닌 억압이었다. 무엇을 그렇게 필사적으로 가두려 했을까?

    나는 제단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발소리가 넓은 공간에서 메아리쳤다. 제단의 표면은 매끄러웠지만, 손을 대자 이상할 만큼 차가웠다. 마치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닌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내 몸을 휘감던 검푸른 파동이 폭주했다.

    우웅-!

    내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었다. 마력 증폭 수정구를 손에 든 것도 아니었는데, 내 몸 자체가 파동의 증폭기가 된 듯했다. 주변의 마법진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더니, 쇠사슬이 묶인 제단 아래에서부터 거대한 울림이 시작되었다.

    크으으으으으으……

    지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거대한 대지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 같기도 한 것이 내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내 몸속의 검푸른 파동은 이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의 어떤 힘에 반응하며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울림과 함께, 제단 아래에서 검은 액체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끈적하고 걸쭉한 검은 액체는 마법진의 봉인을 비웃듯, 제단의 균열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 액체에서 풍기는 비린내는 훨씬 더 강렬했고, 그 액체가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지독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저 검은 액체는… 마력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어떤 마력과도 달랐다. 순수한 악의, 절망, 그리고 파괴 그 자체로 이루어진 마력이었다.

    바로 그때, 제단 아래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찾아왔는가… 나의… 아이여…”

    목소리는 남자의 것 같기도, 여자의 것 같기도 한 기괴한 중저음이었다. 그 목소리는 내 뇌리에서 직접 울리는 듯했다. 내 심장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나의 아이’라는 말에 온몸의 피가 식는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광구를 더욱 높이 들었다. 제단 아래의 어둠 속을 비추기 위해. 하지만 광구의 빛은 어둠을 뚫지 못하고 희미하게 흩어졌다. 하지만 잠시, 아주 찰나의 순간, 나는 보았다.

    제단 아래, 검은 액체 속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형체를. 그것은 사람의 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십 개의 눈이 번뜩이고, 날카로운 촉수들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형체 중앙에는 거대한 입이 벌어져 있었다. 그 입 속에는 무수히 많은 이빨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는데, 그 이빨들은 모두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의 시선이 정확히 나에게 꽂혔다. 무수히 많은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향하자, 나는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네가… 필요하다… 이현…”

    내 이름…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그리고 그 순간, 제단 아래에서 묶여 있던 쇠사슬 중 하나가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끊어진 쇠사슬은 거대한 독사처럼 공중에서 휘둘러졌다.

    나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쇠사슬이 부딪힌 바닥에서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등 뒤에서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제단 아래의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검은 액체가 제단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고, 마법진의 빛이 미친 듯이 깜빡였다. 봉인이 약해지고 있었다.

    “어둠의… 아이여… 나의… 힘을… 받아들여라…”

    압도적인 마력이 온몸을 짓눌렀다. 나는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의 몸속을 흐르던 검푸른 파동이 이제는 나를 삼킬 듯이 솟아올랐다.

    이것이, 아르카나 학원 지하에 숨겨진 금기였다. 그리고 나는, 그 금기의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크아아악!”

    나는 몸을 움켜쥐었다. 내 마력이 폭주하며 주변을 뒤흔들었다. 검푸른 마력이 내 혈관을 따라 휘몰아치며 고통을 안겼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나는 알 수 없는 힘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어둠의 힘… 그것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제단 아래에서, 끊어진 쇠사슬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괴물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학원은, 어쩌면 나 자신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 다크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제 72화: 그림자 속의 칼날**

    천명투기장은 숨 막히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수만 관중의 시선은 오직 투기장의 한 점, 검푸른 운석으로 벼려진 듯한 단단한 원형 무대 위 두 사내에게 박혀 있었다. 거대한 결계가 무대 전체를 감싸고 있었지만, 그 안에 흐르는 살기(殺氣)는 차가운 바람이 되어 관중석 끝자락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한 명은 흑의를 두른 사내였다. ‘사영(死影)’이라 불리는 그는 그림자처럼 희미한 존재감을 풍겼다. 그의 얼굴은 반쯤 가려져 있었고, 드러난 눈빛은 새벽의 얼음장처럼 차갑게 빛났다. 그가 발하는 기운은 음습하고 탁했으며, 마치 살아있는 모든 것을 시들게 할 것만 같은 불길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 이번 대회에서, 그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이변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의 상대들은 하나같이 끔찍한 몰골로 패배했기에, 그를 향한 두려움은 경외심보다 훨씬 깊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푸른색 도포를 걸친 건장한 청년, ‘강휘(姜輝)’가 서 있었다. 명문 무가의 기재이자 정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그는, 이번 대회의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였다. 그의 눈빛은 굳건했고, 뿜어내는 기운은 해맑은 새벽 햇살처럼 맑고 강렬했다. 그러나 그의 심장 속에서는 거대한 폭풍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 사영이라는 존재에게서 풍겨오는 낯선 기운은, 그가 평생 수련해 온 어떤 무학으로도 파악하기 힘든 기이한 것이었다.

    “결승 진출전. 준비되었는가?”

    심판의 굵은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두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서로를 응시할 뿐이었다. 강휘의 주먹에 푸른빛 강기(罡氣)가 서서히 어린 반면, 사영의 손끝에서는 그림자 같은 검은 안개가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시작!”

    명령과 동시에 투기장이 폭발했다.

    강휘가 먼저 움직였다. 그의 몸은 한 줄기 푸른 섬광이 되어 사영에게 돌진했다. ‘파천신권(破天神拳)’의 첫 수가 작렬했다. 대기를 가르고 허공을 찢는 듯한 주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기압은 주변의 결계를 울릴 정도였다. 일격에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듯, 그의 권풍(拳風)은 사영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사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아주 미세하게 옆으로 비켜섰을 뿐이었다. 강휘의 주먹이 그가 서 있던 공간을 찢어발기며 굉음을 토해냈으나, 사영의 몸은 이미 주먹의 궤적 바깥에 고요히 서 있었다.

    “헛!”

    강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피하지 않고, 회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의 공격이 처음부터 그곳을 노리지 않았던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속도가 아니었다. 마치 공간 자체를 조작하는 듯한 기이한 유영(遊泳)이었다.

    사영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검은 안개가 실타래처럼 엮이며 한 가닥의 실을 형성했다. 그 실은 지극히 가늘었으나, 주변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섬뜩한 어둠을 품고 있었다. 강휘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빠르게 몸을 뒤로 뺐다.

    솨아아악!

    사영의 그림자 실이 강휘의 팔뚝을 스쳤다. 단지 스쳤을 뿐인데, 강휘의 푸른 도포 자락이 마치 수백 년 묵은 헌 옷처럼 부식되며 바스러졌다. 살갗은 간신히 피했지만, 옷감이 썩어 문드러지는 광경은 소름 끼치도록 기괴했다.

    “이게 무슨……!”

    강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어떤 독이나 내공으로도 저런 식의 부패는 본 적이 없었다. 사영이 내뿜는 기운은 그야말로 ‘죽음’ 그 자체였다. 닿는 모든 것을 생명력을 흡수하여 소멸시키는, 금지된 영역의 힘.

    사영의 입가에 그림자 같은 미소가 번졌다. “고작 이 정도인가. 천하를 지킬 영웅이라 불리던 강휘가.”

    그의 조롱 섞인 한 마디는 오히려 강휘의 투지를 자극했다. 강휘는 심호흡을 하며 흐트러진 내공을 가다듬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저 그림자 같은 힘의 근원을 파악하고, 뿌리째 뽑아내야만 한다.

    “감히! 불의한 힘으로 무림을 더럽히려 드느냐!”

    강휘의 외침과 함께 그의 몸에서 찬란한 푸른 기운이 폭발했다. 단순한 강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용이 승천하는 듯한 웅장한 기세였다. 그의 내공은 정통 무학의 정수, 순수하고 강맹한 기운의 결정체였다.

    ‘청룡단(靑龍斷)!’

    강휘는 무형의 칼날을 휘두르듯 두 팔을 크게 휘둘렀다. 푸른 기운은 거대한 청룡의 형상을 띠며 사영에게 돌진했다. 단순한 기의 응집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영물(靈物)의 기세였다. 투기장 바닥의 운석조차 미세하게 진동할 정도의 압도적인 힘.

    사영은 여전히 고요했다. 청룡이 그의 코앞까지 쇄도하자, 그는 양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검은 안개가 그의 손끝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며,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그림자 촉수처럼 꿈틀거리며, 강휘의 청룡에 맞섰다.

    쿠오오오오! 콰아앙!

    청룡과 그림자 촉수가 격렬하게 충돌했다. 맑고 푸른 기운과 음습한 검은 기운이 뒤섞이며 투기장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폭발음을 만들어냈다. 결계가 파르르 떨리며 금이 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관중들은 숨을 죽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면 대결. 순수한 양의 기운과 극단적인 음의 기운이 부딪히는 지옥 같은 광경이었다.

    “크윽!”

    강휘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청룡이 그림자 촉수에 의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림자는 단순히 부딪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룡의 기운을 흡수하고, 그 생명력을 갉아먹으며 자신을 증폭시키는 듯했다. 강휘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내공이 마치 끓는 물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어리석은…….” 사영의 목소리가 폭발음 속에서도 또렷하게 울렸다. “생명을 탐하는 그림자는, 그 어떤 빛도 삼켜버릴 수 있느냐니.”

    그 순간, 사영의 그림자 촉수들이 더욱 거대해지며 강휘의 청룡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푸른빛이 사라지고, 거대한 그림자 구체가 투기장 중앙에서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강휘는 눈앞의 광경에 망연자실했다. 그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필살기가, 저 그림자에 의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 구체 속에서, 사영이 유령처럼 걸어 나왔다. 그의 눈빛은 더욱 차갑고 깊어졌으며, 흑의를 두른 몸에서는 한층 더 불길하고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강휘의 청룡을 집어삼킨 후, 더욱 강해진 듯 보였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 너의 모든 빛을 내게 바쳐라, 강휘.”

    사영의 손끝에서 검은 번개가 치솟았다. 그것은 단순한 번개가 아니었다. 생명의 기운을 갉아먹는 어둠의 벼락이었다. 번개는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강휘를 향해 쏜살같이 쇄도했다.

    강휘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피할 수 없다. 저것에 닿는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뽑힐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온몸의 마지막 남은 기운을 끌어모았다. 심장에서 뜨거운 불꽃이 터져 나오는 듯한 강렬한 고통 속에서, 강휘는 다시 한번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림자의 벼락이 그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죽어라, 강휘!”

    사영의 광기 어린 외침이 울려 퍼졌다.

  • 스페이스 오페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진, 출력 올려!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까지 이 지루한 항성계를 벗어나지 못할 거야!”

    카이의 목소리가 조종실을 울렸다. 그는 함장석 대신 보조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행성 스캔 데이터를 훑고 있었다. 그의 눈은 별처럼 반짝였지만, 피곤에 절은 진의 눈은 그렇지 않았다. 진의 표정은 마치 오랫동안 씹다 버린 껌처럼 지쳐 보였다.

    “카이, 이 출력은 이미 아르고 호의 최대치에 가깝네. 그리고 ‘지루한’이라는 표현은 자네 혼자만의 생각이지. 난 이 항성계의 평화로움이 아주 마음에 들어. 연료도 절약되고, 부품 마모도 적고… 얼마나 완벽한가?”

    진은 한숨을 쉬며 메인 콘솔의 에너지 효율을 다시 확인했다. 그의 손놀림은 매끄러웠지만, 그의 등은 이미 몇 날 밤샘 조종으로 굽어 있었다. 엉망진창이 된 진의 머리카락은 중력 제어장치가 고장 난 미역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평화로움? 진, 우리는 탐험가야! 평화로움은 탐험가에게 독이라고! 안 그래?” 카이가 몸을 돌려 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거기다 세피로스 III는 절대 평화롭지 않아. 고대 문명의 유적지가 잠들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잖아? 어딘가에서 엄청난 모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문이라기보다… 술집에서 떠도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지. ‘잃어버린 유적’, ‘고대 병기’, ‘숨겨진 보물’. 그딴 소리에 현혹되어 빚만 지고 돌아온 탐험가들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야. 우리 아르고 호의 수리비가 얼마나 나왔는지 잊었나? 그건 전부 자네의 ‘소문’ 탐사 때문에 생긴 일이야.”

    “이번엔 다를 거야!” 카이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홀로그램 스크린 위를 빠르게 스쳤다. “봐, 여기 이 에너지 이상 수치. 이 미세한 중력 왜곡. 분명 인공적인 흔적이야! 그것도 엄청나게 오래된 문명의 흔적일 거라고! 내 직감이 말해주고 있어!”

    진은 카이의 열정에 한숨만 내쉬었다. 하지만 그 역시 알았다. 카이가 이렇게 흥분했을 때는, 그가 뭔가 ‘진짜’를 찾아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카이의 직감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으니까. 지난번에도 벼랑 끝에 몰린 카이를 구했던 건 바로 그 직감이었다.

    “알았네, 알았어. 자네 말대로라면, 대기권 돌입 준비를 해야겠군.” 진이 마침내 항복 선언을 했다. 그의 꿍얼거리는 목소리에는 포기 외에도 미약한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카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지! 역시 진이야! 역시 내 명콤비!”

    “명콤비는 개뿔. 매번 자네 뒷수습이나 하는 신세지.” 진은 투덜거리면서도 능숙하게 아르고 호의 대기권 돌입 시퀀스를 가동했다.

    아르고 호는 세피로스 III의 붉은 대기권으로 서서히 진입했다. 행성은 온통 붉은 사막과 깎아지른 듯한 황량한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생명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아니, 아예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 같았다. 행성 전체가 거대한 상처처럼 보였다.

    “예상 착륙 지점은 이 좌표로 설정하겠네. 스캔 결과, 이곳의 지반이 가장 안정적이야.” 진이 착륙 지점을 모니터에 띄웠다. 거대한 협곡의 한가운데였다. 거대한 절벽들이 붉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고, 그 사이로 끝없는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흠, 협곡이라… 딱 좋아! 고대 문명은 항상 자신들의 비밀을 깊숙이 숨겨두는 법이니까. 이런 곳이라면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 거야.” 카이는 안전벨트를 다시 조였다. 그의 눈은 이미 협곡의 깊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아르고 호가 착륙 패드 없이 거친 지면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착륙 충격은 거의 없었다. 진의 조종 실력은 언제나 완벽했다. 덕분에 카이는 이 행성의 중력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 카이가 외쳤다. 그는 이미 탐사용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헬멧을 쓰고, 허리에 휴대용 스캐너와 다목적 도구를 매달았다. 그의 모습은 마치 모험을 떠나는 소년 같았다.

    “잠깐, 카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아르고 호의 방어막은 최대로 올릴 거야. 그리고…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콜 사인 보내게. 알았지? 섣불리 혼자 행동하지 말고.” 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카이를 붙잡았다. 진은 이제 그가 떠들었던 위험한 농담들이 현실이 될까 봐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걱정 마! 내가 누군데! 우주 최고의 고대 유적 탐험가 카이 아니겠어? 금방 다녀올게!”

    카이는 장난스럽게 경례를 하고는 해치 문을 열었다. 뜨거운 사막 바람이 후끈하게 불어 들어왔다. 그의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붉은 모래 언덕과 그 아래로 아득히 깊이를 알 수 없는 협곡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행성의 거대한 입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장관이었다. 스캐너를 들고 협곡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이봐, 진. 여기 반응이 더 강해지고 있어. 협곡 아래쪽이야! 정말로 뭔가 있어! 스캐너가 미쳐 날뛰고 있다고!”

    카이는 조심스럽게 협곡 아래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그의 스캐너는 계속해서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수십 미터를 내려갔을까. 거대한 암벽 한가운데에 뭔가 인위적인 문양이 새겨진 것을 발견했다.

    “이런… 이런 제기랄…!”

    그것은 단순한 문양이 아니었다. 세월의 풍파에 마모되어 형태가 희미해졌지만, 거대한 강철 문이 바위에 완전히 파묻힌 채 녹슬어 있었다. 높이만 해도 족히 30미터는 넘어 보였다. 문은 단 하나의 이음새도 없이 매끄럽게 암벽과 일체화되어 있었고, 그 표면에는 기묘한 기하학적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복잡하고 아름다웠다.

    “진, 들려? 찾았어! 찾았다고! 문이야! 거대한 문이라고! 내 스캐너가 미쳐 날뛰고 있어!” 카이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기쁨이 묻어났다.

    “보내주는 영상으로 확인했네. 믿을 수가 없군… 저게 정말 자네가 찾던 고대 유적의 입구란 말인가?” 진의 목소리에도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의 평소 침착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카이는 문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양을 쓸어보았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수만 년의 세월이 그 위에 내려앉은 듯했다. 스캐너를 문양에 갖다 대자, 격렬한 진동과 함께 액정 화면에 복잡한 에너지 패턴이 나타났다. 패턴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분명해! 이건… 봉인되어 있던 문이야. 엄청난 에너지가 잠들어 있어.” 카이가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를 담은 듯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여느냐는 거지.”

    그는 주머니에서 만능 해킹 장비를 꺼내 문양 중앙에 붙였다. 장비가 붉은빛을 내며 문양과 동기화를 시도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장비의 액정에는 ‘오류: 프로토콜 불일치’라는 메시지만 깜빡거렸다.

    “안 돼.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통하지 않아. 너무 오래되거나, 아니면… 우리 문명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기술이 적용된 것 같아.” 카이는 답답한 듯 헬멧을 벗으려다 참았다.

    카이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고대 문명 관련 자료들이 스쳐 지나갔다. 특정 주파수? 고유한 에너지 패턴? 아니면… 단순한 물리적 스위치?

    그때, 그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문양 한가운데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움푹 파인 부분이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끼워 넣어야 할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곳만 유독 깨끗하고 매끄러웠다.

    “진! 혹시… 아르고 호에 고대 유물 같은 거 남은 거 없어? 아주 작고, 특이하게 생긴 거 말이야! 네가 ‘쓸데없는 돌덩이’라고 부르던 것들 중 하나라도!”

    “고대 유물이라니? 내가 그런 걸 왜 가지고 있겠나! 난 고물 수집가가 아니라고! 잊었나? 내 취미는 전파망원경으로 별똥별 구경하기야!” 진이 투덜거렸다. “잠깐만… 아, 이거 말인가? 자네가 예전에 ‘쓸모없지만 아름답다’며 줍자고 고집했던… 둥근 수정 구슬? 행성 칼레스 7에서 주웠던 그거?”

    “수정 구슬? 맞아! 그거!” 카이가 환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은 태양처럼 빛났다. “빨리 가져다줄 수 있어?”

    “지금 자네 위치까지 걸어오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리겠네! 기다리게! 이 나이에 협곡 등반이라니…”

    진은 아르고 호에서 뛰쳐나와 협곡 아래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숨소리가 통신으로도 거칠게 들려왔다. 카이는 진이 도착할 때까지 문양을 연구했다. 수정을 넣어야 할 듯한 그 공간은 묘하게 손에 익은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얼마 후, 헐떡이는 진이 카이 앞에 도착했다. 그의 손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푸른빛이 감도는 둥근 수정 구슬이 들려 있었다. 구슬은 마치 작은 은하계를 품고 있는 듯한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기… 이걸 말하는 건가? 진짜 이런 게 필요할 줄이야…” 진이 숨을 고르며 구슬을 내밀었다. 진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지만, 그의 눈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카이는 구슬을 받아들었다. 차가운 수정의 감촉이 손안에 전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구슬을 문양 한가운데 파인 곳에 맞춰 보았다.

    **정확히 일치했다.**

    구슬이 제자리를 찾자, 문양 전체가 희미한 푸른빛을 내며 빛나기 시작했다. 구슬 자체에서도 강렬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이내, 문에서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기계 장치가 깨어나는 듯한, 마치 잠들어 있던 행성 자체가 뒤척이는 듯한 굉음이었다.

    **크으으으으으… 웅장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닫혀 있던 문이 마침내 그 거대한 입을 벌리자, 그 안에서 차가운 공기와 함께 칠흑 같은 어둠이 쏟아져 나왔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깊이와 고요함이 느껴졌다. 마치 우주 자체의 심연과 같은, 끝없는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어둠이었다.

    “진… 봐… 이건…” 카이의 목소리는 경외심으로 가득했다. 그의 심장은 마치 우주선 엔진처럼 격렬하게 요동쳤다.

    진은 말없이 카이의 옆에 서서, 서서히 열리는 문 안쪽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경이로움과 함께 미묘한 두려움이 교차했다. 그는 카이처럼 무모하지 않았다. 그 어둠 속에서 풍겨오는 압도적인 기운은 그의 본능적인 경고 신호를 울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한, 그러나 분명히 감지되는 에너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던 거대한 존재가 기지개를 켜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요함 속에서도 감지되는 웅장한 생명감.

    “카이… 저 안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거야. 좋은 것일지, 나쁜 것일지… 전혀 알 수 없군.” 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이는 대답 대신, 헬멧의 헤드라이트를 켰다. 강렬한 빛이 어둠 속으로 뻗어 나갔지만, 그 어둠은 빛을 집어삼키는 듯, 끝을 보여주지 않았다. 빛은 겨우 몇 미터 앞에서 허무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라… 그거야말로 우리가 찾던 거 아니겠어?”

    카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미지의 심연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어둠 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진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지만, 이내 스캐너를 켜고 카이의 뒤를 따랐다. 이 모험이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화물칸의 임시 과학실은 평소와 달리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미리내’ 호가 딥스페이스 탐사 중 건져 올린 정체불명의 유물이 바로 그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한별 과학 담당관은 돋보기안경을 코끝에 걸고 홀로그램 스캐너를 조작하며 거대한 검은색 구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매끄럽고 완벽한 구형. 검은색이지만 빛을 완전히 흡수하지는 않아, 각도에 따라 아주 미세하게 보랏빛 광택을 띠었다. 표면에는 아무런 문양도, 연결 부위도 없었다. 마치 태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존재했다.

    “흠… 에너지 반응은 없는데, 이 미세한 파장은 뭐지?” 한별은 중얼거렸다. 그녀의 미간에는 늘 그렇듯 작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이 미녀 과학관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철컥,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별 씨, 고생이 많으십니다요. 드디어 외계인 친구랑 대화 좀 트셨습니까?”

    최지훈 항해사 겸 엔지니어였다. 늘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등장하는 그는 한별의 예민한 신경을 건드리는 데 도가 튼 남자였다. 한 손에는 스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컵을 들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특제 커피일 테다.

    “최 항해사님, 이곳은 엄연히 격리 구역입니다. 허가 없이 들어오시면 곤란합니다.” 한별은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에이, 선장님이 한별 씨 고생한다고 따뜻한 거라도 마시라고 보내셨습니다. 제가 또 선장님의 특명을 받들었죠.” 지훈은 너스레를 떨며 구체로부터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았다. “한별 씨만을 위한, 설탕 세 스푼, 크림 두 스푼, 딱 맞춰 드린 겁니다.”

    한별은 스캐너에서 눈을 떼고 그제야 지훈을 쳐다봤다. “제 취향을 어떻게 아십니까? 저는 단 커피는 마시지 않습니다.”

    “음… 제 데이터베이스에는 그렇게 입력되어 있었는데 말이죠. ‘이한별, 스트레스 지수 최고조일 때 단 것 섭취 욕구 증가.’ 라구요.” 지훈은 윙크했다.

    한별은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쓸데없는 데이터베이스군요.” 하지만 속으로는, ‘솔직히 지금 좀 당 떨어지긴 하는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하, 뭐 어떻습니까. 일단 쉬엄쉬엄 하시죠. 저 녀석, 그냥 검은 돌덩이 같구만. 뭐가 그리 심각하냐구요.” 지훈은 구체를 힐끗 보며 말했다.

    그 순간이었다. 한별이 구체에 손가락을 뻗어 아주 미세하게 떠오른 듯한 보랏빛 광택을 확대하려는 찰나, 구체에서 갑자기 ‘웅-‘ 하는 낮은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화물칸 전체를 휘감는 듯한 묘한 파장이 느껴졌다.

    “어? 이거 뭐야?” 지훈이 순간 미소를 지우고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게 무슨…!” 한별도 놀라 스캐너를 놓칠 뻔했다. 스캐너 화면의 파형 그래프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파장은 뇌를 직접 자극하는 듯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는 기분.

    “아악! 최지훈!” 한별이 갑자기 소리쳤다. “당신… 당신 머리는 왜 맨날 그… 그…!”

    “제 머리요? 제 머리 왜요?” 지훈은 당황해서 자신의 머리를 만졌다. 그는 평소에도 공들여 세팅한 헤어스타일을 자랑하는 편이었다.

    “너무… 너무 반짝거려요! 태양처럼 눈부셔서 쳐다보기가 힘들다고요! 가끔은… 가끔은 좀 풀어헤쳤으면 좋겠다고요! 그리고 왜 저한테 자꾸 단 커피를 먹이려는 거예요! 제가 설탕에 절여진 설탕인간이 될 것 같아요!” 한별의 목소리는 평소의 냉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머릿속의 생각이 필터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지훈의 머리 위로 실제로 햇살처럼 찬란한 광휘가 뿜어져 나오는 환상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커피잔에서는 설탕 결정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기묘한 이미지가 겹쳐 보였다.

    지훈은 멍하니 한별을 바라봤다. “한별 씨, 지금 제 머리에서 햇빛이라도 나옵니까? 그리고 설탕인간이라니… 제발 제 커피 맛을 보신 적은 있습니까?”

    “맛은 안 봤지만, 딱 봐도 달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솔직히 저번에… 저번에 당신이 야근하는 저한테 컵라면 끓여다 줬을 때… 그… 그 어깨는 좀 괜찮았어요!” 한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훈은 이번엔 경악했다. 한별이 자신의 어깨를 칭찬하다니! 그것도 ‘괜찮았다’고? 그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후볐다.

    바로 그때, 지훈의 뇌리에도 묘한 파장이 밀려들어왔다. 그의 눈앞에는 한별의 냉정한 얼굴 뒤로, 왠지 모르게 한숨을 푹푹 쉬는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도 말이 필터 없이 튀어나왔다.

    “한별 씨! 아니, 한별 씨 눈에는 제가 그렇게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보였어요? 제 머리가 태양처럼 빛난다니! 그건 칭찬인가요, 욕인가요! 그리고… 그리고… 아 솔직히 저번에 한별 씨가 밤새도록 보고서 쓰다가 잠든 거 봤을 때… 담요 덮어주고 싶었는데… 너무 가까이 가면 깜짝 놀랄까 봐… 그냥 멀리서 지켜봤어요… 아니, 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번에는 한별이 지훈을 멍하니 쳐다봤다. 담요? 자신에게? 멀리서? 그녀의 뇌 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그녀의 눈에는 지훈의 능글맞은 얼굴 위로, 왠지 모르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훔쳐보는 강아지 한 마리가 겹쳐 보였다.

    “최지훈! 당신 지금…!”

    “한별 씨도 지금… 제 머리 위로… 아기고양이 환영이…!” 지훈은 손가락으로 한별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둘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서로를 노려봤다.
    화물칸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유물은 여전히 ‘웅-‘ 하고 낮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만 보이는 기묘한 환영과,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속마음이 그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게… 대체… 무슨…” 한별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 제 머릿속이… 마구잡이로… 아무 말이나…!” 지훈도 말을 더듬었다.

    그때였다. 격리구역 문이 다시 철컥 열렸다.
    강태식 선장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둘이서 대체 뭘 그렇게 고양이니 개니 하면서 싸우는 거야? 유물이 폭주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한별, 지훈, 괜찮은 건가?”

    선장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유물의 진동이 한순간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별과 지훈은 서로의 머리 위에서 보이던 기묘한 환영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 선장님!” 한별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선… 선장님, 제가 지금… 저… 저한테… 아기고양이 같은 이미지가…!” 지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선장은 두 사람의 표정을 번갈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양이? 아기고양이? 둘 다 피곤한가 보군. 어서 나와서 휴식해라. 그 유물은 잠시 밀봉해두고.”

    “아, 안 됩니다! 지금 작동 기미를 보였는데 어떻게 밀봉만 한단 말입니까!” 한별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선장은 단호한 눈빛으로 한별을 바라봤다. “한별, 네게 휴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훈, 너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과학적 분석 이전에, 심리적 안정이 필요해 보이는군.”

    선장의 말에 한별과 지훈은 서로를 힐끗 쳐다봤다.
    한별의 뇌리에는, ‘젠장, 이제 저 인간이 내 마음속까지 다 아는 거 아니야? 아니, 아는 정도가 아니라 떠들어버렸잖아?!’
    지훈의 뇌리에는, ‘이런, 한별 씨가 내게 설탕인간이라고 생각했다니! 아니 그보다, 내 어깨가 괜찮았다고?! 대박!’

    두 사람의 얼굴은 더욱 새빨개졌다.
    강태식 선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둘이 동시에 얼굴이 빨개지는 건 또 처음 보는데. 혹시 둘이… 뭔가… 있는 건 아니지?”

    “아, 아닙니다!”
    “말도 안 됩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격리구역에 울려 퍼졌다.
    유물은 다시 ‘웅-‘ 하는 낮은 진동음을 내며, 그들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비웃는 듯했다.

  • 오컬트 호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밤의 심장, 내 그림자**

    지우는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었다. 정확히는 낯설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여전히 온전히 익숙해지지는 않는 곳이었다. 카이의 침실. 차가운 벽돌과 짙은 마호가니 가구가 어우러진, 고풍스럽고도 기묘하게 비어 있는 공간. 창밖으로는 해가 뜨지 않는 밤이 계속되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려 손을 뻗었지만, 손목 위는 텅 비어 있었다.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곳에서는 무의미한 듯했다. 카이가 옆에 없다는 사실만이 명확했다. 그의 온기 대신, 희미하게 감도는 흙과 오래된 나무, 그리고 비릿한 철의 냄새가 이 방에 가득했다. 그의 냄새. 지우는 이 냄새가 이제는 자신의 일부인 양 익숙해져 버린 스스로가 섬뜩했다.

    “카이…?”

    작게 중얼거렸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보가 피부에 닿는 감촉이 얼음장 같았다. 어젯밤, 아니, 언제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그 밤의 기억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그의 차가운 입술, 지독하리만치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등골을 타고 흐르던 쾌락과 공포의 기묘한 조화. 그는 언제나 지우를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곳으로.

    방문을 열고 나섰다. 복도는 칠흑 같았다. 이 집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빛조차 삼켜버리는 어둠. 지우는 손을 뻗어 벽을 더듬었다. 차가운 석벽의 감촉이 손끝에 와 닿았다. 발소리조차 흡수하는 듯한 고요함. 그녀는 자신이 이 어둠 속에서 점차 길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카이를 만난 순간부터.

    “지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심장이 발끝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소리 없이, 기척 없이. 몸을 돌리자, 희미한 달빛조차 들지 않는 복도 끝에 카이가 서 있었다. 그의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밤의 심장처럼.

    “놀랐니.”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낮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 속에는 칼날 같은 차가움이 숨어 있었다.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어디 있었어? 또… 사라졌었어?”

    그녀의 질문에 카이는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는 언제나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그녀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미소라기보다는, 덫을 놓는 맹수의 그것에 가까웠다.

    “잠시 바깥을 둘러보고 왔을 뿐이야. 이곳은 밤이 길거든.”

    그의 말에 지우는 창백하게 질렸다. ‘이곳’이란 단어. 이곳은 과연 어디인가. 그녀는 이곳이 어떤 특정 장소가 아니라, 카이의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의 세상. 인간의 시간과 공간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나… 나 이제 집에 가야 해.”

    지우의 목소리는 간신히 나왔다.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적인 충동이 그녀를 휩쓸었다. 일, 친구들, 가족… 잊고 있었던 모든 것이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카이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어둠을 길게 늘이며 지우를 집어삼킬 듯했다. 그의 발걸음은 소리 없이, 유령처럼 움직였다.

    “집? 네 집은 이제 여기가 아니었나?”

    그의 질문에 지우는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았다. 차가운 벽돌이 그녀의 피부를 얼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나는 내 세상이 있어. 너도 알아. 나는…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평범한 사람?” 카이의 눈동자가 더욱 붉게 빛났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곳에 발을 들일 수조차 없었겠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내 손길에 재가 되어 사라졌을 테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내 이름을 알지도 못했을 거야, 지우.”

    그의 말이 송곳처럼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는 옳았다. 카이를 만난 이후로, 그녀의 세상은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평범한 일상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의 세상만이, 이 어둠과 금기로 가득 찬 세계만이 현실처럼 다가왔다.

    카이가 지우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그녀의 턱선을 스쳤다. 얼음장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는 듯한 감촉.

    “너는 특별해, 지우. 아주 오래전부터, 너와 나는 붉은 실로 묶여 있었지. 너의 종족이 나를 ‘이름 없는 존재’라 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름 없는 존재.’ 지우의 머릿속에 섬뜩한 단어가 메아리쳤다. 그녀는 오래된 전설을 떠올렸다. 그림자 속에 숨어 밤을 걷는 존재들. 인간의 영혼을 탐하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이들. 그녀는 설마 하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네… 네가 설마….”

    “설마?” 카이가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그의 입꼬리가 길게 호를 그렸다. “나는 너의 밤이 되고, 너의 그림자가 되고, 너의 가장 깊은 욕망이 되었어. 그리고 이제, 너는 나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말과 함께, 방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바닥이 울리고, 벽이 진동하는 것 같았다. 지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려웠다. 그의 진정한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떠밀려 가는 것이.

    그때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 그리고 이 집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 마치 쇠붙이가 부딪히고, 거대한 돌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였다. 카이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고, 그 속에서 맹수의 잔혹함이 번뜩였다.

    “찾아왔군.”

    그의 목소리는 속삭임이었지만, 그 어떤 천둥소리보다도 강렬하게 지우의 귓가를 때렸다.

    “누가? 누가 찾아왔다는 거야?”

    지우가 공포에 질려 물었다. 카이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너를 탐하는 자들. 내가 너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이 균열은 시작되었어. 그리고 이제, 그들은 너를 앗아가려 할 것이다.”

    균열. 그의 말에 지우는 자신이 서 있는 땅이 갈라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균열 속으로 그녀의 평범한 삶이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내가 너와 함께 있는 한, 그들은 결코 너를 얻지 못해. 하지만….”

    카이의 눈동자가 깊은 심연으로 변하는 것을 지우는 똑똑히 보았다. 검은 안개가 그의 주변을 휘감았다.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는, 나조차도 장담할 수 없지.”

    그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거대한 충격파가 집 안을 덮쳤다. 지우는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지만, 카이가 그녀를 단단히 붙잡았다. 복도 끝에서 섬뜩한 기운이 밀려왔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것이 이 집의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숨어, 지우.”

    카이가 그녀를 밀어냈다. 그녀의 등 뒤로 차가운 벽이 느껴졌다. 벽장처럼 보이는 어둠 속으로 그녀를 밀어 넣는 그의 손길에서, 처음으로 필사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카이… 너는…?”

    “나는 나의 방식대로 그들을 맞이할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형체가 없는 검은 덩어리들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그 그림자들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핏빛 눈동자들. 카이는 지우를 밀어 넣은 채, 자신의 몸을 돌려 그 그림자들을 마주했다.

    “잊지 마, 지우. 너는 이제 나의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벽장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지우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혔다. 문틈으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싸늘한 빛.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울부짖음과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지우는 벽에 몸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밖에서는, 그녀의 연인을 차지하려는 ‘이름 없는 존재’들과, 그녀의 연인이자 ‘이름 없는 존재’인 카이의 피 튀기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카이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_너는 이제 나의 것이다._

    그것은 약속이었을까, 아니면 경고였을까.
    그리고 이 금지된 사랑의 대가는… 대체 무엇일까.
    지우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 안에서, 카이가 남긴 알 수 없는 온기가 차가운 공포와 뒤섞여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카이의 그림자였다.
    그리고 그림자는, 빛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세상은 완전한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머리 위 헤드램프가 뿜어내는 희미한 불빛은 거대한 공간의 깊이를 다 보여주지 못했다. 수십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천장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빗물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액체인지 모를 물방울들이 뚝, 뚝, 규칙적인 박자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 소리가 너무나 선명해서, 우리는 마치 거대한 생명체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이게… 그들이 말하던 ‘심장부’인가?”

    내 목소리는 예상보다 더 갈라져 나왔다. 세라는 내 옆에서 낡은 데이터 패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긴장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패드 화면에는 알 수 없는 파동 그래프가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가 지난 몇 주간 목숨을 걸고 찾아 헤매던, 고대 유적의 가장 깊숙한 곳.

    “에너지 반응이 미쳤어, 강민. 단순한 지하 발전소가 아니야.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아.”

    세라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소형 탐지기가 일정한 리듬으로 경고음을 내뱉고 있었다. 우리가 발을 디딘 곳은 매끄럽고 어두운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원형 공간이었다. 벽면에는 기괴한 문양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는데, 지구상의 어떤 문명에서도 본 적 없는 형상들이었다. 마치 태고적부터 존재해 온 거대한 거미줄 같기도, 아니면 우주의 별자리 같기도 한 형상들이었다.

    “여기서 뭘 찾는 거지?”

    내가 다시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다만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불확실성과 침묵뿐이었다. 우리가 가진 정보라고는 파편화된 기록 몇 조각과 불안정한 추측뿐이었다. 고대인들은 이곳에 ‘세상의 모든 지식’을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파멸의 씨앗’ 또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때, 세라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은 중앙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나 역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우리의 헤드램프 불빛이 겨우 닿는 곳, 공간의 정중앙에 거대한 구조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다이아몬드를 깎아 만든 것 같은 육각형 기둥이었다. 기둥의 표면은 검고 매끄러웠으며, 그 안에서는 희미한 푸른빛이 맥동하고 있었다.

    “저거… 분명히 작동 중이야.”

    세라의 목소리에는 경외심과 함께 미약한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기둥으로 다가갔다. 발소리가 울림 없이 흡수되는 느낌이었다. 육각형 기둥의 높이는 대략 3미터 정도.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위치에 작은 패널이 돌출되어 있었다. 패널에는 또 다른 기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터치스크린 같네. 하지만… 이건 우리가 아는 어떤 언어도 아니야.”

    내가 말했다. 세라는 패널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가락이 표면에 닿자, 기둥 전체에서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동시에, 벽면의 기괴한 문양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푸른 선들이 거미줄처럼 뻗어나가며 공간을 채웠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갑작스러운 굉음이 지하 공간을 뒤흔들었다. 우리는 놀라 움찔했다.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나는 재빨리 어깨에 맨 소총을 고쳐 잡았다. 세라는 탐지기를 움켜쥐고 주위를 경계했다. 굉음은 기둥이 아니라,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 쪽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강민, 뭔가 오고 있어!”

    세라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굉음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음이 아니었다. 거대한 짐승의 포효 같기도, 아니면 오래된 강철이 마모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저 기둥, 뭐라도 해봐! 이걸 작동시켜야 해!”

    나는 외쳤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였다. 이 기둥을 활성화시켜서, 고대 문명의 비밀을 해독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세라는 다시 패널에 집중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빛나는 문양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뛰어난 해독가였다. 과거의 데이터를 복원하고, 고대 시스템을 해킹하는 데 능숙했다.

    “시도하고 있어! 하지만… 이건 너무 복잡해. 방어 시스템인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구 쪽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괴하게 뒤틀린 육체를 가진, 기계와 생물이 뒤섞인 듯한 존재였다. 여섯 개의 다리,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빛나는 붉은 눈. 놈의 몸체에서는 썩은 금속과 피비린내가 동시에 풍겨져 나왔다.

    “젠장! 유적 수호자!”

    세라가 비명을 질렀다. 놈은 우리를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육중한 몸체가 바닥을 울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따다다당! 섬광과 함께 탄환이 놈의 몸체를 강타했다. 하지만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격노한 듯 더욱 속도를 높였다.

    “소용없어! 놈은 이 유적의 방어벽만큼이나 단단하다고!”

    세라가 절규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패널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푸른빛이 기둥을 휘감으며 더욱 강렬해졌다. 나는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놈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놈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놈의 발톱이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찢어발겼다. 금속 바닥에 깊은 흠집이 생겼다. 그 순간, 세라의 외침이 들려왔다.

    “강민! 됐어! 접속 성공!”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육각형 기둥 전체에서 눈부신 백색광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푸른 문양들이 미친 듯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놈의 움직임이 멈췄다. 붉은 눈은 여전히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육중한 몸체는 마치 정지된 사진처럼 굳어 있었다.

    우리는 놈의 갑작스러운 정지에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곧, 우리는 진정한 경악에 빠져들었다.

    기둥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광은 단순히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영상이었다. 허공에 거대한 홀로그램 지도가 펼쳐졌다. 지도는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황폐해진 지상이 아닌, 번성했던 과거의 도시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수많은 점으로 표시된 지하 유적들의 네트워크가 있었다.

    “이게… 뭐야…?”

    세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도는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했던 유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의 지하 도시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가 있는 이 ‘심장부’가 거대한 신경망처럼 모든 것을 연결하고 있었다.

    그때, 백색광 속에서 고대 문자의 흐름이 시작되었다. 번역기가 자동으로 가동되며 의미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경고… 파멸은 이미 시작되었노라. 생존자들은 지하 도시로 대피하라…』

    문장은 섬뜩하게 이어졌다. 우리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지상 세계는 오염되었다. 인류는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지식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깨어난 자는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홀로그램 중앙에 거대한 글자로 새겨졌다. 그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잊혀진 과거로부터 온, 뼈아픈 진실의 선언이었다.

    『너희는 우리의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그 순간, 거대한 육각형 기둥에서 섬광이 번쩍이더니, 우리가 서 있는 바닥 전체가 마치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굳어 있던 유적 수호자가, 붉은 눈을 더욱 섬뜩하게 빛내며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놈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과 함께, 검붉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우리는 거대한 진실 앞에서, 그리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압도적인 위협 앞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 유적은 단순히 지식을 보관한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재앙의 시작점이었고, 동시에 끝나지 않는 지옥의 문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 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천하의 기운이 스러지고 있었다. 수백 년 전만 해도 영롱하게 빛나던 산천의 정기(精氣)가 점차 희미해졌고, 강호의 무인들 사이에서는 내공이 더 이상 진전되지 않거나 심지어 역행한다는 괴담이 돌기 시작했다. 대지는 메말라가고 하늘에는 영묘한 빛 대신 탁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고, 각 문파의 장문인들은 밤낮으로 비술을 연구하며 해결책을 찾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절망뿐이었다.

    그렇게 암울한 세월이 이어지던 어느 날, 모든 강호의 심장을 울리는 하나의 선포가 내려졌다.

    “천하의 정기가 고갈되고, 고대의 봉인이 흔들리며 마(魔)의 기운이 솟구치려 한다. 이는 선계의 예언서에 기록된 대혼돈의 서막이니, 오직 ‘운명의 봉황비무제(鳳凰比武祭)’에서 천하를 구할 단 한 명의 무인을 찾아야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동시에 발출한 그 선포는 천산(天山)의 최고봉, 운해봉(雲海峰)에서 발원하여 삽시간에 팔황(八荒)에 퍼져나갔다. 봉황비무제. 죽어가는 세계의 정기를 다시 불태울 ‘봉황의 불꽃’을 찾기 위한 마지막 희망이자, 천하의 운명을 건 거대한 시험대였다.

    천하 각지에서 무인들이 운해봉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명성을 좇는 자들이 아니었다. 강호의 존망이 자신들의 어깨에 달렸음을 직감한, 진정으로 대의를 품은 고수들이었다.

    그들 중 하나, 류진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낡고 해진 도포 차림에, 허리에는 이름 없는 무쇠검이 매달려 있었다. 그의 외모는 여느 방랑 무사와 다를 바 없었으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과 단단히 다져진 몸에서는 쉬이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는 강호에 알려진 명문 문파의 인물도 아니었고, 젊은 혈기로 똘똘 뭉친 패기 넘치는 신진 고수도 아니었다. 그저 그림자처럼 조용히 세상을 떠돌던 존재였다.

    운해봉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수십 리 밖에서부터 영기(靈氣)가 희박해지고, 심지어 독기 어린 안개가 산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발걸음을 돌렸을 법한 길이었으나, 류진은 흐트러짐 없이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 아래, 독기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류진은 그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희뿌연 안개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거대한 봉우리가 마치 자신을 기다리는 거대한 맹수처럼 느껴졌다.

    며칠 밤낮을 걸어 운해봉 입구에 다다랐을 때, 이미 수많은 무인들이 운집해 있었다. 각 문파의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서로의 위세를 자랑했고, 수려한 의복을 입은 명문정파의 고수들과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사파의 기인들이 뒤섞여 장관을 이루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결의가 교차했고, 간간이 흘러나오는 강렬한 내공의 파동이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허, 저 자는 태산파의 현무진인 아니던가? 벌써 도착했군.”
    “저기 보이는 이는 화산파의 매화검선, 그녀 또한 이번 비무제에 참여하는구나!”
    “아니, 마교의 혈마검객도 보이다니… 정말 모든 고수들이 모였군.”

    소란스러운 웅성거림 속에서 류진은 한 켠에 서서 조용히 그들을 관찰했다. 모두가 일가를 이룬 고수들이었고, 그들의 기운은 하나같이 강렬했다. 그러나 류진의 눈에는 그 강렬함 속에 숨겨진 불안과 조급함이 보였다. 천하의 운명이라는 무거운 짐이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저 멀리 봉우리 정상에서 한 줄기 빛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메말라가던 정기를 일시적으로 끌어올리는 듯한 영묘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빛이 솟아오름과 동시에, 구대문파의 수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운해봉 정상에 자리한 거대한 연무장, ‘봉황대(鳳凰臺)’ 앞에 서 있었다. 봉황대는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신비로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중앙에 선 도사 복색의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이가 무색하게도 청명하고 우렁차, 운집한 모든 무인들의 귓가에 선명히 박혔다.

    “천하의 무인들이여, 그대들 모두의 발걸음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우리의 시대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이 봉황비무제는 마지막 희망이자 시련이 될 것이다.”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무인들은 고개를 숙이거나, 비장한 표정으로 굳게 입을 다물었다.

    “고대의 예언에 따르면, 봉황의 불꽃은 오직 진정한 천하제일인에게서만 타오를 것이며, 그 불꽃은 스러져가는 세계의 정기를 다시 깨울 힘을 지녔다고 한다. 허나 그 힘은 또한 대가(代價)를 요구할 것이니, 이 자리에 모인 그대들 모두는 오직 천하를 위한 대의에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비장한 선포에 이어, 봉황대 주변을 감싸던 거대한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무인들 사이에서는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고, 어떤 이는 흥분한 듯 주먹을 꽉 쥐었고, 어떤 이는 깊은 회의감에 잠긴 듯 고개를 떨구었다. 류진은 그 모든 것을 조용히 응시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서려 있었으나, 동시에 복잡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순간, 봉황대 위에서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웅장하고 깊은 소리는 운해봉 전체를 진동시켰고, 하늘을 덮었던 구름마저 흩어지게 만들었다.

    **”운명의 봉황비무제,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다!”**

    노인의 마지막 외침과 함께, 운해봉의 정기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인들의 심장은 격렬하게 고동쳤고, 천하의 운명이 걸린 거대한 서막이 드디어 열렸다. 류진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그의 그림자가 봉황대를 향해 길게 드리워졌다.

  • 스페이스 오페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거대한 은하 연합의 심장부, 아홉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오르는 행성 ‘영겁성’의 상공에 자리한 초거대 구조물, ‘천공 비무대’는 그 이름만큼이나 웅장했다. 끝을 알 수 없는 돔 지붕은 투명한 나노 결정으로 이루어져, 경기장 내부에서만 온 우주의 별들이 쏟아지는 장관을 연출했다. 수억, 아니 수십억의 생명체가 홀로그램 중계 화면에 매달려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였다. 바로, 은하계의 운명을 결정할 ‘성검 비무대회’의 준결승전을 위해서.

    그 중앙의 원형 경기장, 대지의 기운과 별의 정기가 얽혀 태극 문양을 새긴 단상 위에 두 명의 인영이 마주 서 있었다. 한 명은 낡고 빛바랜 도포를 걸친 젊은 무인이었다. 그의 검은 머리칼은 바람 한 점 없는 경기장 안에서도 미세하게 흔들렸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에는 고요한 호수 같은 평온함이 감돌았다. 그의 이름은 강휘. 그 어떤 문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오직 자신의 길을 걷는 자유로운 무인이었다. 그를 아는 이는 극소수였지만, 그 극소수는 강휘의 무가 단순한 인간의 영역을 초월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마치 다른 차원에서 온 듯한 존재가 서 있었다. 번쩍이는 크롬 합금과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전투복. 그 위로 은하계를 형상화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얼굴의 절반을 가린 투명한 바이저 아래로 섬뜩하게 빛나는 붉은 눈이 드러났다. 그의 이름은 제이안. 은하 연합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는 ‘흑성룡 기사단’의 현 단장이자, ‘흑성룡의 후예’라 불리는 사이보그 무림인이었다. 그의 몸은 첨단 기술과 수십 세대에 걸친 무술의 정수가 결합된 완벽한 병기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관중석에서는 수백 년 만에 찾아온 진정한 ‘천하제일 무도대회’의 전율이 터져 나올 듯했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청아한 전자음이 울려 퍼지자마자, 제이안의 발밑에 펼쳐진 태극 문양이 거세게 진동했다. 그는 마치 시공간을 압축한 듯한 속도로 강휘에게 돌진했다. 그의 움직임은 기계적인 정확성과 무인의 예측 불가능성이 절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오른팔에 장착된 크롬 건틀릿에서 푸른색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초고밀도로 응축된 에너지 장풍이었다.

    “초신성 파동권!”

    제이안의 포효와 함께 푸른 파동이 거대한 뱀처럼 강휘를 향해 쇄도했다. 파동이 지나간 자리에는 경기장 바닥이 녹아내리는 듯한 흔적이 남았다.

    강휘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 자리에 섰다. 그는 피하지도, 막으려 들지도 않았다. 대신 그의 몸에서 은은한 백색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내공의 극에 달한 자만이 펼칠 수 있는 ‘호신강기’였다. 파동권이 강휘의 몸에 닿는 순간, 거대한 충격파가 경기장 전체를 흔들었다. 하지만 강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호신강기는 푸른 파동을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흡수하며, 동시에 그 에너지를 자신을 중심으로 한 원형의 기장으로 역류시켰다.

    “흐음… 제법이군.”

    제이안의 붉은 눈동자가 순간 움찔했다. 강휘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흑성룡 기사단의 수많은 인공지능 시뮬레이션에서도 이렇게 정면으로 파동권을 흡수하는 무형의 방어는 계산된 적이 없었다.

    강휘는 흡수한 에너지를 이용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거대한 푸른 기의 파동이 역으로 제이안에게 쏘아져 나갔다. 제이안은 당황하지 않고 자세를 낮추며 전광석화처럼 회피했다. 푸른 파동은 그가 서 있던 단상 한구석을 정확히 강타했고, 육중한 나노 합금으로 만들어진 바닥은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깊은 균열을 만들었다.

    “이것이… ‘만상귀진공(萬象歸眞功)’인가? 모든 기를 받아들여, 모든 기를 돌려주는?” 제이안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경계심이 스며들어 있었다. “과연, 그 어떤 첨단 무기나 기술도 통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허언은 아니었군.”

    강휘는 말없이 제이안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한계가 있을 터. 내 기술은 우주의 근원적인 힘을 모방한다. 네 몸의 강기는 이 우주의 무한한 힘을 모두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제이안은 거대한 비행선이 착륙하듯 경기장 상공으로 솟아올랐다. 그의 전투복 곳곳에서 작은 추진기가 불을 뿜으며 그의 몸을 허공에 안정시켰다. 이내 그의 두 손이 하늘로 향했다. 그러자 경기장 전체가 어두워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홀로그램으로 연출된 별들이 흔들리고, 관중석의 중계 화면에서도 잡음이 일었다.

    “받아라, 강휘! 흑성룡 기사단의 궁극 오의! ‘초신성 폭렬권(超新星爆裂拳)’!”

    제이안의 두 손바닥 사이에서 검고 붉은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마치 작은 블랙홀이 생성되는 것처럼 주위의 빛과 기운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공이 아니었다. 나노 기술로 증폭된 제이안의 내공이 시공간 자체를 왜곡시키고 있었다. 관중들은 비명을 지르며 본능적인 공포에 사로잡혔다. 저 공격이 단상에 닿는다면, 영겁성 전체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강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더 이상 고요하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백색 강기는 점차 희미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대신, 강휘의 몸 전체에서 은하수를 닮은 푸른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강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우주 자체를 담고 있는 듯한 신비로운 빛이었다.

    강휘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펼쳐, 마치 하늘의 별을 헤아리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주변의 시공간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했다.

    “우주가 곧 내 몸이고, 내 몸이 곧 우주이다. 만물은 하나이며, 하나는 만물로 돌아간다.”

    강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림 없는 경기장 안에 퍼져나갔다. 그의 손바닥 위로 작은 빛의 구슬이 생성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의 탄생과 소멸을 담고 있는 듯한, 거대한 에너지가 응축된 결정체였다. 빛의 구슬은 점점 커져갔고, 그 안에는 수억 개의 별들이 반짝이는 듯한 환영이 깃들어 있었다.

    “이것이… 나의 길. ‘혼원일도(混元一道)’의 극의.”

    제이안의 ‘초신성 폭렬권’과 강휘의 ‘혼원일도’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쿠아아아아앙!

    귀를 찢을 듯한 폭발음이 천공 비무대를 강타했다. 경기장 전체를 감싸고 있던 나노 결정 돔이 뿌리째 흔들렸고, 관중석의 방어막 시스템이 최대치로 가동되며 비명을 질렀다. 검붉은 에너지와 은하수를 닮은 빛이 뒤섞이며 거대한 빛의 기둥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우주가 태어나고 소멸하는 광경과 같았다.

    빛의 폭풍이 잦아들자, 경기장 중앙에는 거대한 분화구가 생겨 있었다. 바닥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아내렸고, 공기는 뜨거운 열기로 일렁였다.

    그 모든 혼돈 속에서, 한 인영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낡은 도포 자락은 곳곳이 찢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강휘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제이안이 무릎을 꿇은 채 쓰러져 있었다. 그의 첨단 전투복은 반파되어 있었고, 얼굴을 가렸던 바이저는 산산조각 나 있었다. 붉게 빛나던 그의 눈은 꺼져 있었고, 기계 팔 곳곳에서는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크윽… 크크… 믿을 수 없어… 우주의 근원적인 힘을 모방한 나의 오의가… 단신으로… 흡수되고… 파괴될 줄이야…”

    제이안은 억지로 고개를 들어 강휘를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망과 함께 깊은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강휘는 천천히 제이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의 손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흘러나오며 제이안의 파괴된 전투복과 상처 입은 몸을 어루만졌다. 기계 팔의 스파크가 잦아들고, 파괴되었던 회로들이 재생되는 듯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싸움은… 끝났다.”

    강휘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승자의 오만함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깊은 울림이 있었다.

    이변이었다. 은하 연합 최강의 무력 집단인 흑성룡 기사단의 단장, 제이안이 무명의 젊은 무인에게 패배한 것이다. 천공 비무대는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가, 이내 거대한 함성으로 뒤덮였다. 승패를 떠나, 방금 목격한 무의 경지는 모든 이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홀로그램 화면에는 강휘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그의 눈은 다시 고요한 호수처럼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우주의 모든 비밀을 담고 있는 듯한, 깊이를 알 수 없는 광활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결승뿐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은하계의 운명을 건 진정한 승리가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