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서울의 심장은 여전히 잠들지 않고 번뜩이는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비는 차가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며 도시의 소음을 희미하게 덮었다. 그러나 그 소음마저 뚫고 들어오는, 섬뜩하리만치 조용한 공간이 있었다.
류은호는 손목시계를 한 번 흘끗 보고는 코트 깃을 올렸다. 비를 막아주기엔 역부족인 얇은 천이었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체온보다도 시선이었다. 번잡한 현장 경찰들의 움직임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항상 본질을 꿰뚫으려 애썼다.
“류 박사님, 오셨습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박형사였다. 굵은 목소리, 피곤에 절어 축 처진 어깨. 언제나 이 남자는 현장의 무게를 온몸으로 짊어지는 듯했다.
“박형사님, 표정이 좋지 않으시군요.”
은호의 담담한 말에 박형사는 한숨을 쉬었다.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 빌어먹을 사건 때문에… 아, 안내하겠습니다. 현장은 이쪽입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강남의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펜트하우스였다. 층고가 높고 유리창이 전면을 감싼 거실은 한눈에 봐도 엄청난 재력이 투입된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공간은 죽음의 그림자에 덮여 있었다.
“피해자는 강태산 씨입니다. 나이는 오십대 중반. 이곳의 실소유주이자… 음, 특정 분야에서는 꽤나 유명한 수집가죠.”
특정 분야. 은호는 그 말의 의미를 대충 짐작했다. 일반적인 골동품이나 미술품이 아닐 터였다. 그의 시선이 거실 한쪽 벽에 걸린, 기묘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탈들을 스쳤다.
“사망 시각은 오늘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인은… 외부 상처는 전혀 없습니다. 부검 결과가 나와봐야 정확하겠지만, 내출혈이 심했습니다. 마치 온몸의 혈관이 한꺼번에 터져버린 것처럼요.”
박형사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졌다.
“가장 큰 문제는 밀실이라는 겁니다.”
은호는 대답 대신 거실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닥에는 선명하게 흰색 라인이 그어져 있었다. 그 안에는 고급스러운 안락의자에 기댄 채 싸늘하게 식어버린 강태산의 시신이 있었다. 눈은 감겨 있었고, 얼굴에는 고통의 흔적이 없었다. 마치 잠들 듯이.
그의 시선이 실내를 천천히 훑었다. 유리창은 모두 특수 강화 처리되어 있었고, 잠금장치는 육안으로 봐도 견고했다. 통유리창 아래쪽에는 ‘완벽 밀봉’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작은 금속 패널이 박혀 있었다.
“모든 창문은 안에서만 열 수 있는 특수 잠금장치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외부 침입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현관문은… 생체 인식, 비밀번호, 그리고 다섯 개의 물리적 잠금장치로 되어 있습니다. CCTV 기록을 아무리 돌려봐도, 오늘 새벽은 물론이고 어제 오후부터 지금까지 강태산 씨 외에 누구도 이 아파트에 드나든 기록이 없습니다. 도어록 기록도 마찬가지고요. 완벽한 밀실입니다.”
박형사의 말대로였다. 벽에 달린 스마트 패널에는 ‘보안 시스템: 모든 구역 정상 작동’이라는 녹색 불빛이 선명했다. 현관문 옆에 설치된 수십 개의 작은 렌즈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감시탑처럼 보였다.
은호는 시신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주변 공간의 색채가 잠시 뒤틀리는 듯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사건의 ‘잔상’이 그의 시야에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강태산의 몸에서는 희미하게 파동이 느껴졌다. 불규칙하고 맹렬한 파동. 마치 심해의 거대한 압력이 내부에서 폭발한 것 같은 에너지의 흔적이었다. 그것은 어떤 마법적인 공격에 의해 발생한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공격자가 없는 밀실에서?
그의 시선은 시신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인 물건으로 향했다.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진 듯한, 손잡이에 붉은 보석이 박힌 단검. 날은 흑요석처럼 새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그 단검에서도 희미한 파동이 느껴졌지만, 시신에서 느껴지는 파동과는 종류가 달랐다. 단검은 ‘축적된’ 에너지였고, 시신은 ‘분출된’ 에너지였다. 단검은 살인 도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단검은 뭡니까?” 은호가 물었다.
“피해자의 수집품 중 하나입니다. 워낙 희귀하고 가치가 높다고 해서… 경찰 감식반이 조심스럽게 다뤘습니다. 지문은 오직 강태산 씨 것만 나왔고요.”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은호가 말했다.
박형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은호의 말을 따랐다. 은호는 단검 주변의 공간에서 미세한 떨림을 감지했다. 그것은 일종의 ‘방어막’이었다. 강력한 방어 마법이 이 단검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강태산은 이 단검을 자신의 호신용으로 사용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방어막은 무력했다. 아니, 무력해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발동되지 못한 것 같았다.
은호는 시신을 중심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시야에 비치는 잔상들은 혼란스러웠다. 공격의 파동은 존재했지만, 공격자의 ‘형체’는 없었다. 마치 유령이 지나간 흔적 같았다.
“현관문 외부 CCTV는 전부 확인했습니까?” 은호가 물었다.
“네, 맹점 하나 없이 전부요. 아무도 찍히지 않았습니다.”
“엘리베이터도요?”
“마찬가지입니다. 피해자 외에 이 층으로 올라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은호는 거실 한쪽 벽에 걸린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대형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거울은 고풍스러운 장식이 둘러져 있었지만, 표면은 현대의 기술로 만들어진 듯 매끄러웠다. 거울 주변에서 미세한 에너지의 떨림이 감지되었다. 다른 물건들과는 다른, 뭔가 ‘열려있는’ 듯한 느낌.
“이 거울은… 보통 거울이 아니군요.” 은호가 중얼거렸다.
박형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그냥 비싼 장식품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뭔가를 감지하신 겁니까?”
은호는 거울 표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었다. 그의 손끝에서 미세한 푸른빛이 일렁였다.
“이곳은 일종의… 통로였군요.”
박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통로라뇨? 어디로 가는 통로 말입니까?”
“정확히는 ‘문’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 문은 한쪽 방향으로만 열리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만.”
은호는 다시 시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동의 혼란이 조금씩 정리되는 듯했다.
“강태산 씨는 자신의 아파트가 완벽한 밀실이라고 믿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외부로부터 침입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내부’로부터의 침입은 어떨까요?”
박형사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내부라니요? 강태산 씨 외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그랬겠죠. 하지만 모든 존재가 물리적인 형태를 띠는 건 아닙니다. 특히 이런 종류의 물건들을 다루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이죠.” 은호의 시선이 다시 기묘한 탈들을 스쳤다.
“범인은 이 문을 통해 침입했습니다. 아니, 침입했다고 표현하는 건 정확하지 않겠군요. 그는 자신의 ‘잔영’을 이 문 너머로 보냈습니다.”
“잔영이요? 유령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박형사는 코웃음을 쳤다.
“단순한 유령이 아닙니다. 일종의 ‘사념체’나 ‘에테르체’에 가깝습니다. 특정한 매개체를 통해서만 활동할 수 있는. 그리고 강태산 씨는 그 매개체를 제공했습니다.”
은호는 탁자 위의 단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단검은 강력한 방어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발동되지 못했죠. 왜일까요? 강태산 씨는 저 단검의 효능을 믿었을 텐데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범인은 강태산 씨가 가진 방어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어구가 무력화되는 순간을 노렸죠. 그 순간은… 단검이 그 효능을 발휘하기 ‘직전’이었을 겁니다.”
은호는 시신의 손목 부근을 유심히 살폈다. 왼쪽 손목에 작은 붉은 점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흔적.
“이 흔적은… 일종의 ‘표식’입니다. 일종의 마법적인 트리거죠. 이 표식을 활성화하면, 일정 시간 동안 주변의 마법 에너지를 중화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강태산 씨는 저 단검을 발동시키려 했을 겁니다. 하지만 발동되기 직전, 이 표식에 의해 방어 마법이 무력화되었고, 그 틈을 타서… 범인의 잔영이 공격을 가했습니다.”
박형사는 경악했다. “표식을 누가? 대체 어떻게?”
“범인의 잔영은 물리적인 형태는 없지만, 아주 미약하게나마 이 공간에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거울을 통해 들어온 순간, 극대화되었을 거고요. 범인은 강태산 씨가 저 단검을 꺼내 방어하려 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태산 씨가 단검을 만지는 순간, 단검의 마법 에너지가 활성화되려 했을 것이고, 그 에너지의 파동을 감지한 범인의 잔영이 강태산 씨의 손목에 저 표식을 새겨 넣은 겁니다. 순식간에, 저항할 틈도 없이.”
박형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럼 잔영은 어떻게 나간 겁니까? 그리고 거울은?”
“잔영은 애초에 들어오고 나가는 개념이 아닙니다. 매개체에 의해 투사된 그림자 같은 존재니까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순간, 사라집니다. 에너지가 소멸하는 거죠. 그리고 이 거울은 한쪽 방향으로만 열리는 문이라고 말씀드렸죠? 잔영이 이쪽으로 넘어오기 위해 사용된 이후에는, 자동으로 닫힙니다. 안에서 열려고 해도, 외부의 매개체가 없으면 열 수 없습니다.”
은호는 거울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거울 표면에는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완벽한 밀실. 하지만 동시에 완벽한 ‘통로’였다.
“범인은 강태산 씨의 마법 아이템 컬렉션과 그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위협을 느꼈을 때 어떤 방어구를 사용할지도 예측했죠. 게다가 이런 고대 마법적인 지식과 아이템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즉, 이 바닥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박형사는 멍하니 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혼란과 경외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럼… 범인이 누군지 짐작이 가십니까?”
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그어진 흰색 라인을 넘어, 거실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남자를 향했다. 굵은 뿔테안경을 쓴, 조용하고 왜소한 체구의 남자. 강태산의 비서이자, 그의 고대 유물 수집을 돕던 유일한 조력자. 그는 시종일관 침착한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그의 손에서는 미세한 떨림이 감지되었다. 그리고 은호의 시야에는, 그의 주변에서 강태산의 시신에서 보았던 것과 유사한, 그러나 훨씬 희미한 파동의 잔영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 거울을 향해 손을 뻗는 잔영이.
“네. 강태산 씨의 모든 것을 알고, 그가 수집한 물건들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며, 심지어 그에게 표식을 새겨 넣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던 사람. 그리고 이 거울을 통해 잔영을 보낼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사람. 생각보다 범위가 좁아지는군요.”
은호는 그렇게 말하며 현장을 빠져나왔다. 바깥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밀실은 깨졌고, 유령 같았던 범인의 그림자는 이제 분명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은 어둠 속에서 여전히 번뜩였지만, 그 빛마저도 가려진 어둠 속에서 감춰진 진실은 늘 은호의 시선 아래 명확해지곤 했다.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차가운 빗속으로 사라졌다. 또 다른 미스터리를 향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