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Original Stories

  • 무협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찬 바람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뺨을 스쳤다. 단우는 거친 바위 능선을 기어오르며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숨은 이미 목 끝까지 차올라 허파가 터질 것 같았다. 아래로는 아찔한 절벽과 끝없이 펼쳐진 설원. 발아래 자잘한 돌들이 미끄러지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잃을 뻔했다.

    “젠장…!”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보잘것없는 하급 무사인 자신에게 이 설산은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몇 년 전, 문파의 사형들과 함께 영약 채집에 나섰다가 불의의 사고로 홀로 낙오된 뒤, 단우는 이 거대한 설산 속에서 한낱 미물에 불과했다.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언제 덮쳐올지 모르는 맹수들의 위협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늘은 그 기적조차 희미해지는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그의 뒤를 쫓던 그림자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설호(雪虎), 무려 한 장이 넘는 몸길이에 푸른 빛이 감도는 눈을 가진 맹수였다. 녀석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심장을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갑고 강력했다.

    “크으읍…!”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발밑의 바위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단우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수십 길 아래의 심연 속으로 추락했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지만,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추락은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고, 이대로 온몸이 찢겨 죽는 것인가 하는 절망감이 밀려왔다.

    콰아앙!

    얼음이 깨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단우는 차가운 물속으로 처박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온몸의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차가웠지만, 동시에 어딘가에 부딪혀 죽는 것만은 면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간신히 수면 위로 떠올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그곳은 거대한 얼음 동굴이었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감도는 동굴 안은 묘한 신비로움을 풍겼다. 천장과 벽에는 온통 낯선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듯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바닥에는 얼음 결정이 반짝이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여, 여기가 어디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호에게 쫓겨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지만, 이곳은 분명 평범한 동굴이 아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얼음 바닥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울렸다. 동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푸른빛은 더욱 선명해졌고, 공기 중에는 어떤 강력한 기운이 떠다니는 듯했다. 무림인으로서 미약하나마 내공을 익혔던 단우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심상치 않은 힘임을 직감했다.

    동굴의 가장 안쪽, 거대한 얼음 기둥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에 이르자 그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곳에는 기이한 형태의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대 문자들이 새겨진 검은색 암석으로 만들어진 제단 위에는,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희미하게 박동하는 수정 구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구슬은 짙푸른색을 띠고 있었고, 그 안에는 마치 은하수가 갇혀 있는 듯 수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동시에 차가운 얼음 동굴과는 상반되는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단우는 홀린 듯 구슬에 다가갔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는 듯했다.

    “이게… 뭐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구슬을 만졌다. 차가운 얼음 같으면서도 뜨거운 불꽃 같았고, 단단한 바위 같으면서도 부드러운 물결 같았다. 형언할 수 없는 감촉이었다.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단우의 몸을 꿰뚫는 듯했다. 그의 어설픈 내공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하고 원초적인 힘이었다.

    그 순간,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갑자기 폭발하듯 강렬해졌다.

    쉬이이이이익!

    눈을 멀게 할 듯한 빛과 함께 구슬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녹아내린 푸른빛은 단우의 오른손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뜨거웠다. 너무나 뜨거워서 손 전체가 불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뗄 수 없었다. 마치 손이 구슬에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악! 으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푸른빛은 그의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세포 하나하나가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단우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신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꼈다. 내공의 흐름이 뒤틀리고, 뼛속 깊이 스며드는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존재 자체를 재구성하는 듯했다.

    푸른빛은 단우의 오른손바닥에 하나의 문양을 새겨 넣었다. 마치 하늘을 나는 용의 비늘 같기도 하고, 번개가 치는 듯한 형상이기도 한 복잡하고 아름다운 문양이었다. 문양이 완성되자마자 고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전신에 넘쳐흐르는 압도적인 힘과 맑아진 정신, 그리고…

    수많은 이미지와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 잊혔던 고대의 지식, 이 세상의 근원과도 같은 힘에 대한 이해, 그리고… 마법.

    마법? 단우는 혼란스러웠다. 무림에서 마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내공과 심법, 검법과 권법이 있을 뿐.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지식은 분명 ‘마법’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손바닥의 문양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 순간, 동굴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얼음 기둥들이 우르릉거리며 균열이 생겼고, 천장에서 거대한 얼음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제단이 서 있던 바닥에서 거대한 균열이 갈라지며 짙은 어둠이 뿜어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아아!

    심장을 찢는 듯한 포효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것은 설호의 울음소리보다 훨씬 거대하고, 고대의 흉포함이 느껴지는 짐승의 소리였다. 동굴의 벽에 새겨져 있던 문양들이 섬광처럼 빛나더니,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단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신이 방금 깨운 힘이, 이 동굴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웠다는 것을. 그리고 그 깨어난 존재는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오른손바닥의 푸른 문양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는 이제 겨우 살아남았을 뿐인데, 고대의 힘은 새로운 시작이자 동시에 더 큰 재앙의 서막처럼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 추리 미스터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아르카디움 마법 학원.
    이름만 들어도 고고한 마법의 정수가 흐르는 듯한 곳.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흑요석 첨탑과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은 밤이면 푸른색 마법진 빛을 뿜어내며 신비로운 위용을 자랑했다. 마법사 가문의 자제들, 각국의 후원자들이 보내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꿈의 요람.

    그리고 나는, 그 꿈의 요람에 오직 ‘재능’이라는 칼날 하나만으로 비집고 들어온 서은우였다.

    마법이라고는 지팡이를 든 노인이 주문을 외우는 그림책에서나 보던 내가 아르카디움에 입학했을 때, 나는 마치 다른 차원에 던져진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경이로웠고, 모든 것이 압도적이었다. 허나 그 경이로움은 이내 날카로운 자격지심으로 변질되었다. 이 학원에는 은은한 계급이 존재했다. 마법의 대가문에서 태어난 자들은 타고난 우월감과 여유를, 나 같은 장학생들은 매 순간 증명해야 하는 불안감과 날 선 긴장을 안고 살았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마법 역사학 강의 시간, 유독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다. 오래된 마법 문헌들이 가득한 강의실은 늘 곰팡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인 특유의 향을 풍겼다. 교수님은 평소처럼 고대 마법 문명의 흥망성쇠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지만, 학생들의 시선은 온통 한곳에 쏠려 있었다.

    박하율.

    그는 늘 도서관에 파묻혀 살다시피 하는 아이였다. 존재감이 희미할 정도로 조용하고 성실했다. 하지만 몇 주 전부터 하율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밤마다 악몽을 꾼다고 했고, 며칠 전부터는 수업 도중 갑자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차가워… 너무 차가워…”

    하율의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했고, 눈 밑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른 입술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읊조리는 듯 움직였다. 그의 자리 주위로 묘한 냉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시험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고, 아니면 주화 마법 연습을 너무 무리하게 한 게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건 단순히 스트레스나 피로 따위가 아니었다.

    하율의 시선은 늘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때로는 바닥을 뚫어져라 노려보기도 했다. 마치 땅 밑에서 무언가 그를 부르는 소리라도 듣는 것처럼.

    “지하에서… 자꾸만, 자꾸만…”

    갑자기 하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동자는 핏발이 서 있었고, 몸은 경련하듯 떨렸다. 쿵, 하고 의자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강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하율에게 꽂혔다. 교수님의 설명도 뚝 끊겼다.

    “하율 군, 무슨 문제라도 있나?”

    교수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하율은 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팔로 머리를 감싸 안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거기 있어… 저 밑에…”

    그리고는 미친 듯이 웃었다. 섬뜩할 정도로 건조하고 공허한 웃음이었다.

    “으하하하하! 너희는 몰라! 아무도 몰라! 저 밑바닥에 뭐가 잠들어 있는지…!”

    정적이 흘렀다. 웃음소리가 멎자, 학원장이 갑자기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늘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오늘 그의 얼굴에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역력했다. 학원장 뒤로는 두 명의 마법사 교관이 따라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푸른색 마법진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학원장은 하율에게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하율 군, 괜찮아.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구나.”

    그 말과 동시에 교관들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마법진이 하율의 몸을 감쌌다. 하율은 옅은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몸에서 마력이 새어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수면 마법이었다.

    학원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하, 우리 하율 군이 근래 마법 연구에 너무 매진한 모양이군. 잠시 요양을 보내야겠습니다. 다들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는 쓰러진 하율을 교관들에게 맡기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강의실을 나섰다. 그의 얼굴에서는 방금 전의 딱딱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학원장의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하율의 비명과 그 서늘한 웃음은 단순한 과로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학원장이 이 타이밍에 강의실에 나타난 것도 이상했다. 마치 하율이 언제 폭주할지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복도를 걷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내가 향한 곳은 학원 구석에 위치한 낡은 도서관이었다. 일반 학생들이 잘 찾지 않는 폐쇄적인 공간. 층계를 내려가면 마법진으로 굳게 잠긴 철문이 나왔다. 학원 초기부터 금지된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는 ‘지하 서고’의 입구였다.

    “이곳은 학원 개교 이래 접근이 엄격히 금지된 구역입니다. 접근 시 즉각적인 퇴학 조치와 강력한 마법적 처벌이 가해질 수 있습니다.”

    철문 옆에는 경고문이 걸려 있었다. 경고문 너머, 차가운 철문 안쪽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환청일까? 아니면 하율이 말했던 ‘지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나는 손을 뻗어 차가운 철문에 살며시 댔다. 금속의 냉기가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뭔가가 심장을 옥죄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 밀려왔다. 마치 철문 너머에 살아있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하율의 말이 다시 울렸다.

    ‘저 밑바닥에 뭐가 잠들어 있는지…!’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분명 뭔가가 있다. 학원장이 감추고 싶어 하는 무언가가. 그리고 박하율은 그 무언가와 접촉했고, 그 때문에 실려 나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이 이상한 학원에서 ‘어쩌면 나만의 착각’이라고 애써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하율의 진실을, 그리고 아르카디움 마법 학원 지하에 숨겨진 그 끔찍한 금기를 파헤쳐야만 했다.

    나의 손전등이 철문에 가려진 어둠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침묵 속에서, 나는 그 어둠 너머의 비밀을 향해 첫발을 내딛기로 결심했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카인은 녹슨 철골이 앙상하게 드러난 천장을 올려다봤다. 잿빛 세상에 떨어진 지 벌써 몇 달째인지 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손목의 HUD가 깜빡이며 배터리 잔량을 경고했다. 젠장, 또다시.

    인벤토리 창을 열자, ‘정수된 물’은 한 병, ‘건조 식량’은 겨우 두 개. ‘붕대’는 너덜너덜한 한 뭉치뿐이었다. 탄약은? ‘구식 리볼버 탄약’ 다섯 발. 끔찍한 잔고였다. 이 정도로는 오늘 밤을 넘기기도 힘들 텐데.

    그는 ‘세이프 가든’이라는 이름만 거창한, 폐허가 된 도시 외곽의 지하 벙커로 향하는 중이었다. 소문으로는 그곳에 아직 온전한 정수 시설이 남아있다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아니, 잡을 지푸라기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그저 한 줄기 허황된 희망을 좇는 것에 가까웠다.

    낡은 백화점 건물 내부, 깨진 쇼윈도 사이로 희미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발밑에는 유리 조각과 콘크리트 파편들이 밟혔다. 카인은 최대한 소리를 죽여가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끽, 끽. 삐걱이는 소리가 폐허의 정적을 갈랐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저 멀리, 어둠 속에 움직이는 거대한 그림자. 금속 파편과 살점이 뒤섞인 기괴한 형태의 짐승, ‘융합체’였다. 놈의 등에서는 녹슨 철근이 가시처럼 돋아나 있었고, 한쪽 팔은 자동차 엔진처럼 불룩했다. 희미한 붉은 눈이 사방을 훑고 있었다. 놈은 느릿하게 움직였지만, 그 육중한 존재감만으로도 주변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젠장. 이런 곳에서 융합체를 마주치다니. 정면 승부는 무리였다. 탄약도, 체력도 바닥이었다. 카인은 이를 악물고 ‘은신’ 스킬을 발동하며 조심스럽게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스킬 ‘은신(Lv.2)’ 발동. 주변 인지 저하.]

    발소리를 죽이고 벽을 따라 움직였다. 융합체는 느리지만 끈질겼다. 놈의 움직임에 맞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번이라도 들키면 끝장이었다. 놈은 천천히, 마치 먹잇감의 흔적을 쫓는 것처럼 매장 진열대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진열대에 부딪혀 떨어진 유리 조각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카인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애써 진정시키며 출구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겨우 몇 걸음을 옮겼을까.
    갑자기 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킁, 킁. 쇠 냄새와 썩은 내음이 뒤섞인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놈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젠장…!”
    결국 실수하고 말았다. 발밑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밟았다. 쨍그랑!
    융합체의 붉은 눈이 정확히 카인을 향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놈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돌진했다. 바닥의 먼지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피할 곳은 없었다. 카인은 허리춤의 리볼버를 뽑아 들었다. 탕! 탕! 두 발을 놈의 붉은 눈을 향해 쏘았다. 첫 발은 빗나갔지만, 두 번째 발은 놈의 쇠붙이 피부에 박혔다. 끄아아아앙!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놈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분노하며 돌진해왔다.
    몸을 날려 옆에 있던 무너진 진열장 뒤로 숨었다. 꽝! 진열장이 박살 나며 그의 어깨에 날카로운 파편이 박혔다.

    [데미지 5. 출혈 상태 이상 발생.]

    젠장, 젠장, 젠장! 망할. 카인은 인벤토리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섬광탄’을 꺼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핀을 뽑아 놈이 돌진해오는 길목에 던졌다. 콰앙! 눈을 멀게 하는 섬광이 번쩍였다. 융합체가 잠시 주춤하며 끔찍한 고통 소리를 질렀다.

    그 틈을 타 카인은 미친 듯이 달렸다. 붕괴 직전의 에스컬레이터를 두 칸씩 뛰어 올라갔다. 발밑에서 낡은 철골이 비명을 질렀다. 굉음이 연이어 터졌지만, 뒤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구에 다다랐다. 철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발밑에 뭔가 딱딱한 것이 밟혔다.

    카인이 숨을 멈췄다. 그것은 닳고 닳은 가죽 지갑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찢어진 ID 카드와 함께, 낡은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종이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이프 가든은… 함정이다. 북쪽… 광산…”**

    카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유일한 희망, ‘세이프 가든’이 함정이라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쫓던 희망은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북쪽 광산’이라는 곳은 또 어디를 말하는 거지?
    뒤에서 융합체의 끔찍한 포효가 다시 울려 퍼졌다. 놈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소리가 고스란히 귀에 박혔다. 카인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움켜쥐었다.
    선택해야 했다. 희망을 쫓을 것인가, 아니면 이 알 수 없는 경고를 믿고 새로운 위험 속으로 뛰어들 것인가.
    잿빛 세상의 밤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추리 미스터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아르카디움 마법 학원.
    이름만 들어도 고고한 마법의 정수가 흐르는 듯한 곳.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흑요석 첨탑과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은 밤이면 푸른색 마법진 빛을 뿜어내며 신비로운 위용을 자랑했다. 마법사 가문의 자제들, 각국의 후원자들이 보내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꿈의 요람.

    그리고 나는, 그 꿈의 요람에 오직 ‘재능’이라는 칼날 하나만으로 비집고 들어온 서은우였다.

    마법이라고는 지팡이를 든 노인이 주문을 외우는 그림책에서나 보던 내가 아르카디움에 입학했을 때, 나는 마치 다른 차원에 던져진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경이로웠고, 모든 것이 압도적이었다. 허나 그 경이로움은 이내 날카로운 자격지심으로 변질되었다. 이 학원에는 은은한 계급이 존재했다. 마법의 대가문에서 태어난 자들은 타고난 우월감과 여유를, 나 같은 장학생들은 매 순간 증명해야 하는 불안감과 날 선 긴장을 안고 살았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마법 역사학 강의 시간, 유독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다. 오래된 마법 문헌들이 가득한 강의실은 늘 곰팡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인 특유의 향을 풍겼다. 교수님은 평소처럼 고대 마법 문명의 흥망성쇠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지만, 학생들의 시선은 온통 한곳에 쏠려 있었다.

    박하율.

    그는 늘 도서관에 파묻혀 살다시피 하는 아이였다. 존재감이 희미할 정도로 조용하고 성실했다. 하지만 몇 주 전부터 하율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밤마다 악몽을 꾼다고 했고, 며칠 전부터는 수업 도중 갑자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차가워… 너무 차가워…”

    하율의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했고, 눈 밑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른 입술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읊조리는 듯 움직였다. 그의 자리 주위로 묘한 냉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시험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고, 아니면 주화 마법 연습을 너무 무리하게 한 게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건 단순히 스트레스나 피로 따위가 아니었다.

    하율의 시선은 늘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때로는 바닥을 뚫어져라 노려보기도 했다. 마치 땅 밑에서 무언가 그를 부르는 소리라도 듣는 것처럼.

    “지하에서… 자꾸만, 자꾸만…”

    갑자기 하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동자는 핏발이 서 있었고, 몸은 경련하듯 떨렸다. 쿵, 하고 의자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강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하율에게 꽂혔다. 교수님의 설명도 뚝 끊겼다.

    “하율 군, 무슨 문제라도 있나?”

    교수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하율은 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팔로 머리를 감싸 안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거기 있어… 저 밑에…”

    그리고는 미친 듯이 웃었다. 섬뜩할 정도로 건조하고 공허한 웃음이었다.

    “으하하하하! 너희는 몰라! 아무도 몰라! 저 밑바닥에 뭐가 잠들어 있는지…!”

    정적이 흘렀다. 웃음소리가 멎자, 학원장이 갑자기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늘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오늘 그의 얼굴에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역력했다. 학원장 뒤로는 두 명의 마법사 교관이 따라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푸른색 마법진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학원장은 하율에게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하율 군, 괜찮아.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구나.”

    그 말과 동시에 교관들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마법진이 하율의 몸을 감쌌다. 하율은 옅은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몸에서 마력이 새어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수면 마법이었다.

    학원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하, 우리 하율 군이 근래 마법 연구에 너무 매진한 모양이군. 잠시 요양을 보내야겠습니다. 다들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는 쓰러진 하율을 교관들에게 맡기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강의실을 나섰다. 그의 얼굴에서는 방금 전의 딱딱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학원장의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하율의 비명과 그 서늘한 웃음은 단순한 과로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학원장이 이 타이밍에 강의실에 나타난 것도 이상했다. 마치 하율이 언제 폭주할지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복도를 걷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내가 향한 곳은 학원 구석에 위치한 낡은 도서관이었다. 일반 학생들이 잘 찾지 않는 폐쇄적인 공간. 층계를 내려가면 마법진으로 굳게 잠긴 철문이 나왔다. 학원 초기부터 금지된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는 ‘지하 서고’의 입구였다.

    “이곳은 학원 개교 이래 접근이 엄격히 금지된 구역입니다. 접근 시 즉각적인 퇴학 조치와 강력한 마법적 처벌이 가해질 수 있습니다.”

    철문 옆에는 경고문이 걸려 있었다. 경고문 너머, 차가운 철문 안쪽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환청일까? 아니면 하율이 말했던 ‘지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나는 손을 뻗어 차가운 철문에 살며시 댔다. 금속의 냉기가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뭔가가 심장을 옥죄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 밀려왔다. 마치 철문 너머에 살아있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하율의 말이 다시 울렸다.

    ‘저 밑바닥에 뭐가 잠들어 있는지…!’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분명 뭔가가 있다. 학원장이 감추고 싶어 하는 무언가가. 그리고 박하율은 그 무언가와 접촉했고, 그 때문에 실려 나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이 이상한 학원에서 ‘어쩌면 나만의 착각’이라고 애써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하율의 진실을, 그리고 아르카디움 마법 학원 지하에 숨겨진 그 끔찍한 금기를 파헤쳐야만 했다.

    나의 손전등이 철문에 가려진 어둠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침묵 속에서, 나는 그 어둠 너머의 비밀을 향해 첫발을 내딛기로 결심했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우주선 ‘별무리호’의 함교는 늘 그렇듯 잔잔한 푸른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광활한 심우주의 고요 속에 잠긴 채, 우주선은 그 자체로 거대한 휴식처였다. 간간이 들려오는 기계음과 승무원들의 나직한 대화만이 이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선장님, 저녁 식사는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우진 씨가 오늘은 특별히 고추장찌개를 끓였답니다.” 부선장 이나영이 선장 한지훈에게 보고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살짝 미소 띤 입매에서는 평화로운 일상의 작은 기쁨이 묻어났다.

    한지훈 선장은 홀로그램 스크린 너머의 별무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오, 박 엔지니어가 솜씨를 발휘했군. 다들 좋아하겠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우주를 항해하는 선장 특유의 무게감과 함께, 가족 같은 승무원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공존했다.

    그때였다.
    함교 중앙의 대형 모니터에 갑자기 경고등이 깜빡였다. 평소라면 안정적인 녹색을 띠었을 우주 환경 감지 시스템이 붉은색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이상 신호 감지! 미확인 물체 접근!”
    탐사대원 최수아의 목소리가 순간 경직되었다. 그녀는 늘 명랑했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모니터로 향했다. 거리 50만 킬로미터. 초고속으로 접근하는 물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의문이었다. 이 구역은 인류의 항로에서 한참 벗어난, 말 그대로 ‘미지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우회 경로 탐색… 아니, 잠깐만요.” 수아의 눈이 모니터에 고정되었다. “이거… 움직임이 불규칙해요. 마치… 방향성을 잃은 것처럼 떠다니는 것 같습니다.”

    한지훈 선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수아, 상세 스캔 돌려. 나영 부선장, 비상 태세 전환 준비하고 전 함선에 상황 전파해. 우진 씨는 엔진실 대기.”

    “알겠습니다!”
    “네, 선장님!”
    “옙!”

    승무원들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깃들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함께 심우주를 누벼 온 그들에게는, 이 정도의 돌발 상황은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오히려 미지의 존재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이 두려움보다 먼저 피어났다.

    몇 분 후, 수아의 낮은 탄성이 함교를 울렸다.
    “선장님, 스캔 결과가 나왔는데… 믿기 힘듭니다.”

    “뭔데?” 한지훈이 성큼성큼 다가가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초고해상도 스캔 이미지는 놀라움을 넘어선 경이로움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적인 암석이나 운석이 아니었다. 분명, 인공적인 구조물이었다.

    “형태가… 특정할 수 없습니다. 육각형 같기도 하고, 오각형 같기도 하고… 계속해서 미세하게 형태를 변형시키는 것 같습니다.” 수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니터에 확대된 이미지는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는 거대한 결정체 같았다. 마치 수만 개의 거울 조각이 붙어 있는 듯, 주변의 별빛을 흡수하고 재반사하며 끊임없이 반짝였다. 겉표면은 매끄러웠지만, 그 안쪽으로는 복잡한 회로 같은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사이즈는?” 나영이 물었다.
    “추정 지름 500미터 이상입니다. 자체 동력원은 감지되지 않지만, 내부 에너지 반응은 비정상적으로 높게 나타납니다. 생체 신호는 전혀 없습니다.”

    한지훈 선장은 턱을 어루만졌다. “미지의 인공 구조물이라… 이런 곳에서 말이지. 정지궤도에 진입, 최대한 근접해서 관찰한다. 탐사선을 내릴 준비도 해.”

    나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장님,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알 수 없기에 더 위험하지만, 동시에 더 가치 있는 발견이 될 수도 있어. 우리가 이 심우주까지 온 이유가 바로 이런 미지의 존재를 찾아내기 위함 아닌가.” 선장의 눈은 흔들림 없이 빛났다. “게다가 ‘별무리호’의 규칙은 늘 변수를 직접 마주하는 거였지. 겁먹을 필요는 없어.”

    별무리호는 조심스럽게 미지의 구조물에 다가갔다.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그 웅장함과 기묘함은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히 거대한 육면체가 아니었다. 표면의 각 면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부조처럼 튀어나와 있었고, 그 문양들 사이로는 희미한 빛의 선들이 맥박처럼 깜빡였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우주 한가운데서 숨 쉬는 듯했다.

    “놀랍군….” 박우진 엔지니어가 함교로 올라왔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장난기 대신 경외심이 가득했다.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문명이 있었다니… 우리가 알고 있던 우주가 너무나도 좁았다는 걸 깨닫는 순간입니다.”

    “에너지 반응이 점차 상승하고 있습니다!” 수아가 외쳤다. “하지만… 공격적인 징후는 포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치 우리를 환영하는 듯한 패턴으로 변하고 있어요.”

    모니터 속 구조물은 별무리호가 가까워지자, 빛의 패턴을 더욱 복잡하게 바꾸기 시작했다. 희미한 푸른빛은 점차 보라색, 주황색으로 번져가며 신비로운 색채의 향연을 펼쳤다.

    한지훈 선장은 숨을 들이켰다. “저것 봐. 정말 아름답지 않나.”
    그의 말에 승무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는 여전했지만, 그 이상으로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있었다. 거대한 예술 작품을 마주한 듯, 모두의 표정에는 경외와 묘한 평화가 깃들었다.

    “우주에 이런 아름다움이 존재했군요….” 최수아는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은 반짝였다. 미지의 두려움 속에서도 발견의 기쁨과 순수한 경이로움이 그녀를 감쌌다.

    나영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구조물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선장님. 저 패턴은… 단순한 장식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메시지처럼 보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구조물의 중앙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마치 투명한 막처럼 펼쳐져, 별무리호의 전면을 뒤덮었다. 아무런 소리도, 충격도 없었다. 그저 눈부신 빛만이 모든 것을 감쌌다.

    “선장님! 통신 두절! 외부 센서 먹통입니다!” 박우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별무리호는 미지의 빛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모두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때, 빛의 기둥 안에서, 구조물의 표면에 새겨져 있던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하나둘씩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문양들은 별무리호의 함교 내부로 스며들 듯 들어와, 승무원들의 눈앞에서 부유했다.

    그것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언어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익숙하고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오래된 기억 속에서 튀어나온 이미지들처럼, 혹은 아주 깊은 곳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그리고 그때, 최수아가 작은 소리로 외쳤다.
    “이게… 뭐죠? 제 머릿속에… 갑자기 엄청난 정보들이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을 기점으로, 함교의 모든 승무원들은 동시에 정지했다.
    눈앞에 떠다니는 알 수 없는 문양들.
    그리고 그 문양들이 불러온, 의식 속의 파동.
    어둠 속에서 떠다니던 작은 별무리호는, 이제 미지의 존재가 보내는 무언가에 완전히 포착되어 버렸다.

    다음 순간, 한지훈 선장의 뇌리에도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였다.
    아주 오래된, 하지만 너무나도 생생한, 심우주의 이야기가.

    그 빛 속에서, 별무리호의 승무원들은 알 수 없는 세계의 문턱에 서 있었다.
    미지의 존재가 선사하는 ‘일상’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긴장감 속에서 피어나는, 묘한 힐링의 순간이었다.
    이것은 위협일까? 아니면… 새로운 시작일까?

    <다음 화에 계속>

  • 가상현실 게임 (VRMMO)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카인은 녹슨 철골이 앙상하게 드러난 천장을 올려다봤다. 잿빛 세상에 떨어진 지 벌써 몇 달째인지 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손목의 HUD가 깜빡이며 배터리 잔량을 경고했다. 젠장, 또다시.

    인벤토리 창을 열자, ‘정수된 물’은 한 병, ‘건조 식량’은 겨우 두 개. ‘붕대’는 너덜너덜한 한 뭉치뿐이었다. 탄약은? ‘구식 리볼버 탄약’ 다섯 발. 끔찍한 잔고였다. 이 정도로는 오늘 밤을 넘기기도 힘들 텐데.

    그는 ‘세이프 가든’이라는 이름만 거창한, 폐허가 된 도시 외곽의 지하 벙커로 향하는 중이었다. 소문으로는 그곳에 아직 온전한 정수 시설이 남아있다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아니, 잡을 지푸라기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그저 한 줄기 허황된 희망을 좇는 것에 가까웠다.

    낡은 백화점 건물 내부, 깨진 쇼윈도 사이로 희미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발밑에는 유리 조각과 콘크리트 파편들이 밟혔다. 카인은 최대한 소리를 죽여가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끽, 끽. 삐걱이는 소리가 폐허의 정적을 갈랐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저 멀리, 어둠 속에 움직이는 거대한 그림자. 금속 파편과 살점이 뒤섞인 기괴한 형태의 짐승, ‘융합체’였다. 놈의 등에서는 녹슨 철근이 가시처럼 돋아나 있었고, 한쪽 팔은 자동차 엔진처럼 불룩했다. 희미한 붉은 눈이 사방을 훑고 있었다. 놈은 느릿하게 움직였지만, 그 육중한 존재감만으로도 주변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젠장. 이런 곳에서 융합체를 마주치다니. 정면 승부는 무리였다. 탄약도, 체력도 바닥이었다. 카인은 이를 악물고 ‘은신’ 스킬을 발동하며 조심스럽게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스킬 ‘은신(Lv.2)’ 발동. 주변 인지 저하.]

    발소리를 죽이고 벽을 따라 움직였다. 융합체는 느리지만 끈질겼다. 놈의 움직임에 맞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번이라도 들키면 끝장이었다. 놈은 천천히, 마치 먹잇감의 흔적을 쫓는 것처럼 매장 진열대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진열대에 부딪혀 떨어진 유리 조각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카인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애써 진정시키며 출구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겨우 몇 걸음을 옮겼을까.
    갑자기 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킁, 킁. 쇠 냄새와 썩은 내음이 뒤섞인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놈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젠장…!”
    결국 실수하고 말았다. 발밑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밟았다. 쨍그랑!
    융합체의 붉은 눈이 정확히 카인을 향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놈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돌진했다. 바닥의 먼지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피할 곳은 없었다. 카인은 허리춤의 리볼버를 뽑아 들었다. 탕! 탕! 두 발을 놈의 붉은 눈을 향해 쏘았다. 첫 발은 빗나갔지만, 두 번째 발은 놈의 쇠붙이 피부에 박혔다. 끄아아아앙!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놈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분노하며 돌진해왔다.
    몸을 날려 옆에 있던 무너진 진열장 뒤로 숨었다. 꽝! 진열장이 박살 나며 그의 어깨에 날카로운 파편이 박혔다.

    [데미지 5. 출혈 상태 이상 발생.]

    젠장, 젠장, 젠장! 망할. 카인은 인벤토리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섬광탄’을 꺼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핀을 뽑아 놈이 돌진해오는 길목에 던졌다. 콰앙! 눈을 멀게 하는 섬광이 번쩍였다. 융합체가 잠시 주춤하며 끔찍한 고통 소리를 질렀다.

    그 틈을 타 카인은 미친 듯이 달렸다. 붕괴 직전의 에스컬레이터를 두 칸씩 뛰어 올라갔다. 발밑에서 낡은 철골이 비명을 질렀다. 굉음이 연이어 터졌지만, 뒤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구에 다다랐다. 철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발밑에 뭔가 딱딱한 것이 밟혔다.

    카인이 숨을 멈췄다. 그것은 닳고 닳은 가죽 지갑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찢어진 ID 카드와 함께, 낡은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종이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이프 가든은… 함정이다. 북쪽… 광산…”**

    카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유일한 희망, ‘세이프 가든’이 함정이라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쫓던 희망은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북쪽 광산’이라는 곳은 또 어디를 말하는 거지?
    뒤에서 융합체의 끔찍한 포효가 다시 울려 퍼졌다. 놈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소리가 고스란히 귀에 박혔다. 카인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움켜쥐었다.
    선택해야 했다. 희망을 쫓을 것인가, 아니면 이 알 수 없는 경고를 믿고 새로운 위험 속으로 뛰어들 것인가.
    잿빛 세상의 밤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우주선 ‘별무리호’의 함교는 늘 그렇듯 잔잔한 푸른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광활한 심우주의 고요 속에 잠긴 채, 우주선은 그 자체로 거대한 휴식처였다. 간간이 들려오는 기계음과 승무원들의 나직한 대화만이 이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선장님, 저녁 식사는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우진 씨가 오늘은 특별히 고추장찌개를 끓였답니다.” 부선장 이나영이 선장 한지훈에게 보고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살짝 미소 띤 입매에서는 평화로운 일상의 작은 기쁨이 묻어났다.

    한지훈 선장은 홀로그램 스크린 너머의 별무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오, 박 엔지니어가 솜씨를 발휘했군. 다들 좋아하겠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우주를 항해하는 선장 특유의 무게감과 함께, 가족 같은 승무원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공존했다.

    그때였다.
    함교 중앙의 대형 모니터에 갑자기 경고등이 깜빡였다. 평소라면 안정적인 녹색을 띠었을 우주 환경 감지 시스템이 붉은색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이상 신호 감지! 미확인 물체 접근!”
    탐사대원 최수아의 목소리가 순간 경직되었다. 그녀는 늘 명랑했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모니터로 향했다. 거리 50만 킬로미터. 초고속으로 접근하는 물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의문이었다. 이 구역은 인류의 항로에서 한참 벗어난, 말 그대로 ‘미지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우회 경로 탐색… 아니, 잠깐만요.” 수아의 눈이 모니터에 고정되었다. “이거… 움직임이 불규칙해요. 마치… 방향성을 잃은 것처럼 떠다니는 것 같습니다.”

    한지훈 선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수아, 상세 스캔 돌려. 나영 부선장, 비상 태세 전환 준비하고 전 함선에 상황 전파해. 우진 씨는 엔진실 대기.”

    “알겠습니다!”
    “네, 선장님!”
    “옙!”

    승무원들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깃들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함께 심우주를 누벼 온 그들에게는, 이 정도의 돌발 상황은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오히려 미지의 존재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이 두려움보다 먼저 피어났다.

    몇 분 후, 수아의 낮은 탄성이 함교를 울렸다.
    “선장님, 스캔 결과가 나왔는데… 믿기 힘듭니다.”

    “뭔데?” 한지훈이 성큼성큼 다가가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초고해상도 스캔 이미지는 놀라움을 넘어선 경이로움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적인 암석이나 운석이 아니었다. 분명, 인공적인 구조물이었다.

    “형태가… 특정할 수 없습니다. 육각형 같기도 하고, 오각형 같기도 하고… 계속해서 미세하게 형태를 변형시키는 것 같습니다.” 수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니터에 확대된 이미지는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는 거대한 결정체 같았다. 마치 수만 개의 거울 조각이 붙어 있는 듯, 주변의 별빛을 흡수하고 재반사하며 끊임없이 반짝였다. 겉표면은 매끄러웠지만, 그 안쪽으로는 복잡한 회로 같은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사이즈는?” 나영이 물었다.
    “추정 지름 500미터 이상입니다. 자체 동력원은 감지되지 않지만, 내부 에너지 반응은 비정상적으로 높게 나타납니다. 생체 신호는 전혀 없습니다.”

    한지훈 선장은 턱을 어루만졌다. “미지의 인공 구조물이라… 이런 곳에서 말이지. 정지궤도에 진입, 최대한 근접해서 관찰한다. 탐사선을 내릴 준비도 해.”

    나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장님,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알 수 없기에 더 위험하지만, 동시에 더 가치 있는 발견이 될 수도 있어. 우리가 이 심우주까지 온 이유가 바로 이런 미지의 존재를 찾아내기 위함 아닌가.” 선장의 눈은 흔들림 없이 빛났다. “게다가 ‘별무리호’의 규칙은 늘 변수를 직접 마주하는 거였지. 겁먹을 필요는 없어.”

    별무리호는 조심스럽게 미지의 구조물에 다가갔다.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그 웅장함과 기묘함은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히 거대한 육면체가 아니었다. 표면의 각 면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부조처럼 튀어나와 있었고, 그 문양들 사이로는 희미한 빛의 선들이 맥박처럼 깜빡였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우주 한가운데서 숨 쉬는 듯했다.

    “놀랍군….” 박우진 엔지니어가 함교로 올라왔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장난기 대신 경외심이 가득했다.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문명이 있었다니… 우리가 알고 있던 우주가 너무나도 좁았다는 걸 깨닫는 순간입니다.”

    “에너지 반응이 점차 상승하고 있습니다!” 수아가 외쳤다. “하지만… 공격적인 징후는 포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치 우리를 환영하는 듯한 패턴으로 변하고 있어요.”

    모니터 속 구조물은 별무리호가 가까워지자, 빛의 패턴을 더욱 복잡하게 바꾸기 시작했다. 희미한 푸른빛은 점차 보라색, 주황색으로 번져가며 신비로운 색채의 향연을 펼쳤다.

    한지훈 선장은 숨을 들이켰다. “저것 봐. 정말 아름답지 않나.”
    그의 말에 승무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는 여전했지만, 그 이상으로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있었다. 거대한 예술 작품을 마주한 듯, 모두의 표정에는 경외와 묘한 평화가 깃들었다.

    “우주에 이런 아름다움이 존재했군요….” 최수아는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은 반짝였다. 미지의 두려움 속에서도 발견의 기쁨과 순수한 경이로움이 그녀를 감쌌다.

    나영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구조물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선장님. 저 패턴은… 단순한 장식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메시지처럼 보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구조물의 중앙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마치 투명한 막처럼 펼쳐져, 별무리호의 전면을 뒤덮었다. 아무런 소리도, 충격도 없었다. 그저 눈부신 빛만이 모든 것을 감쌌다.

    “선장님! 통신 두절! 외부 센서 먹통입니다!” 박우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별무리호는 미지의 빛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모두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때, 빛의 기둥 안에서, 구조물의 표면에 새겨져 있던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하나둘씩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문양들은 별무리호의 함교 내부로 스며들 듯 들어와, 승무원들의 눈앞에서 부유했다.

    그것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언어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익숙하고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오래된 기억 속에서 튀어나온 이미지들처럼, 혹은 아주 깊은 곳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그리고 그때, 최수아가 작은 소리로 외쳤다.
    “이게… 뭐죠? 제 머릿속에… 갑자기 엄청난 정보들이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을 기점으로, 함교의 모든 승무원들은 동시에 정지했다.
    눈앞에 떠다니는 알 수 없는 문양들.
    그리고 그 문양들이 불러온, 의식 속의 파동.
    어둠 속에서 떠다니던 작은 별무리호는, 이제 미지의 존재가 보내는 무언가에 완전히 포착되어 버렸다.

    다음 순간, 한지훈 선장의 뇌리에도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였다.
    아주 오래된, 하지만 너무나도 생생한, 심우주의 이야기가.

    그 빛 속에서, 별무리호의 승무원들은 알 수 없는 세계의 문턱에 서 있었다.
    미지의 존재가 선사하는 ‘일상’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긴장감 속에서 피어나는, 묘한 힐링의 순간이었다.
    이것은 위협일까? 아니면… 새로운 시작일까?

    <다음 화에 계속>

  • 사이버펑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챕터 1: 폐허 속의 잔해]

    축축하고 비좁은 방 안. 강하진은 눅진한 벽에 기대어 흐릿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낡은 환풍구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섞인 습한 공기가 겨우 비집고 들어왔고, 그마저도 천천히 타들어 가는 저질 전구의 오존 냄새에 파묻혔다. 바깥에서는 쉴 새 없이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도시의 심장이 뛰는 듯한 둔탁한 진동이 닳아빠진 매트리스를 타고 전해져 왔다.

    왼쪽 어깨의 통증이 욱신거렸다. 싸구려 인조 근육과 구형 합금으로 어설프게 교체된 팔은 가끔 제멋대로 경련을 일으켰다. 그것은 지난날의 영광, 그리고 추락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잔혹한 징표였다. 하진은 한때 이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가장 빠른 손과 가장 예리한 정신을 가진 자 중 하나였다. ‘넷 러너’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 그녀의 시냅스는 도시의 모든 데이터 흐름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섹터 7의 가장 음습한 골목, 폐기물 더미 속에서나 볼 법한 초라한 방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아니 끝은 바로 그 녀석 때문이었다. 오재혁. 한때 그녀의 가장 친한 동료이자, 같은 꿈을 꾸던 유일한 친구라고 믿었던 남자.

    하진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조악한 데이터 크리스탈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오래전, 폐기된 서버 뭉치에서 겨우 건져낸 잔해. 그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남아있을 리 없었다. 모든 것은 깨끗하게 지워지고, 재혁의 이름으로 다시 쓰였다.

    그날 밤, 그녀는 재혁과 함께 코퍼레이션 ‘헤라클레스’의 최심부 보안 서버를 해킹하고 있었다. 도시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거대 기업의 은밀한 금고를 여는 일. 위험했지만, 둘의 완벽한 호흡이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시스템의 마지막 방어막이 뚫리는 순간, 재혁은 뒤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난생 처음 보는 섬뜩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미안하다, 하진. 이건 네 몫이 아니야. 애초에, 네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지.”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뇌 속으로 침투한 전자기 충격이 시야를 새하얗게 태웠다. 온몸의 신경망이 불타는 듯한 고통과 함께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 그녀는 차가운 감옥 바닥에 버려져 있었고, 왼쪽 팔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져 있었다. 재혁은 사라졌고, 헤라클레스 서버 침투의 모든 공은 그에게 돌아갔다. 그는 영웅이 되었고, 하진은 희생양이 되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낡은 단말기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도시 중심부의 스카이라인을 수놓은 거대 전광판의 불빛이 얇은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전광판 속에서는 재혁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코퍼레이션 ‘프록시마’의 새로운 AI 기반 시티 운영 시스템 발표회였다. 재혁은 이제 프록시마의 핵심 임원이자, 차세대 기술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헤라클레스의 최고 책임자가 서 있었다.

    하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불과 2년 만이었다. 2년 전, 감옥에서 풀려난 그녀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남았다. 폐기물 더미를 뒤져 쓸만한 부품을 찾아내고, 버려진 서버의 잔해 속에서 데이터를 복구하며, 기어이 자신만의 작은 은신처를 만들었다. 모든 것은,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였다.

    화면 속 재혁의 미소는 너무나도 밝아서,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손끝에서 찌르르한 전류가 흘렀다. 부서진 왼팔의 인조 근육이 제멋대로 수축했다. 그녀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좁은 방에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낡은 단말기 앞에 앉아, 부서진 데이터 크리스탈 조각을 단말기의 포트에 끼웠다. 당연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끈기 있게 작업을 시작했다. 닳아빠진 키보드 위로 그녀의 손가락이 춤추기 시작했다. 투박한 합금 팔이었지만, 움직임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사라진 데이터를 복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데이터가 사라진 흔적을 추적하는 것은 가능했다. 재혁이 모든 것을 깨끗이 지웠다고 생각했겠지만, 완벽한 흔적 지우기란 없었다. 특히, 그녀가 손수 구축했던 보안 프로토콜을 통과하면서 남긴 미세한 흔적들은.

    하진의 눈동자가 단말기 화면의 복잡한 코드 속을 훑었다. 초록색 글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두뇌가 다시금 활성화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통스러웠던 과거가 그녀의 발목을 잡는 대신, 오히려 그녀를 더 날카롭게 연마하고 있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바깥의 비는 잦아들었지만, 도시는 여전히 빛과 어둠의 대비 속에 잠겨 있었다. 하진은 복구된 아주 작은 데이터 조각을 발견했다. 암호화된 파일명. 그러나 그녀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재혁과 함께 코드를 만들 때 사용했던 자신들만의 암호였다.

    **<0410.프로젝트_나비효과>**

    하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나비효과.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거대한 폭풍을 일으킨다는 그 말. 재혁이 그렇게나 좋아했던 개념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가 그 나비가 될 차례였다.

    “그래, 재혁. 네가 일으킨 작은 바람이, 이제 태풍이 되어 너를 덮칠 거야.”

    그녀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도시의 중심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 재혁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그녀의 복수가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선 그녀의 처절한 복수극이.

  • 추리 미스터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첫 번째 조각

    밤은 언제나 혼자였다. 아니, 혼자가 되어버렸다.
    창밖으로는 화려한 도시의 불빛이 춤을 추고 있었지만, 이 낡은 고층 아파트의 가장 구석진 방에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눅진한 어둠만이 나의 모든 것을 삼킬 듯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싸늘하게 식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잔뜩 구겨진 일간지 기사가 탁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선일 그룹 박도현 대표, 젊은 기업인의 아이콘으로 급부상]**

    익숙한 이름. 익숙한 얼굴.
    사진 속 박도현은 여전히 빛났다. 아니, 예전보다 훨씬 더 빛나고 있었다. 명품 양복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으리으리한 선일 그룹 본사의 로고가 선명했다.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세우고, 내 영혼을 갈아 넣어 키웠던 그 회사. 이제는 ‘선일 그룹’이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달고 박도현의 제국이 되어 있었다.

    “풋…”

    나지막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딘가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이 텅 빈 방 안에는 오직 나 혼자만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 손에 들린 낡은 사진 한 장.
    빛바랜 사진 속에는 세 명의 젊은이가 어깨동무를 하고 활짝 웃고 있었다. 한 명은 나였다. 강준혁.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스물여덟의 나. 다른 한 명은 박도현. 누구보다 나를 믿고 따르며, 함께 성공을 꿈꾸던 나의 오랜 친구.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차마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나의 전부였던 그녀.

    우리는 함께 꿈꿨다. 맨바닥에서 시작해 밤낮없이 일했고, 수많은 좌절 속에서도 서로를 믿으며 버텼다. 도현은 내 아이디어를 가장 먼저 이해하고 실현 가능한 계획으로 만들어주는 천재적인 능력을 가졌다. 나는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길잡이였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완벽한 파트너가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두고 ‘환상의 콤비’라고 불렀다.

    하지만 환상은 깨지기 마련이다.
    어느 날, 내가 개발 중이던 핵심 기술이 유출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회사는 순식간에 혼돈에 빠졌다. 그때 도현이 내게 말했다. “준혁아, 일단 네가 잠깐만 감옥에 들어가 있어 줘. 내가 이 위기만 수습하고 나오면, 모든 걸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게. 너는 그저 나를 믿고 기다리면 돼.”
    나는 그를 믿었다. 맹목적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믿음은 나를 지옥으로 이끌었다.

    나는 감옥에 갇혔다. 회사 기밀 유출 및 횡령이라는 누명을 쓴 채. 나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모든 증거는 나를 향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가 모든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완벽하게 조작되어 있었다. 내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조차 나를 포기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 나는 박도현이 내 회사를 집어삼키고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차가운 철창 너머로 들려오는 소식들은 칼날처럼 나를 찢어발겼다. 내가 개발한 기술로 새로운 사업을 성공시켰다는 소식. 내가 쌓아 올린 업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 그리고… 나의 전부였던 그녀가 박도현의 옆에 서 있다는 소식.

    “배신자….”

    내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는 분노보다는 절망에 가까웠다. 목이 메었다.
    그는 나를 믿어준 가족들에게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내가 세상에 남긴 모든 흔적을 지워버렸다. 나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유령이 되었다.

    세월은 나를 바꿔놓았다.
    오랜 시간, 나는 짐승처럼 웅크린 채 칼날을 갈았다. 분노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었지만, 증오는 이성적인 도구가 되었다. 나는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 자신을 해체하고 재조립했다. 과거의 강준혁은 죽었다. 지금 내 앞에는 오직 박도현의 몰락만을 꿈꾸는 그림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오랜 침묵 끝에,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도현은 내가 감옥에서 썩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이미 죽었거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 있다. 태양처럼 빛나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공의 정점에 서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높이 떠오른 태양이라 할지라도, 그림자는 길어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는 언제나 나 같은 존재가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낡은 휴대폰을 꺼냈다. 투박한 외형의 구형 모델이었다. 누구의 추적도 받지 않을 나만의 연락 수단. 액정에는 박도현의 얼굴이 담긴 기사가 여전히 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 사진 속 그는 여전히 거만하게 웃고 있었다.

    “웃어라, 박도현. 실컷 웃어둬.”

    나의 중얼거림은 공허한 방 안을 맴돌았다.
    “이제부터, 내가 너에게 가장 익숙한 얼굴로 지옥을 선물할 테니.”

    내 손가락이 휴대폰 액정 위에서 움직였다.
    길고 복잡한 숫자 조합이 입력되고, 통화 버튼이 눌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과거의 강준혁이 아니었다.
    나는 철저하게 계획된 복수의 첫 번째 조각을 완성하려는 그림자였다.
    어둠 속에서, 나의 차가운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복수의 서막이 이제 막 열렸다.

  • 추리 미스터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첫 번째 조각

    밤은 언제나 혼자였다. 아니, 혼자가 되어버렸다.
    창밖으로는 화려한 도시의 불빛이 춤을 추고 있었지만, 이 낡은 고층 아파트의 가장 구석진 방에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눅진한 어둠만이 나의 모든 것을 삼킬 듯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싸늘하게 식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잔뜩 구겨진 일간지 기사가 탁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선일 그룹 박도현 대표, 젊은 기업인의 아이콘으로 급부상]**

    익숙한 이름. 익숙한 얼굴.
    사진 속 박도현은 여전히 빛났다. 아니, 예전보다 훨씬 더 빛나고 있었다. 명품 양복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으리으리한 선일 그룹 본사의 로고가 선명했다.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세우고, 내 영혼을 갈아 넣어 키웠던 그 회사. 이제는 ‘선일 그룹’이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달고 박도현의 제국이 되어 있었다.

    “풋…”

    나지막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딘가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이 텅 빈 방 안에는 오직 나 혼자만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 손에 들린 낡은 사진 한 장.
    빛바랜 사진 속에는 세 명의 젊은이가 어깨동무를 하고 활짝 웃고 있었다. 한 명은 나였다. 강준혁.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스물여덟의 나. 다른 한 명은 박도현. 누구보다 나를 믿고 따르며, 함께 성공을 꿈꾸던 나의 오랜 친구.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차마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나의 전부였던 그녀.

    우리는 함께 꿈꿨다. 맨바닥에서 시작해 밤낮없이 일했고, 수많은 좌절 속에서도 서로를 믿으며 버텼다. 도현은 내 아이디어를 가장 먼저 이해하고 실현 가능한 계획으로 만들어주는 천재적인 능력을 가졌다. 나는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길잡이였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완벽한 파트너가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두고 ‘환상의 콤비’라고 불렀다.

    하지만 환상은 깨지기 마련이다.
    어느 날, 내가 개발 중이던 핵심 기술이 유출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회사는 순식간에 혼돈에 빠졌다. 그때 도현이 내게 말했다. “준혁아, 일단 네가 잠깐만 감옥에 들어가 있어 줘. 내가 이 위기만 수습하고 나오면, 모든 걸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게. 너는 그저 나를 믿고 기다리면 돼.”
    나는 그를 믿었다. 맹목적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믿음은 나를 지옥으로 이끌었다.

    나는 감옥에 갇혔다. 회사 기밀 유출 및 횡령이라는 누명을 쓴 채. 나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모든 증거는 나를 향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가 모든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완벽하게 조작되어 있었다. 내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조차 나를 포기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 나는 박도현이 내 회사를 집어삼키고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차가운 철창 너머로 들려오는 소식들은 칼날처럼 나를 찢어발겼다. 내가 개발한 기술로 새로운 사업을 성공시켰다는 소식. 내가 쌓아 올린 업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 그리고… 나의 전부였던 그녀가 박도현의 옆에 서 있다는 소식.

    “배신자….”

    내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는 분노보다는 절망에 가까웠다. 목이 메었다.
    그는 나를 믿어준 가족들에게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내가 세상에 남긴 모든 흔적을 지워버렸다. 나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유령이 되었다.

    세월은 나를 바꿔놓았다.
    오랜 시간, 나는 짐승처럼 웅크린 채 칼날을 갈았다. 분노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었지만, 증오는 이성적인 도구가 되었다. 나는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 자신을 해체하고 재조립했다. 과거의 강준혁은 죽었다. 지금 내 앞에는 오직 박도현의 몰락만을 꿈꾸는 그림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오랜 침묵 끝에,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도현은 내가 감옥에서 썩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이미 죽었거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 있다. 태양처럼 빛나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공의 정점에 서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높이 떠오른 태양이라 할지라도, 그림자는 길어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는 언제나 나 같은 존재가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낡은 휴대폰을 꺼냈다. 투박한 외형의 구형 모델이었다. 누구의 추적도 받지 않을 나만의 연락 수단. 액정에는 박도현의 얼굴이 담긴 기사가 여전히 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 사진 속 그는 여전히 거만하게 웃고 있었다.

    “웃어라, 박도현. 실컷 웃어둬.”

    나의 중얼거림은 공허한 방 안을 맴돌았다.
    “이제부터, 내가 너에게 가장 익숙한 얼굴로 지옥을 선물할 테니.”

    내 손가락이 휴대폰 액정 위에서 움직였다.
    길고 복잡한 숫자 조합이 입력되고, 통화 버튼이 눌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과거의 강준혁이 아니었다.
    나는 철저하게 계획된 복수의 첫 번째 조각을 완성하려는 그림자였다.
    어둠 속에서, 나의 차가운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복수의 서막이 이제 막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