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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크 판타지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대본: 고요 속의 균열 (1화)

    **장르:** 다크 판타지

    **[프롤로그]**

    **#1. 한밤중의 도시, 고층 아파트 외경**
    *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 위로, 수많은 아파트 건물이 불빛을 뿜어낸다. 그중 한 건물의 중상층 어딘가, 창문 하나가 옅게 빛나고 있다.
    * **내레이션 (지현):** 나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 퇴근 후 따뜻한 집에서 쉬고, 주말엔 좋아하는 드라마를 몰아보고, 가끔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으러 가는… 그런 소박한 행복을 바랐을 뿐이었다.
    * **내레이션 (지현):**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작은 보금자리는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게 되었다.

    **[본문]**

    **#2. 지현의 아파트 현관, 밤 11시 30분**
    *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지현이 비척거리며 들어온다. 검은색 오피스룩 차림. 얼굴엔 피곤이 역력하다. 가방은 무겁고, 어깨는 축 처져 있다.
    * 지현은 불을 켤 생각도 못 한 채, 신발도 벗지 않고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하다.
    * **SFX:** (문 닫히는 소리) 철컥.
    * **지현 (독백):** 아… 죽겠다. 오늘도 야근이네.
    * **지현 (독백):** 이러다 시체가 되어 발견되어도 아무도 모를 거야.

    **#3. 지현의 아파트 거실 겸 침실**
    * 불이 켜지고, 어두웠던 공간이 단출한 살림살이로 채워져 있음을 드러낸다. 침대, 작은 책상, 간이 주방. 온갖 생활용품들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지만, 그럭저럭 정돈된 편이다.
    * 지현은 가방을 아무렇게나 소파에 던져두고, 몸을 침대에 뉘인다. 씻지도 않고 잠들 기세다.
    * **SFX:** (가방 떨어지는 소리) 쿵.
    * **지현:** 으음… 5분만…
    *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방 안을 훑는다. 뭔가 이상하다.
    * **지현 (독백):** …?
    * 침대 머리맡 작은 선반 위에 놓여있던, 어제 퇴근길에 사 온 작은 화분(선인장)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흙이 조금 흩어져 있고, 화분은 멀쩡하다.
    * **지현 (독백):** 내가 이걸 떨어뜨렸나? 분명 어제 자기 전에 물 주고 선반에 잘 올려놨는데…

    **#4. 지현, 화분을 들고 선반에 다시 올리는 모습**
    * 지현은 잠시 갸우뚱하다가, 이내 피곤에 젖은 얼굴로 화분을 다시 선반에 올린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흙도 손으로 대충 쓸어 담는다.
    * **지현:** 하암… 피곤해서 헛것이 보였나. 별걸 다 신경 쓰네.
    *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눕는다.

    **#5. 몇 시간 후, 깊은 밤. 지현의 아파트 침실.**
    * 고요한 어둠 속, 지현은 잠이 들었다. 창밖으로 희미하게 도시의 불빛이 스며든다.
    * **SFX:**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긁는 소리) 긁적… 긁적…
    * 지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잠결에도 거슬리는 소리인 듯하다.
    * **SFX:** (소리가 좀 더 명확해진다) 긁적… 긁적… 득… 득…
    *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 **지현 (독백):** (꿈인가…? 쥐라도 있나? 우리 집이 몇 층인데…)

    **#6. 지현, 잠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
    * 지현은 눈을 뜬다. 어둠 속에서 동공이 확장되며 주위를 살핀다. 소리는 멈춘 듯하다.
    * **지현:** …뭐지?
    * 아무것도 없다. 그저 고요할 뿐이다.
    * **지현 (독백):** 또 꿈인가… 요즘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들리나 봐.
    * 그녀는 다시 눈을 감으려 한다.

    **#7. 지현의 침대 옆 협탁 위, 알람 시계**
    * 시계의 디지털 숫자가 ’02:17’을 가리키고 있다.
    * **SFX:** (침대 바로 옆, 협탁 위에서) 똑… 똑…
    * 지현의 눈이 번쩍 뜨인다. 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 **SFX:** (점점 빨라지는 소리) 똑똑… 똑똑똑… 또도독!
    * 이번에는 분명하다. 마치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
    * 지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협탁을 본다. 알람 시계, 휴대폰, 물컵. 아무것도 소리를 낼 만한 것이 없다.

    **#8. 협탁 위 물컵, 미세하게 움직이는 모습**
    * 지현이 컵을 응시하는 순간, 텅 비어 있는 유리 물컵이 덜컥, 하고 아주 미세하게 한쪽으로 밀려난다.
    * **SFX:** (컵이 움직이며 내는 마찰음) 쓱… 덜컥.
    * 지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몸에 소름이 돋는다.
    * **지현:** 흐읍…
    * 그녀는 숨을 들이쉬며 몸을 일으킨다. 손이 떨린다.
    * **지현 (독백):** 내가… 잘못 본 건가…? 아냐. 분명 움직였어.

    **#9. 지현, 공포에 질린 채 방 안을 둘러보는 모습**
    * 지현은 침대에서 내려와 뒷걸음질 치며 방의 불을 켠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이 환해진다.
    * **SFX:** (전등 스위치) 딸깍!
    * 어둠이 사라지자, 아까의 공포는 잠시 주춤한다. 평범한 자신의 방이다. 컵은 여전히 협탁 위에 놓여 있고, 움직인 흔적은 없다.
    * **지현 (독백):** (아무것도 없잖아… 그냥 착각이었을 거야. 너무 무리해서 그래.)
    * 그녀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려 한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10. 화장실 입구, 지현의 모습**
    * 갈증이 나는지, 지현은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향하려 한다. 그때, 화장실 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
    * **지현 (독백):** 화장실 문… 내가 분명히 닫고 나왔는데.
    * 그녀는 화장실 문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 **지현:** 혹시… 잠결에 내가 열었나?

    **#11. 지현, 화장실 문 앞에 서 있는 모습**
    * 지현은 조심스럽게 열린 틈으로 화장실 안을 들여다본다. 어둡다.
    * **SFX:** (안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속삭임) 쉬이익…
    * 지현의 등골이 오싹해진다.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기울인다.
    * **SFX:** (더욱 또렷해지는 속삭임) 너어…
    * 공포가 지현의 전신을 감싼다.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 **지현:** …누구세요…?

    **#12. 화장실 안,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눈동자**
    * 지현의 말에 대한 답은 없다. 다만, 어둠 속에서, 아주 깊은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가 지현을 응시하는 것이 느껴진다.
    * **SFX:** (찰칵! – 카메라 셔터 소리, 섬광이 터진다)
    * 갑자기 화장실 안에서 휴대폰 플래시가 터지는 듯한 섬광이 번쩍인다. 동시에, 지현의 눈앞에 선명하게,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이 보인다.
    * **지현:** 꺄악!
    * 지현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친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프다.

    **#13. 지현, 거실 한복판에 주저앉아 있는 모습**
    * 지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온몸이 떨린다. 눈물이 흐른다.
    * **지현:** (흐느끼며) 아니야… 잘못 본 거야… 꿈이야…
    * **SFX:** (화장실 문이 스르륵, 완전히 닫히는 소리) 스르르륵… 쿵.
    *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이 닫힌다.

    **#14. 닫힌 화장실 문, 그 위에 선명하게 나타나는 글자**
    * 지현의 시선이 공포에 질린 채 닫힌 화장실 문으로 향한다.
    * 문이 닫힌 하얀 표면 위로, 마치 손톱으로 긁은 듯한 붉은 글씨가 천천히 떠오른다.
    * `나갈 수 없어.`
    * **지현:** (경악하며) 아… 안 돼…
    * 지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다. 더 이상은 환각도, 꿈도 아니다.
    * **내레이션 (지현):** 그날 밤, 나의 작은 아파트는 더 이상 나의 집이 아니었다.

    **[에필로그]**

    **#15. 어둠에 잠긴 아파트 외경, 멀리서 빛나는 창문**
    * 도시의 불빛 속에, 지현의 아파트 창문만이 홀로 섬뜩하게 빛나고 있다. 그 빛은 어딘가에 갇힌 듯, 절규하는 듯하다.
    * **내레이션 (지현):** 고요 속에서, 균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균열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1화 끝]**

  • 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에테리움 마법 학원, 073화: 무지개 비늘 아래의 진실

    쿵. 쿵. 쿵.
    심장이 발소리에 맞춰 격렬하게 울렸다. 복도 끝, 고대 마법학 교수의 우렁찬 목소리가 거대한 바위처럼 등 뒤를 쫓아왔다. “엘리샤! 너 이 망측한 계집애! 당장 서지 못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 질주했다. 후회는 없었다. 그 지루한 ‘고대 마법 유물의 빛깔 분석’ 수업 대신, 내 직감은 이 학원 어딘가에 훨씬 더 흥미로운 ‘무엇’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속삭였다. 게다가, 오늘 아침 식판에 몰래 넣어둔 개구리 알 사탕은 완벽한 복수였다. 교수님, 미안해요. 사실 안 미안해요!

    좁은 비상계단을 세 칸씩 뛰어 내려가다, 등 뒤에서 섬뜩한 마법 기류가 느껴졌다. 젠장, 순간이동 마법까지 쓰다니! 교수님, 체면도 없으세요?

    “붙잡히면 삼일 밤낮을 금서 열람실에 가둬 버릴 줄 알아라!”

    그 목소리는 거의 내 등 뒤에 와 닿은 듯했다. 망했다! 이대로 잡히면 지난번처럼 ‘분노 조절 마법 실패 사례’로 마법 생물에게 둘러싸여 춤추는 굴욕적인 보고서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 내 이미지, 흑역사!

    필사적으로 몸을 틀어 왼쪽 복도로 꺾었다. 익숙지 않은 복도였다. 낡고 오래된 벽돌들이 켜켜이 쌓여 있고, 공기마저 축축하게 눅눅했다. 여긴 대체 어디지? 분명 도서관 지하 창고로 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발밑에 놓인 카펫이 찢어져 너덜거렸다. 그 아래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어? 이건 또 뭐지? 호기심이 두려움을 덮었다. 언제나 그랬듯, 내 마법은 위기에서 빛을 발했다.

    “루멘 테네브리스!”

    내 손끝에서 자그마한 빛의 구슬이 튀어나와 찢어진 카펫 아래를 비췄다. 맙소사. 바닥은 원래부터 갈라져 있었던 게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둔 것 같은 좁은 틈이었다. 그리고 그 틈새 너머로 기분 나쁜 어둠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듯한.

    “엘리샤, 거기 서라! 감히 금지 구역에 접근하려 하다니!”

    이번엔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교수의 거친 숨소리와는 달리, 완벽하게 정돈된 마법 에너지를 내뿜는 목소리.

    “카이젤!”

    나는 망연자실해 뒤를 돌아보았다. 에테리움 마법 학원의 수석이자, 완벽주의의 화신, 카이젤이었다. 항상 단정한 교복에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는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눈은 마치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동시에 불길처럼 타오르는 듯한 경고를 담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네가 가는 곳엔 항상 문제가 생기니까. 이번엔 또 무슨 기상천외한 일을 꾸미는 거지?”

    카이젤은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바닥 틈새를 힐끗 보았다. 위험한 건 알지만,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금지 구역이라니? 난 그저 길을 잃었을 뿐인데?”

    “이 복도는 오래전에 폐쇄된 곳이다. 이 아래엔… 네가 알 바 아니다.”

    그의 목소리에 일말의 흔들림이 있었다. ‘네가 알 바 아니다’라니, 오히려 더 궁금하게 만드는 말 아닌가?

    그때였다. 카펫 아래의 틈새에서 희미한 무지갯빛이 깜빡였다. 마치 누군가 나를 부르는 듯한, 신비로운 빛이었다. 나의 ‘사고 치는 촉’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어? 저기 뭐가…!”

    나는 무심코 카펫을 걷어냈다. 틈새는 생각보다 넓었다. 성인 남성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깊은 수직 통로. 그리고 그 안에서 올라오는 기묘한 마법 기류는… 내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어떤 마법과도 달랐다. 차갑고, 뜨겁고,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매혹적인.

    “엘리샤! 당장 손 떼지 못해!”

    카이젤이 다급하게 외치며 내게 달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호기심에 이끌린 내 몸은 이미 균형을 잃고 통로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으악! 카이젤! 잡아줘!”

    나는 허우적거리며 외쳤다. 카이젤은 한숨을 쉬는가 싶더니, 망설임 없이 내 손을 뻗어 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악력이 느껴졌다.

    문제는 내가 너무 빠르게 추락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카이젤도 내 손을 잡은 채로 균형을 잃고 통로 안으로 함께 빨려 들어갔다.

    “이런 망할…!”

    그의 짧은 욕설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엉켜서 좁은 통로를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머리가 부딪히고, 팔다리가 꺾이는 고통 속에서도, 카이젤은 끝까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꽤 긴 시간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축축한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습했으며, 오래된 흙과 돌멩이 냄새가 났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곳을 가득 채운 마법 기류였다.

    “여긴 대체… 어디야?”

    내 목소리는 떨렸다. 온몸이 쑤셨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떨어진 곳은 거대한 지하 공간이었다. 천장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고, 사방은 으스스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어디선가 발산되는 것 같았지만, 그 근원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공간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그리고 저 멀리, 거대한 수정 기둥들이 박혀 있는 제단 같은 것이 보였다. 그곳에서 가장 강렬한 마법의 파동이 느껴졌다. 위험하다는 본능적인 경고음이 머릿속에서 울렸지만, 나의 발걸음은 이미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엘리샤, 기다려! 함부로 움직이지 마!” 카이젤이 내 팔을 붙잡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냉철함을 잃고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은… 학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 봉인된, 금기의 심장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금기의 심장부라니. 이름부터가 이미 ‘로맨틱 코미디’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제단 쪽으로 다가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법의 기류가 몸을 감쌌다. 기분 좋은 간지러움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제단 위에 놓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놓여있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거대하고, 너무나도 생동감 넘치는 존재였다.

    크기는 거의 어린 송아지만 했다. 온몸은 무지개색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빛에 따라 붉게 타오르다가, 푸르게 반짝이고, 때로는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날개는 없었지만, 길고 유연한 몸체는 마치 비단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거대한 수정 기둥들이 그 존재를 에워싸고 있었고, 그 기둥들에서는 끊임없이 마법 에너지가 흘러나와 존재의 주변을 감쌌다.

    그것은… 마법 생물이었다. 내가 아는 어떤 마법 생물과도 달랐다. 강력한 마법 에너지를 내뿜으면서도, 동시에 너무나도 연약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그 존재의 가장 큰 특징은, 온몸에 꽂혀 있는 수십 개의 족쇄였다. 그것들은 빛을 흡수하는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고, 존재의 마법 에너지를 억누르는 듯했다. 마치… 봉인된 괴물처럼.

    하지만 괴물이라기엔, 너무나도… 귀여웠다.

    그 무지개 비늘 생명체는 제단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작고 동그란 코는 주기적으로 씰룩거렸고, 잠꼬대라도 하는 듯 비늘들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아주 깊은 꿈을 꾸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이게… 대체 뭐야?” 내 목소리는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카이젤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말도 안 돼… 이 아이는… 전설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알려진… ‘무지개 비늘 용’… 마법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존재인데… 이곳에 봉인되어 있었다니.”

    무지개 비늘 용. 마법의 심장. 봉인. 금기.
    모든 단어들이 내 머릿속에서 엉켜들었다.

    그때, 갑자기 무지개 비늘 용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족쇄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빛을 냈다. 용의 비늘이 더욱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악몽이라도 꾸는 듯, 몸을 뒤척이는 그 모습에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엘리샤, 안 돼!” 카이젤이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내 손이 무지개 비늘 용의 머리에 닿는 순간, 거대한 마법 에너지가 폭발했다.

    콰앙!

    온몸을 감싸는 빛과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마법 기류는 미친 듯이 회오리쳤고, 수정 기둥들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기가 비틀리고, 공간 자체가 뒤틀리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으아아악!”

    나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카이젤이 급하게 내 어깨를 잡아주었지만, 그도 비틀거렸다.

    “젠장, 봉인이 풀린다! 무지개 비늘 용은 주변의 마법 에너지를 불안정하게 만든다고!”

    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지만, 내 정신은 이미 혼미했다.
    눈을 겨우 뜨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주변의 돌멩이들이 갑자기 닭으로 변해 꼬꼬댁거리고, 일부 수정 기둥은 통통 튀는 무지개색 젤리로 변해버렸다. 심지어 카이젤의 완벽하게 정돈된 교복 셔츠는… 반짝이는 분홍색 턱시도로 변해 있었다!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고, 나를 붙잡은 그의 손은… 내 왼손이 되어 있었다.

    “뭐… 뭐야?!” 나는 당황해서 내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카이젤의 손이 붙어 있었다!

    말 그대로, 나와 카이젤의 손이 서로의 반대쪽 손에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엘리샤! 이건 네 짓이지?!” 카이젤은 분홍색 턱시도를 입은 채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짜증과 분노로 뒤섞여 있었지만, 내 손을 꽉 잡은 그의 손아귀에는 여전히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내가 뭘 했다고! 난 그냥… 어? 왜 갑자기 이렇게 추워?”

    그때였다. 내 몸이 갑자기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카이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엘리샤… 네 몸에… 나의 코트가…”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입고 있던 내 교복은 사라지고, 카이젤의 고급스러운 망토가 내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망토는… 어쩐지 너무 헐렁한 것이, 그의 마법이 잔뜩 묻어나는 듯했다.

    내 시선이 다시 카이젤에게로 향했다. 그는 이제 얇은 셔츠 차림이었다. 아니, 분홍색 턱시도 셔츠 차림이었다. 그리고 그 추운 지하 공간에서… 마치 얼음물에라도 들어간 듯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의 코트는 내 몸에 있었다.

    “세상에… 설마… 우리 몸이…!”

    “바뀐 건 코트와 손뿐이다! 나머지는 아직 괜찮… 으으 추워!”

    카이젤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희미하게 풀려 있었고,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추위에 약했다. 그리고 나는 더위에 약했다. 지금 내 몸은 그의 망토로 인해 너무나도 뜨거웠다.

    “이봐, 카이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네 망토 너무 더워! 나 쓰러질 것 같아!”

    “그럼 벗어! 으으… 내가 얼어 죽게 생겼다고!”

    “그럼 너도 벗어! 분홍색 턱시도! 난 네 손으로 내 코를 못 파잖아!”

    우리는 서로에게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무지개 비늘 용은 여전히 불안정하게 꿈틀거리고 있었고, 주변의 마법은 계속해서 기묘한 방식으로 변형되고 있었다. 돌멩이들은 토끼로 변하고, 천장에서는 반짝이는 과일이 떨어졌다.

    나는 카이젤의 얼굴을 보았다. 추위 때문에 파랗게 질려 있지만,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은… 왠지 모르게 따뜻했다. 내 손목에 묶인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과 익숙함.

    이 알 수 없는 마법의 심장부에서, 우리는 서로의 손에 묶인 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휘둘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금기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어이없는 혼돈 속에서, 예상치 못한 두근거림이 내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무지개 비늘 용은 잠시 뒤척이더니, 마침내 눈을 떴다.
    찬란한 무지갯빛 동공이 우리를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몸은 다시 한 번 격렬하게 뒤섞였다.

    “젠장, 이번엔 또 무슨…!”

    카이젤의 외침과 함께, 우리의 눈앞은 새하얗게 변했다.
    이 금기 아래에 숨겨진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 혼란 속에서, 우리의 관계는 어디로 흘러갈까?

    (다음 화에 계속)

  • 무협 독립적인 단편 소설

    강호에 이름 없는 고수들이 숱하게 많다지만, 단(段)은 그중에서도 유독 그림자 같았다. 그의 검은 그림자보다 빠르고, 그림자보다 고요했다. 아무도 그의 출신을 몰랐고, 그가 어디로 사라지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달이 없는 밤하늘 아래 번득이는 한 줄기 섬광처럼 나타나 세상의 시끄러움을 잠재우고는 홀연히 사라지는 고독한 검객. 사람들은 그를 고독검(孤獨劍)이라 불렀다.

    어느 해 깊은 가을, 낙엽이 발목까지 쌓인 산길을 홀로 거닐던 단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늙은 장물아비 방 노인이었다. 방 노인은 한때 강호의 기이한 보물들을 은밀히 거래하며 제법 이름을 날렸으나, 이제는 기침 소리마저 힘겨워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는 단의 은거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며칠 밤낮을 기다린 듯 지쳐 있었다.

    “흐읍… 흐읍… 고… 고독검님…”

    방 노인의 손에는 낡은 비단 천에 싸인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단은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방 노인은 겨우 숨을 고르며 천을 풀었다. 그 안에는 손바닥만 한 낡은 청동 조각이 있었다.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푸른 녹이 슬어있는 조각이었다. 그러나 그 표면에 새겨진 문양은 단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교하면서도 낯선 문양. 그리고 조각의 한쪽 끝에는 희미하게 끊어진 지도가 이어질 듯 새겨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조각에서 풍겨 나오는 기묘한 냉기. 손에 쥐는 순간 얼어붙을 듯한 한기였다.

    “이것은… 고독검님께 바치는 저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방 노인이 겨우 입을 열었다. “이것은 서역 상단을 통해 우연히 제 손에 들어온 물건입니다. 듣자 하니… 아득한 옛날, 그림자처럼 사라진 문명의 유물이라더군요. 지도를 따라가면… 전설 속의 ‘지하 만천루’로 향하는 길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허나, 그곳은… 강호의 어떤 고수도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저주의 땅이라 불립니다.”

    방 노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단은 청동 조각을 받아들었다. 조각의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그는 지도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희미하게 그려진 산맥과 강줄기, 그리고 알 수 없는 상형문자. 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 노인은 안도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결국 숨을 거두었다.

    홀로 남은 단은 청동 조각을 든 채 먼 산을 바라보았다. 지하 만천루. 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조각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기운은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모험심을 자극했다. 그는 결심했다. 이 잊혀진 비밀을 찾아 나설 때가 왔다고.

    단은 며칠 밤낮을 달려 험준한 산맥 깊숙한 곳에 다다랐다. 청동 조각의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한 울창한 숲 속, 거대한 폭포 뒤편이었다. 폭포수의 굉음이 천지를 뒤흔드는 곳. 단은 경공(輕功)을 펼쳐 물줄기를 가르고 바위 틈새로 몸을 날렸다.

    폭포 뒤에는 거대한 동굴 입구가 숨겨져 있었다. 입구는 기묘한 형상의 거석들로 막혀 있었는데, 그 사이로 희미하게 한 줄기 빛이 스며 나왔다. 단은 청동 조각을 꺼내 거석에 새겨진 문양에 대어 보았다. 놀랍게도 조각이 거석의 홈에 정확히 맞아들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거석들이 천천히 옆으로 밀려나며 거대한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 안으로 발을 디딘 순간, 훅 하고 흙먼지와 함께 오래된 공기가 단을 감쌌다. 횃불을 켜자 거대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수십 층 높이의 천장, 그리고 그 천장을 떠받치는 거대한 돌기둥들. 기둥마다 정교하게 새겨진 고대 문명의 문양과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단의 시선을 압도했다. 이것이 바로 지하 만천루인가. 단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놀랍군.”

    그의 낮은 중얼거림이 거대한 공간에 메아리쳤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작은 돌 부스러기들이 바닥을 굴렀다.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 중앙에는 거대한 석판이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단은 석판 위로 조심스레 발을 올렸다. 그 순간, ‘쉬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의 벽에서 수많은 독침들이 튀어나왔다.

    단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검을 뽑았다. 그의 검은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허공을 가르며 독침들을 쳐냈다. ‘팅팅팅!’ 맑은 금속음과 함께 독침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함정이었다. 역시 이곳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다.

    함정을 피해 광장을 가로질러 다음 통로로 들어섰다. 통로 끝에는 거대한 철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문에는 다시 청동 조각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문양이 박혀 있었다. 단은 조심스레 청동 조각을 문양에 대었다. ‘끼이이이익!’ 귀를 찢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 안에는 또 다른 공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이전의 공간과는 확연히 달랐다. 거대한 석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그 석상들은 모두 무기를 든 채 단을 향해 서 있었다. 단의 발걸음이 멈추자, 가장 앞에 서 있던 석상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우르릉!’

    석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과 돌이 부딪히는 소리, 땅을 울리는 묵직한 발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열 명이 넘는 석상들이 동시에 단을 향해 돌진했다. 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들은 단순한 조각상이 아니었다. 고대 문명이 남긴 수호자들.

    단은 검을 고쳐 잡았다. 검 끝에서 푸른 기운이 솟아올랐다. 무형의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첫 번째 석상이 든 거대한 몽둥이가 단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단은 몸을 낮춰 피하며 검을 찔러 넣었다. ‘쨍그랑!’ 몽둥이는 바닥에 부딪혀 거대한 파편을 일으켰고, 단의 검은 석상의 복부에 정확히 박혔다. 그러나 석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단단하군.”

    단은 검을 뽑아 뒤로 물러섰다. 석상의 약점을 찾아야 했다. 동시에 여러 석상들이 달려들었다. 단은 경공을 펼쳐 그들 사이를 유령처럼 오갔다. 그의 검은 마치 나비처럼 가볍게 움직였지만,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는 치명적인 힘이 담겨 있었다. 그는 석상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팔과 다리의 연결부, 그리고 관절 부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흐읍!”

    단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검에서 푸른 검기가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는 바람처럼 석상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쉬이익, 콰앙!’ 단의 검이 춤추듯 움직이며 석상들의 약점을 노렸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거대한 석상들이 하나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석상마저 쓰러지자, 공간은 다시 고요해졌다.

    단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몸은 아직 지치지 않았으나, 고대의 기운이 느껴지는 석상들과의 싸움은 정신적으로 피로를 안겨주었다. 그는 쓰러진 석상들 사이를 지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마지막 통로를 지나자, 거대한 돔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천장은 보이지 않는 힘으로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 중앙에는 거대한 제단이 솟아 있었다.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공간 전체를 휘감는 묵직하면서도 어두운 기운이 단을 짓눌렀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리는, 태고적부터 존재했던 듯한 원초적인 힘이었다.

    단은 조심스레 제단에 다가섰다. 제단 표면에는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단은 그 문자를 해독할 수는 없었으나, 청동 조각에 새겨진 문양과 유사한 형태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는 조각을 꺼내 제단 중앙에 있는 움푹 파인 홈에 대어 보았다. 청동 조각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웅-‘

    조각이 제단에 안착하는 순간, 공간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제단 중앙에서 어둠이 솟아오르며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칠흑 같은 구슬이었다. 지름이 한 자 정도 되는 그 구슬은 빛을 흡수하는 듯 검푸른 빛을 뿜어냈고, 구슬 주변의 공기는 기묘하게 왜곡되는 듯했다. 단의 심장이 강하게 울렸다. 이것이 바로 지하 만천루의 비밀, 고대 문명이 봉인하고자 했던 힘이었다.

    구슬에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파괴적이고 혼돈스러웠으며, 동시에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을 것 같은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단은 직감했다. 이 힘은 선과 악을 넘어선, 이 세상의 균형을 뒤흔들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라는 것을. 고대 문명은 이 힘을 제어하려다 실패하고, 결국 봉인하여 세상으로부터 숨기려 했던 것이다.

    그 순간, 구슬 주변의 어둠 속에서 희미한 형체가 떠올랐다. 거대한 장포를 두른 노인의 모습이었다. 노인의 눈은 깊은 어둠을 담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낡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당도했군.” 노인의 목소리는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바위처럼 낮고 묵직했다. “이곳에 들어선 자는 봉인된 힘을 해방하거나, 다시 봉인하여 이곳을 떠날 수 있다. 허나, 그 힘은…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누구인가.” 단이 검을 든 채 물었다.

    “나는… 이 봉인을 지키는 자. 나의 문명은 이 힘을 통제하려다 파멸할 뻔했다. 우리는 이 ‘태초의 핵’을 지하 깊숙이 봉인하고, 지키는 것을 마지막 임무로 삼았다. 너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 힘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잠재울 것인가.”

    노인의 눈빛은 단을 꿰뚫는 듯했다. 단은 칠흑 같은 구슬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세상의 모든 혼돈과 질서가 담겨 있는 듯했다. 한순간, 그 힘을 손에 넣는다면 자신이 어떤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 강호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상상했다. 그러나 곧,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그 힘으로 인해 파멸했던 고대 문명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강호에 미칠 혼란.

    “나는 이 힘을 탐하지 않는다.” 단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것은 세상의 균형을 위해 봉인되어야 할 것이다.”

    노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봉인을 강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너의 모든 내공을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너의 목숨까지도.”

    단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검을 제자리에 꽂고, 두 손을 모아 칠흑 같은 구슬을 향해 내밀었다. 온몸의 내공이 단전에서 끓어올라 손끝으로 모였다. 그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구슬을 감쌌다. 구슬은 맹렬하게 저항하는 듯 흔들렸고, 어두운 기운이 단을 집어삼키려는 듯 덤벼들었다.

    “흐으으읍…!”

    단은 이를 악물었다. 혈관이 터질 듯 팽창하고, 온몸의 기운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고독검의 검기, 그리고 그가 수십 년간 갈고닦은 내공의 정수. 푸른 기운과 검은 어둠이 격렬하게 뒤섞이며 공간을 뒤흔들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단의 몸에서 빛이 사라지고, 그는 겨우 몸을 지탱하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칠흑 같던 구슬은 다시 옅은 어둠을 띠고 잠잠해졌다. 봉인이 더욱 강력하게 강화된 것이다. 노인의 형체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고맙다… 고독검이여. 이제… 이 비밀은 다시 잠들 것이다.”

    노인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쳤다. 단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온몸의 기력이 소진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고요했다. 그는 거대한 비밀을 지켜낸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이 지하 만천루의 존재를 모르고, 그 안에 잠든 태초의 핵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땅했다.

    단은 겨우 몸을 일으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는 다시 그림자처럼 세상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잊혀진 고대 문명의 비밀을 짊어진 채, 고독한 검객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것이다. 세상의 시끄러움 속에서도, 그만이 아는 하나의 거대한 평화를 지키며.

  • 무협 독립적인 단편 소설

    강호에 이름 없는 고수들이 숱하게 많다지만, 단(段)은 그중에서도 유독 그림자 같았다. 그의 검은 그림자보다 빠르고, 그림자보다 고요했다. 아무도 그의 출신을 몰랐고, 그가 어디로 사라지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달이 없는 밤하늘 아래 번득이는 한 줄기 섬광처럼 나타나 세상의 시끄러움을 잠재우고는 홀연히 사라지는 고독한 검객. 사람들은 그를 고독검(孤獨劍)이라 불렀다.

    어느 해 깊은 가을, 낙엽이 발목까지 쌓인 산길을 홀로 거닐던 단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늙은 장물아비 방 노인이었다. 방 노인은 한때 강호의 기이한 보물들을 은밀히 거래하며 제법 이름을 날렸으나, 이제는 기침 소리마저 힘겨워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는 단의 은거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며칠 밤낮을 기다린 듯 지쳐 있었다.

    “흐읍… 흐읍… 고… 고독검님…”

    방 노인의 손에는 낡은 비단 천에 싸인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단은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방 노인은 겨우 숨을 고르며 천을 풀었다. 그 안에는 손바닥만 한 낡은 청동 조각이 있었다.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푸른 녹이 슬어있는 조각이었다. 그러나 그 표면에 새겨진 문양은 단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교하면서도 낯선 문양. 그리고 조각의 한쪽 끝에는 희미하게 끊어진 지도가 이어질 듯 새겨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조각에서 풍겨 나오는 기묘한 냉기. 손에 쥐는 순간 얼어붙을 듯한 한기였다.

    “이것은… 고독검님께 바치는 저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방 노인이 겨우 입을 열었다. “이것은 서역 상단을 통해 우연히 제 손에 들어온 물건입니다. 듣자 하니… 아득한 옛날, 그림자처럼 사라진 문명의 유물이라더군요. 지도를 따라가면… 전설 속의 ‘지하 만천루’로 향하는 길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허나, 그곳은… 강호의 어떤 고수도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저주의 땅이라 불립니다.”

    방 노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단은 청동 조각을 받아들었다. 조각의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그는 지도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희미하게 그려진 산맥과 강줄기, 그리고 알 수 없는 상형문자. 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 노인은 안도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결국 숨을 거두었다.

    홀로 남은 단은 청동 조각을 든 채 먼 산을 바라보았다. 지하 만천루. 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조각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기운은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모험심을 자극했다. 그는 결심했다. 이 잊혀진 비밀을 찾아 나설 때가 왔다고.

    단은 며칠 밤낮을 달려 험준한 산맥 깊숙한 곳에 다다랐다. 청동 조각의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한 울창한 숲 속, 거대한 폭포 뒤편이었다. 폭포수의 굉음이 천지를 뒤흔드는 곳. 단은 경공(輕功)을 펼쳐 물줄기를 가르고 바위 틈새로 몸을 날렸다.

    폭포 뒤에는 거대한 동굴 입구가 숨겨져 있었다. 입구는 기묘한 형상의 거석들로 막혀 있었는데, 그 사이로 희미하게 한 줄기 빛이 스며 나왔다. 단은 청동 조각을 꺼내 거석에 새겨진 문양에 대어 보았다. 놀랍게도 조각이 거석의 홈에 정확히 맞아들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거석들이 천천히 옆으로 밀려나며 거대한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 안으로 발을 디딘 순간, 훅 하고 흙먼지와 함께 오래된 공기가 단을 감쌌다. 횃불을 켜자 거대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수십 층 높이의 천장, 그리고 그 천장을 떠받치는 거대한 돌기둥들. 기둥마다 정교하게 새겨진 고대 문명의 문양과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단의 시선을 압도했다. 이것이 바로 지하 만천루인가. 단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놀랍군.”

    그의 낮은 중얼거림이 거대한 공간에 메아리쳤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작은 돌 부스러기들이 바닥을 굴렀다.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 중앙에는 거대한 석판이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단은 석판 위로 조심스레 발을 올렸다. 그 순간, ‘쉬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의 벽에서 수많은 독침들이 튀어나왔다.

    단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검을 뽑았다. 그의 검은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허공을 가르며 독침들을 쳐냈다. ‘팅팅팅!’ 맑은 금속음과 함께 독침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함정이었다. 역시 이곳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다.

    함정을 피해 광장을 가로질러 다음 통로로 들어섰다. 통로 끝에는 거대한 철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문에는 다시 청동 조각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문양이 박혀 있었다. 단은 조심스레 청동 조각을 문양에 대었다. ‘끼이이이익!’ 귀를 찢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 안에는 또 다른 공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이전의 공간과는 확연히 달랐다. 거대한 석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그 석상들은 모두 무기를 든 채 단을 향해 서 있었다. 단의 발걸음이 멈추자, 가장 앞에 서 있던 석상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우르릉!’

    석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과 돌이 부딪히는 소리, 땅을 울리는 묵직한 발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열 명이 넘는 석상들이 동시에 단을 향해 돌진했다. 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들은 단순한 조각상이 아니었다. 고대 문명이 남긴 수호자들.

    단은 검을 고쳐 잡았다. 검 끝에서 푸른 기운이 솟아올랐다. 무형의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첫 번째 석상이 든 거대한 몽둥이가 단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단은 몸을 낮춰 피하며 검을 찔러 넣었다. ‘쨍그랑!’ 몽둥이는 바닥에 부딪혀 거대한 파편을 일으켰고, 단의 검은 석상의 복부에 정확히 박혔다. 그러나 석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단단하군.”

    단은 검을 뽑아 뒤로 물러섰다. 석상의 약점을 찾아야 했다. 동시에 여러 석상들이 달려들었다. 단은 경공을 펼쳐 그들 사이를 유령처럼 오갔다. 그의 검은 마치 나비처럼 가볍게 움직였지만,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는 치명적인 힘이 담겨 있었다. 그는 석상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팔과 다리의 연결부, 그리고 관절 부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흐읍!”

    단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검에서 푸른 검기가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는 바람처럼 석상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쉬이익, 콰앙!’ 단의 검이 춤추듯 움직이며 석상들의 약점을 노렸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거대한 석상들이 하나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석상마저 쓰러지자, 공간은 다시 고요해졌다.

    단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몸은 아직 지치지 않았으나, 고대의 기운이 느껴지는 석상들과의 싸움은 정신적으로 피로를 안겨주었다. 그는 쓰러진 석상들 사이를 지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마지막 통로를 지나자, 거대한 돔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천장은 보이지 않는 힘으로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 중앙에는 거대한 제단이 솟아 있었다.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공간 전체를 휘감는 묵직하면서도 어두운 기운이 단을 짓눌렀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리는, 태고적부터 존재했던 듯한 원초적인 힘이었다.

    단은 조심스레 제단에 다가섰다. 제단 표면에는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단은 그 문자를 해독할 수는 없었으나, 청동 조각에 새겨진 문양과 유사한 형태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는 조각을 꺼내 제단 중앙에 있는 움푹 파인 홈에 대어 보았다. 청동 조각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웅-‘

    조각이 제단에 안착하는 순간, 공간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제단 중앙에서 어둠이 솟아오르며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칠흑 같은 구슬이었다. 지름이 한 자 정도 되는 그 구슬은 빛을 흡수하는 듯 검푸른 빛을 뿜어냈고, 구슬 주변의 공기는 기묘하게 왜곡되는 듯했다. 단의 심장이 강하게 울렸다. 이것이 바로 지하 만천루의 비밀, 고대 문명이 봉인하고자 했던 힘이었다.

    구슬에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파괴적이고 혼돈스러웠으며, 동시에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을 것 같은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단은 직감했다. 이 힘은 선과 악을 넘어선, 이 세상의 균형을 뒤흔들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라는 것을. 고대 문명은 이 힘을 제어하려다 실패하고, 결국 봉인하여 세상으로부터 숨기려 했던 것이다.

    그 순간, 구슬 주변의 어둠 속에서 희미한 형체가 떠올랐다. 거대한 장포를 두른 노인의 모습이었다. 노인의 눈은 깊은 어둠을 담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낡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당도했군.” 노인의 목소리는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바위처럼 낮고 묵직했다. “이곳에 들어선 자는 봉인된 힘을 해방하거나, 다시 봉인하여 이곳을 떠날 수 있다. 허나, 그 힘은…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누구인가.” 단이 검을 든 채 물었다.

    “나는… 이 봉인을 지키는 자. 나의 문명은 이 힘을 통제하려다 파멸할 뻔했다. 우리는 이 ‘태초의 핵’을 지하 깊숙이 봉인하고, 지키는 것을 마지막 임무로 삼았다. 너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 힘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잠재울 것인가.”

    노인의 눈빛은 단을 꿰뚫는 듯했다. 단은 칠흑 같은 구슬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세상의 모든 혼돈과 질서가 담겨 있는 듯했다. 한순간, 그 힘을 손에 넣는다면 자신이 어떤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 강호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상상했다. 그러나 곧,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그 힘으로 인해 파멸했던 고대 문명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강호에 미칠 혼란.

    “나는 이 힘을 탐하지 않는다.” 단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것은 세상의 균형을 위해 봉인되어야 할 것이다.”

    노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봉인을 강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너의 모든 내공을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너의 목숨까지도.”

    단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검을 제자리에 꽂고, 두 손을 모아 칠흑 같은 구슬을 향해 내밀었다. 온몸의 내공이 단전에서 끓어올라 손끝으로 모였다. 그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구슬을 감쌌다. 구슬은 맹렬하게 저항하는 듯 흔들렸고, 어두운 기운이 단을 집어삼키려는 듯 덤벼들었다.

    “흐으으읍…!”

    단은 이를 악물었다. 혈관이 터질 듯 팽창하고, 온몸의 기운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고독검의 검기, 그리고 그가 수십 년간 갈고닦은 내공의 정수. 푸른 기운과 검은 어둠이 격렬하게 뒤섞이며 공간을 뒤흔들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단의 몸에서 빛이 사라지고, 그는 겨우 몸을 지탱하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칠흑 같던 구슬은 다시 옅은 어둠을 띠고 잠잠해졌다. 봉인이 더욱 강력하게 강화된 것이다. 노인의 형체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고맙다… 고독검이여. 이제… 이 비밀은 다시 잠들 것이다.”

    노인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쳤다. 단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온몸의 기력이 소진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고요했다. 그는 거대한 비밀을 지켜낸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이 지하 만천루의 존재를 모르고, 그 안에 잠든 태초의 핵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땅했다.

    단은 겨우 몸을 일으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는 다시 그림자처럼 세상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잊혀진 고대 문명의 비밀을 짊어진 채, 고독한 검객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것이다. 세상의 시끄러움 속에서도, 그만이 아는 하나의 거대한 평화를 지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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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이 뼈저리게 시린 지하 통로를 따라 흐느적거렸다. 습기 찬 벽은 곰팡이와 퀴퀴한 흙냄새를 뿜어냈고, 간간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횃불의 희미한 불꽃만이 좁은 통로를 가로지르는 그림자들을 더욱 기괴하게 만들었다.

    “모두 들었겠지. 오늘 밤이다.”

    강하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의 얼굴은 횃불 불빛 아래 더욱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굳게 다문 입술은 지쳐 보였지만 단단했다. 스무 명이 채 안 되는 사내와 여인들이 그의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공포와 희망,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 대한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모두가 흑염 제국의 채찍 아래 신음하던 평범한 이들이었다. 광부, 농부, 장인, 그리고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이들까지.

    “황금 손의 전당은 경비가 삼엄해.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저들이 우리의 마지막 식량까지 빼앗아 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다.” 하준이 말을 이었다. “저 전당 안에 갇힌 건 식량만이 아니야. 우리들의 희망, 우리들의 미래도 저 안에 갇혀 있어.”

    유나, 하준의 옆에 앉은 젊은 여인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에는 녹슨 단검이 쥐여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흑염 제국의 탐욕스러운 세금 징수에 항의하다 매질을 당해 죽었다. 그 후로 유나는 복수를 위한 불꽃을 가슴에 품었다.

    “우린 이미 다 잃었어, 대장. 더 잃을 것도 없어.” 한 사내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영양실조로 움푹 들어가 있었고, 뼈만 남은 손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그의 눈만은 맹렬한 불꽃을 품고 있었다.

    “그래, 맞아. 그래서 우리가 이기는 거다.” 하준은 그 사내의 어깨를 두드렸다. “놈들은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잃을 게 없다는 걸 상상도 못 해. 놈들은 우리의 이빨이 부러져도 계속 물어뜯을 줄은 모른다.”

    계획은 단순했다. 도시 변두리에 위치한 ‘황금 손의 전당’은 제국의 상징적인 식량 창고이자 세금 징수처였다. 그곳을 습격하여 식량을 탈취하고, 제국의 허를 찌르는 것이 목표였다. 비록 작은 불씨였지만, 하준은 이 불씨가 언젠가 흑염 제국의 거대한 장막을 태워버릴 불길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하준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흑염 제국은 단순한 폭력과 탐욕으로만 유지되는 제국이 아니었다. 종종 제국의 고위 관리들이나 심지어 일부 병사들에게서도 기묘한 기운을 느꼈다. 그들의 눈빛은 때때로 공허했고, 그들의 힘은 인간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갈림터 도시 지하에는 수백 년 된 고대 유적들이 묻혀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유적에서 올라오는 불길한 속삭임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광부였던 하준은 지하 깊숙한 곳에서 일하며 가끔 기분 나쁜 진동과 알 수 없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땅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그것이 단순한 광기 어린 상상이라고 애써 무시했지만, 그 소리는 여전히 그의 귓가에 남아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그들은 지하 통로를 통해 지상으로 기어 나왔다. 밤의 장막이 갈림터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칙칙한 건물들은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고,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가축의 울음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제국 병사들의 발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려왔다.

    황금 손의 전당은 예상대로 굳건히 서 있었다. 높다란 벽은 밤하늘을 찌를 듯했고, 정문 앞에는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전당 뒤편의 담벼락을 넘기로 했다.

    “셋, 둘, 하나!”

    하준의 신호와 함께, 미리 준비해 둔 갈고리 밧줄이 담벼락 위로 날아올랐다. 금속이 벽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유나가 재빨리 밧줄을 타고 올라갔고, 그녀의 뒤를 이어 다른 이들도 조심스럽게 담을 넘었다. 하준이 마지막으로 담을 넘자, 그들은 전당의 거대한 안뜰에 발을 디뎠다.

    안뜰은 놀랍도록 조용했다. 이 정도 규모의 전당이라면 더 많은 병사가 있어야 정상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하준의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무 조용해… 함정인가?” 유나가 속삭였다.

    “아니, 뭔가 이상해.” 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며 주변의 공기가 묘하게 바뀌었음을 감지했다. 평소의 어둡고 습한 밤공기가 아니었다. 미묘한 비린내와 함께, 알 수 없는 끈적함이 피부에 와 닿았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내부로 침투했다. 좁은 복도를 따라 걸어가자, 거대한 창고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예상대로 산더미 같은 곡식 자루와 보급품들이 쌓여 있었다. 한밤중에 이 정도의 보급품은 엄청난 유혹이었다. 일행의 눈에는 희망과 탐욕이 스쳤다.

    “어서, 최대한 많이 가져가!” 하준이 명령했다.

    그들이 곡식 자루를 옮기기 시작했을 때였다. 창고 저편, 거대한 곡식 더미 뒤에 숨겨진 듯한 철문이 눈에 들어왔다. 문은 검고 육중했으며, 표면에는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하준은 본능적으로 그 문에 이끌렸다.

    “잠깐. 저 문은 뭐지?”

    그는 일행에게 식량 운반을 멈추게 하고 그 철문으로 다가갔다. 문에는 자물쇠조차 없었다. 아니, 자물쇠가 있어야 할 자리에 녹슨 쇠붙이들이 문과 일체화되어 있었다. 문양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유나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문양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이런 문양은 본 적이 없어요. 제국의 어떤 문양과도 달라요.”

    하준이 문에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지만, 그의 귀에 닿은 것은 바람 소리도, 물소리도 아니었다.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쿵, 쿵, 쿵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이해할 수 없는 속삭임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그의 뇌리를 파고들어, 미칠 듯한 두통을 유발했다.

    “대장, 괜찮아요?” 유나가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하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지 않아. 저 문 너머에 뭔가 있어. 식량보다 훨씬 더 중요한, 아니… 훨씬 더 위험한 것이.”

    그는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쿵, 쿵. 문은 단단했다. 그러나 그가 문을 두드릴 때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심장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그리고 속삭임은 더욱 또렷해졌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존재의 의지가 그의 정신을 잠식하려 드는 듯했다.

    그때, 갑자기 창고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이 울렸다. 그들은 놀라 몸을 돌렸다.
    창고의 입구가 부서지고 있었다. 단순한 병사들이 아니었다. 흑염 제국의 특별 감시병들이었다. 그들은 일반 병사들과는 다른 갑옷을 입고 있었고, 헬멧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기괴하게 생긴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놈들이 눈치챘다! 후퇴!” 하준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감시병들은 엄청난 속도로 창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움직임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기계적인 인형에 가까웠다. 그들의 수는 적었지만, 그들에게서는 압도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그때,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심장 소리가 최고조에 달했다. 쿵! 거대한 진동이 창고 바닥을 흔들었다. 그리고 철문의 중앙에 새겨진 가장 큰 문양이 붉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붉은 빛은 마치 혈관처럼 문양을 따라 퍼져나갔다.

    “저… 저건 뭐야…?” 유나가 경악하며 철문을 가리켰다.

    붉은 빛이 문양 전체를 뒤덮자, 육중한 철문이 천천히,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색깔을 집어삼키는, 원초적인 공허 그 자체였다. 그 공허 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비명이 아니었다. 수천, 수만 개의 영혼이 동시에 고통받는 듯한, 광기를 자극하는 소리였다.

    하준은 그 소리에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그의 동지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 있었고, 입에서는 알 수 없는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순식간에 미쳐버린 것이다.

    “도망쳐! 모두 도망쳐!” 하준이 절규했다.

    하지만 감시병들은 이미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텅 빈 눈동자의 병사들은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그들의 움직임은 섬뜩할 정도로 정확하고 빨랐다. 저항군 몇몇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준은 유나를 밀치며 외쳤다. “나가! 어떻게든 빠져나가!”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감시병들에게 맞섰다. 그의 눈은 철문 안쪽의 공허를 향했다. 그리고 그 공허 속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거대한,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차갑고 끈적했으며, 수억 년의 어둠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흑염 제국이 숭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진정으로 섬기는 존재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는 듯했다.

    그것의 일부가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순간, 하준의 정신에 거대한 파도가 휘몰아쳤다.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형상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촉수, 셀 수 없는 눈동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듯한 냉혹한 지성.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가 그의 영혼을 꿰뚫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는 이미 한 명의 감시병이 무기를 치켜들고 있었다. 하준은 마지막으로 유나가 창고의 다른 쪽 문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철문 안쪽의 공허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인지할 수 없는 형태의 존재가, 흑염 제국의 진정한 지배자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준의 귀에는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그 존재의 웃음소리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절규였을까.
    창고의 모든 빛이 꺼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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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이 뼈저리게 시린 지하 통로를 따라 흐느적거렸다. 습기 찬 벽은 곰팡이와 퀴퀴한 흙냄새를 뿜어냈고, 간간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횃불의 희미한 불꽃만이 좁은 통로를 가로지르는 그림자들을 더욱 기괴하게 만들었다.

    “모두 들었겠지. 오늘 밤이다.”

    강하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의 얼굴은 횃불 불빛 아래 더욱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굳게 다문 입술은 지쳐 보였지만 단단했다. 스무 명이 채 안 되는 사내와 여인들이 그의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공포와 희망,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 대한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모두가 흑염 제국의 채찍 아래 신음하던 평범한 이들이었다. 광부, 농부, 장인, 그리고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이들까지.

    “황금 손의 전당은 경비가 삼엄해.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저들이 우리의 마지막 식량까지 빼앗아 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다.” 하준이 말을 이었다. “저 전당 안에 갇힌 건 식량만이 아니야. 우리들의 희망, 우리들의 미래도 저 안에 갇혀 있어.”

    유나, 하준의 옆에 앉은 젊은 여인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에는 녹슨 단검이 쥐여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흑염 제국의 탐욕스러운 세금 징수에 항의하다 매질을 당해 죽었다. 그 후로 유나는 복수를 위한 불꽃을 가슴에 품었다.

    “우린 이미 다 잃었어, 대장. 더 잃을 것도 없어.” 한 사내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영양실조로 움푹 들어가 있었고, 뼈만 남은 손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그의 눈만은 맹렬한 불꽃을 품고 있었다.

    “그래, 맞아. 그래서 우리가 이기는 거다.” 하준은 그 사내의 어깨를 두드렸다. “놈들은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잃을 게 없다는 걸 상상도 못 해. 놈들은 우리의 이빨이 부러져도 계속 물어뜯을 줄은 모른다.”

    계획은 단순했다. 도시 변두리에 위치한 ‘황금 손의 전당’은 제국의 상징적인 식량 창고이자 세금 징수처였다. 그곳을 습격하여 식량을 탈취하고, 제국의 허를 찌르는 것이 목표였다. 비록 작은 불씨였지만, 하준은 이 불씨가 언젠가 흑염 제국의 거대한 장막을 태워버릴 불길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하준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흑염 제국은 단순한 폭력과 탐욕으로만 유지되는 제국이 아니었다. 종종 제국의 고위 관리들이나 심지어 일부 병사들에게서도 기묘한 기운을 느꼈다. 그들의 눈빛은 때때로 공허했고, 그들의 힘은 인간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갈림터 도시 지하에는 수백 년 된 고대 유적들이 묻혀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유적에서 올라오는 불길한 속삭임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광부였던 하준은 지하 깊숙한 곳에서 일하며 가끔 기분 나쁜 진동과 알 수 없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땅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그것이 단순한 광기 어린 상상이라고 애써 무시했지만, 그 소리는 여전히 그의 귓가에 남아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그들은 지하 통로를 통해 지상으로 기어 나왔다. 밤의 장막이 갈림터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칙칙한 건물들은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고,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가축의 울음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제국 병사들의 발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려왔다.

    황금 손의 전당은 예상대로 굳건히 서 있었다. 높다란 벽은 밤하늘을 찌를 듯했고, 정문 앞에는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전당 뒤편의 담벼락을 넘기로 했다.

    “셋, 둘, 하나!”

    하준의 신호와 함께, 미리 준비해 둔 갈고리 밧줄이 담벼락 위로 날아올랐다. 금속이 벽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유나가 재빨리 밧줄을 타고 올라갔고, 그녀의 뒤를 이어 다른 이들도 조심스럽게 담을 넘었다. 하준이 마지막으로 담을 넘자, 그들은 전당의 거대한 안뜰에 발을 디뎠다.

    안뜰은 놀랍도록 조용했다. 이 정도 규모의 전당이라면 더 많은 병사가 있어야 정상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하준의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무 조용해… 함정인가?” 유나가 속삭였다.

    “아니, 뭔가 이상해.” 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며 주변의 공기가 묘하게 바뀌었음을 감지했다. 평소의 어둡고 습한 밤공기가 아니었다. 미묘한 비린내와 함께, 알 수 없는 끈적함이 피부에 와 닿았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내부로 침투했다. 좁은 복도를 따라 걸어가자, 거대한 창고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예상대로 산더미 같은 곡식 자루와 보급품들이 쌓여 있었다. 한밤중에 이 정도의 보급품은 엄청난 유혹이었다. 일행의 눈에는 희망과 탐욕이 스쳤다.

    “어서, 최대한 많이 가져가!” 하준이 명령했다.

    그들이 곡식 자루를 옮기기 시작했을 때였다. 창고 저편, 거대한 곡식 더미 뒤에 숨겨진 듯한 철문이 눈에 들어왔다. 문은 검고 육중했으며, 표면에는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하준은 본능적으로 그 문에 이끌렸다.

    “잠깐. 저 문은 뭐지?”

    그는 일행에게 식량 운반을 멈추게 하고 그 철문으로 다가갔다. 문에는 자물쇠조차 없었다. 아니, 자물쇠가 있어야 할 자리에 녹슨 쇠붙이들이 문과 일체화되어 있었다. 문양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유나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문양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이런 문양은 본 적이 없어요. 제국의 어떤 문양과도 달라요.”

    하준이 문에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지만, 그의 귀에 닿은 것은 바람 소리도, 물소리도 아니었다.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쿵, 쿵, 쿵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이해할 수 없는 속삭임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그의 뇌리를 파고들어, 미칠 듯한 두통을 유발했다.

    “대장, 괜찮아요?” 유나가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하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지 않아. 저 문 너머에 뭔가 있어. 식량보다 훨씬 더 중요한, 아니… 훨씬 더 위험한 것이.”

    그는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쿵, 쿵. 문은 단단했다. 그러나 그가 문을 두드릴 때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심장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그리고 속삭임은 더욱 또렷해졌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존재의 의지가 그의 정신을 잠식하려 드는 듯했다.

    그때, 갑자기 창고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이 울렸다. 그들은 놀라 몸을 돌렸다.
    창고의 입구가 부서지고 있었다. 단순한 병사들이 아니었다. 흑염 제국의 특별 감시병들이었다. 그들은 일반 병사들과는 다른 갑옷을 입고 있었고, 헬멧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기괴하게 생긴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놈들이 눈치챘다! 후퇴!” 하준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감시병들은 엄청난 속도로 창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움직임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기계적인 인형에 가까웠다. 그들의 수는 적었지만, 그들에게서는 압도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그때,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심장 소리가 최고조에 달했다. 쿵! 거대한 진동이 창고 바닥을 흔들었다. 그리고 철문의 중앙에 새겨진 가장 큰 문양이 붉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붉은 빛은 마치 혈관처럼 문양을 따라 퍼져나갔다.

    “저… 저건 뭐야…?” 유나가 경악하며 철문을 가리켰다.

    붉은 빛이 문양 전체를 뒤덮자, 육중한 철문이 천천히,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색깔을 집어삼키는, 원초적인 공허 그 자체였다. 그 공허 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비명이 아니었다. 수천, 수만 개의 영혼이 동시에 고통받는 듯한, 광기를 자극하는 소리였다.

    하준은 그 소리에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그의 동지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 있었고, 입에서는 알 수 없는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순식간에 미쳐버린 것이다.

    “도망쳐! 모두 도망쳐!” 하준이 절규했다.

    하지만 감시병들은 이미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텅 빈 눈동자의 병사들은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그들의 움직임은 섬뜩할 정도로 정확하고 빨랐다. 저항군 몇몇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준은 유나를 밀치며 외쳤다. “나가! 어떻게든 빠져나가!”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감시병들에게 맞섰다. 그의 눈은 철문 안쪽의 공허를 향했다. 그리고 그 공허 속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거대한,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차갑고 끈적했으며, 수억 년의 어둠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흑염 제국이 숭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진정으로 섬기는 존재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는 듯했다.

    그것의 일부가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순간, 하준의 정신에 거대한 파도가 휘몰아쳤다.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형상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촉수, 셀 수 없는 눈동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듯한 냉혹한 지성.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가 그의 영혼을 꿰뚫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는 이미 한 명의 감시병이 무기를 치켜들고 있었다. 하준은 마지막으로 유나가 창고의 다른 쪽 문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철문 안쪽의 공허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인지할 수 없는 형태의 존재가, 흑염 제국의 진정한 지배자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준의 귀에는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그 존재의 웃음소리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절규였을까.
    창고의 모든 빛이 꺼지는 듯했다.

  • 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차가운 금속 냄새가 코를 찔렀다.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뒤덮인 벙커의 공기는 늘 그랬다. 습하고, 무겁고, 어딘지 모르게 시체 썩는 냄새가 희미하게 섞인 듯한. 이곳, ‘새벽’ 기지는 인류 최후의 보루 중 하나였지만, 바깥 세상의 지옥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지 7년. 생존자들은 폐허 위에서 겨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강태진은 낡은 야전상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사령관실 입구 앞에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땀으로 축축한 얼굴의 박상병이 초조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박상병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손에는 자동소총이 들려 있었지만 그 총은 지금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이 상황은 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강… 강태진 씨. 소령님이… 소령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박상병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강태진은 대꾸 없이 무거운 철문을 응시했다. 사령관 김소령의 집무실이자 숙소로 사용되던 이 방은, 새벽 기지 내에서도 가장 삼엄한 보안을 자랑했다. 외부인은커녕, 기지 내 간부조차 소령의 승인 없이는 발 한 걸음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강제로 열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안에서 잠겨 있었다고요?” 강태진이 짧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마치 방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한가로운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네… 젠장, 밤새 통신이 안 되길래 아침에 와봤더니… 문은 굳게 닫혀있고,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나고… 결국 폭파 전문가를 불러서 겨우 열었습니다.” 박상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설명했다. “그리고 안에는… 소령님이, 그 모습으로…”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강태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전등을 켜 철문 안쪽을 비췄다. 철문은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고, 두께만 해도 30센티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지문 인식과 망막 스캔, 그리고 수동 잠금장치까지 삼중으로 되어 있었다. 이 문을 강제로 열었다는 흔적은 선명했다. 녹아내린 용접 자국과 군데군데 그을린 철판.

    강태진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마치 누군가 치우기라도 한 듯, 불필요한 흔적은 없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육중한 철제 책상 뒤로, 김소령이 의자에 기댄 채 쓰러져 있었다. 그의 목에는 선명한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고, 그 밑으로 검붉은 피가 흥건하게 고여 책상 위 서류들을 적시고 있었다.

    “어떤 무기를 사용한 것 같습니까?” 강태진은 시신을 직접 건드리지 않고 눈으로만 살폈다.

    “글쎄요… 날카로운 칼 같은 걸로 한 번에 그은 것 같습니다. 총상이나 다른 흔적은 없고요.” 박상병이 덧붙였다. “주변에서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바깥으로 던질 수도 없는 일이고요. 환기구도 너무 작아서 사람이나 물건이 오갈 수도 없어요.”

    강태진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벽은 콘크리트로 되어 있었고, 창문은 없었다. 유일한 출입구는 방금 들어온 철문뿐이었다. 환기구는 천장 모서리에 작은 구멍으로 뚫려 있었고, 그 위에는 철망이 씌워져 있었다. 일반적인 성인 팔 하나도 제대로 들어가기 힘들 정도의 크기였다.

    그는 천천히 방 안을 배회했다. 김소령의 시신, 책상 위의 피, 그 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강태진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먼지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살폈다. 그의 시선은 문에서부터 시작해 벽, 천장, 그리고 다시 바닥으로 이어졌다.

    “시신은 언제쯤 발견되었죠?”

    “오늘 아침 7시경입니다. 소령님은 어제 밤 11시에 이 방으로 들어가셨고, 그 이후로 아무도 문을 연 흔적이 없습니다. 기록에도 없고요.” 박상병의 목소리에 무력감이 섞여 있었다. 새벽 기지의 보안 시스템은 허술하지 않았다. 모든 출입 기록은 중앙 통제실에 기록되고 있었다. 그 어떤 바이러스보다도 치명적인 것이 바로 내부의 배신과 혼란이었다.

    강태진은 한숨을 쉬었다. 이 상황은 완벽한 밀실이었다. 안에서 잠긴 문, 외부의 침입 흔적 없음, 내부의 도주 경로 없음, 흉기 없음.

    “사건이 알려진 후,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은 박상병 외에 누가 있었습니까?”

    “저와… 의무실의 이박사님, 그리고 통제실의 최이사가 잠시 들어왔었습니다. 소령님 사망 확인을 위해서요. 하지만 아무것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박상병은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좋습니다.” 강태진은 다시 시신 앞으로 돌아왔다. 김소령의 손은 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 굳은 표정은 미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살짝 벌어진 입가에는 고통의 흔적이 없었다. 이건 자살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했다. 스스로 목을 그은 사람의 손에는 저항이나 마지막 발버둥의 흔적이 남아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김소령의 손은 깨끗했다. 손톱 밑에 어떠한 이물질도 없었다.

    강태진은 문득 천장의 환기구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철망은 먼지로 덮여 있었지만, 그 주변의 미세한 스크래치에 시선이 꽂혔다. 마치 얇고 긴 무언가가 지나간 듯한 자국이었다. 그는 손전등을 들어 더 자세히 비췄다. 철망에 붙어있는 먼지는 오래된 것 같았지만, 스크래치 안쪽에는 비교적 신선한 먼지가 긁힌 자국을 메우고 있었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다. 보통 사람은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그는 환기구에 가까이 다가갔다. 콘크리트 벽과 철망 사이, 아주 작은 틈새가 보였다. 그 틈새를 따라 얇고 끈적한 이물질이 묻어 있었다. 너무 희미해서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강태진은 가지고 있던 작은 주머니칼을 꺼내 그 이물질을 긁어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돋보기를 꺼내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것 참…”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였다.

    강태진은 방을 나와 복도로 향했다. 복도 끝에는 의무실이 있었고, 그 옆에는 통제실이 있었다. 그는 먼저 의무실로 향했다. 이박사가 땀을 흘리며 약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박사는 기지 내에서 유일한 의사이자 생물학자였다. 좀비 바이러스 연구를 위해 애쓰는 그의 손은 늘 약품 냄새로 가득했다.

    “이박사님.” 강태진이 문가에 섰다.

    “강태진 씨. 소령님 사건 때문에 오셨군요.” 이박사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눈은 피곤해 보였지만, 평소처럼 침착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 방은 파리 한 마리도 못 들어가는 곳인데…”

    “혹시 기지 내에서… 인력이 닿지 않는 곳까지 정교하게 작동하는 기계 같은 것이 있습니까?” 강태진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기계라니요? 글쎄요… 감시 드론 몇 대가 외부 정찰용으로 운용되고 있습니다만, 내부에서는 사용하지 않고요. 그 외에는 공조 시스템이나 자율 방어 체계 정도가 있겠군요. 모두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움직입니다.”

    “환기구에 대한 질문입니다. 김소령의 방 환기 시스템은 어떻습니까? 공기가 어떻게 순환되죠?”

    “음, 소령님 방은 외부 공기와 직접 연결되지 않고, 내부 공기를 정화해서 재순환하는 방식입니다. 필터 교체 주기가 좀 되긴 했지만,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이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환기구에 관심이 있으시죠?”

    강태진은 대답 없이 의무실을 나왔다. 이번에는 통제실로 향했다. 통제실에는 최이사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앉아 있었다. 최이사는 기지 내 자원 배분과 행정을 담당하는 인물로, 김소령과 자주 마찰을 빚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강태진 씨.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최이사가 묻기보다 다그치듯 말했다. “소령님의 죽음은 기지 전체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겁니다. 지금 같은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최이사님은 어젯밤 어디에 계셨습니까?”

    “저는 밤새 통제실에 있었습니다. 보고서도 직접 확인하고 싶으면 보여줄 수 있습니다.” 최이사는 약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건 그렇고, 혹시 소령님이 최근에 누군가와 심하게 다툰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바로 저와요.” 최이사는 숨기지 않았다. “자원 배분 문제로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소령님은 외부 정찰대 지원을 늘리자고 했지만, 저는 기지 내부의 식량과 보급품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뭐, 그게 살인 동기가 될 리는 없지만요.”

    강태진은 최이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서 딱히 특별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다시 복도를 걷는 강태진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같았다. 그는 다시 김소령의 방으로 돌아왔다. 박상병은 여전히 문 밖을 지키고 있었다.

    강태진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서서, 김소령의 시신과 피 묻은 책상을 다시 한 번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모든 정보를 재조합하기 시작했다.

    밀실. 완벽한 밀실.

    하지만 강태진은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아직 그 방법을 모를 뿐이라고.

    ‘안에서 잠겼다… 안에서.’

    그는 바닥의 미세한 스크래치에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자국이었다. 하지만 너무 얇고 길었다. 무언가가 문틈에 끼어들었다가 빠져나온 흔적 같았다.

    그리고 환기구의 스크래치. 그리고 이박사가 말한 ‘재순환 시스템’.

    강태진은 숨을 들이쉬었다. 머릿속에서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박상병.” 강태진이 문밖의 박상병을 불렀다. “모두를 이 방으로 모아주십시오. 이박사님과 최이사,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잠시 후, 박상병과 이박사, 최이사가 방 안에 모여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궁금증이 뒤섞여 있었다. 김소령의 시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강태진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사건은 밀실 살인입니다. 겉보기에는 말이죠.”

    최이사가 코웃음을 쳤다. “겉보기에는이라니요?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아무도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었죠. 하지만, 죽음을 가져올 수는 있었습니다.” 강태진의 시선이 이박사에게 향했다. 이박사는 순간적으로 눈을 피했다.

    “이박사님. 소령님 방의 환기 시스템은 재순환 방식이라고 말씀하셨죠? 필터 교체 주기가 좀 되었다고요.”

    “그렇습니다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박사가 살짝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상관이 있습니다. 바로 그 필터 교체 주기에요. 필터 교체는 수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외부에서 환기구를 열고 필터를 갈아야 하죠. 맞습니까?”

    이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필터 교체는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날에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교체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환기구의 공기 배출구가 외부로 노출되어 있을 때, 정화된 공기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그 환기 시스템은 일시적으로 ‘열린’ 상태가 될 수 있습니까? 아주 잠깐이라도요.”

    이박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강태진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박사님. 당신은 기지 내의 모든 시스템을 알고 계십니다. 특히 공조 시스템은 더더욱 잘 아시겠죠. 당신은 소령님 방의 환기 시스템의 미세한 결함… 혹은 당신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틈을 이용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이박사에게로 향했다. 이박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소령님 방의 환기구 철망에는 미세한 스크래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스크래치에는 방금 전 제가 긁어낸 이물질이 묻어있었죠. 아주 얇고 끈적한 유기체 성분… 좀비 바이러스에 사용되는 특수 연구 물질이었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다룰 수 있는.”

    강태진은 손에 들고 있던 주머니칼과 돋보기를 들어 보였다.

    “당신은 지난 밤, 필터 교체 타이밍을 조작하거나, 아니면 당신만이 아는 환기 시스템의 맹점을 이용했습니다. 당신은 환기구를 통해 특수 제작된 아주 얇은 강철 와이어에 날카로운 칼날을 부착한 장치를 집어넣었을 겁니다.”

    “말도 안 돼!” 최이사가 소리쳤다. “그 작은 구멍으로 어떻게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는 곳에 칼날을 넣는단 말입니까!”

    “칼날은 작았습니다. 그리고 그 와이어는 유연했겠죠. 당신은 공조 시스템의 압력을 이용해 그 와이어를 소령님 방 안으로 밀어 넣었을 겁니다. 그리고 소령님이 앉아있는 책상 위까지 정교하게 조종해서… 단숨에 목을 그었겠죠.”

    강태진은 다시 김소령의 시신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 피의 흔적… 칼날이 지나간 후, 피는 뿜어져 나온 것이 아니라, 책상 위로 떨어져 고였습니다. 이것은 칼날이 재빨리 사라진 후의 흔적입니다. 와이어가 다시 환기구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증거죠.”

    “그럼 문은요?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고요!” 박상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도 트릭입니다. 이 방의 문은 특정 조건 하에, 외부에서 강제로 잠글 수 있는 보조 잠금장치가 있습니다. 다만, 그 보조 잠금장치는 소령님 방의 내부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어서, 소령님 방에서 내부적으로 ‘잠금’ 신호를 보냈을 때만 활성화될 수 있죠. 이박사님, 당신은 그 ‘잠금’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태진은 이박사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박사의 얼굴은 이미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당신은 김소령의 죽음을 확인한 후, 그 와이어를 이용해 소령님의 손을 조종하여 방의 자동 잠금 버튼을 누르도록 했을 겁니다. 아니면,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소령님의 손에 쥐여 있던 펜이나 다른 물건을 이용해 문 안쪽의 잠금장치를 눌러놓고 와이어를 빼냈을 수도 있겠죠. 문이 닫히면서, 바닥에 있던 그 얇은 와이어가 문틈에 살짝 끼었다가 빠져나오며 미세한 스크래치를 남겼을 겁니다. 그것이 제가 문 앞에서 발견한 미세한 스크래치의 정체입니다.”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의 눈은 이박사에게 고정되었다.

    “대체… 왜요, 이박사님!” 박상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이박사는 고개를 떨궜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소령님은… 소령님은 제 연구를 막았습니다. 이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을… 당신은 너무 조심스러웠고, 너무 많은 것을 통제하려 했어!” 이박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광기에 가까운 절규였다. “좀비는 기다려주지 않아요! 인류의 희망은 당신의 결재 서류 밑에 깔려 죽어가고 있었다고요!”

    강태진은 아무 말 없이 이박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천재적인 두뇌는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또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낸 비극을 해결해냈다. 하지만 그에게 남는 것은 공허함이었다. 바깥 세상은 좀비들로 가득 차 있었고, 안에서는 인간들이 서로를 죽였다. 인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박상병이 다가가 이박사의 팔을 붙잡았다. 이박사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절망과 함께 희미한 해방감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강태진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은 다시 김소령의 싸늘한 시신으로 향했다. 완벽한 밀실은 없었다. 다만, 인간의 절망과 광기가 만들어내는 불가능해 보이는 트릭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강태진은, 언제나 그 트릭의 뒤에 숨겨진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마주해야 했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어쩌면 인간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그는 사령관실을 나섰다. 복도 너머에서 좀비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그건 그저 그의 귓가에 남은, 인류의 마지막 비명이었을지도 모른다.

  • 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차가운 금속 냄새가 코를 찔렀다.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뒤덮인 벙커의 공기는 늘 그랬다. 습하고, 무겁고, 어딘지 모르게 시체 썩는 냄새가 희미하게 섞인 듯한. 이곳, ‘새벽’ 기지는 인류 최후의 보루 중 하나였지만, 바깥 세상의 지옥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지 7년. 생존자들은 폐허 위에서 겨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강태진은 낡은 야전상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사령관실 입구 앞에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땀으로 축축한 얼굴의 박상병이 초조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박상병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손에는 자동소총이 들려 있었지만 그 총은 지금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이 상황은 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강… 강태진 씨. 소령님이… 소령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박상병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강태진은 대꾸 없이 무거운 철문을 응시했다. 사령관 김소령의 집무실이자 숙소로 사용되던 이 방은, 새벽 기지 내에서도 가장 삼엄한 보안을 자랑했다. 외부인은커녕, 기지 내 간부조차 소령의 승인 없이는 발 한 걸음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강제로 열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안에서 잠겨 있었다고요?” 강태진이 짧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마치 방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한가로운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네… 젠장, 밤새 통신이 안 되길래 아침에 와봤더니… 문은 굳게 닫혀있고,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나고… 결국 폭파 전문가를 불러서 겨우 열었습니다.” 박상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설명했다. “그리고 안에는… 소령님이, 그 모습으로…”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강태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전등을 켜 철문 안쪽을 비췄다. 철문은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고, 두께만 해도 30센티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지문 인식과 망막 스캔, 그리고 수동 잠금장치까지 삼중으로 되어 있었다. 이 문을 강제로 열었다는 흔적은 선명했다. 녹아내린 용접 자국과 군데군데 그을린 철판.

    강태진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마치 누군가 치우기라도 한 듯, 불필요한 흔적은 없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육중한 철제 책상 뒤로, 김소령이 의자에 기댄 채 쓰러져 있었다. 그의 목에는 선명한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고, 그 밑으로 검붉은 피가 흥건하게 고여 책상 위 서류들을 적시고 있었다.

    “어떤 무기를 사용한 것 같습니까?” 강태진은 시신을 직접 건드리지 않고 눈으로만 살폈다.

    “글쎄요… 날카로운 칼 같은 걸로 한 번에 그은 것 같습니다. 총상이나 다른 흔적은 없고요.” 박상병이 덧붙였다. “주변에서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바깥으로 던질 수도 없는 일이고요. 환기구도 너무 작아서 사람이나 물건이 오갈 수도 없어요.”

    강태진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벽은 콘크리트로 되어 있었고, 창문은 없었다. 유일한 출입구는 방금 들어온 철문뿐이었다. 환기구는 천장 모서리에 작은 구멍으로 뚫려 있었고, 그 위에는 철망이 씌워져 있었다. 일반적인 성인 팔 하나도 제대로 들어가기 힘들 정도의 크기였다.

    그는 천천히 방 안을 배회했다. 김소령의 시신, 책상 위의 피, 그 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강태진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먼지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살폈다. 그의 시선은 문에서부터 시작해 벽, 천장, 그리고 다시 바닥으로 이어졌다.

    “시신은 언제쯤 발견되었죠?”

    “오늘 아침 7시경입니다. 소령님은 어제 밤 11시에 이 방으로 들어가셨고, 그 이후로 아무도 문을 연 흔적이 없습니다. 기록에도 없고요.” 박상병의 목소리에 무력감이 섞여 있었다. 새벽 기지의 보안 시스템은 허술하지 않았다. 모든 출입 기록은 중앙 통제실에 기록되고 있었다. 그 어떤 바이러스보다도 치명적인 것이 바로 내부의 배신과 혼란이었다.

    강태진은 한숨을 쉬었다. 이 상황은 완벽한 밀실이었다. 안에서 잠긴 문, 외부의 침입 흔적 없음, 내부의 도주 경로 없음, 흉기 없음.

    “사건이 알려진 후,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은 박상병 외에 누가 있었습니까?”

    “저와… 의무실의 이박사님, 그리고 통제실의 최이사가 잠시 들어왔었습니다. 소령님 사망 확인을 위해서요. 하지만 아무것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박상병은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좋습니다.” 강태진은 다시 시신 앞으로 돌아왔다. 김소령의 손은 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 굳은 표정은 미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살짝 벌어진 입가에는 고통의 흔적이 없었다. 이건 자살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했다. 스스로 목을 그은 사람의 손에는 저항이나 마지막 발버둥의 흔적이 남아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김소령의 손은 깨끗했다. 손톱 밑에 어떠한 이물질도 없었다.

    강태진은 문득 천장의 환기구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철망은 먼지로 덮여 있었지만, 그 주변의 미세한 스크래치에 시선이 꽂혔다. 마치 얇고 긴 무언가가 지나간 듯한 자국이었다. 그는 손전등을 들어 더 자세히 비췄다. 철망에 붙어있는 먼지는 오래된 것 같았지만, 스크래치 안쪽에는 비교적 신선한 먼지가 긁힌 자국을 메우고 있었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다. 보통 사람은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그는 환기구에 가까이 다가갔다. 콘크리트 벽과 철망 사이, 아주 작은 틈새가 보였다. 그 틈새를 따라 얇고 끈적한 이물질이 묻어 있었다. 너무 희미해서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강태진은 가지고 있던 작은 주머니칼을 꺼내 그 이물질을 긁어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돋보기를 꺼내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것 참…”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였다.

    강태진은 방을 나와 복도로 향했다. 복도 끝에는 의무실이 있었고, 그 옆에는 통제실이 있었다. 그는 먼저 의무실로 향했다. 이박사가 땀을 흘리며 약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박사는 기지 내에서 유일한 의사이자 생물학자였다. 좀비 바이러스 연구를 위해 애쓰는 그의 손은 늘 약품 냄새로 가득했다.

    “이박사님.” 강태진이 문가에 섰다.

    “강태진 씨. 소령님 사건 때문에 오셨군요.” 이박사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눈은 피곤해 보였지만, 평소처럼 침착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 방은 파리 한 마리도 못 들어가는 곳인데…”

    “혹시 기지 내에서… 인력이 닿지 않는 곳까지 정교하게 작동하는 기계 같은 것이 있습니까?” 강태진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기계라니요? 글쎄요… 감시 드론 몇 대가 외부 정찰용으로 운용되고 있습니다만, 내부에서는 사용하지 않고요. 그 외에는 공조 시스템이나 자율 방어 체계 정도가 있겠군요. 모두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움직입니다.”

    “환기구에 대한 질문입니다. 김소령의 방 환기 시스템은 어떻습니까? 공기가 어떻게 순환되죠?”

    “음, 소령님 방은 외부 공기와 직접 연결되지 않고, 내부 공기를 정화해서 재순환하는 방식입니다. 필터 교체 주기가 좀 되긴 했지만,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이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환기구에 관심이 있으시죠?”

    강태진은 대답 없이 의무실을 나왔다. 이번에는 통제실로 향했다. 통제실에는 최이사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앉아 있었다. 최이사는 기지 내 자원 배분과 행정을 담당하는 인물로, 김소령과 자주 마찰을 빚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강태진 씨.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최이사가 묻기보다 다그치듯 말했다. “소령님의 죽음은 기지 전체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겁니다. 지금 같은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최이사님은 어젯밤 어디에 계셨습니까?”

    “저는 밤새 통제실에 있었습니다. 보고서도 직접 확인하고 싶으면 보여줄 수 있습니다.” 최이사는 약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건 그렇고, 혹시 소령님이 최근에 누군가와 심하게 다툰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바로 저와요.” 최이사는 숨기지 않았다. “자원 배분 문제로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소령님은 외부 정찰대 지원을 늘리자고 했지만, 저는 기지 내부의 식량과 보급품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뭐, 그게 살인 동기가 될 리는 없지만요.”

    강태진은 최이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서 딱히 특별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다시 복도를 걷는 강태진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같았다. 그는 다시 김소령의 방으로 돌아왔다. 박상병은 여전히 문 밖을 지키고 있었다.

    강태진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서서, 김소령의 시신과 피 묻은 책상을 다시 한 번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모든 정보를 재조합하기 시작했다.

    밀실. 완벽한 밀실.

    하지만 강태진은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아직 그 방법을 모를 뿐이라고.

    ‘안에서 잠겼다… 안에서.’

    그는 바닥의 미세한 스크래치에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자국이었다. 하지만 너무 얇고 길었다. 무언가가 문틈에 끼어들었다가 빠져나온 흔적 같았다.

    그리고 환기구의 스크래치. 그리고 이박사가 말한 ‘재순환 시스템’.

    강태진은 숨을 들이쉬었다. 머릿속에서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박상병.” 강태진이 문밖의 박상병을 불렀다. “모두를 이 방으로 모아주십시오. 이박사님과 최이사,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잠시 후, 박상병과 이박사, 최이사가 방 안에 모여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궁금증이 뒤섞여 있었다. 김소령의 시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강태진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사건은 밀실 살인입니다. 겉보기에는 말이죠.”

    최이사가 코웃음을 쳤다. “겉보기에는이라니요?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아무도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었죠. 하지만, 죽음을 가져올 수는 있었습니다.” 강태진의 시선이 이박사에게 향했다. 이박사는 순간적으로 눈을 피했다.

    “이박사님. 소령님 방의 환기 시스템은 재순환 방식이라고 말씀하셨죠? 필터 교체 주기가 좀 되었다고요.”

    “그렇습니다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박사가 살짝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상관이 있습니다. 바로 그 필터 교체 주기에요. 필터 교체는 수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외부에서 환기구를 열고 필터를 갈아야 하죠. 맞습니까?”

    이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필터 교체는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날에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교체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환기구의 공기 배출구가 외부로 노출되어 있을 때, 정화된 공기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그 환기 시스템은 일시적으로 ‘열린’ 상태가 될 수 있습니까? 아주 잠깐이라도요.”

    이박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강태진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박사님. 당신은 기지 내의 모든 시스템을 알고 계십니다. 특히 공조 시스템은 더더욱 잘 아시겠죠. 당신은 소령님 방의 환기 시스템의 미세한 결함… 혹은 당신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틈을 이용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이박사에게로 향했다. 이박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소령님 방의 환기구 철망에는 미세한 스크래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스크래치에는 방금 전 제가 긁어낸 이물질이 묻어있었죠. 아주 얇고 끈적한 유기체 성분… 좀비 바이러스에 사용되는 특수 연구 물질이었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다룰 수 있는.”

    강태진은 손에 들고 있던 주머니칼과 돋보기를 들어 보였다.

    “당신은 지난 밤, 필터 교체 타이밍을 조작하거나, 아니면 당신만이 아는 환기 시스템의 맹점을 이용했습니다. 당신은 환기구를 통해 특수 제작된 아주 얇은 강철 와이어에 날카로운 칼날을 부착한 장치를 집어넣었을 겁니다.”

    “말도 안 돼!” 최이사가 소리쳤다. “그 작은 구멍으로 어떻게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는 곳에 칼날을 넣는단 말입니까!”

    “칼날은 작았습니다. 그리고 그 와이어는 유연했겠죠. 당신은 공조 시스템의 압력을 이용해 그 와이어를 소령님 방 안으로 밀어 넣었을 겁니다. 그리고 소령님이 앉아있는 책상 위까지 정교하게 조종해서… 단숨에 목을 그었겠죠.”

    강태진은 다시 김소령의 시신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 피의 흔적… 칼날이 지나간 후, 피는 뿜어져 나온 것이 아니라, 책상 위로 떨어져 고였습니다. 이것은 칼날이 재빨리 사라진 후의 흔적입니다. 와이어가 다시 환기구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증거죠.”

    “그럼 문은요?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고요!” 박상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도 트릭입니다. 이 방의 문은 특정 조건 하에, 외부에서 강제로 잠글 수 있는 보조 잠금장치가 있습니다. 다만, 그 보조 잠금장치는 소령님 방의 내부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어서, 소령님 방에서 내부적으로 ‘잠금’ 신호를 보냈을 때만 활성화될 수 있죠. 이박사님, 당신은 그 ‘잠금’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태진은 이박사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박사의 얼굴은 이미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당신은 김소령의 죽음을 확인한 후, 그 와이어를 이용해 소령님의 손을 조종하여 방의 자동 잠금 버튼을 누르도록 했을 겁니다. 아니면,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소령님의 손에 쥐여 있던 펜이나 다른 물건을 이용해 문 안쪽의 잠금장치를 눌러놓고 와이어를 빼냈을 수도 있겠죠. 문이 닫히면서, 바닥에 있던 그 얇은 와이어가 문틈에 살짝 끼었다가 빠져나오며 미세한 스크래치를 남겼을 겁니다. 그것이 제가 문 앞에서 발견한 미세한 스크래치의 정체입니다.”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의 눈은 이박사에게 고정되었다.

    “대체… 왜요, 이박사님!” 박상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이박사는 고개를 떨궜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소령님은… 소령님은 제 연구를 막았습니다. 이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을… 당신은 너무 조심스러웠고, 너무 많은 것을 통제하려 했어!” 이박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광기에 가까운 절규였다. “좀비는 기다려주지 않아요! 인류의 희망은 당신의 결재 서류 밑에 깔려 죽어가고 있었다고요!”

    강태진은 아무 말 없이 이박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천재적인 두뇌는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또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낸 비극을 해결해냈다. 하지만 그에게 남는 것은 공허함이었다. 바깥 세상은 좀비들로 가득 차 있었고, 안에서는 인간들이 서로를 죽였다. 인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박상병이 다가가 이박사의 팔을 붙잡았다. 이박사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절망과 함께 희미한 해방감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강태진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은 다시 김소령의 싸늘한 시신으로 향했다. 완벽한 밀실은 없었다. 다만, 인간의 절망과 광기가 만들어내는 불가능해 보이는 트릭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강태진은, 언제나 그 트릭의 뒤에 숨겨진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마주해야 했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어쩌면 인간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그는 사령관실을 나섰다. 복도 너머에서 좀비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그건 그저 그의 귓가에 남은, 인류의 마지막 비명이었을지도 모른다.

  • 메카 액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2화: 검은 심장

    별무리호의 함교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무수한 별들이 박힌 검은 벨벳 같은 심우주 한가운데, 거대한 주화처럼 떠 있는 미지의 물체가 메인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크기는 대략 소행성급. 그러나 형태는 자연물이 아니었다. 완벽한 구형에 가까우면서도, 매끄러운 표면에는 불규칙하면서도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함장님, 목표까지 거리 500킬로미터. 더 이상 접근은 위험합니다.”
    강민준 조종사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울렸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캡틴 김정훈은 턱을 문질렀다. 거대한 암석 덩어리라면 벌써 탐사선이 달라붙었을 터. 하지만 저것은 달랐다. 모든 센서가 먹통이 되는 기이한 현상 때문에, 별무리호는 조심스러운 접근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아 과학 장교, 스캔 결과는 여전히 제로인가?” 김정훈이 물었다.

    이지아 장교는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저었다.
    “예, 함장님. 모든 대역의 스캐너가 침묵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전자기파는 물론, 중력파, 타키온 입자까지…. 어떤 에너지 시그널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요.”

    “존재하지 않는데 눈앞에 있다는 건가?” 박선우 전술 장교가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과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언제나 미지의 것에 가장 먼저 달려들고 싶어 했다.

    “정확히는, 존재하나 우리의 인식 범위 밖에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겁니다.” 이지아의 목소리에는 학자 특유의 오만함과 동시에 경외감이 묻어났다. “어쩌면 다른 차원에 걸쳐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물질로 구성되어 있거나요.”

    그때, 한유진 엔지니어가 조용히 모니터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함장님, 혹시… 저 물체가 블랙홀과 같은 중력 이상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봐야 합니다. 주변 시공간의 왜곡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지아, 중력 센서 최대치로 올려서 재스캔 해.” 김정훈의 지시에 이지아가 분주하게 콘솔을 조작했다. 몇 초간의 정적 끝에, 이지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상합니다, 함장님. 별무리호 자체의 중력장이 약간 교란되고 있습니다. 아주 미세하지만… 물체에서 멀어질수록 정상으로 돌아오는 걸로 봐선, 저것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블랙홀은 아니라는 건가?” 박선우가 물었다.

    “블랙홀이라면 훨씬 더 강한 중력 이상과 함께 강착 원반 같은 현상이 나타났을 겁니다. 이건… 마치 저 물체 자체의 중력이 일정하지 않거나, 혹은 중력을 조작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지아의 설명에 김정훈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자료화면 올려봐.”

    메인 스크린에 미지의 물체의 근접 이미지가 확대되었다. 검은색이지만 빛을 반사하지 않는 흡수체. 표면은 얼핏 보면 매끄러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미세한 균열이나 이음매 같은 것이 보였다. 마치 거대한 퍼즐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구체를 이룬 듯했다. 가장 의아한 것은, 어떤 동력원도, 입구도, 심지어 외부의 충격을 흡수할 만한 완충 장치조차 감지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완벽한 침묵.

    “저 안에… 뭔가 있을까요?” 강민준이 중얼거렸다.

    김정훈은 한숨을 쉬었다. 이 심우주에, 인류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이 끝없는 공백 속에 이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축복이자 동시에 저주였다. 인류의 상식을 뛰어넘는 존재.

    “박선우 전술 장교, 한유진 엔지니어. 발키리 엠팩트 슈트 두 대 준비해. 근접 탐사팀을 편성한다.”

    박선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이지아 과학 장교는 브리핑룸에서 근접 탐사팀에게 지금까지의 모든 데이터를 공유하고, 주의사항을 전달해. 강민준 조종사는 별무리호의 현 위치를 고정하고, 어떤 비상 상황에서도 즉각적인 회피 기동을 할 수 있도록 대비해.”

    “네, 함장님!”
    “알겠습니다, 함장님!”

    함교의 모든 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 속에는 알 수 없는 긴장과 기대, 그리고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미지의 물체가 가져올 것이 무엇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인류의 운명을 바꿀 발견일지, 아니면 파멸의 서곡일지.

    ***

    별무리호의 격납고. 굉음과 함께 거대한 로봇 슈트, ‘발키리 엠팩트’가 도킹 스테이션에서 내려왔다. 티타늄 합금과 전자기 방어막으로 무장한 육중한 기체. 조종석에 앉은 박선우의 손이 컨트롤러를 쥐었다. 옆에는 한유진 엔지니어가 자신의 슈트, ‘크로노스’에 탑승하고 있었다. 크로노스는 발키리만큼 전투용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센서와 특수 장비로 무장한 다목적 탐사 슈트였다.

    “자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군.” 한유진이 통신으로 박선우에게 말했다.

    “하,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인류 최초로 미지의 유물을 만지는 순간인데.” 박선우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목소리 끝에는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이지아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들려왔다. “두 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절대 직접적인 접촉은 피하십시오. 모든 탐사는 원격으로 진행하고, 어떤 이상 반응이라도 감지되면 즉시 복귀해야 합니다.”

    “염려 마십시오, 과학 장교님. 전술 장교 박선우의 판단력을 믿으십시오.” 박선우가 씩 웃었다.

    “흥, 자네 판단력으로 우리를 몇 번이나 위험에 빠뜨렸는지 벌써 잊었나?” 한유진이 핀잔을 주자 박선우가 으르렁거렸다.

    “그건 ‘전술적 우회’라고 하는 겁니다, 엔지니어님!”

    “다 됐고, 각자 슈트 시스템 최종 점검. 별무리호가 발사 준비 중이다.” 김정훈 함장의 묵직한 목소리가 그들의 시시한 언쟁을 끊었다.

    슈트 내부의 계기판들이 일제히 초록불을 밝혔다. 모든 시스템 정상.

    “발키리 엠팩트 1호, 크로노스 2호, 출격 준비 완료.” 박선우와 한유진이 보고했다.

    “좋아. 발사!”

    쉬이이잉-! 격납고의 거대한 문이 열리고, 두 대의 슈트가 푸른 엔진 광선을 뿜으며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별무리호는 마치 거대한 어미가 새끼를 내보내는 듯, 서서히 멀어졌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암흑 속에서 오직 실루엣만을 드러내고 있는 검은 구체. 인류가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태곳적부터 이 심우주에 존재했을지도 모를 유물이었다.

    “목표까지 10킬로미터.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박선우가 지시했다. 그의 시야에 검은 구체의 표면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미세한 무늬들은 이제 복잡한 기하학적 패턴으로 보였다. 마치 어떤 언어 같기도 했다.

    “표면에 어떤 구조물도 보이지 않습니다. 일체의 돌출부도 없고요. 이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확실합니다.” 한유진이 보고했다.

    “표면 스캔 시작. 혹시 출입구가 될 만한 지점이 있는지 확인해봐.”

    크로노스 슈트의 센서들이 물체 표면을 훑기 시작했다. 주사되는 레이저 광선들이 검은 표면에 닿는 순간, 빛은 흡수되어 사라졌다. 어떤 반사도 없었다. 마치 빛을 삼켜버리는 듯한 표면이었다.

    “스캔 불가능합니다. 모든 센서가 먹통이 됩니다! 빛 에너지를 전부 흡수하는 것 같습니다!” 한유진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젠장, 함장님! 스캔 불가입니다!” 박선우가 별무리호로 보고했다.

    “물체와 직접적인 접촉은 아직 하지 마. 일단 주변을 한 바퀴 선회하면서 육안으로 확인해봐.” 김정훈 함장의 지시가 내려왔다.

    두 슈트는 조심스럽게 거대 구체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이윽고, 정면에서 보이지 않던 곳에 다다랐을 때, 박선우의 눈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함장님! 뭔가 보입니다!”

    메인 스크린에 박선우의 시야가 확대되어 나타났다. 검은 구체의 표면 한가운데, 다른 부분보다 조금 더 어둡고 깊어 보이는 지점이 있었다. 마치… 거대한 틈새 같았다.

    “이곳만 스캔이 미약하게나마 통과합니다. 아주 얕은 깊이지만… 마치 문처럼 보입니다.” 한유진의 보고였다.

    “문이라고? 진짜 입구가 있다는 건가?” 김정훈의 목소리에 흥분과 경계심이 동시에 묻어났다.

    “박선우, 한유진. 그 지점에 근접해. 하지만 접촉은 절대 금지.”

    두 슈트가 ‘문’처럼 보이는 지점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어둠 속의 어둠. 주변의 별빛조차 흡수하는 듯한 그곳은, 마치 거대한 심연의 입 같았다. 박선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거리 100미터… 50미터…”

    한유진이 크로노스 슈트의 매니퓰레이터 끝에 달린 초고감도 센서 프로브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20미터… 10미터…”

    프로브의 끝이 문처럼 보이는 지점에 닿기 직전.
    갑자기 슈트 내부에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삐이이이-!

    “젠장! 무슨 일이지? 슈트 시스템 이상 없습니다!” 박선우가 외쳤다.

    “주변 시공간 왜곡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슈트 자체의 중력장이 변하고 있습니다!” 한유진의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 순간, 그들이 마주하고 있던 검은 ‘문’에서 미세한 떨림이 시작되었다. 떨림은 점차 강해지며, 웅웅거리는 저음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 소리는 통신망을 뚫고 그들의 뇌리에 직접 파고드는 듯했다.

    “으악! 이게 무슨 소리야?!” 박선우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의 슈트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윽고, 검은 문이 –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틈새 사이로 드러난 것은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우주 그 자체를 압축해놓은 듯한, 아무것도 없는 완벽한 암흑.
    블랙홀보다 더 깊고, 차갑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무(無)의 공간이었다.

    “함장님! 문이…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한유진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통신망을 찢었다.

    그리고 그 심연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두 슈트, 즉시 후퇴! 전속력으로 별무리호로 복귀해!” 김정훈 함장의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미 늦은 후회였다.

    열린 문의 심연에서, 섬광 한 줄기가 쏘아져 나왔다.
    그것은 빛이 아니라, 순수한 에너지의 흐름이었다.
    너무나도 강력하여, 박선우의 발키리 슈트와 한유진의 크로노스 슈트를 마치 장난감처럼 집어삼켰다.

    “으아아아아아악!!” 박선우의 통신이 끊어졌다.

    “한유진! 한유진!” 이지아의 절규가 이어졌다.

    별무리호 함교의 메인 스크린에 두 개의 점이 동시에 사라지는 모습이 섬뜩하게 잡혔다.

    “박선우! 한유진! 응답해!” 김정훈 함장의 목소리가 절규처럼 울려 퍼졌지만, 답은 없었다.

    검은 문은 다시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지만 그곳에는 이제 두 명의 용감한 대원과 그들의 슈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침묵하는 심우주와 섬뜩하게 닫히는 미지의 구체, 그리고 별무리호 함교의 공포에 질린 승무원들뿐이었다.

    그들은 이제 알았다.
    이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무언가 ‘살아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심장을 건드린 것이다.

    다음 화: 미지의 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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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화: 검은 심장

    별무리호의 함교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무수한 별들이 박힌 검은 벨벳 같은 심우주 한가운데, 거대한 주화처럼 떠 있는 미지의 물체가 메인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크기는 대략 소행성급. 그러나 형태는 자연물이 아니었다. 완벽한 구형에 가까우면서도, 매끄러운 표면에는 불규칙하면서도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함장님, 목표까지 거리 500킬로미터. 더 이상 접근은 위험합니다.”
    강민준 조종사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울렸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캡틴 김정훈은 턱을 문질렀다. 거대한 암석 덩어리라면 벌써 탐사선이 달라붙었을 터. 하지만 저것은 달랐다. 모든 센서가 먹통이 되는 기이한 현상 때문에, 별무리호는 조심스러운 접근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아 과학 장교, 스캔 결과는 여전히 제로인가?” 김정훈이 물었다.

    이지아 장교는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저었다.
    “예, 함장님. 모든 대역의 스캐너가 침묵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전자기파는 물론, 중력파, 타키온 입자까지…. 어떤 에너지 시그널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요.”

    “존재하지 않는데 눈앞에 있다는 건가?” 박선우 전술 장교가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과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언제나 미지의 것에 가장 먼저 달려들고 싶어 했다.

    “정확히는, 존재하나 우리의 인식 범위 밖에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겁니다.” 이지아의 목소리에는 학자 특유의 오만함과 동시에 경외감이 묻어났다. “어쩌면 다른 차원에 걸쳐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물질로 구성되어 있거나요.”

    그때, 한유진 엔지니어가 조용히 모니터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함장님, 혹시… 저 물체가 블랙홀과 같은 중력 이상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봐야 합니다. 주변 시공간의 왜곡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지아, 중력 센서 최대치로 올려서 재스캔 해.” 김정훈의 지시에 이지아가 분주하게 콘솔을 조작했다. 몇 초간의 정적 끝에, 이지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상합니다, 함장님. 별무리호 자체의 중력장이 약간 교란되고 있습니다. 아주 미세하지만… 물체에서 멀어질수록 정상으로 돌아오는 걸로 봐선, 저것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블랙홀은 아니라는 건가?” 박선우가 물었다.

    “블랙홀이라면 훨씬 더 강한 중력 이상과 함께 강착 원반 같은 현상이 나타났을 겁니다. 이건… 마치 저 물체 자체의 중력이 일정하지 않거나, 혹은 중력을 조작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지아의 설명에 김정훈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자료화면 올려봐.”

    메인 스크린에 미지의 물체의 근접 이미지가 확대되었다. 검은색이지만 빛을 반사하지 않는 흡수체. 표면은 얼핏 보면 매끄러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미세한 균열이나 이음매 같은 것이 보였다. 마치 거대한 퍼즐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구체를 이룬 듯했다. 가장 의아한 것은, 어떤 동력원도, 입구도, 심지어 외부의 충격을 흡수할 만한 완충 장치조차 감지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완벽한 침묵.

    “저 안에… 뭔가 있을까요?” 강민준이 중얼거렸다.

    김정훈은 한숨을 쉬었다. 이 심우주에, 인류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이 끝없는 공백 속에 이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축복이자 동시에 저주였다. 인류의 상식을 뛰어넘는 존재.

    “박선우 전술 장교, 한유진 엔지니어. 발키리 엠팩트 슈트 두 대 준비해. 근접 탐사팀을 편성한다.”

    박선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이지아 과학 장교는 브리핑룸에서 근접 탐사팀에게 지금까지의 모든 데이터를 공유하고, 주의사항을 전달해. 강민준 조종사는 별무리호의 현 위치를 고정하고, 어떤 비상 상황에서도 즉각적인 회피 기동을 할 수 있도록 대비해.”

    “네, 함장님!”
    “알겠습니다, 함장님!”

    함교의 모든 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 속에는 알 수 없는 긴장과 기대, 그리고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미지의 물체가 가져올 것이 무엇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인류의 운명을 바꿀 발견일지, 아니면 파멸의 서곡일지.

    ***

    별무리호의 격납고. 굉음과 함께 거대한 로봇 슈트, ‘발키리 엠팩트’가 도킹 스테이션에서 내려왔다. 티타늄 합금과 전자기 방어막으로 무장한 육중한 기체. 조종석에 앉은 박선우의 손이 컨트롤러를 쥐었다. 옆에는 한유진 엔지니어가 자신의 슈트, ‘크로노스’에 탑승하고 있었다. 크로노스는 발키리만큼 전투용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센서와 특수 장비로 무장한 다목적 탐사 슈트였다.

    “자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군.” 한유진이 통신으로 박선우에게 말했다.

    “하,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인류 최초로 미지의 유물을 만지는 순간인데.” 박선우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목소리 끝에는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이지아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들려왔다. “두 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절대 직접적인 접촉은 피하십시오. 모든 탐사는 원격으로 진행하고, 어떤 이상 반응이라도 감지되면 즉시 복귀해야 합니다.”

    “염려 마십시오, 과학 장교님. 전술 장교 박선우의 판단력을 믿으십시오.” 박선우가 씩 웃었다.

    “흥, 자네 판단력으로 우리를 몇 번이나 위험에 빠뜨렸는지 벌써 잊었나?” 한유진이 핀잔을 주자 박선우가 으르렁거렸다.

    “그건 ‘전술적 우회’라고 하는 겁니다, 엔지니어님!”

    “다 됐고, 각자 슈트 시스템 최종 점검. 별무리호가 발사 준비 중이다.” 김정훈 함장의 묵직한 목소리가 그들의 시시한 언쟁을 끊었다.

    슈트 내부의 계기판들이 일제히 초록불을 밝혔다. 모든 시스템 정상.

    “발키리 엠팩트 1호, 크로노스 2호, 출격 준비 완료.” 박선우와 한유진이 보고했다.

    “좋아. 발사!”

    쉬이이잉-! 격납고의 거대한 문이 열리고, 두 대의 슈트가 푸른 엔진 광선을 뿜으며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별무리호는 마치 거대한 어미가 새끼를 내보내는 듯, 서서히 멀어졌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암흑 속에서 오직 실루엣만을 드러내고 있는 검은 구체. 인류가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태곳적부터 이 심우주에 존재했을지도 모를 유물이었다.

    “목표까지 10킬로미터.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박선우가 지시했다. 그의 시야에 검은 구체의 표면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미세한 무늬들은 이제 복잡한 기하학적 패턴으로 보였다. 마치 어떤 언어 같기도 했다.

    “표면에 어떤 구조물도 보이지 않습니다. 일체의 돌출부도 없고요. 이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확실합니다.” 한유진이 보고했다.

    “표면 스캔 시작. 혹시 출입구가 될 만한 지점이 있는지 확인해봐.”

    크로노스 슈트의 센서들이 물체 표면을 훑기 시작했다. 주사되는 레이저 광선들이 검은 표면에 닿는 순간, 빛은 흡수되어 사라졌다. 어떤 반사도 없었다. 마치 빛을 삼켜버리는 듯한 표면이었다.

    “스캔 불가능합니다. 모든 센서가 먹통이 됩니다! 빛 에너지를 전부 흡수하는 것 같습니다!” 한유진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젠장, 함장님! 스캔 불가입니다!” 박선우가 별무리호로 보고했다.

    “물체와 직접적인 접촉은 아직 하지 마. 일단 주변을 한 바퀴 선회하면서 육안으로 확인해봐.” 김정훈 함장의 지시가 내려왔다.

    두 슈트는 조심스럽게 거대 구체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이윽고, 정면에서 보이지 않던 곳에 다다랐을 때, 박선우의 눈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함장님! 뭔가 보입니다!”

    메인 스크린에 박선우의 시야가 확대되어 나타났다. 검은 구체의 표면 한가운데, 다른 부분보다 조금 더 어둡고 깊어 보이는 지점이 있었다. 마치… 거대한 틈새 같았다.

    “이곳만 스캔이 미약하게나마 통과합니다. 아주 얕은 깊이지만… 마치 문처럼 보입니다.” 한유진의 보고였다.

    “문이라고? 진짜 입구가 있다는 건가?” 김정훈의 목소리에 흥분과 경계심이 동시에 묻어났다.

    “박선우, 한유진. 그 지점에 근접해. 하지만 접촉은 절대 금지.”

    두 슈트가 ‘문’처럼 보이는 지점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어둠 속의 어둠. 주변의 별빛조차 흡수하는 듯한 그곳은, 마치 거대한 심연의 입 같았다. 박선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거리 100미터… 50미터…”

    한유진이 크로노스 슈트의 매니퓰레이터 끝에 달린 초고감도 센서 프로브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20미터… 10미터…”

    프로브의 끝이 문처럼 보이는 지점에 닿기 직전.
    갑자기 슈트 내부에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삐이이이-!

    “젠장! 무슨 일이지? 슈트 시스템 이상 없습니다!” 박선우가 외쳤다.

    “주변 시공간 왜곡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슈트 자체의 중력장이 변하고 있습니다!” 한유진의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 순간, 그들이 마주하고 있던 검은 ‘문’에서 미세한 떨림이 시작되었다. 떨림은 점차 강해지며, 웅웅거리는 저음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 소리는 통신망을 뚫고 그들의 뇌리에 직접 파고드는 듯했다.

    “으악! 이게 무슨 소리야?!” 박선우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의 슈트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윽고, 검은 문이 –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틈새 사이로 드러난 것은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우주 그 자체를 압축해놓은 듯한, 아무것도 없는 완벽한 암흑.
    블랙홀보다 더 깊고, 차갑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무(無)의 공간이었다.

    “함장님! 문이…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한유진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통신망을 찢었다.

    그리고 그 심연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두 슈트, 즉시 후퇴! 전속력으로 별무리호로 복귀해!” 김정훈 함장의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미 늦은 후회였다.

    열린 문의 심연에서, 섬광 한 줄기가 쏘아져 나왔다.
    그것은 빛이 아니라, 순수한 에너지의 흐름이었다.
    너무나도 강력하여, 박선우의 발키리 슈트와 한유진의 크로노스 슈트를 마치 장난감처럼 집어삼켰다.

    “으아아아아아악!!” 박선우의 통신이 끊어졌다.

    “한유진! 한유진!” 이지아의 절규가 이어졌다.

    별무리호 함교의 메인 스크린에 두 개의 점이 동시에 사라지는 모습이 섬뜩하게 잡혔다.

    “박선우! 한유진! 응답해!” 김정훈 함장의 목소리가 절규처럼 울려 퍼졌지만, 답은 없었다.

    검은 문은 다시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지만 그곳에는 이제 두 명의 용감한 대원과 그들의 슈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침묵하는 심우주와 섬뜩하게 닫히는 미지의 구체, 그리고 별무리호 함교의 공포에 질린 승무원들뿐이었다.

    그들은 이제 알았다.
    이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무언가 ‘살아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심장을 건드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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