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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천상계, 아홉 번째 옥좌 아래 펼쳐진 연화궁은 늘 서늘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유리보다 투명한 영롱한 기운이 궁을 감싸고돌았고, 희귀한 난초와 푸른 이끼가 덮인 바위 사이로는 수정처럼 맑은 샘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그곳은 완벽한 조화와 영원한 평화가 지배하는 곳이었으나, 연화 선녀에게는 때때로 숨 막히는 고요로 느껴졌다.

    그녀는 고귀한 천족의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났고, 영겁의 세월 동안 천상의 질서를 수호하는 임무를 수행해왔다. 특히, 인간계와 요계의 경계를 감시하고 혹여 발생할지 모르는 영적 혼란을 잠재우는 것이 그녀의 주된 역할이었다. 오늘 밤도, 은하수의 빛을 머금은 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그녀는 영겁의 흐름이 담긴 ‘천계 영맥경’ 앞에 앉아 있었다. 경면은 우주의 모든 기운을 비추는 거울과 같아, 작은 파동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연화 선녀님, 삼계에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습니까?”

    곁을 지키던 어린 선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앳된 얼굴에 근심이 어려 있었으나, 연화의 눈에는 그저 순진한 염려로 비쳤을 뿐이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맑은 옥구슬이 부딪히는 듯 청아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깊은 권태가 깃들어 있었다. 천상은 영원했으나, 그 영원함은 때로 모든 것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희로애락은 인간계의 전유물인 양, 천상계에서는 마치 불필요한 감정처럼 취급되었다.

    그때였다. 고요하던 영맥경의 표면에 작은 파문이 일렁였다. 처음에는 잔잔했던 물결이 이내 거친 물결로 변하며 검붉은 기운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린 선관이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영맥경이 이토록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은 수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연화는 차분한 얼굴로 영맥경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경면 아래로 맹렬한 기운이 역류하듯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것은 천상의 기운과는 완전히 다른, 지극히 원초적이고 혼탁한, 그러나 동시에 압도적인 생명력이었다.

    “인간계의 남쪽, 흑암림에서… 봉인이 풀리는군.”

    그녀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흑암림. 인간계와 요계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그곳은 태초부터 봉인된 저주받은 숲이었다. 천상의 힘으로 겹겹이 봉인되어 있던 그곳에서, 과연 무엇이 깨어났단 말인가.

    “선녀님, 제가 군사를 이끌고…”

    어린 선관이 용감하게 나섰지만,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것은 필시 범상치 않은 존재의 움직임이다. 너희가 감당할 수 없을 테니, 나는 옥황상제께 고하고 직접 하강하겠다.”

    그녀의 결정은 단호했다. 연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푸른 비단 옷자락을 휘날리며 천궁의 문을 향했다. 완벽한 조화 속에서 살아왔던 그녀의 존재에 균열을 일으킬,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

    천상계에서 인간계로 하강하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한 질서에서 혼돈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의식과도 같았다. 맑고 깨끗했던 공기는 점차 탁해지고, 고요했던 정적은 인간 세상의 웅성거림과 자연의 거친 숨소리로 대체되었다. 연화는 익숙한 감각의 변화 속에서도, 흑암림이 뿜어내는 이질적인 기운을 놓치지 않았다.

    봉인된 숲답게 흑암림은 낮에도 어둠이 깊었다. 굵은 나무들은 뒤틀린 가지를 하늘로 뻗어 태양을 가렸고, 땅에는 이름 모를 독초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영맥경에서 보았던 검붉은 기운은 이곳에서 더욱 맹렬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천상의 기운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어둠과 생명력이 뒤섞인 원초적인 에너지였다.

    연화는 조심스럽게 숲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밑에 나뭇가지 하나 부러지지 않았고, 스치는 옷자락에 숲의 정령들이 흠칫 물러났다. 심상치 않은 기운은 숲의 가장 깊은 곳, 마치 세상의 끝처럼 느껴지는 검은 바위 산 아래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그곳은 거대한 동굴의 입구였다. 동굴은 칠흑 같은 어둠을 토해내고 있었고, 그 안에서 맹렬한 기운이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연화는 망설임 없이 동굴 속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주변을 감싸는 희미한 영광이 어둠을 살짝 밀어냈고, 동굴 내부의 기괴한 풍경이 드러났다.

    동굴의 벽은 기이한 문양으로 가득했고, 바닥에는 말라붙은 피와 같은 흔적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리고 동굴의 가장 깊은 곳, 거대한 검은 수정이 박힌 제단 위에서… 한 존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인간의 형상이었으나, 인간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도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동시에 위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은 어깨 아래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고, 창백한 피부는 어둠 속에서 오히려 더욱 빛났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의 눈이었다. 어두운 호박색 눈동자는 희미하게 빛나며 연화의 존재를 인식하는 듯했다. 마치 영겁의 시간을 담고 있는 듯 깊고도, 동시에 무한한 야성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검붉은 기운이 용오름치듯 휘감고 있었고, 그의 손에서는 그 기운을 모아 어떤 형상을 빚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태초의 혼돈을 담은 듯한, 그러나 동시에 생명의 씨앗을 품은 듯한 기묘한 형태였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압도적인 힘이 느껴졌다. 천상계의 질서정연한 영력과는 차원이 다른, 폭풍처럼 거칠고 뿌리 깊은 힘이었다.

    연화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천상에서조차 쉬이 찾아볼 수 없는, 태곳적부터 존재했을 법한 강력한 요기(妖氣)였다. 흑암림의 봉인을 깨고 나온 것이 바로 이 존재였다.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녀에게로 향했다. 어두운 호박색 눈동자가 그녀의 존재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경계심이 없지는 않았으나, 동시에 무언가 알 수 없는 흥미가 엿보이는 듯했다.

    “…천족인가.”

    낮고 굵은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천상의 존재를 향한 경외심도, 두려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태고의 야성이 깃든 듯, 덤덤한 어조였다.

    “나는 천족 연화 선녀. 그대는 대체… 무엇인가?”

    연화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심장 한구석에서 낯선 감각이 요동쳤다. 그것은 위험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고, 동시에 미지의 존재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기도 했다.

    “나는 이령.”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짧게 읊조렸다. 이령. 이름만으로는 그가 어떤 종족인지, 어떤 존재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흑암림의 봉인을 깨고 나온, 압도적인 힘을 가진 미지의 존재라는 것만이 명확할 뿐이었다.

    “이곳은 흑암림. 천상의 봉인이 걸려 있는 곳이다. 그대가 이곳의 봉인을 깨뜨린다면, 삼계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다.”

    연화는 그의 태도에 미묘한 분노를 느꼈다. 그 어떤 천족도 감히 자신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이령은 그녀의 말에 희미한 비웃음을 흘리는 듯했다.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질서? 너희 천족의 질서가 나를 가두고, 나의 본질을 억압했지. 내가 이곳에서 깨어난 것은, 그 질서가 이미 낡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도전적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천상계의 존재를 향한 뿌리 깊은 불신과 경멸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의 주변을 맴돌던 검붉은 기운이 더욱 맹렬해졌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연화를 향해 뻗어오는 듯했다. 연화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력을 끌어올렸다. 푸른빛 섬광이 그녀의 몸을 감쌌고, 동굴 안에는 천족의 맑은 기운과 이령의 혼탁한 요기가 충돌하며 맹렬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대는 이대로 물러서라. 그렇지 않으면, 천상의 법도로 심판받을 것이다.”

    연화는 단호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이령의 눈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호박색 눈동자는 더욱 깊어지며, 무언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듯 반짝였다.

    “천상의 법도? 그것이 과연 나의 본질을 꺾을 수 있을지… 한번 시험해보고 싶군.”

    이령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거대한 창의 형상을 갖추었다. 그것은 마치 태초의 어둠을 응축해 놓은 듯한, 육안으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냈다.

    연화는 긴장했다. 천상계의 그 누구도 이처럼 원초적이고 강력한 힘을 다루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천상의 질서가 감히 재단할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위협이자…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이끌림이었다. 그들의 만남은 시작부터 금지된 경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 에픽 하이 판타지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아르카나의 속삭임

    **[장면 1]**

    **#1. 아르카나 마법 아카데미 도서관 (낮)**

    * 고풍스러운 나무 서가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햇살이 높은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지만, 도서관 특유의 고요함과 낡은 책 냄새가 공간을 감싼다.
    * 가운데 놓인 거대한 고문서 테이블에 앉아, 리안이 두꺼운 양피지 책에 코를 박고 있다. 안경 너머로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눈빛은 형형하게 빛난다. 테이블 위에는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가득한 책들이 펼쳐져 있다.

    **리안 (독백):** (작게 중얼거리며) “음… 이 문양은 또 뭐야? 아르카나 개교 초기의 기록인데… 왜 이리 모호하게 쓰여 있을까.”

    **#2. 같은 장소**

    * 리안의 어깨 너머로 엘리아가 살짝 기대어 내려다본다. 엘리아는 리안보다 조금 더 생기발랄한 표정이다. 손에는 과일 몇 알이 담긴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다.

    **엘리아:** “아이고, 리안! 또 그 난해한 고문서들이야? 며칠째 잠도 안 자고 파고들더니, 다크서클이 발끝까지 내려오겠네.”

    **리안:**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쉿, 엘리아. 여기는 도서관이야. 그리고 난 중요한 실마리를 찾고 있어.”

    **엘리아:** “실마리? 혹시 요즘 아카데미에 떠도는 그 이상한 소문 때문이야? 지하 어딘가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린다는… 그거 말이야?”

    **리안:** (책에서 고개를 들고 엘리아를 쳐다본다.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소문? 너도 들었어? 단순한 소문이라고 치부하기엔… 며칠 전부터 미세한 진동 같은 걸 느꼈어. 뭔가 심상치 않아.”

    **엘리아:** “설마, 또 네 그 과도한 탐구심이 발동한 거야? 제발 평범한 학생처럼 지내자, 응? 졸업반이라고! 과제도 산더미잖아.”

    **리안:** “평범한 건 지루해. 그리고 이 감각은… 마법사의 직감 같은 거야. 이건 간과할 수 없어.”

    **#3. 리안이 펼쳐든 고문서 (클로즈업)**

    * 오래된 양피지에 그려진 기괴한 문양과 함께, 희미하게 빛나는 글자들이 보인다. 그 중 특정 문장이 클로즈업된다.
    * **문서의 글자 (음산하게):** “심연의 틈… 위대한 금기가 잠든 곳… 아카르나스 밑… 망각된 존재… 봉인…”

    **리안:** (숨을 들이켜며) “이건… 이건 단순한 소문이 아니야. ‘아카르나스 밑에 봉인된 망각된 존재’라니… 이 문장, 분명 아카데미 지하를 말하는 것 같아. 하지만 이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는데…?”

    **[쾅-! 쿵-!]** (미세하지만 묵직한 진동이 느껴진다. 리안은 순간 몸을 움찔한다.)

    **엘리아:** “방금… 지진이야?”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다른 학생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각자의 할 일을 한다.)

    **리안:** (진동이 멈춘 후, 귀를 기울인다. 아주 희미하게, 마치 바람이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아니, 지진이 아니야. 들려? 이 소리…”

    **엘리아:** “무슨 소리? 난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리안, 피곤해서 헛것이 들리는 거 아니야?”

    **리안 (독백):**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다른 이에게는 들리지 않는 이 소리. 분명히, 지하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묘한 울림이다.) “아니… 분명히… 무언가가… 속삭이고 있어.”

    **[장면 2]**

    **#4. 아카데미 복도 (오후)**

    * 리안과 엘리아가 바쁘게 오가는 학생들 사이를 걷고 있다. 리안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하다.

    **리안:** “도서관의 기록을 전부 뒤져봤어. 아카데미 지하에 존재하는 공간은, 공용 서고와 비상용 식량 창고, 그리고 마나 발전실 정도가 전부라고 나와 있어. ‘망각된 존재’ 따위는 없어.”

    **엘리아:** “봐, 내가 뭐랬어? 그냥 도시 전설 같은 거야. 아니면 누가 장난치는 거겠지.”

    **리안:** “하지만 아까 그 고문서… 너무나 생생했어. 그리고 그 진동과 목소리. 다른 학생들이 못 느꼈다는 게 더 이상해.”

    **#5. 교장실 앞**

    * 웅장한 문 앞에서 리안이 망설이는 기색 없이 문을 두드린다. 엘리아는 불안한 듯 리안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엘리아:** “정말 교장 선생님께 여쭤볼 생각이야? 위험할 수도 있어! 어른들은 항상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하잖아.”

    **리안:** “모르는 게 독이 될 때도 있어. 아카데미의 안전이 걸린 일일 수도 있잖아.”

    **교장 (목소리):** “들어오게.”

    **#6. 교장실 내부**

    * 인자해 보이는 교장이 책상에 앉아 차분하게 그들을 맞이한다.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리안은 어딘가 모를 미묘한 벽을 느낀다.

    **리안:** “교장 선생님, 실례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아카데미 지하에 대한 질문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교장:** “음? 지하 말이로군. 공용 서고나 마나 발전실에 궁금한 점이라도 생겼나?”

    **리안:** “아니요. 좀 더 깊은 곳에… 혹시 ‘봉인된 구역’ 같은 곳이 존재하나요?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금기 같은 것과 연관된…?”

    **교장 (미소는 유지하지만 눈빛이 순간 흔들린다):** “하하, 리안 자네는 역시 탐구심이 남다르군. 그런 이야기는 그저 오래된 미신일 뿐이야. 아카데미 지하에는 학생들이 접근할 만한 특별한 장소는 없네. 자네의 상상력이 풍부한 건 좋지만, 너무 엉뚱한 곳에 집중하진 말게나.”

    **리안 (독백):** (교장 선생님의 미소 뒤에서 뭔가 불편한 기색을 읽었다. 확실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알겠습니다, 교장 선생님.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7. 복도 (엘리아와 리안이 다시 걷는다)**

    **엘리아:** “봐, 내가 뭐랬어! 괜히 걱정만 했잖아.”

    **리안:** “아니, 교장 선생님은 뭔가 감추고 있어. 마치 나를 돌려보내려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어.”

    **엘리아:** “그럼 이제 어떡할 건데? 정말 포기할 거야?”

    **리안:** (결심한 듯 눈을 빛낸다) “포기? 절대. 오히려 확신이 생겼어. 뭔가 엄청난 비밀이 지하에 잠들어 있다는 확신이. 그리고… 그걸 직접 확인해야만 해.”

    **[장면 3]**

    **#8. 아카데미 지하 통로 (밤)**

    * 자정을 넘긴 시간, 아카데미의 지하 통로는 어둡고 으스스하다. 낡은 석벽과 거미줄, 그리고 희미한 마나 램프의 불빛만이 길을 비춘다.
    * 리안과 엘리아가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이며 걷고 있다. 엘리아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주위를 살핀다.

    **엘리아:** “리안… 진짜 여기 맞을까? 너무 어두워.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아.”

    **리안:** “도서관 기록실에서 찾은 자료에 따르면, 개교 초기의 도면이 현재와는 조금 달랐어. 이쪽 통로 끝에 오래된 서고가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지도에 나와 있지 않아.”

    **#9. 어두운 통로 끝**

    * 그들의 앞에는 다른 석벽과 다르게, 두꺼운 철문으로 봉인된 듯한 거대한 문이 나타난다. 문 주변으로는 희미하게 마법진의 잔해가 그려져 있고, 낡은 쇠사슬이 얽혀 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엘리아:** (문을 보자마자 질겁하며) “세상에… 여, 여기야… 여기 분명해! 소름 끼쳐…!”

    **리안:** (눈을 가늘게 뜨고 문을 응시한다. 문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 “이 문… 뭔가 특별한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어. 일반적인 서고 문이 아니야.”

    **[쉬이이익… 스스스…]** (문틈 사이로,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리안의 몸이 다시 미세하게 떨려온다.)

    **리안:** (속삭임이 더 선명해진다.) “들려? 저 안에서… 저 안에서 무언가가 반응하고 있어.”

    **엘리아:** (귀를 막고 몸을 움츠린다) “아무것도 안 들려! 제발 리안, 우리 돌아가자! 여긴 너무 위험해!”

    **#10. 봉인된 문 (클로즈업)**

    * 문틈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검붉은 기운이 새어 나오는 듯한 묘사가 보인다. 리안은 그 기운에 이끌린 듯 손을 뻗으려 한다.

    **리안 (독백):**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다. 공포와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이 밀려온다.) “이건… 이건… 분명…”

    **#11. 리안의 손**

    * 그 순간, 리안의 눈에 봉인된 문에 새겨진 고대 마법 문양 중 일부가 눈에 띈다. 다른 문양과 달리, 시간의 흐름 속에 마모되어 희미해진 부분이다. 마치 봉인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처럼.

    **리안:** “이 문양… 고문서에서 봤던… 봉인을 약화시키는 역행 마법진의 일부야. 오랜 세월에 걸쳐 에너지를 잃고 있어.”

    **엘리아:** “리안! 뭘 하려고!”

    **리안:** (엘리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모된 문양에 손을 댄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손끝에서 찌릿한 마나의 역류가 느껴진다.)

    **[쉬이이이이이익-!! 와르르르릉-!!]** (리안의 손이 닿자마자, 봉인된 문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거세게 떨린다. 쇠사슬이 녹아내리는 듯한 소리, 마법진이 깨지는 소리가 지하를 울린다.)

    **엘리아:**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선다) “안돼! 리안! 멈춰!”

    **#12.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순간**

    * 봉인이 파괴되면서, 문틈 사이로 칠흑 같은 어둠과 함께 끔찍한 압력이 뿜어져 나온다. 어둠 속에서 섬뜩한 붉은 빛이 일렁인다.
    * **어둠 속 목소리 (수수께끼):** “…자유… 드디어… 너희의… 세상에…”

    **[끼이이이이이이이익-!!!!]** (오랜 봉인에서 풀려나는 끔찍한 소리가 지하 전체를 뒤흔든다.)

    **[경고음-!!!!]** (아카데미 전체에 비상 경고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붉은 비상등이 점멸한다.)

    **리안:** (쏟아져 나오는 어둠의 압력에 몸이 휘청인다. 얼굴에 경악과 함께 알 수 없는 공포가 스친다.) “이럴 수가… 대체… 저 안에 뭐가…!”

    **#13. 아카데미 복도 (동시에)**

    * 경고음에 놀란 교장이 다급하게 뛰쳐나온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인자한 미소는 사라지고, 창백한 경악과 함께 깊은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교장:** (흐트러진 모습으로 지하 통로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안 돼… 그 봉인이… 풀렸다고…?! 말도 안 돼…!”

    **#14. 지하 통로 (클로즈업)**

    * 문은 이제 절반 가까이 열렸고,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은 리안과 엘리아를 집어삼킬 듯이 확장된다. 엘리아는 공포에 질려 눈을 감고, 리안은 그 거대한 어둠 앞에서 얼어붙은 채 눈을 부릅뜨고 있다.

    **리안 (독백):** “대체… 저 안에 뭐가 있었던 거야?”

    **[에피소드 끝]**

  • 메카 액션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에피소드 제목: 강철 심장 속의 이방인**

    **[장면 1]**

    **#1. 광활한 우주 공간 / 기동병기 ‘천둥매’ 조종석 내부 – 밤**

    어둠이 지배하는 우주, 별들이 차가운 빛을 뿌린다. 수많은 파편들이 흩뿌려진 전장 한가운데, 거대한 기동병기 ‘천둥매’가 굉음을 내며 질주한다. 그의 몸체는 검은색과 짙은 회색의 합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푸른빛의 에너지 잔상을 남기며 기동한다. ‘천둥매’의 눈 역할을 하는 센서가 번쩍이며 적을 탐색한다.

    조종석 안, 젊은 파일럿 **카인(KAIN)**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린다. 그의 눈은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고, 손은 조이스틱을 쥐고 격렬하게 움직인다. 옆에 놓인 인공지능 보조장치 ‘아이기스’가 경고음을 낸다.

    **아이기스 (AI, 기계음):** [경고] 적성 기체, 아크리드 드론 다수 감지. 제1전투구역 진입. 즉시 회피 기동을 권고합니다.

    **카인 (거친 숨):** 회피는 얼어 죽을! 놈들 머리통을 깨부숴야지! 좌현 방어막 최대로! 주포 충전!

    카인의 명령과 동시에 ‘천둥매’의 왼팔에서 푸른 보호막이 뿜어져 나온다. 수십 발의 에너지탄이 보호막에 부딪히며 섬광을 터뜨린다. ‘천둥매’는 보호막으로 방어하는 동시에, 오른팔에 장착된 대구경 빔 캐논을 아크리드 드론 무리를 향해 겨눈다.

    **카인:** 받아라!

    콰앙! 강력한 빔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 드론들을 꿰뚫는다. 몇 초 만에 드론들은 폭발하며 우주 먼지로 사라진다.

    **아이기스:** 적성 기체 27기 파괴. 현 시간부로 제1전투구역 적성 기체 전멸.

    **카인 (한숨):** 젠장… 끝도 없군.

    카인이 한숨을 쉬며 잠시 긴장을 푼다. 그때, ‘천둥매’의 센서가 예상치 못한 신호를 감지한다.

    **아이기스:** [경고] 미확인 에너지 반응 감지. 기존 아크리드 패턴과 상이함.

    **카인:** 미확인? 또 새로운 놈들인가?

    스크린에 일렁이는 기이한 형체가 잡힌다. 그것은 기존의 기계적인 아크리드 드론과는 달리, 빛과 어둠이 뒤섞인 유기체적인 형태로 보였다. 마치 살아있는 에너지 덩어리 같았다.

    **아이기스:** 접근 중입니다. 충돌 궤도. 교신 시도 실패.

    **카인:** 젠장! 망할 아크리드 놈들, 뭐가 그리 많아! 주포 재충전!

    카인이 다시 주포를 겨누려는 순간, 미확인 에너지체는 상상 이상의 속도로 ‘천둥매’에게 돌진한다. 너무 빨라서 반응할 새도 없었다.

    **카인 (경악):** 이건…!

    쿵! 하는 충격음과 함께 ‘천둥매’의 기체가 흔들린다. 하지만 파괴적인 충돌음과는 달리, 기체에는 별다른 손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무언가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조종석 안으로 스며들었다.

    **아이기스:** 기체 손상률 0%. 보호막 기능 이상 없음. 미확인 에너지체… 천둥매 기체와 동기화 중?

    **카인:** 동기화라고? 말도 안 돼! 해제해! 당장 해제하라고!

    카인이 패닉에 빠져 여러 버튼을 눌러보지만 소용없다. 그의 머릿속으로, 낯선 감각이 파고든다. 차갑고도 따뜻한, 알 수 없는 ‘의식’의 흐름.

    **엘리아 (ELIA, 목소리 – 조용하고 울림 있는, 머릿속에서 직접 들리는 듯):** (…파괴… 끝없는 증오… 왜…?)

    카인은 자신의 뇌가 아닌, 심장이 직접 반응하는 듯한 섬뜩한 경험을 한다. 그것은 언어라기보다, 감정과 의도가 뒤섞인 순수한 생각의 파동이었다.

    **카인 (내면의 목소리):** 이건… 뭐지? 이 목소리…

    **엘리아 (목소리):** (…피… 붉은 고통… 너희는… 우리를… 우리는… 너희를…)

    카인의 눈앞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잔상이 나타났다. 푸른 행성이 불타오르고, 거대한 기계 병기들이 파괴되는 이미지. 그리고 그 한가운데, 차가운 푸른빛을 내는 존재가 서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과 닮았지만, 훨씬 더 길고 가느다란 사지와 은은한 빛을 내는 피부, 그리고 눈동자 대신 별을 품은 듯한 깊은 어둠을 가진 존재였다.

    **카인 (속으로):** 이 형체… 아크리드의 여왕이라는 소문으로만 듣던… ‘환영의 여인’인가?

    그때, 엘리아의 ‘목소리’가 그의 생각에 직접적으로 울려 퍼졌다.

    **엘리아 (목소리):**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갈 뿐… 너의… 심장도… 나의… 존재도…)

    카인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이 존재는 자신과 직접 소통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언어가 아닌, 순수한 ‘생각’으로. 그의 머릿속이 거대한 혼란에 휩싸였다.

    **아이기스:** [경고] 기체 내부 에너지 역류 감지. 파일럿 생체 신호 불안정. 즉시 분리 조작 권고.

    **엘리아 (목소리):** (…너는… 달라… 너의… 눈은… 슬픔을… 담고 있다…)

    그녀의 마지막 ‘말’과 함께, ‘천둥매’를 감싸고 있던 기묘한 에너지는 마치 연기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조종석 안의 기묘한 압박감도 함께 사라졌다.

    **카인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젠장… 대체… 대체 뭐였지?

    **아이기스:** 미확인 에너지 반응 소멸. 파일럿 생체 신호 안정화. 전투 종료.

    카인은 허탈하게 조종간을 놓았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방금 전 본 ‘환영의 여인’의 모습과 그녀의 슬픈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그의 마음속에,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장면 2]**

    **#2. 연합군 기지 ‘아이언 가드’ 회의실 – 낮**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카인이 회의실로 들어선다. 회의실 안에는 연합군 고위 지휘관들과 선임 파일럿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의 표정은 어둡고 긴장돼 있었다.

    **사령관 김민준 (중년의 강인한 인상):** 카인 중위. 들어와 앉아.

    카인이 지정된 자리에 앉자, 사령관 김민준이 스크린에 띄워진 전투 기록을 가리켰다.

    **김민준:** 자네의 보고서, 잘 읽었다. 제1전투구역에서의 단독 작전 성공은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자네의 기체 센서에 잡힌 ‘미확인 에너지체’에 대한 부분은 납득하기 어렵군.

    **카인:** 사령관님, 저는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기존 아크리드 드론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에너지체 같았습니다. 그리고…

    카인이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인다. 엘리아의 ‘목소리’에 대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김민준:** 그리고? 더 할 말 있나? 자네의 보고서에는 ‘기체와의 동기화’라는 기이한 현상까지 기록되어 있더군. 아이기스도 이상을 감지했다.

    **카인 (결심한 듯):** 예. 사령관님. 저는 그 존재와… 교감했습니다. 그 존재가 저에게 직접… 생각을 전달했습니다.

    회의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몇몇 파일럿들이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선임 파일럿 박성진 (거만한 표정):** 교감? 카인 중위. 피로가 누적되어 환각이라도 본 거 아니오? 아크리드 놈들은 그저 파괴만을 일삼는 괴물들입니다. 어떤 ‘교감’도 통하지 않는 야만적인 종족이라고요!

    **카인:** 하지만… 제가 느낀 것은… 적어도 제게는… 증오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슬픔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김민준 (책상을 내리치며):** 충분하다! 카인 중위! 그들의 본질을 잊었나? 그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학살을 잊었나! 그들에게 인간적인 감정을 투영하는 것은 병사로서 가장 위험한 자세다!

    사령관의 호통에 카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잊지 않았다. 아크리드에게 가족을 잃은 동료들의 분노를, 파괴된 고향 행성의 잔해를. 하지만 엘리아의 ‘목소리’는 그 모든 것을 흔들고 있었다.

    **김민준:** 이번 일은 자네의 피로 누적으로 인한 오판으로 결론 내겠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이런 헛소리를 한다면, 자네는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것이다. 알겠나?

    **카인 (고개를 숙이며):** …예, 알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카인은 터덜터덜 복도를 걸었다.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엘리아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너는 달라… 너의 눈은 슬픔을 담고 있다…’ 그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장면 3]**

    **#3. 카인의 개인 숙소 / 밤**

    어두운 숙소 안, 카인은 침대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그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카인 (내면의 목소리):** 내가… 미쳐가는 걸까? 아니면… 정말이었을까?

    그때, 그의 머릿속에 다시 한번 섬광이 번쩍였다. 이번에는 더 선명하게, 더 강렬하게. 엘리아의 형체가 그의 의식 속에 또렷이 나타났다. 그녀는 푸른빛의 옷을 입고 있었고, 슬픈 눈빛으로 카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엘리아 (목소리):** (…카인… 나의… 이름은… 엘리아…)

    **카인 (깜짝 놀라며):** 엘리아…? 네가… 정말…

    **엘리아 (목소리):** (…그래… 너는… 나를… 기억하는구나…)

    **카인:** 어떻게… 어떻게 된 거지? 너는 아크리드 종족이잖아. 우리 종족의 적… 그런데 왜 나에게… 왜 나를 돕고… 이렇게… 대화하는 거지?

    **엘리아 (목소리):** (…우리는… 너희가 아는… 아크리드가… 아니다… 우리는… 이 별의… 순수한… 의식…)

    엘리아의 ‘목소리’는 슬픔과 함께 간절함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의식은 카인에게 고향 행성의 고통스러운 이미지를 전달했다. 푸른 행성이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무수한 생명체들이 고통받는 모습.

    **엘리아 (목소리):** (…우리 종족의… 일부는… 증오에… 눈이 멀었어… 파괴만이… 유일한… 해답이라… 믿지…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야…)

    **카인:**…너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건가?

    **엘리아 (목소리):** (…전쟁은… 죽음만을… 낳을 뿐… 우리는…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너희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카인은 혼란스러웠다. 그가 평생 믿어왔던 진실, 즉 아크리드 종족은 무자비하고 파괴적인 존재라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카인:** 너희가… 정말 전쟁을 원치 않는다면… 왜 계속 공격하는 거지? 왜 우리 행성들을 침략하고… 사람들을 죽이는 거지?

    엘리아의 형체가 일렁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깊은 고통이 묻어났다.

    **엘리아 (목소리):** (…그것은… 일부의… 맹목적인… 지도자들 때문이야… 그들은… 너희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려 해… 우리 종족… 전체를… 대표하지… 않아…)

    카인은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 상황은 그가 상상했던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적대적인 존재라고만 생각했던 이방인이, 그에게 평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엘리아 (목소리):** (…카인… 나는… 너에게서… 너의… 종족에게서… 다른… 가능성을… 보았어…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카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감정은… 금지된 감정이었다. 적과의 교감은 곧 반역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진실됨은 그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카인:** 내가… 뭘 할 수 있지? 나는… 일개 파일럿일 뿐이야.

    **엘리아 (목소리):** (…너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해… 너의… 연민이… 빛이… 될 수 있어…)

    두 존재 사이의 침묵이 흘렀다. 언어는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서로에게 닿아 있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서로에게 위안이자 동시에 가장 큰 위협이었다.

    **[장면 4]**

    **#4. 우주 전장 / ‘천둥매’와 아크리드 함대 – 낮**

    새로운 대규모 아크리드 함대가 연합군 전선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수백 대의 드론과 거대한 모함들이 우주를 가득 메웠다.

    **사령관 김민준 (무전):** 전 함선, 전 기동병기! 아크리드 함대가 전면 침공을 시작했다! 목표는 ‘오메가 기지’! 전력을 다해 막아내라! 이것은 단순한 전투가 아니다! 우리 인류의 생존이 걸린 싸움이다!

    **카인 (조종석, 이를 악물고):** 망할… 정말 끝도 없군.

    ‘천둥매’는 거대한 빔 캐논을 발사하며 드론들을 폭파시킨다. 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압도적이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아크리드 드론들이 ‘천둥매’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아이기스:** [경고] 기체 피탄률 급증. 방어막 에너지 잔량 30%. 추가 지원 요청이 시급합니다.

    **카인:** 물러설 수 없어! 오메가 기지가 뚫리면 끝이야!

    그때, 그의 머릿속에 다시 엘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다급하고 절박하게.

    **엘리아 (목소리, 절박하게):** (…카인! 위험해! 그들은… 거대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어… ‘균열’을… 만들려고 해…!)

    **카인 (속으로):** 균열? 무슨 소리야?

    **엘리아 (목소리):** (…시공간의… 균열을… 열어서… 다른… 영역에서… 더 거대한… 존재들을… 불러내려고 해… 그들이… 성공하면… 이 우주… 전체가… 위험해져…!)

    카인의 눈앞에, 스크린을 뚫고 들어오는 듯한 섬광이 번쩍였다. 아크리드 모함 중 가장 거대한 함선 중앙에서, 어둠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마치 블랙홀이 생성되는 것처럼, 주변의 빛과 공간을 뒤틀었다.

    **연합군 통신병 (무전, 경악):** 이건… 이건 대체 무슨… 모함에서… 공간 왜곡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김민준 (무전, 다급하게):** 뭐? 공간 왜곡? 전 병력! 저 모함을 우선적으로 파괴하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것을 멈춰!

    카인은 엘리아의 경고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거짓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울렸다. 자신의 종족을 위해 적을 파괴해야 하는 운명. 하지만 그 적의 일부는 평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적의 위험한 계획을 막아야만 했다.

    **카인 (이를 악물고):** 아이기스! 최대 속력으로 모함에 돌격한다! 주포 에너지 코어에 집중!

    **아이기스:** [경고] 무모한 작전입니다! 현 속도로는 적의 집중 화력을 뚫고 목표에 도달할 확률 12% 미만!

    **카인:** 닥쳐! 이거 아니면 모두 끝장이야! 엘리아… 네 말이 진실이라면… 내가 널 믿는다면… 이걸 막아야 해!

    카인의 ‘천둥매’는 푸른 에너지 잔상을 길게 그리며 아크리드 모함의 심장부를 향해 돌진했다. 수많은 드론들이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카인은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봤다.

    **[장면 5]**

    **#5. 아크리드 모함 내부 / ‘천둥매’ 조종석 내부 – 직전**

    ‘천둥매’는 모함의 외벽을 뚫고 내부로 침입했다. 내부 통로는 미로처럼 복잡했고, 수많은 아크리드 드론들이 카인을 향해 쇄도했다.

    **카인:** 망할! 너무 많잖아!

    **엘리아 (목소리, 절박하게):** (…카인! 그들은… ‘균열’을… 거의… 완성했어! 서둘러…!)

    카인의 눈앞에, 모함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거대한 에너지 반응이 빛나고 있었다. 그곳에서 시공간이 일그러지며,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형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카인:** 저게… ‘균열’인가!

    그때, 거대한 아크리드 수호병들이 ‘천둥매’ 앞을 가로막았다. 기존 드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함과 강력한 방어력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카인 (내면의 목소리):** 이대로는… 안 돼. 시간이 없어.

    카인은 엘리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녀가 전해준 이미지들. 아크리드 모함의 에너지 코어 위치. 엘리아가 몰래 건네준 정보였다.

    **카인:** 아이기스! 모함의 중앙 에너지 코어에 가장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탐색해! 위험 등급 무시!

    **아이기스:** [경고] 해당 경로는 고압 에너지 도관이 밀집되어 있습니다. 폭발 위험 99%. 파일럿 생존 확률 0.01%.

    **카인:** 말하고 있잖아! 하라고!

    ‘천둥매’는 방어막을 최대로 올린 채, 아크리드 수호병들의 공격을 뚫고 고압 에너지 도관이 얽힌 미로 속으로 뛰어들었다.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엘리아 (목소리):** (…카인… 무사해야 해… 제발…)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과 함께 따뜻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카인은 그녀를 위해, 그리고 인류를 위해, 그리고 이 어리석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마침내, ‘천둥매’는 모함의 최심부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에너지 코어가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코어 너머, 시공간의 균열은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이미 수십 마리의 거대한 괴물들이 균열 너머에서 이 세계로 넘어오고 있었다.

    **카인:** 늦지 않았어!

    카인은 ‘천둥매’의 모든 에너지를 주포에 집중시켰다. 빔 캐논이 한계치까지 빛을 발했다.

    **카인 (외치며):** 엘리아! 이걸로… 모두 끝낼 거야!

    콰아아앙! 거대한 푸른 빔 에너지가 아크리드 모함의 에너지 코어를 정확히 관통했다.

    **아이기스:** [경고] 모함 중앙 에너지 코어 폭주! 대규모 폭발 예측! 긴급 탈출 권고!

    하지만 ‘천둥매’는 폭발의 여파로 발생하는 강력한 전자기장과 뒤틀린 공간에 갇히고 말았다. 조종석 안은 비상등으로 붉게 물들었다.

    **카인 (피를 토하며):** 크흑…! 엘리아…!

    그때, 그의 의식 속에 엘리아의 형체가 마지막으로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과 함께, 알 수 없는 희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엘리아 (목소리, 희미하게):** (…카인… 너는… 나에게… 희망이었어… 이 전쟁의… 유일한… 해답…)

    그리고 그녀의 형체는 빛과 함께 사라졌다. 동시에, 거대한 폭발이 아크리드 모함을 집어삼켰다. 시공간의 균열은 닫히고, 균열 너머에서 넘어오던 괴물들도 함께 사라졌다.

    **연합군 통신병 (무전, 경악과 환희):** 아크리드 모함… 폭발! 공간 왜곡 현상 소멸! 적 병력 대규모 궤멸! 성공했습니다! 우리가… 우리가 이겼습니다!

    연합군 전선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카인의 ‘천둥매’는 거대한 폭발의 중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김민준 사령관 (무전, 깊은 한숨):** …카인 중위… 그의 희생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모함이 폭발하기 직전, 아주 미세한 에너지 파동과 함께, ‘천둥매’의 잔해 속에서 아주 작고 푸른 빛의 파편 하나가 우주 미아가 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을.

    **[에피소드 끝]**

  • 마법소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아파트 12층, 유리(Yuri)의 작은 방은 언제나 그랬듯 미지근한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밖은 이미 어스름이 짙게 깔려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피어오르는 시간. 엄마와 아빠는 할머니 댁에 가신다고 어제 저녁부터 집을 비웠고, 유리는 딱히 심심할 틈도 없이 평소처럼 침대에 대자로 뻗어 휴대폰 화면 속 세상에 빠져 있었다.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잔잔한 음악 소리만이 고요한 아파트에 유일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그때였다.

    ‘팟.’

    거실에서 희미한 소리가 났다. 유리는 이어폰 한쪽을 빼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지? 옆집 소리인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이어폰을 꽂으려는 순간, 이번에는 ‘찌직… 탁!’ 하는 좀 더 선명한 소리가 들렸다. 거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유리는 휴대폰을 침대 옆에 던져두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 벌써 오셨나?”

    시계를 보니 밤 9시. 이 시간에 돌아올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리는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거실은 어두웠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도시의 불빛만이 희미하게 실루엣을 그렸다.

    “아무도 없네.”

    유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거실 불을 켰다. 거실은 어수선했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다만, 창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려 있었는지 희미한 외풍이 느껴졌다. “창문 단속 좀 잘 하지….” 유리는 투덜거리며 창문을 닫으려고 다가갔다. 그 순간,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도자기로 된 작은 화분 하나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정말 아주 조금, 미세하게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유리는 눈을 비볐다. ‘내가 너무 피곤한가? 환영인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지만, 화분은 처음의 위치에서 살짝 비껴나 있었다. 털이 쭈뼛 섰다. 괜히 오싹한 기분에 얼른 창문을 닫고 뒤돌아섰다.

    “하하, 뭐, 바람이 센가 보지.”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목이 말랐다.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들고 컵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싱크대 위 선반에서 유리컵 하나가 저절로 툭, 떨어졌다. ‘쨍그랑!’ 굉음과 함께 컵은 산산조각이 났다.

    유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이건 바람 때문도, 피곤해서 보는 환영도 아니었다. 이건… 분명히 뭔가 잘못되었다.

    “누구… 누구세요?”

    말소리는 거의 기어들어 가는 수준이었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공포가 온몸을 짓눌러왔다. 유리는 뒷걸음질 치며 거실로 나왔다. 그때였다. 꺼져 있던 TV가 갑자기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켜졌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백색 노이즈 화면. 그리고 화면은 채널을 미친 듯이 돌리기 시작했다. 1번, 2번, 3번… 순식간에 수십 개의 채널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끄, 꺼져!”

    유리는 비명을 지르며 리모컨을 찾았지만, 리모컨은 소파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버린 뒤였다. TV는 여전히 지직거렸고, 그 소리는 유리의 귓속을 파고들며 고막을 찢을 듯 울려댔다.

    그 순간, 유리는 거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이 기울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기울어진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액자를 잡아 비틀듯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액자가 벽에서 떨어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악!”

    유리는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런데 현관문이 갑자기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저절로 닫히더니 ‘철컥’ 하고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잠겼다.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유리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나가지 마.”

    귓가에 마치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그러나 분명히 들리는 속삭임이 들렸다. 낮은, 쉰 목소리. 유리는 숨을 헐떡였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거실의 모든 가구들이 제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소파가 혼자 움직여서 테이블에 부딪히고, 의자가 쓰러지며 쿵 소리를 냈다. 장식장 위의 작은 물건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 났다. 이건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이건… 악의였다. 명백한 악의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유리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문을 닫으려 했지만, 문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버티는 듯 닫히지 않았다. 간신히 몸을 밀어 넣고 문을 발로 막으려 했지만, 이내 문이 활짝 열리더니 안방에 있던 스탠드가 통째로 날아와 유리의 옆을 스치고 벽에 부딪혔다.

    ‘콰앙!’

    유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서웠다. 너무나도.

    그때, 방 구석에 놓여 있던 그녀의 작은 화장대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무서운 속도로 그녀에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피할 틈도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죽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 유리의 심장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았다.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 ‘내가…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내면에서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따뜻하고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자, 날아오던 화장대는 그 자리에서 멈칫하더니 산산조각 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빛은 유리의 몸을 감싸 안았고, 그녀의 평범한 잠옷은 눈 깜짝할 새에 순백의 드레스와 은빛 갑옷으로 변했다. 가슴 중앙에는 영롱한 보석이 박혀 있었고, 손에는 작은 지팡이가 저절로 쥐여졌다. 머리카락은 길게 흩날리며 빛을 머금었고, 눈빛은 더 이상 공포에 질려 있지 않았다.

    경외로움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온몸을 휘감았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게… 뭐야…?”

    낯선 자신의 모습에 놀라는 것도 잠시, 그녀의 눈앞에 흐릿하게 존재하던 악의의 기운이 더욱 강렬하게 꿈틀거렸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숨겨진 존재가 아니었다. 온 아파트를 채우고 있던 어둠의 기운이 마치 하나의 형태로 뭉쳐지려는 듯, 거대한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감히… 내 공간을… 침범하다니….”

    유리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이전의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단호하고, 위엄 있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보석이 빛을 발했다.

    “돌아가!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유리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지팡이 끝에서 눈부신 빛의 파장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어둠의 기운을 향해 쇄도했고, 어둠은 마치 연기처럼 흩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날카롭고 섬뜩한 소리가 아파트 전체를 울렸다.

    빛과 어둠의 충돌은 거실의 모든 물건들을 휩쓸었다. 날아다니던 가구들이 다시금 제자리에 박히고, 깨졌던 액자는 원래대로 돌아오는 듯했다. 어둠은 빛의 공격에 밀려 후퇴하는 듯 보였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마치 깊은 바닥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그림자처럼, 아파트의 벽과 바닥 속으로 스며들며 자취를 감췄다.

    모든 것이 잦아들자, 유리의 몸을 감싸던 빛이 서서히 꺼졌다. 드레스는 다시 잠옷으로, 지팡이는 사라지고, 보석은 사라졌다. 유리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휘청거렸다.

    “하아… 하아….”

    다시금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주위는 아수라장이었다. 깨진 유리 파편, 엉망진창이 된 가구들, 바닥에 흩뿌려진 물건들. 그러나 그녀가 처음 보았던 공포스러운 모습보다는 조금은 정돈되어 있었다. 스탠드는 벽에 박힌 채 간신히 매달려 있었고, 화장대는 부서진 채 바닥에 있었다.

    그녀의 손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희미하게 빛이 남아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내가… 뭘 한 거지…?”

    유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엉망이 된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어둠 속에서 터져 나온 기묘한 빛,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휘두른 강력한 힘.

    이 모든 것이 단지 꿈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손에 남아있는 희미한 잔광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알 수 없는 힘이 다시 필요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 또한 함께였다. 이 밤은 시작에 불과했다.

  • 오컬트 호러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에피소드 1: 심연의 메아리

    **[장면 1] 우주선 내부 – 함교**

    **[컷 1]**
    거대한 창밖으로 무한히 펼쳐진 심우주의 냉혹한 아름다움. 이름 없는 성운들의 희미한 빛이 아틀라스호의 함교를 은은하게 비춘다. 함교는 최첨단 장비들로 가득하지만, 깊은 우주의 침묵 속에서 기계음조차 나른하게 느껴진다.
    <내레이션> (선장 이현우): 탐사 임무 127일째. 정해진 항로를 이탈한 적 없음. 특이 사항 없음. 여전히 우리만 남은 고독한 바다.

    **[컷 2]**
    선장석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하는 이현우 선장 (40대 후반, 침착하고 노련해 보인다). 옆에는 부함장 박지영 (30대 후반, 날카로운 인상의 여성). 두 사람의 표정에서 지루함과 익숙함이 엿보인다.
    <이현우> (나른한 목소리): 박 부함장, 아직도 특별한 것 없나? 슬슬 지루해지는군.
    <박지영>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보시다시피. 잡동사니 소행성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번 섹터는 실망스럽네요.

    **[컷 3]**
    통신병 서윤아 (20대 중반, 비교적 신참)가 자신의 콘솔 앞에서 하품을 참는 모습. 그녀의 눈은 피곤해 보이지만, 모니터에 스쳐 지나가는 데이터에는 여전히 집중하려 애쓴다.
    <서윤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언제쯤 ‘미지의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효과음> (기계음): 삐익-! (갑작스럽게 울리는 경고음)

    **[컷 4]**
    함교 전체가 순간적으로 긴장한다. 이현우 선장이 몸을 곧추세우고, 박지영 부함장이 빠르게 자신의 모니터를 확인한다. 서윤아는 놀라서 몸을 움찔한다.
    <이현우>: 무슨 일이지?!
    <박지영>: …미확인 물체 감지! 좌표 델타-77, 예상 경로 이탈.

    **[컷 5]**
    박지영의 모니터에 희미한 점이 나타나고, 곧 자세한 정보가 분석되어 올라온다. 점의 형체는 불분명하며, 일반적인 소행성이나 우주 파편과는 다른 에너지 반응을 보인다.
    <박지영>: 에너지 스펙트럼이… 비정형적입니다. 생체 반응은 아닌데… 그렇다고 무기물도 아니고…
    <이현우> (미간을 찌푸리며): 더 자세히 분석해봐. 김 박사에게도 연락하고.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장면 2] 우주선 내부 – 분석실**

    **[컷 6]**
    분석실은 각종 센서와 샘플 보관함으로 가득하다. 탐사대장 김민준 (30대 후반, 호기심 넘치는 과학자)이 열정적으로 모니터 앞에 서서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다. 그의 눈은 흥분으로 빛난다.
    <김민준> (들뜬 목소리로): 대단합니다! 이런 스펙트럼은 처음 봅니다! 기존의 어떤 물질과도 일치하지 않아요!
    <내레이션> (김민준): 우주를 수없이 탐사했지만, 진정으로 ‘새로운’ 것을 만나는 순간은 극히 드물다. 이 탐사선 아틀라스가 존재하는 이유.

    **[컷 7]**
    이현우 선장과 박지영 부함장이 분석실로 들어선다. 김민준은 그들에게 미확인 물체의 데이터를 보여준다.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물체는 불규칙한 형태를 띠며, 내부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인다.
    <이현우>: 그래서, 저게 대체 뭐지?
    <김민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미지의 문명, 아니 어쩌면 더 오래된 존재의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저희는 이걸 ‘원점’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 혹은 끝.

    **[컷 8]**
    홀로그램이 클로즈업된다. 물체는 매끄러운 검은색 재질로 되어 있지만, 표면에는 불규칙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마치 어둠 속에 잠든 심해 생물의 피부 같기도 하다.
    <박지영>: 위험성은요? 접촉해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김민준>: 현재까지 유해한 에너지 방출은 없습니다. 오히려… 아주 미약한 ‘흡수’ 반응이 감지됩니다. 주변의 암흑 물질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 같아요.

    **[컷 9]**
    이현우 선장이 홀로그램을 유심히 본다. 그의 표정에는 호기심과 함께 미묘한 불안감이 스친다.
    <이현우>: 흡수? 무엇을 흡수한다는 건가?
    <김민준>: 글쎄요… 어쩌면… 존재 자체를 흡수하는 건지도요.

    **[컷 10]**
    이현우 선장이 잠시 침묵하다가 결정을 내린다.
    <이현우>: 탐사대를 꾸려 저 물체에 직접 접근한다. 김 박사는 외부 탐사팀과 동행해서 현장 연구를 지휘하고. 안전에 최우선을 기해라.

    **[장면 3] 소행성 지대 – 외부 탐사**

    **[컷 11]**
    어둡고 험준한 소행성 지대. 아틀라스호의 셔틀 ‘헤르메스’가 조심스럽게 비행하고 있다. 주변의 소행성들은 얼음과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빛이 닿지 않아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내레이션> (이현우): 우주의 수많은 죽은 잔해들 속에서, 우리는 생명보다 더 생명 같은 무언가를 향해 나아갔다.

    **[컷 12]**
    셔틀 내부. 김민준 박사, 그리고 숙련된 탐사대원 두 명이 우주복을 입고 앉아 있다.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함께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한다는 기대감이 서려 있다.
    <김민준> (마이크에 대고): 선장님, 저희는 목표 지점 500미터 전방에 도달했습니다. 시각 확인했습니다.

    **[컷 13]**
    셔틀 전면 스크린에 미확인 물체 ‘원점’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소행성들 사이에 박혀 있는 거대한 흑요석 같은 형태로, 주변의 모든 빛을 삼키는 듯한 어둠을 발산한다. 그 크기는 소형 우주선만 하다.
    <효과음> (무전음): 지지직… (잡음)
    <이현우> (무전으로): 상태는 어떤가?
    <김민준> (숨을 들이쉬며):…경이롭습니다. 어떤 기하학적 규칙도 따르지 않는 형태… 그리고 표면의 문양들은 마치… 움직이는 것 같아요.

    **[컷 14]**
    ‘원점’의 표면 문양이 클로즈업된다. 그것들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미세하게, 마치 피부 아래 혈관처럼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탐사대원 1> (무전으로, 떨리는 목소리): 소름 돋네요. 저건 대체… 살아있는 건가요?
    <김민준> (흥분하며): 스캐너를 작동해! 근접 스캔을 시작한다!

    **[컷 15]**
    셔틀에서 작은 탐사 드론이 발사되어 ‘원점’에 접근한다. 드론에서 발사된 스캔 광선이 물체에 닿자, 물체의 표면에서 붉은색과 보라색의 희미한 섬광이 뿜어져 나온다.
    <효과음> (기계음): 삐이익-! (드론에서 경고음)
    <김민준>: 뭐지?! 드론이 간섭받고 있어!

    **[컷 16]**
    드론의 영상이 지직거리며 왜곡된다. 화면 속 ‘원점’의 문양들이 더욱 빠르게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섬광이 더욱 강렬해진다.
    <탐사대원 2> (놀란 목소리): 드론의 제어 시스템이… 먹통이 됩니다!
    <이현우> (무전으로): 탐사대, 즉시 철수! 드론은 포기해!

    **[컷 17]**
    드론의 영상이 완전히 끊기고, ‘원점’은 다시 어둠 속에 잠긴다. 하지만 그 주변에는 미약한 잔광이 남아 있다.
    <김민준> (아쉬움과 당혹감에 휩싸여): 이런… 하지만 전자기 간섭이 이렇게 강하다니… 분명 심상치 않습니다.
    <내레이션> (이현우): 우리는 그때 알지 못했다. 그저 단순한 전자기 간섭이 아니었음을. 그것은 저 너머로부터의 첫 번째 ‘인사’였다는 것을.

    **[장면 4] 우주선 내부 – 격리실**

    **[컷 18]**
    ‘원점’이 아틀라스호의 격리실 중앙에 놓여 있다. 특수 자기장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어둠을 품은 그 존재감은 여전히 위압적이다. 김민준 박사, 이현우 선장, 박지영 부함장, 기관장 최상현 (50대 초반, 무뚝뚝한 베테랑)이 유리벽 너머로 그것을 지켜본다.
    <최상현> (팔짱을 끼고): 빌어먹을. 저게 저렇게 큰데… 어떻게 실어 올린 건가? 엔진에 무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김민준> (광학 센서를 조정하며): 질량은 크지만… 중력 특성이 일반 물질과 다릅니다. 이 또한 미스터리죠.

    **[컷 19]**
    ‘원점’의 표면에서 희미한 맥동이 감지된다. 격리실 내부의 공기가 미묘하게 떨리는 듯하다.
    <박지영>: 선장님, 함선 곳곳에서 정체불명의 전력 이상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미약하지만, 지속적으로요.
    <이현우>: 최 기관장, 문제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겠나?
    <최상현> (미간을 찌푸리며): 이놈의 함선이 갑자기 지랄을 하는 건 저 괴물 때문일 겁니다. 저것이 에너지를 빨아먹고 있거나… 아니면…

    **[컷 20]**
    최상현이 말을 흐린다. 그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최상현>: …아니면… 우리 함선이 저놈에게 맞춰서 ‘변하고’ 있거나…

    **[컷 21]**
    선장과 부함장의 시선이 ‘원점’에 고정된다. ‘원점’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어둠을 뿜어낸다. 그 안에서 아까 드론 스캔 때와 비슷한 붉은색과 보라색 섬광이 아주 미세하게 깜빡인다.
    <김민준>: 제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유물입니다. 생체 반응은 없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어쩌면…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생명체일지도…
    <내레이션> (박지영): 나는 이 ‘발견’이 탐사대의 가장 큰 성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것이 가장 끔찍한 실수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장면 5] 개인 숙소 – 밤**

    **[컷 22]**
    서윤아의 좁은 개인 숙소. 어둠 속에서 그녀는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고, 눈빛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서윤아> (혼잣말): 환청이야… 피곤해서 그래…

    **[컷 23]**
    어둠 속에서 희미한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불규칙하고 알 수 없는 언어의 나열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 같기도 하다. 서윤아는 귀를 막고 몸을 움츠린다.
    <효과음> (속삭임): 쉬이이… 지이이… (기이하고 불분명한 속삭임)
    <서윤아> (눈을 질끈 감으며): 제발… 사라져…

    **[컷 24]**
    숙소 벽면이 일렁이는 듯한 착시 현상. 마치 벽 너머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윤아는 떨리는 손으로 손전등을 켜서 벽을 비춘다. 벽은 멀쩡하다.
    <서윤아>: 착각이야… 다 환각일 뿐이야…

    **[컷 25]**
    하지만 그녀의 등 뒤, 어두운 숙소 문틈 사이로 붉은색과 보라색의 섬광이 아주 미세하게 깜빡인다. ‘원점’에서 보았던 그 섬광과 똑같다.
    <내레이션> (서윤아): 그것은 내 안에 있었다. 내 시야에, 내 청각에, 내 심장 소리에 섞여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컷 26]**
    서윤아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문틈에서 흘러나오는 섬광은 어느새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천장 구석에서 거대한 눈동자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다. 그 눈동자는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하다.
    <효과음> (쿵-! 쿵-! 쿵-!): (심장이 격렬하게 울리는 소리)
    <내레이션> (미지의 존재): **찾았다.**

    **[에피소드 끝]**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낙원의 숨결

    손끝에 닿는 차가운 쇠붙이 감각이 지혁을 현실로 끌어내렸다. 무너진 빌딩의 잔해 속에서 겨우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식기였다. 녹슨 숟가락 하나가, 한때 풍요로웠던 문명의 흔적임을 잊지 말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지혁은 흙먼지 낀 손으로 그것을 들어 올렸다. 깨진 손잡이, 검게 변색된 몸체. 쓸모는 없었다. 그저 망설임 없이 바닥에 내던졌다. 여전히, 감상에 젖을 여유 따위는 사치였다.

    하늘은 언제나처럼 잿빛이었다. 멸망의 날 이후, 푸른 하늘은 전설 속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간혹 구름 한 점 없는 날이 찾아오면, 지독한 모래폭풍이 몰아치거나, 태양의 잔해가 붉게 타오르는 기현상만이 이어졌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지혁은 낡은 방독면의 정화통을 만지작거리며 부서진 고층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희미한 태양열로 겨우 작동하는 탐지기가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근처에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젠장, 또.”

    낮은 욕설이 방독면 속에서 맴돌았다. 인간의 흔적은 아니었다. 이런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은 지혁처럼 숨어 지내거나, 아니면 무리를 지어 끔찍한 방법으로 서로를 약탈하며 살아갈 뿐이었다. 탐지기가 감지한 건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훨씬 강하며, 훨씬 잔혹한 존재들—변이체—이었다.

    지혁은 허리춤의 나이프를 고쳐 잡았다. 탄약은 귀했고, 화기는 항상 위험했다. 소리 없이 움직이며 급소에 정확히 나이프를 꽂는 것이 그의 생존 방식이었다. 그는 숨을 죽였다. 오래된 본능이 경고했다. 일반적인 변이체가 아니었다. 탐지기의 파동이 이상할 정도로 섬세했다.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변이체들과는 다른, 정돈된 움직임.

    무너진 백화점 잔해 속, 한때 빛나던 명품관 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마네킹 조각상들이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 사이로 무언가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지혁은 벽에 바싹 붙어 숨을 죽였다. 그리고 보았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에 가까웠다. 길고 가느다란 팔다리, 그러나 피부는 햇빛 한 점 없는 깊은 동굴 속에서나 볼 법한 창백한 푸른빛을 띠었고, 손가락 끝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변해 있었다. 머리칼은 마치 살아있는 덩굴처럼 등 뒤로 길게 뻗어 있었고,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눈이었다. 핏빛처럼 붉게 빛나는, 그러나 너무나도 깊고 지적인 눈동자가 폐허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듯, 혹은 모든 것을 비웃는 듯한 시선이었다.

    ‘변이된 인간인가? 아니면….’

    지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 그가 상대했던 변이체들은 짐승에 가까웠다. 날카로운 이빨, 찢어진 피부, 무자비한 공격성. 하지만 저 존재는 달랐다. 우아하고, 고요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 존재는 멈춰 서서 바닥에 떨어진 낡은 사진첩을 굽어보았다. 사진첩 속에는 멸망 이전의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행복한 얼굴들. 그 존재는 손을 뻗어 사진 속 여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긴 손가락 끝의 날카로운 발톱이 사진을 찢을 듯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찰나의 순간, 그 존재의 붉은 눈동자가 지혁이 숨어 있는 방향을 향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들켰다.

    지혁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엄폐물 뒤로 숨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그 존재는 그의 존재를 인지했다. 놈이라면, 아니 그녀라면—지혁은 무의식중에 그 존재를 ‘그녀’라고 불렀다—지금 당장 달려들어 그의 목을 찢어버릴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지혁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여전히 사진첩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표정함 속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 인간에게서는 보기 힘들었던,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지혁에게 향했다. 이제는 경계심보다는 호기심이 담긴 눈빛이었다. 붉은 눈동자에는 어떠한 적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사진첩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지혁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지혁은 긴장으로 온몸이 굳었다. 나이프를 뽑아 들고 자세를 취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창백한 푸른 피부가 희미한 빛을 받아 기묘하게 빛났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방독면을 쓰고 있는 지혁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본능이 비명을 질렀다. 도망쳐. 저건 괴물이야. 가까이 오지 마!

    하지만 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방독면에 닿았다. 차갑고, 부드러웠다. 날카로운 발톱은 그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았다. 그저 지혁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차가운 보호구를 조심스럽게 더듬을 뿐이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지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그 눈빛 속에 소용돌이쳤다. 슬픔, 호기심, 그리고… 갈망?

    그 순간, 멀리서 굉음이 울렸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소리였다. 다른 변이체들이었다. 무리를 지어 사냥에 나선 굶주린 괴물들.

    그녀의 몸이 순간 경직됐다. 붉은 눈동자에 경고등이 스쳤다. 그녀는 지혁에게서 손을 거두고,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혁은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끝에 남아있는 방독면의 차가운 감촉, 그리고 그녀의 부드러웠던 터치. 그의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를 지배했다.

    그녀는 그를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그에게 어떤 경고를 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이었을까?

    굉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혁은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녀의 붉은 눈동자와 창백한 푸른 피부만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멸망 이후, 인간에게 금지된 존재. 그와의 만남은 생존자에게 곧 죽음과 같았다. 하지만 지혁은 알았다. 그는 방금, 무언가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 마주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운명은, 어쩌면 그의 유일한 생존 이유를 뒤흔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잿빛 하늘 아래 홀로 남겨진 멸망의 도시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의 황량한 삶에 드리운 금지된 빛의 그림자를 느꼈다. 그 그림자는 차갑고 위험했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을 가지고 있었다.

  • 심리 스릴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차가운 금속 펜대가 손에 감기는 감각마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현은 텅 빈 화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지난 5년간, 그를 따라다닌 그림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처럼 어둡고 끈질겼다. 학계는 그를 ‘몽상가’라 불렀고, 그의 가설들은 ‘황당무계한 망상’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이현은 확신했다. 지금껏 인류가 알지 못했던, 감춰진 역사가 저 깊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을 거라고.

    그 어둠이 이제, 마침내, 그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교수님, 이쪽입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김민준의 목소리에 이현은 현실로 돌아왔다. 민준은 그의 유일한 조수이자, 아직까지는 그의 광적인 집념을 견뎌내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현은 몸을 돌려 민준을 따라 이동했다. 발밑의 흙은 질척거렸고, 며칠째 이어진 비로 산은 온통 축축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인적 드문 산골짜기, 오대산 깊숙한 곳의 낡은 폐광 근처였다. 한때 탄광으로 사용되다 버려진 곳이었으나, 이현의 끈질긴 추적 끝에 이 일대에서 기이한 지질학적 변칙성이 감지되었다는 옛 자료를 찾아냈다.

    “최근 조사팀이 발견한 균열입니다. 이전에 없던 지각 변동의 흔적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민준이 어두컴컴한 바위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현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틈이었다. 땅이 갈라지면서 생긴 흔한 균열. 하지만 이현의 눈에는 달랐다. 틈새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냉기는 분명 땅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이었지만, 어딘가 생경하고 차가운 기운이 스몄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이현 교수님, 이곳은…” 민준이 불안한 눈빛으로 이현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폐광 구멍 같습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희의 진짜 목표는…”

    “민준 씨.” 이현은 그의 말을 잘랐다. “우리의 진짜 목표는 여기에 있을 수도 있어. 아니, 분명 여기 있을 거야.”

    이현은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직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지난 밤, 꿈속에서 보았던 것들이 현실과 뒤섞이는 기분이었다. 기이한 문양, 속삭이는 소리, 그리고 거대한 어둠.

    그는 망설임 없이 균열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깨를 잔뜩 움츠려야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틈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흙과 돌멩이가 섞인 습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완벽한 어둠이었다. 이현은 헤드램프를 켰다. 좁은 빛줄기가 주변을 밝혔다.

    균열은 예상보다 깊고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따금 낙석의 흔적이 보였지만, 통로는 묘하게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민준의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세상에…” 민준의 낮은 탄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균열이 끝나고 나타난 것은 자연적인 동굴이 아니었다. 거대한 통로였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검은 현무암 벽은 마치 거대한 거울처럼 빛을 반사했고, 천장은 아득히 높았다. 인공적인 구조물이었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것들이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게… 정말입니까?” 민준의 목소리는 경외감과 함께 떨리고 있었다.

    이현은 아무 말 없이 손으로 벽을 쓸어보았다. 차가운 돌의 감촉은 수천 년의 시간을 머금고 있는 듯했다. 벽에는 기이한 문양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그 어떤 문자 체계와도 닮지 않은, 오직 형상으로만 이루어진 추상적인 문양들이었다. 그는 이 문양들을 본 적이 있었다. 꿈에서.

    “이건… 유적이야.” 이현의 목소리마저 떨렸다. “아무도 알지 못했던, 잊힌 문명의 유적.”

    그들은 조심스럽게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헤드램프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발걸음마다 희미한 발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는 다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그 메아리 속에서, 이현은 무언가를 들었다.

    속삭임.

    “민준 씨, 뭔가 들려?” 이현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민준은 귀를 기울였다. “아니요? 교수님 목소리랑 저희 발소리밖에 안 들리는데요…”

    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착각이었을까. 하지만 분명, 아주 작게,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물 흐르는 소리 같기도 한,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환청일지도 몰랐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긴장 탓일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통로는 더욱 깊숙이 이어졌다. 이따금씩 기둥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 기둥들은 불가능할 정도로 정교하게 깎여 있었다. 하나의 돌덩이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데, 거대한 나무뿌리처럼 위아래로 얽혀 있거나, 비정상적으로 꺾인 각도로 솟아 있었다. 건축 양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거대한 조각품 같았다.

    “교수님, 저기 보세요!” 민준이 앞쪽을 가리켰다.

    불빛이 닿는 곳, 통로의 끝에는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육중한 암석을 통째로 깎아 만든 듯한 문은 압도적인 크기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에는 아까 벽에서 보았던 문양들과는 또 다른, 훨씬 복잡하고 섬세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양들 사이에는, 눈동자처럼 보이는 형상들이 셀 수 없이 박혀 있었다.

    그 눈동자들은 정면을 바라보는 듯했지만, 이현의 시선이 움직일 때마다 마치 그를 따라오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눈동자가 동시에 자신을 주시하는 듯한 기분.

    “맙소사…” 민준이 숨을 들이켰다. “이게 대체… 얼마나 오래된 걸까요?”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섬뜩한 시선들이 그를 꿰뚫는 것 같았다. 문에 손을 대려는 순간, 그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이현 교수님, 조심하세요!” 민준이 걱정스럽게 외쳤다.

    이현의 머릿속에서 다시 그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 선명하게, 더 가까이서.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소리들은 그의 심장을 조여 왔다. 마치 문 저편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문에 새겨진 눈동자 중 하나가 흐릿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붉고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이현은 눈을 비볐다. 착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문이… 열릴 것 같아요.” 이현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낯설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교수님?” 민준이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이현은 문의 틈새를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견고하게 닫힌 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직감은, 아니,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문을 향해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공포가 그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이현은 확신했다. 저 너머에 무언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언가가, 그들의 정신을 잠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현은 천천히 손을 들어 문의 차가운 표면에 댔다.
    그 순간, 문에서 섬뜩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콰앙!

    굉음과 함께 주변의 공기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의 눈앞, 문에 새겨진 모든 눈동자가 한꺼번에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 사이버펑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제1장: 도시의 심장 아래, 잠든 그림자**

    빗물이 검은 강철과 번쩍이는 네온사인 위를 미끄러졌다. 신서울 27구역, ‘구정물’이라 불리는 슬럼가의 밤은 늘 그렇게 끈적하고, 후각을 찌르는 오물 냄새와 전자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빌딩 숲의 허리께부터 시작되는 조악한 주거용 모듈들은 마치 거대한 기계 괴물의 이빨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었고, 그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노란색 배수로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화학 폐수와 함께 한때 누군가의 꿈이었을 인공 꽃잎들이 둥둥 떠다녔다.

    강진우는 그 한가운데, 썩어가는 벽과 삐걱거리는 환풍기 소리만이 살아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좁은 아파트에서 낡은 홀로그램 스크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피로와 함께, 세상 모든 부조리를 꿰뚫어 볼 듯한 차가운 지성이 번뜩였다. 오른팔에는 지능형 의수 ‘크롬’이 단단히 박혀 있었고, 손가락 끝은 마치 살아있는 신경망처럼 키보드 위를 춤추듯 오갔다.

    “젠장, 또 실패냐.”

    그가 내뱉은 혼잣말은 삑삑거리는 기계음과 도시의 소음에 묻혀 희미해졌다. 벌써 사흘째다. 거대 기업 ‘넥서스 코프’의 보안망을 뚫고 들어가려 했지만, 매번 마지막 단계에서 막혔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음 달 월세도 밀릴 판이었다.

    그때, 스크린 한쪽에 파란색으로 반짝이는 알림창이 떴다. 암호화된 메시지. 발신인을 확인하자 진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카론’. 신서울 지하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보상이자, 가장 미스터리한 존재.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어떤 정보도 완벽하게 사고팔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메시지를 열자, 짧고 간결한 텍스트가 나타났다.

    [강진우. 너에게 흥미로운 제안이 있다. 신서울 32구역, ‘네온 카오스’ 바. 자정.]

    진우는 잠시 망설였다. 카론의 제안은 늘 위험했지만, 그만큼 보상도 확실했다. 지금 진우에게 필요한 건 바로 그 ‘확실한 보상’이었다. 어깨를 한번 으쓱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수의 관절이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밤은 깊어가고, 네온 카오스는 그 이름처럼 혼돈으로 가득했다. 끈적한 일렉트로닉 음악이 귀청을 때리고, 땀과 향수와 싸구려 알코올 냄새가 뒤섞여 공기 중에 떠다녔다. 홀로그램 댄서들이 투명한 유리관 속에서 유연하게 몸을 움직였고, 바텐더는 인공지능 팔로 능숙하게 칵테일을 제조했다.

    진우는 약속된 테이블에 앉아 이미 주문된 ‘블랙아웃’이라는 칵테일을 단숨에 들이켰다. 알코올이 그의 목을 태웠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낡은 트렌치코트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그의 존재 자체가 주변의 소음을 흡수하는 듯했다. 카론이었다.

    “오랜만이군, 진우.”
    카론의 목소리는 낮고 쉰 듯했다. 기계적인 변조음이 섞여 있어 진짜 목소리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언제는 아니었나. 용건이 뭔가.”
    진우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카론과의 대화는 늘 그랬다.

    “간단하다. 데이터를 찾아와야 해. 아주 오래된 데이터를.”
    카론은 테이블 위로 얇은 홀로그램 패드를 밀어 넣었다. 패드가 활성화되자, 진우의 눈앞에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지도가 펼쳐졌다. 신서울의 지하 구조도였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지도의 가장 깊은 곳, 현재 도시의 최하층부보다 훨씬 아래쪽에 ‘미확인 구역’이라는 표시와 함께 흐릿한 점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영역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뭔가? 도시 건설 당시 유실된 구역인가?”
    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신서울은 거대한 인공 구조물 위에 세워진 도시다. 그 아래에는 수많은 폐기물 처리장과 구도심의 잔해가 묻혀 있었다. 하지만 이 지도는 그 모든 것보다 더 깊었다.

    “유실이 아니라, ‘지워진’ 구역이지. 공식적인 기록은 물론, 민간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야. 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암시장에서 흘러나온 데이터 조각을 복원해서 겨우 위치를 파악한 거지.”
    카론의 목소리에 미묘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지워졌다고? 정부나 기업이? 그 깊은 곳에 뭘 숨겼다는 거지?”
    진우의 해커 본능이 꿈틀거렸다. 존재하지 않는 기록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정보였다.

    “그걸 네가 알아내야 해. 내가 원하는 건 그곳에 잠든 데이터다. 어떤 종류든 상관없어. 다만, 그곳에서 발견되는 모든 기록을 통째로 가져와야 한다.”
    카론은 붉게 빛나는 눈을 진우에게 고정했다.

    “위험한 곳이겠군.”
    진우는 칵테일 잔을 만지작거렸다.

    “죽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만큼의 보상은 보장한다.”
    카론은 홀로그램 패드에 숫자들을 띄웠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현재까지 그가 벌어들인 모든 돈을 합쳐도 몇 배는 되는 액수였다. 이 정도면 신서울의 최고층 스카이 펜트하우스에서 평생 놀고먹을 수도 있었다.

    “정말 이곳에 이런 게 있다고 확신하나?”
    진우의 의심이 서린 목소리였다.

    “확신한다. 내 정보망은 완벽해. 다만, 그곳은 단순한 폐허가 아닐 거다. 아니, 폐허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지.”
    카론의 목소리에 섬뜩한 예감이 스쳤다.

    “폐허가 아니라면 뭔데?”

    카론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진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어떤 보고서에 따르면, 신서울 건설 초기에 발견된 ‘고대 유적’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너무나 이질적이고, 너무나 강력해서 당시의 기술로는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었다는 기록. 그래서 모든 것을 묻고, 존재 자체를 지워버렸다는 소문이….”

    진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고대 유적? 이 첨단 도시 지하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카론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확실한 건, 그곳은 너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 어떤 사이버 전사나 해커도 시도하지 못했던, 금지된 영역이지. 자, 강진우. 도전할 텐가? 네 인생을 통째로 뒤바꿀 기회가 눈앞에 있다.”

    진우는 카론이 띄운 지도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점선으로 된 미확인 구역. 마치 도시의 심장 아래에 숨겨진 거대한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그의 손이 저절로 의수 ‘크롬’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에서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전해졌다.

    “좋아. 조건은?”

    카론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간단하다. 성공하면 계약금의 열 배. 실패하면… 네 존재 자체가 이 도시에서 지워질 거다.”

    진우는 턱을 굳게 다물었다. 위험했다. 아주 위험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미 탐욕과 모험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이 지겨운 구정물 같은 삶을 벗어날 단 한 번의 기회를 잡은 것일지도 몰랐다.

    “계약하자.”
    진우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카론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좌표와 최소한의 접근 루트를 전송하겠다. 나머지는 네 몫이다. 행운을 빈다, 강진우. 아니… 무운을 빈다. 그곳에는 행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테니.”

    카론은 그렇게 말을 마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진우는 홀로 남았다. 그의 눈앞에는 아직도 카론이 남긴 홀로그램 지도와, 그 아래 미지의 점선 구역이 번쩍이고 있었다. 도시의 심장 아래 잠든 고대 유적의 그림자. 이제 그 그림자를 파헤치는 모험이 시작될 참이었다. 그리고 진우는 직감했다. 이 모험은 그의 삶뿐 아니라, 신서울의 역사 자체를 뒤흔들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의 손에 들린 칵테일 잔이 서서히 식어갔다. 차가운 유리 위로, 도시의 네온 불빛이 춤추듯 반사되고 있었다.

  • 다크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삭막한 대지가 거대한 이빨처럼 벌어진 입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아래는 칠흑 같은 심연이, 살아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듯 웅크리고 있었다. 칼바람이 뼈를 에는 듯 살갗을 할퀴었지만, 렌은 미동도 없이 그 거대한 구멍, 모두가 ‘망자의 틈새’라 부르는 곳을 응시했다. 몇 날 며칠을 헤매어 겨우 찾아낸 목적지였다.

    등 뒤에 진 무거운 배낭이 어깨를 짓눌렀다. 낡았지만 잘 관리된 가죽 갑옷은 오랜 탐험의 흔적을 담고 있었고, 허리춤에 찬 짧은 검은 필요할 때마다 번뜩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의 손에 들린 묵직한 탐사용 랜턴은 이제 곧 빛을 잃을 것처럼 희미하게 깜빡였다.

    “젠장, 벌써부터 이런가.”

    렌은 낮게 중얼거렸다. 바람에 실려 오는 것은 흙먼지와 메마른 풀잎의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아득한 옛날, 이곳에 스며들었던 피와 죽음, 그리고 알 수 없는 절규의 잔향이 허파 깊숙이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이 대지를 ‘저주받은 불모지’라 불렀고, 그 심장에 자리한 이 틈새를 고대 문명 ‘카르수스’의 무덤이라고 속삭였다. 잊힌 문명, 잊힌 지식, 그리고 잊히지 않은 저주. 렌이 여기까지 온 이유였다.

    그의 고향은 ‘검은 안개’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듯한 그 안개는 나무를 썩게 하고, 강물을 오염시키며, 사람들의 영혼마저 좀먹었다. 학자들은 그 기원을 알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고, 신관들은 신의 노여움이라며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하지만 렌은 달랐다. 그는 수많은 고문헌과 비석 조각들을 뒤져, 검은 안개의 기원이 바로 이 ‘카르수스’ 문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단서를 찾아냈다. 금지된 지식, 금지된 힘, 그리고 그 대가.

    심장이 쿵, 쿵, 하고 불규칙하게 울렸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굶주려왔던 진실에 대한 갈망, 그리고 마침내 그 해답의 입구에 도달했다는 흥분감이었다.

    렌은 배낭을 내려놓고 장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튼튼한 로프, 여분의 기름, 비상식량,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법으로 강화된 탐사용 랜턴. 불안정한 마법 광석이 박힌 랜턴은 푸른빛을 내뿜으며 렌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눈은 피로에 지쳐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로프를 단단히 박힌 바위에 묶었다. 망자의 틈새는 수직으로 깎여 내려간 협곡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은, 스스로 미지의 그림자와 마주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젠장… 이래서 다들 돌아오지 못했나.”

    어머니의 마지막 기침 소리, 검은 안개에 잠식되어 희미해지던 여동생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그들의 죽음 앞에서 무력했다. 지식을 탐하는 자로서, 그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곳에서 그는 답을 찾을 것이다. 설령 그 답이 그를 집어삼킬지라도.

    렌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로프를 잡았다. 싸늘한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와닿았다. 한 발, 한 발. 바위 틈새를 딛고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떨어져 나간 작은 돌멩이들이 끝없는 심연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가, 그의 존재마저 삼켜버릴 듯했다.

    내려갈수록 빛은 퇴색하고,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랜턴의 푸른빛마저 힘없이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은 차가운 습기와 퀴퀴한 흙냄새, 그리고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가 숨 쉬는 듯한 음습한 공기였다. 이따금 알 수 없는 마찰음이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외에는 완벽한 침묵만이 존재했다. 죽은 침묵.

    한참을 내려갔을까. 로프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듯한 턱에 다다랐다. 렌은 조심스럽게 발을 떼어 바닥을 더듬었다. 단단한 암반 위에 발이 닿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랜턴을 들어 주위를 비췄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렌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곳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이 아니었다. 높이 솟아오른 기둥들, 정교하게 깎인 벽면,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문양들이 빼곡히 새겨진 통로가 어둠 속에 웅장하게 펼쳐져 있었다. 망자의 틈새 아래, 잊힌 문명의 흔적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벽면의 문양들은 기괴했다. 검은색과 짙은 보라색을 띠는 암석에 새겨진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뒤엉켜 있었고, 그 끝에는 눈동자처럼 보이는 형상들이 이글거렸다. 렌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문양을 쓸어봤다. 차가운 돌의 감촉 아래로, 미세한 진동이 손끝에 전해졌다.

    “카르수스… 너희는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통로는 완만하게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렌은 로프를 회수하고, 다시 배낭을 고쳐 멨다. 랜턴의 불빛이 가는 길을 겨우 밝히는 와중에,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통로 한구석, 바닥에 엎드려 있는 해골이었다.

    다른 탐험가인가? 아니면 카르수스의 고대인인가?

    렌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해골은 낡은 가죽 갑옷을 걸치고 있었고, 앙상한 손가락은 부러진 검을 쥐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늑골 부위에 검게 변색된 얼룩이 있었다. 마치 피부가 녹아내린 듯한 흔적. 검은 안개의 징후와 흡사했다.

    “결국, 여기까지 오지 못하고….”

    렌은 해골의 품속에서 낡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닳고 닳은 양피지 조각과 작은 수정 조각이 들어 있었다. 양피지에는 흐릿한 글자들이 고대 카르수스어로 쓰여 있었다. 렌은 고개를 숙여 해독하기 시작했다.

    ‘…피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심연의 심장이… 깨어난다….’
    ‘…공허의 그림자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리라….’
    ‘…결코 열어선 안 될 문이… 깨어나고 있다….’

    글자들은 단편적이었지만, 섬뜩한 경고를 담고 있었다. 피, 심연, 공허… 그리고 ‘열어선 안 될 문’. 렌의 심장이 더욱 강하게 울렸다. 해골의 손에 들려 있던 수정 조각을 꺼내자, 그것은 희미한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그 순간, 렌의 발밑에서 미약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미미했지만, 점차 강해졌다. 벽면의 기괴한 문양들이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착각마저 들었다. 랜턴의 푸른빛이 흔들리며 벽면에 춤추는 그림자들을 만들어냈다.

    ‘결코 열어선 안 될 문이… 깨어나고 있다….’

    양피지의 글귀가 다시금 뇌리를 스쳤다. 렌은 고개를 들었다. 진동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곳, 통로의 끝. 그곳에 거대한 암석 문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반적인 문과는 달랐다. 거대한 하나의 암석이 통째로 깎여 만들어진 듯한 문에는, 아까 보았던 촉수 같은 문양들이 더욱 크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양들의 중심에는, 렌이 방금 발견한 수정 조각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빈 홈이 파여 있었다.

    그때, 진동은 절정에 달했고, 동시에 렌이 손에 든 수정 조각에서 보랏빛 광채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문에 새겨진 문양들이 그 빛을 흡수하더니,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며 기괴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육중한 암석 문이, 천천히, 그리고 섬뜩한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것은 빛이 아니었다. 차가운 어둠, 그리고 귓가를 찢을 듯한 알 수 없는 저주스러운 웅웅거림이었다. 동시에, 그 안에서 스멀스멀 피어 나오는 익숙한 기운.

    ‘검은 안개.’

    렌은 숨을 들이켰다. 망설일 틈도 없이, 그는 손에 든 수정을 그 홈에 박아 넣었다. 수정이 제자리를 찾자, 문의 진동은 멎었지만, 문은 완전히 열린 채, 그 안에 감춰져 있던 심연을 드러냈다.

    검은 안개가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고향을 좀먹던 바로 그 저주였다.
    그 심연 너머에는, 과연 무엇이 렌을 기다리고 있을까.
    단지 죽음일 뿐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을 끝낼 진실일까.
    렌은 부서진 해골을 뒤로한 채, 천천히 그 어둠 속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이제 되돌아갈 길은 없었다.

  • 스팀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아르카나 학원, 증기 기관의 웅장한 심장 소리가 시계탑의 정교한 톱니바퀴와 함께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곳. 고도로 훈련된 마법사들과 기계공학자들이 모여 시대의 첨단 마법 공학을 탐구하는, 세상의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배움의 전당이었다. 하지만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 또한 짙어지는 법. 리안은 그 그림자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리안, 네 차례야. A-117 아크로스 동력 코어 해제 공식을 완성하라고. 멍하니 있지 말고.”

    교수님의 목소리가 리안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눈앞의 칠판에는 복잡한 룬 문자와 기어 조합도가 뒤섞인 마법 공학 문제가 빼곡했다. 하지만 리안의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아르카나 학원의 불빛들, 그 아래로 아득하게 펼쳐진 거대한 증기 파이프라인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자동 인형들의 실루엣. 그 모든 웅장함 아래, 뭔가 깊숙이 감춰진 비밀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이 리안의 심장을 자꾸만 자극했다.

    “리안!”

    “아, 네! 교수님!”

    화들짝 놀라며 펜을 든 리안의 옆구리를 세라가 쿡 찔렀다. 세라는 리안과 동갑내기 친구로, 학원 내에서도 손꼽히는 룬 마법 이론 전문가였다. 그녀의 깔끔하게 묶어 올린 머리카락 아래로 반짝이는 증기 안경이 늘 그녀의 진지함을 대변했다.

    “또 딴생각했지? 이러다 졸업도 못 하겠다 너.”

    세라의 잔소리에도 리안은 그저 씨익 웃어 보였다.

    “별거 아니야. 그냥 학원의 저 아래쪽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서.”

    “아래쪽? 설마 ‘감마 구역’ 말하는 거야? 거긴 학원의 폐기물 처리장이잖아. 괜히 이상한 데 관심 두지 마.”

    세라는 질색하며 손을 저었다. 감마 구역. 학원 내에서 가장 깊고, 가장 폐쇄적인 구역. 아무도 그곳에 대해 자세히 말하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학원 지도를 봐도 그 구역은 단순히 ‘제한 구역’으로만 표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폐기물 처리장이라기엔 너무나 삼엄한 보안, 그리고 가끔씩 들려오는 이상한 소문들이 리안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수업이 끝나고, 늘 그렇듯 리안과 세라는 함께 기숙사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는 길, 고학년 선배 몇몇의 대화가 리안의 귀를 잡아챘다.

    “어제 야간 순찰 돌다가 감마 구역 쪽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

    “또 그 얘기야? 그냥 낡은 증기 파이프 소리겠지.”

    “아니야. 뭔가… 기계적인 울음소리 같았어. 마치 생명체 같은… 게다가 어제 밤늦게 아르카나 공방 쪽 연구원들이 잔뜩 장비를 싣고 감마 구역으로 내려가는 걸 봤다니까.”

    “쉬잇! 함부로 떠들지 마. 감마 구역 얘기는 자칫하면 퇴학 사유가 될 수도 있어. 선배들 중에도 그곳을 파고들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선배들의 목소리는 이내 뚝 끊겼다. 리안은 세라와 눈을 마주쳤다. 세라의 표정에도 어렴풋한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봐. 내가 뭐랬어. 그냥 폐기물 처리장이 아니라니까?” 리안의 눈이 반짝였다. “궁금하지 않아? 대체 저 아래에 뭐가 있길래 그렇게 감추려 하는지?”

    세라는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요즘 학원 분위기가 이상해. 평소보다 자동 인형 순찰대도 늘어났고, 도서관의 열람 제한 구역도 더 많아졌어. 그런데 굳이 우리가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아르카나의 빛나는 지성 아래 숨겨진 진짜 진실이라면? 그걸 모른 척 지나칠 수는 없어. 어쩌면… 위대한 발견일 수도 있잖아?”

    리안의 눈빛에 장난기가 섞였지만, 그 속에는 진심 어린 탐구심이 빛나고 있었다. 세라는 리안의 이런 면모를 잘 알고 있었다. 한번 꽂히면 물불 안 가리는 성격.

    “하… 알았어, 알았어. 너 혼자 가면 더 큰 사고 칠 게 뻔하니까. 대신 내가 계획을 짠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철수하는 거야.”

    세라의 말에 리안은 활짝 웃었다. “역시 세라! 너 없으면 난 아무것도 못 해.”

    그날 밤늦게, 모든 기숙사가 고요에 잠들었을 무렵, 리안과 세라는 각자의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학원 지하의 오래된 유지보수 통로 입구 앞에 섰다. 세라의 손에는 학원 도면이 홀로그램으로 떠다니는 소형 마법 시계와 몇 가지 해제용 룬 도구가 들려 있었다. 리안은 허리춤에 휴대용 조명탄과 소형 만능 기어 렌치를 챙겼다.

    “이곳은 예전에 폐쇄된 증기 배관 통로야. 도면상으로는 더 이상 연결된 곳이 없다고 되어있지만… 학원 지하 건축물은 계속 확장되어 왔어. 분명 어딘가 이어지는 곳이 있을 거야.”

    세라가 손전등을 비추자, 녹슨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굳게 잠긴 자물쇠에는 오래된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리안이 렌치를 꺼내 들려 하자 세라가 그를 말렸다.

    “안 돼. 물리적인 충격은 경보를 울릴 수도 있어. 룬 마법으로 해제해야지.”

    세라는 자물쇠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고대 룬 문자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이내 자물쇠가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풀렸다.

    “역시 세라!”

    리안이 감탄사를 내뱉자 세라가 콧방귀를 뀌었다. “자, 가자. 조용히.”

    철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리자, 안에서는 차갑고 습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오래된 금속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리안이 휴대용 조명탄을 작동시키자, 작은 에테르 불꽃이 어둠을 밝혔다.

    통로는 좁고 미로 같았다. 낡은 증기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가끔씩 ‘쉬이익’ 하고 증기가 새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리안과 세라는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통로의 끝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동시에, 낮게 울리는 웅장한 기계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단순한 파이프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규칙적이면서도 묘하게 불길한 박동이었다.

    “이 소리… 전에 들었던 적이 없어.” 세라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렸다.

    “더 깊이 내려가는 것 같아. 분명 학원 지하실보다도 더 아래일 거야.”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빛이 새어 나오는 틈새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낡은 철문이 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자물쇠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보안 장치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황동과 강철로 이루어진 거대한 문은 고대 룬 문자로 가득했고, 그 룬 문자들은 미세하게 푸른빛을 내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제 단순한 기계음이 아니었다. ‘철컥… 징징… 욱…’ 무언가가 힘겹게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낮게 깔린 기계적인 신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마치 거대한 생명체가 고통받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세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봉인 룬이야. 학원의 어떤 자료에도 이런 종류의 룬은 없어. 너무나도… 원시적이면서도 강력해.”

    그녀가 룬에 손을 대자, 갑자기 문에서 강력한 정전기가 튀어 올랐다. 세라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손을 거두었다.

    “이건…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리안의 눈은 그 문에 홀린 듯 고정되어 있었다. 문 옆에는 낡은 제어판이 있었다.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지만, 그중 몇몇 버튼은 최근에 만진 듯 깨끗했다. 그리고 제어판 위에는 낡은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누군가 급하게 쓴 듯한, 갈겨 쓴 글씨.

    **”경고: 동력원 불안정. 자가 수복 기능 저하.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경우, 학원 전체의 에테르 흐름이 역류할 위험이 있습니다. 서둘러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동력원? 학원의 에테르 흐름? 리안과 세라는 서로를 바라봤다. 아르카나 학원의 모든 마법 공학은 학원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에테르 저장고’에서 공급되는 순수한 에테르를 동력원으로 삼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 경고문은 마치 그 동력원이 단순한 저장고가 아닌, 무언가 ‘살아있는’ 존재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때였다. 웅장한 기계음과 함께 들려오던 신음소리가 갑자기 거칠어졌다. ‘크르르릉… 쾅!’ 하는 격렬한 소리가 문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문을 감싸고 있던 룬들이 미친 듯이 번쩍이기 시작했고, 통로 전체가 흔들렸다. 천장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안 돼! 이대로 있다간 통로가 무너질 거야!” 세라가 리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도망쳐야 해!”

    하지만 리안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대한 철문,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계적인 울부짖음. 그리고 낡은 경고문. 이 모든 것이 거대한 퍼즐 조각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학원의 모든 영광과 빛이, 저 문 너머의 ‘무언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쾅! 쾅!’

    문이 안쪽에서 찢어발겨질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룬 문자들이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그 거대한 문틈 사이로, 아주 잠시,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기계 눈동자 같은 섬광이 비쳤다. 이어진 것은 금속이 긁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비명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 소리가 아니었다. 고통받는 존재의 절규였다.

    리안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곳은 단순한 폐기물 처리장도, 일반적인 에테르 저장고도 아니었다. 학원 지하 깊숙한 곳에는, 아르카나 학원 전체를 지탱하는 끔찍한 금기가 잠들어 있었다.

    “리안! 어서!”

    세라의 다급한 외침에 리안은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 그가 도망치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문 너머에서 다시 한번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섬광과 함께, 짧은 순간이지만 거대한 철문 틈새로 기괴한 형태의 그림자가 비쳤다.

    인간의 팔과 흡사하지만 수많은 기어와 증기 파이프로 이루어진, 거대한 기계 장치와 유기체가 뒤섞인 듯한 형상. 그것이 마치 문을 부수려는 듯 격렬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형상의 중심에서, 붉고 강렬한 빛을 뿜는 하나의 눈동자가 리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동자는 고통과 분노, 그리고 지독한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리안은 그 눈동자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아르카나 학원의 심장부에 숨겨진 진실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것이었다.

    “우린… 뭘 발견한 거지, 세라…?”

    리안의 목소리는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눈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뒤에서 문이 굉음과 함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황급히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금기가 그들을 향해 깨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