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흉터처럼 잊힌 곳이었다. 재개발 계획에 묶여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 수십 년. 낡은 상점 간판들이 녹슬고, 창문들은 먼지로 뿌옇게 흐려진 채 도심 속 유령처럼 서 있었다. 김준호는 그런 곳을 좋아했다. 쓸모없이 버려진 것들 속에서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내는 탐험가 기질이 그에게는 있었다.
“이번엔 또 뭘 건질 수 있을까.”
낡은 공구 가방을 든 준호는 가장 끄트머리에 버려진 한 한옥 건물 앞에 섰다. 기와는 깨지고, 담벼락은 무너져 내렸으며, 문은 이미 오래전에 떨어져 나간 흔적만 남아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혹은 시간이 썩어버린 듯한 풍경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하고 눅진한 곰팡이 냄새, 그리고 오래된 나무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채는 완전히 폐허였다. 마루는 삐걱거렸고, 천장에서는 흙먼지가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준호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그의 눈은 익숙하게 오래된 물건들 속에서 특이한 기운을 가진 것을 찾아 헤맸다. 빈 병, 찢어진 책, 부서진 가구… 시시한 것들뿐이었다.
“젠장, 헛걸음인가.”
깊숙이 들어선 작은 방, 이불장으로 쓰였을 법한 공간에 다다랐을 때였다. 널브러진 잔해들을 치우다, 그는 바닥에 깔린 널빤지 하나가 미묘하게 솟아올라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널빤지들과는 달리, 손때 묻은 느낌이 덜했다. 준호는 삐걱거리는 널빤지를 들어 올렸다. 아래는 습한 흙먼지로 가득한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 검은 천에 싸인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천을 걷어내자,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나무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옻칠을 한 듯 검고 윤기 나는 표면에, 기묘하고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무판은 겉보기에 오래되어 보였지만, 손에 닿는 순간 오싹하리만치 차가운 냉기가 전해졌다.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를 만진 듯, 미약하지만 분명한 떨림이 느껴졌다.
“이건… 대체 뭐지?”
준호는 이성적으로는 단순한 오래된 목판 조각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본능은 무언가 다른 것을 속삭였다. 그는 목판을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었다. 왠지 모르게, 이 물건은 그곳에 버려져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준호는 늦은 밤까지 목판을 들여다보았다. 인터넷으로 아무리 검색해도 목판에 새겨진 문자들과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고대의 언어이거나, 아니면 그저 무의미한 낙서일 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알 수 없는 냉기와 미묘한 떨림은 그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잠이 들었는지조차 모를 무렵, 그의 의식은 이상한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꿈이었다. 하지만 어떤 꿈보다도 선명하고, 현실적이었다. 그는 거대한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존재들이 기괴한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몸에서 피어나는 그림자는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고, 때로는 형체를 바꾸며 준호를 향해 손짓했다. 낮은 읊조림이 귓가에 들려왔다. 언어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의미를 가진 메시지였다. *’갈망하라… 더욱 깊이…’*
다음 날 아침, 준호는 온몸이 뻐근했지만 묘하게 정신이 맑았다. 밤새 꾼 꿈의 잔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책상 위의 목판으로 향했다. 목판은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놓여 있었지만, 어쩐지 그 주변의 공기가 더 차갑고, 그림자가 더 짙게 드리워진 것 같았다.
그는 문득 목판의 문자를 손가락으로 덧그려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차가운 나무 표면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자, 손끝에서부터 오싹한 전율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목판에 새겨진 홈에서 희미한 검붉은 빛이 일렁였다.
“헉!”
준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떼었다.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의 손가락 끝에는 섬뜩할 정도의 잔열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방 한구석에 놓인 낡은 화분이 시들기 시작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푸른 잎을 자랑하던 식물은 준호의 눈앞에서 생기를 잃어가더니, 불과 몇 초 만에 바싹 마른 갈색으로 변해버렸다. 마치 모든 수분이 빨려 나간 것처럼, 가루가 되어 부스러졌다.
준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공포와 경이로움이 뒤섞인 감정이 그를 덮쳤다. *’내가… 내가 한 건가?’*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목판에 손을 얹었다. 이번에는 화분 쪽을 바라보며 집중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욕망하라. 네가 원하는 것을. 생명을. 어둠을.’*
그는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상상했다. 화분의 생명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아니, 그 반대였다. 화분의 생명을 *빨아들이는* 것을.
손끝에서 다시 차가운 기운이 솟아났다. 목판이 미미하게 진동했다. 이번에는 희미한 검붉은 기운이 그의 손에서 화분 쪽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검은 실 같은 것이었다. 화분은 순식간에 다시 한번 생기를 잃고 말라비틀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준호는 온몸에 퍼지는 짜릿한 쾌감과 함께, 전례 없는 강력한 에너지가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피곤함은 사라지고, 몸은 가벼웠다. 세상이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준호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는 목판의 힘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식물들로, 다음에는 버려진 벌레들로. 그는 생명을 흡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림자를 조종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밤이 되면 그의 방 안 그림자는 그의 의지대로 길어졌다가 짧아졌고, 때로는 춤을 추듯 움직였다. 그는 그림자 속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어두운 형상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그를 따라다니는 듯했지만, 해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힘의 존재를 환영하는 듯했다.
점점 더 힘을 사용할수록, 준호는 기묘한 변화를 겪었다. 그의 피부는 창백해졌고, 눈 밑은 어두워졌다. 마치 그의 육신이 힘에 잠식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내면은 전에 없던 강력한 힘으로 가득 찼다. 그는 배고픔을 덜 느꼈고, 수면 시간도 짧아졌다. 평범한 인간의 욕구가 점차 사라지는 대신, 오직 목판의 힘에 대한 갈증만이 깊어졌다.
밤마다 그는 더욱 생생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고대 의식을 주관하는 자가 되어,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힘을 끌어내는 존재들과 마주했다. 그들은 자신을 ‘근원의 자식들’이라 칭하며, 그에게 목판의 힘은 ‘단순한 시작일 뿐’이라고 속삭였다.
“네 안의 어둠을 받아들여라. 그러면 너는 진정한 힘을 얻으리라.”
어느 날 밤, 준호는 여느 때처럼 목판의 힘으로 방 안 그림자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림자는 그의 의지대로 춤을 추고, 벽에 기괴한 형상들을 만들었다. 그때였다. 목판이 갑자기 강렬하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검붉은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고, 목판에 새겨진 문자들이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흐읍…!”
준호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방 안의 그림자들이 갑자기 독립적인 생명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거미줄처럼 방 안을 가득 채웠고, 이내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검은 실타래들이 얽히고설켜,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거대한 형체를 이루어갔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과 비슷했지만, 너무나도 왜곡되고 기괴했다. 여러 개의 팔다리가 돋아나 있었고,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그 존재의 시선은, 준호의 영혼을 꿰뚫는 듯했다.
준호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것은 그가 여태껏 다루던 힘이 아니었다. 이것은… 힘의 근원이었다.
“네… 네가… 뭐야…?” 준호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어둠의 존재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고대의 언어가 아닌, 분명한 의미의 텔레파시가 울려 퍼졌다.
*’너는… 그저… 열쇠… 문… 허기진… 존재의… 시작…’*
그리고는 여러 개의 그림자 팔 중 하나가, 끈적이는 어둠의 촉수처럼 준호를 향해 뻗어왔다. 차가운 그림자 촉수가 준호의 뺨을 스쳤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그 촉수에 의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영혼이, 육체가, 모든 것이 조여들고, 빨려 들어가는 끔찍한 감각이었다.
*’더… 깊이… 더… 강하게… 네 모든 것을… 바쳐라…’*
준호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어둠의 존재는 더욱 거대해지고 있었다. 그의 시야는 그림자에 잠식당했고, 몸은 이제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닌 듯했다. 그의 정신은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자신이 겨우 얻은 힘이 사실은 자신을 잠식하기 위한 거대한 존재의 미끼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림자가 그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순간, 그의 존재는 세상에서 지워졌다. 그가 버려진 한옥에서 찾아낸 것은, 단순한 고대의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숨겨져 있던, 허기진 어둠의 문이었다. 그리고 준호는, 그 문을 열어버린 어리석은 열쇠에 불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