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미궁 속의 초대장
**1. 새로운 현실의 문턱**
부드러운 전기가 온몸을 감쌌다. 익숙한 감각, 하지만 언제나 새로웠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미세한 전류가 정수리를 훑고 지나가자, 이내 눈앞에 검은 심연이 펼쳐졌다. 그 심연은 잠시 후 무수한 별빛으로 채워지며 거대한 은하의 풍경으로 변했다. 이내 별들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거대한 성채와 숲, 그리고 활기 넘치는 도시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아크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지막하지만 웅장한 여인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나는 익숙하게 시야에 떠오른 로그인 창을 넘기고, 몇 초 후 완벽하게 재구성된 또 다른 나의 육체를 느꼈다. 뻣뻣했던 목을 돌리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질감 따위는 없었다. 그저 또 다른 현실이 시작된 것뿐이었다.
내 게임 속 이름은 ‘미궁’이었다. 본명은 한결. 스물아홉, 백수. 그리고 한때는 잘나가는 프로파일러를 꿈꿨던 미제 사건 덕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열망을 가상현실 속에서나마 채우려는 걸까. 이곳, 아크랜드에서 나는 ‘탐정’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게임 내 시스템이 제공하는 정식 직업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역할극이자, 취미에 불과했다.
내 사무실은 엘도리아라는 대도시의 허름한 뒷골목에 있었다. 낡은 간판에는 ‘미궁 탐정 사무소’라고 삐뚤빼뚤하게 쓰여 있었지만, 찾아오는 이는 거의 없었다. 게임 속에서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쏘며 거대한 보스를 잡거나, 희귀한 아이템을 찾아 미지의 던전을 헤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누가 시시한 NPC의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주거나, 플레이어의 바람피운 연인을 추적하는 일 따위에 관심을 가질까.
하지만 나는 그런 일들을 좋아했다. 시스템이 정해준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미스터리 자체를 파헤치는 것. 단서들을 조합하고,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는 그 과정이 나를 매료시켰다. 나는 주로 게임 속에서 발생하는 기이한 현상이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사건들을 ‘해결’해주며 소소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물론, 그 명성은 ‘괴짜 탐정’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었지만.
“흠…”
창밖으로 엘도리아의 분주한 거리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딱히 특별한 의뢰가 없었다. 벽난로 속에서 장작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만이 사무실의 정적을 깼다. 이런 날은 대개 게임 속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대 문헌을 읽거나, 길드 게시판을 훑으며 혹시나 있을 만한 흥미로운 사건을 찾아다녔다.
그때였다. 낡은 사무실 문이 ‘쾅!’ 하고 거칠게 열렸다. 먼지가 푸석하게 일고, 문틀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문간에는 헐레벌떡 뛰어온 듯한 젊은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의 숨은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고,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길드 마크가 새겨진 망토를 보니, 엘도리아에서 꽤 이름 있는 상인 길드 소속의 플레이어 같았다.
“탐정님! 미궁 탐정님 되십니까?!” 그녀는 채 진정되지 않은 숨을 몰아쉬며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큰일 났어요! 정말 큰일이요!”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베르제니아 저택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어요!”
베르제니아 저택. 그 이름이 나의 귀를 사로잡았다. 엘도리아 외곽에 위치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귀족 NPC의 저택이었다. 게임 속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매우 은밀하고 폐쇄적인 곳이었다. 그곳에서 살인이라니.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어조로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가이아가… 가이아님이 죽었어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이름을 뱉어냈다. 가이아. 베르제니아 가문의 후계자이자, 아크랜드 내에서도 손꼽히는 보석 수집가로 알려진 NPC였다. 그의 방에는 희귀한 보석들이 가득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럼 베르제니아 영주님께서 탐정님을 찾아오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요… 영주님은 너무 충격을 받으셔서 아무것도 못 하고 계세요. 경비대장님은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영주님께서 가이아님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다고 막으셨고요. 아무것도 손대지 못하고 있어요. 저는 그저… 소문을 듣고 미궁 탐정님을 찾아온 겁니다. 제발, 제발 저희 가이아님을 위해 진실을 밝혀주세요!”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보니, 단순한 NPC가 아닌, 그녀가 아끼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크랜드는 플레이어가 NPC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밀실 살인. 은밀한 귀족 저택. 희귀한 보석 수집가. 내 안의 미제 사건 덕후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곳으로 안내해주시겠습니까?”
**2. 베르제니아 저택의 비극**
베르제니아 저택은 소문대로 거대하고 웅장했다. 엘도리아의 번화가에서 한참 떨어진 숲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나타나는 그곳은, 높게 솟은 담장과 철통같은 경비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를 안내한 여인, ‘세레나’는 저택의 사용인 중 한 명인 듯했다. 그녀의 안내 덕분에 복잡한 경비 시스템을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저택 내부는 더욱 엄숙하고 무거웠다. 고풍스러운 가구와 벽을 장식한 초상화들이 모두 비극적인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복도 곳곳에는 혼란스러운 표정의 사용인들과 경비병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내가 탐정이라는 말에 이내 체념한 듯했다. 이 상황에서 딱히 더 나쁜 일이 벌어질 것 같지도 않았을 테니.
“이쪽입니다…” 세레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어느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문의 재질은 최고급 흑단나무로 되어 있었고, 곳곳에 금으로 장식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육중하고 견고한 문. 그리고 그 문 앞에는 베르제니아 영주로 보이는 노신사가 지팡이를 짚은 채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수척했고, 눈은 이미 모든 희망을 잃은 듯 텅 비어 있었다.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도 그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탐정이라고 들었네만… 자네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영주는 내게 시선을 돌렸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내 아들이… 내 아들이 죽었네. 저 방 안에서. 문은 안에서 걸쇠가 채워져 있고, 창문은 굳게 닫혀 잠겨 있네. 부술 수도 없어. 자네가 뭘 본다고 달라질 게 있겠나?”
나는 영주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 굳게 닫힌 문을 자세히 살펴봤다.
“말씀하신 대로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다면, 문을 부수더라도 그 흔적은 남을 겁니다. 시신을 훼손하는 것보다, 제가 먼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나의 차분한 목소리에 영주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대장이 다가와 말했다.
“탐정님. 상황은 이렇습니다. 어젯밤 가이아님께서는 서재에서 책을 읽으시다 잠이 드셨다고 합니다. 아침에 사용인이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고, 불안함을 느낀 저희가 문을 열려고 했으나… 안에서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문까지 살펴봤지만, 창문도 안에서 잠겨 있었고, 외부에는 쇠창살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방은 저택의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해 있어 외부에서 침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어떤 흔적도 없었습니다.”
“외부인은 없었습니까?”
“어젯밤 저택에는 모든 문과 창문에 경비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외부 침입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완벽한 밀실. 게임 속이라지만, 이렇게 완벽한 밀실 살인이라니. 평범한 플레이어들이라면 버그라고 외치거나, 운영진에게 문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이것이 바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운영진이 의도한 미스터리일 수도 있고, 혹은 플레이어의 기발한 트릭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흥미로웠다.
나는 문틈에 얼굴을 바싹 대고 냄새를 맡았다. 희미하게 타는 듯한 향이 느껴졌다. 향초인가? 아니, 좀 더 날카로운, 어딘가 익숙한 냄새였다.
“문 안쪽에는 연기가 자욱합니까?” 내가 물었다.
경비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요. 전혀. 어떠한 기척도 없었습니다.”
나는 다시 문을 살폈다. 흑단나무 문은 빈틈없이 닫혀 있었다. 문의 위쪽 경첩 부분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리고는 이내 주머니에서 작은 금속 막대를 꺼내 문틈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향했다.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경비대장이 의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 문은 완벽한 밀실이 아니군.’
금속 막대를 섬세하게 움직이자, 이내 ‘딸깍’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아주 미세하게, 삐걱거리며 열렸다. 모든 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경악과 놀라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문 안쪽, 서재 의자에 앉아 있는 가이아의 시신이 보였다. 얼굴은 평온했지만, 가슴팍에는 거대한 칼날이 박혀 있었다. 칼날에서는 마치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내가 맡았던 그 냄새의 원인이 있었다. 벽난로 앞에 놓인 작은 탁자 위, 다 타다 남은 한 장의 종이. 그리고 그 옆에는, 마치 누가 일부러 세워놓기라도 한 듯, 기이하게 뒤틀린 모양의 작은 ‘자수정’ 조각이 놓여 있었다.
나는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닫힌 문을 등지고 서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문은 제가 열었으니, 이제 저를 제외한 모든 분들은 뒤로 물러서 주십시오. 이 방 안의 모든 것은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함부로 손대지 마십시오.”
경비대장은 놀란 눈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 사람들을 통제했다. 영주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그의 눈빛 속에는 아주 희미한 희망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나는 가이아의 시신을, 그리고 방 안의 모든 풍경을 천천히 훑었다. 완벽하게 잠겨 있던 방에서 벌어진 살인. 하지만 문은 외부에서 열렸다. 물론, 특수한 방법을 통해서였지만. 그렇다면 범인은 과연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갔을까?
다 타다 남은 종이, 그리고 기이한 자수정 조각. 이 두 가지가 무언가 중요한 열쇠라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다 타다 남은 종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종이는 검게 그을려 있었지만, 그 위에 새겨진 문양만큼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어디선가 본 듯한, 아주 오래된 상형문자였다.
‘이건… 설마?’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익숙했다. 아크랜드의 숨겨진 역사를 탐구하던 중, 고대 유적에서 발견되었던 ‘어둠의 서약’에 나오는 문양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그리고 그 서약에는 언제나 ‘밀실’과 관련된 기묘한 이야기가 따라붙었다.
이 살인 사건은 단순한 게임 속의 비극이 아니었다. 어쩌면, 아크랜드의 깊은 비밀과 연결된, 거대한 미궁의 시작일지도 몰랐다.
나는 무릎을 굽혀 자수정 조각을 주웠다. 보랏빛 광채를 띠는 자수정은 차가웠다. 그리고 그 조각의 끝은 마치 누군가가 칼로 억지로 깎아낸 듯, 날카롭게 잘려 있었다.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
“이곳은 완벽한 밀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완벽한 ‘속임수’였죠. 그리고 그 속임수는… 아주 오래된 언어로 시작되는군요.”
뒤에서 세레나의 작은 비명이 들렸다.
“어둠의 서약… 설마…”
나는 조용히 방 안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이제부터, 진짜 미궁이 시작될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