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열람실, 고요는 숨소리마저 집어삼킬 듯 무거웠다. 낡은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강민은 길게 하품을 했다. ‘고려시대 지방 호족의 토지 제도 변천사’라니, 이 빌어먹을 보고서 주제는 언제쯤 내 머릿속에 제대로 박힐까.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거대한 서가 사이를 걷는 강민의 발소리만이 낡은 마룻바닥을 삐걱이게 했다. 중앙 도서관의 이 오래된 별관은 평소에도 사람이 드물었지만, 이 시간대엔 거의 유령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런 걸 누가 읽는다고….”
투덜거리며 손전등으로 서가를 비췄다. 교수님이 던져준 참고 문헌 목록에는 분명 ‘별관 제7서고 비치, 미분류 고서’라는 희한한 항목이 있었다. 미분류라니, 도서관 시스템에 등록도 안 된 책을 굳이 찾아보라는 건 그냥 괴롭히는 걸로밖에 안 들렸다. 그의 손전등 불빛이 먼지로 덮인 낡은 책들을 스쳐 지나갔다. 이름 모를 학자들의 해묵은 연구서부터, 누군가의 시집으로 보이는 것까지, 종류도 가지가지였다.
서가 가장 구석, 손이 잘 닿지 않는 맨 위 칸에 희미한 자태를 드러낸 낡은 책 한 권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른 책들이 표지에 큼지막한 제목이라도 박혀 있는 것과 달리, 이 책은 그저 검붉은 가죽으로 제본되어 있을 뿐이었다. 표지 중앙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들이 불규칙하게 새겨져 있었다. 손전등 빛에 반사되어 그 문양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게 뭔가….”
강민은 의자를 끌어와 밟고 올라섰다. 손을 뻗어 책을 잡으려 하자, 손끝에 닿는 감촉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래된 가죽 특유의 거칠고 건조한 느낌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를 만지는 듯한 미묘한 온기가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책을 끌어내리자, 수십 년은 쌓였을 법한 먼지가 풀썩, 하고 일어났다. 재채기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강민은 책을 낡은 열람대 위에 내려놓았다.
책은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두툼한 두께와 달리 묵직한 무게감이 흡사 쇠덩어리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표면의 기하학적 문양을 엄지손가락으로 무심코 쓸어봤다. 그 순간, 손끝에서 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놀라서 손을 떼려 했지만, 이내 그 찌릿함은 사라지고 손바닥 전체를 감싸는 포근한 온기로 바뀌었다.
심장이 쿵, 하고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기분 탓이겠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느껴지는 걸 거라며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강민은 책을 펼쳤다. 안쪽 페이지는 바깥 표지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글자도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얇고 질긴 종이 위에 연한 먹색으로 알 수 없는 그림과 상형문자 같은 기호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글인지 그림인지도 모를 기호들은 정교하게 얽혀 있었고, 종이의 재질은 일반적인 종이와는 확연히 달랐다. 만지면 살짝 거친 듯하면서도 매끄러운, 마치 얇은 비단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무심코 한 페이지에 그려진 가장 크고 복잡한 문양에 손가락을 댔다. 문양은 마치 살아있는 세포처럼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위이이잉…….’
열람실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던 백색소음이 한순간 정지하는 듯한 착각. 그리고 정적을 깨고, 희미한 윙 하는 소리가 강민의 귓가를 스쳤다. 열람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낡은 형광등들이 일제히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전기 회로에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 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빛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강민은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책에서 떼었다.
형광등의 빛이 점점 더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가장 가까운 형광등 하나가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버렸다. 유리 파편이 바닥에 쏟아지고, 열람실은 순간적으로 더 깊은 어둠에 잠겼다. 깜짝 놀란 강민은 등받이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쿵 하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젠장! 뭐야 이거….”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오래된 건물이라 전압이 불안정한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형광등이 터지는 건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그가 책에 손을 대는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도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의 시선은 다시 책으로 향했다. 낡은 가죽 표지는 여전히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고,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책을 펼쳤던 페이지는 여전히 정교한 기호들로 가득했다. 강민은 망설였다. 다시 손을 대봐야 할까?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한 의문이 그의 심장을 강하게 울렸다.
고민 끝에, 강민은 떨리는 손으로 아까 그 문양 위에 다시 손가락을 얹었다. 손끝에서 다시금 미묘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더욱 선명한 일이 일어났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그의 낡은 스마트폰이, 마치 거대한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책 쪽으로 스르륵 밀려왔다. 불과 몇 센티미터의 움직임이었지만, 분명 제 스스로 움직인 것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강민은 숨을 헙 들이켰다.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환각도 아니었다. 그의 눈앞에서 물리적인 현실이 왜곡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닿아 있는 이 낡은 책이, 이 이해할 수 없는 문양들이, 무언가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열람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였다. 강민은 혼비백산하여 책에서 손을 떼고, 황급히 책을 닫았다. 묵직한 책을 끌어안고 주변을 둘러봤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서관 직원일까? 아니면 야간에 순찰 도는 경비원?
“거기 누구 있습니까?”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강민은 대답 대신, 엉거주춤한 자세로 책을 배낭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깨에 메자, 책의 묵직한 무게와 함께 알 수 없는 온기가 그의 등 뒤에서 피어올랐다. 심장이 여전히 발광하듯 뛰고 있었지만, 이내 그는 침착함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아, 네! 저, 보고서 때문에 좀 늦게까지 있었네요.”
멀리서 손전등 불빛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강민은 급하게 자신의 필기구와 자료들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마치 도서관에서 귀한 유물을 훔쳐 달아나는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의 귓가에는 여전히 형광등이 터지던 ‘퍼억!’ 하는 소리와 스마트폰이 스르륵 밀려오던 기이한 움직임이 생생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그의 평범했던 일상은 송두리째 뒤바뀌었음을 직감했다. 이 낡은 책이, 과연 어떤 비밀을 품고 있을지, 그리고 그 비밀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강민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밤의 발견이, 그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는 미스터리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예감.
어둠 속, 그의 배낭 속에서 낡은 책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