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선협 (신선) 독립적인 단편 소설

    어둠이 깃든 산맥 아래, 회색빛 먼지가 자욱한 사막과 같은 땅. 그곳에 ‘새벽벌’이라는 이름의 작은 촌락이 있었다. 이름과는 달리 새벽은커녕 밤의 그림자가 더 짙게 드리운 듯한 곳이었다. 몇 안 되는 허름한 집들은 툭 치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 대신 흙먼지 낀 피로와 체념이 깊게 패어 있었다. 희미한 달빛조차도 그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지 못했다.

    “이봐, 노인장! 세금은 어디에 두었지? 오늘은 해 질 녘까지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흙바닥에 깔린 적막을 갈랐다. 제국 병사, 아니, 제국의 ‘정령사’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하급일지언정 몸에 흐르는 미약한 기운을 통해 평범한 인간들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철갑옷은 먼지투성이였지만, 그들이 휘두르는 채찍은 여전히 매서웠다. 마을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웅크렸다.

    진우는 밭고랑에 엎드려 숨을 죽였다. 고작 스무 살, 그는 새벽벌 촌락에서 가장 꼿꼿한 허리를 지닌 젊은이였으나, 지금은 그저 흙 속에 몸을 숨기는 데 급급했다. 그의 눈앞에서 어머니뻘 되는 여인이 쌀 한 톨 없는 곡식자루를 내밀며 애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수없이 많은 절망을 보아온 듯 텅 비어 있었다.

    “나으리, 보시다시피… 작년 흉작으로 모두 말라 죽었습니다. 올해는 가뭄까지 들어서… 제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시끄럽다! 네년의 거짓말은 이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황제의 은총을 거부하는 역도들 같으니!”

    정령사 중 하나가 여인의 어깨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흙먼지가 풀썩 일었다. 여인의 찢어진 소복 아래로 핏자국이 번지는 것이 진우의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분노였다. 그러나 동시에 무력감 또한 밀려왔다.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매번 그랬다.

    그때, 또 다른 정령사가 낄낄거리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희미하게 푸른빛이 감도는 영석 조각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권능을 상징하는 듯 섬뜩하게 빛났다.

    “저기 저 아이는 제법 쓸 만하겠군. 이 마을에서 가장 곱상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나? 제국군 막사에서 하녀로 쓰면 딱 좋겠어.”

    그의 시선이 진우의 여동생, 열세 살 난 ‘아린’에게 향했다. 아린은 두려움에 질린 채 어머니의 뒤에 숨어 있었다. 진우의 손이 저절로 흙바닥의 돌멩이를 움켜쥐었다. 손톱이 파고드는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안 돼… 안 돼…” 진우는 속으로 뇌까렸다. 그의 속삭임은 흙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정령사는 거침없이 아린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냈다. 아린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는 찢어진 다리로 기어가며 매달렸지만, 정령사의 발길질에 또다시 쓰러졌다. 진우의 눈앞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흙투성이 손으로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무언가가 온몸을 휘감는 듯했다.

    “놔라… 내 동생에게서 손 떼!”

    그의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밭고랑의 정적을 깼다. 정령사들이 일제히 진우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비웃음과 경멸이 가득했다. 벌레 한 마리가 감히 울부짖는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오호라? 이 촌뜨기가 황제 폐하의 병사에게 대드는 것이냐?”

    정령사 중 한 명이 희미한 기운을 손에 모으며 진우에게 다가왔다. ‘기운장’이라는 하급 술법이었다. 맞으면 뼈가 부러질 수도 있었다. 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 그의 몸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마치 용암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그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생경한 감각이었다. 그의 심장을 태우는 분노와 함께 전신을 휩쓸었다. 그의 눈에 이글거리는 불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

    “뭣들 하느냐! 저 하찮은 것을 당장 끌어내 황제 폐하의 법도를 가르쳐라!”

    대장 격인 정령사가 격노하며 소리쳤다. 그 명령에 따라 두 명의 정령사가 거친 웃음을 흘리며 진우에게 달려들었다. 진우는 눈을 감았다.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 동생을 지키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의 심장에서 끓어오른 뜨거운 기운이 마치 용암처럼 팔다리를 타고 흘렀다. 땅속 깊이 박혀 있던 뿌리들이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시야가 이전과는 다르게 선명해진 것 같았다.
    정령사 한 명이 ‘기운장’을 실은 주먹을 휘둘렀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숲 속의 맹수처럼 거칠고 예측 불가능했다. 정령사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이어서 진우는 제 몸을 던지듯 달려들어 정령사의 다리를 걸었다. 그 동작에는 어떤 기술도 없었지만, 끓어오르는 기운이 실린 몸놀림은 평소의 진우와는 확연히 달랐다.

    “컥!”

    정령사는 균형을 잃고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다른 정령사가 허리춤에서 시퍼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검 끝에 미약한 기운을 실어 진우에게 찔러 넣었다. 진우는 몸을 숙여 검을 피한 후, 쓰러진 정령사의 허리춤에서 칼집을 뽑아 들었다. 칼집은 비록 무딘 나무 조각이었으나, 진우의 손에서는 마치 날카로운 검처럼 휘둘러졌다. 그의 몸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원초적인 힘이 칼집에 실리는 듯했다.

    “크악!”

    그의 칼집이 정령사의 손목을 강타했다. 검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쨍하고 울렸다. 진우는 망설임 없이 발길질로 정령사의 복부를 찼다. 정령사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마을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아무도 감히 제국의 병사에게 대항하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은 진우를 보았다. 흙투성이 된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눈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한 명의 평민이, 무기력한 백성이, 제국의 정령사 두 명을 물리친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저 놈을 죽여라! 죽여!”

    대장 정령사가 격노하며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손에 푸른 기운을 모아 술법을 시전했다. ‘빙결탄’. 작은 얼음 조각들이 진우를 향해 날아갔다. 진우는 몸을 날려 피했다. 얼음 조각들은 그의 뒤편의 허름한 집에 박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깊은 균열이 생겼다. 저런 술법은 마을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부술 수 있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 순간, 한 그림자가 진우의 옆으로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진우야, 이 바보 같은 자식! 무모하게 굴지 마!”

    그림자는 다름 아닌 가람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꾼의 딸이자, 진우의 오랜 친구였다.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사냥칼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장 정령사를 향해 칼을 던졌다. 그녀의 칼은 단순한 무쇠였지만, 숙련된 사냥꾼의 손에서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정확했다.

    칼은 정령사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령사는 비틀거렸다. 작은 상처였지만, 그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가람아!” 진우가 외쳤다. 가람은 진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도망쳐! 우선 도망쳐야 해!”

    그녀는 진우를 이끌고 밭고랑을 가로질러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정령사들의 고함소리가 쫓아왔다.

    “잡아라! 저 역적들을 잡아라!”

    진우는 뛰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린은 여전히 땅에 쓰러진 어머니 옆에 주저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두려움에 질린 아린의 눈빛, 그리고 무기력한 어머니의 모습이 그의 뇌리에 박혔다.

    “젠장…”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물러서는 것뿐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 모든 것을 되갚아 줄 것이다. 그의 심장 속에서 솟구치는 기운은 이제 차가운 분노와 뜨거운 복수심으로 뒤섞여, 그의 전신을 새로운 힘으로 채우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땅과 연결된, 세상의 모든 생명이 공유하는 듯한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

    칠흑 같은 밤, 숲 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동굴에서 진우와 가람은 숨을 고르고 있었다. 둘의 옷은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숨은 턱 끝까지 차 있었다. 동굴 입구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바람 소리만이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더욱 흔들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가람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자칫하면 잡혀 죽을 뻔했잖아! 네가 죽으면 어쩌려고!”

    진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허벅지에 박힌 작은 얼음 조각을 뽑아냈다. 쓰라린 통증이 스쳤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타오르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그럼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아린이 잡혀가는 것을?” 진우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분노가 가득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결의가 배어 있었다. “어머니는 또 당하셨고… 매년 똑같은 일이 반복돼. 이젠 지긋지긋해. 더 이상은 못 참아.”

    가람은 진우 옆에 앉았다. “알아.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 같은 평민이 어떻게 제국에 대항해? 그들은 술법을 쓰고, 우리는 맨주먹뿐인데. 무모한 짓이야, 진우야.”

    “맨주먹?” 진우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흙이 잔뜩 묻은 투박한 손이었지만, 그 안에서 아직도 뜨거운 기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가람아. 나는… 나는 뭔가 느껴졌어. 내 몸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치는 것을. 그 정령사들을 밀쳐낼 때… 뭔가 달랐어. 평소와는.”

    가람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진우의 손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정말? 네가…? 혹시…?”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평민들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일, 기운을 느끼고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제국의 선관이나 특출난 자들에게만 허락된 능력, 혹은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들이 아린을 데려가려 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어. 내 가족, 내 마을. 아무것도.”

    진우의 말에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도 오랜 시간 쌓인 분노와 슬픔이 어려 있었다. 제국의 수탈로 인해 그녀의 아버지도 병들어 죽었고, 사냥터는 제국군의 훈련장으로 변해 버렸다. 이 고통은 비단 진우의 가족만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평민의 고통이었다.

    “혼자서는 안 돼. 하지만 우리처럼 지친 사람들이 많아. 태수 아저씨도… 마을 사람들도… 모두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어.” 가람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희미한 희망이 섞여 있었다. “만약 우리가…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다면…”

    진우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혼자서는 안 돼. 하지만 여럿이 모이면? 제국의 병사들이 술법을 쓴다고 해도, 그들도 결국 사람이야. 그들의 술법이 통하지 않는 곳도 있을 테고, 우리가 더 많은 수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무모해.”

    동굴 입구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우와 가람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그림자 속에 서 있는 것은 덩치 큰 사내였다. 그의 얼굴은 험악했지만, 눈빛은 깊은 회한과 오랜 세월의 지혜를 담고 있었다. 바로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이자 전직 나무꾼이었던 태수였다. 그는 과거 제국군에 징집되었다가 겨우 도망쳐 나온 경험이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낡은 도끼가 걸려 있었다.

    “태수 아저씨!”

    “너희 둘이 여기 숨어 있는 것을 모를 리가 없지. 마을에서 소란이 엄청났어.” 태수는 천천히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질책과 함께 깊은 우려가 섞여 있었다. “제국에 대항하다니. 어리석은 짓이야. 수십 년간 수없이 많은 반란이 있었지만, 모두 피로 끝났어. 뼈도 못 추리고 죽었지.”

    “하지만 아저씨, 이대로 계속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게 낫다고요!” 가람이 울분을 토했다.

    태수는 말없이 진우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진우의 눈에 담긴 불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진우, 네 몸에서 기운이 느껴진다는 게 사실이냐?”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수의 눈빛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 거의 보이지 않는 희미한 기대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네가 희망이 될 수도 있겠군.” 태수의 목소리에 미약한 기대감이 실렸다. “하지만 단순히 기운을 조금 느낀다고 해서 제국의 선관들과 싸울 수는 없어. 그들은 수십 년, 수백 년간 수련해 온 자들이야. 그들의 술법은 산을 가르고 강을 마르게 할 수도 있지. 너는 아직 아무것도 아냐.”

    “그럼 어쩌라는 거예요? 그냥 죽어란 말이에요? 아니면 동생이 잡혀가는 걸 보고만 있으란 말이에요?” 진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갈급함이 묻어났다.

    태수는 잠시 침묵했다. 깊은 고민에 잠긴 듯했다. “아니.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망설임과 두려움조차 허락되지 않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길이다.”

    진우와 가람은 태수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마지막 희망에 매달리는 듯한 간절함이 가득했다.

    “제국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이 땅의 근원에서 솟아나는… ‘대지의 기운’을 다루는 자들. 아주 먼 옛날, 제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대지의 기운과 소통하며 살았다고 한다. 제국의 선관들은 하늘의 기운을 다루지만, 대지의 기운은 그들과는 다른 종류의 힘이다. 하늘의 기운이 개인의 수련과 영성을 통해 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면, 대지의 기운은 이 땅과 그 속의 생명과 하나 되어 얻는 힘이다. 거대하고 끈질긴… 생명의 힘이지. 하지만 그 힘을 다루는 방법은… 오래전에 잊혔지.”

    “잊혔다구요? 그런 위대한 힘이?” 가람이 의아하게 물었다.

    “아니, 정확히는 제국이 의도적으로 없앤 것이다.” 태수는 씁쓸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이 스스로의 힘을 깨닫는 것을 두려워했지. 모든 기록을 불태우고, 대지의 기운을 다루던 이들을 ‘역도’라 칭하며 학살했다. 이 땅의 백성들이 대지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게 만들었어.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숲 속 깊은 곳 어딘가에, 그 옛 기운을 기억하는 자들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힘을 깨울 수 있는 실마리가.”

    진우의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대지의 기운. 평범한 땅에서 솟아나는 힘. 자신과 같은 평민들이 다룰 수 있는 힘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제국의 ‘하늘의 기운’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대항마가 될 터였다.

    “그들을 찾아야 해. 그 힘을 찾아야 해.” 진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싸울 거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자유를 되찾을 때까지. 내 동생 아린이, 우리 어머니가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때까지.”

    태수는 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체념과 함께 새로운 불씨가 타오르는 듯했다. “좋아. 내가 길을 안내하마.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해주지. 하지만 명심해라. 이 길은 피와 죽음으로 가득할 것이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이야. 한 번 발을 들이면, 끝장을 봐야 해.”

    진우는 차가운 동굴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의 손에서 희미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의 몸속에서 솟아나는 기운은 분명히, 대지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 같았다. 그 작은 온기가 그의 심장까지 따뜻하게 데우는 듯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으니까.”

    가람 또한 그의 옆에 섰다. 그녀의 눈은 단단한 결의로 빛났다. 그녀의 손은 진우의 어깨를 굳게 잡았다.
    그날 밤, 새벽벌 촌락의 작은 동굴에서, 부패한 제국에 맞서는 평민들의 거대한 반란의 서막이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열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절망 속에 머물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의 발아래 있는 흙먼지가, 그들의 피와 땀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기운의 원천이 될 것이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작품 제목:** 은하의 새벽
    **에피소드 제목:** 1화. 먼지 낀 항성, 베스타

    **[장면 1]**
    **배경:** 광물의 별, 베스타. 거대한 대기 처리탑들이 희뿌연 스모그를 내뿜는 황량한 평원. 지평선 너머로 아스트라 제국의 깃발이 나부끼는 요새의 실루엣이 보인다. 낡고 녹슨 운송선들이 느릿하게 하늘을 가로지른다. 광산 드론들의 둔탁한 진동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시간:** 해 질 녘. 붉고 탁한 노을이 먼지 구름과 뒤섞여 기괴한 색채를 이룬다.

    **내레이션 (아라):**
    여기는 베스타.
    한때는 광물의 보고라 불리며 번성했던 행성.
    지금은 아스트라 제국의 탐욕이 빚어낸 거대한 쓰레기장일 뿐이다.
    우리는… 이곳의 먼지 같은 존재들.
    잊혀지고, 버려지고, 짓밟힌.

    **[장면 2]**
    **배경:** 베스타 외곽, 폐기된 광산 터널의 깊숙한 곳. 간이 발전기에서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동굴 벽에 설치된 낡은 홀로그램 지도를 비춘다. 땀과 먼지로 얼룩진 십여 명의 사람들이 굳은 얼굴로 지도를 응시하고 있다.
    **인물:**
    * **아라 (30대 후반, 여성):** 거친 작업복 차림. 얼굴에 옅은 흉터가 있고 눈은 언제나 단단하게 빛난다. 전직 광산 감독관이자 저항군의 실질적인 리더.
    * **진 (20대 초반, 남성):** 날렵한 체구. 스카우터 복장에 허리춤에 휴대용 통신기를 차고 있다. 유능한 파일럿이자 정찰병.
    * **카엘 노인 (60대 후반, 남성):** 백발의 노인. 낡은 로브를 걸치고 있지만 눈빛은 형형하다. 과거 행성 정부의 기록관. 저항군의 지략가.

    **아라:**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제국군 보급선 ‘템페스트-7’호의 다음 보급 일정은 D-2. 델타 섹터의 3번 화물 터미널에 정박할 거다.”

    **진:** (미간을 찌푸리며)
    “3번 터미널은 경비가 너무 삼엄합니다, 아라님. 제국군 정규 병력이 상주하고 있어요. 게다가 그쪽은 대형 함선용 도킹 포트라 우리 ‘날개 없는 새’로는 접근도 힘들 겁니다.”

    **아라:** (고개를 저으며)
    “알고 있어.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우리 식량 비축량은 일주일도 못 버틴다. 의료품도 바닥났고.”
    “이번 보급선에는 ‘에너지 코어’도 실려 있을 거야. 그걸 확보해야 우리의 동력원도 확보할 수 있어.”

    **카엘 노인:** (침착하게)
    “진의 말도 일리가 있네. 무모한 시도는 안 돼. 제국군은 최근 베스타 행성 주둔군을 증강했어. 총독의 감시도 더욱 심해졌고. 사소한 움직임 하나라도 들키면…” (말끝을 흐린다)

    **아라:** (입술을 꾹 다문다)
    “무모해도 해야 합니다, 노인장.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요. 아이들의 얼굴을 보세요. 배고픔에 지쳐 가는 그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플래시백 – 1초]**
    **[장면 3]**
    **배경:** 폐광 터널 안, 지친 아이들이 얇은 천 조각에 몸을 감싸고 웅크려 잠들어 있다. 얼굴엔 때와 먼지가 가득하다.

    **내레이션 (아라):**
    우리의 미래는… 저 아이들의 눈물 속에 있다.
    그들에게 내일을 줄 수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플래시백 끝]**

    **[장면 4]**
    **배경:** 다시 작전 회의실. 아라의 눈빛이 더욱 결연해진다.

    **아라:**
    “우리의 목표는 화물선의 ‘메인 컨트롤 허브’다. 침투해서 보급 목록을 복제하고, 가능하다면 에너지 코어를 회수한다.”
    “가장 큰 문제는 ‘날개 없는 새’가 화물 터미널에 들키지 않고 접근하는 것….”

    **진:** (한숨을 쉬더니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 눈을 번뜩인다)
    “잠깐만요, 아라님. ‘날개 없는 새’는… 대형 화물선 옆에 붙어 위장하면 어떨까요?”

    **아라:** (미간을 찌푸리며)
    “위장? 무슨 말이지?”

    **진:**
    “3번 터미널에는 늘 대형 민간 화물선들이 정박해 있습니다. 베스타에서 채굴된 광물을 싣고 다른 항성계로 나가는 배들이죠. 그 배들은 제국군 함선과 달리 보안 검색이 허술합니다.”
    “우리 ‘날개 없는 새’는 크기가 작으니… 그 화물선 중 한 척의 동체 하부에 자력 흡착 장치로 몰래 붙어서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마치 기생충처럼.”

    **카엘 노인:** (흥미로운 듯 턱을 쓰다듬는다)
    “제국군 스캐너는 대형 화물선의 주요 구조물 위주로 탐지할 테니, 작은 비행체가 그 그림자에 숨어들어 가면 간과할 가능성이 크겠군. 기발한 생각이야, 진.”

    **아라:** (진을 바라본다. 그의 아이디어에 일말의 희망을 본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지 않나?”

    **진:**
    “성공만 한다면, 제국군 경보를 울리지 않고 화물 터미널 내부로 침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제가 해내겠습니다.”

    **[장면 5]**
    **배경:** 낡은 격납고. 저항군의 유일한 함선인 ‘날개 없는 새’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 있다. 소형 탐사선으로 개조된 함선은 전투용이라기보다 긴급 탈출용에 가깝다. 하지만 진이 개조한 자력 흡착 장치가 선체 하부에 부착되어 있다.

    **아라:** (날개 없는 새의 동체를 쓰다듬으며)
    “네가 이 아이를 얼마나 믿는지 궁금하구나.”

    **진:** (비행선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제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베스타의 거친 대기권에서 수십 번도 더 저를 살려준 녀석입니다. 제 친구나 다름없어요.”

    **아라:**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작전명은… ‘기생충’.”

    **[장면 6]**
    **배경:** 며칠 후, 새벽녘. 베스타의 대기권 상공. 진이 조종하는 ‘날개 없는 새’가 어둠 속에 잠긴 채 조용히 비행한다. 그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진:** (무전기에 대고)
    “본부, 여기 진. 목표 화물선 ‘카르고-927’에 접근 중. 제국군 스캐너 감지 없음.”

    **아라 (무전):**
    “수신했다, 진. 침투 지점까지 은밀하게 이동해라. 제국군 감시망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무리하지 마.”

    **진:**
    “알겠습니다.”

    **[장면 7]**
    **배경:** ‘카르고-927’의 거대한 선체. 낡고 녹슬었지만 웅장한 크기를 자랑한다. ‘날개 없는 새’가 조심스럽게 접근하며, 선체 하부의 틈새를 찾는다. 진의 손놀림이 재빠르다.

    **진:** (조심스럽게 조작하며)
    “흡착 장치 가동 준비… 목표 지점 포착.”

    **[장면 8]**
    **배경:** ‘날개 없는 새’가 ‘카르고-927’의 어두운 동체 하부에 철컥, 하고 달라붙는다. 작은 충격음이 진의 조종석에 울려 퍼진다. 내부 모니터에는 외부 카메라를 통해 본 ‘카르고-927’의 거대한 선체가 가득 찬다.

    **진:**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성공… 본부, 흡착 성공. ‘카르고-927’에 합류했습니다. 지금부터 터미널로 이동합니다.”

    **아라 (무전):**
    “잘했다, 진. 긴장의 끈을 놓지 마라.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다.”

    **[장면 9]**
    **배경:** 베스타 델타 섹터 3번 화물 터미널의 거대한 입구. 제국군 정규 함선과 보급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다. 터미널 위로는 쉴 새 없이 정찰 드론들이 오가고, 중무장한 제국군 병사들이 순찰을 돈다. ‘카르고-927’이 느릿하게 입구를 통과한다.

    **내레이션 (진):**
    제국군의 심장부.
    우리는… 너무나도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들.
    하지만… 이 작은 씨앗이 언젠가 거대한 제국에 균열을 낼 거라 믿는다.
    어머니가 들려주신 옛 이야기처럼…
    우리는, 새벽을 기다리는 별이다.

    **[장면 10]**
    **배경:** 터미널 내부. 거대한 기둥과 화물 컨테이너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 ‘카르고-927’이 지정된 도킹 포트로 이동한다. ‘날개 없는 새’는 여전히 그 하부에 붙어 있다.

    **진:** (긴장한 목소리로)
    “터미널 진입 완료… 이제 도킹 포트로 이동합니다. 스캐너 감지 없음… 아직은.”

    **[장면 11]**
    **배경:** ‘카르고-927’이 도킹 포트에 완전히 정박하는 순간, 갑자기 터미널 전체에 비상 경보음이 울려 퍼진다! 붉은색 비상등이 번쩍이며 내부를 비춘다.

    **제국군 병사 (무전, 다급한 목소리):**
    “델타-3 섹터! 미확인 비행체 감지! 즉시 모든 출입구를 봉쇄하고, 스캐너를 최대로 가동하라!”

    **진:** (경악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본다. 눈빛이 흔들린다.)
    “젠장! 들켰다고?! 어떻게?!”

    **[장면 12]**
    **배경:** ‘날개 없는 새’의 조종석. 진의 얼굴에 공포와 절망이 스친다. 외부 카메라에는 ‘카르고-927’을 향해 접근하는 제국군 전투 드론들과 무장 병사들의 모습이 잡힌다. 그들의 레이저 포가 빛을 뿜기 시작한다.

    **아라 (무전, 다급하게):**
    “진! 무슨 일이야?! 응답해!”

    **진:** (떨리는 손으로 스티어링 휠을 붙잡는다. 숨이 가빠진다.)
    “아라님… 저… 저희, 들킨 것 같습니다. 제국군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어요! 사방에서…!”

    **[에피소드 종료]**

  • SF (공상과학)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챕터 1] 녹슨 철문 너머**

    “빌어먹을, 또 허탕이군.”

    김도윤은 눅눅한 공기 속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헤드기어에 달린 스캐너가 지직거리는 소리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2377년의 네오-서울은 지상 500미터 상공에 거대한 스카이 아콜로지를 건설하고 그 속에서 번영을 누렸지만, 도윤 같은 최하층민에게는 여전히 ‘올드 존’이라 불리는 폐허 속을 뒤지는 게 일상이었다. 녹슨 철골과 깨진 콘크리트 잔해 속에서 21세기 문명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 때로는 미사용 부품을, 때로는 희귀한 기록 매체를. 대부분은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였지만.

    그는 스카이 아콜로지의 빛 한 줄기 닿지 않는 지하 300미터 아래, 과거 ‘도서관’이라 불렸던 구조물의 심장부를 헤치고 있었다. 수십 년 전 붕괴된 천장 때문에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데이터 서버들의 잔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먼지 섞인 금속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낡은 작업복 위로 거미줄과 먼지가 뒤엉켰다.

    “이봐, 도윤. 오늘은 뭐라도 찾았냐? 식량 배급 시간 얼마 안 남았어.”
    통신기로 동료 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늘상 들리는 피곤에 절은 목소리였다.
    “아니, 이 구역은 전부 슬러지뿐이야. 데이터 칩 하나도 안 보여.” 도윤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젠장. 그럼 철수해. 오늘은 운이 없었나 보다.”

    찬의 말이 맞았다. 이젠 지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도윤의 눈은 스캐너의 작은 점멸에 꽂혔다. 다른 스캐너로는 잡히지 않는 미약한 에너지 파장. 오류인가? 아니, 미세하게나마 일정한 패턴을 보였다. 호기심이 그의 발길을 잡아끌었다. 닳고 닳은 탐사병의 직감이 속삭였다. ‘이건 달라.’

    “찬, 잠깐만. 뭔가 이상한 게 잡혔어. 저 안쪽… 구역 마커에도 없는 곳이야.”
    “뭐? 또 오버하는 거 아니지? 위험할 수도 있어. 그냥 돌아와!”
    “아니, 느낌이 안 좋아. 금방 확인하고 갈게.”

    도윤은 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캐너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자 거대한 철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짙은 녹이 슬어 있었고, 군데군데 알 수 없는 문양들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오래된 보안 시스템의 흔적은커녕, 문을 잠그는 장치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닫혀 있을 뿐이었다.

    “이런 곳에… 뭐가 있다고?”

    그는 멀티툴을 꺼내 문틈을 비집고 넣었다. 끙, 하는 신음과 함께 온몸의 힘을 실어 밀어내자, 철문은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수십 년간 갇혀 있던 어둠이 희미한 헤드라이트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은 더 깊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과, 중앙에 놓인 알 수 없는 기계 장치들로 가득했다. 기계라기보다는… 거대한 제단 같았다.

    주변 공기는 바깥과 확연히 달랐다. 눅눅함 대신 건조하고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 타는 듯한 향이 섞여 있었다. 도윤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스캐너는 여전히 미세한 파장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가 기계 장치들 사이를 지나 가장 안쪽 구석으로 향하자, 마침내 스캐너의 점멸이 하나의 오브젝트를 가리켰다.

    그것은 바닥에 박혀 있는, 검은색 금속 관이었다. 한 팔 길이 정도의 원통형 물체였는데, 겉면은 매끄럽고 윤기가 흘렀다. 주변의 모든 것이 부식되고 삭아 있었지만, 이 관만은 마치 어제 만들어진 것처럼 온전했다. 덮개 부분에는 방금 문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문양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21세기의 어떤 기술로도 설명할 수 없는 재질과 디자인이었다.

    “이게… 뭐지?”

    도윤은 무릎을 굽혀 관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단순한 기록 장치는 아니었다. 어떤 버튼도, 연결 포트도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관의 표면을 쓸어보았다. 차가운 금속 감촉. 그 순간, 손끝에서 미약한 전기가 스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관에 새겨진 문양들이 아주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옅은 푸른빛이었다.

    깜짝 놀란 도윤이 손을 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손바닥과 관이 달라붙은 듯한 감각. 푸른빛은 점점 강해지며 관 전체를 뒤덮었고, 심지어 도윤의 팔을 타고 올라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대 도시의 모습, 하늘을 가로지르는 빛줄기, 그리고… 무언가 울부짖는 소리. 환청인가?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의 세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그의 몸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존의 모든 센서와 스캐너가 감지하지 못했던, 순수한 ‘힘’이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치… 마법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쿵!

    머릿속에서 거대한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나며 모든 감각이 명료해졌다. 푸른빛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관은 다시 평범한 검은색 금속으로 돌아와 있었다. 도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관에서 손을 떼어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 이게 대체….”

    그의 시선이 흔들리는 손으로 향했다. 손바닥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세상이 이전과 달랐다. 낡은 벽면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에너지의 흐름이 보였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녹슨 철골은 더 이상 단순한 고철이 아니었다. 그 안에서 미세한 에너지가 순환하고, 흐르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세상의 모든 숨겨진 ‘줄기’들이 그의 눈에 드러난 것 같았다.

    벽에 기댄 채 작동을 멈춘, 수십 년 된 냉각 장치가 있었다. 그에게는 그저 고철 덩어리였던 그것이, 지금은 내부에서 미약하게나마 흐르는 푸른빛 에너지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기계가,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마치 실핏줄처럼.

    도윤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미친 건가? 아니면, 방금 그 관이… 뭔가 그의 몸에 심어 넣은 것인가?

    그는 떨리는 손을 다시 검은 금속 관으로 뻗었다. 관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치 방금 일어난 일이 모두 환상이었다는 듯이.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숨겨진 에너지가, 보이지 않던 세상의 이면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한때 폐허였던 이 공간이, 이제는 미지의 힘으로 가득 찬 고대의 유적처럼 느껴졌다. 도윤은 떨리는 숨을 내쉬며 관을 품에 안았다. 이 미지의 힘이 그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혹은 무엇을 빼앗아갈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삶은 이제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 크툴루 신화 독립적인 단편 소설

    이준은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강원도 깊은 산골, 버려지다시피 한 외딴 마을에 자리한 작은 할아버지의 낡은 집.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이라고는 덩그러니 이 집 한 채뿐이었다. 서울에서 역사학과 박사 과정을 밟다 휴학하고, 진로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지내던 그에게 이곳은 현실 도피처이자 동시에 또 다른 답답한 감옥 같았다.

    “젠장, 이게 대체 몇 년 치 먼지람.”

    그는 투덜거리며 할아버지 서재의 문을 열었다. 작은 할아버지는 생전 기인(奇人)으로 불렸다. 평생을 홀로 이 집에서 은둔하며 고서와 골동품에 파묻혀 살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괴짜라 했지만, 이준에게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던 다정하고 신비로운 존재였다. 서재 안은 그의 기대대로, 아니 기대 이상으로 어지러웠다. 천장까지 닿는 낡은 책장에는 온갖 빛바랜 책들이 비스듬히 꽂혀 있었고, 탁자 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석상 조각들과 희한한 문양이 새겨진 그릇들이 쌓여 있었다. 창문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실내는 어스름한 새벽처럼 침침했다.

    이준은 쿰쿰한 냄새를 애써 외면하며 책장 한 칸을 비우기 시작했다. 고문헌 정리에는 익숙했지만, 이건 단순한 먼지와의 싸움이 아니었다. 책들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종이 조각들과 손때 묻은 필기구들, 알 수 없는 향을 내는 말린 식물들까지, 작은 할아버지의 삶의 흔적들이 너무도 농밀하게 배어 있었다.

    한참을 정리하던 그의 손이 책장 깊숙한 곳에 닿았다. 일반적인 나무가 아니었다. 차갑고 단단한, 마치 석탄과도 같은 질감의 판자. 그는 호기심에 그 부분을 힘껏 밀었다. ‘끼이이익-‘ 낡은 나무가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책장의 일부가 옆으로 밀려났다. 그 뒤에는 텅 빈 공간, 아니, 하나의 작은 감춰진 수납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이준의 손전등 불빛이 움직였다. 수납장 안에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보관된 두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검은색 상자였다. 매끄러우면서도 차가운 표면은 마치 흑요석 같았다. 상자의 육면체는 완벽한 형태가 아니었다. 어딘가 미묘하게 비틀려 있었고, 그 표면에는 기하학적이면서도 생명체 같은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의 손이 상자에 닿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한이 느껴졌다.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존재의 근원을 흔드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차가움이었다.

    다른 하나는 낡은 양피지 두루마리였다. 누렇게 바랜 가죽은 사람의 피부처럼 얇았고, 그 위에는 기괴하면서도 매혹적인 문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와 비슷해 보였지만, 그 필체는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왜곡되어 있어 어느 문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형태였다. 글자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준은 상자와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왠지 모를 강렬한 이끌림에 그는 두루마리를 펼쳤다. 섬뜩할 정도로 선명한 잉크 자국들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는 학자적 호기심을 발휘해 문자를 해독하려 애썼다. 분명히 모르는 글자였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뇌리에는 희미한 잔상처럼 의미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저 너머… 어둠… 잠든 자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리라. 하지만 상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차가운 기운과 두루마리에서 풍기는 알 수 없는 고대의 냄새는 그를 압도했다.

    그는 무심코 검은 상자의 한쪽 면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상자의 비틀린 면 중 한 부분이 안쪽으로 눌리는 것을 느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상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안에서 아주 미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빛이 그의 눈동자를 찌르는 듯했다. 빛이라기보다는, 공간 그 자체가 왜곡되어 발생하는 시각적인 착란에 가까웠다.

    그 순간, 이준의 머릿속에 엄청난 양의 정보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단어의 나열이 아니었다. 이미지이자 감각이자, 이해를 초월하는 지식의 파편들이었다. 그는 눈앞의 서재가 사라지고, 대신 끝없는 검은 심연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 심연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들이 뒤틀린 채 잠들어 있었다. 우주의 법칙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형태들, 인류의 상상력으로는 감히 그려낼 수 없는 괴물들이 그를 향해 아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이준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렸고, 몸은 경련하듯 떨렸다. 눈앞의 환상은 너무도 생생해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다. 그는 자신이 이 세계의 아주 작은 먼지 같은 존재이며, 이 우주가 얼마나 무한하고 잔인한 미지의 존재들로 가득 차 있는지 깨달았다. 그의 이성은 그 거대한 진실 앞에서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환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준은 땀으로 흥건한 몸으로 탁자에 쓰러졌다. 그의 시선은 다시 상자와 두루마리에 고정되었다. 이제 그것들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문이었다. 금지된 지식으로 통하는, 차가운 문이었다.

    그날 밤 이후, 이준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더 이상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심연 속의 괴물들이 그를 노려보는 듯했고, 귀를 막아도 알 수 없는 속삭임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동시에 기이한 갈증을 느꼈다. 그 지식의 파편들이 남긴 잔재를 갈망했다.

    이준은 서재로 돌아가 두루마리를 다시 펼쳤다. 이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문자들이 이제는 희미하게나마 의미를 드러내는 듯했다. 그것은 마법의 주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주의 구조와 존재의 진실을 설명하는 일종의 안내서였다. 상자는 단순히 빈 상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원과 차원을 연결하는 통로, 일종의 인식의 촉매제였다.

    그는 문득 작은 할아버지가 남긴 다른 책들에서도 이상한 기색을 발견했다. 낡은 서적들 사이에서 그는 작은 할아버지의 친필 기록을 찾아냈다. 흐트러진 필체로 적힌 그 글에는 상자와 두루마리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_”…오랜 세월 찾았다. 그들은 존재한다. 이 세계의 장막 너머에… 상자는 시야를 열고, 두루마리는 진실을 속삭인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 하지만 나는 더 알아야만 한다. 그 힘을, 그 존재들을… 언젠가 그들을 깨울 수 있다면…”_

    이준은 작은 할아버지가 단지 은둔자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진실을 좇던, 그리고 결국 진실에 미쳐버린 탐구자였다. 아니, 어쩌면 그는 이미 그 진실의 일부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한밤중, 이준은 상자를 다시 열었다. 이제 그는 두려움보다 더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그의 손이 상자 속의 허공을 더듬었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손가락 끝에서 아주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공간 자체가 떨리는 듯했다.

    그는 두루마리를 펼치고, 거기에 적힌 문자를 따라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언어는 아니었다. 소리이자 진동이었다. 그것은 그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원초적인 메아리 같았다.

    소리가 서재에 울려 퍼지자, 방 안의 모든 빛이 깜빡였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오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벽에 걸린 낡은 액자들이 흔들리고, 책장의 책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준은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읊조리기를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의지가 아닌, 그를 지배하는 어떤 존재의 의지인 것 같았다.

    방의 중앙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현현하는 듯했다. 공기가 차갑게 응축되고, 주변 공간이 일그러졌다. 이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정신은 그 존재의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크툴루 신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우주의 심연에서 온 태고적 존재의 그림자였다.

    점차 이준의 의식은 희미해졌다. 그의 몸은 바닥에 쓰러졌고, 눈은 천장을 향한 채 초점을 잃었다. 그의 입에서는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정신은 끝없는 심연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인간의 이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혼돈과 광기, 그리고 태초의 어둠만이 가득했다.

    서재의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탁자 위에는 검은 상자와 낡은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다. 상자에서는 이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유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진 이준의 눈은 여전히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와 희열이 뒤섞인 기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준은 이제 더 이상 이준이 아니었다. 그는 보았다. 그는 들었다. 그는 이해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일부가 되었다. 어둡고 차가운 우주의 진실,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고대의 숨겨진 힘이 마침내 그를 통해 이 세상에 아주 작은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균열은, 언제든 더 크게 벌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재 밖, 고요한 밤하늘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딘가 먼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 별들의 희미한 속삭임이 울려 퍼지는 듯했다.

  • 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유랑자의 노래

    차가웠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스며드는 냉기가 뼈마디를 긁었다. 해가 떠올랐는지, 아니면 그저 구름이 옅어져 하늘이 잠시 잿빛 농도를 달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세상은 항상 그랬다. 희뿌연 먼지와 재가 끊임없이 내려앉는 칙칙한 풍경. 강하준은 익숙하게 망토 깃을 더 바싹 여몄다.

    그의 시선은 한없이 메마른 땅을 훑었다. 갈라지고 뒤틀린 대지 위로 앙상한 잔해들이 비석처럼 박혀 있었다. 한때 거대한 도시의 심장이었을 육중한 철골 구조물들은 이제 녹슬고 주저앉아, 거대한 괴물의 뼈대 같았다. 그 아래를 지나는 그의 발걸음은 흙먼지를 일으키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이 재에 덮여 축축한 잿가루만이 사박이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젠장, 오늘도 빈손인가.”

    갈라진 입술 새로 굳은 독백이 터져 나왔다. 어제 간신히 찾아낸 마른 열매 몇 알이 전부였다. 뱃속에서는 이따금 경고성 울림이 터져 나왔고, 목은 사막처럼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었다. 금은 보석 따위는 썩어 문드러질 뿐, 생명을 이어갈 수 없었다.

    하준은 나지막이 읊조리며 폐허 더미 사이로 더 깊이 들어섰다. 오래전, ‘대붕괴’라 불리는 재앙이 세상을 집어삼켰을 때, 모든 것이 무너졌다. 찬란했던 문명은 한낱 먼지로 변했고, 땅은 독기로 오염되었으며, 짐승들은 흉측한 돌연변이로 뒤틀렸다. 살아남은 이들은 극소수였고, 그들조차 살아남기 위해 매일 지옥 같은 삶을 견뎌야 했다.

    그의 목적지는 멀리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였다. 한때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을 초고층 건물의 잔해. ‘강철의 심장’이라 불렸던 그곳은 이제 거대한 죽음의 탑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소문은 돌았다. 간혹 그 안에서, 대붕괴 이전의 온전한 물품들이 발견되기도 한다는 소문. 물론, 그 소문을 쫓아 들어간 이들 중 살아 돌아온 자는 거의 없었다.

    하준은 허리춤에 찬 낡은 사냥칼을 만져보았다. 손때 묻은 칼자루는 그의 유일한 벗이자 생명줄이었다. 칼날은 날카롭게 갈려 있었지만, 과연 저 안에서 마주칠지 모를 ‘그림자 추적자’나 ‘철피(鐵皮) 늑대’에게 얼마나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이곳의 짐승들은 강철 같은 가죽과 맹독을 품고 있었다.

    그는 폐허의 그림자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찢어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위태롭게 솟아 있었고, 그 사이로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바람은 찢겨진 천 조각들을 흔들고, 녹슨 금속들이 서로 부딪히며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 마치 이 폐허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문득, 하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공기 중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 재 섞인 바람에 실려 오는 희미한 냄새. 흙먼지와 금속이 뒤섞인 듯한 역한 비린내. 그것은 돌연변이 짐승의 냄새였다. 그는 즉시 몸을 낮춰 으스러진 벽 뒤로 숨었다.

    심장이 쿵, 쿵, 하고 크게 울렸다. 손에 땀이 배어 칼자루가 미끄러울 지경이었다. 경험상, 이 냄새는 ‘철피 늑대’의 것과 비슷했다. 강철 같은 피부와 짐승보다 영리한 잔인함을 가진 포식자. 한 마리만으로도 능숙한 사냥꾼 여럿을 제압할 수 있는 무서운 존재였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하준은 숨을 죽였다. 낡은 철골 구조물 위로, 그림자 같은 형체가 어른거렸다. 육중한 몸집, 비정상적으로 길고 단단해 보이는 사지, 그리고 뼈처럼 앙상하게 드러난 척추를 따라 돋아난 거대한 칼날 같은 뿔. 틀림없는 철피 늑대였다. 놈은 잿빛 세상에 완벽하게 녹아든 색깔로, 거친 숨을 내쉬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놈은 서서히 이동하며, 하준이 숨어있는 벽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대로 들키면 끝이었다.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고 해도 승산은 희박했다. 철피 늑대의 눈은 잿빛 폐허 속에서도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놈의 거친 숨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하준은 칼자루를 꽉 쥐었다. 만약 들킨다면, 마지막까지 발버둥 쳐야 했다. 그의 눈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불안정한 구조물, 떨어져 나간 콘크리트 덩어리들.

    바로 그때, 늑대가 멈춰 섰다. 놈은 코를 킁킁거리며 허공을 맡았다. 하준의 굳어버린 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놈의 예리한 시선이 그가 숨어있는 벽을 향했다.

    “크르릉…”

    낮은 으르렁거림이 울렸다. 놈은 한순간 주춤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하준은 숨을 멈추고 놈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놈이 사라진 후에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놈이 자신을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다. 놈은 다른 무언가를 감지하고 그쪽으로 향한 것이 분명했다.

    안도의 한숨이 길게 터져 나왔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하준은 벽에 기대어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목숨을 건 줄타기. 이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하준은 폐허의 심장, ‘강철의 심장’이라 불리는 거대한 탑의 잔해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철피 늑대가 다른 곳으로 향한 것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놈이 사라진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돌아서, 그는 무너진 건물 사이의 좁은 틈새를 통해 탑의 가장자리로 접근했다.

    내부는 예상대로 어둠과 먼지로 가득했다. 찢어진 철골들이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부서진 환기구에서는 바람 소리가 텅 빈 공간을 울렸다. 하준은 오래된 철제 선반들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이미 대부분의 물건은 약탈당했거나, 오랜 세월 속에 부식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한참을 헤매던 그의 시선이 구석에 쌓인 파이프 더미에 멈췄다. 녹슨 파이프들 사이에, 먼지에 덮여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상자가 있었다. 그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희망은 언제나 이토록 작고 보잘것없는 형태로 찾아왔다.

    하준은 조심스럽게 파이프를 치우고 상자를 꺼냈다. 낡은 금속 상자 위에는 오랜 문양이 새겨져 있었지만, 이미 퇴색되어 알아볼 수 없었다. 뚜껑을 열자, 희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곰팡이 냄새 사이로 느껴지는 미약한 단내.

    안에는 오래된 영양 바 몇 개와, 작고 단단하게 밀봉된 물통 하나가 들어 있었다. 영양 바는 비록 겉포장이 바랬지만, 내용물은 단단하게 보존되어 있는 듯했다. 물통은 차가웠다. 마치 대붕괴 이전의 시절을 간직한 듯한 시원한 감촉이었다.

    하준은 영양 바 하나를 집어 들었다. 포장을 뜯자, 흙과 재가 뒤섞인 세상에서는 보기 힘든, 희미한 초록색 내용물이 드러났다.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물었다. 퍽퍽했지만, 생명 유지에 필요한 영양소가 응축된 맛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소중한 물통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쿨럭.

    작은 병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텅 빈 폐허에 울렸다.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갑고 깨끗한 물이 메마른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살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비참함이 잊히는 듯했다.

    배가 채워지고 목마름이 가시자, 주변의 위협들이 다시금 선명해졌다. 이곳은 위험한 곳이었다. 더 이상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는 남은 영양 바와 물통을 다시 상자에 넣고, 조심스럽게 챙겼다.

    폐허 밖으로 다시 나섰을 때, 잿빛 하늘은 더욱 깊어진 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세상의 밤은 낮보다 훨씬 위험했다. 그림자 속에서 꿈틀거리는 더 많은 괴물들, 예측 불가능한 기후 변화. 그는 멀리 보이는 또 다른 폐허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최소한의 잠자리라도 찾아야 했다.

    하준은 터덜터덜 걸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거대한 탑을 돌아보았다. 오늘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내일도, 또 그다음 날도, 그는 이 끝없는 잿빛 유랑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지평선 너머 어딘가에, 아직 푸른 풀이 돋아나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안식처’가 존재한다는 희미한 희망을 품고서.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은 거대한 폐허 속에서 한 점 먼지에 불과했지만, 그의 눈빛은 쉬이 꺼지지 않는 작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어떻게든. 그것이 이 잿빛 세상에서 그가 가진 유일한 사명이었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화려한 아치형 문과 무미건조한 안내판이 즐비한 아르카나의 수도, 에테르나의 거리는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강준혁은 언제나 그 북적임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퀘스트 마커를 따라 움직이는 이들과, 길드 채팅창에 오가는 농담들, 새로운 레이드 공략법에 대한 열띤 토론들. 그는 그런 것들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 지도의 빈칸이었다.

    오늘도 그는 에테르나 서쪽, 푸른 안개 숲 깊숙한 곳을 헤매고 있었다. 고작 레벨 30대 몬스터들이 어슬렁거리는 저레벨 사냥터. 최고 레벨 유저들이 우글거리는 최전방 던전이나 새로 추가된 하늘섬 같은 곳과는 비교도 안 되는 한적한 곳이었다. 파티를 맺자는 귓속말도, 길드 가입 권유 메시지도 날아오지 않았다. 완벽한 고독. 준혁은 이 고독을 사랑했다.

    “젠장, 여기도 아무것도 없네.”

    낮게 중얼거리며 덩굴에 뒤덮인 오래된 석상을 밀어냈다. 이 숲에는 전설이 있었다. 세상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고대 문명의 유적이 잠들어 있다는. 대부분의 유저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초보자들을 위한 흔한 배경 스토리 정도로 치부했다. 하지만 준혁은 달랐다. 게임 시스템이 버젓이 ‘발견되지 않은 지역’이라는 문구를 띄우지 않는 이상, 그 어떤 낡은 전설이라도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햇빛이 듬성듬성 스며드는 숲길을 따라 걷다 보니, 유난히 짙은 초록빛을 띠는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절벽이 나타났다. 그 절벽 아래에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계곡이 있었고, 이름 모를 물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평화롭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원한 물가에 쪼그려 앉아 손을 담갔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이 현실보다 더 생생했다.

    문득, 계곡 건너편 절벽에 시선이 닿았다. 울창한 덩굴과 이끼에 가려져 희미하게 보이는 균열. 그저 흔한 암벽 틈새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준혁의 본능이 속삭였다. ‘저긴 뭔가 달라.’

    그는 망설임 없이 계곡을 가로질러 갔다. 물은 무릎께까지 차올랐지만, 차갑고 신선했다. 거친 암벽을 손으로 짚고 덩굴을 헤치고 나아가자, 균열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인위적으로 깎인 듯한 돌의 단면. 희미하게 새겨진 문양. 오래된 돌문이었다. 절벽과 하나가 된 듯한 교묘한 위장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런 곳에… 진짜가 있을 줄이야.”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손으로 밀어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변을 살폈다. 덩굴을 걷어내자, 돌문 양옆으로 희미한 홈이 보였다. 마치 어떤 물건을 끼워 넣는 자리처럼.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덩굴과 이끼만 무성할 뿐. 준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돌문 전체를 훑었다. 그의 시선이 문 위쪽에 닿았다.

    거기에는 손바닥만 한 돌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다른 부분과는 다르게 매끈하게 마모된 표면. 그 돌기에는 희미한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고대의 시험. 지혜를 증명하라.]

    “지혜의 증명이라…”

    준혁은 나직하게 읊조렸다. 흔한 퍼즐 문구였다. 하지만 이 잊혀진 장소에서 발견된 것이기에 의미가 달랐다. 그는 주변의 나무들을 살펴보았다. 어떤 나무는 뿌리가 기형적으로 돌을 감싸고 있었고, 어떤 나무는 잎사귀가 기묘한 색을 띠었다. 그러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계곡 아래, 물속에 잠겨 있는 둥근 돌.

    물속에서 건져낸 돌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매끈하게 닳아 있었고, 표면에는 육각형의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돌문의 홈과 크기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듯했다. 그는 돌을 들고 다시 문으로 향했다. 오른쪽 홈에 돌을 끼워 넣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돌이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두 개가 필요한 건가?”

    왼쪽 홈도 비어 있었다. 분명 어딘가에 또 다른 돌이 있을 터였다. 준혁은 다시 주변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의 시선은 다시 절벽 위쪽으로 향했다. 덩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곳, 마치 누군가 던져 넣은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또 하나의 둥근 돌.

    돌을 주워 들기 위해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흙과 이끼가 미끄러웠지만,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디뎠다. 마침내 손이 닿는 곳까지 올라가 돌을 낚아챘다. 내려오면서 몇 번 미끄러질 뻔했지만, 다행히 균형을 잃지 않았다.

    두 번째 돌 역시 첫 번째 돌과 같은 육각형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왼쪽 홈에 돌을 끼워 넣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쉬이이익-‘

    돌문 사이에서 미세한 틈이 생기더니,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문이 안쪽으로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수백 년간 닫혀 있던 문이 마침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차갑고 눅눅한 기운이 밀려왔다.

    준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앞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게임 내에서 어떤 정보도, 어떤 퀘스트도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공간. 잊혀진 고대 문명의 유적.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순간을 위해 그는 아르카나를 플레이했다.

    한 걸음.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주머니에서 간이 손전등 아이템을 꺼내 빛을 비추자, 그의 시야에 낡은 석벽과 천장에 그려진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양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벽면을 따라 빽빽하게 새겨진 그림들은 사람의 형상 같기도 했고, 짐승 같기도 했다. 그들의 눈은 모두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더 깊은 곳.
    통로의 끝.
    저 안에는 과연 무엇이 잠들어 있을까.
    준혁은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사로잡혀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둠이 그를 삼켰다.

  • 크툴루 신화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챕터 1. 심연의 메아리

    드넓은 우주에서, 고독한 ‘새벽별호’는 끊임없이 미지의 어둠 속으로 항해했다. 창밖으로는 점멸하는 별빛마저 아득히 멀어져, 오직 잉크보다 짙은 허무만이 존재했다. 이곳에선 시간의 개념마저 퇴색하는 듯했다. 몇 년간의 장기 임무 중, 가장 예측 불가능한 변수라곤 고장 난 우주선 부품이나 따분한 식사 메뉴 정도였다.

    그 모든 예측을 뒤엎는 건, 늘 가장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다.

    “함장님! 긴급 상황입니다!”

    통신망을 뚫고 튀어나온 민준의 목소리에는 평소 차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떤 기묘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는 새벽별호의 과학 담당이자 최고 엔지니어였다. 이함장은 즉시 조타실로 향했다. 긴 복도를 걷는 발걸음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조타실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메인 스크린이 이함장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드넓은 검은 우주를 배경으로, 기이한 형태의 물체가 거대한 성운 뒤편에 흐릿하게 떠 있었다. 그 형상은 마치 누군가 부드러운 진흙을 아무렇게나 뭉쳐놓은 뒤, 수십 개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무작위로 박아 넣은 듯했다.

    “민준, 무슨 일인가?”

    이함장의 질문에 민준은 제어판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미확인 물체입니다. 분석 결과, 인공 구조물로 추정됩니다만… 그 어떤 문명의 패턴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형태는 끊임없이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어요. 그리고… 에너지 반응이 너무… 너무 이상합니다.”

    스크린에 얼굴을 박고 있던 재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젊지만 항성 간 외계 문명 연구의 권위자였다.

    “형태가… 기하학적이면서도 비정형적이에요. 마치 수십 개의 논리가 한데 뒤섞여 무작위로 튀어나온 것처럼요. 이건… 이해할 수 없어요.”

    재희의 목소리에는 학자 특유의 호기심과 함께, 미지의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섞여 있었다.

    민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감지되는 ‘그것’의 에너지가 더욱 격렬해집니다. 마치… 잠자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 같은 반응입니다.”

    “깨어난다고?” 이함장은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수년간 우주를 떠돌며 수많은 현상을 목격했지만, 이런 식의 보고는 처음이었다. ‘인공 구조물’이라는 단어조차 이 물체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

    “함장님, 아무래도… 더 가까이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신호는 처음이에요.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재희의 눈은 이미 불타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위험을 인지하면서도, 학자로서의 욕망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함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접근 속도를 최저로 낮춰. 거리는… 5킬로미터까지. 비상 탈출 준비는 항상 완료 상태로.”

    이함장의 명령에 조타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작했다. 5킬로미터는 이 거대한 물체에 비하면 코앞이나 다름없었다.

    새벽별호가 물체에 가까워질수록, 함선 내부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승무원들의 얼굴에는 설명할 수 없는 피로감이 번져갔다. 희미한 두통을 호소하는 자도 있었고, 이유 없는 메스꺼움을 느끼는 자들도 있었다.

    재희는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계 유물의 데이터를 쫓았다.

    “무언가가… 제 머릿속을 맴도는 것 같아요. 말이 아닌, 이미지도 아닌… 그냥… 기분 나쁜 파장 같은 게… 제 사고 회로를 짓누르는 것 같아요.”

    “나도 그래.” 이함장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희미하게 머릿속이 울리는 듯했다. ‘피로감 때문인가?’ 그렇게 합리화하려 애썼지만, 이 알 수 없는 압박감은 평범한 피로와는 달랐다.

    그때, 함선 전체의 조명이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안정화되었지만, 그 찰나의 순간은 모두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민준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는 계기판을 확인하며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내부 에너지 흐름에 미세한 교란이 감지됩니다. 외계 물체와… 뭔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마치… 이 함선의 의식을 읽으려는 것처럼요.”

    그 순간, 정체불명의 나지막한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것은 심연에서 들려오는 듯한, 수만 년 된 고래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뼈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마찰음 같기도 한… 그 어떤 지구상의 소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불쾌하고 기괴한 소리였다. 마치 소리 자체가 형체를 가지고 영혼을 짓누르는 듯했다.

    승무원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함장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옆구리의 비상 호출 버튼으로 향했다.

    “함장님! 물체에서… 뭔가 변화가 있습니다!”

    재희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의 손가락은 스크린을 가리키고 있었다.

    메인 스크린 속 외계 유물은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차갑고도 섬뜩한 보라색이었는데, 별빛마저 빨아들이는 듯한 짙은 어둠 속에서 오직 그것만이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에너지 반응이 감지되었다.

    그리고 빛의 중심에서, 흐릿한 형상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것은 어떤 문자의 형태를 띠는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우주의 모든 공포가 압축된 듯한 비현실적인 그림자 같기도 했다.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비틀리고 왜곡된 시각적 테러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서 뭔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저건… 대체….”

    이함장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수십 년의 경험과 훈련으로 다져진 그의 이성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때, 민준이 절규하듯 외쳤다.

    “감지 센서가… 모두 미쳐버리고 있습니다! 정신 오염… 경고! 정신 오염 경고!”

    함선의 내부 조명이 격렬하게 깜빡이다 마침내 완전히 꺼졌다. 비상등의 붉은 불빛이 간헐적으로 깜빡이며 어둠을 찢었지만, 그마저도 메인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뜩한 보라색 빛에 압도당했다.

    그 빛 속에서 외계 유물의 형상은 점차 선명해지며, 마치 심연의 문이 열리는 듯한 불길한 예감을 드리웠다. 스크린 속 형체는 더 이상 단순히 기하학적인 도형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눈알 같기도 하고, 거대한 촉수 같기도 하며, 동시에 비명을 지르는 얼굴 같기도 한, 형언할 수 없는 존재로 변해가는 듯했다.

    “이건…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야….”

    재희는 넋 나간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눈동자는 흔들리는 보라색 빛 속에서 공허하게 빛났다.

    정적이 감돌았다. 숨소리마저 멎은 듯한 공포가 조타실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고, 스피커에서 다시 그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선명하게. 마치 그 소리가 직접 승무원들의 뇌리를 파고드는 것처럼. 인간의 언어로 번역될 수 없는, 하지만 분명하게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끔찍한 파장이었다.

    그 소리와 함께, 스크린 속 외계 유물의 표면에서 섬뜩한 문양이 꿈틀거리며, 마치 함선 안으로 스며들 듯 번져나가는 환영이 모두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조타실 벽면을 따라 흐르는 보라색 빛의 그림자들이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움직이는 착각마저 들었다.

    공포는 이제 현실이 되어, 새벽별호의 모든 승무원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 마법소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산등성이를 가로지르는 바람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부서진 유리 파편과 긁힌 금속이 뒹구는 폐허 속에서, 달빛마저 희미하게 숨을 죽인 듯했다. 채유리는 그 모든 파괴의 중심에,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밤하늘처럼 차가웠고, 검게 물든 마법복은 어둠 속에서도 섬뜩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 웅크린 그림자 아래에서 강하은이 불안하게 몸을 떨었다. 한때는 반짝이는 별빛처럼 빛나던 ‘새벽의 인도자’였다. 지금은, 폐기된 인형처럼 바닥에 나뒹굴 뿐이었다. 마법의 힘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고, 피로 얼룩진 얼굴엔 공포만이 가득했다.

    “겨우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구나, 하은아.”

    유리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서늘했다. 마치 몇 년 동안 켜켜이 쌓인 증오가 응축되어 흘러나오는 듯했다. 하은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유, 유리… 네가 어떻게… 살아있을 리가…”

    하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유리를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죄책감 대신 경악과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내가 왜 살아있으면 안 되는 건데? 네가 죽이려고 했으니까?” 유리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섬뜩하게 올라갔다. “그날, 나를 버리고 도망쳤던 그때처럼 말이야?”

    그 말에 하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아, 아니… 그건 오해야…! 난 그저…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유리는 한 발짝, 또 한 발짝 하은에게 다가섰다. 그녀의 발걸음마다 파편이 ‘바스스’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 소리는 하은의 심장을 후벼 파는 비수와도 같았다. “네가 희망이라고 외치며 그들을 속여 넘길 때마다, 나는 너의 그 위선적인 미소를 수도 없이 되새겼어. 네가 지키려던 게 고작 너 자신뿐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너를 원망했어. 네가 왜 그랬는지 알고 싶었어.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유리의 손끝에서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불길한 빛이 피어올랐다. 과거의 ‘별빛 수호자’의 힘과는 확연히 달랐다. 생명을 지키던 빛이 아닌,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파괴의 불꽃이었다.

    하은은 뒤로 기어가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제발! 유리! 우린 친구였잖아! 기억나지 않아? 같이 별을 보며 꿈을 꾸던 날들…!”

    “친구?” 유리는 그 단어를 읊조리며 실소를 터뜨렸다. “너는 친구라는 단어의 의미를 더럽혔어. 네가 배신하던 순간, 그 모든 기억은 재가 되어 사라졌어. 이제 내게 남은 건, 너를 똑같이 절망의 끝으로 몰아넣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뿐이야.”

    하은은 절규했다. “아니! 나는… 나는 그저 모두를 구하고 싶었을 뿐이야!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궤변은 집어치워.” 유리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빛의 파동이 하은의 얼굴을 강타했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하은의 몸이 벽에 세게 부딪혔다. 입가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크억…!”

    하은은 온몸의 뼈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하은의 앞에 멈춰 서서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래, 넌 늘 ‘더 큰 선’을 운운하며 네 죄를 정당화했지. 하지만 네가 만들어낸 지옥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밤을 울부짖었는지, 너는 상상조차 못 할 거야.”

    유리의 검게 물든 마법 지팡이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지팡이 끝에서 응축된 어둠의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폐허를 감싸던 희미한 달빛조차 그 기운에 눌려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 내가 그 고통을 너에게 돌려줄 테니까.”

    하은의 눈에 공포가 극에 달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이미 다리가 풀려 움직일 수 없었다. 유리의 얼굴에는 과거의 연약함이나 슬픔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차갑고 무자비한 복수의 의지만이 가득했다.

    “잠깐! 유리! 내가… 내가 말해줄 게 있어! 그날의 진실을 전부 말해줄게! 제발…!”

    하은의 절규에도 유리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지팡이를 내리찍을 준비를 했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수년간 쌓인 한이 서려 있었다.

    “진실?” 유리가 냉소적으로 되물었다. “네가 감히 내게 진실을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아니, 하은아. 이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뿐이야.”

    어둠의 마력이 지팡이 끝에 집중되어 거대한 구체를 형성했다. 주변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 구체는 하은의 눈동자에 섬뜩하게 비쳤다.

    하은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비명을 질렀다. “아니! 안 돼! 유리!”

    유리는 그 비명을 들었지만, 듣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바로, 네가 만든 세상이야. 새벽의 인도자.”

    유리의 지팡이가 맹렬한 기세로 바닥을 향해 내리찍혔다.
    ‘콰아아아앙!!!’
    어둠의 구체가 하은을 향해 맹렬하게 쇄도했다. 폐허 전체가 진동하며, 거대한 폭발음이 밤하늘을 갈랐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파괴의 소리 속에서, 유리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러나 유리의 눈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듯 허공을 응시했다. 무너진 잔해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무언가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먼지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하은의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였다. 한때는 둘이 함께 맞췄던, 별 모양의 펜던트.

    유리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하은아.” 그녀의 목소리는 파괴된 폐허 속에서도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건 고작 시작일 뿐이니까.”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재가 되어버린 하늘 아래, 잿빛 먼지가 춤추는 황무지에서 지아는 오늘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녹슨 철골과 깨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이빨처럼 박힌 도시의 잔해는 언제나 날카로운 침묵 속에 도사린 위험을 뿜어냈다. 지아의 손에는 낡고 무거운 강철 몽둥이가 쥐여 있었다. 허리춤에는 다 쓴 탄피를 잘라 만든 칼집에 녹슨 단검이 꽂혀 있었다. 그녀는 ‘잿빛 보루’의 가장 뛰어난 수색꾼 중 한 명이었다.

    그날도 지아는 홀로 폐허 속을 헤매고 있었다. 굶주림은 늘 끈질긴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다녔고,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지하 주차장 입구를 발견했을 때, 그녀의 심장은 미약하게나마 희망으로 뛰었다. 어쩌면 오래된 통조림이나, 쓸 만한 부품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축축하고 역겨운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소리가 울림 없이 사라지는 어둠 속으로 지아가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빛 한 점 없는 지하 깊숙한 곳에서, 갑자기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낮고 끈적이며, 동시에 날카로운 기계음 같은 울림. 지아가 자세를 낮추는 순간,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 세 개가 튀어나왔다.

    “젠장, 어둠 사냥꾼!”

    그것들은 재앙 이후 생겨난 변이체였다. 검은 비늘로 뒤덮인 맹수 같은 형체에, 뼈처럼 앙상한 사지가 뻗어 나와 있었다. 핏발 선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섬뜩하게 빛났다. 지아는 망설임 없이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놈들은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녀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뜨거운 피가 울컥 솟았다.

    한 마리가 목덜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지아가 피할 새도 없이 무기력하게 주저앉는 순간, 마치 어둠 자체가 움직이는 듯한 검은 그림자가 번개처럼 그들 사이를 갈랐다.

    *쉬이이익-*

    어둠 사냥꾼의 등 뒤에서 튀어나온 것은, 지아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였다. 인간과 흡사한 형체였지만, 키는 훨씬 크고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피부는 새벽하늘처럼 깊은 검푸른색이었고,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섬뜩하면서도 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의 손가락은 길고 날카로운 검은 발톱으로 끝나 있었다. 등 뒤에는 마치 날개처럼 보이는, 검은 그림자 같은 막이 접혀 있었다.

    놈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였다. 그림자처럼 유연하게 어둠 사냥꾼의 공격을 피하고, 뼈처럼 단단한 팔뚝으로 놈들의 몸을 후려쳤다. 쿵,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어둠 사냥꾼들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놈은 순식간에 두 마리를 제압하고 마지막 한 마리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짧고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어둠 사냥꾼은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정적이 흘렀다.

    지아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고통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녀의 눈은 오직 그 미지의 존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자신을 향했다.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마치 깊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시선.

    “너… 너는… 뭐야?” 지아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떨렸다.

    그 존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아를 응시할 뿐이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놈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낮은, 숲속의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혹은 오래된 돌이 부서지는 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이.”

    그것은 짧고 단순한 음절이었지만, 지아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카이.

    지아는 어깨 부상으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카이는 아무 말 없이 지아에게 다가왔다. 지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갈 곳이 없었다. 카이는 지아의 어깨 상처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폐허 바닥에 돋아난 이름 모를 이끼를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으깨어 지아의 상처에 발랐다. 차갑고도 기이한 느낌. 하지만 놀랍게도 출혈이 멎고 통증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날 밤, 지아는 카이가 마련해 준 동굴 속에서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카이는 지아에게 열매 몇 개를 건넸다. 어둡고 푸른색의 열매는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맛이 났다. 지아는 카이를 경계하면서도, 그의 손길에서 적의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깊은 호기심과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몇 주가 흘렀다. 지아는 어깨 부상이 완치될 때까지 카이와 함께 지냈다. 잿빛 보루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카이는 지하 폐허의 복잡한 길을 마치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사냥하고,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았다. 그의 금빛 눈은 밤에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지아는 카이에게 인간의 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카이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단어를 습득했다.

    “불.” 지아가 작게 피워놓은 모닥불을 가리켰다.
    “불.” 카이가 어눌하게 따라 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독특했지만, 전보다 훨씬 또렷했다.
    “물.”
    “물.”

    그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이해하는 듯했다. 지아가 웃으면 그도 희미하게 웃음 지었고, 지아가 슬퍼하면 그의 금빛 눈동자에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지아가 ‘인간’이라는 종족의 일원으로서 짊어진 고독과 불안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듯했다.

    지아 또한 카이에게 이끌렸다. 보루의 사람들은 ‘그림자 일족’이라 불리는 카이의 종족을 두려워하고 혐오했다. 그들은 인간을 잡아먹고, 인간의 터전을 파괴하는 악마와도 같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아가 본 카이는 달랐다. 그는 조용하고, 사려 깊었으며, 묘하게 보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느 날, 카이가 작은 조약돌을 손에 쥐고 지아에게 내밀었다. 조약돌은 표면이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고, 빛을 받으면 무지개색으로 반짝였다.

    “예쁘지?” 지아가 조약돌을 받아들며 말했다.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뻐.”
    “이거… 나 주는 거야?”
    카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지아를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그 깊은 눈빛은 인간의 것보다 더 순수하고 솔직한 감정을 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 순간, 지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카이에게 빠져버렸다는 것을. 종족을 뛰어넘어, 두려움을 넘어선 감정이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잿빛 보루에서 지아를 찾아 나선 수색대원들이 폐허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카이의 서식처 근처까지 다가왔다.

    “지아! 지아! 대답해!” 동료들의 목소리가 폐허에 울려 퍼졌다.

    카이의 금빛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지아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는 뜨거웠다.

    “가야 해.” 카이가 겨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묻어 있었다.
    “아니, 나 너 혼자 못 둬.”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널 찾으면… 죽이려고 할 거야.”

    그때였다. “저기다! 저기 그림자 일족이 있어!”

    수색대원들의 외침이 들렸다. 총성이 울렸다. 그들은 카이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했다. 카이는 지아를 자신의 뒤로 밀쳐내고, 벽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이미 몇 발의 총알이 그의 팔과 다리에 박힌 후였다. 푸른 피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카이!” 지아가 절규했다.

    카이는 지아의 손을 잡고 폐허의 더 깊은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훨씬 느렸다. 피를 흘리며 헉헉거리는 카이를 보며, 지아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녀 때문에 카이가 위험에 처한 것이다.

    결국 그들은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수색대원들이 그들을 포위했다. 보루의 대장인 철우가 앞장서서 그들을 노려봤다.

    “지아! 대체 저 괴물과 함께 뭘 하는 거냐! 제정신이냐!” 철우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배신감이 서려 있었다. “어서 이리 와! 저놈은 괴물이야!”

    지아는 카이의 앞에 섰다. 그녀의 낡은 몽둥이가 땅에 지지대처럼 박혔다.

    “아니.” 지아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그는 괴물이 아니야. 그는… 카이야. 나를 구해줬어.”

    철우가 코웃음 쳤다. “괴물에게 홀린 게 분명해! 어서 비켜, 지아! 저 괴물을 처리해야 한다!”

    총구가 카이를 향했다. 카이는 지아의 뒤에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깊고 슬펐다.

    “지아… 살아.” 카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순간, 지아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이 있었다. 잿빛 보루의 차가운 규칙,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그리고 폐허 속에서 만난 카이의 따뜻한 손길. 그 어느 쪽도 놓칠 수 없었다.

    지아는 주저 없이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동료들을 향해 외쳤다.

    “아무도… 아무도 카이에게 손대지 마!”

    철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지아를 바라봤다. “지아… 너 미쳤군!”

    지아는 카이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놓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카이에게 말했다.

    “우리… 우리만의 길을 찾자. 이 폐허 속에서… 우리 둘이 함께 살 수 있는 곳을.”

    카이의 금빛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났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지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들의 시선은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규범이 사라진 폐허 속에서, 두 개의 다른 종족이 서로에게서 유일한 안식처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수색대원들의 당황한 총성이 다시 울렸다. 지아는 카이와 함께, 총알이 빗발치는 폐허의 심연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의 미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서로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삼키려 할 때, 두 개의 다른 심장이 함께 뛰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금지된 사랑으로 빚어진, 그러나 가장 순수한 형태의 희망이었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새벽이 물들기 시작하는 산등성이, 아직 밤의 냉기가 가시지 않은 공기 속에서 은은한 차 향이 피어올랐다. ‘볕드는 마루’는 마을 어귀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외딴곳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찾아오는 이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대개는 복잡한 속세의 번뇌를 잠시 잊으려는 이들이었지만, 요 며칠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마루의 주인, 아란은 오늘도 가장 먼저 일어나 찻물을 올렸다. 섬세하게 끓어오르는 물방울 소리가 고요를 깨트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불을 조절하며, 그녀는 작은 유리창 너머로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산을 응시했다. 연초록 잎새마다 영롱하게 맺힌 이슬방울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볕드는 마루’는 언제나처럼 평화로웠고, 아란의 마음 또한 그랬다.

    하지만 평화로움 속에서도 아주 작은 파문은 일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마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소문 때문이었다. 먼 북쪽에서부터 시작되어 천하를 뒤흔들고 있다는 ‘천하제일 무도대회’. 본디 이 작은 마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법한 일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이번 대회의 마지막 결전지가 바로 이 산중턱 어딘가라는 풍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봐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이상하게도 이 산골짜기로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부쩍 늘어난 건 사실이었다. 평소에는 볼 수 없던 기묘한 복색의 손님들이 하나둘 마루를 찾아오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차 한잔 부탁하네.”

    굵고 낮은 목소리가 아란의 상념을 깨뜨렸다. 문득 고개를 들자, 마루 한편에 자리한 손님 중 한 명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며칠 전부터 마루의 가장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내였다. 허름한 삿갓 아래로 그림자 진 얼굴은 표정을 읽기 어려웠지만,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은 범상치 않았다. 등에는 낡았지만 잘 관리된 검 한 자루가 짊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산 그림자 검객’이라 불렀다.

    “네, 어르신. 따뜻한 죽엽차가 방금 다 되었습니다.”

    아란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하며, 정갈한 찻잔에 맑고 푸른빛을 띠는 죽엽차를 따랐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은 차분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삿갓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눈매 아래로 깊게 패인 주름들이 그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찻잔을 받아 든 그는 말없이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 그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마저도 고요하게 들렸다.

    “…이 차는, 늘 마음을 가라앉히는군.”

    오랜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피로감이 섞여 있었다. 아란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차는 언제나 그랬다. 뜨겁게 달아오른 마음도, 복잡하게 얽힌 생각도 한 모금의 차 앞에서는 잠시나마 쉬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르신은 며칠째 잠을 잘 이루지 못하시는 듯합니다.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아란의 말에 사내는 피식 웃었다. 억지로 꾸며낸 웃음이 아니라, 정말 피곤함이 묻어나는 쓴웃음이었다.

    “천하의 운명이 걸린 판국에, 잠인들 편히 잘 수 있을 리가 있나. 젊은 아가씨는 이런 산골짜기에서 한가롭게 차나 내리고 있으니, 세상 근심이 없겠지만.”

    그의 말에 아란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의 표정에는 세상 근심이 없다는 말에 대한 반박도, 동의도 없었다. 그저 작은 깨달음만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세상의 운명이 걸렸다는 그 일도, 결국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사람들도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차를 마시고, 밤이 되면 잠을 자야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찾아오시는 분들이 잠시라도 편히 쉬어가실 수 있도록 돕는 것뿐입니다.”

    사내는 아란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찻잔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그의 모습에서, 고단함 속에 피어나는 작은 안식이 느껴졌다. 그의 곁에는 여전히 날 선 검이 놓여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낡은 나무 조각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그때였다. 마루의 문이 활짝 열리며 눈부신 아침 햇살과 함께 한 젊은 여인이 들어섰다. 쨍한 붉은색 도포 자락이 경쾌하게 휘날리고, 허리춤에는 푸른 비단이 감겨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입가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머! 벌써 손님이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주인장님! 드디어 제가 이 ‘볕드는 마루’를 찾았군요!”

    맑고 명랑한 목소리가 고요했던 마루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산 그림자 검객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지만,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오랜 친구라도 만난 듯 활짝 웃으며 아란에게 다가왔다.

    “저는 이연이라고 해요! 저 멀리 남쪽에서부터 왔답니다! 혹시 여기, ‘흑룡검’이라 불리는 분이 계신가요? 아니면 ‘매화비수’님이라든지!”

    그녀는 연신 두리번거리며 마루 안을 살폈다. 이연이라는 이름의 이 젊은 여인 역시, 그 ‘천하제일 무도대회’를 찾아온 무림인 중 한 명임이 틀림없었다.

    아란은 이연의 활기찬 에너지에 잠시 넋을 잃었지만,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이연 아가씨. 볕드는 마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찾는 분들이 아직 도착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따뜻한 차 한잔 드시면서 여독을 푸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연은 신이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와! 역시 소문대로네요! 이 찻집은 정말 특별한 기운이 있어요! 차도 엄청 맛있다고 하던데… 빨리 마셔보고 싶어요!”

    산 그림자 검객은 혀를 차며 다시 삿갓을 깊이 눌러썼다. 그의 옆에 새로이 등장한 이 활기찬 파문이, 잠시 얻었던 안식을 또다시 흔들어 놓을 것만 같았다. 아란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세상의 운명이 걸린 대회가 다가오고 있지만, 이곳 ‘볕드는 마루’는 오늘도 찾아오는 손님들의 배고픔과 갈증,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채워주는 일상을 이어나갈 터였다. 그녀의 손에서 찻잔이 다시 조용히 놓였다. 고요한 마루에, 새로운 손님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지는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