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7화: 심연의 장막 아래
차가운 강철 벽이 침묵 속에 깊이를 더해갔다. 이곳은 은하연합의 최첨단 기함 ‘아르고스’의 최하층에 위치한, 버려지다시피 한 격납고 덱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폐기 위성 잔해들을 수집하던 정비용 로봇들의 서식지였으나, 지금은 빛 한 줄기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직 한 쌍의 존재만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엘라라는 숨을 죽였다. 그녀의 손은 제피르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촉수처럼 길고 섬세한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타고 전해지는 낯선 감각은 언제나 엘라라의 심장을 미묘하게 저리게 했다. 그의 피부는 인간보다 훨씬 매끄럽고 차가웠지만, 그 아래 흐르는 혈류의 맥동은 엘라라의 것과 똑같이 뜨거웠다.
“괜찮아?” 엘라라가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나 그녀의 떨림이 제피르에게도 전해질까 두려웠다.
어둠 속에서 제피르의 눈동자가 고요히 빛났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그 어떤 인간의 눈과도 다른 깊이를 가진 눈. 그 시선이 엘라라의 불안정한 영혼을 꿰뚫는 듯했다.
“괜찮을 리 없지, 엘라라.” 제피르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는 늘 서늘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그의 모국어가 아니었음에도, 엘라라에게는 그 어떤 인간의 언어보다도 더 명확하게 그의 감정이 전달되었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면….”
그때였다. 엘라라의 신경망에 직접 연결된 개인 통신망에서 미세한 잡음이 흘러들었다. 마치 수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불어오는 우주의 바람 소리처럼, 듣는 순간 심장을 갉아먹는 듯한 불길한 소리였다. 엘라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누군가… 온다.” 그녀는 거의 입술만 움직여 속삭였다.
제피르의 몸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의 눈빛은 맹렬한 집중으로 타올랐고, 주위의 희박한 공기가 그의 존재감에 눌려 파동치는 듯했다. 그는 엘라라의 손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그들의 종족에게는 이런 식의 육체적 접촉이 금기였다. 아니, 그들의 존재 자체가 금기였다.
제피르는 엘라라를 끌어당겨 낡은 화물 컨테이너 뒤편의 그림자 속으로 숨겼다. 컨테이너의 금속 표면은 차가웠지만, 제피르의 등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엘라라에게 생경한 안도감을 주었다.
“아르고스는 늘 수많은 감시망으로 촘촘히 엮여 있어. 제아무리 네 ‘정보 은폐술’이 뛰어나다 해도….” 엘라라의 말은 채 끝나지 못했다.
“이번엔 다를 거야.” 제피르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났다. 그의 종족, 젤라시안들은 오랜 시간 은하계의 변방에서 자신들만의 문명을 건설하며 연합의 눈을 피해왔다. 그들은 극도의 정신력과 환경 적응력을 바탕으로 번성했지만, 그들의 존재는 늘 연합에게 미지의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그들의 고유 능력인 ‘사념 투사’와 ‘현실 왜곡’은 연합의 기술로는 설명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엘라라는 지구 출신의 고고학자였다. 우주 곳곳에 흩어진 고대 문명의 흔적을 추적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우연히, 아니, 필연적으로 젤라시안의 숨겨진 유적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제피르를 만났다. 처음에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했지만, 시간과 공간, 그리고 수많은 금기를 넘어선 감정들이 그들을 묶었다.
“하필 지금이야? 젤라시안-연합 평화회담을 앞두고….” 엘라라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 관계가 들통나는 순간, 그들이 맺으려던 위태로운 평화는 산산조각 날 터였다. 단순한 파국이 아니었다. 전면전이었다.
화물 덱 입구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금속 바닥을 울리는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포식자의 발걸음처럼 엘라라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젠장, 순찰인가?” 엘라라가 중얼거렸다.
“아니.” 제피르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깊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정신 파동이… 단순한 순찰병의 것이 아니야. 그들의 감시를 피한 녀석….”
두 그림자가 컨테이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들은 연합군의 표준 전투복을 입고 있었지만, 걸음걸이나 자세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흡사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이쪽이다. 미약하지만, 명확한 에너지 잔여물이 감지돼.” 한 명의 병사가 손목의 스캐너를 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기계음처럼 건조했다.
엘라라는 제피르의 팔을 붙잡았다. 그들이 ‘잔여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그들의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제피르가 엘라라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진정해. 섣부른 행동은 금물이다.”
하지만 엘라라는 진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병사의 등 뒤에서 어둠과 함께 일렁이는 희미한 그림자였다. 그것은 연합군 병사의 것이 아니었다. 형태가 불분명하고, 마치 공간 자체를 왜곡시키는 듯한 검은 아지랑이였다.
“저건…?” 엘라라의 입에서 의문이 터져 나오려는 찰나, 제피르가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의 눈동자에 경고의 빛이 스쳤다.
검은 아지랑이가 병사의 어깨 위에서 서서히 형태를 드러냈다. 그것은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실루엣이었고, 그 끝에는 핏빛으로 번뜩이는 하나의 눈이 달려 있었다. 공포가 엘라라의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저것은 단순한 순찰병이 아니었다. ‘그들’이었다. 젤라시안의 숙적, ‘쉐도우 스토커’라 불리는 존재들. 그들은 그림자처럼 존재하며, 다른 종족의 정신을 지배하고 육체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했다. 젤라시안만이 그들의 정신 간섭에 저항할 수 있었기에, 쉐도우 스토커들은 젤라시안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찾았다.” 쉐도우 스토커에게 조종당하는 병사의 입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엘라라와 제피르가 숨어있는 컨테이너를 향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텅 빈 동공 안에서 검은 유성처럼 섬광이 번뜩였다.
제피르의 손이 엘라라의 허리를 강하게 감쌌다. 그의 근육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졌다. 피할 수 없는 위기였다.
“엘라라, 숨어. 절대로 움직이지 마.” 제피르가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과 함께, 그녀를 지키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싫어! 당신 혼자 두고 갈 순….”
제피르의 금빛 눈동자가 엘라라의 눈과 마주쳤다. 그 시선 속에서 엘라라는 난생 처음 보는 비장함과 결의를 읽었다.
“우리는 함께가 아니면 죽을 뿐이야!” 엘라라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제피르는 엘라라의 몸을 거칠게 밀쳐 컨테이너 틈새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그림자에서 뛰쳐나왔다. 그의 몸에서 푸른빛의 사념 에너지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젤라시안 고유의 ‘방어막’이자 ‘공격’ 수단이었다. 격납고 덱 전체가 그의 에너지 파동으로 일렁였다.
“너희들이 감히… 이 영역을 침범하다니!” 제피르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동시에 비통함도 서려 있었다. 쉐도우 스토커들은 젤라시안 종족에게 있어 단순한 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젤라시안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 그림자였고, 젤라시안의 존재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끔찍한 괴물이었다.
쉐도우 스토커에게 조종당하는 병사들은 제피르의 강력한 사념 파동에 휘청거렸다. 병사들의 눈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며, 그들의 육체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쉐도우 스토커의 본체가 병사의 어깨에서 분리되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마치 액체와도 같았던 그것은 순식간에 수많은 촉수로 변해 제피르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엘라라는 숨겨진 곳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현실이 아니라 악몽이었다. 제피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쉐도우 스토커의 촉수들을 막아냈지만, 그들의 수는 너무나도 많았다. 마치 어둠 자체가 제피르를 집어삼키려는 듯했다.
“제피르!” 엘라라의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그 소리는 격렬한 사념 파동과 쉐도우 스토커의 기괴한 울음소리에 묻혀버렸다.
그때, 제피르의 몸에서 마지막 힘을 짜내듯 거대한 푸른빛의 사념 파동이 폭발했다. 격납고 덱의 낡은 철골 구조물이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고, 전등이 깜빡이다 마침내 꺼져버렸다.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엘라라는 공포에 질린 채 떨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오직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제피르의 이름을 불렀다.
“제피르! 제피르…!”
대답이 없었다.
엘라라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오직 제피르의 존재를 갈망했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차가운 금속 벽, 부서진 잔해들, 그리고…
끈적하고 차가운 액체가 그녀의 손에 닿았다. 핏기 어린 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엘라라의 손가락이 떨렸다.
“제피르…?”
그때, 그녀의 귀에 닿은 것은 제피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엘라라. 그를 찾아야 해.*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 그것은 바로 제피르가 그녀의 신경망에 연결될 때마다 사용하던 암호화된 정신 파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약하고, 간신히 들릴 듯 말 듯한 메아리였다.
*…시간이 없어. 놈들이… 놈들이 곧….*
그리고는 모든 것이 끊어졌다.
엘라라는 공포에 질린 채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졌지만, 제피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파괴된 격납고의 잔해들과, 희미하게 빛나는 쉐도우 스토커의 그림자만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제피르는 사라졌다. 그의 흔적은 핏빛 액체와 함께 공포의 잔해 속에 흩어져 있었다.
그 순간, 엘라라의 귓가에 다시 한번 섬뜩한 기계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개인 통신망이 아니었다.
*――경고: 외부 침입자 감지. 기함 아르고스 최하층 덱 봉쇄. 모든 인원은 비상 대피 절차를 따르시오. 침입자 포획을 위해 전투 인력이 배치될 예정입니다.*
그들의 금지된 사랑이 마침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제피르는 어디에도 없었다. 엘라라는 남겨진 채, 어둠 속에서 차가운 피를 움켜쥐고 홀로 남겨졌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그녀는 혼자였다. 홀로 이 모든 위협과 맞서야 했다.
**[다음 화에 계속]**## 제 17화: 심연의 장막 아래
차가운 강철 벽이 침묵 속에 깊이를 더해갔다. 이곳은 은하연합의 최첨단 기함 ‘아르고스’의 최하층에 위치한, 버려지다시피 한 격납고 덱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폐기 위성 잔해들을 수집하던 정비용 로봇들의 서식지였으나, 지금은 빛 한 줄기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직 한 쌍의 존재만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엘라라는 숨을 죽였다. 그녀의 손은 제피르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촉수처럼 길고 섬세한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타고 전해지는 낯선 감각은 언제나 엘라라의 심장을 미묘하게 저리게 했다. 그의 피부는 인간보다 훨씬 매끄럽고 차가웠지만, 그 아래 흐르는 혈류의 맥동은 엘라라의 것과 똑같이 뜨거웠다.
“괜찮아?” 엘라라가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나 그녀의 떨림이 제피르에게도 전해질까 두려웠다.
어둠 속에서 제피르의 눈동자가 고요히 빛났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그 어떤 인간의 눈과도 다른 깊이를 가진 눈. 그 시선이 엘라라의 불안정한 영혼을 꿰뚫는 듯했다.
“괜찮을 리 없지, 엘라라.” 제피르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는 늘 서늘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그의 모국어가 아니었음에도, 엘라라에게는 그 어떤 인간의 언어보다도 더 명확하게 그의 감정이 전달되었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면….”
그때였다. 엘라라의 신경망에 직접 연결된 개인 통신망에서 미세한 잡음이 흘러들었다. 마치 수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불어오는 우주의 바람 소리처럼, 듣는 순간 심장을 갉아먹는 듯한 불길한 소리였다. 엘라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누군가… 온다.” 그녀는 거의 입술만 움직여 속삭였다.
제피르의 몸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의 눈빛은 맹렬한 집중으로 타올랐고, 주위의 희박한 공기가 그의 존재감에 눌려 파동치는 듯했다. 그는 엘라라의 손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그들의 종족에게는 이런 식의 육체적 접촉이 금기였다. 아니, 그들의 존재 자체가 금기였다.
제피르는 엘라라를 끌어당겨 낡은 화물 컨테이너 뒤편의 그림자 속으로 숨겼다. 컨테이너의 금속 표면은 차가웠지만, 제피르의 등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엘라라에게 생경한 안도감을 주었다.
“아르고스는 늘 수많은 감시망으로 촘촘히 엮여 있어. 제아무리 네 ‘정보 은폐술’이 뛰어나다 해도….” 엘라라의 말은 채 끝나지 못했다.
“이번엔 다를 거야.” 제피르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났다. 그의 종족, 젤라시안들은 오랜 시간 은하계의 변방에서 자신들만의 문명을 건설하며 연합의 눈을 피해왔다. 그들은 극도의 정신력과 환경 적응력을 바탕으로 번성했지만, 그들의 존재는 늘 연합에게 미지의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그들의 고유 능력인 ‘사념 투사’와 ‘현실 왜곡’은 연합의 기술로는 설명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엘라라는 지구 출신의 고고학자였다. 우주 곳곳에 흩어진 고대 문명의 흔적을 추적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우연히, 아니, 필연적으로 젤라시안의 숨겨진 유적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제피르를 만났다. 처음에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했지만, 시간과 공간, 그리고 수많은 금기를 넘어선 감정들이 그들을 묶었다.
“하필 지금이야? 젤라시안-연합 평화회담을 앞두고….” 엘라라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 관계가 들통나는 순간, 그들이 맺으려던 위태로운 평화는 산산조각 날 터였다. 단순한 파국이 아니었다. 전면전이었다.
화물 덱 입구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금속 바닥을 울리는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포식자의 발걸음처럼 엘라라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젠장, 순찰인가?” 엘라라가 중얼거렸다.
“아니.” 제피르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깊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정신 파동이… 단순한 순찰병의 것이 아니야. 그들의 감시를 피한 녀석….”
두 그림자가 컨테이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들은 연합군의 표준 전투복을 입고 있었지만, 걸음걸이나 자세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흡사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이쪽이다. 미약하지만, 명확한 에너지 잔여물이 감지돼.” 한 명의 병사가 손목의 스캐너를 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기계음처럼 건조했다.
엘라라는 제피르의 팔을 붙잡았다. 그들이 ‘잔여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그들의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제피르가 엘라라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진정해. 섣부른 행동은 금물이다.”
하지만 엘라라는 진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병사의 등 뒤에서 어둠과 함께 일렁이는 희미한 그림자였다. 그것은 연합군 병사의 것이 아니었다. 형태가 불분명하고, 마치 공간 자체를 왜곡시키는 듯한 검은 아지랑이였다.
“저건…?” 엘라라의 입에서 의문이 터져 나오려는 찰나, 제피르가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의 눈동자에 경고의 빛이 스쳤다.
검은 아지랑이가 병사의 어깨 위에서 서서히 형태를 드러냈다. 그것은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실루엣이었고, 그 끝에는 핏빛으로 번뜩이는 하나의 눈이 달려 있었다. 공포가 엘라라의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저것은 단순한 순찰병이 아니었다. ‘그들’이었다. 젤라시안의 숙적, ‘쉐도우 스토커’라 불리는 존재들. 그들은 그림자처럼 존재하며, 다른 종족의 정신을 지배하고 육체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했다. 젤라시안만이 그들의 정신 간섭에 저항할 수 있었기에, 쉐도우 스토커들은 젤라시안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찾았다.” 쉐도우 스토커에게 조종당하는 병사의 입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엘라라와 제피르가 숨어있는 컨테이너를 향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텅 빈 동공 안에서 검은 유성처럼 섬광이 번뜩였다.
제피르의 손이 엘라라의 허리를 강하게 감쌌다. 그의 근육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졌다. 피할 수 없는 위기였다.
“엘라라, 숨어. 절대로 움직이지 마.” 제피르가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과 함께, 그녀를 지키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싫어! 당신 혼자 두고 갈 순….”
제피르의 금빛 눈동자가 엘라라의 눈과 마주쳤다. 그 시선 속에서 엘라라는 난생 처음 보는 비장함과 결의를 읽었다.
“우리는 함께가 아니면 죽을 뿐이야!” 엘라라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제피르는 엘라라의 몸을 거칠게 밀쳐 컨테이너 틈새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그림자에서 뛰쳐나왔다. 그의 몸에서 푸른빛의 사념 에너지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젤라시안 고유의 ‘방어막’이자 ‘공격’ 수단이었다. 격납고 덱 전체가 그의 에너지 파동으로 일렁였다.
“너희들이 감히… 이 영역을 침범하다니!” 제피르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동시에 비통함도 서려 있었다. 쉐도우 스토커들은 젤라시안 종족에게 있어 단순한 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젤라시안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 그림자였고, 젤라시안의 존재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끔찍한 괴물이었다.
쉐도우 스토커에게 조종당하는 병사들은 제피르의 강력한 사념 파동에 휘청거렸다. 병사들의 눈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며, 그들의 육체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쉐도우 스토커의 본체가 병사의 어깨에서 분리되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마치 액체와도 같았던 그것은 순식간에 수많은 촉수로 변해 제피르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엘라라는 숨겨진 곳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현실이 아니라 악몽이었다. 제피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쉐도우 스토커의 촉수들을 막아냈지만, 그들의 수는 너무나도 많았다. 마치 어둠 자체가 제피르를 집어삼키려는 듯했다.
“제피르!” 엘라라의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그 소리는 격렬한 사념 파동과 쉐도우 스토커의 기괴한 울음소리에 묻혀버렸다.
그때, 제피르의 몸에서 마지막 힘을 짜내듯 거대한 푸른빛의 사념 파동이 폭발했다. 격납고 덱의 낡은 철골 구조물이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고, 전등이 깜빡이다 마침내 꺼져버렸다.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엘라라는 공포에 질린 채 떨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오직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제피르의 이름을 불렀다.
“제피르! 제피르…!”
대답이 없었다.
엘라라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오직 제피르의 존재를 갈망했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차가운 금속 벽, 부서진 잔해들, 그리고…
끈적하고 차가운 액체가 그녀의 손에 닿았다. 핏기 어린 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엘라라의 손가락이 떨렸다.
“제피르…?”
그때, 그녀의 귀에 닿은 것은 제피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엘라라. 그를 찾아야 해.*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 그것은 바로 제피르가 그녀의 신경망에 연결될 때마다 사용하던 암호화된 정신 파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약하고, 간신히 들릴 듯 말 듯한 메아리였다.
*…시간이 없어. 놈들이… 놈들이 곧….*
그리고는 모든 것이 끊어졌다.
엘라라는 공포에 질린 채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졌지만, 제피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파괴된 격납고의 잔해들과, 희미하게 빛나는 쉐도우 스토커의 그림자만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제피르는 사라졌다. 그의 흔적은 핏빛 액체와 함께 공포의 잔해 속에 흩어져 있었다.
그 순간, 엘라라의 귓가에 다시 한번 섬뜩한 기계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개인 통신망이 아니었다.
*――경고: 외부 침입자 감지. 기함 아르고스 최하층 덱 봉쇄. 모든 인원은 비상 대피 절차를 따르시오. 침입자 포획을 위해 전투 인력이 배치될 예정입니다.*
그들의 금지된 사랑이 마침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제피르는 어디에도 없었다. 엘라라는 남겨진 채, 어둠 속에서 차가운 피를 움켜쥐고 홀로 남겨졌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그녀는 혼자였다. 홀로 이 모든 위협과 맞서야 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