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의 그림자: 생존자의 기록>**
**SCENE 1**
**내부. 폐허가 된 건물. 낮.**
칙칙한 회색빛 먼지가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희미한 햇살 속에서 춤을 췄다. 한때 위용을 자랑했을 거대한 백화점의 잔해 속은 썩은 냄새와 곰팡내, 그리고 알 수 없는 비릿한 금속성 악취로 가득했다. 무너진 천장에서 앙상한 철근들이 뼈처럼 튀어나와 있었고, 빗물이 고인 바닥에는 검고 끈적한 이끼들이 스멀스멀 기어 번지고 있었다. 세계가 재앙에 휩싸인 지 햇수로 몇 년인지도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시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오직 해가 뜨고 지는 것만이 유일한 시계였고, 그마저도 항상 잿빛 하늘 아래에서 희미했다.
시온은 넝마가 된 방한 재킷의 후드를 바싹 조여 쓰고 있었다. 얼굴의 반을 가린 천 조각 아래로 굳게 다문 입술과 날카로운 턱선이 드러났다. 눈빛은 주변의 모든 것을 스캔하듯 바삐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는 녹슨 철근 조각이 단단히 쥐여 있었다. 끝부분이 날카롭게 가공된,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이미 수많은 위기 속에서 시온의 목숨을 구해낸 임시변통의 무기였다.
“젠장, 아무것도 없어…”
시온의 목소리가 삭막한 공간에 작게 울렸다. 며칠째 제대로 된 먹을 것을 찾지 못했다. 이미 복부에는 쓰라린 허기가 돌고 있었고, 입안은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물조차도 함부로 마실 수 없었다. 이 세계의 물은 대부분 오염되어 있었다. 정화 장치가 있지만, 그것을 매번 가지고 다니기엔 너무 무거웠고, 그마저도 필터 교체 주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시온은 부서진 진열장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유리 파편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치 이 고요한 폐허 속에서 그녀의 존재를 외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혹시나 남아있을지 모르는 통조림이나, 먹을 수 있는 말린 식료품을 찾아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오직 먼지와 부패한 잔해들뿐이었다.
그때였다.
**SFX: (먼 곳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낮은 소리, 짐승의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의 것 같기도 한 기괴한)**
시온의 몸이 굳었다. 척추를 타고 섬뜩한 한기가 흘렀다. 그녀는 재빨리 가장 가까운 무너진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철근 조각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고,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폐허 속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들’이었다.
**SFX: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는 발소리, 질척이는 듯한, 혹은 무언가를 끄는 듯한 소리)**
숨을 죽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그녀의 귀는 소리의 근원지를 쫓았다. 저건 한 마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두세 마리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지만, 피부는 검은 비늘로 뒤덮여 있고, 눈은 핏빛으로 번뜩이는, 재앙 이후에 나타난 존재들. 사람들은 그것을 ‘그림자 파편’이라 불렀다.
기둥의 틈새로 살짝 엿보니, 저 멀리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들이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키가 족히 3미터는 되어 보이는 흉측한 형상이 천천히 시온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진열되어 있던 마네킹의 머리를 발로 차서 날리거나, 부서진 의자를 부러뜨리며 폐허를 유린했다. 목적 없는 파괴. 그것이 ‘그림자 파편’들의 유일한 유희였다.
시온은 식은땀을 흘렸다. 들키면 끝장이었다. 철근 조각 하나로는 저 덩치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웬만한 금속도 맨손으로 구겨버릴 수 있을 만큼 강했고, 재앙의 핵에서 나온 검은 안개를 들이마시면 순식간에 재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SFX: (발소리가 더욱 가까워짐, 숨소리가 거칠게 들림)**
그림자 파편 중 한 마리가 시온이 숨어있는 기둥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시온은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코를 찌르는 역겨운 피비린내가 가까이서 풍겨왔다. 그녀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SFX: (쿵! 하는 둔탁한 소리, 기둥을 발로 차는 소리)**
기둥이 흔들렸다. 시온은 겨우 균형을 잡았다. 그림자 파편이 기둥을 부수려는 것인가? 그녀는 다음 움직임을 예상했다. 그때, 그림자 파편의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녀석이 고개를 들고 허공을 향해 길게 으르렁거렸다.
**SFX: (길게 찢어지는 듯한 기괴한 울음소리)**
그 소리에 맞춰 다른 그림자 파편들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우두머리 녀석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아무것도 찾지 못했는지 흥미를 잃은 듯 다시 발길을 돌렸다.
**SFX: (멀어지는 발소리, 점차 잦아드는 웅성거림)**
시온은 힘이 풀린 다리로 겨우 주저앉았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고,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숨죽이고 있다가, 마침내 그림자 파편들의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시온은 기둥 뒤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안심은 잠시였다. 그녀가 숨어있던 기둥 바로 옆, 깨진 진열장 아래에 작은 상자 하나가 굴러 떨어져 있었다. 그림자 파편이 기둥을 찼을 때 생긴 진동으로 떨어져 나온 것 같았다.
상자는 낡고 먼지가 가득했지만, 묘한 끌림이 있었다. 시온은 조심스럽게 상자에 다가갔다. 금속으로 된 상자였다. 혹시 먹을 것이라도 있을까 하는 희망에 그녀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SCENE 2**
**내부. 폐허가 된 건물. 낮.**
상자 안에는 바싹 마른 미트저키 몇 개와 물에 타 마실 수 있는 정화된 소금 결정, 그리고 낡은 통신기가 들어있었다. 통신기는 전원이 꺼져 있었지만, 상태가 꽤 좋아 보였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작동하는 통신기를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다. 시온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신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SFX: (찌릿, 하는 작은 전류음, 지지직 거리는 노이즈)**
액정 화면에 희미하게 불이 들어왔다. 깜짝 놀란 시온은 통신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 통신기는… 작동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통신기를 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이게… 살아있다고?”
놀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 고요한 폐허 속에서 작동하는 물건은 흔치 않았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생존자로서의 본능은 이 희망의 빛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미트저키 하나를 입에 넣었다. 질기고 짰지만, 며칠 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이었다. 소금 결정을 물통에 넣고 흔들어 마시자, 갈증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이제 남은 건 통신기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통신기는 낡은 모델이었지만, 기본적인 통신 기능 외에 간단한 지도와 과거의 데이터베이스를 열람할 수 있는 기능도 있었다. 시온은 조심스럽게 지도 기능을 켰다. 지도는 대부분의 지역이 ‘오염 지역’ 또는 ‘접근 불가’로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 군데, 폐허가 된 도시 외곽의 지하 벙커로 추정되는 곳이 ‘미확인’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작은 녹색 점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SFX: (통신기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신호음)**
“신호…?”
시온은 눈을 비볐다. 분명히 신호였다. 매우 약했지만, 누군가 이곳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 고독한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의 메시지.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경고음이기도 했다. 신호를 보내는 이가 인간인지, 아니면 그림자 파편들의 함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갈등했다. 이대로 폐허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이 희미한 희망을 쫓아 미확인 지역으로 향할 것인가. 생존 본능은 안전한 길을 택하라고 속삭였지만, 오랜 시간 혼자 싸워온 외로움은 그녀의 발길을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젠장, 어차피 죽을 바엔… 뭐라도 해봐야지.”
시온은 통신기를 꽉 쥐었다. 녹색 점이 깜빡이는 지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녀의 눈빛에 결연한 의지가 서렸다. 그곳은 폐허가 된 도시의 외곽, 오래된 산업 단지 깊숙한 곳에 위치한 버려진 연구 시설 근처였다. 지도상으로도 접근이 매우 어려워 보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를 따라 이동할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가는 길에는 분명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희미하게나마 들려오는 신호음은 그녀의 심장에 꺼져가던 불씨를 다시 지피는 것 같았다.
**SCENE 3**
**외부. 폐허가 된 도시 외곽. 황혼.**
시온은 폐허가 된 도시를 벗어나 외곽으로 향했다. 하늘은 붉은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기괴한 황혼으로 물들어 있었다. 먼지바람이 회색빛 대지를 휩쓸었고, 앙상한 나무들은 유령처럼 흔들렸다. 길은 온통 부서진 차량들과 잔해들로 막혀 있었다. 그녀는 익숙하게 장애물들을 피해 좁은 길을 따라 나아갔다.
**SFX: (끼이익, 하는 금속 마찰음, 스산한 바람 소리)**
한때는 번성했을 공장 지대의 거대한 건물들이 뼈대만 남긴 채 흉물스럽게 서 있었다. 이따금씩 날아다니는 검은 새들이 불길한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시온은 통신기를 손에 든 채, 미확인 신호의 강도를 계속 확인했다. 신호는 미미했지만,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아주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 멈춰 선 트럭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화물칸이 열려 있고, 그 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시온은 경계 태세를 취했다. 저 빛은… 인공적인 빛이었다.
그녀는 트럭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발소리를 죽이고, 숨을 참고. 트럭의 후미로 돌아가 안을 엿보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트럭 화물칸 안에는 작은 발전기와 함께 몇 개의 조명 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조명 아래, 한 소녀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소녀는 시온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낡고 더러운 옷차림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마치 갓 태어난 새끼 동물처럼 불안하고도 맑았다.
소녀의 옆에는 낡은 라디오와 통신기가 놓여 있었다. 시온의 통신기가 보내던 신호의 근원지였다. 소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간헐적으로 지지직거리는 라디오를 불안한 듯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와 절망감이 가득했다.
**SFX: (소녀가 작게 흐느끼는 소리)**
시온은 무심코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그 순간, 부서진 나뭇가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SFX: (바스락! 하는 나뭇가지 소리)**
소녀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시온의 눈과 마주쳤다. 소녀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소녀는 뒷걸음질 쳤다.
시온은 자신이 오해받을까 봐 서둘러 철근 조각을 뒤로 숨겼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다려… 난 해치지 않아.”
소녀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하지만 시온의 목소리에서 위협을 느끼지 못한 건지, 그녀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겁먹은 눈으로 시온을 올려다보았다.
“너… 너도 살아있었어?”
소굵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 질문은 시온에게도 똑같이 던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 폐허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시온은 천천히 트럭 안으로 들어갔다. 소녀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 넌… 왜 여기 혼자 있는 거지?”
소녀는 고개를 숙였다.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모르겠어… 깨어나 보니 여기였어. 가족들은… 다 사라졌고…”
소녀의 목소리에서 깊은 슬픔과 상실감이 묻어났다. 시온은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모든 것을 잃었다.
“이름이 뭐야?” 시온이 물었다.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윤슬… 제 이름은 윤슬이에요.”
“윤슬…” 시온은 그 이름을 되뇌었다. 마치 오래된 노래처럼 낯설면서도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난 시온이야.”
두 소녀는 그렇게 폐허의 황혼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윤슬의 라디오에서 여전히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흘러나왔지만, 이제 그 소리는 더 이상 불안하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삭막한 세상에서 두 존재의 연결을 알리는 희미한 희망의 선율처럼 느껴졌다.
윤슬은 다시 시온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두려움보다 희미한 기대감이 섞인 눈빛이었다.
“우리… 어디로 가야 할까요?”
시온은 통신기를 다시 보았다. 지도상의 녹색 점은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그 미확인 지역은 여전히 수수께끼였지만, 이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 그리고… 저 신호를 쫓아봐야지.”
시온은 윤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녀의 표정에는 여전히 피로와 경계심이 서려 있었지만, 그 안에 아주 작은, 그러나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고독한 생존에 익숙해진 그녀의 마음에, 새로운 길이 열리고 있었다. 이 황폐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었다.
**SCENE 4**
**외부. 폐허의 밤. 캠프.**
밤이 찾아오자 폐허는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겼다. 시온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이용해 임시 방편으로 작은 은신처를 만들었다. 바닥에는 찢어진 천 조각을 깔고, 그 위에 윤슬과 함께 앉았다. 작은 모닥불이 그들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시온은 챙겨온 정화기로 오염된 물을 끓여 간신히 몇 모금 마실 수 있게 만들었다.
윤슬은 시온이 건넨 미트저키 조각을 오물거리며 먹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불안감이 역력했지만, 시온의 존재 덕분에 조금은 안정을 찾은 듯 보였다.
“밤에는… 위험한 것들이 더 많이 돌아다니나요?” 윤슬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시온은 모닥불 속에서 튀어 오르는 불꽃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림자 파편들은 어둠 속에서 더 강해져. 눈에 잘 띄지 않고, 움직임도 빨라지지. 밤에는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 게 상책이야.”
윤슬은 바싹 겁을 집어먹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폐허는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시온은 한숨을 쉬었다. 이 질문은 그녀 역시 수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었다.
“아무도 몰라. 어느 날 갑자기 검은 안개가 몰려왔고, 세상은 순식간에 변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거나… 혹은 그림자 파편처럼 변했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극히 일부뿐이야.”
그녀는 짧게 말을 끊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 그녀의 눈빛이 잠시 흐려졌다.
“너는… 왜 이 트럭 안에 있었던 거야?” 시온이 다시 물었다. 윤슬이 깨어보니 여기였다는 말이 걸렸다.
윤슬은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그냥… 제가 여기 버려졌다는 것만 알아요. 라디오에서 나오는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꼭 제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서 계속 틀어놓고 있었어요.”
그녀는 옆에 놓인 통신기를 보았다. 시온의 통신기와 같은 모델이었다.
“이 통신기는… 아버지가 쓰던 거예요. 저는 사용법을 잘 몰라서… 그냥 신호가 잡히는 것 같아서 켜두고 있었어요. 저를 데리러 와주기를 바라면서…”
시온은 윤슬의 손에 든 통신기를 보았다. 그 통신기는 계속해서 미약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시온의 통신기는 그 신호를 포착했던 것이다. 우연치고는 기묘했다.
“혹시… 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지 기억나?”
윤슬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연구원이셨어요. 항상 무언가를 찾고 계셨죠. 이 재앙의 원인이나… 아니면 해결책 같은 거요.”
“연구원…” 시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재앙 이전에 존재했던 과학자들은 이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윤슬의 아버지가 보냈던 이 신호는, 어쩌면 그녀가 찾고 있던 그 ‘해결책’의 단서일지도 몰랐다.
“그럼… 그 신호가 어디서 오는지 대략적으로라도 알고 있어?” 시온이 물었다.
윤슬은 고개를 젓다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낡은 통신기의 액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아버지가 가끔 가셨던 ‘검은 동굴’이라는 곳이 있었어요. 위험하다고는 하셨지만, 뭔가 중요한 것을 찾고 계셨던 것 같아요. 저 신호가 그곳에서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검은 동굴’. 시온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도시 외곽에서 들려오는 소문 중에 가장 끔찍한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이었다. 그곳은 그림자 파편들이 가장 많이 출몰하는 곳이자, 재앙의 근원이 되는 검은 안개가 가장 짙게 깔린 지역 중 하나였다.
“검은 동굴은… 엄청 위험해. 거기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어.” 시온의 목소리에 경고의 어조가 담겼다.
윤슬은 고개를 숙였다. “알아요… 하지만 아버지가… 아버지가 거기에 계실지도 모르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시온은 윤슬의 어깨를 다시 한번 토닥였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어린 소녀의 희망을 꺾어야 할까? 아니면 이 위험천만한 길을 함께 가야 할까?
그녀는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신의 오랜 원칙을 깨뜨려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 살아남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었지만, 이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모닥불의 불꽃이 어둠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시온은 철근 조각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눈빛은 결의로 빛났다.
“좋아. 그럼 내일 아침, 검은 동굴로 향한다.”
윤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폐허 속에서 피어난 한 떨기 작은 꽃처럼 아름답고, 동시에 위태로웠다.
시온은 알고 있었다. 이 여정이 얼마나 험난할지.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작은 소녀의 희망이, 어쩌면 이 황폐해진 세상에서 그녀 자신도 잊고 있던 희망의 불씨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SCENE 5**
**외부. 검은 동굴 입구. 낮.**
다음 날 아침, 시온과 윤슬은 ‘검은 동굴’의 입구에 도착했다. 동굴 입구는 거대한 바위와 뒤엉킨 넝쿨로 뒤덮여 있었고, 마치 거대한 괴물의 입처럼 보였다. 동굴 안에서는 짙은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 안개 속에서는 불길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SFX: (동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안개 소리, 낮은 으르렁거리는 소리)**
시온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눈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동굴 입구 주변의 나무들은 검게 변색되어 있었고, 땅바닥에는 찢겨진 옷가지와 알 수 없는 뼈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들이었다.
“시온 언니… 정말 여기로 들어가야 해요?” 윤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손은 시온의 옷자락을 꽉 잡고 있었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통신기는 검은 동굴 안에서 나오는 신호가 점차 강해지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래. 여기에 뭔가 있어. 네 아버지의 단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재앙의 원인일 수도 있어. 하지만 들어가야만 알 수 있어.”
그녀는 배낭에서 오래된 랜턴을 꺼냈다. 기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희미하게 빛을 발할 뿐이었지만, 없는 것보다 나았다. 그녀는 철근 조각을 든 손에 다시 한번 힘을 주었다.
“절대 내 곁을 떠나지 마. 어떤 소리가 들려도, 어떤 그림자가 보여도,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내 뒤에 꼭 붙어있어야 해. 알았지?”
윤슬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 속에서도 희미한 결의가 비쳤다.
시온은 랜턴을 들고 먼저 동굴 안으로 발을 디뎠다. 차가운 공기와 함께 짙은 검은 안개가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안개는 시야를 거의 가려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폐허의 바깥에서와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어둠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SFX: (동굴 안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물방울 소리, 알 수 없는 삐걱거리는 소리)**
“천천히 움직여.” 시온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동굴 안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바닥은 울퉁불퉁한 바위와 끈적한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검은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동굴 내부를 떠다녔다.
그때, 윤슬의 통신기가 갑자기 강하게 울렸다.
**SFX: (통신기에서 크게 울리는 신호음! 지지직 거리는 노이즈)**
“신호가… 신호가 엄청 강해졌어요!” 윤슬이 놀라 외쳤다.
시온은 재빨리 통신기의 액정을 확인했다. 지도의 녹색 점은 이제 바로 그들 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녹색 점 옆에는 작은 글씨로 ‘연구 시설 지하’라고 쓰여 있었다.
“연구 시설… 지하?” 시온이 중얼거렸다. 윤슬의 아버지가 말했던 ‘검은 동굴’은 사실 오래된 연구 시설의 비밀 통로였던 것이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SFX: (쿠아아앙! 하는 괴성, 바닥이 진동하는 소리)**
그것은 그림자 파편 중에서도 유난히 거대하고 흉측한 존재였다. 온몸이 뾰족한 비늘로 뒤덮여 있었고, 눈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숯덩이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 괴물은 시온과 윤슬을 향해 돌진했다.
“젠장!”
시온은 윤슬을 뒤로 밀치며 철근 조각을 높이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순간적으로 섬광처럼 번뜩였다. 이곳은 그녀의 생존 본능이 시험받는 최전선이었다. 그녀는 이 작은 소녀와 함께, 이 거대한 어둠 속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새로운 목적이었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아 떠나는 두 생존자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장면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