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미나는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른 아침, 작은 가게 문을 열었다. ‘별의 조각’이라는 이름처럼, 가게 안은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가득했다. 햇살이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면, 진열된 색색의 펜과 스티커, 그리고 그녀가 직접 디자인한 따스한 감성의 엽서들이 보석처럼 빛났다. 미나는 늘 이 순간이 좋았다. 세상의 온갖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이곳만큼은 자신만의 작은 우주 같았으니까.
“좋은 아침, 별의 조각.”
그녀는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직접 볶은 원두로 커피를 내렸다. 고소한 커피 향이 가게 안을 채우고, 오래된 오디오에서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이곳은 미나에게 단순한 작업실이나 상점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마음을 담은 종이 한 장으로 세상에 작은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처음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막막함에 몇 번이고 포기할까 싶었지만, 그녀의 손에서 피어나는 작은 그림들과 글씨들을 보고 환하게 웃어주던 손님들의 얼굴이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특히 그 아이의 얼굴이 그랬다. 이제는 어른이 된 그 얼굴이.
“미나야, 또 새벽부터 깨어 있었니?”
오후 두 시쯤,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박지수였다. 지수는 미나의 학창 시절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다. 같은 동네에서 자라 같은 학교를 다니며, 미나의 엉뚱한 상상력과 지수의 현실적인 조언이 만나 많은 일들을 함께 헤쳐왔다. 미나에게 지수는 가족 그 이상이었다. 피를 나눈 형제자매보다도 깊은 유대감으로 묶인 존재.
“어? 지수 왔어? 웬일이야, 이 시간에?” 미나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미소는 언제나 따뜻했다.
“웬일은. 너한테 맡겨둔 디자인 시안, 검토하러 왔지. 안 그래도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지수는 가게 한쪽에 놓인 단골 지정석에 앉아 미나가 건넨 따뜻한 커피를 받아 들었다. 그는 미나와 달리 화려하고 도회적인 분위기를 풍겼지만, 미나의 가게에만 오면 이상하게 긴장을 풀고 편안해 보였다. 그는 미나에게 자신의 작업물에 대한 조언을 구하거나, 때로는 단순히 지쳐 쉬러 오기도 했다. 미나는 그런 지수를 위해 늘 따뜻한 차 한 잔과 진심 어린 격려를 준비해 두었다.
“아, 그거. 거의 다 됐어. 네가 말했던 방향으로 수정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래도 네가 직접 봐야지.”
미나는 작업대 위에서 꼼꼼히 정리해둔 지수의 디자인 스케치북을 그에게 건넸다. 지수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신중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그의 미간에 살짝 잡혔던 주름이 이내 스르르 풀렸다.
“역시 너뿐이야, 미나. 내 엉망진창 스케치를 이렇게 깔끔하고 매력적으로 정리하다니. 네 손을 거치면 평범한 것도 특별해져.”
“칭찬이 너무 과한 거 아니니? 다 네 아이디어가 좋아서 그런 거지.” 미나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아니, 진심이야. 너 요즘 ‘미래를 그리는 종이’ 공모전 준비 때문에 바쁘다며. 내 것까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
미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미래를 그리는 종이’는 그녀에게 꿈이자 기회였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국내 최고 권위의 디자인 공모전. 당선작은 유명 문구 회사와의 협업 기회는 물론, 엄청난 상금까지 주어졌다. 미나는 이 공모전을 위해 지난 몇 달간 밤낮으로 매달렸다. ‘별의 조각’을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신만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내일이 마감이라 오늘 최종 제출하려고. 마지막까지 수정할 부분이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어.” 미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디자인은 언제나 완벽하니까 걱정 마. 분명 좋은 결과 있을 거야.” 지수는 빙긋 웃으며 미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의 격려에 미나는 다시금 마음이 따뜻해졌다. 항상 이렇게, 힘든 순간마다 지수는 그녀 곁에 있었다. 그녀의 유일한 버팀목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지수에게 공모전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렸을 때부터, 구체적인 디자인 컨셉과 스토리텔링까지 모든 것을 공유했다. 지수라면 자신의 꿈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응원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참, 지수야. 내일 같이 저녁 먹을래? 최종 제출 기념으로 맛있는 거 먹자!” 미나는 들뜬 목소리로 제안했다.
“음… 내일은 좀 어렵겠는데.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지수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말했다. “미안하다, 미나. 나중에 내가 한턱 쏠게.”
“에이, 아쉽다. 그럼 다음에 꼭 같이 먹어줘야 해!”
“당연하지. 네가 공모전 당선되면 내가 더 큰 거 쏠게.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한번 미나의 스케치북을 들여다봤다. 미나의 공모전 최종 시안이 담긴 그것을.
“야심작이지?” 지수가 물었다.
“응, 내 모든 걸 담았어.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물론이지. 네 열정이 가득 담겼으니. 그럼 잘 제출하고, 연락할게.”
지수는 그렇게 미소를 지으며 가게 문을 나섰다. 쨍한 햇살 아래 그의 뒷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당당해 보였다.
지수가 나간 뒤에도 미나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미래를 그리는 종이’.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한 디자인은 밤하늘을 수놓는 별자리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소원을 담은 조각들’이라는 컨셉으로, 사용자가 직접 스티커와 펜으로 자신만의 별자리를 만들어 소망을 기록하는 다이어리였다. 미나는 이 아이디어가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지수의 응원 속에서 더욱 단단해졌다.
그날 저녁, 미나는 신중하게 최종 디자인 파일을 업로드하고 제출 버튼을 눌렀다. 홀가분함과 동시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벅찬 기대감이 차올랐다. ‘별의 조각’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다음 날.
미나는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며칠 밤낮없이 작업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느긋하게 브런치를 즐기고 가게 문을 열려던 찰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공모전 운영팀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마 벌써 결과가? 아니, 최소한 일주일은 걸린다고 했는데.
“여보세요?”
“서미나 씨 되십니까?”
“네, 맞습니다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딱딱하고 사무적이었다. 그녀의 가슴은 불안감으로 술렁였다.
“다름이 아니라, 서미나 씨께서 제출하신 ‘소원을 담은 조각들’이라는 작품은…”
미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다른 참가자 박지수 씨의 작품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내용과 컨셉, 심지어 디자인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완전히 동일합니다. 이에 따라 귀하의 작품은 표절로 간주되어 실격 처리되었습니다. 재심은 불가하며, 자세한 내용은 메일로 보내드렸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미나의 손에서 휴대전화가 스르륵 미끄러져 떨어졌다. 쨍하는 소리와 함께 액정에 금이 갔다.
“거짓말…”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다. 지수? 박지수?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가족 같았던 그 지수가?
어제 그녀의 스케치북을 들여다보던 지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미소. 그의 격려. 그리고 그의 눈빛.
그것은 격려가 아니었다. 탐욕과 조롱이 뒤섞인 비웃음이었다.
미나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그녀의 꿈, 그녀의 열정, 그녀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배신감, 분노, 그리고 지독한 절망.
‘별의 조각’에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섬뜩하리만큼 차갑게 느껴졌다.
미나는 천천히,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를 주워 들었다. 금이 간 액정에는 수신된 메일 알림이 선명했다.
박지수.
그 이름 세 글자가 핏빛으로 뇌리에 박혔다.
미나는 이를 악물었다. 두 눈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힐링은 끝났다.
이제, 그 모든 것을 돌려줄 시간이었다.
그녀의 세상은, 이제 더 이상 반짝이는 별의 조각이 아니었다.
차가운 칼날만이 번뜩이는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