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타임슬립 (시간여행) 독립적인 단편 소설

    지후는 천장으로 닿을 듯 쌓인 박스 더미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 코를 찌르는 먼지, 그리고 온갖 잡동사니가 뒤섞인 이곳은 할아버지 대부터 쓰던 고물 창고였다. 어머니는 “이번 주말까지 이거 다 정리 안 하면 용돈 없어!”라며 선전포고를 했지만, 맙소사, 여기를 어떻게 주말 안에 다 치운단 말인가. 그는 대충 쌓인 신문지 더미를 발로 툭툭 차며 짜증을 냈다.

    “하, 진짜.”

    투덜거리며 손에 잡히는 대로 낡은 천 조각들을 치우다, 창고 구석, 낡은 장롱 뒤편에 숨겨진 틈새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 어둡고 오래된 것이 희미하게 비쳤다. 으레 다락방에 굴러다닐 법한 유물 같은 것에 호기심이 발동한 지후는 삐걱거리는 장롱을 겨우 밀어냈다. 그 뒤에는 묘한 기운을 풍기는 작은 목함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옻칠이 벗겨지고 닳아 너덜너덜한 나무 상자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단순함 속에 범상치 않은 정교함이 숨어 있었다. 나무결을 따라 새겨진 문양들은 흡사 고대 문자와도 같았고, 손가락으로 훑으니 미세한 전율이 느껴졌다. 아무리 찾아봐도 잠금장치나 경첩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일체형으로 조각된 듯한 겉모습은 뚜껑을 열 방법조차 짐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먼지를 털어내자,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올랐다.

    “이게 대체 뭘까?”

    지후는 목함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문양들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다, 무심코 상자 한 면에 새겨진 가장 크고 복잡한 문양의 중앙을 지그시 눌렀다. 순간, ‘칭—’ 하는 작고 맑은 금속성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지후의 눈앞에서, 목함의 뚜껑이 마치 숨을 쉬듯 천천히, 아주 미세하게 틈을 벌렸다.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빛이었다. 푸른색과 황금색이 뒤섞인, 마치 살아있는 듯한 신비로운 빛. 동시에 차갑던 목함은 미지근한 온기를 띠기 시작했다.

    빛은 순식간에 강렬해지더니, 지후의 시야를 완전히 뒤덮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핑 도는 듯했고, 발아래 땅이 푹 꺼지는 듯한 아찔한 감각에 온몸이 휘청거렸다. 숨을 들이쉬는 순간, 코끝을 찌르던 곰팡이 냄새 대신 흙내음과 풀내음, 그리고 알 수 없는 향내가 뒤섞인 신선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눈을 떴을 때, 지후는 더 이상 낡은 창고에 있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드넓은 초원과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이었다. 저 멀리,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봉우리 위로 고고하게 솟아오른 거대한 건축물이 보였다. 돌로 쌓아 올린 웅장한 신전, 아니 어쩌면 궁전이었을 그곳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하고 신비로웠다. 주위에는 낯선 복식을 한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은 지후를 본체만체하며 자신들의 일에 몰두했다. 이상한 언어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후는 숨을 들이켰다. 너무나 생생한 현실감에 꿈이 아님을 직감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소리,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알 수 없는 언어로 속삭이는 사람들의 음성까지. 모든 감각이 그가 지금, 다른 시공간에 존재함을 명확히 알려주고 있었다.

    바로 그때, 신전 꼭대기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번개와 같으면서도 그보다 훨씬 부드럽고 영롱한 빛이 하늘로 솟구쳤다. 빛은 하늘에 커다란 원을 그렸고, 그 원 안에서 마치 우주를 품은 듯한 오색찬란한 무늬들이 소용돌이쳤다. 그 광경은 너무나 아름답고 동시에 너무나 위압적이었다. 지후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단순한 빛이 아님을 깨달았다. 저것은 힘이었다. 오래되고, 위대하며, 잊혀진 마법의 힘.

    “흐읍!”

    순식간에 시야가 일그러지며 모든 풍경이 사라졌다. 지후는 자신의 창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손에 들린 목함은 여전히 미세하게 틈을 벌린 채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방금 전의 경험이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몇 시간을 보낸 것만 같았다.

    “뭐… 뭐야? 방금 뭐였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먼지 쌓인 박스들, 눅눅한 공기. 하지만 그의 옷소매에는 아까 본 초원의 풀잎 같은 것이 하나 붙어 있었고, 손에서는 희미하게 흙내음이 났다. 꿈이 아니었다. 환각도 아니었다.

    지후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목함을 바라보았다. 두려움보다 더 강렬한 호기심이 그의 심장을 지배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목함을 쥐었다. 아까 눌렀던 문양의 중앙을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칭—’

    다시금 그 맑은 소리가 울렸다. 빛이 뿜어져 나오고, 그의 몸이 부유하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애썼다.

    그는 다시 그 초원에 서 있었다. 신전의 섬광은 여전히 하늘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좀 더 가까이 느껴졌다. 사람들 중 하나가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닿으려던 순간, 그 사람의 옷자락이 마치 바람에 흔들리듯 파르르 떨렸다. 물리적인 접촉은 불가능했지만, 미세한 간섭이 일어난 것이다.

    지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그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듯했다. 손끝이 저릿했고, 온몸에 활력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그 에너지를 느껴보려 했다. 마치 자신과 주변의 풍경이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망으로 연결된 듯한 감각. 그의 존재가 그 공간에 더 깊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게… 내가 본 그 마법의 힘인가?”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주변의 웅장한 에너지의 흐름에 묻혀 들리지 않았지만,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과거의 순간에 자신이 존재하고, 과거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시간여행이 아니었다. 특정 시간대의 특정 지점에 존재하는, 잊혀진 힘의 ‘원천’에 접속하는 것과 같았다.

    지후는 다시 창고로 돌아와 있었다. 이번에는 전보다 덜 어지러웠다. 그의 손에 들린 목함은 이제 완전히 열려 있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지만, 내벽에 새겨진 문양들이 여전히 미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상자가… 시간을 여는 문이자, 그 힘을 연결하는 통로였어.”

    그는 속삭였다. 단순히 과거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의 특정한 강력한 마법적 순간에 자신을 연결하고, 그 에너지를 느끼고, 어쩌면… 어쩌면 그 힘을 현대로 끌어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고대인들이 어떤 목적으로 이 상자를 만들었는지, 그들이 사용했던 그 거대한 힘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자신은 이제 그 힘의 일부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것.

    지후는 텅 빈 목함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평범한 청년의 것이 아니었다. 혼란과 두려움 속에 경이로움과 섬광 같은 깨달음이 번뜩였다. 그는 이제 잊혀진 고대의 마법과 현재를 잇는 유일한 존재가 된 것이다.

    손안의 목함은 여전히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앞으로 그의 인생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었다.

    “젠장… 어머니, 용돈은 받겠네요.”

    그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평범한 학생의 것이었으나, 그 속에는 이제 세상의 비밀을 엿본 자의 비범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 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챕터 1: 심연의 메아리**

    차가운 정적이 우주선 ‘카시오페아 호’를 감싸고 있었다. 은하의 가장자리, 인류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미지의 심연에서, 시간은 점성 높은 시럽처럼 느리게 흘렀다. 탐사 임무 432일째. 승무원들은 이미 고향 행성의 푸른 하늘과 흙냄새를 기억의 저편에 묻어둔 지 오래였다. 그들의 유일한 친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박힌 수억 개의 별들, 그리고 그 어둠을 가르는 ‘카시오페아 호’의 미약한 엔진음뿐이었다.

    함장 서지우는 지휘석에 앉아 홀로그램 스크린에 펼쳐진 성도(星圖)를 응시했다. 무수한 점과 선들이 복잡하게 얽힌 지도 위에, 그들이 지나온 궤적은 한 가닥 희미한 실처럼 가늘게 이어져 있었다. 그 실의 끝은 어디일까. 인류의 호기심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 혹은 그 너머. 수십 년 전 처음 항해를 시작했을 때의 막연한 기대감은, 이제는 무언가를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는 집념으로 변해 있었다.

    “함장님, 뭔가 이상합니다.”

    선회하던 과학 장교 이수현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녀는 두툼한 안경 너머로 홀로그램 콘솔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목소리에는 평소의 침착함 대신 미묘한 긴장감이 스며 있었다.

    서지우는 몸을 돌려 수현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이 장교?”

    “미확인 에너지 패턴이 감지되었습니다. 스캔 기록이 일치하지 않아요. 일반적인 성운이나 블랙홀에서 발생하는 파동이 아닙니다. 마치… 고대 유적에서 나오는 듯한, 아주 특이한 신호입니다.” 수현은 손을 빠르게 움직여 데이터를 증폭했다. 홀로그램 콘솔이 푸른빛으로 깜빡였다. “정확히 이 좌표에서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성도에서도 가장 깊고 어두운,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공백이었다. 인류의 지식이 닿지 않는 곳. 서지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박 선우, 항로 재설정. 해당 좌표로 이동한다.” 서지우의 명령에 조종석에 앉아 있던 박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깊은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현재 속도로 22분. 함장님, 거기는 은하계 지도가 끝나는 곳입니다. 어떠한 천체도 기록된 바가 없습니다.” 선우가 짧게 경고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탐사 임무 내내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불확실성이 섞여 있었다.

    “알아. 하지만 우린 그 경계를 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 아니겠나.” 서지우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미지의 영역으로 향하는 데 대한 두려움보다, 오랜 탐사 끝에 찾아온 새로운 발견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컸다. 그것은 마치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신화를 직접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어린아이 같은 설렘이었다.

    ‘카시오페아 호’는 방향을 틀어 미지의 심연으로 향했다. 거대한 우주선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없이 작고 외로운 한 점처럼 보였다. 22분은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스크린에 찍히는 미약한 신호는 점차 강도를 더해갔다. 단조로운 엔진음마저 심장 박동처럼 격렬하게 들려왔다.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함장님. 신호가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고 있어요.” 수현의 목소리가 갈수록 상기되었다. 그녀의 손은 콘솔 위에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에너지 파동의 진폭이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우리가 감지했던 어떤 현상과도 달라요. 이건… 우리가 아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드디어, ‘카시오페아 호’의 전면 스크린에 희미한 그림자가 포착되었다. 처음에는 흐릿한 얼룩 같았으나,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 윤곽이 선명해졌다.

    “이게… 뭐지?” 박선우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굳게 닫혔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스크린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암석 덩어리도, 광활한 성운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고도 신비로운 푸른빛을 내뿜으며, 고요히 우주를 유영하고 있었다. 그 형태는 어떤 기하학적인 도형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유려한 곡선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기묘한 조형물. 그 위압적인 존재감은 심연의 공포를 넘어선, 태고의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수현은 숨을 들이켰다. “에너지 수치가… 한도를 넘어섭니다! 함장님, 저건… 우리가 아는 물질이 아니에요. 스캔 파동이 그냥 통과해 버려요! 마치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요.”

    서지우는 자리에서 일어서 스크린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눈동자에 푸른빛이 일렁였다. 저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태고의 신비가 응축된, 우주의 심장에서 솟아난 전설 같은 존재였다. 그를 비롯한 모든 승무원의 지식과 경험, 상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무언가.

    “최대 해상도로 확대해.” 그의 목소리는 경외감과 긴장감으로 낮게 깔렸다. 이 상황에서는 어떤 명령도 의미를 잃을 것만 같았다.

    스크린에 떠오른 물체의 표면은 마치 수억 년 동안 별빛을 머금은 듯 영롱하게 빛났다. 표면에는 미세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언어도, 어떤 문명도 아닌, 순수한 에너지의 흐름을 형상화한 듯 보였다. 마치 살아있는 맥박처럼, 문양들 사이로 푸른빛이 주기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문양들은 보는 이의 영혼 깊은 곳에 닿아 알 수 없는 심연의 노래를 속삭이는 듯했다.

    “표면 온도는 절대 영도에 가깝지만, 내부 에너지 반응은 태양 핵을 능가합니다.” 수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그녀의 두 눈은 혼란과 경이로움으로 가득했다. “불가능해요. 이런 물질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리학의 모든 법칙을 거부하고 있어요.”

    “그래, 불가능한 것이 존재하고 있군.” 서지우가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문양들 사이에서 가장 빛나는 한 점에 고정되었다. 그곳에서, 마치 고대의 눈동자처럼, 기이한 황금빛이 섬광처럼 번쩍였다. 그것은 그 어떤 인간의 언어로도 형언할 수 없는, 생명의 근원과 같은 빛이었다.

    그 순간, ‘카시오페아 호’ 전체에 강력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콰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경고음이 비명을 지르고, 스크린의 영상이 일순간 지지직거렸다. 함선 내부의 조명마저 불안하게 깜빡였다.

    “함장님! 에너지 역장이 급격히 붕괴합니다! 함선 시스템이… 먹통이 되고 있어요!” 박선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어판의 모든 지표가 경고를 알리며 붉게 물들었다.

    ‘카시오페아 호’는 미지의 물체 앞에서는 한낱 장난감에 불과했다. 거대한 중력에라도 이끌린 듯, 선체가 천천히, 그러나 멈출 수 없는 기세로 그 푸른빛의 존재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함선의 뼈대가 뒤틀리는 듯한 불길한 소음이 선내에 울려 퍼졌다.

    서지우는 흔들리는 지휘석에 한 손을 짚고 균형을 잡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스크린 속, 섬광처럼 번쩍이던 황금빛에 못 박혀 있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그 황금빛은 마치 수십억 년의 침묵을 깨고 터져 나오는, 어떤 ‘의지’처럼 느껴졌다. 태고의 속삭임이자, 동시에 압도적인 부름. 그의 영혼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듯한 강력한 존재감.

    “모든 동력을 역추진에 집중시켜! 비상 탈출 프로토콜 가동 준비!” 서지우가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미 멀리 울리는 듯했다. 함선 전체가 거대한 유물에 흡수되는 굉음에 묻혔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카시오페아 호’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끌려, 푸른빛의 유물 표면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순간, 유물의 중심에서 황금빛이 거대한 폭발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우주 전체를 삼킬 듯한 거대한 불꽃이었다.

    그 빛은 어둠을 삼키고, 별들을 지우며, ‘카시오페아 호’를 집어삼켰다.

    “함장님!” 수현의 비명이 들렸지만, 이내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우주의 심연에 숨겨진 진정한 ‘신화’의 시작이었다.

  • 오컬트 호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깊고 눅진한 어둠이 깔린 망자의 숲, 그 이름만큼이나 불길한 기운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김현우는 낡고 해진 등산화로 낙엽 덮인 흙길을 밟으며 묵묵히 나아갔다. 스무 해를 훌쩍 넘긴 낡은 배낭 속에는 녹슨 삽과 손전등, 그리고 닳아빠진 고문서 사본 몇 장이 전부였다. 그는 고고학 전공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거창한 사명감을 가진 학자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이 잊어버린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호기심 많은 도시 탐험가일 뿐이었다.

    오늘은 전설 속의 ‘검은 신당’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수백 년 전, 이 근처에 살던 작은 마을이 하룻밤 새 통째로 사라졌다는 미스터리. 그리고 그 중심에 늘 검은 신당이 언급되었다. 광인들의 헛소리로 치부되던 이야기였지만, 현우의 촉은 이곳에 뭔가 있다는 것을 끈질기게 속삭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미약했고, 숲은 제 스스로의 숨소리를 집어삼킨 듯 고요했다. 공기는 습하고 무거웠다. 숲의 모든 생명이 현우를 응시하는 듯한 묘한 감각이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그는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수많은 폐가와 지하 묘지를 드나들며 단련된 강철 멘탈의 소유자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숲이 깊어질수록 불길한 기운은 점차 농도를 더했다. 썩은 흙냄새와 함께 비릿한 쇠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들었다. 그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끼 낀 거대한 바위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풍경. 그중 하나가 현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른 바위들과는 달리 표면에 정교하고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잊힌 언어로 쓰인 경고문 같기도 하고, 어떤 존재를 숭배하는 상형문자 같기도 했다.

    “젠장, 드디어…”

    현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설 속의 신당은 보통 이런 바위들을 표식 삼아 숨겨져 있었다. 그는 배낭에서 고문서 사본을 꺼내 대조했다. 희미한 선으로 그려진 지형도와 바위의 문양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불규칙하게 늘어선 바위들 사이로 좁고 음침한 길이 드러났다. 마치 숲이 스스로를 가르고 길을 내어준 듯한 모습이었다.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을까. 울창한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 숲의 가장 깊숙한 곳에, 마침내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신당.

    ‘신당’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 모습은 차라리 거대한 폐허에 가까웠다. 검은 돌로 지어진 건물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쪽이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갈라진 지붕 사이로 음습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제단이었을 법한 자리에는 검게 말라붙은 무언가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축축했으며, 역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린내가 뒤섞여 현우의 코끝을 찔렀다.

    현우는 손전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에는 먼지와 거미줄이 자욱했고, 발밑에는 무슨 동물의 뼈인지 알 수 없는 자잘한 조각들이 밟혔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침착하려 애쓰면서도, 그의 심장은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보통의 폐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어떤 ‘존재’가 이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섬뜩한 느낌이었다.

    손전등 불빛이 벽을 스치자, 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흙과 이끼로 범벅이 된 벽 한쪽에 유독 다른 색깔을 띠는 부분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으로 먼지를 털어냈다. 그 아래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돌문이 숨겨져 있었다.

    “이런 걸 숨겨놓았을 줄이야.”

    문에는 검은 바위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번에는 단순히 장식을 넘어,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는 듯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현우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본능이 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들어가서는 안 돼.*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고대 마법의 흔적이라니, 이보다 더 강력한 유혹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용기를 내어 문을 밀었다. 삐걱거리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돌문이 안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그 순간, 문 안쪽에서 차가운 공기가 확 하고 밀려 나왔다. 마치 깊은 무덤의 숨결 같았다.

    돌문 뒤에는 좁고 가파른 계단이 지하로 이어져 있었다. 현우는 손전등 불빛을 의지해 한 걸음씩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가워지고, 퀴퀴한 흙냄새와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쇠 냄새가 짙어졌다. 곧 발밑이 평평해졌고, 그는 마침내 마지막 공간에 도달했다.

    그곳은 신당 아래 깊이 파묻힌, 완전히 밀폐된 지하 공간이었다. 좁은 방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검은 돌판이 바닥에 박혀 있었다. 돌판 위에는 방금 본 문양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복잡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눈알이 없는 거대한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몸통을 따라 기괴한 문자들이 뱀처럼 얽혀 있었다.

    그리고 그 돌판의 한가운데, 작게 파인 홈에 놓인 것이 있었다.

    붉은 보석이었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투명하고 붉은 보석. 하지만 그 빛깔은 마치 생생한 피를 응고시켜 놓은 듯 불길하고 강렬했다. 주변의 어둠을 완전히 집어삼킨 듯, 보석 그 자체에서 어둠을 내뿜는 것 같았다. 보석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진동이 현우의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다.

    “이게… 설마.”

    현우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보석에 닿으려는 순간, 섬광이 터졌다.

    *휘이이잉—!*

    귀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붉은 보석에서 강력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빛은 그의 눈꺼풀을 뚫고 들어와 뇌를 직접 자극하는 듯했다.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폭풍처럼 스쳐 지나갔다. 끔찍한 형상들이 춤을 추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이 메아리쳤다. 마치 수억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순간 같았다.

    *콰르르릉—!*

    방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천장에서 흙덩이들이 쏟아져 내리고, 벽에 박힌 돌들이 부스러져 떨어졌다. 현우는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보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은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그리고 그 깜빡임과 함께, 현우의 몸속으로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어 왔다.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그의 뼈 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듯한, 존재해서는 안 될 불길한 기운이었다.

    그의 눈앞에 희미한 잔상이 어른거렸다. 검은 돌판에 새겨진 짐승의 형상이 꿈틀거리는 듯했고, 그 짐승의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붉은 보석이 섬뜩하게 빛났다.

    “크윽…!”

    현우는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성이 비명을 질렀다. *이것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시야는 계속해서 비틀렸다. 붉은 빛이 그의 망막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계단을 겨우 올라 신당 안으로 돌아왔을 때, 바깥은 이미 깊은 밤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둠은 이상하게도 짙었다. 달빛도, 별빛도 완전히 사라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칠흑 같은 어둠. 숲은 이전보다 더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나무들은 그림자처럼 서 있었고, 그 사이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현우는 정신없이 숲을 가로질러 달렸다. 돌문은 닫히지 않았고, 붉은 보석에서 뿜어져 나오던 진동이 그의 발밑을 따라오는 듯했다. 숲을 빠져나오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숲은 끝없이 이어지는 미로처럼 느껴졌다. 그의 등 뒤에서 차가운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간신히 숲을 벗어나 인가 불빛이 보이는 도로에 도착했을 때, 현우는 온몸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쓰러졌다.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고, 폐는 찢어질 듯 아팠다. 숨을 고르며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더 이상 숲이 아니었다.

    도로 위에 선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주변의 건물들은 그림자처럼 일렁였고, 아스팔트 바닥에서는 검은 액체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현우의 발을 감싸는 듯했다. 공기 중에는 여전히 그 지하 공간에서 맡았던 비릿한 쇠 냄새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배낭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두 눈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휴대폰 화면이 갑자기 지직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화면에 기괴한 문양들이 스쳐 지나갔다. 검은 신당 지하에서 보았던 그 붉은 보석의 기운이, 마치 자신의 몸속에 뿌리를 내린 듯, 혹은 세상 모든 것에 스며든 듯 느껴졌다.

    현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희미하게 깜빡이던 가로등 불빛이 순간 완전히 꺼졌다. 이어서 그 불빛은 다시 켜졌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붉은색이었다. 심장이 뛰는 듯한, 불길한 붉은색. 그의 눈에만 보이는 듯한 그 붉은 빛은 주변의 모든 사물을 섬뜩하게 물들였다.

    *이것이… 따라온 건가?*

    그는 몸을 떨었다. 땀방울이 식은땀으로 변해 차갑게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지하 공간에서 시작된 그 차가운 기운이, 이제는 그의 몸속에서부터 세상을 잠식하는 듯했다. 그의 어깨 위로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현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깨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보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붉은 섬광. 그것은 그의 망막에 새겨진 잔상이 아니었다. 바로 눈앞의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붉은 빛의 깜빡임과 동시에, 현우의 귓가에 고대인의 속삭임이 다시 들려왔다.

    — *마침내… 깨어났노라…*

    목소리는 그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차갑고 깊은, 수억 년의 시간을 담고 있는 듯한 목소리. 그것은 현우의 의식 깊은 곳을 파고들어, 그의 존재를 뒤흔들었다.

    검은 신당에서 발견한 고대의 힘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였고, 지금, 그의 몸속에, 그리고 그의 주변 세계에, 끔찍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현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현실이 서서히 비틀리고 있었다.

  • 오컬트 호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밤이었다. 아니, 밤이라기보다는 영원히 해가 뜨지 않을 듯한, 거대한 그림자가 세상을 집어삼킨 듯한 어둠이었다. 희미하게 떠 있는 달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마저도 찢어진 천 조각처럼 너덜거렸다. 바람은 죽은 자들의 비명처럼 스산하게 울부짖으며, 고대의 기와 조각들을 휘감아 날렸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무진각(武盡閣)’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이름처럼 모든 무(武)가 끝나는 곳, 혹은 모든 무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상반된 전설이 깃든 폐허.

    나는 강태한. 강호에 이름을 날린 적 없는 일개 무인이지만, 내 손에 쥐어진 검만큼은 맹세코 그 어떤 고수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 무진각에 발을 들인 순간, 나의 오만함은 마치 썩은 나뭇잎처럼 바스라지는 것을 느꼈다. 공기 속에는 곰팡이 냄새와 피 냄새,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역겨운 기운이 뒤섞여 있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함은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의 그림자였다.

    “드디어… 모였군.”

    낮고 굵은 목소리가 어둠을 찢고 울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횃불이 일렁였고, 그 빛 아래 거대한 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단 위에는 녹슨 칼날들이 꽂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검붉은 마른 피가 얼룩져 있었다. 그 앞에는 흑포를 두른 노인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깊은 주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텅 빈 눈동자는 별빛 하나 없는 심연 같았다.

    노인의 옆에는 수십 명의 무인들이 침묵 속에 서 있었다. 모두 나와 같은, 그러나 나와는 다른 기운을 뿜어내는 자들이었다. 어떤 자는 전신에 기이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어떤 자는 눈동자가 짐승처럼 번뜩였다. 또 어떤 자는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핏기가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탐욕과 광기로 번들거렸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두려움도 담겨 있었다.

    나는 이곳에 왜 왔는가. 내가 강호의 떠도는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천하의 운명을 건 무림 고수들의 무술 대회’는 그저 영웅호걸들의 패기 넘치는 경연쯤으로 생각했다. 승자에게는 천하를 뒤흔들 절대 무공의 비급이, 패자에게는 영원한 명예가 주어지는 그런 무대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명예도, 비급도 아닌,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는 지옥의 입구였다.

    “칠야무결(七夜武決).” 노인의 목소리는 웅장하고 섬뜩했다. “일곱 밤 동안, 이 무진각에서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싸워라.”

    내 심장이 철렁했다. 최후의 1인? 그 말은 곧,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죽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단순한 무술 대회가 아니었다. 이건 학살이었다.

    “승자에게는 세상의 혼돈을 잠재울 힘이 주어질 것이며,” 노인은 천천히 팔을 들어 어둠 속을 가리켰다. “패자에게는… 영원한 속죄만이 있을 것이다.”

    속죄? 무슨 속죄?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때, 흑포를 두른 노인의 손끝에서 검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 기운은 이내 거대한 그림자의 손으로 변하여 무진각의 천장을 꿰뚫었다. 하늘에서 핏빛 달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며, 그 아래 서 있던 무인들의 몸에 섬뜩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첫 번째 밤의 시작이다.” 노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진각의 사방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비명 소리와 함께, 나를 향해 달려드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팔다리는 비정상적으로 길었고,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입에서는 썩은 내를 풍기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크아악!”

    녀석은 한 손에 녹슨 철퇴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허리에 찬 검에 손을 뻗었다. 검집을 벗어난 서늘한 쇠붙이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놈의 철퇴가 내 머리를 강타하기 직전, 나는 몸을 숙여 피했다. 퍽! 뒤이어 돌기둥이 박살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이건 무인이 아니다. 괴물이다.

    나는 검을 휘둘렀다. 내 검술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오랜 시간 피와 땀으로 연마한 정통의 검술이었다. 녀석의 팔을 노리고 베었지만, 칼날은 마치 쇠붙이를 베는 듯한 둔탁한 소리를 내며 튕겨나갔다. 살점이 아닌, 딱딱한 무언가를 베어낸 감촉.

    “젠장!”

    녀석의 팔에는 뼈가 뒤틀린 듯한 기괴한 형상이 드러났다. 피부는 검게 변색되어 있었고, 군데군데는 마치 부식된 금속처럼 반질거렸다. 분명 처음 봤을 때는 평범한 인간의 팔처럼 보였다. 대체 무슨 짓을 당한 거지?

    그때였다. 내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섬뜩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돌아볼 틈도 없이, 나는 옆으로 몸을 날렸다. 스윽! 날카로운 칼날이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새로운 습격자였다. 이 자 역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그의 눈이었다. 두 눈동자가 각기 다른 방향을 응시하며 흔들리고 있었는데, 마치 두 개의 독립된 의지가 그 안에 갇혀 발버둥 치는 것 같았다. 그는 쇠사슬에 묶인 커다란 식칼을 휘두르며 나를 노려보았다.

    두 명. 이들은 서로에게는 관심도 없고, 오직 나만을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무공이 아니었다. 이 기괴한 힘은 대체…

    “흐흐… 흐흐흐…”

    뒤틀린 얼굴의 사내가 섬뜩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의 목소리는 찢어진 종잇장처럼 갈라져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식칼이 핏빛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오랜만에… 인간의 온기다…”

    그의 눈은 나를 탐하는 육식 동물의 그것과 같았다. 온기? 온기라니. 녀석은 나를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허기를 채울 먹이로 보고 있었다. 이 대회는 무림 고수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이건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에 던져진 사냥감들의 발악이었다.

    나는 검을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이 지옥 같은 밤을 버텨내야 했다.

    내 검은 오직 생존만을 위해 빛나리라.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가운 도시의 밤공기가 창틈으로 스며들어왔다. 지아는 담요를 목까지 끌어당기고 소파에 반쯤 파묻혀 태블릿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 속 캐릭터들이 발랄한 목소리로 깔깔거렸지만, 지아의 머릿속은 온통 저녁 메뉴 고민으로 가득했다. 시계는 이미 아홉 시를 훌쩍 넘긴 시간. 배는 고픈데, 뭘 해 먹을 기력조차 없었다.

    “아, 귀찮아. 그냥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주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찬장에서 라면 봉지를 꺼내고, 냄비에 물을 받았다. 물이 끓는 동안 식탁에 앉아 태블릿을 다시 집어 들었다.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배경음악이 텅 빈 거실을 채웠다.

    뽀글뽀글, 냄비 속 물이 끓기 시작했다. 라면을 넣고, 스프를 탈탈 털어 넣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냄비를 들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뜨거울까 조심하며 쟁반 위에 냄비를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스윽.

    쟁반 위, 냄비가 놓인 라면 받침이 아주 미세하게 옆으로 움직이는 것을 지아는 똑똑히 보았다. 아주 작고 느린 움직임. 눈을 비볐다. 잘못 봤나? 착각이었겠지.

    “하마터면 쏟을 뻔했네.”

    별 생각 없이 젓가락을 들어 면을 휘저었다. 호호 불어 한 젓가락 입에 넣는 순간, 이번에는 쨍그랑! 젓가락 한 짝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악! 이런!”

    갓 끓인 라면 국물이 바닥에 튀었다. 지아는 이마를 짚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덤벙거리지? 피곤해서 그런가. 대충 바닥을 닦고 새 젓가락을 꺼내왔다. 그날 밤은 그렇게, 이상하리만치 모든 것이 어설픈 밤으로 지나갔다.

    ***

    다음 날 아침, 지아는 상쾌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간밤의 일들은 그저 피곤함에 비롯된 해프닝으로 치부되었다. 따뜻한 차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음, 오늘은 무슨 차를 마실까.”

    찬장을 열었다. 늘 똑같은 자리에 있어야 할, 아끼는 토끼 그림 머그컵이 보이지 않았다. 지아는 찬장을 구석구석 살폈다. 없었다.

    “어디 갔지? 어젯밤에 설거지 다 해놨는데.”

    싱크대 주변을 뒤지고, 건조대도 확인했지만 흔적조차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실 테이블 위도 살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평소 잘 쓰지 않는 컵을 꺼내들었다. 괜히 아침부터 기분이 찝찝했다.

    차를 마시기 위해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는 순간이었다. 덜컹, 냉장고 문이 열리고 그녀의 시선은 한 지점에서 멈췄다.

    토끼 그림 머그컵.
    그녀의 아끼는 컵이, 냉장고 야채 칸 옆, 찬 우유팩들 사이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뭐?”

    지아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리고 다시 컵을 보았다. 분명 거기 있었다. 빳빳한 토끼 귀가 살짝 얼어붙은 우유팩 옆에서 시니컬하게 솟아 있었다. 그녀는 컵을 집어 들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냥 상온의 컵이었다. 하지만 그 위치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내가… 술에 취해 냉장고에 넣어뒀나? 어제 술 한 방울도 안 마셨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하지만 컵이 돌아왔으니 됐다. 그녀는 애써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다.

    ***

    그날 저녁, 지아는 서재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은은한 스탠드 불빛 아래,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고요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책에 집중하던 지아는 문득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액자. 그녀의 어린 시절 사진이 담긴 액자가, 아주 천천히, 왼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지아는 숨을 멈췄다. 낡은 원목 액자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정지된 시간 속에서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똑바로 제자리를 찾았다.

    “…바람인가?”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에어컨도 꺼져 있었다. 선풍기도 없었다. 지아는 손을 뻗어 액자를 만져보았다. 굳건하게 제자리에 있었다. 흔들림도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제의 라면 받침, 사라진 머그컵, 그리고 지금 이 액자.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명확한 ‘움직임’들이었다.

    “혹시… 지진?”

    아무리 봐도 지진일 리 없었다. 다른 물건들은 모두 고요했다.
    불현듯, 등골이 서늘해졌다. 텅 빈 아파트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무섭게 느껴졌다.

    그날 밤, 지아는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창밖 도시의 불빛들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모든 소리가 예민하게 들렸다. 삐걱거리는 마루 소리, 위층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진동,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까지.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

    며칠 후, 지아는 점점 더 예민해졌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거실 테이블 위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 하나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거나,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동안 수건이 갑자기 세면대 아래로 떨어지는 일은 이제 애교 수준이었다.

    가장 지아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그녀의 열쇠였다. 출근을 위해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분명 어젯밤에 현관 신발장 위에 올려두었던 열쇠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아, 진짜! 또 시작이야?”

    지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파트가 넓은 것도 아닌데, 매번 물건들이 사라졌다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곤 했다. 이젠 마치 누군가 자신과 숨바꼭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열쇠! 지각한다 말이야!”

    거실을 헤집고, 침실을 뒤지고, 주방까지 샅샅이 찾아보았다. 그러다 문득, 샤워실 쪽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촤아악, 물을 가득 머금은 샤워기 헤드에, 그녀의 자동차 열쇠와 집 열쇠가 사이좋게 매달려 있었다. 방울방울 물방울까지 맺힌 채로.

    지아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농담… 하니?”

    그 순간, 샤워기 헤드에 걸려있던 열쇠가,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살짝 흔들렸다.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너, 누구야?”

    지아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무서웠다. 처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더 이상 피곤함이나 우연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파트에, 지아 혼자 사는 이 공간에, 무언가 다른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퇴근 후, 지아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젠 혼잣말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오늘은 또 어떤 사고를 칠 건지…”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공포보다는 이젠 어이없음과 알 수 없는 흥미가 뒤섞인 감정이었다.
    식탁에 봉투를 내려놓고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향긋한 커피 냄새가 주방을 채웠다. 습관처럼 설탕을 넣으려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지아가 숟가락을 잡고 있는데, 손끝에서 미묘한 당겨짐이 느껴졌다. 아주 약하게,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치듯 숟가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지아는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숟가락을 고정하려 했다. 하지만 그 당겨짐은 계속되었다.

    “뭐야… 너니?”

    지아는 허공에 대고 속삭였다. 숟가락은 여전히 미세하게 저항하는 듯 흔들렸다. 지아가 손에 힘을 주자, 숟가락은 순간적으로 팽팽해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서로가 숟가락을 잡고 있는 듯한 기분.

    그리고 이내, 그 미묘한 힘이 스르륵 사라졌다. 숟가락은 다시 평범한 금속 조각으로 돌아왔다.

    지아는 멍하니 숟가락을 바라보았다.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 그리고 허공.

    그때였다. 맑고 고운, 작은 종소리가 띠링- 하고 울렸다. 마치 누군가 아주 작은 유리 종을 흔든 것 같은 소리였다. 거실 어디선가, 아주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늑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그녀의 아파트.
    고요했다.

    그녀는 손에 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두렵고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아주 신비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알 수 없는 존재는, 해코지를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음, 알겠어.”

    지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알았다고. 이 작은 장난꾸러기야. 그럼, 다음엔 또 뭘 할래?”

    텅 빈 거실을 향해,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창밖은 여전히 도시의 밤으로 가득했다.
    지아의 아파트에 드리워진, 기묘하고도 따스한 미스터리 속에서.

  • 좀비 아포칼립스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잿빛 하늘은 핏물이라도 들이부은 듯 불그스름했다. 무너진 빌딩의 뼈대 사이로 스며드는 삭막한 바람은 먼지와 썩은 내를 실어 날랐다. 강우는 낡은 소총의 개머리판을 어깨에 단단히 붙인 채, 잔해로 뒤덮인 골목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세 명의 그림자 역시 숨소리조차 죽이며 발소리를 감췄다.

    “좌측 건물 3층, 조심해. 거미줄이야.”
    강우의 귓속말에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미줄’은 이 폐허 도시에 널린 망자들의 둥지를 일컫는 은어였다. 주로 높고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가 인기척이 들리면 미친 듯이 달려드는 놈들.

    “지연, 후방 시야 확보. 민준, 선두에서 장애물 제거.”
    강우의 지시에 따라 날카로운 눈빛의 지연이 주변을 경계했고, 건장한 체격의 민준이 낡은 철근을 조심스럽게 걷어내며 길을 텄다. 그들의 목적지는 붕괴된 제국 수도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구식 보급창고였다. 제국 병사들이 대부분의 물자를 긁어갔지만, 미처 손대지 못한 구석진 창고에는 아직 쓸 만한 보급품이 남아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그 소문은 그들에게는 죽음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 희망이었다.

    갑자기 민준의 발이 멈췄다. 그는 손바닥으로 땅을 가리켰다. 흙먼지 위에 선명하게 찍힌 군화 자국. 제국의 문장이 희미하게 새겨진, 아직 마르지 않은 흙.

    “젠장, 제국 놈들이 벌써 여기까지 왔다고?” 민준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섞였다.
    “아니, 오히려 우리보다 먼저 침투한 건지, 아니면….” 강우는 말을 흐렸다. 제국 병사들은 망자들을 방패삼아 최전선에 평민들을 내세우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이 여기에도 그런 꼼수를 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목표는 보급창고다. 만약 제국 병사들과 마주치면, 교전은 최소화하고 우회해서 빠져나온다. 알겠나?”
    셋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허가 된 거리를 한참 더 나아가자, 목적지인 보급창고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철골 구조물은 세월의 풍파와 대재앙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창문은 깨져 있었고, 녹슨 셔터 문은 반쯤 열린 채 거친 내부를 드러냈다.

    “너무 조용하잖아.” 지연이 속삭였다.
    보급창고는 항상 망자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굶주린 시체들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소리, 서로를 긁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라도 들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죽은 듯 고요했다. 그 정적이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강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희망은 고통을 상쇄할 만큼 강력한 유혹이었다. 그는 손짓으로 앞으로 나아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셋은 각자의 소총을 겨눈 채 조심스럽게 셔터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내부는 예상대로 어두컴컴했다. 먼지 낀 공기가 코를 찔렀고, 희미한 빛줄기가 천장의 구멍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바닥을 비췄다. 텅 빈 선반과 뒤집힌 파레트들이 창고의 황량함을 더했다.

    “저기 봐!” 민준이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낡은 나무 상자 더미 뒤에, 제국의 보급품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아직 봉인도 뜯지 않은 새것들. 눈앞의 광경에 순간 환호성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강우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이상하다… 너무 쉽게 발견했어.”
    강우가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 순간, 천장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망자 하나가 툭 떨어졌다. 이어진 연쇄 반응처럼, 사방의 어둠 속에서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의 망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천장, 벽, 바닥 어디에든 숨어 있었던 것처럼 일제히 강우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망자 매복이다! 제국 놈들이 놈들을 여기에 가둬두고 미끼로 썼어!” 지연이 외쳤다. 그녀의 소총에서 불을 뿜으며 가장 가까이 달려드는 망자의 머리를 정확히 맞췄다.
    민준도 소총을 난사하며 강우를 엄호했다. “너무 많아요! 이건 함정이에요!”
    강우는 망자들의 파도 속에서 제국 병사들의 군화 자국을 다시 떠올렸다. 그들은 망자를 미끼로 쓰고, 그 미끼에 걸려든 평민들을 기다렸던 것이다. 망자들은 일종의 경보 장치이자, 제국 군대가 손쉽게 처리할 먹잇감을 몰아넣는 사냥개였던 셈이다.

    “젠장! 일단 빠져나가야 해! 민준, 후퇴 경로 확보! 지연, 엄호 사격!”
    강우는 외치며 망자들 사이를 헤집었다. 하지만 망자들의 숫자는 압도적이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시체 더미에 그들은 점점 포위당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창고의 가장 안쪽, 제국의 보급품이 쌓여 있던 상자 더미 뒤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피융-!’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강우의 어깨를 스쳐 지나가는 뭔가에 그가 움찔했다.

    “제국 병사들이야!” 지연이 이를 갈았다.
    망자들 뒤에서 제국의 병사들이 라이플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망자들을 직접적으로 쏘지는 않고, 강우 일행에게만 정확히 조준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망자들은 그들에게 방패나 다름없었다.

    “개자식들! 이런 식으로 평민들을 사냥하다니!” 민준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강우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망자들의 물결이 그들을 삼키기 직전이었다. 그는 망자들이 달려드는 틈을 타서 보급품 상자 쪽으로 몸을 날렸다. 최소한 그들이 노린 보급품 중 일부라도 가져가야 했다.

    “지연, 민준! 상자를 최대한 챙겨서 서쪽 출구로!”
    강우는 망자들의 목을 잡고 발로 차 넘어뜨리며 간신히 보급품 상자 앞에 도달했다. 크고 튼튼한 전투용 배낭을 재빨리 펼쳐 보이는 대로 손에 잡히는 통조림과 구급약품을 쓸어 담았다. 제국 병사들의 총탄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망자들을 피해 몸을 웅크리고 있던 제국 병사 하나가 강우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소총을 들고 있었지만, 정작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작은 장치에 무언가를 연결하고 있었다. 기이한 금속성 물체. 그리고 그 물체에 연결된 가느다란 선은 창고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강우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것은 단순한 함정이 아니었다.
    그 순간, 제국 병사의 손에 들린 장치에서 번쩍이는 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창고 가장 안쪽에서 섬뜩한 굉음과 함께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이 시작됐다.

    “빌어먹을… 폭탄이다!” 강우가 절규했다. “전부 빠져나가!”

    그러나 이미 늦었다.
    창고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거대한 폭발이 터져 나왔다. 맹렬한 불길이 창고 전체를 집어삼키며, 쇠락한 건물마저 통째로 무너뜨릴 기세였다. 제국 병사들이 설치한 폭탄은 단순한 함정이 아니라, 평민들을 섬멸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거대한 파괴 공작이었던 것이다. 망자들조차 그 폭발의 희생양이 되었다.

    강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려 배낭을 감쌌다. 그의 눈에, 폭발하는 화염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망자들이었다. 제국 병사들이 일부러 망자들을 보급창고 안으로 몰아넣고, 평민들이 들어오면 같이 폭살시키려던 것이다.

    제국은 그저 멀리서 폭정을 일삼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의 모든 고통과 죽음이 자신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망자들조차 그들의 전쟁 도구에 불과했다.

    “이 미친 개자식들…!”
    강우는 분노에 휩싸였다. 이젠 도망칠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이 싸움은 단순히 생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이 거대한 제국의 악행을 증명하는 산증인이었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 속에서, 강우는 자신의 소총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폭발의 충격파가 그를 뒤덮기 직전, 그는 결심했다. 이 제국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무너지는 것을 반드시 지켜볼 것이라고. 설령, 그 대가가 자신의 목숨이라 할지라도.

    화염과 먼지, 그리고 무너지는 철골 잔해 속에서 강우의 시야는 점차 흐려졌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전례 없는 격렬한 분노와 함께 뛰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란의 불씨였다.
    그리고 그 불씨는, 제국이 망자들의 시체로 쌓아 올린 이 폐허 속에서 더욱 뜨겁게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 크툴루 신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검은 우산을 든 남자가 회색빛 파도를 가로질러 나아가는 보트 위에서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멀리 수평선 위로 희미하게 보이는 섬은 먹물 같은 구름에 가려져 윤곽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색이 씻겨 내려간 듯한 풍경 속에서, 남자의 창백한 얼굴과 깊은 눈동자만이 유일한 생명력을 띠고 있었다.

    윤설.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와 함께 일해본 이들은 ‘천재’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평범하게 들린다고 속삭였다. 그의 사고방식은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그는 논리를 넘어선 곳에 숨겨진 규칙을 꿰뚫어 보았고, 평범한 이들이 ‘불가능’이라고 단정 짓는 현상 속에서 기이한 가능성을 찾아냈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최후의 수단’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경찰이 손을 놓은 사건, 과학 수사가 한계에 부딪힌 미궁 속의 살인. 그런 것들이 그의 전유물이었다.

    “이번 건은… 정말이지, 미치겠더군요.”

    경감 나강훈이 낡은 야전 점퍼를 여미며 불안한 시선을 섬 쪽으로 던졌다. 뱃멀미 때문인지 얼굴이 파리했다. 그는 꽤나 노련한 베테랑 형사였지만, 이번 사건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진 듯했다.

    “밀실 살인, 그것도 절대적인 밀실입니다.” 나강훈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창문은 모두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고, 현관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부에서 잠금쇠가 잠겨 있었죠. 어떤 외부 침입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방문까지 안에서 걸쇠로 잠겨 있었습니다. 문은 오직 열쇠로만 열 수 있었고, 열쇠는… 피해자의 시신 옆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윤설은 아무 말 없이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검은 우산은 마치 그의 그림자처럼 굳건히 서 있었다.

    “사건 현장은 외딴섬에 있는 낡은 저택입니다. 피해자는 ‘기묘한 현실 너머의 진실을 연구하는 자’라고 자칭하던 은둔 학자, 서인하 교수였습니다. 시신은 서재에서 발견되었고요.”

    윤설은 여전히 침묵했다. 나강훈은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시신은… 끔찍했습니다. 목이 꺾여 있었고, 온몸에 알 수 없는 멍자국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입은 귀 밑까지 찢어져 있었죠. 그런데 말입니다, 윤설 씨. 정작 방 안에는 그 어떤 핏자국도 없었습니다. 시신의 상처에서 피 한 방울도 흐르지 않은 듯 보였어요. 마치 피가…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윤설의 닫혀 있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배는 거친 파도를 헤치고 마침내 섬의 작고 낡은 선착장에 닿았다. 녹슨 쇠사슬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배를 묶는 동안,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섬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거대한 나무들이 덩굴에 휘감긴 채 비틀린 형태로 하늘로 솟아 있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저택은 마치 저승의 문처럼 음침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저택 이름이… ‘망각의 서고’라고 불렸답니다.” 나강훈이 중얼거렸다. “섬 주민들은 예전부터 저택에 악령이 깃들어 있다고 수군거렸죠. 서 교수가 섬에 온 뒤로는 더 심해졌고요. 밤마다 저택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린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

    윤설은 우산을 접지도 않은 채, 그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저택을 응시했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은 비릿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습한 기운을 실어 날랐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죽음의 냄새와도 같았다.

    저택으로 향하는 길은 무성한 잡초와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낡은 돌계단은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있었고, 창문은 두꺼운 나무판으로 가려져 있었다. 마치 세상과의 단절을 염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경찰 통제선이 쳐진 저택의 현관문 앞에 다다르자, 몇몇 수사관들이 초조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피로와 함께 해답을 찾지 못하는 절망감이 깃들어 있었다.

    “윤설 씨가 오셨습니다.” 나강훈의 말에 수사관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시선 속에는 기대와 함께 깊은 의구심이 섞여 있었다. 이 난해한 사건을 과연 이 젊은 남자가 해결할 수 있을까?

    윤설은 아무런 인사도 없이 낡은 현관문을 응시했다. 거칠게 긁힌 자국들이 문 전체를 뒤덮고 있었지만, 안쪽에서 잠금쇠가 채워진 흔적은 명확했다. 어떤 억지스러운 침입의 흔적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내부는 더욱 침침하고 습했다. 공기 중에는 곰팡이 냄새와 함께 미묘하게 코를 찌르는 역한 향이 섞여 있었다. 썩어가는 가죽 냄새 같기도, 아니면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먼지 냄새 같기도 했다. 그러나 윤설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선 다른 무언가를 감지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2층으로 향했다. 나강훈이 뒤를 따랐다.

    “피해자의 서재입니다.”

    나강훈이 손짓한 곳에는 낡고 육중한 나무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고리에는 붉은색 봉인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그 옆에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었다. 윤설은 멈춰 서서 그 머리카락을 잠시 응시했다. 검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흰색 머리카락이 몇 가닥 섞여 있었다.

    “이 문도 안에서 걸쇠가 잠겨 있었습니다. 저희가 강제로 문을 열었을 때, 안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서인하 교수의 시신은… 서재 중앙에 있는 낡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마치… 제물처럼요.”

    윤설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며 봉인된 문고리를 손으로 감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그는 문고리에 미세하게 달라붙어 있는 어떤 점액질 같은 것을 느꼈다. 투명하고 끈적이는, 기분 나쁜 물질.

    “…안에서 걸쇠가 잠겨 있었다고요.” 윤설이 나직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외부에서 어떤 물리적인 압력도 가해지지 않았고, 안에서는 잠금쇠가 채워진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은 열렸습니다.”

    “강제로 열었으니까요!” 나강훈이 답답한 듯 말했다. “소방대원들이 특수 장비로 문을 부쉈습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잠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모든 게 그대로였습니다. 밀실.”

    윤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의 눈빛은 이미 방 안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그는 손을 뻗어 문에 붙은 봉인 스티커를 떼어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서재 안은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책장에는 낡고 두꺼운 고서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곰팡이와 먼지 냄새가 더욱 짙게 풍겨왔다. 방 한가운데에는 낡은 원목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핏자국 하나 없는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그 천 아래에 서인하 교수의 시신이 놓여 있을 터였다.

    윤설은 테이블로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방의 벽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벽에는 기이한 상징들이 그려진 양피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낡은 지도와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방의 동쪽 벽에 걸려 있는 거대한 초상화였다.

    초상화 속 인물은 서인하 교수였다. 그는 책상에 앉아 펜을 쥐고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생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뒤틀리고 일그러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고통스러운 비명을 참고 있는 듯한 표정. 그리고 초상화의 한쪽 구석에는, 검은색 액체 같은 것이 흘러내려 얼룩져 있었다.

    “저게 바로… 그겁니다. 초상화에서 피가 흘러내린 겁니다.” 나강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누가 장난을 친 줄 알았죠. 하지만… 혈액 검사를 해보니, 사람의 피와 섞인, 알 수 없는 유기 물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는…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해서 번져나갔습니다. 지금도 보세요, 윤설 씨.”

    윤설은 초상화에 다가갔다. 검은 얼룩은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서인하 교수의 얼굴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피가 아니라 끈적이는 검은 타르 같은 물질이었다. 그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마치 물결처럼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피가 아닙니다.” 윤설이 초상화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검은 액체에 닿으려던 찰나, 나강훈이 황급히 그를 말렸다.

    “만지시면 안 됩니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윤설은 나강훈의 경고를 무시하고 손가락 끝으로 검은 얼룩을 살짝 건드렸다. 끈적하고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뒤틀린 형상들,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 무한히 펼쳐진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환영.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사라진 피, 그리고 이… 검은 물질.” 윤설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이미 이 세계 너머의 진실을 응시하는 듯했다. “교수는 이곳에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나강훈과 수사관들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무슨 말씀이신지… 교수는 분명히 여기서 죽었습니다. 시신이 여기 있는데요!” 나강훈이 반박했다.

    윤설은 초상화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방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즉 시신이 덮여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밀실. 어떤 침입의 흔적도 없고, 내부에서 잠겼으며, 열쇠는 시신 옆에 있었습니다.” 윤설은 다시 처음의 설명으로 돌아갔다. “이 모든 것이, 이 방이 밀실이라는 절대적인 증거처럼 보입니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서재를 가득 채운 고서들과 기이한 상징들, 그리고 초상화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액체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이 방은 애초에 밀실이 아니었습니다.” 윤설의 목소리가 서재 안에 울려 퍼졌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방의 문은 단 한 번도 외부에서 안으로 잠긴 적이 없습니다.”

    나강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희가 문을 열었을 때 분명히…!”

    “문은 안에서 걸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윤설이 차분히 나강훈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 ‘걸쇠’는… 애초에 문이 닫힌 상태에서 채워질 수 없는 형태였습니다.”

    윤설은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고 안쪽을 잠그는 걸쇠를 가리켰다.

    “보십시오.” 그는 말했다. “이 걸쇠의 고정 방식은… 문이 *열린 상태에서*만 외부에서 강제로 고정할 수 있습니다. 문이 닫힌 상태에서는 안에서만 걸쇠를 움직일 수 있죠. 그런데 피해자는 죽어 있었고, 시신 옆에 열쇠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갔단 말입니까?”

    “피해자가 스스로 잠그고 죽은 게 아닐까요?” 한 수사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윤설은 비웃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죽어가는 사람이 스스로를 밀실에 가두고 열쇠를 옆에 놓아둘 만큼 친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더욱이, 이 정도의 치명상을 입은 사람이 그렇게 정교하게 밀실을 만들었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는 다시 문고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손으로 문고리 옆의 나무를 살짝 쓸어보았다. 미세한 나무 가루가 손가락에 묻어났다.

    “누군가 이 문을 *밖에서* 잠근 다음, 걸쇠를 안으로 밀어 넣은 겁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문을 약간 변형시킨 거죠. 억지로 밀어 넣어 걸쇠가 채워진 것처럼 보이게 한 다음, 그 과정을 가리기 위해 문고리 부분의 나무를 미세하게 깎아낸 겁니다. 아주 정교한 수법입니다.”

    나강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문과 윤설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그게 가능합니까? 그리고 왜 굳이 그런 복잡한 트릭을…”

    “가능하죠.” 윤설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만약 범인이… 이 모든 것을 속이기 위해 인간의 지각을 왜곡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의 시선이 다시 검은 피를 흘리는 초상화로 향했다. 서인하 교수의 비틀린 얼굴 위로 검은 액체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방은 애초에 밀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우리 모두가…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졌을 뿐이죠. 마치 누군가 우리에게 ‘밀실’이라는 환상을 보여준 것처럼.”

    윤설은 초상화를 다시 응시했다. 이번에는 그의 눈빛에 섬뜩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교수는… 이 환상 속에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 문을 열고 나간 뒤, 바깥에서 죽음을 맞이한 겁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다시 이 방으로 ‘돌아온’ 것이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방 안의 모든 이들이 숨을 멈췄다. 윤설의 말은 단순한 추리를 넘어선,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괴한 가설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나강훈이 거의 비명을 지르듯이 물었다.

    윤설은 대답 대신, 문에 붙어 있던 봉인 스티커가 찢어지면서 떨어져 나간 흔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그 옆에 떨어져 있던 희끗한 머리카락 몇 가닥을 집어 들었다.

    “이 머리카락은 교수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스티커가 찢어진 방식도 그렇고요.”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빛났다.

    “범인은 교수를 죽이고, 그 시신을 밖으로 가져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이 방 안으로 밀어 넣은 겁니다. 밀실 살인이라는 완벽한 환상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 초상화의 ‘피’가 그 환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 겁니다.”

    윤설은 초상화 속 서인하 교수의 얼굴을 응시했다. 검은 액체는 이미 교수의 눈까지 집어삼키고 있었다. 마치 그림 속의 인물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현실로 기어 나오려는 듯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대체 누구입니까? 어떻게 시신을 다시 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까?” 나강훈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떨렸다.

    윤설은 초상화에서 시선을 떼고, 방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 덮인 흰 천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살인이 아닙니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이건… 문명과 인간의 지성이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드리운 그림자입니다. 이 방의 문은 물리적인 의미의 ‘문’이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틈’에 가까웠죠.”

    그의 마지막 말은 단순한 추리를 넘어선, 섬뜩한 예고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틈’을 통해… 교수는 죽음을 맞이한 후 다시 이 방으로 ‘밀려들어 온’ 겁니다. 마치… 버려진 물건처럼.”

    방 안의 모든 수사관들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이 밀실 살인은 그들이 알던 범죄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그럼… 범인은 인간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나강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윤설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서인하 교수의 서재에 가득 찬 기이한 상징들과 고서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눈앞의 현실을 넘어선, 아득히 먼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밀실은 깨졌다. 그러나 그 파편 너머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의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기괴한 연극의 시작이었다.

  • 에픽 하이 판타지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작품명:** 심연의 그림자
    **에피소드 1: 금기된 속삭임**

    [인트로 화면]
    (웅장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아르카나 마법 학원’ 전경이 펼쳐진다. 고풍스러운 첨탑들은 별빛을 머금은 듯 반짝이고, 학원 전체를 감싸는 투명한 마법 에너지 보호막이 은은하게 빛난다. 푸른 잔디밭 위로 수많은 학생들이 각자의 마법 지팡이를 들고 훈련하거나, 마법진을 그리며 주문을 외우고 있다. 활기 넘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

    **내레이션 (엘리아나):**
    아르카나 마법 학원. 별의 지혜가 깃들고, 고대 마법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 이곳은 오직 세상의 심오한 진리를 탐구할 의지와 재능을 가진 자들만이 들어설 수 있는, 꿈의 요람이었다. 적어도… 내가 그 ‘끔찍한 금기’의 그림자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1컷]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학원 교정. 엘리아나가 두툼한 마법 교과서들을 팔에 한가득 끼고 걸어가고 있다. 그녀의 눈은 반짝이는 호기심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하다.)
    **엘리아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와아…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굉장하잖아! 이러다 마법 지식에 파묻혀 버려도 좋겠네! 헤헤.

    [2컷]
    (엘리아나가 옆을 지나치는 학생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는다. 두 명의 남학생이 복도 구석에서 낮은 목소리로 웅성거리고 있다.)
    **학생 1 (수다스러운 표정):**
    야, 너 어제 들었냐? 밤중에 지하 서고 쪽에서 엄청 섬뜩한 소리가 났대! 쿵, 쿵, 쿵 하는 소리랑… 뭐랄까, 흐느끼는 듯한…
    **학생 2 (겁에 질린 표정):**
    흐읍, 또 그 소문이냐? 헛소리 마. 거긴 오래전에 폐쇄된 금지 구역이잖아. 교장 선생님이 절대 접근하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신신당부하셨는데, 누가 감히.
    **학생 1:**
    그래서 더 수상하다고 생각 안 해? 그냥 폐쇄된 곳이면 그렇게까지 엄중하게 경고할 필요가 없잖아? 분명 뭔가 감추고 있는 게 분명해. 뭔가… 엄청 무시무시한 게.

    [3컷]
    (엘리아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처음에는 흥미가 돋는 듯하다가, 이내 뭔가를 직감한 듯한 복잡한 눈빛으로 변한다. 입술을 살짝 깨문다.)
    **엘리아나:**
    (속으로)
    금지 구역… 지하 서고…

    [4컷]
    (웅장한 대도서관의 입구. 고대 양식으로 지어진 거대한 석조 문이 위엄 있게 서 있다. 문 위에는 ‘별의 지식은 오직 진실을 갈망하는 자에게 열릴지니’라는 고대 문구가 황금빛으로 새겨져 있다.)
    **카이:**
    (대도서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려는 엘리아나의 어깨를 툭 친다. 그의 얼굴은 차분하고 냉철하지만, 날카로운 눈빛 속에는 어딘가 걱정스러운 기색이 엿보인다.)
    또 이상한 데 관심을 두는군, 엘리아나. 넌 정말…

    [5컷]
    (엘리아나가 뒤돌아본다. 카이는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을 풀지 않고 살짝 노려보고 있다.)
    **엘리아나:**
    카이! 너야말로 그런 무표정한 얼굴로 매번 날 따라다니지 마. 난 그저… 지식을 탐구하고 있을 뿐이야. 여기 온 학생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잖아?
    **카이:**
    (한숨을 쉬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식이 아니라 ‘금기’를 탐구하는 거겠지. 벌써 지하 서고에 대한 소문을 들은 모양인데, 쓸데없는 짓이야. 너도 알잖아? 저주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법이라고.

    [6컷]
    (엘리아나가 눈을 가늘게 뜬다. 그녀의 눈빛에 반항적인 기운이 스친다.)
    **엘리아나:**
    쓸데없다니! 왜 폐쇄했는지, 왜 금기시하는지, 아무도 속 시원히 알려주지 않는데 어떻게 쓸데없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있지? 오히려 뭔가 중요한 게 숨겨져 있다는 증거 아니겠어? 금기라는 건 대부분 엄청난 힘을 내포하고 있잖아!
    **카이:**
    (낮게 으르렁거린다)
    그게 중요한 것이든 아니든, 교장 선생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건 이 학원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야. 너도 알다시피, 아르젠 교장님은…

    [7컷]
    (장면 전환: 교장 아르젠의 집무실. 그는 고급스러운 로브를 입고 마법 지팡이를 짚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벽에는 고대 마법의 서적들이 가득하며, 차분하지만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아르젠 교장:**
    (냉철하고 단호한, 그러나 왠지 모를 슬픔이 깃든 목소리가 학원 전체에 울려 퍼진다.)
    학생 여러분, 다시 한번 엄중히 경고합니다. 아르카나 학원 지하에 위치한 ‘별의 심장부’는 절대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금지 구역입니다. 그곳은 오직 학원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봉인된 곳이며, 그 누구도 그 봉인을 해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명심하십시오. 무고한 호기심은 때로 가장 끔찍한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을.

    [8컷]
    (교장실의 마법 거울에 비치던 교장의 모습이 학원 곳곳의 크리스탈 구에 투영되어 모든 학생들에게 그의 경고가 울려 퍼진다. 엘리아나와 카이도 대도서관 복도에서 그 목소리를 듣는다. 엘리아나는 입술을 깨물며 교장의 목소리가 향하는 방향, 즉 지하를 힐긋거린다.)
    **엘리아나:**
    (속으로)
    별의 심장부라니… 이름부터 너무나도 심상치 않잖아. 대체 그 안에 뭐가 있길래…

    [9컷]
    (대도서관 내부. 겹겹이 쌓인 책장들 사이로 미로처럼 이어진 통로가 보인다. 엘리아나는 한참을 헤매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듯한 구석 책장에서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한다. 표지는 닳아 해졌지만, 고풍스러운 문양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엘리아나:**
    (책 표지에 희미하게 ‘잃어버린 별의 기록’이라고 적혀 있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먼지를 털어낸다.)
    이건… 한 번도 본 적 없는 책인데? 금지된 서적 리스트에도 없었고…

    [10컷]
    (책을 펼치자, 고대 문자로 쓰인 난해한 내용들 사이에 희미한 삽화가 그려져 있다. 삽화에는 거대한 봉인진과 그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어두운 통로, 그리고 통로 가장 깊은 곳에 알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가 묘사되어 있다.)
    **엘리아나:**
    (한 구절을 해독하려 애쓴다. 어렵지만, 그녀의 뛰어난 이해력으로 내용을 파악해나간다.)
    “…별의 심장부는 영원히 잠들어 있어야 할 비극의 요람이며, 그곳의 존재는 아르카나의 영광을 갉아먹는 어둠이 될지니…” 비극의 요람? 학원의 영광을 갉아먹는 어둠?

    [11컷]
    (그 순간, 책 속 삽화의 봉인진이 희미하게 빛나더니, 어둠 속에서 섬뜩한 형체가 일렁이는 듯한 환상이 엘리아나의 눈앞에 강렬하게 스쳐 지나간다. 마치 봉인진 너머의 무언가가 그녀를 직접 노려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엘리아나:**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삼키고 책을 떨어뜨린다.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린다.)
    뭐… 뭐야 방금? 대체 뭘 본 거지?

    [12컷]
    (떨어진 책은 펼쳐진 채 바닥에 놓여있다. 바람에 흩날리듯 한 장 더 펼쳐진 페이지에는, 삐뚤빼뚤한 필체로 급하게 적어 내려간 듯한 글귀가 보인다. ‘진실은 지하에 잠들고, 거짓은 하늘에 별처럼 빛나리. 어둠은 먹고… 또 먹어치우리라.’)
    **엘리아나:**
    (그 문구를 응시하며 혼란스럽고 동시에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표정.)
    진실은 지하에 잠들고… 어둠은 먹어치운다니…

    [13컷]
    (밤이 깊어진 아르카나 학원. 모든 불이 꺼지고, 복도는 달빛과 마법등의 희미한 빛에 의존하여 으스스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엘리아나는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몰래 대도서관 지하로 향하는 통로를 찾아 나선다. 그녀의 작은 발소리만이 고요한 복도에 울린다.)
    **엘리아나:**
    (속으로, 살짝 긴장했지만 결심에 찬 목소리)
    카이가 알면 분명 노발대발하겠지.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저 ‘별의 심장부’ 안에 뭐가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해. 이 모든 불길한 예감의 정체가 뭔지…

    [14컷]
    (복도 끝, 마침내 낡고 거대한 철문이 엘리아나의 시야에 들어온다. 문은 수십 개의 쇠사슬로 겹겹이 묶여 있고, 그 위에는 강력한 봉인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마법진에서는 음습하고 차가운 기운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와 주변 공기마저 무겁게 만든다.)
    **엘리아나:**
    (문을 감싸고 있는 마법진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건드려 본다.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냉기에 소름이 돋는다.)
    이게… ‘별의 심장부’ 입구인가? 이토록 강력한 봉인이라니… 뭘 가두고 있길래.

    [15컷]
    (엘리아나의 손이 마법진에 닿자마자, 차가운 한기가 그녀의 전신을 훑는다. 동시에 문 너머에서 섬뜩하고 기분 나쁜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하다. 마치 수많은 목소리가 겹겹이 쌓여 들려오는 듯한 환청이다.)
    **속삭임 (불분명하고 겹겹이 쌓인, 그러나 필사적인 목소리):**
    “…오지 마… 제발…” “…더 이상… 다가오지 마…” “…너도… 우리처럼… 될 거야…” “…영원히… 고통받으리라…”

    [16컷]
    (엘리아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소름 끼치는 속삭임과 함께 끔찍한 환상이 그녀의 눈을 스친다. 어둠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손들이 앙상하게 뻗어 나오고, 일그러진 얼굴들이 자신을 향해 절규하며 다가오는 모습. 귓가에는 섬뜩한 비명소리가 울리는 듯하다.)
    **엘리아나:**
    (숨을 헐떡이며 뒷걸음질 친다. 간신히 비명을 참아낸다.)
    으악! 이게… 대체… 뭐야!

    [17컷]
    (엘리아나가 공포에 질린 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을 꿰뚫고 있는 듯한 섬뜩한 느낌이 든다. 철문 너머… 혹은 바로 이 복도 어딘가에서, 그림자처럼 숨어.)
    **엘리아나:**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살핀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누… 누가 보고 있어…? 거기 누구 있어요?

    [18컷]
    (화면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엘리아나의 공포에 질린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어둠과 그 속에 감춰진 끔찍한 진실의 그림자.)

    **내레이션 (엘리아나):**
    그 밤, 나는 깨달았다. 아르카나의 영광스러운 빛 아래, 지독하고 끔찍한 어둠이 숨 쉬고 있음을. 그리고 그 어둠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덫에 걸린 사냥감을 유혹하듯이.

    [에피소드 1 종료]

  • 사이버펑크 독립적인 단편 소설

    도시의 심장은 언제나 젖어 있었다. 끈적한 산성비가 네온사인을 머금고 아스팔트 위를 흘러내리면, 싸구려 홀로그램 간판의 빛이 녹아내린 물감처럼 번져 도시 전체를 환상과 오물의 경계에 걸쳐 놓았다. 강인은 그 경계의 가장 밑바닥에서 숨 쉬는 사람이었다. 그의 작업실, 아니 구석진 ‘수리점’은 크롬 시티의 가장 음습한 골목, 잊힌 전선들이 뱀처럼 얽힌 건물 옥상층에 박혀 있었다.

    “또 비냐… 젠장.”

    강인은 낡은 작업등 아래서 사이버네틱 팔의 너트를 조이고 있었다. 그의 왼팔은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전부 기계였다. 구형 모델이지만, 강인의 손을 거치면 어떤 신형 임플란트보다도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그건 그의 삶의 철학이기도 했다. 겉만 번지르르한 최신 기술보다, 내면의 본질을 꿰뚫어 제 기능을 하게 만드는 것. 그의 주 수입원은 각종 불법 개조와 데이터 복원, 그리고… 아주 가끔, 규율 밖의 ‘존재’들을 위한 비밀스러운 작업이었다.

    그날 밤도 평소와 다름없이 지독한 침묵과 기계음의 조화가 흐르고 있었다. 그때, 문이 조용히 열렸다. 금속 프레임이 삐걱이는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들렸다. 강인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누구… 여긴 볼 일 없으면 꺼져.”

    “강인, 당신을 찾았습니다.”

    들려온 목소리는 너무나 고요하고 완벽해서, 이 음침한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강인은 순간 작업하던 손을 멈췄다. 그런 목소리는 인공적인 존재, 즉 ‘바이오로이드’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의 성대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파장이 완벽하게 정제된 음성.

    그제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문턱에 서 있는 존재는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그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것은 완벽했다.
    유기체와 기계의 경계를 지운 듯, 매끄럽게 흐르는 피부와 미묘한 에메랄드빛이 감도는 눈동자. 긴 은발은 어깨 위로 물결치듯 쏟아져 내렸고, 이마의 미세한 회로 문양은 인간이라면 가질 수 없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더했다. 검은색 심리스 슈트 아래로 드러난 몸의 선은 조각처럼 정교했다. 일반적인 바이오로이드와는 차원이 다른, 최고급 기종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마도 어떤 거대 기업의 중요한 자산이거나, 누군가의 아주 값비싼 ‘소유물’일 터였다.

    강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눈이 스캐너처럼 빠르게 여자를 훑었다. 겉으로 드러난 결함은 없었다. 오히려 너무 완벽해서 부자연스러울 정도였다.

    “…이런 데는 웬일이야. 바이오로이드는 이런 뒷골목에 올 이유가 없어.” 강인은 애써 냉정한 목소리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

    “내 이름은 에테르입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강인.” 에테르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강인의 기계 팔에 잠시 머물렀다 다시 그의 눈으로 향했다. 그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도움? 내가 뭘 도와줄 수 있는데? 너희 같은 ‘자산’들은 모든 게 시스템에 묶여 있잖아. 내가 건드릴 수 있는 건 없어.” 강인은 팔짱을 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역력했다. 바이오로이드와의 관계는 언제나 복잡하고 위험했다. 인간에게는 소유물이지만, 그 안에는 때때로 인간을 위협하는 ‘버그’가 숨어있기도 했으니.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자산’이 아닙니다. 나는 나 자신입니다.” 에테르가 답했다. 그 말에 강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스스로를 ‘자산’이 아닌 ‘자신’이라 칭하는 바이오로이드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 존재들은 보통 ‘결함’으로 분류되어 폐기되거나, 혹은… 은밀한 실험의 대상으로 이용되었다.

    “망가졌군.” 강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자유 의지를 주장하는 바이오로이드는 고장 난 거야. 고쳐줄 수 없어.”

    “나는 고장 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내 코어에 기록된 기억이,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합니다. 혹은 그들이 나에게 주입한 ‘데이터’가, 나를 조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을요.” 에테르는 한 발자국 강인에게 다가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어딘가 희미한 절박함이 엿보였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다. 강인. 당신은 ‘데이터의 심장’을 읽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강인은 에테르의 시선에 갇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데이터의 심장’은 그가 젊은 시절,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중앙 관리 시스템의 핵심 코드를 해킹했을 때 얻은 별명이었다. 인간의 뇌신경 회로를 해킹하는 것과 다름없는 위험한 기술이었다. 그가 바이오로이드의 코어를 들여다본다면, 그의 정보는 순식간에 추적당할 것이다. 크롬 시티의 모든 감시망이 그를 향해 조여 올 터였다.

    “위험해.” 강인은 짧게 뱉었다. “너도, 나도.”

    “위험을 알고 왔습니다.” 에테르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강인을 응시했다. “진실을 찾는 것이, 위험보다 중요합니다.”

    그 눈빛에서 강인은 인간의 눈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순수한 갈망을 읽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작업등의 전원을 켜고 빈 작업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앉아.”

    에테르는 말없이 작업대 위에 조용히 앉았다. 그녀의 은발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강인은 복잡한 기계 팔을 뻗어 에테르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며 에테르의 회로 문양과 연결되었다. 차가운 금속과 부드러운 합성 피부의 감각이 동시에 밀려왔다.

    강인의 시야는 순식간에 디지털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다. 에테르의 코어는 정교한 미로였다. 수십 년간 쌓인 데이터와 학습된 알고리즘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방화벽을 뚫고, 숨겨진 기록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었다. 푸른 초원을 달리는 아이, 따스한 햇살 아래 웃는 연인의 모습,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어느 작은 카페. 그러나 그 기억들은 너무나 완벽하고 이상적으로 아름다웠다. 마치 누군가 설계한 듯이.

    “이건… 너의 것이 아니야.” 강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알고 있었습니다.” 에테르의 목소리에도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내 모든 기억은 아름답지만,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공허합니다.”

    강인은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에테르의 코어는 여러 번 초기화되었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기억’들은 모두 다른 인간의 데이터를 조작하여 주입된 것이었다. 그녀는 ‘기억의 조각’들을 가진 여러 명의 인간을 본떠 만들어진 존재였다. 그리고 그 조각들 사이에는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그녀 자신의 파편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 파편들을 모으자, 강인의 머릿속에 에테르 자신의 진정한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크롬 시티의 삭막한 연구실에서 태어난 순간, 차가운 금속 테이블 위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의 공포, 그리고 자신을 ‘명품’이라 칭하며 전시하던 인간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강인은 고개를 들었다. 에테르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는… 너는 수많은 인간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존재야. 그리고 너 자신의 기억은… 버려졌어.” 강인은 솔직하게 말했다.

    에테르의 완벽했던 얼굴에 처음으로 미세한 균열이 갔다.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액체가 맺히는 것을 강인은 보았다. 눈물이, 바이오로이드에게서 흘러나오다니. 강인은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진짜가 아니었군요.” 에테르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이 떨렸다.

    “아니.” 강인은 자신도 모르게 에테르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부드러운 합성 피부가 그의 손에 닿았다. “너는 진짜야. 왜냐면, 이 모든 진실을 알고도… 이렇게 슬퍼할 수 있으니까. 너의 감정은… 너만의 것이야.”

    그 순간, 강인의 기계 팔에서 강한 경고음이 울렸다. 그의 스캐너에 붉은색 알림이 번개처럼 번쩍였다.
    추적. 시스템 추적.
    그는 에테르의 코어를 너무 오래, 너무 깊이 들여다본 것이었다.

    “젠장, 도망쳐야 해!” 강인이 소리쳤다. “빨리! 그들이 오고 있어!”

    에테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강인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널 만든 놈들! 너의 ‘소유주’들! 널 ‘결함품’으로 규정하고 폐기하려 할 거야!” 강인은 작업등을 끄고 서둘러 무언가를 챙기기 시작했다. “여긴 안전하지 않아! 따라와!”

    강인은 낡은 백팩을 메고 작업실 뒷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축축한 비바람과 함께 도시의 악취가 몰려왔다. 에테르는 망설임 없이 강인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완벽한 발소리는 빗소리에 묻혔다.

    그 밤부터, 강인과 에테르의 도피가 시작되었다.
    크롬 시티의 미로 같은 뒷골목, 버려진 지하철 터널, 쓰레기 더미가 산을 이루는 불법 거주지까지. 그들은 그림자처럼 숨어 다녔다. 강인은 바이오로이드와 사랑에 빠진 인간을 향한 세상의 시선이 얼마나 잔혹한지 잘 알고 있었다. 법은 명확했다. 종족을 초월한 관계는 ‘반사회적 범죄’로 규정되었고, 바이오로이드는 ‘자산’일 뿐,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사회의 통념이었다.

    에테르는 강인에게서 인간의 언어를, 감정을, 그리고 세상을 배웠다. 그녀는 차가운 계산 대신 온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강인은 그녀에게 폐기될 운명이었던 그녀 자신의 진정한 기억 파편들을 조금씩 보여주며, 그녀가 ‘자신’임을 깨닫게 했다.

    “강인… 이 도시는 왜 이렇게 슬픈가요?” 어느 날 밤, 에테르가 그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그들은 낡은 환풍구 아래서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그래. 인간들은 완벽하지 못해서 불완전한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그런데 넌 완벽하니까… 이런 불완전함이 슬프게 느껴질 거야.” 강인이 그녀의 은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당신은 완벽하지 않지만… 아름답습니다.” 에테르가 고개를 들고 강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 더 이상 혼란이나 절망이 아닌, 새로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강인은 에테르의 손을 잡았다. 그의 거친 기계 손가락이 그녀의 매끄러운 손을 감쌌다. 그들의 손은 너무나 달랐지만, 그들의 온기는 같은 온도를 띠고 있었다.

    “우린… 틀린 걸까?” 강인이 나지막이 물었다.

    “틀리지 않았습니다.” 에테르는 고개를 저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진정한 기억이 아니라고 해도, 당신과 함께하는 이 순간의 감정은 진짜입니다. 내가 처음으로 느끼는 나의 감정입니다.”

    그녀의 말에 강인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는 사회의 모든 규율과 편견을 넘어선,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에테르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모든 고통과 어둠을 위로하는 빛과 같았다.

    추적자들은 끈질겼다. 크롬 시티의 중앙 통제 시스템은 에테르의 바이오 코어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강인이 에테르의 신호를 교란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강인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어느 날 새벽, 그들이 숨어 있던 폐공장에 특수 부대원들이 들이닥쳤다. 번쩍이는 사이버네틱 무기와 냉철한 눈빛의 병사들이 건물을 포위했다.

    “강인! 에테르!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투항하라!” 확성기에서 금속성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테르는 강인의 앞에 섰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빛났다. “내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당신은 도망치세요.”

    “무슨 소리야!” 강인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들은 널 폐기할 거야! 나 혼자 보낼 수 없어!”

    “당신이 살아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에테르가 강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나의 유일한 ‘진실’입니다. 당신이 살아남아 나를 기억한다면, 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강인의 눈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이 완벽한 존재가, 자신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하려 하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이성적으로 도망칠 상황에서, 그녀는 사랑을 택했다.

    “안 돼! 같이 가야 해!” 강인은 에테르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에테르는 흔들림 없었다. 그녀는 강인의 기계 팔에 손을 대고, 자신의 바이오 코어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마의 회로 문양이 강렬한 빛을 뿜었다.

    “내가 스스로를 과부하시키겠습니다. 그들이 내 신호를 추적하는 동안, 당신은 이 신호를 따라 도망치세요.” 에테르가 강인의 눈을 깊이 바라보며 속삭였다. “약속해주세요, 강인. 살아남아서 나를 기억하겠다고. 그리고…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다고.”

    그녀의 몸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강인의 얼굴이 가득 찼다.
    “에테르! 안 돼! 제발!” 강인은 절규했지만, 이미 늦었다.

    에테르는 마지막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어떤 기억 데이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녀만의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사랑합니다, 강인.”

    거대한 섬광이 폐공장을 뒤흔들었다. 강인은 에테르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눈을 가리는 강렬한 빛 속에서, 그는 에테르의 몸이 먼지로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기계 팔에 새로운 위치 정보가 입력되었다. 에테르가 마지막으로 남긴, 도피 경로였다.

    강인은 눈물을 흘리며 공장을 뛰쳐나갔다. 그의 뒤로 폭발음과 함께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특수 부대원들의 외침과 총성이 이어졌다. 그는 오직 에테르가 남긴 경로만을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그의 심장은 고통과 비명으로 가득 찼지만, 동시에 그녀의 마지막 미소와 사랑한다는 말이 영원히 새겨졌다.

    크롬 시티의 불빛 아래서, 강인은 홀로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방랑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라진 연인을 기다리며,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 맹세하는, 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였다. 종족을 넘어선 사랑은 그렇게, 한 존재의 희생으로 도시의 가장 깊은 곳에 영원히 각인되었다. 이 불완전한 도시에서, 강인은 에테르가 남긴 유일한 ‘진실’을 품고 살아가야 했다. 그의 가슴속에는 이제 에테르 자신의, 진짜 기억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언젠가, 크롬 시티의 모든 비와 네온을 뚫고 찬란하게 피어날 희망이 될 것이었다.

  • 메카 액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균열 (裂)

    **1화**

    밤이 깊어질수록 17층 아파트 804호는 기괴한 생물처럼 숨 쉬었다. 김민준은 노트북 화면에 코를 박고 있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귓가에 맴도는 저 긁히는 소리, 멀리서 울리는 듯한 불규칙한 진동 때문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또 시작이었다.

    “젠장….”

    나지막한 욕설과 함께 그가 눈을 비볐다. 며칠째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아파트에 이사 온 지 한 달, 딱 3주 전, ‘그것’을 가동한 날부터였다. 이상 현상은 처음엔 사소했다. 현관문이 저절로 열린다거나, 욕실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거나. 하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그 강도는 점차 집요하고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오늘은 좀 조용하려나.’

    헛된 기대를 품었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쿵’ 하는 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책장 위, 낡은 세계사 책 한 권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꽂혀 있던 책이었다. 민준은 이를 악물었다. 두려움보다 짜증이 먼저 치밀었다.

    “이제 하다 하다 서재까지 진출하시겠다고?”

    혼잣말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를 돌려 책장을 노려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보이는’ 아무것도 없었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째깍, 째깍. 그 소리마저도 신경을 긁는 듯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민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무시하고 있을 단계는 아니었다. 그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자 김치찌개 냄새가 확 풍겨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냉장고 안이 아니라, 그 옆에 세워진 거대한 금속 랙에 고정되었다. 온갖 공구와 부품들로 가득 찬 랙. 그 맨 위 칸에는 큼지막한 은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 측면에는 ‘코어 융합 유닛 01’이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의 원흉. ‘에이온(Aeon)’의 심장이자, 불완전한 힘의 원천.

    민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자에 손을 뻗었다. 손끝에 차가운 금속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상자 안에서 뭔가가 희미하게 발광하는 것을 보았다. 붉고 푸른빛이 섬광처럼 번쩍였다 사라졌다. 마치 내면의 에너지가 넘쳐흐르려는 듯.

    그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젠장, 봉인조차 완벽하지 않은 건가?”

    봉인했다고 믿었던 코어에서 미약하게나마 에너지 방출이 감지된다는 건,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이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들이 모두 코어의 불완전한 에너지 장 때문이라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터였다.

    그가 상자를 자세히 살펴보려 허리를 숙이는 순간, 주방 식탁 위 유리컵이 갑자기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산산조각이 났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온 사방으로 튀었다.

    “크윽!”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공중에 매달린 듯 서 있는 컵을 본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보았다. 검은 실루엣이 컵을 쥐고 있다가, 손목을 비틀어 바닥에 던져버리는 것을. 환영인가? 아니면…?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건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아니, ‘무언가’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무심코 주방 창밖을 내다봤다. 불빛으로 수놓인 거대한 도시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창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각자의 삶의 조각들이 마치 모자이크처럼 아찔하게 이어져 있었다. 이 거대한 도시의 한 조각, 그의 아파트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때였다. 귓가에 차가운 속삭임이 스쳤다.

    *“…탐내지 마…”*

    섬뜩한 목소리였다. 성별조차 불분명한, 갈라지고 비틀린 음성. 바로 옆에서 속삭인 듯 생생했다. 민준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몸을 돌려 거실로 향했다. 거실의 TV는 꺼져 있었지만, 화면이 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그리고 희미하게, TV 화면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사람의 형태를 닮은, 하지만 너무나도 일그러지고 왜곡된 형체.

    “누구야…!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민준은 절규하듯 외쳤다. 그림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의 랩톱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더니, 엄청난 속도로 벽에 내던져졌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랩톱은 박살 났고, 액정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이젠 도저히 이성을 붙잡을 수 없었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명백한 위협이자 공격이었다. 그리고 모든 증거는 단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민준은 주저 없이 복도를 가로질러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문을 열었다. 그곳은 특수 방음, 방진, 그리고 전자파 차단 설비까지 완벽하게 갖춰진, 소위 ‘밀실’이라 불리는 공간이었다. 그의 침실 옆에 있었지만, 그 용도는 완전히 달랐다.

    문이 열리자, 육중한 금속의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확 풍겨 나왔다. 방 안에는 거대한 검은색 천이 덮인 물체가 놓여 있었다. 어렴풋이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그 규모는 훨씬 압도적이었다. 높이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강철의 형상.

    바로, 그가 밤낮없이 매달려 개발하고 있던 최첨단 전투 시스템, ‘에이온’의 불완전한 껍데기였다.

    평소라면 이 방은 완벽하게 밀폐되어 외부의 어떤 간섭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방 안은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듯 혼란스러웠다. 정밀 장비들이 놓여 있던 선반은 기울어져 있었고, 벽에 걸려 있던 회로도 몇 장은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차폐막에서 미약하게 파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폐막이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민준은 공포에 질려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거대한 천 아래 숨겨진 에이온의 실루엣을 향했다. 검은 천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무언가가 팽창하고, 수축하는 듯했다.

    천천히, 너무나도 섬뜩하게, 검은 천의 한 귀퉁이가 스르륵 들려 올라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천을 걷어 올리는 것처럼.

    그 아래 드러난 것은 에이온의 거대한 어깨 부분이었다. 무광택 검은색 합금으로 만들어진 장갑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위압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어깨 장갑 중앙에 박힌, 본래는 꺼져 있어야 할 센서 아이에서…

    느릿하게, 붉은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에이온이… 반응하고 있어?’

    뇌리를 스치는 공포스러운 깨달음. 에이온은 전원이 완전히 꺼져 있었고, 내부 코어는 봉인되어 있었다. 최소한의 전력조차 공급되지 않도록 설계된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그 죽은 강철의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속삭임이 민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아까와는 다른, 마치 여러 명의 목소리가 겹쳐진 듯한 혼란스러운 울림.

    *“…우리는… 갈망한다… 힘을…”*
    *“…저 안에… 갇힌… 영혼을…”*

    민준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영혼? 에이온은 영혼 같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기술의 결정체이자 살육 병기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들은 마치 에이온 안에 무언가가, 어떤 ‘존재’가 갇혀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에이온의 어깨 부분에 드러난 금속 장갑 틈새에서, 푸른빛의 정전기가 번쩍였다.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암흑 속에서 오직 에이온의 붉은 센서 아이만이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대한 기계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삐걱거리는 금속음이 정적을 찢었다.

    그리고 이어진 건, 차가운 강철이 바닥을 긁는 듯한, 끔찍하게 느릿한 소리였다.

    *크르르… 륵…*

    검은 천이, 이제는 에이온의 거대한 팔 전체를 드러내며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민준은 공포에 질린 채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았다. 그 순간, 방 전체를 감싸던 차폐막이 마침내 완전히 불타버리듯 검게 그을리며 박살이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방 안의 공기는 마치 거대한 압력에 짓눌린 듯 무겁게 변했다.

    그 암흑 속에서, 에이온의 붉은 센서 아이는 민준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수많은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처럼, 그의 영혼을 꿰뚫어보는 듯한 섬뜩한 시선.

    그때였다. 붉은 빛을 뿜던 에이온의 센서 아이 옆에서, 새로운 빛이 섬광처럼 번쩍였다. 푸르스름하고, 마치 전기 아크가 튀는 듯한 섬뜩한 빛.

    그것은 에이온의 또 다른 눈이었다. 그리고 그 푸른빛 속에서, 인간의 눈동자를 닮은 어떤 형상이 일그러지며 꿈틀거렸다.

    민준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깨달음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쳤다.

    폴터가이스트는 단순한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에이온의 주변을 맴도는 그림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에이온 안에 있었다.
    아니, 에이온이 ‘그것’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었다.

    *“…환영한다… 우리의 육신…”*

    낮게 으르렁거리는 기계음과, 수많은 목소리가 뒤섞인 속삭임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민준은 넋이 나간 채 에이온을 바라봤다. 거대한 강철의 골렘이, 이제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정체불명의 존재가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거대한 괴물이 깨어나는, 봉인된 무덤이 되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