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마을. 이름처럼, 마을은 온통 잿빛이었다. 흙벽은 세월의 더께와 빈곤으로 검게 바랬고, 지붕 위에는 서리가 내려앉아 얼음 비늘처럼 빛났다. 스산한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동토의 계절. 그 잿빛 마을의 한켠에서, 강휘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다. 수도인 황성에서는 저 별들이 온갖 화려한 비단과 보석들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빛의 향연이겠지만, 이곳 잿빛마을에겐 그저 차가운 하늘의 감시자일 뿐이었다. 별빛 아래, 온몸을 덜덜 떨며 잠든 어머니와 어린 동생의 마른기침 소리가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오늘 저녁, 식구들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끓인 풀뿌리 한 줌과 물이 전부였다. 그것마저도 이틀 전, 황성에서 내려온 징수대가 마을의 남은 곡식을 깡그리 털어갔기에 겨우 마련한 것이었다.
“젠장…”
강휘의 손아귀에 쥐어진 돌멩이가 부스러질 듯 꽉 쥐어졌다. 그의 눈빛은 차가운 밤하늘만큼이나 시렸으나, 그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열아홉 해를 살면서 그가 본 세상은 오직 이랬다. 끝없이 빼앗기고, 밟히고, 절망하는 평민들의 삶. 그리고 그 위에서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황족과 귀족들.
제국은 거대했다. 태양의 제국이라 불리며 천하를 호령한 지 천 년. 그 오랜 세월 동안 제국의 영토는 끝없이 팽창했고, 그들의 권위는 하늘의 천명과 같다고 굳게 믿어졌다. 황제는 천룡의 혈통을 이어받아 신선과 같은 힘을 가졌다 했고, 황성에는 세상의 온갖 보물과 영약이 쌓여 영생을 꿈꾼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그러나 그 모든 영화는 오직 소수의 몫이었다. 제국의 그림자 아래, 수많은 평민들은 가축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어김없이 찾아온 보릿고개는 잔혹했다. 눈이라도 제대로 녹으면 풀뿌리라도 캘 수 있을 텐데, 매서운 한파는 끈질기게 땅을 얼어붙게 했다. 며칠 전 징수대가 들이닥쳤을 때의 광경이 강휘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모두 나와라! 황제의 명이시다! 겨울 곡식 징수를 시작한다!”
붉은 깃발을 펄럭이며 마을 어귀에 나타난 제국군은 마치 거대한 굶주린 짐승 같았다. 그들의 갑옷은 차가운 금속으로 번뜩였고, 허리춤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을 풍기는 검이 번들거렸다. 대열의 선두에는 뚱뚱한 몸매에 날카로운 눈을 가진 징수관이 비단옷을 휘날리며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덜덜 떨면서도 마당으로 나왔다. 모두가 흙빛 얼굴에 뼈만 앙상한 몸이었다.
“어이, 노인장! 자네 집에 곡식이 많다던데, 얼른 내놓지 않고 뭘 꾸물거리는가!”
징수관의 매서운 외침에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백발의 장노인이었다. 강휘의 어린 시절부터 마을의 온갖 대소사를 챙겨왔던, 모두에게 존경받는 이였다.
“징수관 나으리… 보시다시피… 마을에는 남은 곡식이 없습니다. 지난 가을, 전염병으로 수확도 변변치 못했고, 남아있는 것은 이제 내년 봄을 버틸 종자뿐입니다…”
장노인의 목소리는 힘없이 떨렸으나, 그 안에는 늙은 소가 억지로 끌려가며 내는 듯한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종자? 헛소리 마라! 네 놈들이 내년까지 살 걱정을 왜 하느냐! 황성에서는 신성한 의식을 위해 막대한 곡식이 필요하다! 어서 내놔!”
징수관은 비웃으며 장노인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를 거칠게 밀쳐냈다. 깡마른 장노인은 속절없이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아악!”
쓰러진 장노인의 등 위로 제국군 병사의 몽둥이가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장노인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강휘는 그 광경을 보고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의 옆에서 어머니는 입을 틀어막고 흐느꼈고, 어린 동생은 공포에 질려 강휘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 반역의 무리 같으니! 황명을 거역하려 드는가!” 징수관은 싸늘하게 외치며 병사들에게 명했다. “샅샅이 뒤져라! 한 톨도 남기지 말고 모두 압수하라!”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집집마다 들이닥쳤다. 부엌의 낡은 항아리를 부수고, 마루 밑을 파헤치고, 심지어는 이불 속까지 뒤지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그들이 찾아낸 것은 쥐새끼나 먹을 만한 쥐똥 섞인 묵은 곡식 몇 줌, 그리고 갓 캔 듯한 누런 풀뿌리 몇 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마저도 모두 자루에 담아갔다.
“이것이 전부라니… 역병이 들었구나! 쯧쯧. 이래서야 황제가 너희를 어여삐 여길 수가 있겠느냐!”
징수관은 혀를 차며 경멸의 눈빛으로 마을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황급히 종이에 뭔가를 적어 병사들에게 건넸다.
“이들을 당장 황성으로 끌고 가라! 병사들의 군량미를 채우는 노역에 동원할 것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이들은 강휘 또래의 젊은 사내들과 미혼의 처녀들이었다. 강휘 역시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안 돼! 우리 아들! 강휘야!”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병사들은 무자비하게 그녀를 밀쳐냈다. 강휘는 눈앞에서 어머니가 흙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온몸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수십 명의 무장한 병사들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그는 그저 무력하게 잡혀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장노인이 피투성이 몸을 이끌고 겨우 일어섰다.
“이 비렁뱅이 같은 놈들아! 하늘이 두렵지 않으냐! 너희가 정녕 황제의 백성들을 이리 다루어도 되는 것이냐!”
장노인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의 눈빛은 핏발이 서 있었으나, 그 안에는 죽음을 불사하는 굳건함이 있었다. 징수관은 그의 외침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오, 노인장께서 아직도 혀를 놀리시는군. 좋다. 너의 그 대쪽 같은 기개를 황제 폐하께 보여드리도록 하지.”
징수관은 병사에게 손짓했다. 병사들이 장노인을 둘러쌌다. 강휘는 불길한 예감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장노인! 안 됩니다!”
그가 외치려 했으나, 뒤에서 잡아챈 병사의 손아귀가 억세게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순간, 병사들의 몽둥이가 장노인의 몸을 향해 무자비하게 쏟아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뼈가 부러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장노인의 몸은 맥없이 축 늘어졌고, 곧 피범벅이 된 채 흙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눈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으나, 그 안의 빛은 이미 꺼져 있었다.
“장노인…!”
강휘의 목에서 신음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몸은 분노와 슬픔으로 격렬하게 떨렸다. 그는 병사들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징수관의 목을 당장이라도 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그의 몸은 수십 명의 병사들에게 붙들려 있었다.
그날 밤, 강휘와 마을의 젊은이들은 끌려갔다. 징수관은 떠나기 전, 마을 사람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다시는 황명을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이 마을은 지도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징수대와 병사들은 말발굽 소리를 남기며 황성 방향으로 사라졌다. 남은 마을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피투성이가 된 장노인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는 슬픔과 함께, 깊은 절망과 더 깊은 증오가 서려 있었다.
강휘는 끌려가는 마차 안에서 내내 그날의 참상을 떠올렸다. 장노인의 죽음, 어머니의 절규, 동생의 울음소리. 그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불덩이가 끓어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한이 응축된, 거대한 복수의 불꽃이었다.
며칠 밤낮을 달려 도착한 황성은, 그야말로 다른 세상이었다. 마을의 잿빛과 대비되는 휘황찬란한 금빛 궁전들,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 밤에도 꺼지지 않는 수많은 등불들. 그 화려함은 강휘의 눈을 현혹하기보다 더욱 강렬한 역겨움을 안겨주었다. 제국의 부는 모두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백성들의 피와 땀, 눈물과 목숨을 앗아 만들어진 허상.
그들은 황성 근처의 거대한 노역장에 갇혔다. 수백, 수천 명의 평민들이 짐승처럼 일했다. 황궁 증축 공사, 성벽 보수, 귀족들의 정원 꾸미기 등 끝없는 노역에 시달렸다. 매일 밤, 강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성 위로 떠 있는 거대한 달은 유난히 희미하고 차가워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해가 저물고 노역자들이 하나둘 쓰러져 잠이 들 무렵이었다. 강휘는 우연히 몇몇 노역자들이 모여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들었나? 저 남쪽, 백룡산 자락에서 ‘바람칼’이라 불리는 자가 나타났다고 하더군.”
“바람칼? 그게 누구인가?”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제국 병사들을 단신으로 격퇴한다는 신출귀몰한 자라네. 어떤 이는 그가 선인이 보낸 심판자라고도 하더군.”
“선인이라니… 허튼소리 마라. 이 세상에 선인이 어디 있나. 다들 황제의 편에 서서 우리를 억압할 뿐이지.”
“그래도… 어쩌면, 어쩌면 우리도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노역자들의 눈빛에 오랜만에 희미한 불씨가 피어오르는 것을 강휘는 똑똑히 보았다. 바람칼. 선인. 미신과 같은 이야기였지만,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작은 희망조차 움켜쥐려 했다. 강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속의 불꽃이 더욱 거세지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밤, 강휘는 잠들지 못했다. 노역자들의 희망 섞인 속삭임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선인이든 아니든, 누군가는 저 거대한 제국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자신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장노인의 죽음, 어머니와 동생의 고통, 그리고 모든 잿빛마을 사람들의 절망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 전, 강휘는 몰래 노역장을 빠져나왔다. 그는 더 이상 짐승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빼앗기고, 밟히고, 절망하며 죽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황성이 눈앞에 아득히 펼쳐진 언덕 위에서, 손에 쥔 돌멩이를 부스러뜨릴 듯 꽉 움켜쥐었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황성 너머 어렴풋이 보이는 거대한 산맥, 전설 속 선인들이 기거한다는 백룡산을 향했다. 제국이 천 년간 쌓아 올린 견고한 성벽은 그의 눈에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젠가 깨부숴야 할 거대한 감옥일 뿐이었다.
“기다려라. 이 강휘,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너희의 잿빛 세상을 끝장낼 것이다.”
강휘의 입에서 굳은 맹세가 터져 나왔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슬픔이나 분노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이제, 굳건한 결의와 뜨거운 투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제국에 맞설 작은 불씨였으나, 언젠가 모든 것을 태워버릴 거대한 횃불이 될 것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어스름한 새벽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목적지는 백룡산. 희망의 칼날, 바람칼이 있다는 그곳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끌려가는 노예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는, 제국에 맞선 반란의 첫걸음을 떼는 한 명의 전사였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그의 심장은 뜨겁게 고동쳤다.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막을 올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