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잿빛마을. 이름처럼, 마을은 온통 잿빛이었다. 흙벽은 세월의 더께와 빈곤으로 검게 바랬고, 지붕 위에는 서리가 내려앉아 얼음 비늘처럼 빛났다. 스산한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동토의 계절. 그 잿빛 마을의 한켠에서, 강휘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다. 수도인 황성에서는 저 별들이 온갖 화려한 비단과 보석들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빛의 향연이겠지만, 이곳 잿빛마을에겐 그저 차가운 하늘의 감시자일 뿐이었다. 별빛 아래, 온몸을 덜덜 떨며 잠든 어머니와 어린 동생의 마른기침 소리가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오늘 저녁, 식구들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끓인 풀뿌리 한 줌과 물이 전부였다. 그것마저도 이틀 전, 황성에서 내려온 징수대가 마을의 남은 곡식을 깡그리 털어갔기에 겨우 마련한 것이었다.

    “젠장…”

    강휘의 손아귀에 쥐어진 돌멩이가 부스러질 듯 꽉 쥐어졌다. 그의 눈빛은 차가운 밤하늘만큼이나 시렸으나, 그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열아홉 해를 살면서 그가 본 세상은 오직 이랬다. 끝없이 빼앗기고, 밟히고, 절망하는 평민들의 삶. 그리고 그 위에서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황족과 귀족들.

    제국은 거대했다. 태양의 제국이라 불리며 천하를 호령한 지 천 년. 그 오랜 세월 동안 제국의 영토는 끝없이 팽창했고, 그들의 권위는 하늘의 천명과 같다고 굳게 믿어졌다. 황제는 천룡의 혈통을 이어받아 신선과 같은 힘을 가졌다 했고, 황성에는 세상의 온갖 보물과 영약이 쌓여 영생을 꿈꾼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그러나 그 모든 영화는 오직 소수의 몫이었다. 제국의 그림자 아래, 수많은 평민들은 가축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어김없이 찾아온 보릿고개는 잔혹했다. 눈이라도 제대로 녹으면 풀뿌리라도 캘 수 있을 텐데, 매서운 한파는 끈질기게 땅을 얼어붙게 했다. 며칠 전 징수대가 들이닥쳤을 때의 광경이 강휘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모두 나와라! 황제의 명이시다! 겨울 곡식 징수를 시작한다!”

    붉은 깃발을 펄럭이며 마을 어귀에 나타난 제국군은 마치 거대한 굶주린 짐승 같았다. 그들의 갑옷은 차가운 금속으로 번뜩였고, 허리춤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을 풍기는 검이 번들거렸다. 대열의 선두에는 뚱뚱한 몸매에 날카로운 눈을 가진 징수관이 비단옷을 휘날리며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덜덜 떨면서도 마당으로 나왔다. 모두가 흙빛 얼굴에 뼈만 앙상한 몸이었다.

    “어이, 노인장! 자네 집에 곡식이 많다던데, 얼른 내놓지 않고 뭘 꾸물거리는가!”

    징수관의 매서운 외침에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백발의 장노인이었다. 강휘의 어린 시절부터 마을의 온갖 대소사를 챙겨왔던, 모두에게 존경받는 이였다.

    “징수관 나으리… 보시다시피… 마을에는 남은 곡식이 없습니다. 지난 가을, 전염병으로 수확도 변변치 못했고, 남아있는 것은 이제 내년 봄을 버틸 종자뿐입니다…”

    장노인의 목소리는 힘없이 떨렸으나, 그 안에는 늙은 소가 억지로 끌려가며 내는 듯한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종자? 헛소리 마라! 네 놈들이 내년까지 살 걱정을 왜 하느냐! 황성에서는 신성한 의식을 위해 막대한 곡식이 필요하다! 어서 내놔!”

    징수관은 비웃으며 장노인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를 거칠게 밀쳐냈다. 깡마른 장노인은 속절없이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아악!”

    쓰러진 장노인의 등 위로 제국군 병사의 몽둥이가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장노인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강휘는 그 광경을 보고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의 옆에서 어머니는 입을 틀어막고 흐느꼈고, 어린 동생은 공포에 질려 강휘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 반역의 무리 같으니! 황명을 거역하려 드는가!” 징수관은 싸늘하게 외치며 병사들에게 명했다. “샅샅이 뒤져라! 한 톨도 남기지 말고 모두 압수하라!”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집집마다 들이닥쳤다. 부엌의 낡은 항아리를 부수고, 마루 밑을 파헤치고, 심지어는 이불 속까지 뒤지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그들이 찾아낸 것은 쥐새끼나 먹을 만한 쥐똥 섞인 묵은 곡식 몇 줌, 그리고 갓 캔 듯한 누런 풀뿌리 몇 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마저도 모두 자루에 담아갔다.

    “이것이 전부라니… 역병이 들었구나! 쯧쯧. 이래서야 황제가 너희를 어여삐 여길 수가 있겠느냐!”

    징수관은 혀를 차며 경멸의 눈빛으로 마을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황급히 종이에 뭔가를 적어 병사들에게 건넸다.

    “이들을 당장 황성으로 끌고 가라! 병사들의 군량미를 채우는 노역에 동원할 것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이들은 강휘 또래의 젊은 사내들과 미혼의 처녀들이었다. 강휘 역시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안 돼! 우리 아들! 강휘야!”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병사들은 무자비하게 그녀를 밀쳐냈다. 강휘는 눈앞에서 어머니가 흙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온몸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수십 명의 무장한 병사들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그는 그저 무력하게 잡혀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장노인이 피투성이 몸을 이끌고 겨우 일어섰다.

    “이 비렁뱅이 같은 놈들아! 하늘이 두렵지 않으냐! 너희가 정녕 황제의 백성들을 이리 다루어도 되는 것이냐!”

    장노인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의 눈빛은 핏발이 서 있었으나, 그 안에는 죽음을 불사하는 굳건함이 있었다. 징수관은 그의 외침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오, 노인장께서 아직도 혀를 놀리시는군. 좋다. 너의 그 대쪽 같은 기개를 황제 폐하께 보여드리도록 하지.”

    징수관은 병사에게 손짓했다. 병사들이 장노인을 둘러쌌다. 강휘는 불길한 예감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장노인! 안 됩니다!”

    그가 외치려 했으나, 뒤에서 잡아챈 병사의 손아귀가 억세게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순간, 병사들의 몽둥이가 장노인의 몸을 향해 무자비하게 쏟아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뼈가 부러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장노인의 몸은 맥없이 축 늘어졌고, 곧 피범벅이 된 채 흙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눈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으나, 그 안의 빛은 이미 꺼져 있었다.

    “장노인…!”

    강휘의 목에서 신음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몸은 분노와 슬픔으로 격렬하게 떨렸다. 그는 병사들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징수관의 목을 당장이라도 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그의 몸은 수십 명의 병사들에게 붙들려 있었다.

    그날 밤, 강휘와 마을의 젊은이들은 끌려갔다. 징수관은 떠나기 전, 마을 사람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다시는 황명을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이 마을은 지도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징수대와 병사들은 말발굽 소리를 남기며 황성 방향으로 사라졌다. 남은 마을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피투성이가 된 장노인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는 슬픔과 함께, 깊은 절망과 더 깊은 증오가 서려 있었다.

    강휘는 끌려가는 마차 안에서 내내 그날의 참상을 떠올렸다. 장노인의 죽음, 어머니의 절규, 동생의 울음소리. 그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불덩이가 끓어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한이 응축된, 거대한 복수의 불꽃이었다.

    며칠 밤낮을 달려 도착한 황성은, 그야말로 다른 세상이었다. 마을의 잿빛과 대비되는 휘황찬란한 금빛 궁전들,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 밤에도 꺼지지 않는 수많은 등불들. 그 화려함은 강휘의 눈을 현혹하기보다 더욱 강렬한 역겨움을 안겨주었다. 제국의 부는 모두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백성들의 피와 땀, 눈물과 목숨을 앗아 만들어진 허상.

    그들은 황성 근처의 거대한 노역장에 갇혔다. 수백, 수천 명의 평민들이 짐승처럼 일했다. 황궁 증축 공사, 성벽 보수, 귀족들의 정원 꾸미기 등 끝없는 노역에 시달렸다. 매일 밤, 강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성 위로 떠 있는 거대한 달은 유난히 희미하고 차가워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해가 저물고 노역자들이 하나둘 쓰러져 잠이 들 무렵이었다. 강휘는 우연히 몇몇 노역자들이 모여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들었나? 저 남쪽, 백룡산 자락에서 ‘바람칼’이라 불리는 자가 나타났다고 하더군.”

    “바람칼? 그게 누구인가?”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제국 병사들을 단신으로 격퇴한다는 신출귀몰한 자라네. 어떤 이는 그가 선인이 보낸 심판자라고도 하더군.”

    “선인이라니… 허튼소리 마라. 이 세상에 선인이 어디 있나. 다들 황제의 편에 서서 우리를 억압할 뿐이지.”

    “그래도… 어쩌면, 어쩌면 우리도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노역자들의 눈빛에 오랜만에 희미한 불씨가 피어오르는 것을 강휘는 똑똑히 보았다. 바람칼. 선인. 미신과 같은 이야기였지만,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작은 희망조차 움켜쥐려 했다. 강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속의 불꽃이 더욱 거세지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밤, 강휘는 잠들지 못했다. 노역자들의 희망 섞인 속삭임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선인이든 아니든, 누군가는 저 거대한 제국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자신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장노인의 죽음, 어머니와 동생의 고통, 그리고 모든 잿빛마을 사람들의 절망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 전, 강휘는 몰래 노역장을 빠져나왔다. 그는 더 이상 짐승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빼앗기고, 밟히고, 절망하며 죽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황성이 눈앞에 아득히 펼쳐진 언덕 위에서, 손에 쥔 돌멩이를 부스러뜨릴 듯 꽉 움켜쥐었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황성 너머 어렴풋이 보이는 거대한 산맥, 전설 속 선인들이 기거한다는 백룡산을 향했다. 제국이 천 년간 쌓아 올린 견고한 성벽은 그의 눈에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젠가 깨부숴야 할 거대한 감옥일 뿐이었다.

    “기다려라. 이 강휘,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너희의 잿빛 세상을 끝장낼 것이다.”

    강휘의 입에서 굳은 맹세가 터져 나왔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슬픔이나 분노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이제, 굳건한 결의와 뜨거운 투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제국에 맞설 작은 불씨였으나, 언젠가 모든 것을 태워버릴 거대한 횃불이 될 것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어스름한 새벽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목적지는 백룡산. 희망의 칼날, 바람칼이 있다는 그곳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끌려가는 노예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는, 제국에 맞선 반란의 첫걸음을 떼는 한 명의 전사였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그의 심장은 뜨겁게 고동쳤다.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막을 올리고 있었다.

  • 좀비 아포칼립스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철골만이 앙상하게 남은 돔 경기장은,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을 비웃기라도 하듯 잿빛 먼지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한때 수많은 환호가 터져 나왔을 관중석은 이제 절반 이상이 무너져 내린 채, 간간이 생존자들의 그림자만이 희미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희망보다는 체념과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공기 중에는 먼지와 퀴퀴한 곰팡이 냄새, 그리고 저 멀리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짐승들의 쉰 목소리, 즉 ‘그림자’들의 낮은 울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인류의 멸망을 알리는 영원한 자장가 같았다.

    “운명결전무회.”

    류한은 제 차례를 기다리며 비좁은 대기 공간에 기대어 섰다. 낡은 철판으로 얼기설기 짜여진 무대, 그 위에 얼룩덜룩하게 말라붙은 검붉은 흔적들을 무심히 응시했다.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이 투기장은 오직 절망과 피로 얼룩진 인류 최후의 발악이었다. 승자는 ‘연합진’의 총지휘권을 얻고, 고성 깊숙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 속 ‘창세의 비전’을 해독할 권리를 부여받는다. 그것이 그림자들을 몰아낼 유일한 희망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아니, 믿고 싶어 했다.

    “크으으윽…!”

    무대 위에서 들려오는 거친 신음소리에 류한의 시선이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 무대를 지배하던 ‘강철권’ 오대수가 간신히 한쪽 무릎을 짚고 서 있었다. 그의 온몸은 피투성이였고, 거대한 육중함에도 불구하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오대수의 주먹은 바위를 부수고 강철을 찌그러트린다는 명성을 지녔지만, 지금 그의 주먹에는 핏방울만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비연검’ 이소월이 마치 한 마리 나비처럼 가볍게 서 있었다. 흑림 문파의 비검술은 말 그대로 제비처럼 빠르고, 칼날은 연기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녀의 가는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살기가 전신을 감싸고 있었고, 흑색 도포 자락은 무대 위를 흐르는 바람에 나부꼈다. 소월의 검 끝에서는 붉은 피 한 방울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오대수의 팔뚝을 깊게 베어낸 상흔의 증거였다.

    “젠장… 이 계집애가…!”

    오대수가 이를 갈며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발 아래 철판이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온몸의 근육이 비틀리고 솟아오르며, 강렬한 내공이 뿜어져 나왔다. 투기장을 채운 공기가 순간적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절박함이 류한의 눈에는 비쳤다. 저들은 단순히 승리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 인류의 운명을 위해 싸우는 전사들이었다.

    “강철! 쇄신권!”

    오대수가 포효하며 지면을 박찼다. 콰앙! 굉음과 함께 그의 육중한 몸이 날아올랐고, 거대한 주먹은 흡사 쇠망치처럼 이소월에게 쇄도했다. 파공음이 귀청을 찢을 듯했다. 저 한 방에 맞으면 평범한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쉬이이익!

    그러나 이소월은 예상대로 움직였다. 그녀의 경공술은 바람 같았다. 오대수의 주먹이 닿기 직전, 마치 환영처럼 사라졌다. 오대수의 강철권이 허공을 갈랐고, 그 충격파에 무대 바닥의 먼지가 폭발하듯 흩날렸다.

    “어디를!”

    이소월은 오대수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녀의 ‘비연검’은 허공을 한 번 휘젓더니, 은빛 궤적을 그리며 오대수의 목을 노렸다. 살기를 품은 검날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크윽!”

    오대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팔뚝으로 검격을 막아냈다. 쨍그랑!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지만, 소월의 검은 뼈를 깎는 듯한 예리함으로 오대수의 팔뚝을 또다시 깊게 갈랐다. 피가 솟구쳤다. 오대수는 비틀거렸지만, 악착같이 버티며 역으로 팔꿈치로 소월을 찍어 눌렀다.

    쾅!

    소월은 기민하게 몸을 돌려 오대수의 공격을 피했지만, 그 충격에 잠시 균형을 잃었다. 바로 그때였다. 오대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광기가 번득였다.

    “잡았다!”

    오대수의 주먹이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는 궤적이었다. 이소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푸른빛의 내공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촤르르륵!

    검집에서 다시 뽑아낸 ‘비연검’이 마치 살아있는 제비처럼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칼날이 일으킨 바람이 오대수의 주먹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퍽! 챙강!

    주먹과 검날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검날은 오대수의 단단한 주먹을 깊숙이 파고들었고, 오대수의 주먹은 소월의 검날을 간신히 쳐냈다. 이소월은 그 반동으로 뒤로 크게 밀려났고, 오대수 또한 손등에서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피가 튀었다. 관중석에서는 탄식과 함께 침묵이 흘렀다. 이소월은 입가에 피를 머금은 채 비틀거렸다. 오대수 역시 오른팔이 너덜거렸지만, 그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그의 눈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네놈은… 여기까지다!”

    오대수가 다시 한번 포효했다. 왼손으로 지면에 박힌 철판을 부수듯 짚고, 으스러진 오른팔을 애써 들어 올렸다. 피로 물든 주먹에 다시 한번 강철 같은 기운이 서렸다. 그의 남은 힘을 모두 쏟아부을 작정이었다. 필살의 일격.

    하지만 그때였다.

    휘이이잉…!

    경기장 바깥에서 들려오던 그림자들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그리고 이어진 끔찍한 비명 소리. 섬뜩한 굉음이 지면을 흔들었다. 경기장 한쪽 벽면에서 거대한 균열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마치 거대한 짐승이 심장을 울리는 듯한 소리였다.

    모든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경기장 벽에 세워둔 콘크리트 바리케이드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붉게 빛나는 눈동자와 검은 발톱들이 어둠 속에서 번득였다.

    ‘그림자들이다…’

    류한은 이를 악물었다. 설마 이 경기장까지 직접 침입할 줄은 몰랐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었다.

    “상황 발생! 투기장 벽면 붕괴! 그림자 무리가 침입한다! 각 파 문주는 즉시 방어선을 구축하라!”

    확성기를 통해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판석에 앉아 있던 노인들이 벌떡 일어섰다. 그들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었다.

    오대수와 이소월은 서로를 노려보던 눈빛을 거두고, 그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균열을 응시했다. 승패는 이제 의미가 없었다. 더 큰 위협이 닥쳐왔다.

    “이런… 망할…!”

    오대수는 욕설을 내뱉으며 피 묻은 오른팔을 움켜쥐었다. 이소월 또한 검을 고쳐 잡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만은 흔들림 없이 날카로웠다.

    류한은 품속의 흑목도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칼집 속에서도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비좁은 대기 공간을 벗어나 무대로 향했다.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무림 고수들의 싸움은 서로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 진정한 투쟁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그림자들의 검은 발톱이 균열을 넘어 투기장 안으로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류한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그의 ‘고요한 발걸음’은 이미 피로 물든 무대 위로 조용히 향하고 있었다. 무명의 검객, 류한. 그의 검 끝에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류한은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낮은 속삭임을 들었다.
    ‘때가 되었다….’
    그것은 바람소리 같기도, 환청 같기도 했다. 하지만 류한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의 차례가 온 것이다.
    절규의 투기장, 검은 발톱과 무인의 혼이 격돌하는 혼돈 속에서.

  • 크툴루 신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저주받은 낙원: 7화 – 심연의 메아리**

    장마가 시작되려는 듯, 검은 구름이 도시의 마천루 꼭대기를 집어삼킬 기세로 낮게 깔려 있었다. 불길한 정적이 공기를 짓누르는 가운데, 나는 허름한 건물 옥상 난간에 위태롭게 서서 아래를 굽어봤다. 번쩍이는 네온사인 아래, 한때 내가 모든 것을 바쳤던, 그리고 모든 것을 빼앗겼던 이 거대한 도시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현석….”

    갈라진 목소리가 빗물 머금은 바람에 흩어졌다. 내 입에서 그의 이름이 튀어나올 때마다,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피 비린내가 나는 증오가 치솟았다. 최현석. 한때 나를 ‘형’이라 부르며 따랐고, 내 모든 것을 공유했던 유일한 친구. 그러나 그 이름은 이제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마의 언어와도 같았다.

    그는 내 모든 것을 파괴했다. 내 연구, 내 명예, 내 가족. 그 빌어먹을 고대 유물 ‘심연의 눈’을 함께 파헤쳤던 그날 밤 이후, 나의 삶은 산산조각 났다. 그는 그 유물의 힘을 탐했고, 나를 미끼로 삼아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하려 했다. 나는 지옥 끝까지 추락했고, 그곳에서 나는 악마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악마의 그림자를 빌린, 그보다 더 끔찍한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래에 있는 건물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창고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달랐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끔찍하게 뒤틀린 에너지의 흐름이 건물을 휘감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리며, 이 도시의 어두운 심장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의 울림과 공명하고 있었다. 내가 ‘심연의 눈’을 통해 얻은, 동시에 나의 영혼을 좀먹는 능력이었다.

    “젠장….”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현석이 이 창고 건물 지하에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는 정확했다. 그의 어둠은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겨우 초보적인 수준의 주술에 매달리던 녀석이, 이제는 감히 심연의 권능을 조작하려 들고 있었다. 분명 더 깊이, 더 위험한 존재와 접촉한 것이 틀림없었다. 나의 복수는 단순히 현석의 숨통을 끊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그를 이토록 타락하게 만든 근원을 찾아 뿌리째 뽑아야 했다.

    나는 폐허가 된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무중력 상태처럼 몸이 공중에 잠시 떠올랐다가, 아래층 옥상으로 소리 없이 착지했다. 발밑의 콘크리트가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강화된 신체 능력. 이것 또한 그 지옥 같은 심연의 문턱에서 내가 얻은 대가였다. 인간으로서의 나를 버리고 얻은 능력. 가끔은 내가 아직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었다.

    창고 건물 뒷편의 낡은 환기구를 목표로 움직였다. 그림자 속을 유영하듯, 나는 마치 어둠 그 자체가 된 것처럼 움직였다. 경비 시스템은 이미 한 시간 전, 내가 심어둔 바이러스에 의해 무력화된 상태였다. 인간의 눈으로 나를 막을 순 없었다. 진정한 위험은 언제나 인간의 영역 너머에 있었다.

    환기구는 녹슬어 삐걱거렸지만,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듯한 불쾌한 소리를 내며 순순히 열렸다. 미로 같은 덕트 안으로 몸을 던졌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약품 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풍겨오는 철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을 기어가는 동안, 내 시야는 환기구 내부를 투과하여 아래층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지하 3층, 가장 깊숙한 곳에서 가장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 심장이 불규칙하게 고동쳤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끓어오르는 복수심과 함께, 미지의 존재에 대한 원초적인 호기심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나는 어둠 속으로 더 깊이 기어 들어갔다.

    마침내, 환기구 끝에 도달했다. 아래에는 지하 깊숙이 파인 거대한 원형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붉고 검은 문양이 바닥과 벽을 뒤덮고 있었고, 그 중앙에는 거대한 석판이 놓여 있었다. 석판 위에는 정체불명의 물질로 만들어진 제단이 세워져 있었고, 그 주위로 검은 로브를 걸친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앙에, 최현석이 있었다.

    그는 예전의 날카롭고 이성적이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얼굴은 기묘하게 수척해졌고, 눈은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검고 공허했다. 그의 손에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흉측한 형상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가 내뱉는 주문은 인간의 언어라고 할 수 없었다. 혀가 뒤틀리고 목구멍에서 찢어지는 듯한 기괴한 소리들이 공간을 채웠다. 그 소리는 내 두개골을 짓누르는 듯한 압력을 가했고, 정신을 교란시켰다.

    **크툴루 신화**의 세계에서는, 이런 소리 하나만으로도 평범한 인간의 이성을 붕괴시킬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 또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 소리를 견뎌냈다.

    “현석… 네놈이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나.”

    나는 그의 변화된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더 이상 나의 친구가 아니었다. 그저 또 다른 심연의 꼭두각시, 혹은 그들의 광기를 탐하는 어리석은 인간일 뿐이었다.

    그때, 제단 위의 단검이 섬광처럼 번쩍이더니, 석판 중앙의 균열에서 검고 끈적거리는 액체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액체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점차 거대한 형상을 갖춰갔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혐오스러운 형태였다. 비늘인지 가죽인지 알 수 없는 피부, 수많은 눈동자가 박힌 머리, 뒤틀린 촉수들이 허공을 휘저었다.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태초의 혼돈에서 기어 나온 듯한 존재였다.

    제단 주변의 로브를 입은 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현석의 기괴한 주문과 합쳐져, 하나의 거대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현석은 감히 되살려서는 안 될 존재를 완전히 소환하고 말 것이다.

    나 또한 심연의 힘을 다루는 자. 그들의 광란에 동참하는 척, 나의 어둠을 해방시키기로 했다.

    나는 환기구의 격자를 조용히 뜯어냈다.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는 지하의 끔찍한 소음 속에 완전히 파묻혔다. 나는 그대로 몸을 아래로 던졌다. 20미터가 넘는 높이였지만,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착지 직전, 내 몸을 감싼 그림자가 지면에 먼저 닿아 충격을 흡수했다. 그림자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내 발밑에서 춤을 추다가 다시 내 몸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로브를 입은 자들 중 가장자리에 서 있던 한 명의 뒤에 소리 없이 섰다. 그는 심연의 존재에게 완전히 정신이 팔린 듯, 나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싸늘한 기운이 로브 입은 자의 몸을 타고 흘러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그는 경악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의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으로 변하는 순간, 나는 그의 정신 속으로 파고들었다. 인간의 이성이 버텨낼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광경들이 그의 의식을 강타했다. 우주 저편의 차가운 진공, 기형적인 형상의 신들, 영원히 반복되는 고통의 순환.

    “크아아악!”

    로브 입은 자의 비명이 지하 공간을 찢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눈을 손톱으로 마구 할퀴기 시작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고, 그는 바닥에 쓰러져 발작하며 거품을 물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다른 로브 입은 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향했다. 그들의 얼굴은 공포와 분노로 일그러졌다. 현석의 주문이 잠시 멈췄다. 그의 공허한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향했다. 그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강준호… 네가 감히 여기까지 왔을 줄이야.”

    그의 목소리는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눅진하고 비인간적인 울림을 담고 있었다. 마치 심연 그 자체가 말을 하는 듯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했다. 나의 눈동자 또한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네놈은 이 우주를 재앙으로 몰아넣을 뻔했지.”

    말을 마치는 순간, 나는 손을 들어올렸다. 내 손바닥에서는 어둠이 응축되어, 작고 검은 구체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빛을 집어삼키는 듯한 불길한 기운을 내뿜었다.

    “이게 바로 네놈이 내게서 빼앗으려 했던 힘의 진정한 모습이다, 현석.”

    나는 그 구체를 현석이 들고 있던 단검을 향해 날렸다. 검은 구체는 공간을 찢고 날아가, 정확히 단검에 명중했다.

    콰앙!

    귀청을 찢는 듯한 폭발음과 함께, 단검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현석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뒤로 휘청거렸다. 그가 들고 있던 단검은 검은 구체의 힘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단검이 파괴되자, 제단 위에서 꿈틀대던 혐오스러운 존재의 형상이 흔들리며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파동이 지하 공간을 뒤흔들었다.

    “네 이놈! 감히 내 의식을 방해해?!”

    현석이 피와 증오로 물든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이제 인간적인 표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완벽한 광기였다.

    나는 그의 분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로브 입은 자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의 의지에 따라 그림자들이 그들의 발밑에서 솟아올랐다.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그림자들은 그들의 발목을 휘감고, 몸을 조여들었다. 공포에 질린 비명들이 터져 나왔다.

    “네놈의 광기는 여기까지다, 최현석. 이제 네가 빼앗아간 모든 것을 되찾아줄 시간이다.”

    나는 싸늘하게 선언했다. 하지만 현석은 나의 위협에 비웃음으로 답했다.

    “착각하지 마라, 강준호. 너 또한 나처럼 이 심연의 일부가 되었을 뿐! 우리에게 도망칠 곳은 없어! 네가 나를 죽인다고 해도, 이 광기는 결코 끝나지 않아!”

    그의 외침과 함께, 제단 위에서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혐오스러운 존재가 갑자기 거대한 촉수 하나를 휘둘렀다. 마치 분노에 찬 신의 채찍처럼, 촉수는 나를 향해 맹렬하게 날아왔다.

    나는 피할 수 없었다. 아니, 피하지 않았다.

    촉수가 내 몸에 닿는 순간,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꿰뚫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듯한 감각.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내 몸에 흐르는 어둠의 힘이 촉수의 침식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게 네놈의 끝이 아닐 거야, 현석. 난 널 이 심연의 끝까지 끌고 갈 거니까.”**

    나는 피를 토해내며 말했다. 현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서 광기와 함께 희미한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그가 처음으로, 자신이 발을 들인 심연의 깊이를 깨달은 것처럼.

    촉수에 의해 멀리 날아간 나는 거대한 기둥에 부딪혔다. 몸이 완전히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나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단검이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하게나마 다시 형체를 잡아가려는 제단 위의 혐오스러운 존재와, 그 앞에서 나를 향해 절규하는 현석의 얼굴이었다.

    나는 실패한 것인가? 아니.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내 복수는, 이제 막 심연의 문을 두드린 참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 선협 (신선)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제목: 제 오장: 천뢰(天雷)를 가르는 검, 운명의 대회 제 삼십육 경기**

    웅장한 천상 경기장은 셀 수 없는 신선과 무림 고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은하수가 쏟아지는 듯한 영롱한 빛이 거대한 대련장을 비추었고, 그 아래 옥으로 만들어진 무대는 그 어떤 비무도 버텨낼 듯 단단해 보였다. 오늘 열리는 대회는 단순한 힘 겨루기가 아니었다. 암흑의 기운이 천하를 잠식하려 드는 이때, 신선계와 무림계는 힘을 합쳐 세상의 운명을 걸고 최강의 무인을 뽑는 이 ‘천룡대회(天龍大會)’를 열었던 것이다.

    침묵 속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회의 삼십육 번째 경기가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찾아왔다.

    “다음은, 청룡도의 주인, 철혈검문(鐵血劍門)의 청룡도제! 한태오!”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객석에서 와아 하는 함성 대신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한태오는 중원의 십대 고수 중에서도 손꼽히는 인물로, 그가 든 푸른 용의 문양이 새겨진 도(刀)는 수많은 강자들의 목을 베어낸 전설적인 무기였다. 그의 등장에 경기장 한쪽에서 푸른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한태오는 늠름한 체구에 강렬한 눈빛을 지닌 사내였다. 허리에 찬 청룡도에서는 싸늘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고, 그의 발걸음 한 걸음마다 옥석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리고 그의 상대는… 북궁문(北宮門)의 신진 무사, 운휘!”

    운휘의 이름이 호명되자 관중들은 더욱 술렁였다. 북궁문은 쇠락한 문파였고, 운휘는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소년에 불과했다. 모두가 이 경기가 한태오의 손쉬운 승리로 끝날 것이라 예상했다. 그 누구도 운휘가 한태오를 상대로 한 합이라도 제대로 겨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운휘는 달랐다.
    고요한 발걸음으로 무대에 오른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한태오를 향하고 있었다. 비록 낡아 보이는 검 한 자루를 찼을 뿐이었지만, 그의 온몸에서는 어떤 기세에도 꺾이지 않을 강인함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수많은 시선들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의 의식은 오직 눈앞의 강대한 적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어린 친구로군. 여기서 멈추는 게 좋을 거다.”
    한태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에는 일말의 경멸도 없었지만, 그저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여유가 엿보였다.

    운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허리에 찬 낡은 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쥐었다. 그 순간, 검은 그의 손에 착 달라붙는 듯한 익숙한 감각을 전해왔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길이다.’
    그의 심장이 맹렬하게 고동쳤다.

    “경기… 시작!”

    심판의 외침과 동시에 한태오의 청룡도가 번개처럼 뽑혔다. 푸른 도기(刀氣)가 허공을 가르며 거대한 용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용은 굉음을 내며 운휘를 향해 돌진했다. 감히 그 누구도 정면으로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할 압도적인 기세였다.

    “청룡섬광참(靑龍閃光斬)!”

    운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용의 그림자가 자신을 집어삼키려 들었지만, 그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낡은 검집에서 섬광처럼 뿜어져 나온 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은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가 펼쳐지는 듯 신비로운 궤적을 그리며 용의 머리를 정확히 노렸다.

    콰아앙!

    청룡의 기운이 운휘의 검과 부딪히며 거대한 폭발음을 일으켰다. 경기장의 옥석 바닥이 금이 가기 시작했고, 폭풍 같은 기운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운휘는 뒤로 세 걸음 밀려났지만, 그의 눈빛은 더욱 형형하게 빛났다. 청룡도제의 일격을 정면으로 막아낸 것에 관중들은 경악했다.

    “흥, 제법이군.”
    한태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하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닐 테지.”

    그의 발이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육중한 도가 허공을 가르며 수십 개의 푸른 잔영을 만들어냈다.
    “청룡십삼도(靑龍十三刀)!”

    도기가 칼날 하나하나에 서려 광포한 바람과 함께 운휘를 덮쳐왔다. 운휘는 눈을 감고 귀를 열었다. 바람 소리, 도기의 움직임, 그리고 한태오의 미세한 호흡까지. 모든 것이 그의 감각 속에서 선명하게 포착되었다.

    ‘북궁비검(北宮秘劍)… 제 일식, 유성추월(流星墜月)!’

    운휘의 검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빠르게 회전하며 도기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그의 검은 마치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처럼, 예측 불가능한 궤적으로 한태오의 빈틈을 노렸다. 낡은 검날 위로 푸른 빛이 덧입혀졌다. 그것은 그가 수련한 북궁문의 비기, 자연의 기운을 빌려 쓰는 ‘풍화검결(風華劍訣)’이었다.

    쉬이이잉! 파아앙!

    수십 개의 푸른 도기가 마치 거대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지만, 운휘는 그 모든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흘려내거나 검끝으로 쳐냈다. 그의 검 움직임은 빠르면서도 유려했고, 마치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듯했다. 그러나 한태오의 도는 강력했다. 매번 부딪힐 때마다 운휘의 검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의 팔은 서서히 마비되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안 돼,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

    한태오는 운휘의 방어적인 움직임에서 약점을 간파했다. 그의 도가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운휘의 검이 아닌, 그의 몸통을 향해 쇄도했다. 방어할 틈도 주지 않는 기습이었다.

    “크윽!”

    운휘는 간신히 검을 비틀어 막아냈지만, 충격은 고스란히 그의 몸에 전해졌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에 그의 입술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몸의 균형이 무너지고, 그는 크게 휘청거렸다.

    이때다! 한태오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놓치지 않았다.

    “이제 끝이다, 소년!”

    청룡도가 하늘로 치솟았다. 푸른 기운이 응축되어 거대한 도신의 형상을 이루었다. 천상 경기장의 옥석 천장이 울릴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었다. 모든 것이 압도적이었다.

    “청룡멸세참(靑龍滅世斬)!”

    하늘에서 거대한 푸른 칼날이 운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세상을 멸할 듯한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운휘는 피할 수 없었다. 아니,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잃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무너진 문파, 쓰러져 간 스승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건넨 한 마디…
    ‘네 안에 잠든 바람을 깨워라. 그것이 너를 구원할 유일한 길이다.’

    운휘는 모든 것을 잊었다. 고통도, 두려움도, 자신의 존재마저도.
    오직 검만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바람… 바람의 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풍화검결의 기운이 갑자기 변질되기 시작했다. 푸르던 기운은 투명해지더니, 점차 거칠고 날카로운 회오리바람으로 변해갔다. 낡은 검날 위로 푸른 바람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뜻을 담은 듯한, 신비로운 바람이었다.

    운휘는 고통을 잊은 채, 오직 하나의 동작에 모든 것을 실었다.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북궁비검… 제 이식, 풍뢰일섬(風雷一閃)!”

    수직으로 떨어지는 청룡멸세참을 향해, 운휘의 검이 역으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검이 아니었다. 바람이 휘몰아치고, 번개가 번쩍이는 듯한 움직임.
    굉음과 함께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경기장을 뒤덮었다.

    콰아아아앙!!!

    두 거대한 힘이 충돌했다.
    거대한 푸른 칼날과, 그를 뚫고 솟아오르는 바람과 번개의 검.
    천상 경기장 전체가 흔들렸다.
    관중들은 입을 다문 채 숨을 죽였다.
    그리고…
    장막처럼 펼쳐졌던 기운의 폭풍이 걷히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청룡도제의 거대한 청룡멸세참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잔해 속에서 운휘는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한 채 서 있었다.
    그의 낡은 검날 끝에서는 푸른 바람의 기운이 아직도 희미하게 감돌고 있었다.

    한태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런 일이… 말도 안 돼!”

    운휘는 피를 토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의 눈빛은 승리자의 그것이었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지만, 이 일격으로 승패의 균형은 무너졌다.

    경기장은 침묵에 잠겼다가, 이내 거대한 폭풍 같은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무명의 소년이 천하의 십대 고수 중 하나를 상대로 기적을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운휘는 검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여전히 한태오를 향하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의 의지는 불꽃처럼 타올랐다.

  • 마법소녀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별빛이 이끄는 길: 잊혀진 심연의 서곡

    **[장면 1]**

    **#1. 흐릿한 오후의 골동품 가게**

    (컷: 오래된 먼지가 가득한 골동품 가게 내부. 낡은 서적들이 빼곡하게 꽂힌 서가 앞, 햇살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다. 그 햇살 아래, 평범한 교복 차림의 여고생 ‘서하’가 낡은 책 한 권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고 있다. 책의 표지는 빛바래고, 알 수 없는 고대 문양이 새겨져 있다.)

    **서하 (내레이션):** 그날 오후, 나는 늘 그렇듯 낡고 희귀한 이야기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닳고 닳은 책갈피 사이에서, 어쩌면 특별한 우주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로.

    **서하:** (책을 펼치며 혼잣말) 음… ‘고대의 별자리 이야기’라.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데.

    (컷: 서하가 책을 펼치는 순간, 낡은 종이 사이에서 손바닥만 한 펜던트 하나가 툭, 하고 떨어져 책상 위로 굴러떨어진다. 펜던트는 은빛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며, 중앙에는 작은 별 모양의 보석이 박혀 있다.)

    **서하:** 어? 이게 뭐지?

    (컷: 서하가 펜던트를 집어 든다. 그녀의 손가락이 별 모양의 보석에 닿는 순간, 펜던트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퍼져 나온다. 동시에, 그녀가 들고 있던 책 속의 고대 문자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반짝이며 둥둥 떠오른다.)

    **효과음:** 쉬이이잉-! (펜던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소리)
    **효과음:** 촤르륵! (책 속 글자들이 떠오르는 소리)

    **서하:** 으악! 이게 무슨…?!

    (컷: 떠오른 글자들이 공중에 떠올라 짧은 문장을 형성한다. 그 문장은 고대의 언어로 쓰여 있지만, 신기하게도 서하의 머릿속에 그 뜻이 번역되어 새겨진다.)

    **고대 문자 (번역):** `별빛이 이끄는 곳으로… 잊혀진 우물이 너를 기다린다.`

    **서하:** 잊혀진 우물…?

    (컷: 서하의 눈에 펜던트가 더욱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빛은 한 방향을 가리키는 듯하다. 서하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함께 묘한 호기심이 스친다.)

    **[장면 2]**

    **#2. 숲 속, 잊혀진 우물의 입구**

    (컷: 울창한 숲 속,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 이끼 낀 돌들 사이에 오래된 석조 우물이 보인다. 우물은 거의 폐허처럼 보이며, 주변은 넝쿨로 뒤덮여 있다. 서하가 펜던트의 빛을 따라 우물 앞에 서 있다. 숨을 헐떡이는 그녀의 모습.)

    **서하:**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우, 겨우 찾아왔네… 여기가 그 잊혀진 우물이라고? 너무 낡았잖아.

    (컷: 서하가 펜던트를 우물 안으로 조심스럽게 가져간다. 펜던트의 빛이 우물 바닥을 비추자, 놀랍게도 우물 바닥이 흐릿한 안개처럼 사라지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이 나타난다.)

    **효과음:** 스르르르… (우물 바닥이 사라지는 소리)

    **서하:** 맙소사…!

    (컷: 어둠 속에서 차가운 기운이 서하를 감싼다. 그녀는 망설이는 듯 주춤거리지만, 이내 펜던트의 따뜻한 빛과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이끌려 조심스럽게 첫 계단을 밟는다.)

    **서하 (내레이션):** 두려웠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 작은 펜던트가 나를 이끄는 곳에는 분명, 내가 찾던 특별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으니까.

    **[장면 3]**

    **#3. 심연 속 고대 유적**

    (컷: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온 서하. 눈앞에는 거대한 지하 공간이 펼쳐진다. 천장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사방에는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진 거대한 석조 기둥들이 늘어서 있다. 공기는 차고 축축하며,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난다. 서하의 펜던트만이 유일한 빛이다.)

    **서하:** 와… 이게… 대체…

    (컷: 서하가 경이로움에 휩싸여 주변을 둘러본다. 그때, 어둠 속 한구석에서 작고 푸른 빛의 구슬 하나가 떠오른다. 그 빛은 서하의 펜던트와 비슷한 색깔이다.)

    **효과음:** 뾰로롱-! (작은 빛이 나타나는 소리)

    **서하:** 누구세요?

    (컷: 빛의 구슬이 서하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더니, 그녀의 어깨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다. 작은 구슬은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듯 서하를 지그시 응시한다.)

    **아루:** (맑고 어린 목소리) 드디어 오셨군요, 별빛의 계승자여.

    **서하:** 으아악! 말하는 구슬이라니! 당신은… 대체 뭐예요?

    **아루:** 저는 이 유적의 수호자, ‘아루’라고 합니다. 이 펜던트가 당신을 이끈 것을 보니, 당신이 그 분이 맞군요.

    **서하:** 그… 그분이라니요? 무슨 말이에요?

    **아루:** 이 펜던트는 단순한 보물이 아니에요. 잊혀진 마법의 근원으로 향하는 ‘열쇠’이자 ‘안내자’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주인 없는 빛을 기다리고 있었죠.

    (컷: 아루가 서하의 펜던트를 가리킨다. 펜던트의 빛이 한층 더 강해진다.)

    **아루:** 그리고 당신은, 그 빛에 선택된 존재입니다. 이 유적은…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던 고대 마법이 봉인된 곳. 하지만 지금 그 봉인이 불안정해지고 있어요.

    **서하:** 봉인이 불안정하다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아루:** 우리 함께, 이 유적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진정한 힘이 잠든 곳으로.

    **[장면 4]**

    **#4. 봉인된 문과 첫 번째 시험**

    (컷: 아루의 안내를 받아 유적 깊숙이 들어온 서하와 아루. 거대한 석조 벽면에 거대한 이중문이 우뚝 솟아 있다. 문 전체에는 복잡하고 신비로운 문양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으며, 중앙에는 손바닥 크기의 움푹 파인 홈이 있다.)

    **아루:** 저곳이 바로, 고대 문명의 마지막 기록과 힘이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봉인이 너무 강해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열 수 없습니다.

    **서하:** 그럼 어떻게 열어야 하죠?

    **아루:** 당신 안의 별빛을 깨워야 합니다. 펜던트가 당신을 선택한 이유… 당신에게 잠재된 ‘별빛의 마법’을 사용해야만 이 문을 열 수 있습니다. 펜던트를 저 홈에 넣고, 마음속 가장 깊은 염원을 떠올려 보세요.

    (컷: 서하가 조심스럽게 펜던트를 문 중앙의 홈에 넣는다. 펜던트가 홈에 완벽하게 들어맞자, 문 전체의 문양들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효과음:** 즈으으응… (문양이 울리는 소리)

    **서하 (내레이션):** 염원… 마음속 가장 깊은 염원? 나는 뭘 간절히 바랐을까. 혼란스러운 마음속에서, 단 하나의 생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잊혀진 비밀을 밝혀내고 싶어! 내가 이 빛을 사용할 수 있다면…!

    (컷: 서하의 눈이 강렬한 빛으로 물든다.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주변의 어둠을 밀어내듯, 별처럼 반짝이는 입자들이 그녀의 주변을 감싼다.)

    **서하:** (결연한 표정) 이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세요!

    **효과음:** 쏴아아아아-! (서하의 몸에서 마력이 폭발하는 소리)
    **효과음:** 파지직! (주변 마력장이 형성되는 소리)

    (컷: 서하의 옷이 마법의 빛에 휩싸이며 신비로운 형태로 변한다. 교복 대신 순백의 옷과 반짝이는 장신구가 생겨나고, 등 뒤에는 별빛으로 이루어진 날개 같은 형태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녀의 손에서 은빛 마력이 뿜어져 나와 봉인된 문으로 향한다.)

    **아루:** (놀란 표정) 놀라워라…!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별의 아이여!

    (컷: 서하의 마력이 봉인된 문에 닿자, 문 전체의 문양들이 더욱 격렬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굉음과 함께 봉인이 풀리는 소리가 유적 전체에 울려 퍼진다.)

    **효과음:** 콰아아앙! (봉인이 풀리는 굉음)
    **효과음:** 삐그덕-! (고대 문이 서서히 열리는 소리)

    **[장면 5]**

    **#5. 고대의 기록, 그리고 위기**

    (컷: 육중한 고대 문이 마침내 활짝 열린다. 문 안쪽에는 거대한 원형 홀이 펼쳐져 있다. 홀의 벽면 전체에는 섬세하고 거대한 벽화가 새겨져 있다. 벽화에는 과거에 번성했던 문명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어떤 거대한 위협에 맞서 마법의 힘을 이 지하에 봉인하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서하:** (압도된 표정으로) 이… 이게 다 뭐지?

    **아루:** 이 벽화는 고대 문명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번영을 이끌었던 ‘별빛 마법’이 너무나 강력하여, 잘못 사용될 경우 세상을 파멸로 이끌 수 있음을 깨달았죠. 그래서 그 힘을 이곳에, 심연 깊은 곳에 봉인하려 했던 것입니다.

    (컷: 서하가 벽화를 따라 시선을 옮긴다. 벽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거대한 봉인진이 그려져 있고, 그 봉인진 속에서 불길한 형체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 위로는 알 수 없는 어두운 상징들이 가득하다.)

    **서하:** 이 불길한 그림은… 뭐예요? 봉인이 깨어나고 있다는 건가요?

    **아루:**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린다) 예… 봉인이 완벽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혹은 외부의 어떤 힘 때문에… 봉인이 서서히 약해지고 있는 거죠. 저 그림은 봉인된 힘이 다시 깨어나려 하는 것을 경고하는 것 같습니다.

    **효과음:** 쿠우우우웅-! (갑자기 유적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리는 소리)
    **효과음:** 쩌어어억-! (벽면이 갈라지는 소리)

    (컷: 유적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지고, 바닥에는 균열이 생긴다. 벽화의 마지막 봉인진 부분이 더욱 강렬하고 불길한 붉은빛으로 빛난다.)

    **아루:** 이럴 수가! 봉인이… 정말로 깨어나고 있어!

    (컷: 흔들리는 어둠 속에서, 홀 한구석에 서 있던 거대한 석상 하나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석상은 고대의 전사를 형상화한 듯하며, 그 눈에서는 불길한 붉은빛이 번쩍인다.)

    **효과음:** 크아아아아아-! (석상이 깨어나며 내는 괴성)

    **서하:** (공포에 질린 표정) 으악! 저건 또 뭐야?!

    (컷: 깨어난 고대 수호자 석상이 서하와 아루를 향해 거대한 석검을 겨눈다. 서하는 마법소녀로 변신한 채, 두려움 속에서도 펜던트를 꽉 쥐고 석상을 마주한다. 그녀의 눈빛에는 아직 혼란과 함께 희미한 결의가 비친다.)

    **서하 (내레이션):** 잊혀진 마법의 근원지. 그리고 깨어나고 있는 봉인. 내 앞에 나타난 거대한 위협 앞에서, 나는 과연 이 별빛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에피소드 종료]**

  • SF (공상과학) 독립적인 단편 소설

    차가운 금속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빛 한 점 없는 심연 속으로 탐사선이 내려앉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팀원들은 각자의 좌석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의 어둠을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구상 가장 깊은 곳, 태곳적부터 잊힌 채 잠들어 있던 거대한 균열의 틈새로 향하고 있었다.

    “이든 대장님, 현재 고도 마이너스 2700미터, 지하 압력 급증하고 있습니다.”
    조종석에서 카이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짙은 눈썹 아래로 예리한 눈빛을 빛내며 계기판을 주시했다. 카이는 이 팀의 기술 및 보안 담당이었다. 과묵했지만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기계는 없었다.

    내 옆에 앉은 세라는 투명한 스크린에 띄워진 고대 문양들을 정신없이 분석하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은 스크린 위를 춤추는 상형문자에 매료된 듯했다. 세라는 고대 언어 및 유물학 분야의 독보적인 천재였다. 이 임무의 핵심 열쇠는 바로 그녀였다.

    “그래픽 노이즈가 너무 심하군. 제대로 된 스캔은 지하 3천 미터부터 가능할 거다.” 내가 말했다. 팀장으로서 내 역할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 모든 위험을 예측하며, 이들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임무만큼은 내 경험과 지식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지구 깊은 곳에서 포착된 미지의 에너지 파동. 인류의 과학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거대하고 안정적인 신호였다. 그것은 수천 년 전, 어쩌면 수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문명의 흔적일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우리는 그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다.

    탐사선이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착륙했다.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탐사선의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전방을 비추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세상에….” 세라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 눈앞에는 거대한 동굴이 펼쳐져 있었다. 그 동굴의 벽면은 자연적인 암석이 아니었다. 매끄럽고 검은색의 거대한 돌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축물.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빼곡히 새겨진 벽은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문양들 사이로는 희미한 푸른빛이 맥박처럼 깜빡거렸다.

    “이건… 자연의 동굴이 아니에요. 누군가 인공적으로 만든 구조물이에요.” 세라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이든 대장님, 이 문양들… 제가 연구하던 고대 문헌에서 본 것과 유사한 패턴이에요! 하지만 훨씬 더 복잡하고, 미지의 상징들이 섞여 있어요.”

    “카이, 대기 성분 분석. 위험 물질은 없는지 확인해.” 내가 지시했다.
    카이는 휴대용 센서를 꺼내 들어 주위를 스캔했다. “산소 농도 정상. 유해 가스 없음. 기압은 지상과 유사합니다. 놀랍군요.”

    우리는 탐사선에서 내려 내부로 진입했다. 발밑의 바닥은 매끄럽게 가공된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의 발자국 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길고 긴 복도를 따라 걷자, 거대한 아치형 문이 나타났다. 문은 벽과 마찬가지로 검은 돌로 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세라가 문양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닿자 문양에서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번쩍였다. “이건… 일종의 인증 시스템이에요. 살아있는 에너지를 감지하는 것 같아요.”

    “풀 수 있겠어?” 내가 물었다.
    세라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결심한 듯 눈을 반짝였다. “노력해봐야죠. 제가 연구하던 문헌들을 바탕으로 퍼즐을 맞춰볼게요.”

    몇 시간이 흘렀을까. 세라의 손가락은 홀로그램 패널 위를 춤추듯 움직였다. 고대 문양들이 복잡하게 재배열되고, 그에 따라 문의 푸른빛이 변화했다. 마침내, 세라의 마지막 터치와 함께 문양 전체가 밝은 섬광을 내뿜었다.

    쿠우우우우웅-
    거대한 문이 굉음을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뒤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에너지는 우리의 심장을 격렬하게 뛰게 만들었다.

    문의 너머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광경이 펼쳐졌다.
    우리는 거대한 돔형 공간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그 중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빛나는 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고, 기둥들 사이로는 투명한 에너지 라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모든 기둥과 라인에서는 부드러운 푸른빛이 발산되었고, 그 빛은 이 거대한 공간 전체를 신비로운 아우라로 채우고 있었다. 천장에는 거대한 수정 조각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것들은 내부의 빛을 반사하며 마치 별들이 쏟아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게… 전부 인공 구조물이라고요?” 카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무표정이 서려 있었지만, 흔들리는 동공은 그가 느꼈을 경외감을 숨기지 못했다.
    세라는 이미 황홀경에 빠진 듯,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든 대장님, 저기 보세요! 저 수정들… 단순한 장식이 아니에요! 에너지를 흡수하고 방출하는 매개체 같아요. 그리고 저 중앙의 기둥… 마치 이 모든 시스템의 핵심 코어처럼 보여요.”

    중앙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빛나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너자, 중앙 코어에 가까워질수록 에너지의 울림이 더욱 강렬해졌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살아있는 심장처럼 느껴졌다.

    코어는 거대한 수정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주위에는 여러 개의 작은 패널들이 떠다녔다. 세라가 패널 중 하나에 손을 대자, 놀랍게도 패널에서 홀로그램 이미지가 튀어나왔다.

    이미지는 고대 문명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인류와는 전혀 다른 종족이었지만, 놀랍도록 발전된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건설하고, 별들 사이를 유영하며, 우주의 비밀을 탐구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미지 속의 세상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붉은 빛이 화면을 뒤덮었고, 거대한 재앙이 그들을 덮쳤다. 행성이 파괴되고, 문명은 붕괴되었다.

    “그들은… 멸망했어요.” 세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외부의 어떤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지 못했어요.”

    홀로그램은 계속되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최후의 순간, 자신들의 모든 지식과 기술, 그리고 재앙의 기록을 이 지하 유적에 봉인했다. 이 장소는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다. 미래의 생명체, 즉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였다.

    화면은 마지막으로 거대한 에너지의 근원을 보여주었다. 이 모든 시스템을 움직이는 원천이자, 홀로그램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한 그 미지의 에너지 파동이었다. 그 에너지는 잠들어 있었지만, 언제든 깨어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게 그들의 마지막 선물인가… 아니면 또 다른 함정인가.” 내가 중얼거렸다. 그들의 문명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은 인류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대장님, 코어에서 에너지가 불안정하게 진동하고 있습니다. 수치가 계속 상승하고 있어요.” 카이가 경고했다. “오래 머물다간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세라는 마지막 홀로그램 메시지에 적힌 고대 문자를 해석하려 애썼다. “이든 대장님… 그들은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해요. 이 에너지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그리고 미래를 열라고….”

    우리는 코어 앞에 서서 고뇌했다. 이 고대 에너지를 활성화시킨다면, 인류는 상상할 수 없는 기술적 도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잊혀진 문명이 맞닥뜨렸던 알 수 없는 재앙의 씨앗을 품게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의 경고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결국 우리는 단지 그들의 메시지와 일부 지식만을 가지고 돌아가기로 했다. 아직 인류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 거대한 에너지는 아직 더 깊은 잠에 들어야 했다.

    탐사선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의 마음속에는 잊혀진 문명의 그림자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무거운 고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다시 탐사선이 이륙했고, 우리는 미지의 지하 유적을 뒤로한 채 서서히 지상으로 향했다.

    하늘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알고 있었다. 지구의 깊은 곳에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고대의 지혜와 경고가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비밀을 짊어진 우리는, 이제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책임을 안게 되었다. 이 모험은 끝났지만, 진정한 도전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하늘은 언제나 재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대붕괴 이후, 한때 푸르렀던 이 행성의 대기층은 미세한 잿빛 먼지로 가득 차 올랐고, 해는 종종 희미한 주황색 점처럼 보일 뿐이었다. 살아남은 인류는 흙빛 폐허 위에서 겨우 숨을 쉬며, 과거의 영광은 망각의 늪으로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나는 폐허가 된 도시의 심장부에 돋아난 작은 바벨탑, 일명 ‘새벽 보루’의 가장 높은 감시탑에 서 있었다. 사방은 녹슨 철근과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로 뒤덮여 있었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마치 죽은 자들의 손가락처럼 허공을 갈랐다. 한때 문명의 상징이었던 고층 빌딩들은 이제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서진 씨, 거기서 뭐 합니까?”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새벽 보루’의 총 관리관이자, 이 생존자 집단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강준이었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피로와 걱정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살아 있었다.

    “그냥… 보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똑같군요.” 내가 툭 던지듯 말했다.

    강준은 감시탑의 삐걱거리는 계단을 몇 칸 더 올라와 내 옆에 섰다. 낡은 방탄복 차림의 그는 허리에 찬 권총집을 만지작거렸다. “똑같아서 다행인 겁니다. 더 나빠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새벽 보루는 바깥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된 요새였다. 높다란 장벽과 전기 철조망, 그리고 24시간 감시 체계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있었다. 내부는 층층이 쌓인 컨테이너와 임시 막사, 그리고 간신히 복구된 발전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살아남은 약 200여 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오늘은 특이 사항 없었습니까?” 강준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늘 있는 감염체들의 배회와 서쪽 구역의 금속음, 그뿐입니다.”

    우리가 ‘감염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붕괴 이후 출현한 기괴한 생명체들이었다. 한때 인간이었던 것들도 있었고, 아예 다른 형태로 변이된 것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그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맹렬한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강준은 한숨을 쉬었다. “점점 더 힘들어지는군요. 보급품도 바닥나고 있고… 오늘 아침에도 박주임이 식량 배분 문제로 난리였습니다.”

    박주임. 보급 관리 담당관 박성철. 그는 꼼꼼하고 원리원칙주의자였지만, 동시에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기로 유명했다. 보루 내에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의 철저함 덕분에 아직까지는 보급망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 사람이 언제 난리가 아니었습니까?” 나는 비죽이 웃었다. 박주임은 가끔 내게도 이것저것 따져 묻곤 했다. 나의 ‘쓸모없어 보이는’ 연구 활동에 대한 의문이나, 배급되는 식량량에 대한 불만 같은 것들.

    그때, 감시탑 아래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관리관님! 강 관리관님!”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봤다. 보루의 통제실에서 근무하는 젊은 대원 하나가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강준의 목소리가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큰일 났습니다! 박주임이… 박주임이 죽었습니다!”

    강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뭐라고? 어디서?”

    “보급 창고 안에서요! 밀폐된… 밀폐된 보급 창고 안에서요!” 대원은 겨우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보급 창고? 그곳은 보루 내에서도 가장 보안이 삼엄한 구역 중 하나였다. 외부인 출입은커녕, 허가받은 인원조차도 통제실의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강준은 대원을 지나쳐 계단을 거의 뛰어 내려갔다. 나도 그의 뒤를 따랐다. 쿵, 쿵, 쿵. 발걸음 소리가 폐허 속의 심장 박동처럼 울렸다.

    보급 창고는 보루의 지하 3층에 위치해 있었다. 두꺼운 강철 문과 지문 인식, 그리고 수시로 바뀌는 비밀번호 체계로 철저하게 봉쇄된 공간이었다. 창고로 향하는 복도는 이미 몇몇 대원들과 보루의 의료 담당관인 김 박사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충격과 혼란이 역력했다.

    강준이 도착하자마자 대원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그는 강철 문 앞에 섰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 강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오늘 오전 8시에 정기 보급품 점검을 위해 박주임이 들어갔습니다. 저와 이 대원이 함께 입구까지 동행했고, 박주임은 평소처럼 혼자 들어간 뒤 내부 잠금장치를 작동시켰습니다. 출입 기록에도 명확히 남아있습니다.” 한 대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오전 10시 정각에 박주임이 나오지 않아 저희가 문을 두드렸고, 응답이 없자 곧바로 통제실에 보고했습니다. 시스템을 확인해보니… 내부 잠금장치는 그대로 작동 중이었고, 외부에서는 강제로 열 수 없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확인했지?” 강준이 물었다.

    “창고 내부에는 비상시를 대비한 소형 감시 카메라가 한 대 있습니다. 전원이 꺼져 있어 확인이 불가능했지만, 저희가 강제로 복구시키자… 박주임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굳게 닫힌 강철 문에 박혔다. 두께만 30cm에 달하는 이 문은 방폭 기능까지 갖추고 있었다. 안에서 잠기면 밖에서는 폭탄을 쓰지 않는 한 열 수 없었다. 시스템 해킹은 불가능했고, 물리적 파괴는 보루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행위였다.

    “문은 어떻게 열었지?” 나는 강준의 옆에 서서 물었다. 나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아직 열지 못했습니다.” 김 박사가 답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강철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통제실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내부 잠금장치가 활성화된 상태에서는 외부에서 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현재 복구반이 비상 수동 해제 장치를 찾고 있지만…”

    즉, 박성철은 외부의 침입자가 있을 수 없는 가장 안전한 곳에서, 스스로 문을 잠그고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CCTV를 통해 확인된 것은 그가 ‘쓰러져 있었다’는 것. 자살이라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창고 안에서 무슨 소리라도 들렸나?” 내가 물었다.

    “아니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습니다.” 대원 중 한 명이 고개를 저었다.

    강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밀폐된 공간. 외부 침입 불가. 그런데 사람이 죽었다? 서진 씨, 자네가 한번 봐야겠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이 보루에서 쓸모없는 고철을 주워다 늘 괴상한 기계나 종이에 알 수 없는 기호들을 그리는 괴짜로 통했다. 하지만 가끔, 보루에서 발생하는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내가 풀어낼 때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나를 ‘어둠 속의 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잠시 문을 응시했다. 무쇠처럼 굳게 닫힌 문.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죽음과 함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갇혀 있었다.

    “김 박사님, 박주임의 사망 원인이 확인되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김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카메라 영상이 너무 흐릿해서 자세한 확인은 어렵습니다만… 몸에 큰 외상은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쓰러져 있었고… 그의 얼굴은…”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다시 문을 바라봤다. 그들은 지금 가장 단순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밀폐된 보급 창고. 엄격한 보안. 그리고 그 안에서 홀로 죽은 박성철 주임.
    만약 그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것은 완벽한 ‘밀실 살인’이었다.
    그리고 그 트릭을 깨부술 수 있는 자는, 이곳에 나밖에 없을 터였다.

    “일단 문을 엽시다.” 내가 말했다. “안에 들어가 봐야, 비로소 진실이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내 말에 강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구반, 서둘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문을 열어!”

    모두의 얼굴에는 한 줄기 희망과 동시에 또 다른 공포가 서렸다.
    문이 열리면 무엇이 드러날까?
    한 사람의 죽음? 아니면 이 잿빛 세계가 감추고 있던 또 다른 악의 조각?
    나는 조용히 문 앞에서, 그 굳게 닫힌 공간이 품고 있는 수수께끼를 기다렸다.
    대붕괴 이후, 인류는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워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곳, 새벽 보루 안에서.

  • 크툴루 신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장. 균열

    이현우는 아침을 신성시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의 하루 중 유일하게 통제 가능한 시간이었다. 해가 완벽하게 뜨기 전, 동이 트는 푸른빛이 희미하게 창을 가로지르는 그 시간. 그는 언제나 알람이 울리기 5분 전, 묘한 예감으로 눈을 떴다. 정적 속에서 침대에서 내려와, 굳이 발소리를 죽여 거실로 향했다.

    1004호. 고층 아파트의 10층.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숫자는 현우에게 꽤나 안도감을 주었다. 주변의 복잡한 건물들 사이에서, 이 작은 공간만큼은 그의 견고한 섬이었다. 차분하게 커피를 내리고, 어젯밤 읽다 만 책을 펼쳤다. 종이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커피 향만이 존재하는 시간. 세상의 소음이 시작되기 전, 고요의 장막이 그를 감싸는 순간.

    하지만 그 장막은, 아주 미세한, 실금 같은 균열을 품고 있었다.

    처음 균열을 느낀 건 지난주였다. 출근 전 현관에서 지갑과 스마트폰, 그리고 열쇠를 챙기려는데, 열쇠가 없었다. 분명 어젯밤 식탁 위에 올려두었는데.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아, 어제 자기 전에 습관처럼 코트 주머니에 넣었나?’ 하고 생각했다. 현우는 종종 그랬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자부했지만, 가끔 이런 작은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코트 주머니를 뒤지자, 예상대로 열쇠가 만져졌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웃어넘겼다.

    이틀 뒤, 퇴근하고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늘 그래왔듯, 모니터 전원 버튼을 누르는 순간, 거실의 스탠드 등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꽤나 길게.

    “젠장, 또 전압 문제인가.”

    현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아파트가 지어진 지 20년이 넘었다. 가끔 노후된 전선 문제로 이런 일이 생기기도 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컴퓨터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 속 뉴스 기사가 오늘따라 유독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였다. 분명 침실 문을 닫았는데, 희미하게 ‘덜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문이 살짝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듯한 소리. 그는 피곤해서 헛들었나 싶어 뒤척였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귓가에 얇은 실타래 같은 속삭임이 맴도는 것 같았다. 의미 없는, 형태 없는 소리. 마치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같기도 했다. 신경이 곤두섰다. 이 아파트에서 이런 소리가 난 적은 없었다. 그는 벽에 귀를 대봤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낡은 아파트가 내는 미세한 마찰음이 전부였다.

    다음날 아침, 현우는 평소보다 10분 늦게 일어났다. 개운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부엌으로 갔다. 텅 빈 싱크대 한가운데, 전날 마시고 그대로 두었던 머그컵이 엎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물기가 흥건했다.

    “내가 씻어두는 걸 깜빡했나? 아니, 엎어놓지는 않았는데….”

    현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싱크대에 놓았을 뿐, 엎어놓지는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머그컵을 바로 세웠다. 어쩐지 등골이 서늘했다.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출근 준비를 서두르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고, 헛것이 들리는 거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착각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날 저녁, 찝찝함은 서서히 공포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현우는 퇴근 후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드라마가 흘러나왔다. 무심하게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들던 순간, 식탁 맞은편 의자가 스르륵 뒤로 밀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현우는 순간 동작을 멈췄다.

    “뭐야…?”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분명 그가 의자를 그렇게 빼놓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 의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의자는 현우의 시선이 닿자마자 멈췄다. 마치, 누군가 밀다가 들킨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현우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천천히 의자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었고, 진동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고요함만이 짓눌러오는 압력처럼 느껴졌다.

    그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젠장, 피곤해서 별걸 다 보네.”

    자신에게 하는 변명이었지만, 목소리에는 이미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로 다가갔다. 의자의 다리 부분을 손으로 잡고 천천히 원래 자리로 당겼다. 아무런 저항도, 이상한 점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다시 밥을 먹으려 했다.

    그때였다.

    화장실 문이 ‘쾅’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현우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젓가락이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가 현관문을 닫을 때나 날 법한 육중하고도 소름 끼치는 소리.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화장실 문을 바라봤다. 분명 아까 퇴근하고 들어왔을 때, 화장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아무도 없다. 이 집에는 나 혼자다.

    현우의 이성이 경고음을 울렸다. 그 어떤 합리적인 설명으로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노후된 아파트? 그건 전등이나 가끔 말썽을 일으키는 수압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문이 저절로 닫히는 건, 그것도 저런 폭력적인 소리를 내면서 닫히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머릿속에서 ‘도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곧바로 지워졌다. 문이 저렇게 닫힐 리가 없지 않은가. 도둑이라면 숨죽이고 조용히 움직일 테니. 그리고 애초에 창문은 다 닫혀 있었고, 현관문도 그가 잠갔다.

    심장이 발작하듯 뛰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문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소리마저 거슬릴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문에 다다르자, 그는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소름 끼쳤다. 천천히 돌렸다. ‘끼이익’ 하는 경첩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문이 안쪽으로 스르륵 열렸다.

    텅 비어 있었다.

    세면대, 변기, 샤워부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현우는 숨을 들이켜자마자, 묘한 한기를 느꼈다. 평소보다 훨씬 차가운 공기. 마치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냉기가 아니었다. 피부에 닿는 순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깊고 불쾌한 한기였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시선. 그것은 벽 너머에, 혹은 허공 속에, 어쩌면 그의 등 뒤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확신이 엄습했다.

    현우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화장실 불을 켰다. 환하게 빛나는 전구 아래,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한기와 시선은 여전히 그곳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아주 조용히, 천천히.

    밥맛이 싹 가셨다. 그는 저녁 식사를 그대로 남겨둔 채 거실 소파에 앉았다. 텔레비전 화면 속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이질적으로 들렸다. 이젠 더 이상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분명 뭔가가 있었다. 이 1004호에, 그가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들어와 있었다. 혹은,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가 이제야 그것을 인지하기 시작했을 뿐.

    밤은 깊어지고, 아파트의 다른 집들은 하나둘 불빛을 잃어갔다. 현우는 불을 켜놓은 채,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귓가에는 아까 화장실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형태 없는 속삭임이 아스라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 거실 중앙에 놓인 작은 탁자 위에서, 그의 스마트폰이 스르르 움직였다.

    아주 느리게, 마치 실에 매달린 것처럼 부드럽게. 액정이 아래로 향한 채로, 탁자 끝을 향해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현우는 숨을 멈췄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채, 그 기괴한 움직임을 응시했다. 스마트폰은 탁자 끝에 닿았다. 그리고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밀어 떨어뜨리려는 듯, 끄트머리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툭.’

    스마트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액정이 깨지는 소리 대신, 둔탁하고 깊은, 마치 진흙 덩어리가 웅덩이에 빠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액정은 깨지지 않았다. 멀쩡했다.

    그러나 현우는 보았다. 스마트폰이 떨어져 나간 탁자 끄트머리, 그곳에 짧은 순간, 어둠보다 더 짙은 어둠이, 마치 구멍처럼, 허공에 한 조각 찢어져 있는 것을.

    그리고 그 구멍 속에서, 비현실적인 각도로 뒤틀린, 무언가 차가운 것이, 그를 향해 움직이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단순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아니었다.

    이 좁은 아파트 1004호에, 이제껏 잠들어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었다.

    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었다.

  • 이세계 전생 (Isekai)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잃어버린 세계의 숨결

    이한은 숨을 헐떡이며 숲 속을 내달렸다. 허파가 터질 것 같은 고통도, 온몸을 긁어대는 덤불의 날카로운 가시도 이제 와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으르렁거림과 발굽 소리가 그를 더욱 채찍질했다. ‘그림자 늑대’ 무리였다. 하급 몬스터라곤 하지만, 서너 마리가 동시에 덤벼들면 평범한 모험가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십상이다. 하물며 이제 겨우 던전 최하층도 버거운 이한에게는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젠장… 왜 하필 오늘…!”

    오늘따라 약초 채집량이 좋아서, 조금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것이 화근이었다. 평소엔 얼씬도 하지 않던 ‘재의 숲’ 안쪽까지 발을 들인 것이 패착이었다. 거대한 고목들이 하늘을 가려 낮인데도 어둑한 숲은, 온갖 기괴한 형상의 나무뿌리들이 지면을 뒤덮고 있어 발을 헛딛기 일쑤였다. 이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달릴수록 멀어지기는커녕 늑대들의 기척은 더욱 가까워지는 듯했다.

    쿵!

    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찢어진 무릎에서 뜨거운 피가 흘렀지만,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 그림자처럼 드리운 늑대들의 형상이 보였다. 녀석들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이제 끝인가. 전생에서 트럭에 치여 이세계로 넘어왔을 때도 이렇게 허무하진 않았다. 이 세계에서 겨우 한 자리를 잡고 살아보려 발버둥 치는 와중에, 이렇게 무의미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크아아악!”

    절규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필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절벽이나 다름없는 비탈길이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정신없이 아래로 구르던 그는, 곧 무언가에 세게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축축하고 서늘한 공간으로 떨어졌다.

    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만큼 처참한 상태는 아니었다. 등 뒤에서 쿵,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쫓아온 그림자 늑대 무리가 구멍 위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였다. 녀석들이 내려올 엄두를 못 내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깊은 곳까지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주위는 온통 어둠이었다.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주워 불을 피워보려 했지만, 축축한 습기 탓인지 좀처럼 불이 붙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채 주위를 더듬던 그의 손에 무언가 차갑고 단단한 것이 닿았다.

    ‘돌인가…?’

    무심코 손바닥으로 벽을 훑자, 거친 돌벽이 느껴졌다. 단순히 돌벽이 아니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매끄러웠다. 마치 고대 신전의 건축물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석벽이었다.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내디디자, 발끝에 밟히는 것이 돌멩이가 아니라 잘 다듬어진 석판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뭐지?”

    여긴 분명 평범한 숲 속 지하가 아니었다. 이곳은, 망각된 문명의 유적이었다.

    숨을 죽이고 주위를 탐색했다. 퀘스트를 받고 찾아다니는 유적은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우연히 발견한 유적은 처음이었다. 혹시 상상을 초월하는 보물이라도 있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출구를 찾아야 했다. 늑대들이 포기하고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위험했다.

    한참을 헤매던 이한의 눈에,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푸른빛이었다. 신비롭고 영롱한, 흡사 별빛 같은 푸른빛이 저 멀리서 은은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빛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빛이 가까워질수록, 주위의 풍경이 점차 드러났다. 거대한 돔형 공간이었다. 천장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고, 벽면에는 낡고 오래된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벽화 속에는 인간으로 보이는 존재들이 알 수 없는 의식을 행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공간의 중앙에는, 모든 빛의 근원처럼 보이는 거대한 수정이 박혀 있었다.

    수정은 바닥에서 솟아난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사람의 허리춤까지 오는 높이에, 양팔로 감싸 안아도 부족할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수정 자체는 영롱한 푸른빛을 뿜어냈지만, 그 안에는 흡사 은하수를 담아놓은 듯한 무수히 많은 별들이 아른거렸다. 수정 주위로는 고대 문자들이 원형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그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장엄하고 신성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한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살아생전 이런 아름다움을 본 적이 없었다.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은 그의 심장 깊은 곳을 울렸다.

    “이건… 대체…”

    가까이 다가가자, 수정에서 나오는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희미한 속삭임이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고대의 언어인지, 아니면 그저 환청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소리는 분명 이한을 부르고 있었다.

    홀린 듯이 수정에 손을 뻗었다. 차가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수정의 표면은 미지근했다. 손바닥이 수정에 닿는 순간, 거대한 에너지가 그의 몸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마치 오래된 댐이 무너지며 거대한 물줄기가 쏟아져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커헉!”

    이한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손은 수정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빛은 그의 혈관을 따라 흐르는 듯했고, 이한의 몸은 투명해지는 것처럼 빛을 발했다.

    눈앞에 수많은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까마득한 옛날, 이 세계가 막 태어났을 때의 혼돈. 생명체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경이로움. 그리고 거대한 문명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모습. 인간과 다른 종족들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 이 모든 것이 마치 자신의 기억인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중에는 알 수 없는 힘을 다루는 자들의 모습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숨결’이라 불렀던, 세상 만물을 구성하는 근원적인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하지만 그 힘은 점차 잊혀지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힘의 마지막 잔재가, 바로 이 수정 안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수정과의 연결이 깊어질수록, 이한의 머릿속에 새로운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단순히 지식의 편린이 아니었다. 세상의 진리, 만물의 이치, 그리고 그 안에서 잠들어 있던 ‘힘’을 다루는 방법들이었다. 마나의 흐름을 읽고, 원소를 이해하며, 생명의 근원을 파악하는 능력. 그 모든 것이 그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이건… 마법이 아니야. 마법의 근원… 그 자체다…!’

    지금까지 그가 알던 마법은, 그저 이 거대한 힘의 아주 작은 파편에 불과했다. 이 수정은, 그 모든 힘의 뿌리였다.

    수정에서 흘러나온 빛이 이한의 몸속으로 완전히 흡수되자, 제단 위에 놓여 있던 거대한 수정은 순식간에 빛을 잃고 평범한 돌덩이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이한의 몸을 감싸던 빛도 사라졌다.

    이한은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새롭게 태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활력과 에너지가 그의 몸속을 맴돌았다. 눈을 감자, 주위의 모든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마나의 입자들, 벽을 타고 흐르는 습기의 움직임, 심지어 멀리 떨어진 지상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그림자 늑대들의 발소리까지. 모든 것이 그의 감각에 포착되었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에서 푸른빛의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단순한 불꽃이 아니었다. 생명의 에너지가 응축된 듯한, 따스하면서도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불꽃은 그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꾸었다. 때로는 물방울이 되고, 때로는 작은 흙덩이가 되었다.

    “이게… 내가 얻은 힘인가…”

    그는 더 이상 평범한 이세계 전이자가 아니었다. 우연히 발견한 고대의 유적에서, 그는 잃어버린 세계의 숨결, 만물의 근원적인 힘을 계승한 존재가 되었다. 이제 그에게는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그의 눈빛이 깊고 오묘하게 빛났다. 더 이상 그림자 늑대가 두렵지 않았다. 이 지하에서 빠져나갈 방법도, 어쩌면 이미 그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방황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확신에 찬 발걸음이었다. 어둠으로 뒤덮인 유적의 통로 끝에서, 희미한 빛이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출구가 아니었다. 이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문이었다.

  • 다크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안개의 장막 아래, 첫 번째 비명

    짙푸른 안개가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도시 전체를 집어삼키던 밤이었다. 오래된 석조 건물들의 날카로운 실루엣이 거친 숨을 내쉬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고, 축축한 공기는 잿빛 폐허의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발레리우스 백작의 저택은 그 정점이었다. 뾰족한 고딕 양식의 첨탑들이 밤하늘을 찢을 듯 솟아 있었고, 낡은 창문들은 수많은 눈처럼 도시의 고통을 묵묵히 응시하는 듯했다.

    그 침묵을 갈랐던 것은 비명이었다.

    “악!”

    지하실에서 울려 퍼진 끔찍한 절규는 곧이어 계단을 따라 층층이 울려 퍼지며 저택의 심장을 꿰뚫었다. 잠들어 있던 하인들이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굴러떨어졌고, 야간 순찰을 돌던 경비병들은 무거운 갑옷을 부딪치며 소리의 근원지로 달려갔다.

    소리가 멎은 곳은 백작의 서재였다. 묵직한 오크나무 문 앞에 도착한 경비대장 로반은 이미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하녀장으로부터 열쇠를 건네받았다.

    “대… 대장님. 백작님이… 백작님이…!”

    하녀장은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로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열쇠를 자물쇠에 꽂았다. 묵직한 쇳소리가 어둠 속에서 불길하게 울렸다. 잠금쇠가 풀리는 순간, 서재 안에서 기괴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깊은 겨울의 심장부가 이곳으로 옮겨진 듯한 차가움이었다.

    “비켜!”

    로반은 거칠게 문을 열었다. 서재 안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으나, 복도에서 쏟아져 들어간 횃불의 불빛이 그 안의 광경을 조심스럽게 비췄다.

    그리고 모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충격적인 죽음의 그림자였다.

    벽난로 앞에 놓인 최고급 비단 카펫 위, 백작 발레리우스는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붉은색 벨벳 의자에 기댄 채 죽어 있었는데, 그의 눈은 공포로 크게 뜨여 있었고, 입은 벌어져 비명이라도 지르려다 굳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정말 섬뜩한 것은 그의 몸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아니었다.

    “이게… 대체…?”

    한 경비병이 헛구역질을 했다. 백작의 가슴에는 날카로운 칼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문제는 칼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을 꿰뚫고 있는 것은 단단하고 투명한 얼음 조각이었다. 마치 깎아놓은 수정처럼 빛나는 얼음 칼날은 핏방울 하나 묻히지 않은 채 섬뜩하게 박혀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작은 얼음 조각들이 서리처럼 흩어져 반짝이고 있었다.

    로반은 경악하며 방 안을 둘러봤다.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은 안쪽에서 단단히 걸쇠가 채워져 있었다. 유리는 깨진 흔적 하나 없었다. 유일한 문인 서재 문 또한 자신이 열기 전까지는 밖에서 굳게 잠겨 있었다. 안쪽에서 걸어 잠근 형태가 아니라, 밖에서 열쇠로 잠겨 있었다.

    “이건… 밀실이다.” 로반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바닥의 얼음 조각들을 발로 건드렸다. 순식간에 녹아내려 축축한 물방울만 남겼다. 살인 무기가 사라진 것이다.

    “마법인가… 아니면, 악마의 짓인가…”

    공포에 질린 경비병들이 웅성거렸다. 이성을 초월한 상황에 모두의 얼굴에는 경멸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의 세계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저택의 정문에서부터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굳고, 차가운 것이 바닥을 긁는 소리.

    곧이어 서재 문가에 기묘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키가 컸으나 어딘가 비틀린 듯 앙상한 몸매를 지녔다. 낡았지만 고급스러운 검은색 코트 자락이 그의 움직임에 맞춰 바닥을 쓸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뺨은 깊게 패여 마치 해골 같았지만, 그 안에 박힌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번뜩였다. 날카로운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은 그의 예민한 감각을 대변하는 듯했다. 한 손에는 은색 손잡이가 박힌 흑단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항상 두꺼운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카이사르’라고 불렀다.

    “흥미롭군요.”

    카이사르가 서재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지만,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그는 시체 근처에 다가가지도 않고,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방 안을 쭉 훑어봤다. 그 시선은 가구, 벽, 천장, 그리고 죽은 백작의 시신까지, 모든 것을 관통하는 듯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읽어내는 듯한 섬뜩함이 있었다.

    “카이사르 경,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반 대장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이 도시에서 ‘밀실 살인’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하면, 모두는 어쩔 수 없이 이 기묘한 천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명성은 너무나도 독보적이었다. “보시다시피…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개탄스럽기 그지없군. 경비대장은 문만 열어젖히고 서 있었다는 말인가? 이 중요한 현장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카이사르의 눈이 로반을 향했다. 그의 시선에 로반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아, 아닙니다! 아직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것은… 인간의 소행으로는 도저히…” 로반은 말을 더듬었다.

    카이사르는 피식 웃었다. 실소를 참지 못한 듯한 웃음이었다.

    “인간의 소행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자네는 이 백작을 죽인 것이 어둠 속에서 나타난 망령이나, 벽을 뚫고 들어온 악마라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방은 안팎으로 완벽하게 잠겨 있었습니다. 게다가 살인 도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로반이 손을 휘저으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사르는 대답 없이 다시 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그의 발걸음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지팡이 끝이 바닥에 닿는 미세한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그는 창문 가까이 다가가 커튼을 살짝 젖혔다. 두꺼운 강철 격자가 창문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밖에서는 도저히 들어올 수 없는 구조였다.

    “흥미롭군.” 카이사르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욱 활기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로 흥미로워.”

    그의 시선이 죽은 백작에게로 향했다. 그는 백작의 얼굴을 잠시 응시했다. 굳어버린 표정, 공포에 질린 눈. 그는 무엇을 보았던 걸까?

    “로반 대장, 백작은 생전에 딱히 원한을 살 만한 자는 아니었습니까? 혹은 마법사들과 교류가 있었다거나, 기묘한 저주에 걸릴 만한 행동을 한 적은 없습니까?” 카이사르가 물었다.

    “백작은 온화한 분이었습니다. 사업 수완이 좋았고, 최근에는 귀족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권 다툼에서 큰 이득을 보셨습니다만… 원한이라고 할 만한 것은… 글쎄요.” 로반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들과는 거리를 두셨습니다. 그분은 지극히 현실적인 분이셨죠.”

    “현실적…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 완벽한 밀실은, 그 지극히 현실적인 백작에게 어떤 환영을 보여주려 했던 걸까요?” 카이사르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은 다시 한번 백작의 시신과 주변의 얼음 조각들이 녹아 흔적만 남은 바닥을 오갔다.

    그의 눈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단서를, 불가능해 보이는 트릭의 실마리를. 이 밀실은 그에게 있어 거대한 퍼즐 상자였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그 퍼즐을 풀기에 최적화된, 섬뜩하도록 예리한 이성의 칼날을 가진 사냥꾼이었다.

    “대장, 경비병들을 문 밖에 세워두고 아무도 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카이사르가 명령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지휘관의 권위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하녀장을 다시 데려오십시오. 백작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무엇인지, 그 공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야 합니다.”

    로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카이사르 홀로 서재에 남았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듯한 그의 눈은 죽음이 드리운 공간을 집요하게 탐색했다. 핏자국 하나 없이 완벽하게 얼어붙은 죽음,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살인 도구. 모든 것이 불가능을 외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지팡이 끝으로 바닥의 희미한 물기를 가볍게 건드렸다.

    “불가능한 것은 없지. 단지 아직 그 해답을 찾지 못했을 뿐.”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의 미소와 같았다. 이 밤, 발레리우스 저택의 안개 속에서, 천재 탐정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던져진 첫 번째 퍼즐 앞에서,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