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 번째 밤, 핏빛 섬광
무색무취의 침묵이 거대한 비무장을 짓눌렀다. 수만 명의 관중이 내뿜던 열기는 마치 얼음벽에 부딪힌 듯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오직 싸늘한 정적만이 차갑게 맴돌았다. 무대 중앙, 붉은 피가 흥건한 검은 바닥 위에는 두 인영이 서 있었다. 아니, 서 있었다기보다는 한 인영은 꼿꼿이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고, 다른 인영은 마치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강민! 혈랑 강민 선수의 압도적인 공격! 흑월검 백무진 선수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과연 이대로 경기가 끝날 것인가요?!”
사회자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마법처럼 침묵을 깨고 울려 퍼졌다. 그제야 관중석에서는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환호나 탄성이 아닌, 깊은 불안감과 의문이 뒤섞인 불협화음이었다.
류한은 상단 관중석 가장자리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낀 채로 비무장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뿌려진 핏자국만큼이나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무대를 수놓던 흑월검 백무진의 검술은 분명 일류의 경지에 달한 것이었다. 달빛 아래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가는 그의 검은 환영을 흩뿌리며 강민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강민, ‘혈랑’이라 불리는 사내는 그 모든 공격을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막아내고 되받아쳤다.
백무진의 검이 강민의 옆구리를 향해 번개처럼 찔러 들어갔을 때였다. 강민은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왼쪽 어깨를 살짝 비틀었다. 콰앙! 쇠와 쇠가 부딪히는 굉음이 울려 퍼졌고, 백무진의 검이 강민의 팔목을 감싼 검은 철갑에 부딪히며 엄청난 불꽃을 튀겼다. 그의 검이 튕겨 나가는 찰나, 강민의 오른손이 그림자처럼 뻗어 나왔다.
파앗!
그것은 손이 아니었다. 손목에 장착된 날카로운 검은 발톱이었다. 그 발톱이 백무진의 심장을 향해 맹렬하게 내리꽂혔다. 백무진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막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발톱은 그의 검을 스쳐 지나가 심장을 꿰뚫었다.
크윽!
백무진의 입에서 짧은 비명과 함께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검은 발톱은 그의 몸을 관통했고, 그 충격으로 백무진의 몸이 뒤로 크게 휘청였다. 하지만 강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발톱을 뽑아내지 않고 오히려 몸을 밀어붙여 백무진의 눈앞에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을 향해 소리 없는 일격을 날렸다.
퍼억!
그것은 주먹이 아니었다. 강민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기이한 붉은 섬광이 백무진의 얼굴을 강타했다. 섬광은 짧고 강렬했으며, 마치 안개처럼 백무진의 안면을 감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크, 크으윽……”
백무진의 몸이 다시 한 번 크게 경련했다. 그의 눈은 동공이 풀린 채 허공을 응시했고, 그의 입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에는 어떤 외상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 섬광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백무진의 몸은 마치 생명의 근원이라도 뽑혀 나간 것처럼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흑월검은 텅 빈 손아귀에서 스르륵 미끄러져 떨어져 바닥에 처박혔다. 쨍그랑! 날카로운 쇳소리가 비무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백무진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쓰러진 그의 몸은 미동도 없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갓 만들어진 인형처럼 움직임을 멈춘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비무장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무겁고, 훨씬 더 섬뜩한 침묵이었다.
“……경기, 경기 종료! 승자는, 강민 선수입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승자의 이름에 대한 환호보다, 쓰러진 자에 대한 공포와 알 수 없는 의문이 가득했다. 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환호 대신 술렁거렸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방금 그게 뭐였지? 붉은 섬광?”
“얼굴에 아무 상처도 없는데 왜 저렇게 된 거야?”
“그냥 죽은 게 아니라, 뭔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지 않아?”
“섬뜩하다. 혈랑 강민의 무공은 대체….”
류한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강민에게서 백무진의 쓰러진 시신으로, 다시 강민에게로 향했다. 강민은 검은 발톱에 묻은 피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낸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비무장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의 뒤로 따라오는 싸늘한 시선들이 그의 등줄기에 박혔지만, 강민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기이한 일격이었군.’
류한의 뇌리에서 방금 전 붉은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단순히 무공의 일종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현상이었다. 무림의 고수들은 기를 다루고, 내공을 운용하며 상대를 제압한다. 하지만 강민의 붉은 섬광은 기의 흐름과는 또 다른, 마치 생명 그 자체를 빨아들이는 듯한 섬뜩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백무진의 몸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지만, 그의 생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류한은 분명히 감지했다. 마치 인형처럼. 영혼이 사라진 껍데기처럼.
류한의 시선이 강민이 떠난 비무장 바닥에 머물렀다. 붉은 피가 흥건한 곳 옆으로, 흑월검이 버려진 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 과거의 한 기억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십 년 전, 무림을 뒤흔들었던 ‘흑사건(黑死件)’의 희생자들도 모두 저런 모습으로 발견되었었다. 외상은 거의 없었으나, 생명력이 완전히 소진된 채, 마치 수백 년을 늙어버린 듯한 시신들. 당시에는 아무도 그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설마… 그때 그 힘이 다시 나타난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이번 천하무림대전은 단순히 무림 최강자를 가리는 대회가 아니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다는 말이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진실일 수도 있었다. 류한의 눈빛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품속으로 향했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이 그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관중석을 빠져나왔다. 그의 발걸음은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결의는 그 어떤 천둥소리보다도 웅장했다.
‘강민… 그 붉은 섬광의 정체는 무엇이지? 그리고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둠 속에서 강민의 싸늘한 표정이 류한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분명히, 그에게는 뭔가 비밀이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은 무림 전체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암흑의 그림자를 품고 있었다.
류한은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 창밖으로는 비무장을 환히 밝히던 영석들의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그의 눈에 비친 그 빛은 더 이상 승리와 영광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파멸을 예고하는, 핏빛 섬광처럼 위태로운 전조였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류한은 다시 한 번 싸늘한 각오를 다졌다.
이번에는, 결코 십 년 전과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어둠 속에서,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천하무림대전… 이제야 진짜 막이 오르는군.”
그의 손이 품속의 검집을 쥐었다. 차가운 칼날이 그의 손바닥 안에서 미약하게 떨리는 듯했다.
밤은 아직 길었다. 그리고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