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타버린 하늘은 이제 더 이상 하늘이 아니었다. 밤이 오면 별들이 불타는 핏빛 눈동자처럼 섬뜩하게 빛났고, 낮이 오면 잿빛 구름이 저주받은 그림자처럼 지상을 덮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에서 벗어나 뒤틀리고, 뒤집히고, 녹아내렸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지훈은 무너진 고층 건물 잔해 틈에서 몸을 웅크렸다. 차가운 금속 파편들이 그의 닳아빠진 점퍼를 스쳤다. 손에 쥔 녹슨 철근은 유일한 무기이자, 때로는 지탱해주는 지팡이가 되어주었다. 며칠째 제대로 된 식량은 입에 대지도 못했다. 뱃속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고, 마른 목구멍은 사막처럼 갈라져 있었다. 살아야 한다. 이 죽음 같은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 그것이 지훈이 가진 유일한 목표였다.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건너편 무너진 건물, 한때는 백화점이었을 거대한 철골 구조물에서였다. 저 안에는 아직 쓸 만한 것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남아있기를 바랐다. 지훈은 숨을 죽이고 주위를 살폈다. 잿빛 대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 으스스하게 뼈를 깎는 소리를 내며 불어왔다. 먼지, 부서진 콘크리트, 그리고 알 수 없는 것들의 썩은 내. 그게 이 세계의 전부였다.
조심스럽게, 한 발짝 한 발짝 백화점 잔해 쪽으로 다가갔다. 건물 외벽에 붙어있던 간판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찌그러져 있었고, 유리창은 모두 깨져나가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시체 같았다. 지훈은 입구를 찾아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더욱 처참했다. 상품들은 모두 부패하거나 먼지에 덮여 형체를 잃었고, 진열대는 쓰러져 파편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천장은 붕괴되어 뻥 뚫린 구멍 사이로 뒤틀린 하늘이 보였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습기가 느껴졌다. 지훈은 철근을 바싹 쥐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였다.
“흐읍… 흐읍….”
낮게 깔린 숨소리.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인간의 소리였다. 이 버려진 세상에서 인간을 만나는 건 언제나 축복이거나, 아니면 저주였다. 대부분은 후자였다.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 미쳤거나, 아니면 다른 이들의 피를 빨아먹는 악귀가 되어 있었다.
“누구… 누구세요….”
가냘픈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지훈은 철근을 휘둘러 경계 태세를 취했다.
“…거기 누구냐.”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거칠었다. 한때는 부드러웠던 목소리였을 텐데,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기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손전등을 켰다. 빛이 닿은 곳에는 한 남자가 벽에 기대어 쓰러져 있었다. 뼈와 가죽만 남은 몰골, 찢어진 옷,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 찬 눈.
“살려… 살려줘요….”
지훈은 순간 망설였다. 그를 돕는 것은 자신의 식량을 나누는 것이고, 어쩌면 더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눈빛은 너무나도 절박했다.
“…괜찮아.” 지훈은 겨우 목소리를 냈다. “내가 뭘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줄 수 있어.”
지훈은 등에서 낡은 배낭을 내렸다. 안에는 마지막 남은 비상 식량 바 하나와 녹슨 칼, 그리고 반쯤 남은 물통이 있었다. 바를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바를 받아들고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마치 먹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바를 삼켰다. 물통을 내밀자 그는 망설임 없이 절반을 비웠다.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남자는 한참을 먹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했다. 그의 이름은 민준이라고 했다. 한 달 전, 가족을 찾겠다며 홀로 길을 나섰다가 이 백화점에서 발이 묶였다고 했다.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어 움직일 수 없었다고.
“여기… 뭐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어요.” 민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한 기운?”
“네… 저쪽 지하에서요. 자꾸… 저를 부르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내려가려다가 그만….”
민준은 지하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가리켰다. 계단은 이미 파손되어 끊어져 있었고, 그 너머는 검은 심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지훈은 민준을 부축해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민준의 다리는 썩어가고 있었다. 며칠 내로 손을 쓰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터였다. 지훈은 찢어진 천으로 그의 상처를 대강 싸맸다.
“지하에는 뭐가 있었는데?” 지훈이 물었다.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몰라요. 하지만… 뭔가 오래된 것 같아요. 이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부터 있던 것 같은… 아주 섬뜩한 존재가.”
그의 눈에 다시금 공포가 서렸다.
밤이 찾아왔다. 검붉은 별들이 하늘에 총총 박히고, 멀리서 알 수 없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세계의 야수들은 밤에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 지훈은 민준과 함께 쓰러진 진열대 뒤에 숨어 밤을 보냈다. 민준은 밤새 끙끙 앓았다.
“지훈 씨….” 민준이 헐떡거리며 지훈을 불렀다.
“왜 그래.”
“저… 저 아래서… 또 부르는 것 같아요. 뭔가… 저를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민준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지훈은 그가 열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이 세계에서 광기는 전염병처럼 퍼져나갔으니까.
다음 날 아침, 지훈은 민준의 다리를 다시 보았다. 상태는 훨씬 심각해져 있었다. 당장 조치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지하로 향하는 구멍을 응시했다. 민준의 말처럼, 그곳에서 알 수 없는 끌림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생존 본능은 이곳을 벗어나라고 소리쳤지만, 이 알 수 없는 이끌림은 그보다 강렬했다.
“여기서 기다려. 내가 내려가 볼게.” 지훈이 말했다.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가지 마세요. 저것들은… 우리를 꿰뚫어 보고 있어요.”
하지만 지훈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희미한 희망이 그를 이끌었다. 어쩌면 그곳에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이 저주받은 세상의 진실.
지훈은 끊어진 에스컬레이터 옆의 낡은 계단으로 내려갔다.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밑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벽에는 이끼가 가득했다.
지하층은 완벽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손전등 빛이 닿는 곳만 겨우 드러났다. 이곳은 예전에 서점이나 문구점이었던 것 같았다. 진열대가 쓰러져 있었고, 젖은 종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진열대가 쓰러진 뒤편, 벽에는 손가락으로 긁은 듯한 알 수 없는 그림들이 가득했다. 기하학적인 무늬들, 눈을 뜨고 있는 거대한 형상,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문자들. 그것들은 마치 악몽이 현실로 발현된 것 같았다.
그때, 지훈의 눈에 한 권의 책이 들어왔다. 다른 책들과 달리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새까만 가죽으로 덮인 두툼한 책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가죽이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뭔가 딱딱하고 매끄러운 비늘 같은 재질이었다. 책등에는 아무런 제목도 없었다.
지훈은 홀린 듯 책에 손을 뻗었다. 표면은 차갑고 축축했으며, 알 수 없는 비린내가 풍겼다. 그는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부터 혼란스러운 그림과 문자들이 가득했다. 인간의 언어라고 할 수 없는 뒤틀린 문자들, 그리고 오직 광인만이 그릴 수 있을 법한 기괴한 형상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머리가 찢어질 듯 아파왔다. 동시에, 환영이 눈앞을 스쳤다.
거대한 눈동자. 무한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수많은 눈동자들. 그것들이 허공에 떠 있었다. 그것들로부터 뻗어 나온 수많은 촉수들이 우주를 감싸고, 별들을 부수고, 행성을 삼키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검은 심연.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이미지였다. 인간의 시야로 담을 수 없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존재. 우주의 가장 깊은 곳에서 깨어나, 그저 존재함으로써 모든 것을 뒤틀리게 만드는 존재. 이 모든 폐허가 바로 그것의 그림자라는 것을, 지훈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젠장….”
지훈은 책을 내던지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책이 그의 손에 달라붙은 것처럼. 페이지를 넘길수록 머릿속의 환영은 더욱 선명해지고, 그의 정신은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이 세계의 종말이 단순히 재앙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오랜 침묵’ 이전부터 존재했던, 태초의 혼돈. 어느 순간, 인간들이 잊고 있던, 혹은 감히 인지조차 못 했던 존재가 잠에서 깨어났고, 그 여파로 현실의 얇은 장막이 찢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이제 그 찢어진 장막을 통해 진실을 엿보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지훈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핏빛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거대한 덩치, 뒤틀린 팔다리, 피부를 뚫고 솟아난 뿔과 비늘. 그것은 이 세계의 변화가 낳은 괴물이었다. 어쩌면… 인간이었을지도 모르는 존재.
그것은 지훈이 들고 있는 책을 알아보는 듯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혹은 오랜 주인을 찾은 개처럼, 기괴하게 휘어진 몸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입에서는 검은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책을 내던졌다.
“이런 빌어먹을!”
책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괴물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리고 광기 어린 울음소리를 내며 지훈에게 달려들었다.
지훈은 필사적으로 철근을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괴물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괴물은 다시 달려들었다. 이성은 마비되고, 오직 생존 본능만이 그의 몸을 지배했다. 피와 살이 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간신히 괴물을 물리쳤을 때, 지훈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찢어진 팔, 피투성이가 된 얼굴, 덜덜 떨리는 다리. 그는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물리쳤다고 할 수 있을까. 바닥에 쓰러진 괴물의 시체는 검은 액체로 변해 땅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 세계의 존재들은 완전한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듯했다.
지훈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방금 본 환영, 그리고 괴물과의 사투. 그의 정신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그는 다시 그 책을 보았다. 검은 비늘 가죽으로 된, 이 세계의 진실을 담고 있는 책. 그것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그 안에 담긴 지식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그의 시야를 영원히 뒤틀어버린 듯했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민준이 기다리고 있는 지상으로. 그의 발걸음은 몹시 무거웠다.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민준은 이미 숨을 거두고 있었다. 눈은 허공을 응시하며 굳어 있었고, 입은 기괴하게 벌어져 있었다. 마치 마지막 순간에 지옥을 본 것처럼.
지훈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죽음은 이제 너무나도 흔한 일이었다. 그는 민준의 시체를 지나쳐 무너진 백화점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잿빛 하늘 아래, 검붉은 별들이 이미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들은 예전보다 훨씬 가까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을 직접 응시하는 것처럼.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세계가 왜 이토록 황폐해졌는지, 그리고 이 끝없는 고통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
그러나 그 지식은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영원한 절망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었다.
그는 혼자였다. 황폐한 대지 위에서, 뒤틀린 하늘 아래에서. 그의 손에는 여전히 녹슨 철근이 쥐어져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생존을 갈망하지 않았다. 그저, 이 모든 것이 끝나는 날을 기다리는, 영원히 고통받을 운명에 처한 한 조각의 육신일 뿐이었다.
지훈은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걷고 또 걸었다. 이 광활하고 공허한 우주 속에서, 자신을 굽어보는 거대한 존재의 그림자 아래에서, 그는 영원히 표류할 것이었다.
살아남았다. 하지만 과연, 이것을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입가에 찢어진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광인이 내는 웃음과 다를 바 없었다.
어둠이 그를 완전히 집어삼킬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