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Original Stories

  • 이세계 전생 (Isekai) 독립적인 단편 소설

    밤 11시 43분. 현우는 익숙하게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비빅, 삐비빅, 삑. 투박한 기계음이 침묵한 복도를 찢었다. 철컥,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지독한 피로가 그를 감쌌다. 텅 빈 아파트 내부의 공기는 어딘가 눅진했다. 마치 비라도 내릴 것처럼 습하고 무거웠다. 그가 현관에 구두를 벗어두고 거실로 향했다.

    “하아…”

    오늘도 지긋지긋한 야근이었다.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거워 소파에 몸을 던졌다. 허름한 스탠드 조명 아래서,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틱, 톡. 틱, 톡. 꼭 누군가 일부러 박자를 맞추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잠시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희미한 긁는 소리가 현우의 귀를 파고들었다. 마치 손톱으로 나무를 긁는 듯한, 짧고 날카로운 소리. 스르륵.
    현우는 잠결에 인상을 찌푸렸다. 쥐라도 들어왔나? 그는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 거실은 여전히 적막했고, 스탠드 조명은 무심히 빛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잘못 들었겠거니,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렸다.

    스르르륵… 긁는 소리는 이번에는 주방 쪽에서 들려왔다. 현우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아파트에는 쥐가 나올 리 없었다. 신축 아파트인데다, 청소도 깨끗하게 하는 편이었다. 그는 뻣뻣한 몸을 이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어제 먹고 남긴 과일 접시와 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방을 샅샅이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젠장, 피곤해서 헛것이 들리나.”

    현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쩐지 등골이 서늘했다. 그는 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컵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가 컵을 내려놓으려는데, 컵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쨍그랑! 컵은 차가운 타일 바닥 위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현우는 당황했다. 평소 같으면 손에서 미끄러질 리 없었다. 컵에 기름이라도 묻어 있었나? 그는 손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았다. 멍하니 깨진 유리 조각들을 내려다보는데, 등 뒤에서 희미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쉬익…

    차가운 공기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현우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텅 빈 거실. 하지만 분명, 누군가 옆에 서서 그를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누구… 야?”

    그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거실 불을 켰다. 환하게 밝아진 실내. 공포심에 가득 찬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벽에 걸린 그림도, 소파 위의 쿠션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 현우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는데, 벽장 문이 스르륵, 아주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익… 녹슨 경첩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 그는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기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은 기척이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현우는 수척한 얼굴로 출근 준비를 했다. 거실의 깨진 컵 조각들은 그대로였다. 그는 그것들을 치우지도 못하고 밤새 얼어붙어 있었다. 출근해서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간밤의 일들은 그저 피곤함이 만들어낸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래, 너무 피곤해서 그랬을 거야.

    하지만 퇴근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의 합리적인 생각은 산산조각 났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어제 분명히 닫아놓았던 벽장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벽장 안의 옷가지들은 바닥에 엉망진창으로 널려 있었다. 마치 누군가 벽장 안을 뒤집어엎기라도 한 것처럼.

    “이게… 뭐야.”

    현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벽장 안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잃어버린 물건도, 침입자의 흔적도. 그저 옷들이 헤집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설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집에 도둑이 들었거나, 아니면…

    밤이 깊어질수록 아파트는 섬뜩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 현우는 거실에 앉아 손에 땀을 쥐었다. 그가 설치한 휴대폰 카메라가 거실 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TV를 켜 두었다.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똑. 똑. 똑.
    현우는 숨을 멈췄다. 소리는 바로 그의 눈앞, 벽에서 들려왔다. 마치 벽 너머에서 손가락으로 툭툭 치는 듯한 소리.

    “누구…세요?”

    그의 목소리는 아예 나오지 않았다. 목이 바짝 말랐다. 똑. 똑. 똑. 소리는 더 커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벽에서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촤자작, 촤자작. 마치 거미줄처럼 벽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의 아파트 벽에,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젠장!”

    현우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TV 화면이 갑자기 지직거리기 시작했다. 뉴스 앵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노이즈와 함께 섬뜩한 형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펑! TV가 폭발하듯 꺼지면서 아파트 전체의 불이 나갔다.

    암흑. 지독한 암흑.
    현우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거려 손전등을 켰다. 불빛이 벽을 비추는 순간, 그는 얼어붙었다. 벽의 균열들은 이제 단순히 벽을 찢은 것이 아니었다. 그 균열 사이로 섬뜩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에메랄드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빛이었다.

    그리고 그 빛 사이로, 희미하게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물속처럼 일렁이는 공간. 현우는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이것은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이, 이게 대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벽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강렬해지며 아파트 전체를 삼켰다. 강렬한 흡입력과 함께, 바닥에 놓여 있던 의자가 굉음과 함께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현우는 비명을 질렀다. 그를 중심으로 모든 물건들이 공중에 떠올라 빛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몸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그를 붙잡고 잡아당기는 것처럼, 몸이 점점 빛을 향해 끌려갔다.

    “아아아악!”

    그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손가락 끝이 미끄러지고, 그의 몸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눈앞의 벽은 이제 거대한 소용돌이치는 포털이 되어 있었다.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현우는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격렬한 혼란을 느꼈다. 시야는 번개처럼 터져 나가는 색채로 가득했고, 귀에서는 모든 소리가 한데 섞여 거대한 울림으로 변했다.

    그는 잠시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눈을 떴을 때, 현우는 더 이상 자신의 아파트에 있지 않았다. 머리 위로는 붉은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거대한 쌍둥이 달이 떠 있었고, 발아래는 낯선 식물들이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기는 짙은 풀내음과 함께, 알 수 없는 금속성 냄새를 풍겼다.

    “여긴… 어디야?”

    그의 눈앞에는, 방금 전 자신의 아파트 벽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이끼 낀 돌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다. 돌기둥 표면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빛을 머금고 있었다.
    현우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파트에서 벌어졌던 그 기괴한 현상들은, 그저 이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기 위한 징조였을 뿐이었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기대감과 함께, 새로운 세계의 막이 오르고 있음을 직감하는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는 아파트 벽이 사라진 자리, 이세계의 풍경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뗐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벽과 그림자

    새벽 두 시, 도시의 심장이 고요히 멎은 시간. 고층 빌딩 숲은 거대한 그림자처럼 검푸른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축축한 아스팔트 위에서 춤을 추고, 빗줄기는 끈질기게 창문을 두드렸다. 서은율은 그 소리마저 해독하려는 듯, 눈을 감고 깊은 숨을 쉬었다. 그의 작은 서재는 책과 알 수 없는 기묘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놀랍게도 먼지 한 톨 없었다. 모든 것이 은율의 손길이 닿는 곳에, 계산된 듯이 놓여 있었다.

    고요를 깬 건 날카로운 진동음이었다. 책상 위, 오래된 디자인의 휴대전화가 지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발신인은 김형사. 이 시간의 김형사라면, 필시 ‘어려운’ 사건일 터였다. 은율은 픽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김형사, 제발 이번엔 사라진 고양이 수색 같은 건 아니길 바라네.”

    수화기 너머로 김형사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서… 서은율 씨!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아주… 골치 아픈 사건입니다.”

    “골치 아픈 사건은 형사님의 전문 분야 아닌가. 나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이라는 뜻이고.”

    “불가능? 불가능 정도가 아니라…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김형사의 목소리에는 초조함과 함께 미약한 공포가 섞여 있었다. 은율은 희미하게 흥미를 느꼈다. 김형사가 저 정도로 동요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주소 불러.”

    짧은 지시 후, 은율은 전화기를 끊었다. 빗소리는 여전했지만, 그에게는 이제 사건 현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배경음악처럼 들렸다. 낡은 코트를 걸치고 문을 나서는 그의 눈빛은 이미 어둠 속 저편의 실마리를 쫓고 있었다.

    ***

    강남의 한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펜트하우스 층은 이미 경찰 통제선으로 가득했다. 비상등의 붉고 푸른빛이 빗물에 반사되어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은율은 익숙하게 통제선을 넘어섰다. 경계를 서던 젊은 경찰이 제지하려 했으나, 김형사가 황급히 달려와 그를 가로막았다.

    “서은율 씨, 여기입니다.”

    김형사의 얼굴은 창백했다. 눈빛은 초점을 잃은 듯 흔들리고 있었다. 은율은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적막했고,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숨을 멈춘 것만 같았다.

    “피해자는 강태준 씨입니다. 아시죠? IT 기업 ‘크로노스’의 창립자이자, 최근에는 비상장 주식 투자의 귀재로 불리던 인물.”

    김형사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준. 이름만 들어도 아는 자산가였다. 최근에는 도시의 숨겨진 유물이나 이능력자들의 세계에 관심이 많다는 소문도 들렸다.

    “사망 시각은 대략 두세 시간 전으로 추정됩니다. 사인은 칼에 의한 과다 출혈.”

    드디어 사건 현장인 서재 문 앞에 섰다. 굳게 닫힌 문에는 조심스럽게 지문 채취용 분말이 뿌려져 있었고, 주변은 이미 과학수사팀의 활동 흔적으로 가득했다. 은율은 문고리를 가볍게 쓸어보았다.

    “밀실입니다.”

    김형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한마디에 모든 설명이 함축되어 있었다.

    “창문은 모두 이중 잠금장치로 안에서 완벽하게 잠겨 있었습니다. 방범창, 방탄 유리까지 완벽했죠. 발코니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에서 걸쇠가 굳게 잠겨 있었고,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강태준 씨는 혼자 살고 있었고, 비서와 가사 도우미는 오후에 퇴근한 상태였습니다. CCTV는 층별 복도와 엘리베이터에만 설치되어 있는데, 사망 추정 시각에 이 방으로 접근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지문 감식 결과, 강태준 씨 본인의 지문 외에는 다른 사람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어요. 문 잠금장치에도, 창문에도, 어디에도.”

    “그럼 강태준 씨가 스스로 문을 잠그고 자살했다는 말인가?” 은율이 무심하게 되물었다.

    김형사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의 손에는 흉기가 쥐어져 있지 않았어요. 흉기는 방 한가운데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목격자가 있습니다.”

    은율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목격자라니?”

    “경비실 직원이 밤중에 순찰을 돌다가 이 펜트하우스 층에서 희미하게 비명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뭔가 떨어지는 소리도요. 곧바로 올라와 이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잠겨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혹시나 해서 외부에서 육안으로라도 창문을 확인했지만, 그마저도 굳게 닫혀 있었다고 합니다. 비명 소리를 들은 시각과 사망 시각이 거의 일치해요.”

    은율은 잠시 침묵했다. 비명, 잠긴 문, 외부 침입 흔적 없음, 그리고 흉기가 피해자의 손에 쥐어져 있지 않음. 완벽한 밀실 살인. 아니, 적어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만한 조건이었다.

    “문 열어봐요.”

    김형사는 한숨을 쉬며 특수 제작된 도구를 이용해 문을 개방했다. 묵직한 철제 문이 천천히 안으로 열리자, 내부의 광경이 드러났다.

    서재는 넓고 호화로웠다. 벽면 가득 책장이 들어차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고가의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방 한가운데, 강태준은 거대한 페르시아 카펫 위에 쓰러져 있었다. 흰 셔츠는 붉은 피로 흥건했고, 눈은 아직도 무언가에 놀란 듯 크게 뜨여 있었다. 그의 시선은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은율은 망설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과학수사팀원들이 조심스럽게 비켜섰다. 그는 시신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방 전체를 훑었다. 그의 시선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방의 구석구석을 탐색했다.

    김형사는 은율의 뒤를 따르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어떻습니까? 정말… 말도 안 되죠?”

    은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강태준의 시신을 지나, 천장의 거대한 샹들리에를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는 벽에 걸린 추상화, 정교하게 짜인 책장,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까지, 모든 것을 스캔하듯 훑어 나갔다. 마치 이 방의 공기, 벽의 질감, 흐르는 시간의 잔상마저 읽어내는 것처럼.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서재 한쪽 벽에는 고풍스러운 작은 자개함이 놓여 있었다. 그 자개함 옆, 벽면에서 아주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 눈으로 겨우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머리카락보다 가는 틈이었다. 다른 이들은 아마 벽의 오래된 균열로 치부했거나, 아예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은율은 그곳으로 걸어갔다. 손가락으로 균열을 따라 조심스럽게 쓸어보니, 벽지가 살짝 들떠 있었다. 마치 원래 벽이 아니었던 것처럼, 혹은 어떤 것을 숨기기 위해 덧붙여진 것처럼.

    “김형사.”

    은율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공간을 갈랐다.

    “이 방은 벽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김형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모든 잠금장치는 보이는 곳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잠금장치야말로 가장 견고한 법이죠. 강태준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 방은, 결코 밀실이 아니었습니다.”

    은율은 손가락으로 그 미세한 균열을 톡톡 두드렸다. 그 순간, 방 안을 가득 채우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첫 번째 실마리였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장: 골목의 메아리

    지환은 늘 그랬듯 지겨운 오후의 끝자락을 질질 끌고 있었다. 빌어먹을 주방 보조 일은 튀김 기름 냄새와 뜨거운 열기로 사람을 잡아먹는 재주가 있었다. 오후 여섯 시, 퇴근 도장을 찍고 가게 문을 나서는 순간, 온몸의 근육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듯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시멘트 바닥에 옅게 깔린 노을빛은 오늘따라 유독 회색빛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색이었다.

    늘 다니던 번잡한 대로변 대신, 지환은 왠지 모르게 한적한 골목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재개발 예정지로 지정된 후로는 인적이 드물어진 낡은 골목이었다. 벽에는 빛바랜 벽화와 정체 모를 낙서들이 얼룩져 있었고, 이따금씩 고양이들이 길고 좁은 그림자 사이를 유령처럼 스쳐 지나갔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음식물 쓰레기의 시큼한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지만, 대로변의 소음보다는 차라리 나았다. 복잡한 생각들이 흐릿한 회색 연기처럼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골목의 절반쯤 들어섰을 때였다. 유독 빛바랜 벽, 낡은 합판과 깨진 플라스틱 상자들이 쌓여있는 구석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마치 오래된 형광등이 수명을 다해가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명멸하는 옅은 푸른빛이었다. 지환은 걸음을 멈췄다. 호기심이 피곤함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쓰레기 더미 쪽으로 다가갔다.

    낡은 합판을 밀어내자, 안쪽 벽면에 숨겨져 있던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안에, 푸른빛을 내뿜는 것은 다름 아닌 손바닥만 한 돌이었다. 거칠게 다듬어진 듯한 회색빛 돌에는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기하학적이면서도 유기적인 곡선들이 서로 얽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뛰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빛은 바로 그 문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이 골목의 흔한 낙서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대 유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지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돌에 닿는 순간, 차가운 전율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심장이 쿵, 하고 크게 울렸다. 돌에 새겨진 문양의 푸른빛이 순식간에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하게 타올랐다. 동시에 수많은 속삭임이 귓전을 때렸다. 오래된 언어, 잊힌 약속, 저편의 세계에서 넘어온 듯한 알 수 없는 소리들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가, 다시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기는 찰나의 순간. 지환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흐읍!”

    그가 거친 숨을 내쉬며 뒤로 나자빠지자, 푸른빛은 거짓말처럼 스러져 다시 희미한 상태로 돌아왔다. 골목은 여전히 퀴퀴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만이 그가 방금 경험한 일이 환상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지환은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여전히 미친 듯이 뛰어대고 있었다.

    그는 다시 벽면의 돌을 노려보았다. 이제는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는, 그저 평범한 회색 돌멩이처럼 보였다. 아까의 강렬한 경험은 순전히 제 착각이었을까? 피곤함에 지쳐 헛것을 본 것일까? 하지만 손끝에서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차가운 감각, 귓가에 맴도는 알 수 없는 속삭임의 잔향은 그 모든 것을 환상으로 치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지환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비친 골목은 방금 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이전과는 달리 보였다. 어딘가 낯설고, 어딘가 숨겨진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기분. 그는 쓰레기 더미를 다시 밀어 넣어 돌을 가렸다. 그리고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왔다.

    대로변에 다시 발을 디뎠을 때, 도시의 불빛과 사람들의 소리가 그를 감쌌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골목의 어둠과 그 안에서 만난 푸른빛 돌, 그리고 귓가를 맴도는 알 수 없는 메아리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손끝은 여전히 시큰거렸고, 심장은 방금까지도 차가운 불꽃에 휩싸여 있던 것처럼 뜨거웠다.

    오늘 밤은 잠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 낡은 골목길은 더 이상 단순한 지름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그의 삶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거대한 비밀의 입구였다.

  • 좀비 아포칼립스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에피소드 제목**: 그림자 속의 잔해

    **등장인물**:
    * **강민 (20대 후반)**: 침착하고 현실적인 생존자 그룹의 실질적인 리더. 책임감이 강하다.
    * **지혜 (20대 초반)**: 민첩하고 눈썰미가 좋은 저격수. 감성적이지만 강인하다.

    **[장면 1] 폐허가 된 도시의 잿빛 새벽**

    **#1.1**
    **장면**: 새벽의 푸른빛이 희미하게 깔린 도시의 폐허. 앙상한 건물들의 실루엣이 스카이라인을 잠식하고 있다. 도로에는 뒤집힌 차량들과 뜯겨 나간 간판들이 널려 있어, 한때 활기 넘치던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강민과 지혜는 망가진 버스 잔해 뒤에 몸을 숨긴 채, 주위를 경계하며 눈빛을 교환한다. 강민의 손에는 낡은 소총이, 지혜의 등에는 저격총이 매달려 있다. 둘 다 옷은 해지고 먼지로 얼룩져 있지만, 눈빛만은 살아남겠다는 강한 의지로 빛난다.

    **강민**: (나직하게, 시야를 스캔하며) …젠장, 여기도 영 시원찮네.

    **지혜**: (쌍안경으로 먼 곳의 건물을 살피며) 어제 본 마트 건물… 외곽은 깨끗했지만, 왠지 수상했어요. 안은 이미 싹 털렸을 수도 있고.

    **강민**: (한숨 쉬듯)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어. 식량은 바닥이야. 보존식으로 겨우 이틀 버틸 양.

    **지혜**: (쌍안경을 내리고 강민을 돌아본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죠. 어디든 가야 해요.

    **강민**: (지혜의 눈을 마주한다) 알아. 그래서 저쪽, 낡은 백화점 건물로 가보려고. 지도가 있다면 좋겠지만…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아직 탐색되지 않은 구역이 있을지도 몰라.

    **지혜**: 백화점이라면… (고개를 갸웃) 위험 부담이 너무 커요. 좀비들이 갇혀 있을 가능성도 높고, 혹시 다른 생존자 집단이 자리를 잡았다면…

    **강민**: 그래서 조심해야지. 낮이니까 시야는 확보될 거야. 밤이 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들어가서, 필요한 것만 챙겨서 나와야 해. 무엇보다… (허리춤에 찬 작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린다) 물이 필요해.

    **지혜**: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요. 제가 선두에서 시야 확보할게요. 움직이죠.

    **#1.2**
    **장면**: 강민과 지혜가 폐허 속을 조심스럽게 이동한다. 날카로운 파편들이 널린 길을 피하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들을 등지고 걷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부러진 간판과 먼지가 쌓인 차들의 삐걱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가른다. 멀리서 들려오는 좀비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장면 2] 죽은 자들의 백화점**

    **#2.1**
    **장면**: 낡은 백화점 건물 앞. 유리창은 대부분 깨져 있고,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곳도 보인다. 주차장은 뒤집힌 차들로 가득하고, 뼈대만 남은 버스들이 불타버린 흔적을 보여준다. 입구는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와 뒤엉켜 있지만, 간신히 들어갈 틈이 보인다.

    **지혜**: (낮은 목소리로) 입구 쪽은 깨끗해 보이네요. 외부엔 보행자가 없어요.

    **강민**: (주변을 살핀다) 너무 깨끗한 게 오히려 수상해. 누군가 치웠을 수도 있고, 아니면… (말을 흐린다)

    **지혜**: 안에 들어가면 더 조심해야겠네요. 제가 먼저 들어갈게요.

    **강민**: (지혜의 어깨를 잡는다) 아니, 내가 먼저. 네가 뒤에서 엄호해주는 게 더 효율적이야. 혹시 모르니 소음기 달린 권총 준비해.

    **지혜**: (고개를 끄덕이며 권총을 꺼낸다) 알겠어요.

    **#2.2**
    **장면**: 강민이 무너진 입구를 통해 조심스럽게 백화점 안으로 진입한다. 내부 역시 엉망이다. 고급스러운 상품들이 진열되었을 법한 공간에는 유리 파편과 뜯겨나간 옷가지, 먼지가 엉겨 붙어 있다. 희미한 햇빛이 깨진 천장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먼지 구덩이 속을 비춘다.

    **강민**: (속삭이듯) 조용히…

    **지혜**: (뒤를 따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핀다) …이상하네요. 좀비 소리가 하나도 안 들려요.

    **#2.3**
    **장면**: 두 사람은 층계를 올라 2층으로 향한다. 스포츠웨어 코너였을 법한 곳은 마네킹들이 팔다리가 부러진 채 나뒹굴고 있다. 한쪽 구석에 쌓인 박스 더미가 눈에 들어온다.

    **강민**: (박스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이쪽… 아직 뜯기지 않은 박스들이 좀 있어. 운이 좋으면…

    **지혜**: (갑자기 멈춰 서며) 잠깐! (권총을 든 손을 들어 강민을 제지한다)

    **강민**: (지혜의 시선을 따라간다) 왜? 뭘 본 거야?

    **지혜**: 저기… (손가락으로 저 멀리 어둠 속에 잠긴 코너를 가리킨다) 뭔가가 움직였어요. 그림자가…

    **#2.4**
    **장면**: 지혜가 가리킨 방향, 명품 코너였을 법한 곳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사람 형체가 보인다. 그러나 움직임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낡은 옷을 걸친 채,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모습.

    **강민**: (낮은 목소리로) 하나… 둘… 셋… 네 마리. 고립된 것 같군.

    **지혜**: (숨을 죽이며) 다행히 아직 우릴 보지 못한 것 같아요. 조용히 돌아갈까요?

    **강민**: (고개를 젓는다) 안 돼. 이 정도면 처리 가능해. 저 박스들은 포기할 수 없어.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귀한 것들이 있을지도 몰라. 이대로 돌아가면 또 며칠을 굶어야 해.

    **지혜**: …알겠어요. 제가 엄호할게요.

    **#2.5**
    **장면**: 강민이 칼을 꺼내들고, 지혜는 권총을 겨눈다. 강민이 조심스럽게 좀비들에게 접근한다. 그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볍고, 눈은 목표물에 고정되어 있다. 첫 번째 좀비의 뒤로 돌아선 강민이 망설임 없이 목을 긋는다. 피 한 줄기가 뿜어져 나오지만, 이미 마른 시체라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 좀비는 힘없이 쓰러진다.

    **지혜**: (속으로 중얼거린다) 좋아…

    **#2.6**
    **장면**: 두 번째 좀비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 순간, 지혜의 권총에서 ‘챙’ 하는 소음기 소리와 함께 총알이 발사된다. 좀비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며 바닥에 고꾸라진다.

    **강민**: (몸을 숙이며 다음 좀비에게 달려든다) 셋!

    **지혜**: (강민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남은 좀비들을 주시한다) 하나 남았어!

    **#2.7**
    **장면**: 마지막 좀비는 강민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이미 강민의 칼날은 그 좀비의 눈을 꿰뚫은 후였다. 좀비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려다 기도로 막힌 소리만 내며 쓰러진다.

    **강민**: (숨을 고르며, 주변을 다시 살핀다) 주변은 깨끗한 것 같아.

    **지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권총을 내린다) 휴… 정말이지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장면 3] 뜻밖의 수확과 그림자**

    **#3.1**
    **장면**: 강민과 지혜가 박스 더미로 다가간다. 박스들은 먼지로 뒤덮여 있지만, 잘 포장되어 있다. 강민이 칼로 박스를 뜯어본다. 안에는…

    **강민**: (눈을 크게 뜨며) 이런… 이건…!

    **지혜**: (놀란 표정으로 박스 안을 들여다본다) 생수 병이에요! 그것도 여러 개! 그리고… 통조림!

    **#3.2**
    **장면**: 박스 안에는 꽤 많은 생수병과 비상 식량용 통조림이 가득했다. 상자에 적힌 글자는 ‘비상 물품’이라고 되어 있었다. 아마도 재난 대비용으로 백화점 창고에 쌓아 두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감격과 안도의 표정을 짓는다.

    **강민**: (살짝 미소 짓는다) 기적이다… 진짜 기적이야. 이 정도면 며칠은 버틸 수 있어. 아니, 어쩌면 더 오래.

    **지혜**: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강민 오빠… 우리 살았어요…

    **#3.3**
    **장면**: 두 사람이 서둘러 배낭에 물과 통조림을 채워 넣는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안도감이 뒤섞여 있다. 그때,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스윽’ 하는 소리가 들린다.

    **강민**: (움찔하며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본다)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지혜**: (배낭을 메다 멈춰 서며) 들었어요… 발소리 같은데…

    **#3.4**
    **장면**: 어둠 속에서 천천히, 사람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좀비는 아니다. 하지만 낡은 군복을 입고, 낡은 소총을 든 채, 두 사람을 노려보는 모습은 또 다른 위협을 암시한다. 그의 얼굴은 수염으로 덮여 있고, 눈빛은 탐욕과 경계로 가득하다.

    **미지의 남자**: (쉰 목소리로) …흐음. 좋은 걸 주웠군.

    **강민**: (지혜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총을 겨눈다) 누구야?

    **미지의 남자**: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듯 웃는다) 죽은 자들의 물건을 줍는 자들 중 하나지. 하지만… 그 물건, 이제 내 거야.

    **지혜**: (강민의 뒤에서 권총을 겨눈다) 무슨 소리예요! 우리가 먼저 찾았어요!

    **미지의 남자**: (총구를 내리지 않는다) 선점? 이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힘 있는 자가 전부 갖는 거지. (그의 시선이 지혜의 저격총으로 향한다) 특히… 네가 가진 그 무기는 탐나는군.

    **강민**: (경고하듯) 물러서. 더 이상 다가오면 쏴버릴 거야.

    **미지의 남자**: (픽 웃으며) 하하! 그 조그만 권총으로? 겁대가리 상실했군. 난 혼자가 아니야.

    **#3.5**
    **장면**: 미지의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백화점 어둠 속의 기둥 뒤와 깨진 진열대 사이에서 또 다른 두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 역시 낡은 무기를 들고, 강민과 지혜를 포위하려는 듯 서서히 다가온다. 세 명의 사냥꾼이 두 명의 생존자를 노리는 그림이 연출된다.

    **지혜**: (얼굴이 굳어진다) 셋…

    **강민**: (이를 악문다) 젠장…

    **[장면 4] 절체절명의 순간**

    **#4.1**
    **장면**: 세 명의 약탈자가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온다. 그들의 얼굴에는 잔혹한 미소가 걸려 있다. 강민은 지혜와 등을 맞대고 총구를 이리저리 돌리며 경계한다.

    **미지의 남자**: (비웃듯이) 어때? 항복하면 고통 없이 보내줄 수도 있어. 물론 물건은 전부 놔두고 가야겠지만. 그리고… 아가씨. (지혜를 훑어본다) 그 예쁜 얼굴, 망가뜨리고 싶진 않거든.

    **지혜**: (분노에 찬 목소리로) 입 닥쳐!

    **강민**: (지혜의 팔을 살짝 잡아 진정시키고, 약탈자들을 노려본다) 우리가 죽으면 너희도 아무것도 못 가져. 그 전에 내가 먼저 너희 심장에 구멍을 내줄 테니까.

    **미지의 남자**: (어깨를 으쓱) 허세 부리기는. (다른 두 명에게 손짓한다) 잡어.

    **#4.2**
    **장면**: 두 명의 약탈자가 강민과 지혜에게 달려든다. 강민은 재빠르게 반응하여 첫 번째 약탈자를 향해 총을 쏘지만, 약탈자는 몸을 피하며 칼을 휘두른다. 지혜는 다른 약탈자를 향해 총구를 겨누지만, 약탈자 역시 재빨리 장애물 뒤로 숨어버린다.

    **지혜**: (외친다) 엄폐물이 많아서 총격이 어려워요!

    **강민**: (칼을 피하며) 이 건물은 우리에게 불리해! 도망쳐야 해!

    **#4.3**
    **장면**: 강민은 첫 번째 약탈자와 육탄전을 벌인다. 칼과 총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린다. 그 사이 지혜는 엄폐물 뒤에 숨은 다른 약탈자를 노리며 이동한다. 미지의 남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한다.

    **강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혜! 2층으로 올라가! 옥상으로 가는 길을 찾아!

    **지혜**: (엄폐물 뒤에서 몸을 날리며 달려간다) 하지만 오빠는!

    **강민**: 내가 시간을 벌게! 어서 가!

    **#4.4**
    **장면**: 강민이 약탈자의 칼을 쳐내고 몸을 틀어 권총 손잡이로 약탈자의 머리를 가격한다. 약탈자는 잠시 비틀거린다. 그 틈을 타 강민은 재빨리 뒤돌아 지혜를 향해 외친다.

    **강민**: 서둘러!

    **지혜**: (결심한 듯 계단을 향해 전력 질주한다) 알겠어요!

    **#4.5**
    **장면**: 지혜가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동안, 미지의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소총을 겨눈다.

    **미지의 남자**: (조롱하듯이) 어디 가려고, 예쁜 아가씨?

    **#4.6**
    **장면**: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발사된다. 그러나 총알은 지혜의 옆 벽을 스쳐 지나간다. 지혜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하며 위층으로 사라진다. 강민은 그 사이 다시 약탈자와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

    **강민**: (이를 갈며) 놓쳤군! 이 멍청한 자식아!

    **미지의 남자**: (입맛을 다시며) 흥, 제법인데. 하지만 오래가지 못할 거야. 동료들이 너를 잡아줄 테니.

    **[장면 5] 새로운 시작 혹은 끝**

    **#5.1**
    **장면**: 백화점의 옥상. 지혜는 허둥지둥 문을 열고 옥상으로 뛰쳐나온다. 옥상에는 낡은 환풍기들과 잡동사니들이 널려 있다. 지혜는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살핀다. 멀리 도시의 폐허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지혜**: (낮은 목소리로) 강민 오빠…

    **#5.2**
    **장면**: 지혜는 재빨리 등 뒤에 메고 있던 저격총을 꺼내 자세를 잡는다. 그녀의 눈은 날카롭게 아래층 백화점 내부를 향한다. 그녀의 시야에 강민이 두 명의 약탈자와 싸우는 모습이 들어온다. 그중 한 명은 아까 강민에게 맞았던 약탈자로 보인다. 미지의 남자도 시야에 들어온다.

    **지혜**: (숨을 참고 조준한다) 이제 내 차례야…

    **#5.3**
    **장면**: 지혜는 미지의 남자를 조준한다. 그의 동료들이 강민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 보인다. 지혜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얹힌다.

    **지혜**: (나직하게) 죽어…

    **#5.4**
    **장면**: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지혜의 저격총에서 불을 뿜는다. 총알은 정확히 미지의 남자의 팔을 관통한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소총을 놓치고 쓰러진다.

    **미지의 남자**: (비명 지르며) 크아악! 이… 이 미친 계집애가!

    **#5.5**
    **장면**: 강민을 공격하던 두 명의 약탈자들은 우두머리의 비명 소리에 놀라 지혜가 있는 옥상을 올려다본다. 그 순간, 강민이 약탈자 중 한 명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칼을 휘두른다. 약탈자는 복부를 움켜쥐고 쓰러진다.

    **강민**: (외친다) 지혜! 잘했어! 이제 도망쳐!

    **#5.6**1
    **장면**: 남은 한 명의 약탈자는 동료들의 부상과 우두머리의 쓰러진 모습에 당황하여 도망치기 시작한다. 강민은 그를 쫓지 않는다. 이미 목적은 달성했기 때문이다. 그는 쓰러진 미지의 남자의 소총을 주워 들고, 아까 주웠던 물품들이 든 배낭을 챙긴다.

    **강민**: (숨을 고르며 옥상을 올려다본다) 지혜! 여기는 이제 안전해! 내려와!

    **#5.7**
    **장면**: 지혜는 저격총을 다시 등 뒤에 메고 옥상 문을 통해 계단을 내려온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긴장감이 남아있지만, 결연한 의지가 더욱 뚜렷해졌다. 강민은 부상당한 약탈자들이 완전히 무력화된 것을 확인한 후, 그들이 더 이상 자신들을 쫓지 못하도록 조치한다. 그는 미지의 남자가 쓰러진 곳으로 다가가, 그의 얼굴을 쳐다본다. 탐욕으로 가득했던 눈빛은 이제 고통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다.

    **강민**: (나직하게) 다음부턴… 이 세상에서 남의 것을 탐내지 마라.

    **#5.8**
    **장면**: 강민과 지혜는 백화점 입구로 향한다. 어둠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하는 폐허의 도시. 두 사람의 발걸음은 비록 지쳐 보이지만, 손에 들린 물품들과 등에 맨 저격총은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내일을 향한 의지를 부여한다. 오늘 밤은 굶지 않을 것이고, 내일은 또 다른 생존을 위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혜**: (강민의 옆에서 걷는다) 오빠… 정말 아슬아슬했어요.

    **강민**: (작게 웃는다) 아슬아슬하지 않은 날이 언제 있었냐. 그래도 오늘은… (배낭을 살짝 흔든다) 좋은 수확이었어.

    **지혜**: (강민을 올려다본다) 우린… 계속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강민**: (지혜의 어깨를 살짝 두드린다) 살아남아야지. 우리는 아직… 살아있으니까.

    **#5.9**
    **장면**: 폐허가 된 도시의 석양이 붉게 물든다. 두 명의 생존자가 작은 희망의 빛을 안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잿빛 세상에 새로운 여운을 남긴다.

    **[에피소드 끝]**

  • 메카 액션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제1장. 얼어붙은 강철의 밀실

    “젠장…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거대한 강철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내부로 들어서자 거대한 아치형 천장 아래, 돔 형태의 격납고가 눈앞에 펼쳐졌다. 중앙에는 암회색의 묵직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기체가 우뚝 서 있었다. 실험용 전투 메카닉 ‘아스가르드-X’. 그 위압적인 실루엣은 살아있는 맹수 같기도, 혹은 검은 신전의 수호자 같기도 했다. 강 소위는 고개를 저으며 굳게 닫힌 메카닉의 콕핏을 응시했다.

    류진은 늘 그랬듯, 태평한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흐트러짐 없는 강 소위의 칼날 같은 시선과 달리,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차갑고 비릿한 금속성 냄새와 냉각액 특유의 향이 코를 찔렀다. 바닥에 깔린 두터운 방음재가 그의 발걸음 소리마저 집어삼키는 듯했다.

    “그래서, 강 소위. 제법 어려운 사건이라고 들었는데, 어디 한번 설명해 주시죠.” 류진이 눈썹을 까딱였다. 그의 시선은 ‘아스가르드-X’의 매끄러운 장갑 위를 훑고 있었다.

    “어렵다니요, 이건 불가능합니다!” 강 소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사망자는 한서준 박사입니다. ‘아스가르드-X’ 개발의 총책임자였죠. 어제 저녁 늦게, 이 7번 테스트 챔버 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됐습니다.”

    그녀는 딱딱한 어조로 보고를 시작했다. “발견 당시, 박사님은 ‘아스가르드-X’의 콕핏에 앉아 있었습니다. 콕핏은 내부에서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었고, 저희 보안 시스템은 외부에서의 침입 시도를 단 한 건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더 중요한 건… 이 7번 테스트 챔버 자체도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된 상태였습니다. 모든 출입구는 봉쇄되었고, 센서 기록에 따르면 한 박사님이 들어오신 이후, 아무도 이 챔버를 드나든 흔적이 없습니다.”

    “밀실 살인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흥미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네, 그것도 단순한 밀실이 아닙니다. ‘아스가르드-X’의 콕핏은 생체 인식으로만 해제되는 최첨단 시스템입니다. 게다가 이 챔버는 우주 환경 시뮬레이션까지 가능한 특수 설계 시설이죠. 벽은 수십 센티미터 두께의 특수 합금으로 되어 있고, 전자기 차폐는 물론, 완벽한 기밀을 자랑합니다. 그 어떤 외부 침입도 물리적으로, 그리고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강 소위가 숨을 골랐다. “부검 결과는 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 박사님은 심각한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온몸이 얼어붙을 듯한 상태였죠.”

    류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아스가르드-X’의 거대한 발치에 섰다. “저체온증이요? 이 최첨단 콕핏 안에서?”

    “네. 그런데 콕핏 내부의 환경 제어 시스템 기록을 확인한 결과, 사망 당시에도 실내 온도는 정확히 22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나옵니다. 산소 농도 또한 정상이었고요.” 강 소위는 이를 악물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시스템은 완벽하고, 외부 침입은 없었고, 밀실 안에서 사람은 얼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내부 시스템은 정상 온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 보안국 전체가 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 류진 탐정님.”

    류진은 대답 없이 콕핏을 올려다봤다. 조종석 유리는 짙은 스모크 처리되어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아스가르드-X’의 몸체를 따라 움직였다. 손가락으로 거친 질감의 장갑 표면을 쓸어보기도 하고, 육중한 관절 부위를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강 소위는 그가 이상한 것을 발견할 때마다 눈치 보듯 숨을 죽였다.

    “콕핏 잠금은 어떻게 되어 있었죠?” 류진이 불쑥 물었다.

    “한 박사님이 내부에서 걸어 잠근 상태였습니다. 부검 결과, 박사님의 시신에서 저항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외부 침입 흔적도 전혀 없고요. 마치… 스스로 콕핏에 들어가서 얼어 죽은 것 같은 상황입니다.”

    “스스로 얼어 죽는 사람이라… 희한한 취미군요.” 류진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아스가르드-X’의 등 부분에 위치한 거대한 냉각 배기구에 닿았다. 그것은 단순한 환기구가 아니었다. 전투 시 메카닉 내부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열을 한 번에 배출하기 위한, ‘아스가르드-X’의 핵심 시스템 중 하나인 ‘초고밀도 극저온 코어’의 배기구였다. 이 코어는 실험용 플라즈마 무기의 과열을 막기 위해 개발된, 상상을 초월하는 냉각 성능을 자랑하는 장치였다.

    “강 소위, 이 ‘아스가르드-X’의 콕핏은 비상시 고온 환경에 대비한 냉각 시스템이 내장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류진이 갑자기 물었다.

    “네? 아, 그렇습니다. 외부에서 핵융합 폭발 같은 극한의 열 공격을 받았을 경우를 대비해, 조종사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비상 냉각 루프가 있습니다. 콕핏과 직접 연결되어 최단 시간에 온도를 낮출 수 있도록 설계되었죠.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상 상황을 가정한 것이고… 실제 전투에서 그걸 쓸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강 소위는 의아한 표정으로 류진을 바라봤다. “갑자기 왜 그걸 물으시는 거죠?”

    류진은 냉각 배기구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흥미롭군요. 그 비상 냉각 루프는… 콕핏의 주 환경 제어 시스템과는 별도로 작동합니까?”

    강 소위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네, 비상 상황에서는 주 시스템의 오작동을 고려해 독립적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보조 장치인 셈이죠. 긴급 상황 시에는 외부 제어 없이도 콕핏 내에서 직접 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물론, 활성화되었다면 시스템 기록에 남았을 겁니다.”

    “기록에 남았을 거라… 그렇겠죠.” 류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천천히 메카닉의 아래쪽, 바퀴 같은 이동 부품 대신 거대한 세 개의 다리 중 하나를 향해 걸어갔다. 육중한 다리 관절 사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작은 패널이 있었다. 잠겨 있기는 했지만, 마치 정비용으로 쓰이는 듯한 단순한 형태였다. “이건 뭡니까?”

    “아, 그건 외부 진단 및 정비 포트입니다. 기체 전체의 시스템 이상 유무를 점검할 때 사용하는 곳이죠. 보안이 철저해서 생체 인증과 다중 암호 없이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강 소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류진을 쳐다봤다. “거기서 뭔가 단서를 찾으신 겁니까?”

    류진은 패널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거 말이죠. 아주 재미있는 곳입니다.”

    그는 다시 ‘아스가르드-X’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 섰다. 한 박사의 시신이 여전히 안에 있는 콕핏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강 소위, 한 박사님은 비상 냉각 루프가 콕핏 내부를 급속도로 냉각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겠죠?”

    “물론입니다. 본인이 개발한 시스템인데요.”

    “그렇다면, 이 비상 냉각 루프가 역으로 작동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까요?” 류진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강 소위는 미간을 찌푸렸다. “역으로 작동된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냉각은 냉각일 뿐입니다. 발열 기능이 있는 게 아닙니다.”

    “아니죠. 냉각은 극저온 에너지를 주변에서 ‘빼앗는’ 과정입니다. 만약 그 빼앗은 에너지를… 콕핏 안으로 ‘분출’할 수 있다면?” 류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니면 더 단순하게, 그 ‘초고밀도 극저온 코어’의 냉각 에너지를 콕핏으로 직접 흘려보낼 수 있다면?”

    강 소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설마… 그건 시스템상 불가능합니다! 비상 냉각 루프는 콕핏의 고온을 외부로 빼내는 역할이지, 코어의 극저온을 콕핏으로 끌어들이는 용도가 아닙니다!”

    “원래는 그렇겠죠. 하지만 이 ‘아스가르드-X’의 핵심인 ‘초고밀도 극저온 코어’는 얼마나 강력합니까? 그 냉각 에너지를 잠시 동안만이라도 콕핏으로 직결시켰다면, 콕핏의 주 환경 시스템이 오작동으로 판단하고 기록을 지워버리기 전에, 이미 안의 사람은 얼어 죽었을 겁니다.” 류진이 손가락으로 아까 봤던 외부 진단 포트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조작은 바로 저 진단 포트를 통해 이루어졌을 겁니다. 보안 시스템은 외부 침입을 감지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시스템 내부’에서의 조작은 놓쳤을 수 있습니다. 마치 기계 스스로 고장 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죠.”

    “하지만… 그 포트에 접근하려면 생체 인증이 필요하고, 기록도 남지 않습니까?” 강 소위가 거의 절규하듯 물었다.

    류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반적인 경우는 그렇겠죠. 하지만 한 박사님 같은 최고 설계자에게는 비밀리에 사용하는 비상 코드나 백도어가 존재했을 겁니다. 모든 보안 시스템이 완벽하더라도, 개발자 본인을 위한 예외는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죠. 범인은 그 예외를 이용했을 겁니다. 박사님에게 직접 코드를 알아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박사님의 생체 정보를 몰래 복제했을 수도 있겠죠.”

    류진은 콕핏 유리에 손을 짚었다. 차가운 유리가 그의 손끝에 닿았다. “콕핏 내부의 주 환경 시스템 센서들은 외부 충격이나 자체적인 결함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내부 부품의 일시적이고 극단적인 오작동, 특히 비상 시스템의 역활용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기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잠시 동안 콕핏 전체를 극저온 환경으로 만들어 한 박사님을 살해하고, 다시 시스템을 정상으로 돌려놓은 것이죠. 주 환경 시스템은 갑작스러운 냉각을 오류로 인식하고 스스로 복구한 후, 그 짧은 ‘이상 상황’ 기록을 지웠을 겁니다.”

    “그럼… 범인은…?”

    “아직 거기까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밀실은 깨졌습니다, 강 소위.” 류진은 콕핏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 거대한 강철의 신전은, 스스로 비명을 지르며 제 주인을 얼려 죽인 겁니다. 범인은 이 ‘아스가르드-X’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자일 테죠. 그리고 한 박사님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던 자일 테고요.”

    그는 마지막으로 거대한 메카닉을 올려다봤다. 차가운 강철의 덩어리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하지만 류진의 눈에는, 그 침묵 속에서 터져 나오는 차가운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자, 이제 그 진단 포트의 기록을 다시 확인해 보십시오. 단 몇 초라도 비정상적인 접근이나 데이터 조작이 있었는지. 아마 미세한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 했겠지만, 천재는 늘 작은 실수를 남기는 법이거든요.”

  • 무협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작품명:** 용의 비늘 아래 핀 연꽃
    **에피소드 제목:** 붉은 달 아래 맹세

    **[장면 시작]**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숲은 온갖 짐승들의 숨소리로 가득했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붉은 달빛은 세상 모든 것을 신비롭고 위태롭게 물들였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계곡, 깎아지른 절벽 아래 숨겨진 작은 동굴 입구에 한 여인이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그녀의 발걸음은 마치 숲의 그림자와도 같이 가벼웠지만,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비룡.”

    여인의 목소리는 숲의 정적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나직했지만, 그 속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청운문(靑雲門)의 수석 제자이자, 일찍이 검법으로 강호에 이름을 알린 재목, 연화(蓮華)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에는 날카로운 검기가 아닌 애틋함과 불안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동굴 안쪽에서 어둠을 가르고 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인간의 모습이었으나,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범상치 않았다. 은은하게 빛나는 비늘 같은 피부, 깊이를 알 수 없는 황금빛 눈동자. 비룡(飛龍)이었다. 용족의 젊은 수장이자, 수천 년간 인간과 앙숙이었던 거대한 종족의 지도자.

    그가 성큼 다가와 연화의 어깨를 감쌌다. 온몸을 휘감는 단단하고 뜨거운 기운에 연화는 비로소 긴장을 풀고 그의 품에 안겼다. 그의 품에서 낯설면서도 익숙한, 흙냄새와 비릿한 용의 기운이 섞인 듯한 독특한 향이 느껴졌다.

    “늦었군, 연화. 오는 길에 별일은 없었고?” 비룡의 목소리는 낮고 무게감이 있었지만, 연화에게 닿을 때면 깃털처럼 부드러워졌다. 그의 손이 연화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연화는 그의 손길에 고개를 기댔다. “별일 없었어. 다만… 요즘 청운문 주변에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고 수련을 더 엄하게 시켜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뿐.”

    “이상한 기운?” 비룡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 한순간 서늘한 광채가 스쳤다. “용족의 기운인가.”

    연화는 고개를 젓다가 잠시 망설였다. “아니, 그보다는… 며칠 전부터 사부님과 장로님들이 모여서 ‘이변(異變)’에 대해 논의하는 걸 들었어. 산맥 깊은 곳에서 고대 용의 기운이 꿈틀거린다는 소문이 돈다고.”

    비룡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의 눈빛에 한순간 섬뜩할 정도의 살기가 번뜩였다. 그러나 이내 그 살기는 연화를 향한 걱정으로 바뀌었다. “고대 용의 기운… 그들은 분명 나와 우리 용족을 의심하고 있을 터.”

    “비룡.” 연화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이러다 우리 관계가 발각될까 두려워. 수천 년의 원한 위에 피어난 우리의 인연을 누가 이해하려 할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파르르 떨리는 불안감이 역력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비룡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손이 연화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감쌌다. “용족은 인간을 멸시하고, 인간은 용족을 두려워하지. 우리의 사랑은 이 세상 모든 이에게 금지된 것. 하지만… 난 포기할 수 없다, 연화.”

    그는 연화를 끌어안았다. 연화의 작은 몸이 그의 품에 완전히 파묻혔다. 동굴 안은 그들의 숨결과 심장 소리만이 가득했다. 밖의 세상이 아무리 위험해도, 이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완벽한 안식처였다.

    “나도 포기할 수 없어.” 연화의 목소리가 울먹였다. “나는 너의 눈빛 속에서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진정한 슬픔과 고결함을 보았어. 너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내 운명은 너에게로 향했어.”

    비룡은 연화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은 뜨겁고, 그 온기는 연화의 심장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그때였다.
    **바스락!**
    동굴 입구 쪽 숲에서 나뭇가지 밟는 소리가 들렸다. 작지만 또렷하게.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굳혔다. 비룡의 황금빛 눈동자가 번개처럼 날카로워졌다. 연화는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었다.

    “누구냐!” 비룡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인간의 것을 넘어선 맹수의 위압감이 담겨 있었다. 동굴 안의 공기가 급격히 차갑게 식어갔다.

    **파앗!**
    동굴 입구에 갑자기 섬광이 터지며 어둠이 걷혔다. 세 명의 무인들이 날카로운 검을 겨눈 채 서 있었다. 그들의 도포에는 청운문의 문양이 선명했다.

    “누구냐니? 우리가 너희에게 물을 참이다!” 선두에 선 중년 무인이 날카롭게 외쳤다. 그의 눈은 비룡을 향해 의심과 경계심을 가득 담고 있었다. “연화 제자! 대체 밤중에 이런 외진 곳에서 누구와 있는 것이냐!”

    연화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청풍대사님!”

    청풍대사(淸風大師)는 청운문의 장로 중 한 명으로, 고지식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특히 이종족에 대한 혐오가 깊었다.

    “이자는… 낯선 사내로군.” 청풍대사의 시선이 비룡을 훑었다. 그의 예리한 눈빛이 비룡의 인간 같지 않은 기색을 파고들었다. “얼굴에 요사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니, 필시 인간이 아닐 터. 연화, 어째서 이런 요물과 함께 있는 것이냐!”

    비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더욱 거세졌다. 그의 등 뒤로 보이지 않는 용의 형상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요물이라…” 비룡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비룡, 안 돼!” 연화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대로 정체가 발각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될 터였다.

    청풍대사는 비룡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감히 청운문의 제자에게 해를 끼치려 드는가! 당장 정체를 밝혀라!”
    그가 외치며 한 걸음 내딛자, 뒤따르던 무인들도 검을 뽑아 들고 공격 태세를 취했다.

    “하찮은 인간들 주제에.” 비룡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연화를 등 뒤로 감추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쉬이이잉-!**
    갑자기 동굴 안의 공기가 칼날처럼 변하며 사방의 바위들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비룡의 손끝에서 푸른빛의 기운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용족 특유의 기운, 그것도 보통 용족이 아닌, 수장의 강대한 힘이었다.

    청풍대사의 얼굴에 놀라움과 함께 깊은 경악이 스쳤다. “이 기운은… 설마! 용족의 기운이렷다!”

    “비룡! 안 돼! 그들을 해치면 안 돼!” 연화가 절규했다. 이대로 용족의 힘을 쓰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그들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비룡은 잠시 망설였다. 연화의 간절한 눈빛이 그의 분노를 억눌렀다. 그의 손끝에서 뭉치던 푸른 기운이 흐트러졌다. 대신, 그는 다른 수를 택했다.

    “연화, 내 손을 잡아라!” 비룡이 외쳤다.
    연화는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비룡의 손이 그녀를 감싸자마자, 그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연화의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쉬이이익-!**
    동굴의 바닥에서 갑자기 푸른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야를 가릴 정도로 짙어진 안개는 청풍대사와 그의 일행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게 무슨… 연막술인가!” 청풍대사가 당황하여 외쳤다.
    그들이 시야를 확보하려 애쓰는 사이, 비룡은 연화를 안아 들고 동굴 깊은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움직임은 그림자처럼 빠르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안개가 걷히고, 청풍대사와 무인들이 눈을 비비며 동굴 안을 살펴보았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연화도, 정체 모를 사내도 흔적 없이 사라진 후였다.

    “젠장! 놓쳤다!” 한 무인이 분통을 터뜨렸다.

    청풍대사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의 손에는 연화가 동굴 입구에 떨어뜨리고 간 작은 비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연화가 항상 머리에 꽂고 다니던, 청운문의 문양이 새겨진 비녀였다. 그의 굳게 다문 입술이 희미하게 떨렸다.

    “용족… 용족이 인간의 여인과 밀회했다니…” 청풍대사의 눈빛은 분노와 함께 복잡한 감정으로 일렁였다. “이것은 단순한 이변이 아니다. 이건… 인간과 용족의 오랜 평화를 깨뜨릴 거대한 불길의 시작이다.”

    **한편, 동굴을 벗어나 숲을 빠르게 가로지르던 비룡과 연화.**

    비룡은 여전히 연화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좌절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결국… 발각되었군.” 비룡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연화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니야, 비룡… 이건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어. 우리가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운명 같은 것.”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비룡은 발걸음을 멈추고 연화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달빛이 그의 눈동자 위로 부서져 내렸다.
    “운명 따위, 내가 부숴버릴 것이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결의로 가득했다. 그의 등 뒤로 보름달이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로 검고 단단한 비늘 하나가 스치듯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청운문 본원, 청풍대사의 서재.**

    청풍대사는 붓을 든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앞에는 낡고 오래된 두루마리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두루마리에는 고대에 기록된 듯한 희미한 그림과 글자들이 있었다. 그림 속에는 용과 인간이 서로 칼을 겨누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한 쌍의 남녀가 비극적으로 얽혀 있었다.
    글자의 내용은 희미했지만, ‘용인의 저주’, ‘종족의 멸망’, ‘금지된 결합’ 같은 단어들이 눈에 띄었다. 그는 비녀를 든 손으로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용족과 인간의 금지된 사랑… 그것이 현실이 되다니. 고대의 예언이 다시 시작될 것이란 말인가.”
    그의 눈은 불안과 함께 무언가 결심한 듯 날카롭게 빛났다.
    “허락할 수 없다. 절대로.”

    **동시에, 용족의 성역, 검은 산맥의 심장부.**

    수십 길 높이의 거대한 동굴 내부. 기이한 푸른빛의 결정들이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그 빛을 받으며, 비룡은 인간의 모습이 아닌, 본래의 용의 형태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몸을 뒤덮은 흑색 비늘이 빛을 반사하며 신비로운 광채를 뿜어냈다. 거대한 뿔이 솟아나고, 날카로운 발톱이 바위를 찍었다. 그의 위압적인 존재감에 동굴 전체가 경외심에 떨었다.

    그의 앞에는 여러 용족들이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 흑룡대 대장 묵룡(墨龍)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수장님. 인간들의 기운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성역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비룡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용의 눈으로 먼 동쪽, 인간의 세상이 있는 곳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폭풍이 일고 있었다.

    **[비룡]:** “인간들은 우리의 정체를 눈치챘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나의 정체를. 그리고… 연화의 존재를.”
    그의 목소리는 용족 특유의 저음으로 동굴 전체를 울렸다.
    **[비룡]:** “묵룡, 모든 용족에게 명을 내려라. 인간들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어떤 도발에도 응하지 마라. 지금은 때가 아니다.”

    묵룡은 고개를 들지 않고 답했다.
    **[묵룡]:** “알겠습니다, 수장님. 하지만 인간들은 그들의 ‘금지된 존재’를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의 대전쟁이 다시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비룡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묵룡을 보았다. 그의 거대한 용의 눈동자 속에서 연화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비룡]:**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연화를 지켜낼 것이다. 설령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우리의 사랑을 저주한다 해도.”
    그의 목소리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비룡]:** “나는 용족의 수장이자, 연화를 사랑하는 자. 이제, 고통스러운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인간과 용족,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르는… 잔혹한 운명이.”

    붉은 달은 여전히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금지된 사랑의 불꽃은 더욱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1화 끝]**

  • 이세계 전생 (Isekai) 독립적인 단편 소설

    고요한 심우주, 마치 검은 벨벳 천에 흩뿌려진 다이아몬드처럼 별들이 박혀 있는 그곳에서,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싣고 항해하는 우주선 ‘아레스’호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섬이었다. 길고 지루한 항해는 승무원들의 정신을 서서히 마모시키고 있었다.

    “선장님, 미확인 에너지 신호 포착.”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함교의 정적을 깬 건 수석 과학자 서예진 박사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강준호 선장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항해의 피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비상 상황 앞에서는 언제나 그랬듯 강철 같은 냉정함이 번뜩였다.

    “좌표?”
    “은하계 표준 시간으로 2315-알파 섹터, 저희 현 위치에서 0.5파섹 지점입니다. 지금까지 탐지된 적 없는 패턴이에요. 자연적인 현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모니터에는 주황색으로 번뜩이는, 비정상적인 에너지 스펙트럼이 나타났다. 박지훈 부기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블랙홀의 특이점 같은 건 아닐까요? 주변에 별들도 없는데.”
    “블랙홀과는 다릅니다. 이 신호는… 너무 규칙적이에요. 마치 맥박처럼,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출력이 너무 강합니다. 저희 센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예요.” 서 박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선장님, 이건 우리가 찾던 겁니다. 분명 외계 문명의 흔적일 거예요.”

    강 선장은 잠시 침묵했다. 미지의 존재와 조우할 가능성. 인류의 숙명과도 같은 이 순간 앞에서 그는 한없이 겸손해졌다.

    “예진 박사, 분석 결과 보고서 재확인 후 최단 시간 내에 브리핑 준비하세요. 지훈 부기장, 동력계 최대로 끌어올려. 충돌 경고 시스템 활성화하고, 접근 속도 최저로 유지해.”
    “예, 선장님!”
    “선장님, 정말 다가갈 건가요?” 박지훈 부기장의 목소리에는 우려가 섞여 있었다.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모든 것은 미지의 영역에서 시작되었다네, 지훈. 우리는 탐험가야. 그리고, 저 너머에 무언가 엄청난 것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며칠 후, 아레스호는 서서히 그 미지의 존재에 다가섰다. 육안으로도 식별 가능한 거리가 되었을 때, 모두는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거대했다.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크기, 완벽한 육각형 모양의 구조물은 우주 공간에 어떠한 추진력도 없이, 그저 존재하고 있었다. 검은색의 표면은 빛을 흡수하는 듯했고, 마치 밤하늘에 뚫린 구멍처럼 느껴졌다.

    “이건…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형태가 아닙니다.” 서예진 박사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설계되었어요. 누군가에 의해, 혹은 무언가에 의해.”
    “내부에서 신호가 감지됩니까?” 강 선장이 물었다.
    “아니요. 어떤 전파도, 복사열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완벽한 죽음의 고요함… 오직 저 규칙적인 에너지 파동만이 전부예요.”

    강 선장은 결심했다. “탐사선을 내린다. 나도 함께 간다.”
    “선장님, 위험합니다!” 박지훈 부기장이 반대했지만, 강 선장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이건 내 임무이자, 나의 의지다. 예진 박사, 나와 함께 가겠나?”
    “영광입니다, 선장님.” 서예진 박사의 눈은 호기심으로 불타올랐다.

    소형 탐사선이 아레스호의 격납고를 벗어나 육각형 구조물로 향했다. 그들은 천천히 다가갔다. 구조물의 표면은 매끄러웠고, 어떤 문양이나 문구도 없었다. 완벽한 검은색,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심연 같았다.

    “선장님, 저기… 뭔가 있습니다.” 서예진 박사가 가리킨 곳에는 육각형 구조물의 한 면에 작은 틈새가 보였다. 마치 누군가 칼날로 그어 놓은 듯, 가느다란 선이었다. 그리고 그 선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 푸른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탐사선은 틈새 근처에 착륙했다. 그들은 EVA 슈트를 입고 탐사선 밖으로 나섰다. 무중력 공간에서 그들은 조심스럽게 육각형 표면을 따라 이동했다. 푸른빛은 가까워질수록 더욱 강렬해졌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맥박 치듯 미약하게 깜빡였다.

    “이건… 에너지원이군요.” 서 박사가 틈새로 손을 뻗었다.
    “함부로 만지지 마!” 강 선장이 소리쳤지만 늦었다. 서예진 박사의 손가락이 푸른빛에 닿는 순간, 거대한 육각형 구조물이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떨리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빛은 시각을 넘어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강 선장은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서 우주가 일그러졌다. 별들이 사라지고, 모든 검은색이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파란색은 또다시 다른 색으로, 다른 형태로 변해갔다.

    강 선장은 자신이 더 이상 무중력 공간에 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거대한 나무뿌리들 사이에서, 따뜻하고 축축한 흙냄새를 맡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빽빽한 나뭇잎들이 햇빛을 가려 어둑했다. 숲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숲.

    “선장님…?”
    곁에서 들려오는 서예진 박사의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정했고, 어딘가에서 박지훈 부기장의 흐느낌도 들리는 듯했다.
    “예진 박사! 정신 차려! 이게… 대체…?”

    강 선장이 주위를 둘러보자, 서예진 박사와 박지훈 부기장이 보였다. 그들은 더 이상 우주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이 세계에 태어난 사람처럼, 얇은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무언가 낯선 열매가 들려 있었다. 그들의 눈은 공포와 경외감, 그리고 낯선 향수로 가득 차 있었다.

    “저는… 저는 이곳에서 살았어요.” 서예진 박사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숲의 가장자리에서 작은 오두막을 짓고, 매일 아침 샘물에서 물을 길어왔어요. 지훈은… 지훈은 늘 저와 함께 사냥을 갔었죠.”
    “말도 안 돼!” 강 선장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그의 손 역시, 평생 우주선의 금속을 만져오던 손이 아니었다. 거칠고, 굳은살이 박혀 있었으며,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옷자락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을 느꼈다.

    그의 머릿속에는 낯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름 모를 들꽃의 향기, 밤하늘에 빛나는 두 개의 달, 낯선 언어로 속삭이던 친구들의 목소리, 따뜻한 모닥불의 온기…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하여, 아레스호에서의 삶이 오히려 꿈처럼 느껴졌다.

    “이건… 우리가 아니야.” 박지훈 부기장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슬픔과 혼란이 가득했다. “우리는 우주선 아레스의 승무원이야… 그런데 왜… 왜 이 모든 것이 진짜 같지?”

    강 선장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공허감을 느꼈다. 이 숲의 삶은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가족도, 친구도, 행복했던 기억들도 그에게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매일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숲의 생명들과 교감하며 살아왔다. 그의 머릿속은 두 개의 자아로 찢겨 나가는 듯했다. 한쪽은 아레스호의 강준호 선장, 다른 한쪽은 이 숲에서 살아온 이름 모를 존재.

    “저를 기억하세요, 아버지?”
    갑자기 숲속에서 작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 선장은 고개를 돌렸다. 덤불 사이에서 작은 소녀가 나타났다. 소녀의 얼굴은 맑고 순수했으며, 강 선장의 눈을 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소녀의 눈은, 그가 잠시 잊고 있었던, 그의 딸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강 선장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딸… 그는 우주로 떠나기 전, 지구에 두고 온 딸을 떠올렸다. 소녀는 마치 그가 이곳에서 살아온 삶의 증거인 양,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는 그 소녀와 함께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숲속에서 함께 열매를 따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들…

    “아니… 아니야… 나는…”
    강 선장은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현실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혼란 속에서 그는 필사적으로 진실을 붙잡으려 했다. 그는 우주선 아레스의 선장 강준호다. 그는 미지의 유물을 탐사하러 온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감각은, 그의 기억은, 그의 심장은 이 숲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었다.

    그때, 육각형 구조물이 다시 한번 강하게 진동했다.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번뜩였다. 숲이 흔들리고,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강 선장은 몸을 웅크렸다. 소녀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아버지…?”

    모든 것이 다시 한번 푸른빛으로 뒤덮였다.

    ***

    강 선장은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탐사선 바깥, 무중력 공간에 떠 있었다. EVA 슈트의 헬멧 안에서 그의 숨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눈앞에는 여전히 거대한 검은색 육각형 구조물이 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은… 여전히 푸른빛이 깜빡이는 틈새에 닿아 있었다.

    “선장님! 괜찮으십니까?”
    서예진 박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들려왔다. 그녀와 박지훈 부기장은 여전히 탐사선 근처에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강 선장과 같은 혼란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서 박사… 지훈… 너희도…?” 강 선장은 겨우 목소리를 냈다.
    “숲… 숲이 있었어요, 선장님! 저는… 저는 거기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제가 아레스호의 승무원이라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져요.” 서예진 박사의 목소리는 떨렸다.
    “제 아내… 제 아들도 그 숲에 있었어요…” 박지훈 부기장은 흐느꼈다. “아레스호에서의 10년이… 한순간의 꿈 같아요.”

    강 선장은 자신의 손을 빼냈다. 푸른빛은 여전히 그 틈새에서 맥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육각형 구조물에 손을 댄 시간은 아마 몇 초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그들은 수십 년의 삶을 경험했다. 낯선 세계에서, 낯선 존재로 태어나, 사랑하고, 아파하고,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왔던 것이다.

    “모두 탐사선으로 복귀한다. 즉시 아레스호로 돌아가.” 강 선장은 애써 냉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평온하지 않았다.

    아레스호로 돌아온 승무원들은 침묵에 잠겼다. 함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금속으로 된 벽, 빛나는 모니터, 복잡한 기계들… 이 모든 것이 갑자기 차갑고, 공허하며,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강 선장은 함장석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숲의 향기, 소녀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 낯선 세계에서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는 과연 아레스호의 선장 강준호일까? 아니면 그 숲에서 딸과 함께 살아가던 이름 모를 아버지일까?

    이 거대한 육각형 구조물은 그저 물리적인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원과 존재의 경계를 허무는 문이었다. 그들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전생했다. 다른 세상, 다른 삶으로. 단지 그 전생이 물리적인 몸을 바꾸는 것이 아닌, 의식과 기억의 심연을 파고들어, 또 다른 삶의 경험을 심어 넣는 방식이었을 뿐이었다.

    “선장님…” 서예진 박사가 다가왔다. “저희…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강 선장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예전의 강 선장의 눈이 아니었다.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그 안에는 형언할 수 없는 깊이와, 미지의 깨달음이 번뜩이고 있었다.

    “우리는… 탐험가다.” 강 선장은 마치 자신에게 이야기하듯 중얼거렸다. “우리는 우주의 심연을 탐험했고, 그 심연은 우리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이제… 두 개의 삶을 사는 존재가 되었다.”

    우주선 아레스는 다시 움직였다. 허공에 떠 있는 검은 육각형 구조물을 뒤로한 채, 그들은 인류의 귀환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더 이상 이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육신은 여전히 우주선 안에 있었지만, 그들의 정신은 이미 낯선 세계에 전생하여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그들은 가장 기묘한 형태로 ‘이세계 전생’을 경험한 인류 최초의 존재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진짜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될 참이었다. 두 개의 현실, 두 개의 삶 속에서, 그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아레스호는 칠흑 같은 우주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마치 자신들의 내면에 또 다른 우주를 품은 채.

  • 타임슬립 (시간여행)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성공”이라는 단어는 흔히 빛나는 별에 비유되곤 했다. 하지만 김준혁에게 그 단어는, 지금 그가 서 있는 수십 층 빌딩의 최상층을 휘감는 도시의 불빛이자,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 그 자체였다. 그의 눈앞에는 ‘아르케(ARKE)’라는 로고가 새겨진 거대한 전광판이 번쩍이고 있었다. 몇 년 전, 작은 지하방에서 시작했던 꿈이 현실이 되어 온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오늘 밤, 아르케의 신기술 발표와 함께 주식은 상한가를 쳤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외쳤다.

    환호와 박수갈채 속에서도 준혁의 시선은 한 사람을 향했다. 바로 그의 가장 오랜 친구이자 아르케의 공동 창업자, 이도윤이었다. 도윤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기자들의 질문에 능숙하게 답하고 있었다. 언제나 준혁의 옆에서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했던 그였다. 둘은 서로의 눈빛에서 말없이 축하와 감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주고받았다.

    “준혁아, 잠시 나 좀 보자.”

    환희로 들끓던 파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도윤이 준혁을 따로 불러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준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의 뒤를 따랐다. 아마 다음 프로젝트에 대한 중요한 논의를 하려는 것이겠지. 둘은 파티장과 떨어진 빌딩의 가장 높은 층, 준혁의 개인 집무실로 향했다.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그 야경만큼이나 빛나던 준혁의 미래가, 불과 몇 분 뒤 산산조각 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네 얼굴이 좀 굳어 있는데.” 준혁이 웃으며 물었다.

    도윤은 준혁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문을 닫고 안쪽에서 잠금장치를 걸었다. 굳게 닫히는 문소리가 어쩐지 불길하게 울렸다. 그의 눈빛은 아까 파티장에서 보여주던 따뜻한 미소와는 전혀 달랐다. 낯설고, 차갑고, 날카로웠다.

    “오늘이 아르케의 마지막 발표가 되겠구나, 김준혁.”

    도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준혁의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듯했다. 마지막 발표?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야, 도윤아? 장난치지 마.” 준혁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장난? 그래, 네가 생각하기엔 장난일 수도 있겠지. 평생을 ‘천재 김준혁’의 그림자에서 허우적대던 내게, 이 모든 게 장난처럼 느껴질 리 없겠지만 말이야.” 도윤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 그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번졌다. “아르케는 이제 내 거야. 네가 평생을 바쳐 이룬 모든 것이, 이제부터는 나의 이름으로 빛나게 될 거라고.”

    준혁은 숨이 턱 막혔다. 믿기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아는 이도윤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그래, 멍청한 천재 녀석아. 네가 똑똑하다고 생각했나 보지? 하지만 세상은 결국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법. 그리고 그 힘은, 너처럼 순진하고 우직한 놈이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도윤은 태블릿을 들어 준혁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 안에는 충격적인 문서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회사 지분 매각 동의서, 특허권 양도 계약서, 그리고 준혁의 이름으로 된 해외 비자금 조성 혐의 보고서까지. 모든 문서에는 준혁의 서명이 위조되어 있었고, 그 밑에는 법적 효력을 갖춘 공증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준혁의 모든 재산은 이미 도윤의 수중에 넘어갔고, 그는 곧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구속될 예정이었다.

    “이게… 이게 다 뭐야! 말도 안 돼!” 준혁의 목소리가 격앙됐다. “네가 감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우린 친구잖아!”

    “친구? 하, 친구.” 도윤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친구지. 내가 네 그림자 속에서 살면서 얼마나 많은 걸 감수해야 했는지 알기나 해? 네가 칭찬받을 때마다, 네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마다, 나는 너를 보며 얼마나 이가 갈렸는지 알아? 네가 모든 걸 가졌을 때, 나는 네 옆에서 웃으며 박수치는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 했어. 이제 그 역할이 바뀔 때가 됐어.”

    도윤의 광기 어린 눈빛에서 진심이 읽혔다. 준혁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자신이 가장 믿었고, 모든 것을 나누었던 친구에게서 온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배신이었다.

    “넌… 넌 인간도 아니야!” 준혁은 이를 악물었다. “네가 이럴수록, 이 아르케는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질 거야! 그리고 네 더러운 진실도 언젠가 드러날 거라고!”

    “오호, 글쎄? 넌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될 텐데?” 도윤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올라갔다. “네가 사라지면, 아르케는 나의 독자적인 기술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회사가 되겠지. 그리고 너는… 역사 속에서 잊힐 거야. 아주 더럽고 추악한 범죄자로.”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무실 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고 건장한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준혁을 붙잡아 거대한 통유리창 쪽으로 끌고 갔다.

    “이게 무슨 짓이야! 놔! 놓으라고!” 준혁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창밖으로 내던져졌다.

    차가운 유리창에 몸이 부딪히는 순간, 준혁의 눈에 도윤의 얼굴이 다시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냉혹했다. 그 얼굴에서 지난 세월의 우정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광기와 승리감만 가득했다.

    “잘 가라, 나의 오랜 친구. 이제부터 이 모든 영광은 나의 것이 될 테니.”

    도윤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준혁의 몸은 공중으로 떠밀려 나갔다. 수십 층 높이의 빌딩에서, 그는 한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도시의 불빛들이 빠르게 멀어져 갔고,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할퀴었다.

    그 짧은 순간, 준혁의 뇌리에는 과거의 기억들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도윤과 함께 밤샘 연구를 하며 라면을 나눠 먹던 시절, 실패에 좌절했을 때 서로를 다독이던 순간들, 그리고 아르케의 첫 성공에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던 기억들. 그 모든 순수한 시간들이 거짓으로 얼룩졌다는 사실에, 그는 비통함과 분노로 몸부림쳤다.

    ‘이도윤… 이 개자식…!’

    몸은 중력에 이끌려 추락하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내가… 내가 반드시 살아 돌아올 거야. 그리고 네가 나에게 했던 것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더 처절하게 갚아줄 거야. 반드시…!’

    차가운 지면이 눈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충격이 몸을 덮치기 직전, 그의 시야는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백색 섬광으로 가득 찼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머릿속을 울리는 굉음만이 남았다. 마치 시간이 뒤틀리고 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알 수 없는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 메카 액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제1장: 강철 무림의 서막

    거대한 원형 경기장은 밤하늘 아래 별똥별처럼 박힌 수만 개의 광석 조명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천 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싼 협곡 한가운데, 수백 척 높이로 솟아오른 이곳은 오직 천하의 운명을 가를 자들만이 설 수 있는 성지였다. ‘천하제일 무장대회’. 그 이름만으로도 강호의 모든 무인들을 들끓게 하는, 그러나 동시에 무거운 숙명처럼 다가오는 이름이었다.

    경기장 중앙의 거대한 강철 평원 위에서 두 명의 강철 거인이 격렬하게 맞붙고 있었다. 하나는 짙은 남색으로 칠해진, 흡사 거대한 맹금류를 연상시키는 날렵한 형상의 무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묵직한 황동색으로 빛나는, 마치 대지를 딛고 선 산맥과도 같은 위압적인 무장이었다.

    “크아아아!”

    황동색 무장이 거대한 강철 주먹을 벼락처럼 내리꽂았다. 엄청난 기압이 발생하며 대기마저 갈라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일자 관통권!’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석에서 한 고수가 외쳤다. 그 주먹은 단순히 기계적인 힘이 아니었다. 조종사의 오랜 내공이 강철 몸체 구석구석을 타고 흘러, 순수한 기(氣)의 파동으로 증폭되어 터져 나오는 필살기였다. 주먹 끝에서는 푸른색 섬광이 번뜩였다.

    남색 무장은 놀라운 속도로 허리를 비틀어 그 일격을 피했다. 경공술을 응용하여 강철 거구를 움직이는 조작법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가벼운 움직임. ‘표연신법(飄然身法)!’ 또 다른 고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젠장, 늙은 맹호가 아직도 저런 힘을 숨기고 있었다니!”

    관중석 한쪽, 팔짱을 낀 채 무장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청년, 김도윤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전장 위 무장들의 격렬한 움직임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황동색 무장의 조종사는 ‘태산북두’라 불리는 북방의 장로, 철무석. 남색 무장의 조종사는 ‘천공의 칼날’이라 칭송받는 강서림. 두 사람 모두 무림에서 반세기 이상 이름을 떨친 대고수들이었다.

    철무석의 무장은 묵직한 발놀림으로 다시 한번 지면을 박차고 돌진했다. 거대한 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력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찌그러지는 듯했다. 그의 강철 주먹이 연속해서 허공을 갈랐다. ‘연환파산권(連環破山拳)!’ 매 타격마다 경기장의 강철 바닥이 깊게 패이며 진동이 관중석까지 전해졌다. 파괴적인 힘, 그것은 철무석의 무학 그 자체였다. 그의 무장은 마치 움직이는 요새 같았다.

    강서림의 무장은 그런 맹공 속에서도 놀라운 기민함으로 공격을 피하거나 흘려냈다. 때로는 강철 거체의 움직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유연함으로 맹렬한 주먹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기회를 포착하자마자 그의 무장은 번개처럼 팔을 뻗었다. 팔목에 장착된 강철 도신(刀身)이 섬광처럼 뿜어져 나오며 철무석의 무장 옆구리를 스쳤다. ‘비연참(飛燕斬)!’

    크아앙!

    강철과 강철이 부딪히는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스친 상처에서 푸른 스파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철무석의 무장이 휘청거렸다.

    “이게… 인간의 움직임이란 말인가.”

    도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장들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조종사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내공이 깃든 강철의 분신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과 속도, 방어력을 제공하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결국 혈육을 가진 무인이었다. 그래서 무장끼리의 싸움은 더욱 치열하고 처절했다.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 극한의 대결.

    “제법이군, 천공의 칼날! 하지만 이 맹호의 발톱은 아직 부러지지 않았다!”

    철무석의 음성이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의 무장은 옆구리의 손상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온몸에서 붉은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무장의 강철 외피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희미하게 붉은빛을 띠었다.

    “노망이 들었나? 이 정도로는 나를 쓰러뜨릴 수 없어!”

    강서림 또한 지지 않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응수했다. 그의 무장에서도 푸른색 기운이 솟아나오며 강철 몸체를 감쌌다. 두 무장의 기세가 폭풍처럼 충돌하며 경기장 중앙에 거대한 에너지 파동을 일으켰다.

    “이게 바로 ‘무신강림(武神降臨)’ 단계인가.”

    도윤은 숨을 멈췄다. 무장이 내공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증폭시켜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힘을 발휘하는 단계. 그것은 숙련된 고수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다. 그리고 이 대회는 그런 무신강림의 경지에 오른 자들이 겨루는 전장이었다.

    철무석의 무장이 붉은 기운을 두른 채 지면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거대한 강철 몸체가 공중에서 회전하며 강서림의 무장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흡사 붉은 혜성이 떨어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태산압정(泰山壓頂)!’

    강서림의 무장은 빠르게 자세를 낮추고 양손의 강철 도신을 교차시켜 방어 태세를 취했다. 푸른 기운이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천공진(天空陣)!’

    콰앙!

    두 무장의 필살기가 격돌했다.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강철과 강철이 비명을 지르며 짓눌리고 찢어지는 소리가 난무했다. 경기장 중앙의 강철 평원이 거대한 충격파에 의해 뒤틀리고 갈라졌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관중석마저 크게 흔들렸다. 사람들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섬광이 걷히자 드러난 것은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두 무장 모두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철무석의 무장은 한쪽 팔이 완전히 부서져 너덜거렸고, 강서림의 무장은 가슴팍에 거대한 함몰이 생겨 있었다. 그러나 승패는 아직 갈리지 않았다. 두 무장 모두 힘겹게 버티고 서 있었다.

    “하아… 하아…”

    철무석의 거친 숨소리가 무장 내부에서 들려왔다. 그는 강렬한 붉은 기운을 다시 한번 끌어모으며 부서진 팔로 남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듯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경기장 상공에서 거대한 전음(傳音)이 울려 퍼졌다.

    — 승패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두 대협은 잠시 휴식하도록 하라.

    그 음성은 마치 천지의 기운을 모두 담고 있는 듯 웅장하고 압도적이었다. 감히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권위가 느껴졌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경기장 위에는 검은색 강철 무장이 조용히 떠 있었다. 그 무장은 어떤 문양이나 장식도 없이 그저 칠흑 같은 어둠만을 두르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 그 자체가 무장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저것이… 천무맹주(天武盟主)의 무장인가.’

    천하무림맹의 맹주. 이번 대회를 주최하고,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마지막 한 수를 쥐고 있는 존재. 그의 무장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들 했다.

    철무석과 강서림의 무장은 그 전음에 따라 힘겹게 자세를 풀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분노와 아쉬움, 그리고 존경이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도윤아, 이제 시작이다.”

    도윤의 옆에 서 있던 한 노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백발의 노인은 깊은 주름이 새겨진 얼굴로 덤덤하게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밤, 첫 관문이 열렸다. 이제 너의 차례다.”

    도윤은 노인의 말에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경기장 중앙, 처참하게 파괴된 강철 평원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남겨진 무장들의 잔해를 보며, 자신의 무장을 떠올렸다. 작고 투박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강철의 동반자.

    천하제일 무장대회. 이 대결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운명의 장막이 막 열리고 있었다.

  • 스팀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미지의 고동

    천공 나선호의 함교는 황동과 증기, 그리고 톱니바퀴의 예술적인 조화 그 자체였다. 거대한 증기압 게이지들이 묵직하게 숨 쉬고, 복잡하게 얽힌 황동 파이프들 사이로 미세한 증기가 주기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조종간마다 새겨진 정교한 문양과 빛바랜 가죽 손잡이는 수많은 항해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했다. 저 멀리 아득한 심우주의 심연이 검푸른 장막처럼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흩뿌려진 별들은 마치 망가진 회중시계의 다이아몬드 조각 같았다.

    “함장님, 순항 고도 유지 중입니다. 이 구역의 에테르 흐름은 안정적입니다.”

    항해사 유나가 기계식 항해 지도를 응시하며 보고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별빛처럼 반짝였지만, 피로감이 역력했다. 천공 나선호는 수개월째 미개척 성간 항로를 탐사 중이었다. 새로운 자원, 새로운 문명, 어쩌면 인류의 다음 개척지를 찾아 떠난 길이었다.

    함장 강혁은 투박한 황동 망원경으로 창밖의 심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굵직한 손가락이 낡은 주머니시계의 뚜껑을 만지작거렸다. “좋아, 유나. 특별한 이상은 없나?”

    바로 그때, 유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계기판의 바늘 하나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오류로 치부할 만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바늘은 점차 격렬하게 요동치더니, ‘미확인 에너지 반응’을 나타내는 붉은 경고등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함장님! 미지의 에너지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좌표는… 이례적입니다. 이 구역에선 관측된 적 없는 패턴입니다.” 유나의 목소리에 일말의 긴장감이 서렸다.

    강혁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함교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이례적이라… 흥미롭다는 뜻이지. 탐사 전문가 서하와 기관장 철수를 함교로 호출하게. 접근 속도를 최대로 올려.”

    천공 나선호는 묵직한 기합 소리를 내며 방향을 틀었다. 에테르 엔진이 뿜어내는 푸른 섬광이 주변의 우주 먼지를 밝게 물들였다. 수만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낮은 진동이 선체를 타고 올라왔다. 멀리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그 존재의 기운은… 뭐라 형용할 수 없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저 텅 빈 공허와 팽팽한 긴장감이 뒤섞인 듯한 기분.

    얼마 지나지 않아, 늘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인 기관장 철수와, 지식에 대한 갈증으로 눈을 빛내는 탐사 전문가 서하가 함교로 뛰어들어왔다.

    “함장님, 무슨 일입니까? 엔진실의 압력계가 미친 듯이 날뛰는군요!” 철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서하는 이미 유나의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이 반응…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문명권의 에너지 패턴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자연 현상이라고 보기에도 너무나… 인위적입니다.”

    “인위적이라.” 강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전방의 주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흐릿했던 점이 점차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준비하게. 이제 곧 그 모습을 드러낼 테니.”

    망원렌즈 너머로 그 모습을 처음 확인했을 때, 함교의 모든 이들은 숨을 멈췄다.

    그것은… 거대한 금속 덩어리였다. 아니, 덩어리라는 표현은 부적절했다. 완벽한 구형이었다. 육안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크기. 표면에는 어떤 이음새도, 문양도 없었다. 마치 태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인 듯한 미니멀리즘의 정점이었다. 별빛마저 빨아들이는 듯한 짙은 검은색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말도 안 돼…” 서하가 흥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교할 만한 데이터가 없습니다. 어떤 물질인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전혀 분석되지 않습니다. 저희 탐사선으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술력입니다!”

    철수는 자신의 연장통을 툭툭 치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에너지 반응이 일정치 않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고동치는 것 같다고. 저거 괜히 건드렸다간 천공 나선호 통째로 날아갈지도 모른다고요!”

    “걱정 말게, 철수. 함선은 내가 지키네.” 강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단호함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었다. “유나, 접근 속도를 더 낮춰. 서하, 계속해서 정보를 분석해. 철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보조 동력계를 가동 대기시켜 놓게.”

    천공 나선호는 거대한 검은 구체 앞에서 멈춰 섰다. 구체는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다. 그저 그곳에, 영원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우주 자체의 응축된 침묵 같았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그때였다.

    완벽하게 매끄러웠던 구의 표면에, 마치 물결이 일렁이듯 미세한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미줄처럼 가늘었던 균열은 점차 깊어지고 넓어지며,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기 시작했다. 균열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 나왔고, 그 빛은 점차 강렬해지며 함교를 가득 채웠다. 강혁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함장님! 에너지 반응이 폭주하고 있습니다!” 유나의 다급한 외침이 함교를 울렸다.

    “이것은… 이 패턴은!” 서하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강혁은 굳건한 눈빛으로 빛나는 구체를 노려봤다. 수억 년의 시간을 품은 듯한, 알 수 없는 존재가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각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체는 천천히,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완벽한 구형이 마치 거대한 연꽃잎처럼 부드럽게 펼쳐졌다. 안에서는… 온갖 종류의 톱니바퀴와 황동 부품, 그리고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시계 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아는 어떤 시계와도 달랐다. 모든 부품이 제각기 움직이며, 마치 우주의 운행을 조작하는 신의 손길처럼 복잡하고도 섬세한 리듬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한 줄기 빛이,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이 번뜩였다. 섬광이 함교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