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잊혀진 심연의 부름**
이름: 이진우. 직업: 고고학자, 비주류 언어학자. 주류 학계에서 나를 부르는 별명은 ‘미친 이 박사’였다.
내 평생을 바쳐 쫓아온 것은 언제나 ‘있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치부되는 문명, 누구도 읽을 수 없다는 고대 언어,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유물들. 동료들은 내가 시간 낭비, 아니 인생 낭비를 하고 있다고 손가락질했지만, 내겐 그 모든 비웃음이 역설적으로 내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나도 그들처럼 평범한 유물이나 쫓으며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연은 한번 엿본 자를 절대 놓아주지 않는 법이다.
어느 비 오는 여름날 오후였다. 낡은 연구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먹구름 냄새가 퀴퀴한 종이 냄새와 섞여 공기 중에 맴돌았다. 책상 위에는 읽어야 할 고문헌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고, 낡은 커피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낡은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였지만, 유독 오늘따라 심장을 울리는 것 같았다.
문을 열자, 우체부 아저씨가 젖은 택배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발신인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잉크가 번져 지워져 있었다. 하지만 상자의 한쪽 구석, 알아보기 힘들게 삐뚤빼뚤 적힌 한 글자를 본 순간 내 심장이 철렁했다.
‘김(金).’
김 교수님. 내 학부 시절 스승이자, 기이한 전설과 잊힌 신화에 평생을 바쳤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3년 전, 모든 연락을 끊고 홀연히 사라졌다. 주변 사람들은 노망이 들어 요양원에 갔거나, 아니면 실종된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그 ‘무언가’가 마침내 그를 데려갔을 것이라고.
황급히 상자를 뜯었다. 안에는 낡은 가죽 상자가 하나 들어 있었다. 상자를 열자, 익숙한 김 교수님의 필체로 쓰인 빛바랜 편지 한 장과, 낡은 양피지 지도가 보였다. 편지는 짧고 강렬했다.
*진우에게.*
*마침내 찾아냈네. 우리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 문명. 그들은 지하에 잠들어 있었어. 세상의 시작보다도 오래된 것들이. 진우, 자네만이 이 진실을 이해할 수 있을 걸세. 어둠이 모든 것을 삼키기 전에, 와서 보게.*
*마지막 단서는 지도를 따라가면 돼. 그곳의 문은 자네가 풀 수 있을 걸세. 부디, 너무 늦지 않기를.*
*김.*
편지 마지막 글자는 잉크가 번져 흐릿했다. 마치 김 교수님이 절박한 심정으로 급하게 쓴 것처럼.
양피지 지도는 기묘했다. 지도는 한반도의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듯했지만, 일반적인 지도가 아니었다. 산맥의 능선, 강물의 흐름이 불길한 상징들로 왜곡되어 있었고, 지도 중심에는 눈으로 보기에도 기분 나쁜, 거대한 나선형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 문양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뒤틀려 있었다.
“이진우 박사님! 또 뭘 혼자 보고 계세요? 이 시간에 커피는 이제 그만 마시셔야죠.”
연구실 문이 벌컥 열리며 조민서가 들어섰다. 내 유일한 조수이자, 유일하게 내 기행을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내 광적인 집념을 경계했지만, 동시에 깊은 신뢰를 보여주었다.
“민서야, 이걸 좀 봐.”
내 손에 들린 편지와 지도를 본 민서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김 교수님…? 그분이 보내신 건가요?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사라진 거야, 민서. 사라졌던 거지, 죽은 게 아냐. 아니,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무언가일지도 모르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흥분으로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 지도. 김 교수님이 찾아낸 곳이야. 잊혀진 지하 문명. 우리는 그곳으로 가야 해.”
민서는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박사님, 이건… 너무 위험해요. 지리적으로도 그렇고, 이건 아무리 봐도 고대 문명의 유적 지도라기보다… 뭔가 저주받은 부적 같아요. 게다가 김 교수님은 실종되셨어요. 이 편지도, 누가 보냈는지 확실하지 않잖아요.”
“이 필체는 김 교수님 거야. 틀림없어. 그리고… 위험? 그래, 위험하겠지. 하지만 민서, 우리는 항상 위험한 길을 걸어왔잖아. 이걸 찾지 못하면, 난 평생 후회할 거야.”
그날 밤, 우리는 필요한 장비를 챙겼다. 민서는 비상용 식량, 위성 전화, 의료 키트를 꼼꼼히 챙겼고, 나는 김 교수님의 다른 논문과 고대 상형문자 해독집을 가방에 넣었다. 다음 날 새벽, 우리는 낡은 SUV를 몰고 지도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강원도의 깊은 산골이었다. 지도상의 지점은 인적 없는 계곡의 끝자락, 거대한 암벽으로 막힌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험준한 산세에, 숲은 너무나 빽빽해서 한낮에도 어둑했다. 오래된 나무들이 기괴하게 뒤틀린 채 하늘로 솟아 있었고, 그 밑으로는 눅눅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버섯들이 피어 있었다.
“박사님, 여기 정말 맞아요?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닌데요. 이런 곳에 문명이 잠들어 있을 리가…”
민서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지도에 나와 있는 지형지물과 실제 풍경을 비교했다.
“맞아. 이 거대한 바위와… 저기, 기이하게 꺾인 나무… 정확해.”
지도의 중심에 그려진 나선형 문양은 이곳 암벽 어딘가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암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한참을 헤매던 중, 거대한 바위틈 사이로 희미한 어둠이 보였다. 마치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 같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위화감이 들었다. 동굴 입구는 매끄럽게 다듬어진 것처럼 보였고, 그 안쪽에는 희미하게 뭔가 새겨진 흔적이 있었다.
“이게… 김 교수님이 말한 문인가?”
나는 손전등을 켰다. 빛이 닿는 곳마다, 동굴 벽면에는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직선과 곡선이 불가능한 각도로 교차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피로해지는 형태들이었다.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완전히 이질적인 문양들이었다. 그것은 어떤 문명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광기의 산물처럼 보였다.
“박사님, 저것 좀 보세요.” 민서가 손가락으로 동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유난히 크고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나선형과 각진 선이 얽히고설킨, 마치 살아있는 존재가 꿈틀거리는 듯한 문양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웅얼거리는 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의 속삭임. 동시에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이게… 입구를 여는 열쇠라고 했지. 김 교수님이.”
나는 그 문양을 천천히 손으로 쓸어보았다. 거칠고 차가운 돌의 감촉. 문양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일수록, 희미한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문양의 특정 지점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문양이 아니었다. 특정한 패턴을 가진, 일종의 고대 잠금장치였다.
내 눈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나는 전생에 이 문양을 본 적이 있는 것처럼, 아니, 직접 새긴 것처럼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지도의 나선형 문양과 동굴 벽의 문양이 겹쳐지며, 내 머릿속에서 섬광처럼 해답이 떠올랐다.
클릭.
어디선가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대한 바위가 움직이는 듯한 둔중한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동굴 안쪽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돌과 돌이 마찰하며 내는 끔찍한 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울렸다.
문 너머에는 심연이 있었다.
손전등 불빛으로는 도저히 끝을 알 수 없는, 압도적인 어둠.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나는 희미하게 무언가를 보았다. 불가능한 각도로 뻗어 올라간 거대한 기둥들. 인간의 손으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비현실적인 규모의 건축물들. 그것들은 마치 태초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세상에…”
민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공포와 경외심이 뒤섞인 감탄사였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곰팡이 냄새, 젖은 흙냄새, 그리고… 알 수 없는 비린내가 섞인, 차갑고 오래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 냄새는 단순히 오래된 것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었다. 썩어가는 시체 냄새 같기도 했고,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끔찍한 해초의 냄새 같기도 했다.
이곳이 바로 김 교수님이 말한 곳이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 땅 아래 잠들어 있던 미지의 문명.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두려움.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흥분.
이것이 내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진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직감했다.
우리가 발을 들여놓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만 년의 침묵을 깨고, 드디어 깨어날 준비를 마친 그것이.
“가자, 민서.”
내 목소리는 예상보다 더 확신에 차 있었다.
민서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끔찍한 어둠 속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그 순간, 뒤에서 돌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콰앙-!
우리는 완벽하게 갇혔다.
차가운 어둠이 우리를 삼켰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속삭이는 듯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기이하고 오래된 언어로.
그것은 환청일까, 아니면… 우리를 환영하는 소리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