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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상현실 게임 (VRMMO)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제1장: 심연의 속삭임

    어둠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우주선 *오디세이 호*의 함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칠흑 같은 허공과 그 속에 듬성듬성 박힌 먼 별들의 점멸이 전부였다. 인류가 개척한 가장 먼 변방,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심우주. 이곳에서의 시간은 지독하리만큼 느리게 흘렀다.

    “선장님, 오늘도 특이사항 없음입니다. 정기 센서 스캔 결과, 소행성 한 조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지루함이 제 세포를 좀먹는 기분입니다.”

    조타수 박선우가 길게 하품하며 투덜거렸다. 그의 눈앞에는 수많은 홀로그램 패널이 떠 있었고, 그 중 하나는 피로도를 나타내는 붉은색 바를 깜빡이고 있었다. 가상현실 게임 ‘코스믹 오디세이’ 속에서 우주선 선장 역할은 현실의 그 어떤 직업보다도 고된 임무였다. 물론, 이 게임에서 ‘피로도’는 단순히 불편함 그 이상은 아니었지만.

    함장 이진우는 턱을 괸 채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봐, 선우. 우리가 여기 왜 왔는지 잊었나? 미개척 지역 탐사. 인류가 발 디딘 적 없는 곳을 찾아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게 우리의 임무잖아.” 그의 눈동자는 창밖의 어둠을 꿰뚫는 듯 빛났다. 게임 속 그의 캐릭터는 굳건하고 노련한 베테랑 함장이었지만, 현실의 이진우는 그저 방구석에서 컨트롤러를 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그 역시 진정한 탐험가였다.

    그때, 함교 한켠에 자리한 과학 담당관 김세라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어, 잠시만요, 선장님!”

    모든 시선이 세라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홀로그램 패널 위로 평소와 다른 그래프들이 춤추기 시작했다. 선우의 졸음 가득했던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뭐지? 뭔가 감지됐어?” 진우의 목소리에 일말의 기대감이 서렸다.

    “네! 아주 미약하지만, 특정 주파수의 에너지 신호가 잡혔어요. 이전에 기록된 적 없는 패턴입니다.” 세라가 손가락으로 공중의 패널을 확대하며 말했다. “약간의 중력 이상과 함께 오는군요. 행성이나 소행성단은 아닌 것 같아요.”

    “새로운 발견인가?” 기관장 최준혁이 그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터프한 외모와는 달리, 게임 속 그의 직업은 섬세한 기계 조작이 필요한 기관장이었다. “설마 또 우주 해적들의 함정 같은 건 아니겠지? 그놈들, 갈수록 교활해지더군.”

    “아니요, 해적 함선과는 완전히 다른 신호예요. 인공적인 것 같으면서도, 자연 현상과는 거리가 멀어요.” 세라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선장님, 저 신호가 오는 방향으로 항로를 설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분석이 필요해요.”

    진우는 잠시 망설였다. 미지의 신호. 심우주에서 마주하는 모든 미지는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 탐험가 정신이 속삭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다.’

    “선우, 신호 원점 방향으로 항로를 수정해. 속도는… 워프 없이 최대로.” 진우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선장님!” 선우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지루했던 임무에 드디어 활기가 찾아온 것이다. 함교 전체의 조명이 희미하게 붉은색으로 변하며 경고음이 울렸다. ‘항로 변경 감지. 미확인 구역 진입.’

    오디세이 호는 거대한 몸체를 틀어, 미지의 신호가 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몇 시간 뒤, 함선 내 모든 스크린에 경이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선장님! 전방에… 뭔가 있습니다!” 세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검은 우주 공간 속, 홀로 떠 있는 거대한 구조물. 그것은 어떤 행성도, 위성도 아니었다.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인간의 기술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을 듯한 유려하면서도 기묘한 곡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빛을 반사하지도, 자체 발광하지도 않는 듯 보였지만, 묘하게도 주변의 어둠을 흡수하는 듯한 시각적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공간 자체가 일그러진 것 같았다.

    “젠장… 저게 뭐야?” 준혁이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내가 아는 어떤 금속으로도 저렇게 만들 수는 없어. 크기도 장난 아니군.”

    스크린에 잡힌 구조물의 크기는 거의 소행성급이었다. 하지만 그 매끄러운 표면에는 인공적인 문양이나 접합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완벽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측정 불가! 모든 스캔 주파수가 튕겨 나옵니다! 표면 재질 파악 불가능! 에너지 신호도… 사라졌어요!” 세라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치 우리가 가까이 오자마자 스스로를 숨긴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고 있지 않나?” 진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게임 시스템이 버그를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이 미지의 존재가 게임 속에서 구현된 새로운 메커니즘인가?

    “저… 선장님.” 선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진우를 불렀다. 그의 눈이 고정된 곳은 조타 패널의 시야 화면이 아닌, 함교의 메인 스크린이었다.

    “왜 그러나, 선우?”

    “저… 저것이 움직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메인 스크린으로 향했다. 거대한 검은 유물이, 아주 느리지만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거인처럼. 그리고 그 움직임과 함께, 유물의 표면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은하수의 먼지를 압축해 놓은 듯, 다채롭고 오묘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빛이 강해질수록, 함선 내부에 이상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스템 오류 감지’, ‘전력 이상’, ‘함체 불안정’ 등의 경고음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야, 준혁!” 진우가 소리쳤다.

    “모르겠습니다! 외부 에너지가 함선 시스템에 직접 간섭하고 있어요! 보호막이 버티질 못합니다!” 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홀로그램 패널은 온통 붉은색 경고로 뒤덮여 있었다.

    유물의 빛은 이제 함교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강렬해졌다. 그 빛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러나 존재 자체를 압도하는 신비로운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선장님! 저 유물이… 유물이 저희를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세라가 외쳤다. 그녀의 홀로그램 패널에는 유물과 오디세이 호 사이에 생성된 거대한 중력 띠가 표시되고 있었다.

    “젠장, 도망쳐! 전속력으로 후퇴! 워프 코어 가동!” 진우가 사자후를 토해냈다.

    “안 됩니다, 선장님! 워프 코어가 외부 에너지 간섭으로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어요!” 준혁이 절규했다. “엔진도 출력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오디세이 호는 거대한 유물의 손아귀에 붙잡힌 듯, 서서히 그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함선 내부는 극심한 흔들림과 함께 온갖 경고음으로 가득 찼다. 함교의 조명은 깜빡거리며 이따금 암전되었다.

    그리고, 유물의 표면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흡사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생명체처럼, 그 균열 사이에서 더욱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었다. 마치 수만 개의 별빛이 한 점으로 모여든 듯한, 우주의 근원을 담고 있는 듯한 장엄한 광경이었다.

    “선장님! 외부 센서가 이상 반응을 보입니다! 공간의 밀도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어요!” 세라의 목소리가 거의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균열은 순식간에 확장되었고, 이내 거대한 문처럼 활짝 열렸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이제 오디세이 호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기묘한 형태의 무언가가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렸다.

    “선장님! 이건… 이건 게임 데이터가 아니에요!” 세라가 절규했다. 그녀의 눈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게임 시스템이 결코 구현할 수 없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이질적인 이미지였다.

    오디세이 호는 빛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승무원들의 비명과 함께 함선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새하얀 섬광에 휩싸였다.

    이진우는 눈을 감는 대신, 그 압도적인 빛 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다.
    균열 너머에서 꿈틀거리던 것은, 거대한 검은 눈동자였다.
    그것은 마치 심연 그 자체를 담고 있는 듯,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한 공허한 시선으로 *오디세이 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상현실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진정한 공포를 느꼈다.
    이것은 더 이상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던전 탐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강철 밀실의 그림자

    피 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쾨쾨한 흙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던전의 고유한 악취마저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선명하고 비릿한 금속성 향기였다. 탐사팀 ‘새벽별’의 임시 휴게소로 사용되던 철문 안쪽, 그 밀폐된 공간에서 한 남자가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이진우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쓰러진 팀장 한재혁의 시신에서 시작해, 방을 꼼꼼히 훑었다. 방은 대략 오 미터 사방의 정사각형 구조였다. 돌벽은 닳아 있었고, 천장에 박힌 마나 램프가 희미한 푸른빛을 뿌리고 있었다. 출입문은 육중한 강철문 하나뿐이었다. 문 안쪽에는 굵은 빗장이 단단히 걸려 있었다. 그리고 문 반대편 벽에는 비상용 탈출 장치로 연결되는 작은 패널이 있었지만, 그 패널은 현재 먹통이었다.

    “젠장!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덩치 큰 탱커, 김민준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꽝 하는 소리가 강철 문을 때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휴게실 전체를 울렸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날렵한 레인저 박서연은 한재혁 팀장의 시신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날카롭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지만, 안색은 창백했다. “밖에서 침입한 흔적은 전혀 없어. 문은 우리가 들어온 후에 팀장님이 직접 잠그셨어. 외부에서 열 수 없는 구조잖아.”

    힐러인 최지혜는 문가에 기대어 서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마나 지팡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밀실… 살인… 그럼 범인은 우리 중에 있다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곧 울음이 터질 듯 위태로웠다.

    세 사람의 시선이 공포와 의심을 담아 서로를 향했다. 이진우는 그 시선들 한가운데 서서 아무 말 없이 바닥의 시신을 다시 응시했다. 한재혁 팀장은 심장을 정확히 꿰뚫린 채 쓰러져 있었다. 상처는 깨끗했고, 주변에 혈흔이 흥건했다. 사용된 무기는 얇고 날카로운 단도 종류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그 단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시신 주변에 무기는 없군.” 이진우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팽팽한 긴장감 속에 가라앉았다.

    김민준이 다시 이를 갈았다. “무기?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우리가 이 안에 갇혔고, 범인은 우리 중 하나라는 거잖아! 이 지옥 같은 던전에서 탈출도 못 하고 죽게 될 거라고!”

    박서연이 김민준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닥쳐, 민준 씨! 흥분한다고 해결될 일은 없어. 진우 씨, 뭔가 발견한 게 있어?”

    이진우는 한재혁 팀장의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시계는 깨져 있었고, 시간은 새벽 3시 2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팀장님은 평소 습관대로 시계를 왼손에 차고 계셨어요.” 이진우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른손에 차고 계시네요.”

    최지혜가 흐느끼며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뜻이죠?”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진우는 대답 대신 시신 옆에 떨어져 있는, 반쯤 불탄 탐사 일지를 집어 들었다. 표지는 던전의 습기 때문에 축축했고, 안쪽 몇 장은 찢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쓰인 페이지를 펼치자,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끔찍한 하루였다. ‘그것’의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다. 탈출구는 대체…」

    여기까지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진우는 일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봐, 진우.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야. 누가 팀장님을 죽였냐고!” 김민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살해 시각은 새벽 3시 27분 전후로 추정됩니다.” 이진우가 무심하게 말했다. “누구라도 그때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다면 알 수 있겠죠.”

    최지혜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저는… 전 밤새 잠 못 자고 뒤척였어요. 하지만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요! 젠장, 무서워요!”

    박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불침번 교대 시간까지는 잠들어 있었고, 교대 후에는 주변 경계를 확인하느라 바빴어.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 어쩌면… 소리가 나지 않는 방식으로 살해된 걸 수도.”

    이진우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니요. 현장의 혈흔을 보면, 짧고 격렬한 몸싸움의 흔적이 미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한재혁 팀장의 손가락 끝을 가리켰다. 손톱 밑에는 미세한 피부 조직 조각이 박혀 있었다.

    “범인의 피부 조직?” 박서연의 눈이 커졌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진우는 긍정했다.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만… 이 밀실 안에서 범인을 특정할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겁니다.”

    그의 말에 세 사람의 얼굴에 한 줄기 희망과 동시에 더 깊은 절망이 스쳐 지나갔다.
    밀실, 그리고 범인의 피부 조직. 이제 그들 중 한 명이 살인자임이 명백해졌다.

    “하지만 밀실… 어떻게 된 거죠?” 박서연이 물었다. “이 강철 문은 던전의 몬스터조차 뚫기 힘든 문인데.”

    이진우는 강철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손가락이 문틈을 천천히 훑었다. 잠금쇠가 걸린 부분, 문틀과 벽이 만나는 부분, 그리고 문고리까지.
    “이 문은 밖에서 침입하는 것을 막는 데는 완벽하죠.” 그가 말했다. “하지만 안에서 나가는 것은 어떨까요?”

    김민준이 코웃음을 쳤다. “안에서 나가는 건 더 쉽지! 빗장만 풀면 되니까. 팀장님이 안에서 잠갔으니 범인이 나간 거라면… 다시 잠글 수는 없잖아!”

    “맞습니다.” 이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방은 밀실입니다. 밖에서 잠그고 안에 들어와 살인을 저지른 후, 다시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죠.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의 눈이 문득, 철문 위쪽의 닳아버린 틈새에 고정되었다. 돌벽과 강철문 사이에 미세하게 벌어진, 마치 세월의 흔적처럼 보였던 작은 틈. 아무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그저 낡은 던전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그 부분에 그의 시선이 꽂혔다.

    “이 틈은… 외부와 연결되어 있습니까?” 이진우가 박서연에게 물었다.

    박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연결…이라뇨? 그저 오래된 던전 문의 틈새일 뿐이에요. 바람도 잘 통하지 않을 정도로 작아요.”

    이진우는 대답 대신, 자신의 배낭에서 작은 렌턴을 꺼내 틈새에 비췄다. 렌턴의 빛이 좁은 틈을 따라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틈새의 안쪽, 미세한 금속성 빛이 반사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얇은 실크였지만, 단순한 실크가 아니었다. 몬스터의 강력한 독액에도 견디는 특수한 강화 실크였다.

    “이게… 뭐죠?” 최지혜가 겁에 질린 눈으로 물었다.

    이진우는 그 실크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실크가 문틈을 따라 딸려 나왔다. 실크의 끝에는 작고 날카로운 갈고리 모양의 금속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이건… 비상 잠금장치를 조작할 때 쓰는 도구입니다.” 이진우가 말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특정 던전 문의 잠금장치를 원격으로 해제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죠.”

    세 사람의 눈동자가 혼란과 경악으로 흔들렸다.

    “원격 해제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김민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진우는 조용히 갈고리를 바라보았다. “팀장님은 이 방을 ‘안에서’ 잠그셨습니다. 빗장으로. 하지만, 이 문은… 밖에서도 잠글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이 도구를 이용하면 밖에서 잠근 문을, 다시 밖에서 해제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모두 이 문이 한 번 잠기면 밖에서 열 수 없는, 완벽한 ‘밀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던전 탐사자들에게 상식처럼 통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럼 누가 이런 도구를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박서연이 숨죽여 물었다.

    이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선은 바닥에 흩뿌려진 한재혁 팀장의 피 흔적과, 그 옆에 떨어진 탐사 일지를 향했다. 그리고 그 일지에서 찢어진 페이지의 흔적에, 그의 눈이 다시 한 번 깊이를 더했다.

    “이 도구는 외부 침입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이 도구는 이 팀 안에 있었던 사람의 것입니다.” 이진우가 말했다.

    그리고 이진우의 시선이 천천히, 김민준, 박서연, 최지혜를 차례로 훑었다.
    “범인은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간 뒤, 이 도구를 이용해 문을 다시 잠갔습니다. 마치 밀실인 것처럼 보이도록. 그리고… 이 도구는 단단히 고정된 빗장을 원격으로 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쓰였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에, 공간을 지배하던 무거운 침묵이 더욱 깊어졌다. 이진우는 돌연 몸을 숙여, 깨진 한재혁 팀장의 시계 조각을 집어 들었다. 시계의 유리 조각들 사이, 아주 미세한 긁힘이 보였다. 마치 무언가에 긁힌 듯한.

    “만약 이 방이 처음부터 밀실이 아니었다면, 범인은 왜 이런 복잡한 트릭을 썼을까요?” 이진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범인은… 완벽한 밀실 살인을 위장함으로써, 우리 모두를 한재혁 팀장을 살해할 수 있는 용의자로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그게 무슨…!” 김민준이 반박하려 했지만, 이진우의 다음 말에 목소리를 잃었다.

    “그리고 찢어진 탐사 일지. 여기에 ‘그것’이라고 적힌 부분이 가장 의심스럽습니다. 한재혁 팀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아마 이 안에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도구를 이용해… 살인에 대한 힌트를 남긴 것이 아닐까요?”

    이진우는 손에 쥔 실크 갈고리를 응시했다. 이 작은 도구는 단순한 잠금 해제 도구가 아니었다.
    “아니, 이 도구 자체가 살해에 사용된 트릭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 사람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진우는 시계에 남은 미세한 긁힘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었다. 그리고 그 긁힘이 실크 갈고리의 끝부분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팀장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했고, 범인의 트릭을 파괴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눈빛이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번뜩였다.
    “범인이 이 방을 밀실로 위장한 진정한 이유는… 이 방이 완벽한 밀실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아는 사람, 바로 살해당한 한재혁 팀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러운 진우의 말에, 세 사람의 얼굴은 일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밀실의 트릭이 오히려 피해자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니.

    이진우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문득 최지혜의 뒤편, 즉 문과 가장 가까운 벽 모서리를 응시했다. 그곳에는 몬스터의 습격을 막기 위해 급하게 쌓아둔 작은 돌무더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돌무더기 틈새에, 희미하게 빛나는 은색 물체가 보였다.

    “아, 저게…!” 박서연이 놀란 표정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그것은 얇고 날카로운 단도였다. 팀장 한재혁을 살해한 흉기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단도에는 핏자국과 함께… 무엇인가에 긁힌 듯한 작은 흠집이 선명했다.

    이진우는 그 단도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밀실의 트릭은, 이 도구를 사용해 외부에서 문을 다시 잠그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트릭은… 이 던전의 특수한 환경을 이용해, 단도를 ‘증발’시킨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죠.”

    그의 말은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던전의 특수한 환경을 이용한 ‘증발’ 트릭?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진우!” 김민준이 울부짖었다.

    이진우는 단도를 집어 들었다. 단도의 손잡이에는 희미하게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보석은, 팀장 한재혁의 마지막 일지에 언급된 ‘그것’이 어떤 종류의 던전 몬스터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범인은 이 칼에, 특정 몬스터의 ‘시간 역행 마나’를 주입했습니다.”

    숨 막히는 침묵이 공간을 채웠다.

    “이 던전의 ‘시간 왜곡’ 현상을 이용한 겁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칼은 물리적으로 현재의 시간 선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마치 증발한 것처럼. 그리고 일정 시간 후, 다시 나타나는… 시체 유기 및 증거 인멸의 완벽한 트릭이죠. 하지만 완벽하진 않았습니다.”

    이진우는 단도를 든 채 서서히 돌아서, 세 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마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하지만, 팀장님은… 단도에 주입된 마나의 흐름을 마지막 순간에 훼방 놓았습니다. 자신의 시계를 부숴, 단도에 미세한 흠집을 냈고, 그로 인해 마나의 흐름이 불완전해져… 이 칼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이 방에 남게 된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은 철벽 같았다.

    “즉, 팀장님은 범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범인이 이 던전의 ‘시간 왜곡’ 현상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까지요. 그리고 그 정보를… 우리에게 남기려고 한 겁니다.”

    이진우의 시선이 최종적으로 박서연에게 닿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이 던전의 ‘시간 왜곡’ 현상을 이용하는 마법, 그리고 이런 종류의 단도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팀장 한재혁의 시계를 부숴서 흔적을 남길 만큼의 격렬한 몸싸움을 벌인 사람… 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박서연 씨.”

    정적. 깨질 듯한 침묵 속에서, 박서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그녀의 입술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손이 허리춤의 단도 손잡이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아니… 아니야… 나는…” 그녀의 목소리는 희미한 속삭임이었다.

    “아직 남아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팀장님의 시신 옆에 떨어진 탐사 일지. 찢어진 페이지는 무엇을 숨기려 했던 걸까요?” 이진우는 허리를 굽혀 찢어진 일지를 펼쳤다. 그리고 찢어진 자국을 따라 일지의 마지막 페이지와 이어진 다른 낱장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팀원들의 개인 장비 점검 기록이었다.

    「박서연 – 특수 강화 단도 (시간 역행 마나 코어 삽입).」

    이진우는 그 기록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박서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은 팀장님의 동생을 살해한, 던전의 한 길드와 결탁해 팀원들을 팔아넘기려 했던 그 배신자와 내통하고 있었죠? 팀장님은 그걸 알고 당신을 추궁했고, 당신은 자신의 정체가 밝혀질까 두려워 팀장님을 살해한 겁니다.”

    박서연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마치 가면을 쓴 듯 무감각해졌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표정은 차가운 분노로 변했다. 그녀의 손이 빠르게 허리춤의 다른 단도를 뽑아들었다.

    “시끄러워!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지껄여!”

    은빛 단도가 섬광처럼 이진우의 목을 겨냥했다.
    그러나 이진우는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그 어떤 혼란도 없이 박서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단도가 그의 목에 닿기 직전, 그는 나직이 읊조렸다.

    “하지만 밀실 트릭이 파괴된 순간, 당신의 모든 알리바이는 사라졌습니다. 이제 당신은… 이 던전 속에서 도망칠 곳 없는 살인자일 뿐입니다.”

    박서연의 단도 끝이 이진우의 피부에 닿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소름 돋게 느껴졌다.
    그 순간, 육중한 강철 문이 굉음을 내며 활짝 열렸다.

  • 심리 스릴러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대본: 그림자 도감 – 1화: 낡은 책방의 속삭임

    **[프롤로그]**

    **[1.1] 낡은 고시원 방**

    **#장면:**
    비좁고 허름한 고시원 방. 벽지는 누렇게 바래 있고, 작은 창밖으로는 회색빛 도시의 빌딩 숲이 답답하게 펼쳐져 있다. 책상 위에는 스케치북, 닳아빠진 연필과 지우개, 그리고 편의점 컵라면 용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오후의 볕이 겨우 한 줌 들어와 방 한구석을 비춘다.

    **#캐릭터:**
    **미나 (20대 중반, 여성):** 축 늘어진 스웨터와 오래된 청바지 차림. 얼굴은 창백하고, 눈빛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어딘가 지쳐 보이지만,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진 예술가 지망생의 기색이 엿보인다.

    **#액션:**
    미나는 텅 빈 시선으로 스케치북을 응시한다. 페이지에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가로수와 그 뒤로 빼곡히 솟은 빌딩들의 스케치가 정교하게 그려져 있지만, 어딘가 생명력 없이 차갑다. 미나의 손은 연필을 쥐고 있지만,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 있다. 그녀의 가슴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연필이 ‘또각’ 소리를 내며 책상 위로 떨어진다.

    **#내레이션 (미나의 생각, 잔잔하고 공허한 목소리):**
    또… 이런 식이다. 아무리 애써도, 내가 원하는 그림은 나오지 않아.
    이 회색빛 도시처럼, 내 안도 온통 잿빛으로 물든 것 같아.
    특별할 것 없는 하루의 반복. 나는 그냥, 이 세상에 존재하기만 하는 걸까?
    이 고시원 방처럼, 나도 곧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존재가 될까.

    **[1.2] 도시의 뒷골목**

    **#장면:**
    미나가 고시원 방을 나와 낡은 골목길을 걷는다. 대로변의 번잡함과는 달리, 이곳은 시간마저 멈춘 듯 고요하다. 낡은 상점들이 삐뚤빼뚤 늘어서 있고, 간판들은 빛이 바랬다. 축축한 시멘트 바닥에는 낙엽과 쓰레기가 뒤섞여 있다.

    **#액션:**
    미나는 이어폰을 꽂고 터벅터벅 걷는다. 주변의 활기찬 소음과 분리된 듯, 마치 자신만의 투명한 막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발걸음은 왠지 모를 불안감과 함께 어딘가를 찾아 헤매는 듯하다.

    **#내레이션 (미나의 생각):**
    가끔은, 사라져 버리고 싶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는 곳으로.
    아니, 사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저… 특별한 무언가를 갈망하는, 흔하디흔한 존재일 뿐.

    **[1.3] 고요한 책방의 입구**

    **#장면:**
    골목 안쪽, 다른 상점들보다 유독 더 낡고 초라한 중고 서점이 나타난다. 나무 간판에는 붓글씨로 ‘고요한 책방’이라고 쓰여 있지만, 글씨는 희미해져 알아보기 힘들다. 창문 안으로는 오래된 책들이 빼곡히 쌓여 있어 내부가 어둡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먼지가 자욱한 창문 너머로 책들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액션:**
    미나는 서점 앞에서 멈춰 선다. 이곳은 그녀가 유일하게 안식처를 느끼는 공간이다. 그녀의 눈빛에 잠시 불안 대신 편안함이 스친다. 조심스럽게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연다. 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 하고 나지막하게 울린다.

    **#대사 (서점 주인, 중년의 남성, 책 뒤에서 얼굴도 내밀지 않고 무심하게):**
    어서 와.

    **#액션:**
    미나는 대꾸 없이 익숙하게 책들 사이를 걷는다. 코끝에 닿는 퀴퀴한 종이 냄새, 오래된 나무 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책장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햇빛에 먼지 입자들이 춤추듯 떠다닌다. 그녀의 손이 조심스럽게 책등을 쓸어내린다.

    **[1.4] 서점 안쪽의 발견**

    **#장면:**
    서점의 가장 안쪽, 다른 책장들보다 더 어둡고 그림자 드리운 구석진 책장. 이곳의 책들은 유독 오래되고 낡아 보인다.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고, 책장 위에는 거미줄까지 쳐져 있다.

    **#액션:**
    미나는 평소처럼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구석을 탐색한다. 먼지 앉은 책등을 쓸어내리다가, 다른 책들과 확연히 다른 질감의 책을 발견한다. 그녀의 손길이 멈춘다.

    **#묘사:**
    그 책은 다른 어떤 책보다도 두껍고 투박했다. 가죽인지 나무인지 알 수 없는 검은색 표면은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닳고 닳아 흐릿해진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어떤 언어로도 읽을 수 없는 기묘한 그림 문자들. 책등에는 제목도, 저자명도 없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처럼.

    **#내레이션 (미나의 생각, 호기심과 미약한 불안감이 뒤섞인):**
    이건… 뭐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책인데.
    늘 이곳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나타난 것 같기도 해.

    **#액션:**
    미나는 손가락으로 문양을 조심스럽게 쓸어본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다. 순간, 손끝에 미약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 스친다. 미나는 움찔하며 손을 뗀다. 주변의 먼지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 같기도, 공기가 한층 더 차갑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액션:**
    미나는 망설이다가 다시 책을 잡는다. 이끌리듯 책을 빼낸다. 책장의 틈새에서 책을 꺼내자, 안쪽에서 어두운 틈이 살짝 더 벌어진다. 좁은 틈 사이로, 책장의 안쪽 공간이 살짝 엿보인다. 마치 책장이 가려진 또 다른 공간이 있는 것처럼. 순간, 미나의 눈에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뜩이는 듯한 착시가 스친다.

    **#내레이션 (미나의 생각,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
    이건… 착각일 거야.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는 걸 거야.

    **#액션:**
    미나는 애써 불안감을 떨쳐내며 책을 품에 안고 계산대로 향한다. 서점 주인은 여전히 책에 파묻혀 있다.

    **#대사 (서점 주인,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걸 골랐어? 꽤 오래된 물건인데. 값은 따로 없어. 가져가.

    **#내레이션 (미나의 생각, 혼란스러운):**
    공짜라고? 이 귀한 고서 같은 걸?
    왠지 불길한 기분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횡재한 기분이다.
    그래, 이걸 스케치해보자. 뭔가 특별한 걸 그릴 수 있을지도 몰라.

    **[1.5] 고시원 방, 밤의 속삭임**

    **#장면:**
    미나의 고시원 방. 창밖은 이미 짙은 밤이 되어 어둡다. 스탠드 조명만이 책상 위를 외롭게 비춘다. 방 안에는 침묵만이 흐른다.

    **#액션:**
    미나는 침대에 앉아 방금 가져온 책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아까 서점에서보다 훨씬 더 서늘한 기운이 책에서 느껴지는 것 같다. 책의 검은 표면이 어둠 속에서 더욱 깊이를 알 수 없는 색으로 빛난다.

    **#내레이션 (미나의 생각,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목소리):**
    이 책… 뭘까? 왜 주인이 그냥 주었을까?
    뭔가에 홀린 것처럼 가져왔는데… 이제 어쩌지?

    **#액션:**
    미나는 망설이다가,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책을 펼친다.

    **#묘사:**
    책 속 페이지는 예상과 달리 모두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그저 오래된 종이의 질감만이 느껴질 뿐. 누렇게 바랜 종이에서 퀴퀴한 냄새가 올라온다.

    **#내레이션 (미나의 생각, 실망감):**
    뭐야… 빈 책이잖아. 그럼 그렇지. 무슨 특별한 게 있겠어.
    내 착각이었어. 그저 낡은, 평범한 빈 책일 뿐이야.

    **#액션:**
    미나는 책을 닫으려 한다. 그 순간,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표지의 기묘한 문양에 다시 스친다. 그녀의 시선은 문양에 닿아 고정된다. 찰나의 순간, 잊고 있던 그녀의 깊은 갈망이 문득 떠오른다. ‘특별해지고 싶어. 이 잿빛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묘사:**
    (클로즈업: 미나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표지의 문양 전체가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듯한 영롱한 빛이 어둠 속에서 피어난다. 그 빛은 점차 강렬해지더니, 책 속의 텅 비어 있던 페이지들까지 빛으로 가득 채운다. 동시에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진다. 마치 다른 차원의 공간이 열린 듯한 착각마저 든다. 미나의 주변 모든 것이 정지한 듯, 시간마저 얼어붙은 것 같다.

    **#대사 (미나, 경악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흐읍…! 으, 으악!

    **#액션:**
    미나는 비명을 삼키며 본능적으로 책을 떨어뜨린다. 책은 바닥에 ‘툭’ 소리를 내며 떨어져 닫힌다. 빛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방 안은 다시 고요하고 어두워진다. 모든 것이 착각이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레이션 (미나의 생각, 심장이 발작하듯 뛰는 소리, 거친 숨소리):**
    말도 안 돼… 내가 뭘 본 거지?
    꿈인가? 환상인가?
    너무 피곤해서, 내가 미쳐버린 걸까?

    **#액션:**
    미나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책을 다시 응시한다. 책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낡고 평범한 고서의 모습으로 놓여 있다. 하지만 미나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평범함이 없다. 혼란, 공포, 그리고… 묘한 기대감이 뒤섞여 소용돌이친다.

    **#내레이션 (미나의 생각, 점점 더 깊어지는 내적 혼란과 흡인력):**
    하지만… 분명히, 보았어.
    그 빛을… 그 차가운 기운을…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1.6] 에필로그: 그림자의 속삭임**

    **#장면:**
    바닥에 놓인 책의 클로즈업. 어둠 속에서 책 표면의 고대 문양이 아주 미세하게, 마치 살아있는 심장 박동처럼 ‘깜빡’이는 듯하다.

    **#내레이션 (미나의 생각, 마지막 컷, 등골이 오싹해지는 조용한 목소리):**
    어쩌면… 이 책은, 나를 삼킬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나를, 다른 존재로 만들지도.


    **[1화 끝]**

  • 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세상은 죽었다. 더 정확히는, 반쯤 죽은 채로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한때는 찬란한 문명이 꽃피웠을 대륙은 이제 잿빛 먼지와 부서진 잔해들로 뒤덮여 있었다. 하늘은 항상 탁한 회색빛이었고, 태양은 희미한 그림자처럼 겨우 제 존재를 알릴 뿐이었다. 공기 중에는 쇠비린내와 눅눅한 흙먼지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으로 까끌거리는 입자들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에이든은 낡은 방독면을 고쳐 쓰며 부서진 건물 더미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발밑에서는 깨진 유리 조각과 금속 파편들이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곳은 한때 ‘빛의 도시’라 불렸던 에이레네의 폐허였다. 이제는 그저 ‘잿빛 도시’라 불릴 뿐, 빛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죽은 공간이었다. 그는 지난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갈증과 허기가 뼈를 갉아먹는 듯했다. 손에 쥔 닳아빠진 철제 봉은 그의 유일한 무기이자 지팡이였다.

    “젠장, 정말 아무것도 없군.”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방독면 안에서 먹먹하게 울렸다. 이 도시에 남은 것이라곤 부패하지 않는 쓰레기더미뿐이었다. 며칠 전 운 좋게 발견한 통조림 한 조각이 마지막 식량이었다. 이제는 썩은 음식조차 귀했다.

    에이든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했다. 붕괴 직전의 건물, 언제 무너질지 모를 위태로운 잔해들, 그리고 그 잔해 속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위험. 이곳은 온갖 종류의 변이된 생명체들로 가득했다. 독성을 뿜는 덩굴 식물부터,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으로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는 짐승들까지.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는 순간, 바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한때 백화점이었을 거대한 건물의 입구로 향했다. 무너진 간판에는 ‘럭스 백화점’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문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뻥 뚫린 입구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에이든은 허리춤에 매달린 작은 랜턴을 꺼내 들었다. 건전지는 거의 바닥이었지만, 희미하게 빛을 비출 수는 있었다.

    내부는 지독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다. 천장은 대부분 붕괴하여 하늘이 보였고, 바닥은 쓰레기와 먼지,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액체로 뒤덮여 끈적거렸다. 에이든은 랜턴을 천천히 휘두르며 주위를 살폈다. 1층의 명품 매장들은 이미 약탈당하고 부서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혹시 지하 창고 같은 곳은…”

    에이든의 시선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쪽으로 향했다. 난간은 녹슬어 부식되었고, 계단은 일부 파괴되어 있었다. 하지만 희망은 오직 이런 위험한 곳에만 존재했다. 그는 무너진 계단 벽을 조심스럽게 짚고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무거워지고 습해졌다. 랜턴 불빛이 닿는 곳은 한정적이었지만, 에이든은 바닥에 뒹구는 뼈 조각들을 보았다. 사람의 것인지 짐승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기에는 충분했다.

    지하 창고는 생각보다 넓었다. 텅 빈 선반들과 부서진 상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곳 역시 이미 여러 번 털린 듯했다. 에이든은 벽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다 그의 발끝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낡은 나무 상자였다. 다른 상자들과는 달리 뚜껑이 단단히 닫혀 있었고, 겉면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에이든은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히고 상자를 확인했다. 틈새로 미세한 흙먼지가 새어 나와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상자들보다는 온전해 보였다.

    “이건… 뭐야?”

    그는 철제 봉을 상자의 틈새에 끼워 넣고 힘을 주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조금씩 들렸다. 안에서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 대신, 희미하게 오래된 종이 냄새와 함께 어떤 약초 같은 향이 풍겨 나왔다. 기대감에 에이든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뚜껑이 완전히 열리자, 랜턴 불빛 아래에서 상자 속 내용물이 드러났다. 낡고 바싹 마른 가죽 두루마리 몇 개와, 깨지지 않은 작은 유리병들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에이든은 떨리는 손으로 가죽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펼쳐보니, 그림과 함께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지도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떤 마법 의식의 설명서 같기도 했다. 지금 당장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리고 유리병. 그중 하나를 들어 올리자, 안에 든 투명한 액체가 희미한 불빛을 반사했다. 아무 색도, 향도 없었지만, 에이든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귀한 물건임을 느꼈다. 어쩌면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일지도, 아니면 지친 몸에 활력을 줄 약물일지도 몰랐다.

    “이런 곳에 이런 게…”

    그 순간이었다.

    정적을 깨고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텅 빈 창고를 가로지르는 불쾌한 마찰음. 에이든의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상자를 재빨리 닫고 랜턴을 껐다. 칠흑 같은 어둠이 다시 그를 집어삼켰다. 방독면 너머로 그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렸다.

    철제 봉을 고쳐 쥐었다. 그 소리는 가까웠다. 창고 안, 어딘가에서.
    그리고 곧,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점이 섬뜩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피에 굶주린 짐승의 눈동자처럼.

    크르르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에이든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길 곳을 찾았다. 낡은 선반 뒤편으로 몸을 웅크린 채, 그는 철제 봉을 꽉 쥐었다. 상대는 최소한 둘 이상이었다. 붉은 눈이 천천히 그의 위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그림자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앙상한 사지, 뒤틀린 척추가 그대로 드러난 검은 가죽의 몸통, 그리고 머리에는 마치 오래된 갑옷 조각을 뒤집어쓴 듯한 기괴한 형상의 뿔이 솟아 있었다. 입에서는 노란색의 점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부식자’라고 불리는 변이체였다. 닿는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독성 침을 뱉어내는 놈들. 한때는 작은 설치류였던 것들이 이런 끔찍한 모습으로 변이된 것이었다.

    놈들은 에이든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랜턴 불빛이 없으니 시각은 희미했지만, 에이든은 놈들의 썩은 살 냄새와 끈적한 침 떨어지는 소리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숨죽이며 기다렸다. 놈들이 가장 가까이 왔을 때, 기습적으로 공격하거나 도망칠 기회를 노려야 했다.

    부식자 한 마리가 선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놈의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에이든은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쓰으읍…

    부식자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압력이 새는 소리 같기도 했고, 빠르게 불을 끄는 소리 같기도 했다. 놈들의 붉은 눈이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워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몸을 뒤로 물리는 것이 느껴졌다.

    크아아악!

    비명이었다. 어둠 속에서 한 마리의 부식자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비명 소리. 혼란에 빠진 부식자들이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든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이 자신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재빨리 랜턴을 켜고 어둠을 가로질렀다. 빛이 비추는 곳에는 두 마리의 부식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놈들의 몸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검은 가죽은 심하게 녹아내려 있었다. 마치 강한 산성액이라도 뿌린 것처럼.

    그리고 그 너머,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는 에이든과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난 실루엣은 에이든보다 키가 작았지만, 이상하리만치 단단하고 굳건해 보였다. 손에는 무언가 반짝이는 물건을 쥐고 있었다.

    “누구냐?”

    에이든이 경계하며 철제 봉을 겨누었다. 그의 목소리는 방독면 안에서 거칠게 울렸다.
    그림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천천히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랜턴 불빛이 닿는 곳, 그림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검고 긴 머리카락은 낡은 두건 아래로 흘러내렸고, 얼굴은 먼지와 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놀라울 정도로 맑고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에이든이 본 것 중 가장 생기 있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푸른 눈동자가 에이든을 응시하는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묘한 끌림을 느꼈다.

    그림자의 한쪽 어깨에는 낡고 찢어진 천으로 둘러싸인 물건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손에 든 반짝이는 물건은… 긴 금속제 활이었다. 활시위는 이미 당겨져 있었고, 화살촉은 에이든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활이 아니었다. 활대에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활시위에서는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장전된 화살촉은 마치 얼음 조각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그림자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위압감은 주변의 냉기를 더하는 듯했다.
    에이든은 숨을 멈췄다. 그의 목덜미에 차가운 땀방울이 맺혔다.
    위험했다. 이 소녀는 자신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선택해야 했다.

    “난 아무것도 해치지 않았다.” 에이든은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소녀의 푸른 눈이 에이든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녀의 시선은 에이든의 철제 봉에서 허리춤의 작은 가죽 주머니, 그리고 손에 쥔 유물 상자까지 훑어 내려갔다.

    “네 손에 든 것, 내놔.”

    그녀의 목소리는 명령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에이든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황폐한 세상에서 겨우 찾은 작은 희망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목에 겨눠진 얼음 화살촉은 그 희망을 한순간에 산산조각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날 죽일 셈이냐? 고작 이런 걸 가지고?”

    소녀의 푸른 눈동자에 일렁이던 미세한 감정이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해졌다.
    “넌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 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활시위가 더욱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음 화살촉이 더 강렬하게 빛났다.
    에이든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패배를 인정하는 자세였다.
    “좋아. 가져가라.”

    그는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소녀는 여전히 활을 겨눈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에이든을 잠시 더 지켜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상자 쪽으로 걸어왔다.

    에이든은 바닥에 엎드려 소녀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조용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했다. 그녀가 상자에 거의 다다랐을 때, 에이든은 문득 그녀의 어깨에 매달린 낡은 천 조각에서 무엇인가가 삐져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아주 작은, 마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잎사귀 같은 것이었다. 아니, 잎사귀라기보다는… 어린아이의 작은 손가락 같았다.

    소녀가 상자를 집어 드는 순간, 그녀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천 조각이 살짝 흔들렸고, 그 틈으로 얼핏 보인 것은… 낡은 천 안에 조심스럽게 싸여 잠들어 있는 어린아이의 얼굴이었다. 아이는 갓난아기처럼 작았고, 몹시 지쳐 보였다.

    에이든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 소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이 죽은 세상에서 살아남고 있었다니.

    그 순간, 소녀의 눈동자가 다시 에이든을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에이든은 그녀의 푸른 눈 속에서 어떤 깊은 그림자를 보았다. 생존의 고통, 그리고 어린 존재를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의지가 뒤섞인 그림자.

    “너는… 아이와 함께 있는 건가?” 에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소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상자를 단단히 쥐고는 활을 내리지 않은 채 뒤돌아섰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에이든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방금 본 어린 소녀와 그녀의 아기가 지울 수 없는 잔상으로 남아있었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든 그 유물 상자는 대체 무엇일까.

    에이든은 천천히 일어섰다. 상자는 사라졌지만, 그 대신 그의 가슴 속에는 새로운 의문이 싹트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이 죽은 세상의 숨겨진 비밀을 향한 작은 실마리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는 단순히 식량을 찾는 것 이상의 다른 운명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함께.
    밖은 여전히 잿빛 하늘 아래, 죽은 듯 고요했다. 그리고 에이든은 다시 이 어둠 속에서 한 걸음 내디뎠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도시의 가장 낮은 곳, ‘수골 지구’의 비좁은 골목은 언제나 눅눅한 잿빛 공기로 가득했다. 햇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거리에선 썩어가는 음식물 쓰레기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여 희뿌연 안개처럼 떠다녔다. 낡은 목재 건물들은 서로를 지탱하듯 위태롭게 서 있었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판자집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카인은 익숙하게 그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오가는 이들의 텅 빈 눈동자를 살폈다. 게임 속에서 그는 ‘아르카나: 제국의 그림자’의 평범한 노동자 NPC 중 한 명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망루지기’라는 직업명은 이름뿐인 허울이었다.

    모두가 같았다. 창백한 얼굴, 야윈 몸. 제대로 된 끼니조차 잇지 못해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아이들이 흙먼지 속에서 공놀이를 하는 대신,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었다. ‘아제나 제국’의 그림자는 수도 벨루스의 화려한 상층부를 넘어, 이 최하층민의 구역까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오늘 새벽에도 제국 수비대원들은 어김없이 수골 지구의 공동 곡물 창고를 털어갔다. 남아있는 거라곤 썩어가는 밀가루와 쥐들이 파먹고 남은 빵 부스러기뿐.

    카인의 ‘시스템 창’에는 조용히 그의 상태가 표시되어 있었다. 마치 한 편의 비극적인 서사를 읽어내리듯, 그의 눈에 비치는 현실은 이 게임이 단순한 오락이 아님을 매 순간 일깨웠다.

    [이름: 카인]
    [직업: 그림자 계승자 (히든)]
    [레벨: 78]
    [체력: 85% / 마나: 60%]
    [소속: 땅울림 (반군)]

    히든 직업이라곤 해도, 이 게임 ‘아르카나: 제국의 그림자’에서는 직업 자체가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중요한 건 ‘각성’과 ‘경험’이었다. 그리고 카인은 이곳 수골 지구에서 제국의 잔혹함을 매일같이 ‘경험’하며 분노를 키워왔다. 처음엔 그저 게임 속의 불합리한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날이 이어지는 NPC들의 고통과 그들의 눈에서 읽히는 절망은, 단순한 데이터 값을 넘어선 현실의 무게로 다가왔다.

    “크흑, 그만… 제발…”

    골목 어귀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카인은 즉시 시선을 돌렸다. 젊은 여인이 붉은색 제복의 제국 수비대원 둘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특유의 거만하고 오만한 표정으로 그녀의 짐 꾸러미를 뒤지고 있었다. 짐 속에서 겨우 몇 알갱이 되는 곡식들이 쏟아져 나오자, 한 수비대원이 발로 짓밟았다. 곡식 알갱이들은 흙먼지 속에 힘없이 흩어졌다.

    “흥, 밀수품인가? 이 거지 같은 년이 주제도 모르고.”
    “아, 아니에요! 그건… 제 아이에게 먹일 마지막…”

    여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수비대원들은 비웃으며 그녀를 거칠게 밀쳤다. 여인은 차가운 흙바닥에 나뒹굴며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비참한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손이 짓밟힌 곡식 알갱이들을 향해 허우적거렸지만, 닿을 수 없었다.

    카인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느껴지는 고통은, 게임 속 캐릭터의 감정이 자신에게 고스란히 전이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당장 저들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울분을 토했다. 하지만 때가 아니었다. ‘땅울림’의 대장, 엘리아나가 항상 강조했던 말이었다. ‘분노는 연료가 될지언정, 폭발의 타이밍은 우리가 정해야 한다.’

    카인은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골목의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차가운 시멘트 벽을 따라 지하로 이어지는 낡은 문을 열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희미한 등유 램프 불빛이 내부를 밝혔다. 열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대부분 카인처럼 초라한 옷차림의 일반 주민 NPC들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절망을 넘어선 날카로운 결의가 서려 있었다. 간혹 몇몇 플레이어들도 보였다. 그들 역시 이곳 수골 지구의 처참한 현실에 분노하여 제국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이들이었다.

    “카인, 왔군.”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나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낡은 두건 아래로 감춘 그녀는 여전히 불꽃 같은 눈으로 모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닳아빠진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낡은 등유 램프 불빛 아래, 지도의 희미한 선들이 그림자처럼 흔들렸다.

    “이번에도 제국의 농간이 시작됐어.” 엘리아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북부 곡창 지대에서 수확될 예정이던 모든 곡식을 ‘황실 전용’이라는 명목으로 압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보급선마저 끊는다는 소리야. 겨울이 오기 전에, 이곳 수골 지구는 거대한 공동묘지가 될 거야.”

    장내가 술렁였다. 웅성거림은 곧 절망적인 한숨으로 바뀌었다. 한 늙은 여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의 앙상한 어깨가 들썩였다.
    “대체 언제까지 당해야 합니까?” 한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는 그저 살아남고 싶을 뿐인데…”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한가요?” 엘리아나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공간을 채웠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맹렬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살아남아도, 노예처럼 죽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더 이상 제국의 먹잇감이 아니다!”

    그녀의 말에 장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두려움과 함께 새로운 결의가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엘리아나가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낡은 지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오늘 밤, 이대로는 안 돼. 북부에서 벨루스 수도로 향하는 황실 곡물 수송대가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수송대가 ‘제4 보급창’을 거쳐간다는 정보야.”
    그녀는 손가락으로 지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그곳은 수도 벨루스 외곽에 위치한, 제국이 새로이 확장하고 있는 물류 거점이었다.
    “이곳이야. 평소라면 제국 수비대가 삼엄하게 지킬 테지만, 마침 오늘은 수도 외곽 지역의 순찰이 강화되는 날이다. 이곳의 경비는 평소보다 소홀할 거야.”

    모두의 시선이 지도에 집중됐다. 침묵 속에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운 순간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두 가지다. 첫째, 곡물 수송대를 기습하여 보급품을 확보한다. 단 한 알의 곡식도 허투루 쓰지 않을 것이다. 둘째, 그 과정에서 제국에 우리의 존재를 명확히 알린다. 우리는 더 이상 어둠 속에 숨어있는 그림자가 아니다. 우리는 땅울림이다!”

    엘리아나는 카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은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강렬한 신뢰를 담고 있었다.
    “카인. 너에게는 가장 중요한 임무가 있다. 보급창 내부에 침투하여 경비 시스템을 무력화해야 해. 중앙 통제실의 통신 교란 장치를 해제하고, 정문 잠금 시스템을 개방해야 한다. 그리고 수송대가 도착하는 정확한 시간을 우리에게 알려줘야 한다. 네 ‘그림자 계승자’의 능력이 필요해. 너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게임 속에서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쌓아 올린 ‘그림자 계승자’의 능력은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느껴졌다. 제국의 부패를 직접 경험하며 키워온 분노와 정의감이 그의 혈관을 타고 맹렬하게 흘렀다.

    “실패하면…?” 한 젊은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역력했다.
    엘리아나는 짧게 웃었다. 싸늘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단념한 듯한 웃음이었다.
    “실패하면, 제국은 이곳 수골 지구를 피로 물들일 거야. 우리 모두는 물론, 가족들까지도… 모든 것이 끝이겠지. 하지만 성공하면… 우리는 이곳에 희망의 불씨를 지필 수 있어.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힐 수 있다고!”

    그녀의 말에 모두의 눈빛이 흔들렸다. 두려움과 결의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들이었다. 한쪽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다른 한쪽에서는 주먹을 꽉 쥐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결국, 모두의 시선은 엘리아나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빛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렸던 마지막 희망을 보았다.

    카인은 창문 밖 어둠이 짙게 깔린 벨루스 수도를 내다봤다. 화려한 제국의 심장부가 멀리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거대한 제국의 그림자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그림자 속에서, 작은 불씨 하나가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자, 이제 각자 위치로. 새벽이 오기 전에, 우리의 첫걸음을 내딛자.”

    엘리아나의 명령과 함께,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각자의 임무를 부여받은 이들이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움직였다. 카인 역시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낡은 단검이, 오늘 밤 제국의 심장에 깊은 상처를 남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오직, 복수와 자유를 향한 불타는 열망만이 그를 이끌었다.

    [퀘스트: 새벽의 불씨 – 제4 보급창 침투]
    [목표: 보급창 통신 교란 장치 해제 및 정문 잠금 시스템 개방]
    [보상: 미정]
    [실패 시: 모든 희망 상실 (사망 패널티 적용)]

    카인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지막 경고 문구는 그 어떤 것보다 선명하게 그의 심장을 울렸다. 이것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들의 모든 것이 걸린 전쟁의 서막이었다.

  • 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무한의 심연, 별들의 무덤 사이를 가로지르는 아르테미스호는 낡고 지친 거인처럼 보였다. 30년 탐사 임무의 끝자락, 귀환을 불과 몇 달 앞둔 지금, 승무원들은 이미 지상의 향긋한 흙냄새와 차가운 물 한 잔을 갈망하고 있었다.

    “선장님, 저기요.”

    항해사 김민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브릿지의 고요를 갈랐다. 선장 이지혁은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키며 메인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며칠 밤낮 이어진 행성계 분석 작업으로 눈 밑이 거무튀튀했다.

    “또 이상 신호야? 이제 지긋지긋하다, 김 항해사. 그냥 우주 쓰레기겠지.”

    이지혁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스크린 위에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발원한 미세한 에너지 파장이 선명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일반적인 천체 현상과는 다른, 인공적인 규칙성이 감지되었다.

    “쓰레기라기엔 너무… 질서정연한데요.” 김민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감지 범위는 좁지만, 에너지가 꽤 높습니다. 선장님, 이건 분명 뭔가가 있습니다.”

    새로운 미지의 발견에 과학담당 정하윤 박사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인류의 지도를 벗어난 심우주에서? 이건 대발견입니다! 경로 변경을 건의합니다, 선장님!”

    이지혁은 잠시 침묵했다. 귀환을 서두르던 탐사선에 새로운 변수를 추가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피 속에는 미지에 대한 해묵은 갈망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 박사. 딱 72시간이다. 그 안에 뭔지 알아내고 돌아오는 거다. 김 항해사, 경로 변경해.”

    아르테미스호는 거대한 몸을 틀어 미지의 신호가 발원하는 어둠 속으로 향했다. 며칠 후, 스크린에는 기이한 형상이 떠올랐다. 거대한 고대 구조물이었다. 행성도 아니었고, 소행성도 아니었다. 어떤 거대한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부유한 우주 잔해 속에 감춘 듯한 모습이었다. 표면은 검은 현무암처럼 보였으나, 미약하게 빛을 흡수하며 맥동하는 듯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탐사팀이 꾸려졌다. 이지혁 선장과 정하윤 박사, 그리고 선내 최고의 만능 엔지니어인 최준호, 그리고 경비대원 이병장. 넷은 탐사선에 몸을 싣고 고대 구조물 속으로 진입했다.

    내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이했다. 복잡한 기계 장치나 첨단 기술의 흔적은 없었다. 대신,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뒤틀린 회랑이 끝없이 이어졌다. 벽면은 매끄러웠지만, 손을 대면 서늘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이봐요, 하 박사. 여기 대기 성분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산소 농도가… 음… 높습니다.” 최준호가 휴대용 분석기를 확인하며 말했다.

    정하윤은 이미 어떤 신비로운 힘에 홀린 듯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다. “이건… 어떤 존재의 내부를 탐험하는 기분이에요. 경이롭지 않나요?”

    이지혁은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본능적인 경고음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자. 신호 발원지를 빨리 찾는 게 좋겠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통로의 끝에서 거대한 홀을 발견했다. 홀 중앙에는 기이한 형상의 유물이 떠 있었다. 검은 현무암과 같은 재질이었으나, 표면에는 복잡하고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유물은 고요하게 정지해 있었지만, 주변의 공간이 미약하게 일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세상에…!” 정하윤은 숨을 들이켰다. “이건… 인류가 본 적 없는 진화의 정점입니다! 형태는 마치 고대의 관 같으면서도, 이 에너지 반응은… 설명 불가능합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유물에 다가가려 했다. 이지혁이 재빨리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함부로 만지지 마, 하 박사.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라.”

    그러나 경비대원 이병장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유물 가까이 다가섰다. 그는 보호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유물의 표면을 살짝 스쳤다.

    그 순간, 유물의 표면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순식간에 이병장의 몸을 휘감았다가 사라졌다. 이병장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이지혁은 더욱 강한 불길함을 느꼈다. “당장 철수한다. 유물은 조심스럽게 회수해서 격리실로 옮겨. 하 박사는 섣부른 분석 시도하지 말고, 의료담당 박서준에게 이병장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게 해.”

    아르테미스호로 돌아온 후, 유물은 특별 격리실에 안치되었다. 정하윤은 분석 결과에 흥분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그녀는 유물이 방출하는 에너지 파장이 생체 활동과 유사하다는 기묘한 결론에 도달했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한편, 박서준 의료담당은 이병장의 건강을 면밀히 관찰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피로감이나 우주선증이라고 생각했다. 가벼운 발열, 식은땀, 약간의 어지럼증. 그러나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이병장은 초조해하고 안절부절못했으며, 눈빛은 초점을 잃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병장님, 식사 좀 하셔야죠.” 박서준이 다가가자, 이병장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피부는 핏기 없이 창백했고, 눈 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왜 그러세요, 이병장님? 혹시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박서준이 손을 뻗는 순간, 이병장이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그의 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고, 입에서는 의미 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는 속도와 힘이었다. 박서준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어깨를 물어뜯겼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의 살을 파고들었다.

    “크아아악!” 박서준의 비명에 달려온 의료팀원들이 이병장을 제압하려 했지만, 이미 통제를 벗어난 괴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이병장은 한 명, 한 명을 찢어발겼다. 그의 손톱은 날카로운 갈고리처럼 변해 있었고, 이빨은 피에 굶주린 짐승의 그것과 같았다.

    그리고 더욱 끔찍한 것은, 물려 쓰러진 의료팀원들이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경련을 일으키며 다시 일어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눈도 이병장처럼 공허하게 뒤집혔고, 핏빛으로 물든 입에서는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선장님! 의료실입니다! 이병장이… 이병장이 사람을 물었습니다! 미쳤습니다! 물린 사람들도 다…! 당장 격리 조치해야 합니다!” 김민아 항해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브릿지에 울려 퍼졌다.

    이지혁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좀비’라는 단어가 그의 머릿속을 스쳤지만, 심우주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하지만 통신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현실이었다.

    “전 승무원은 각자 위치에서 비상 프로토콜 발동! 격벽 폐쇄! 모든 출입구 봉쇄! 의료실 주변 섹터 즉각 격리!” 이지혁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외쳤다.

    최준호 엔지니어가 필사적으로 격벽 시스템을 조작했다. 육중한 금속 격벽들이 굉음을 내며 닫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감염의 속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선내 통신망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비명과 총성, 그리고 기괴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선장님! 감염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격벽 폐쇄 전에 상당수가 다른 섹터로 넘어갔습니다!” 김민아의 목소리가 절망으로 물들었다.

    정하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스크린을 노려봤다. “대체… 저 유물이 대체 뭘 가지고 온 거죠? 이건 바이러스가 아니에요! 생체 반응이 너무 빠르고… 너무 기이합니다!”

    아르테미스호는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외부에서 보기엔 여전히 고요히 우주를 유영하는 강철 거인이었지만, 그 내부에서는 피와 광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생존자들은 브릿지로 후퇴했다. 이지혁, 김민아, 최준호, 그리고 정하윤. 넷은 브릿지를 최후의 보루로 삼았다.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우주의 고요함과 대비되는, 선내 통신망을 통해 들려오는 감염자들의 끔찍한 울음소리가 그들을 질식시켰다.

    “유물을… 유물을 우주로 방출해야 해!” 정하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저게 모든 것의 원인입니다! 저걸 제거해야만 이 악몽을 멈출 수 있어요!”

    “유물은 격리실에 있고, 격리실은 가장 깊숙한 하부 데크에 있어. 감염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뚫고 가야 한다는 얘기다.” 최준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지혁은 망설였다. 그의 눈앞에는 자신을 믿고 따라온 승무원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동시에, 이대로 가면 모두 죽으리라는 냉혹한 현실도 그의 뇌리를 스쳤다.

    “다른 방법이 있나?” 이지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가 저걸 가져왔다. 그럼 우리가 다시 돌려보내야 해. 최 엔지니어, 유물 방출 절차를 준비해. 김 항해사는 통로 스캔해서 가장 안전한 경로를 찾아. 하 박사는… 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나에게 줘. 뭘 알아야 저것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

    그들은 필사적으로 계획을 세웠다. 브릿지에 남은 최후의 생존자들. 그들은 유물을 우주로 방출하기 위해, 지옥이 된 아르테미스호의 어둠 속으로 다시 발을 내딛기로 결심했다.

    육중한 브릿지 문이 열리고, 차가운 금속 복도가 그들을 맞이했다. 공포와 절망이 그들의 심장을 옥죄었지만, 이지혁 선장의 굳건한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인류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의 대가를 치르는 마지막 발걸음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직감했다.

    선내 통신망은 이제 완전히 먹통이 되었다. 오직 그들의 거친 숨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기괴한 짐승의 울음소리만이 아르테미스호의 침묵을 깨고 있었다. 인류는 그렇게, 미지의 심연에서 가져온 재앙과 마주하고 있었다.

  • 스팀펑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제목: 심연의 울림 (The Echo of the Abyss)**
    **회차: 제13화**

    칙칙한 지하 통로는 습기와 오래된 기계 기름 냄새로 가득했다. 엘라라의 손에 들린 휴대용 기압 램프가 불안하게 깜빡이며, 길고 불규칙한 그림자를 벽에 늘어뜨렸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낡은 황동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천장을 뒤덮고 있었고, 틈새마다 희뿌연 증기가 낮게 깔려 시야를 흐렸다.

    “엘라라, 정말 괜찮겠어?”

    진의 목소리는 평소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초조하게 움직였다. 엘라라가 발견한 ‘숨겨진 지도’에 표시된 이 지하 통로는, 아카데미아 루미나리스의 공식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재학생들이 접근 가능한 가장 깊은 지하 도서관보다도 더 깊은 곳.

    “걱정 마, 진. 여기까지 왔잖아.”

    엘라라는 씩 웃었지만, 그녀의 심장도 불안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이곳의 공기는 단순히 습한 것을 넘어, 왠지 모르게 비릿하고 무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오래된 마법의 잔재와 기계 장치의 쇠냄새가 뒤섞인, 묘한 불쾌감이었다.

    “괜찮다고 하기엔… 기계음이 너무 기분 나쁜데. 윙, 윙, 웅… 뭔가 심장이 뛰는 소리 같아.”

    진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얕게 깔린 증기 너머에서,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한 거대한 기계의 맥동이 느껴졌다. 살아있는 무언가가 심장을 울리는 듯한 소리였다. 마치 저 아래, 거대한 짐승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엘라라는 램프를 높이 들고 조심스럽게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좁은 통로의 끝에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녹슨 이음새와 무거운 볼트들이 고딕 양식의 문양처럼 새겨져 있었지만, 표면은 놀랍도록 매끄러웠다. 마법적인 코팅이라도 되어있는 걸까?

    “이게… 뭐야?” 진이 경외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엘라라는 문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예상과 달리 묘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의 손바닥에 닿는 문 안쪽에서 희미한 진동이 울렸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문고리는 없었다. 대신 중앙에 복잡한 마법진과 스팀 압력계가 결합된 장치가 박혀 있었다. 열쇠구멍처럼 보이는 곳은 정교하게 세공된 수정으로 막혀 있었다.

    “이건… 비전 마법과 증기 공학의 조합이야. 아카데미아의 현 기술로는 구현 불가능한 수준인데?” 엘라라는 흥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천재적인 두뇌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앞에 놓이자 활성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걸 만들려면 최소한 200년 전, 대재앙 이전의 고대 마법 공학 기술이 필요해. 그런데 이게 왜 여기에…?”

    그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수정구를 꺼냈다. 비전 에너지를 감지하는 도구였다. 수정구는 철문에 가까워지자 붉은빛을 뿜어내며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위험 수치였다.

    “이 안에… 엄청난 에너지가 잠들어 있어.” 엘라라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생체 에너지… 아니, 그 이상이야. 아주 오래되고, 끔찍한… 압도적인 힘.”

    진은 덜컥 겁에 질린 채 엘라라의 팔을 붙잡았다.

    “돌아가자, 엘라라! 이건 우리가 건드릴 일이 아니야! 아카데미아에 보고해야 해!”

    “보고? 이 문이 있다는 걸 아는 자가 아무도 없어, 진. 이건 아카데미아의 역사에도 없는 기록되지 않은 장소야. 어쩌면… 아카데미아의 존재 자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엘라라는 눈을 빛내며 진을 뿌리쳤다. 그녀의 탐구심은 두려움을 압도했다.

    그녀는 문 옆 벽면에 박힌, 얼핏 보면 단순한 장식처럼 보이는 낡은 압력 밸브를 발견했다. 밸브는 세 개의 크고 작은 톱니바퀴와 연결되어 있었다. 엘라라는 망설임 없이 밸브에 손을 댔다.

    “잠깐! 뭐 하는 거야!” 진이 소리쳤지만, 때는 늦었다.

    엘라라는 첫 번째 톱니바퀴를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끼이익!’ 하는 끔찍한 쇳소리와 함께 지하 통로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천장의 파이프에서 거친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콜록, 콜록! 엘라라!”

    진이 기침하며 눈을 비볐지만, 이미 엘라라는 두 번째 톱니바퀴를 돌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쿠르르릉!’ 하는 굉음과 함께 바닥이 꺼지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문 중앙의 마법진이 섬뜩한 보랏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압력계의 바늘이 미친 듯이 치솟았다.

    “엘라라, 제발 멈춰!” 진은 거의 울부짖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엘라라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광기에 가까운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톱니바퀴를 힘껏 돌렸다.

    ‘쉬이이이이익!’

    거대한 철문에서 엄청난 압력의 증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증기 속에서 기계적인 굉음과 함께 굵은 쇠사슬이 풀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철컥, 콰아앙!’ 하는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수 세기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안쪽으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 어두웠지만, 그 색은 너무나도 기이했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불길한 기운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돔 형태의 공간, 그 중앙에는 거대한 생체-기계 장치가 웅크리고 있었다. 수많은 황동 파이프와 굵은 전선들이 얽히고설켜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기이한 액체가 흐르는 유리관들이 마치 핏줄처럼 뻗어 있었다. 장치의 중심부에서는 알 수 없는 생명체들이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는 듯한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것들은 마치 기계에 갇힌 채 살아있는 먹이처럼 작동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광경 위로, 마치 오래된 지옥의 목소리처럼, 수많은 영혼들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그 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히 현실의 소리였다.

    엘라라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건… 대체…”

    그때였다.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리는 굉음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거대한 장치 한가운데서 번개처럼 푸른 섬광이 터져 나왔다. 섬광은 순식간에 공간 전체를 집어삼켰고, 엘라라와 진의 눈동자에도 번쩍이는 푸른 빛이 가득 찼다.

    이어지는 것은 엄청난 진동과,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얼어붙게 만드는 듯한 끔찍한 한기였다.

    문 안쪽,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톱니바퀴와 징그러운 촉수들이 뒤섞인 채… 그림자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엘라라와 진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마치, 잠들어 있던 악몽이 깨어난 것처럼.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 새벽달의 그림자

    최지은의 하루는 언제나 새벽의 고요와 함께 시작되었다. 해가 뜨기 전, 세상이 아직 단잠에 빠져 있을 때, 그녀의 작은 베이커리 ‘새벽달’에서는 이미 따뜻한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규칙적인 소리, 오븐 속에서 빵이 부풀어 오르는 달콤한 향기, 그리고 갓 내린 커피의 그윽한 쌉쌀함이 어우러져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지은은 이 모든 순간을 사랑했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재료들을 섞고, 모양을 빚고, 뜨거운 오븐에 넣어 황금빛으로 구워내는 과정은 그녀에게 단순한 노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치유였고, 행복이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가게 안은 지은의 손길이 닿은 작은 조명들 덕분에 아늑하게 빛났다. 손수 뜨개질한 컵받침, 직접 그린 수채화 액자, 그리고 동네 아이들이 보내온 서툰 그림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곳은 단순히 빵을 파는 곳이 아니었다. 지은의 온 마음이 담긴 작은 우주였다.

    “후우… 오늘도 잘 구워졌네.”

    갓 나온 식빵의 노릇한 표면을 보며 지은은 작게 미소 지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식빵을 한 김 식혀 조심스럽게 썰자, 부드러운 속살이 드러났다. 이 식빵 하나로도 많은 이들이 아침을 행복하게 시작하리라. 그런 생각만으로도 지은은 마음이 벅차올랐다.

    오전 7시, 문을 열자마자 첫 손님들이 찾아왔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들러 모닝 빵과 커피를 사 가는 회사원, 아이들 간식으로 마들렌을 찾는 젊은 엄마, 그리고 가끔은 새벽달의 풍경을 스케치하러 오는 나이 지긋한 화가 아저씨까지. 그들은 지은의 일상에 잔잔한 기쁨을 더하는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지은 씨, 오늘도 빵 냄새가 예술이네요! 아침부터 기분 좋아져요.”

    화가 아저씨가 따뜻한 라떼를 받아 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지은도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오늘은 그림 잘 그려지시겠네요.”

    그렇게 소박하지만 충만한 시간들이 흐르고,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이면 늘 그가 찾아왔다. 강서준. 지은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새벽달’의 든든한 조력자. 고등학교 시절부터 함께 꿈을 키워왔고, 지은이 ‘새벽달’을 열었을 때 가장 열렬히 응원해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지은의 곁에서 항상 빛이 되어주었다.

    “지은아! 오늘도 대박이네, 대박!”

    서준은 늘 그렇듯 활기찬 목소리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등장에 가게 안은 한층 더 생기가 돌았다. 잘생긴 얼굴에 시원시원한 성격까지, 서준은 단골손님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는 마치 ‘새벽달’의 마스코트 같았다.

    “너 없었으면 이 정도도 못했지.”

    지은은 그의 말에 싱긋 웃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꾸했다. 실제로 서준은 ‘새벽달’의 마케팅과 운영 전반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가 빵 굽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복잡한 서류 작업이나 홍보 아이디어는 모두 서준의 몫이었다.

    “야, 무슨 소리야. 다 네 손맛 덕분이지. 난 옆에서 거드는 것뿐이야. 그나저나 저번에 말했던 신메뉴 ‘밤 식빵’ 반응 어때? 벌써 다 나갔어?”

    서준은 진열대에 놓인 빵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가 제안했던 ‘밤 식빵’은 출시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렸다. 그의 사업적인 감각은 언제나 지은을 놀라게 했다.

    “응, 벌써 두 번째 구웠는데 그것도 거의 다 나갔어. 네 덕분에 손님이 더 늘었어.”

    “그럼 됐어! 어때, 기분 좋지? 우리가 꿈꿨던 ‘새벽달’이 이렇게 잘 되는 거 보면 진짜 뿌듯하다.”

    서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활짝 웃었다. 그의 웃음은 언제나처럼 티 없이 맑았다. 지은은 그런 서준을 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서준이 없었으면 지금의 새벽달도 없었을 거야. 넌 정말 내게 주어진 가장 큰 행운이야.’*

    그날 오후, 서준은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은아, 우리 이제 ‘새벽달’을 더 키워야 할 때인 것 같아.”

    “더 키운다니? 지금도 충분히 바쁜데?”

    “아니, 지금 이 인기에 안주하면 안 돼. 내가 알아본 투자자가 있어. 이 정도 성장세면 투자 유치하는 거 어렵지 않아. 우리 베이커리를 프랜차이즈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온 거야!”

    서준의 눈은 뜨거운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지은은 조금 망설였다. 지금의 ‘새벽달’은 작지만 아늑하고,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규모가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의 손을 떠나는 부분도 많아진다는 의미였다.

    “프랜차이즈라니… 너무 급작스러운 거 아니야? 나는 그냥 지금처럼 작지만 정성껏 빵 만드는 게 좋은데.”

    “지은아, 언제까지 그렇게 소박하게만 살 거야? 네 빵은 이 작은 가게에만 머무르기엔 아까워. 더 많은 사람들이 네 빵을 맛봐야 해! 그리고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넌 지금처럼 빵 굽는 데만 집중하면 돼. 나머지 복잡한 건 내가 다 처리할게.”

    서준은 언제나 그랬듯이 지은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주었다.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와 뜨거운 눈빛은 지은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늘 그녀에게 최고의 길을 제시해왔고, 한 번도 그녀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새벽달’의 성공 뒤에는 항상 서준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음… 그렇게까지 말하면… 알았어, 서준아. 네 말을 믿을게. 대신, 내가 만든 빵의 진심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연하지! 그게 바로 ‘새벽달’의 핵심인데! 걱정 마, 지은아. 내가 다 알아서 잘 해낼 거야. 우리가 함께 꿈꾸던 세상이 현실이 되는 걸 보게 될 거야.”

    서준은 지은의 손을 덥석 잡고 활짝 웃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그의 미소는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다. 그날 밤, 지은은 늦도록 잠 못 들었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설렘과 막연한 불안감이 뒤섞였지만, 서준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든든했다.

    며칠 뒤, 서준은 ‘새벽달’의 확장을 위한 투자 유치 계약서라며 두툼한 서류뭉치를 가져왔다.

    “이게… 다 뭐야?”

    “이제 우리 ‘새벽달’이 새로운 도약을 하는 데 필요한 서류들이야. 법률팀에서 다 검토한 거니까 걱정 말고, 지은아. 여기랑 여기에만 사인하면 돼. 자, 이제 우리 꿈이 현실이 되는 거야!”

    서준은 익숙한 듯 펜을 건넸다. 지은은 서류를 훑어보았지만, 법률 용어들로 가득한 내용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나도 많은 글자들이 현란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서준이 옆에서 괜찮다고, 다 좋은 내용이라고 재차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그를 전적으로 믿었다.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서준이 가리키는 곳에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그 순간, 그녀의 삶은 180도 달라질 운명이었다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한 채.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났다. 서준은 투자 유치 건으로 바쁘다며 가게에 오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지은은 홀로 가게를 지키며 빵을 굽고, 서준의 소식을 기다렸다.

    “요즘 서준 씨는 왜 안 와? 매일 왔었는데.” 단골손님들이 묻곤 했다.
    “응, 중요한 프로젝트 때문에 좀 바쁜가 봐. 곧 좋은 소식으로 찾아올 거야.” 지은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어느 날, 지은은 서준의 사무실에 찾아갔다. 약속 없이 간 것이었지만, 그를 오랜만에 보고 싶었고, 진척 상황도 직접 듣고 싶었다. 그의 사무실은 굳게 잠겨 있었다. 몇 번 전화를 걸었지만, 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며칠째 연락이 닿지 않자 지은의 불안감은 점차 커져갔다.

    결국 지은은 서준이 말했던 ‘투자자’라는 회사의 주소를 찾아갔다. 으리으리한 건물 로비에서 서준의 이름을 댔지만, 담당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서준 씨요? 음… 저희 회사에 그런 분은 없는데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지은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받지 않았다. 그 순간, 로비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서 뉴스 영상이 흘러나왔다. 화려한 개업식 풍경과 함께 기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오늘, 강서준 대표는 ‘새벽별 베이커리’ 1호점 개업식에서 새로운 프랜차이즈 사업의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만의 독창적인 레시피와 사업 수완으로 단숨에 베이커리 업계의 혜성처럼 떠오른 ‘새벽별 베이커리’는…”

    카메라가 비춘 화면 속에는 활짝 웃으며 박수갈채를 받는 서준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옆에는 ‘새벽별 베이커리’라는 간판이 크게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간판 아래에는 그녀가 정성껏 디자인했던 ‘새벽달’의 로고와 너무나도 흡사한 문양이 박혀 있었다. 심지어 배경에는 낯익은 빵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지은의 밤 식빵, 마들렌, 그리고 그녀만의 시그니처 메뉴인 ‘달빛 스콘’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도 똑같았다.

    지은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뇌가 사고를 멈춘 듯 멍해졌다.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서준의 말, 그의 미소, 그의 따뜻한 손길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의 세상은 산산조각 났다. 그녀의 모든 열정, 꿈, 그리고 믿음이 한순간에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강타했다.

    로비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지은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서준의 웃는 얼굴과 ‘새벽별 베이커리’라는 이름만이 그녀의 망막에 박혀 고통스럽게 아른거렸다. 그녀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차오르는 눈물을 겨우 삼켰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후의 처절한 복수극. 그 비극의 서막이, 바로 그 순간 고요하고 아름다웠던 ‘새벽달’ 베이커리의 그림자 속에서, 잔혹하게 열리고 있었다. 지은의 가슴속에서는 이제 따뜻한 빵 냄새 대신, 차가운 복수의 칼날이 서서히 벼려지고 있었다. 그녀의 ‘새벽달’은, 이제 더 이상 이전의 ‘새벽달’이 아니었다.

  • 스팀펑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증기 도시의 유령들: 01. 새벽 3시 17분

    이재현은 고층 창밖으로 펼쳐진 새벽 도시의 전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거대한 증기탑들이 내뿜는 희뿌연 연기가 차가운 새벽 공기와 뒤섞여 몽환적인 스모그를 만들어냈다. 그 사이로 촘촘히 박힌 기계식 가로등들이 오렌지빛으로 빛나며, 고풍스러운 황동색 외벽을 자랑하는 고층 빌딩들의 실루엣을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 그의 아파트, ‘아르카나 타워’는 이 모든 기계 문명의 심장부 한가운데서 숨 쉬고 있었다.

    재현은 한숨을 쉬며 작업실로 돌아섰다. 그의 작은 아파트 서재는 온갖 증기기관 부품들과 기묘한 발명품들로 가득했다. 책상 위에는 정교한 황동 기어들이 분해된 채 놓여 있었고,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고색창연한 기계 공학 서적들과 함께 직접 그린 설계도들이 너덜너덜하게 붙어 있었다. 예술가이자 발명가인 재현에게 이곳은 안식처이자 동시에 끝나지 않는 탐구의 공간이었다.

    오늘도 그는 밤늦도록 설계도에 매달렸다. 어제부터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증기압으로 움직이는 자동 피아노의 음색 조절 장치가 계속해서 오작동을 일으켰다. 그는 기어이 피아노를 뜯어내 내부의 복잡한 증기 파이프와 밸브들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문제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반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가끔씩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엉뚱한 음이 흘러나왔다.

    “젠장, 대체 뭐가 문제야?”

    재현은 중얼거리며 렌치를 내려놓았다. 뻣뻣해진 목을 주무르며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철컥.’

    아파트 현관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재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간, 누구도 올 리가 없었다. 그는 항상 현관문을 잠갔고, 혹시 모를 침입에 대비해 안쪽에는 이중 잠금장치까지 해두었다.

    “누구 없어요?”

    재현은 문 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거실의 커다란 기계식 시계추가 묵직하게 움직이는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재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관으로 향했다. 복도는 어두웠지만, 저 멀리 거실에서 새어 나오는 증기등의 은은한 불빛이 길을 안내했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찰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잠겨 있어야 할 문고리가 어정쩡하게 반쯤 돌아가 있었다. 심지어 안쪽 이중 잠금장치마저 풀려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재현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분명히, 잠그고 들어왔는데.

    “누가 장난치는 건가?”

    그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하며 문고리를 단단히 돌려 잠갔다. 다시 이중 잠금장치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그저 오래된 아파트의 노후된 부품들이 말썽을 부린 것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러나 그날 밤, 기이한 일은 또다시 일어났다.

    책상에 앉아 다시 설계도를 보던 재현은 문득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작업실 안의 모든 증기등이 일제히 약해지며 깜빡거렸다. 마치 누군가 전력 공급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처럼. 책장 위, 정교하게 만들어진 황동제 기계 비둘기 조각상의 작은 태엽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스스로 감기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재현은 숨을 죽이고 비둘기를 주시했다. 곧이어 비둘기의 작은 날개가 천천히,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펼쳐졌다.

    “젠장!”

    재현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앞에서 날개를 펼친 비둘기는 마치 도망치려는 듯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태엽이 다 풀린 것처럼 힘없이 축 늘어졌다.

    재현은 비둘기 조각상에 다가가 태엽 부분을 확인했다. 역시나, 태엽은 완전히 감겨 있었다. 이 조각상은 태엽을 직접 감아야만 날개가 펼쳐지는 방식이었다. 그는 어젯밤 분명히 풀어둔 채 잠들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합리적인 설명을 찾으려 했지만, 도저히 불가능했다. 전력 공급의 문제? 태엽이 스스로 감길 리는 없었다.

    그때였다. 거실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현은 황급히 작업실을 뛰쳐나왔다.

    거실 중앙, 그가 아끼던 유리 돔 안에 전시되어 있던 정교한 증기 동력 오르골이 바닥에 산산조각 난 채 흩어져 있었다. 오르골을 받치고 있던 작은 받침대는 멀쩡한데, 오르골 본체만 마치 누군가 집어 던진 것처럼 박살 나 있었다.

    재현은 굳어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의 뇌는 빠르게 상황을 분석하려 했지만, 모든 논리가 깨져버렸다.

    바닥에 흩어진 오르골 파편들 사이에서, 가장 중심부에 있던 작은 태엽 부품 하나가 홀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힘없이, 그리고 기묘하게. 마치 오르골 자체가 죽어가는 마지막 숨결을 내쉬는 것처럼.

    창밖의 증기 도시가 여전히 무심한 듯 숨 쉬고 있었다. 거대한 기계 문명의 심장 소리가 멀리서부터 웅웅거렸다. 하지만 재현의 아파트 안에는, 그 소리마저 집어삼킬 듯한 차가운 공포가 가득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복도 끝, 현관문이 아주 조금, 정말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그 틈새로 마치 누군가 그를 지켜보는 듯한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어왔다.

    재현은 깨달았다. 혼자가 아니었다. 이 기계 문명의 심장부, 그의 아파트에… 무언가 알 수 없는 존재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지금 막 그에게 말을 걸어온 참이었다. 그의 모든 합리를 산산조각 내면서.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도심의 빌딩 숲은 밤이 깊어질수록 차가운 강철의 뼈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강민호는 짙은 어둠이 깔린 고층 빌딩의 옥상 난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아래로는 휘황찬란한 도시의 불빛이 아득하게 펼쳐졌지만,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기, 가장 높이 솟아오른 유리궁전의 꼭대기. 이선우, 그 개자식이 모든 것을 걸고 구축한 제국.

    차가운 바람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릿한 핏물 냄새와 먼지가 뒤섞인 도시의 공기. 민호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한기는 고통스러우리만치 선명한 과거의 조각들을 떠올렸다. 함께 밤새워 웃고 떠들던 시절, 등을 맞대고 거친 이능의 세계를 헤쳐나가던 시간들. ‘우리는 형제보다 더한 사이다.’ 선우는 늘 그렇게 말했다. 그 달콤한 거짓말에, 민호는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 대가는 처절한 배신이었다.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민호의 심장을 찢어발기는 칼날과 같았다. 한순간의 방심. 잔혹한 웃음. 그리고 등 뒤로 날아든 이능력자의 공격. 그 모든 것이 이선우,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꾸며낸 각본이었다. 민호의 이능을 탐하고, 그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피투성이가 되어 버려졌다.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을 때, 민호의 세상은 이미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는 유령처럼 세상에 홀로 남았다.

    살아남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복수. 이선우, 그 자의 모든 것을 짓밟아버릴 때까지, 그는 절대 죽을 수 없었다.

    “선우야…”

    나직이 읊조린 이름은 더 이상 그리움이 아닌, 지옥의 불길이 타오르는 맹세였다. 그의 눈빛이 일순 섬뜩하게 번뜩였다. 차가운 분노와 뜨거운 증오가 뒤섞여, 그의 전신에서 검은 그림자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오래된 은제 회중시계가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선우가 선물했던 물건이었다. 그날의 배신 이후, 민호는 이 시계에 역겨운 저주를 걸었다. 선우가 파멸하는 순간, 이 시계 또한 깨져버릴 것이다. 그 깨지는 소리가 민호의 복수가 완성되는 신호탄이 될 터였다.

    민호는 난간에서 사뿐히 뛰어내렸다. 중력은 그의 의지 앞에서 무의미했다. 발밑으로 허공이 아찔하게 펼쳐졌지만, 그는 단단한 땅을 걷는 것처럼 침착했다. 그의 몸은 어둠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고층 빌딩의 외벽을 따라 그림자처럼 미끄러져 내려가던 그는, 정확히 37층의 한 사무실 창문 앞에서 멈췄다.

    이곳은 이선우가 세운 ‘아크 프로젝트’의 핵심 연구실 중 하나. 겉으로는 최첨단 생명공학 기업을 표방하지만, 그 속내는 썩어문드러진 이능력자들의 암거래와 금단의 실험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이선우는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가장 위험한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포식자였다.

    유리창에 손을 대자, 희미한 푸른빛과 함께 정교한 보안 장치들이 그의 눈에 보였다. 레이저 그리드, 움직임 감지 센서, 에너지 파장 분석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방어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민호는 이미 수도 없이 이곳의 보안 시스템을 분석해왔다. 그의 이능은 그 어떤 시스템도 우회할 수 있는 ‘침식’의 힘이었다.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유리창을 서서히 물들였다. 마치 잉크 방울이 맑은 물에 퍼지듯이, 검은 그림자가 유리창의 모든 보안 회로를 잠식해 들어갔다. ‘쉬이이익-‘ 아주 미세한 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안쪽으로 스르르 열렸다. 마치 존재하지 않던 문이 열린 듯했다.

    민호는 그림자처럼 실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연구실 내부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푸른색 조명 아래 몇몇 모니터가 빛나고 있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기이한 형태의 홀로그램이 떠 있었다. 섬세한 인체 해부도 같기도 하고, 어떤 에너지 흐름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주위로 온갖 복잡한 장비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민호의 시선은 곧장 테이블 위로 향했다. 홀로그램 아래, 고대 문자로 빼곡하게 채워진 두툼한 양피지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다. 그가 잃어버린, 아니, 이선우에게 강탈당한 ‘그것’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했다. 민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선우… 네가 감히 그걸 손에 넣으려 하는구나.”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는 최대한 움직임을 억제하며 주변을 살폈다. 예상대로 인기척은 없었다. 하지만 민호의 감각은 어떤 미세한 이질감을 포착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가장 구석진 모니터 앞으로 다가섰다.

    모니터는 꺼져 있었지만, 민호의 손이 닿자마자 푸른빛과 함께 화면이 살아났다. 그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스크린을 스쳤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모니터 속 데이터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민호의 눈동자가 빠르게 수많은 정보를 훑었다. ‘검은 심장 프로젝트’, ‘코드명: 하르마’, ‘생체 에너지 동조율 98%…’

    ‘하르마…’ 그가 잃어버린 능력이었다. 단순히 이능을 빼앗긴 것이 아니었다. 이선우는 그 이능을 이용해서, 어떤 거대한 존재와 동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민호의 심장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그림자가 이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그때였다. 연구실 한쪽 구석에 놓인 작은 액자 프레임에서 미세한 에너지가 감지되었다. 민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벽과 하나가 된 것처럼 그의 존재감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쳇, 늦었잖아.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함께, 벽 뒤편에 숨겨진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문을 통해 나타난 것은 이선우의 오른팔 격인, ‘그림자 사냥꾼’으로 알려진 한시우였다. 시우는 늘 칼날 같은 눈빛을 지닌 남자였다. 민호는 그를 기억했다. 선우와 함께 다니던 어중이떠중이 중 하나였는데, 이제는 제법 이능의 고수가 되어 있었다.

    시우는 이리저리 연구실을 훑어보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양피지 두루마리를 확인했다.

    “젠장, 아직도 오지 않았단 말이야? 대표님께서 직접 오실 줄 알았더니.”

    그의 말에 민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표님’? 선우가 직접 온다고? 지금 이곳으로?

    시우는 짧은 한숨을 쉬더니, 품속에서 작은 단말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무전 버튼을 누르려 했다. 그 순간, 민호의 그림자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그 이름을 부르지 마.”

    섬뜩한 목소리가 시우의 등 뒤에서 울렸다. 시우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민호의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쇠사슬처럼 단단한 악력이 시우의 숨통을 조여왔다.

    “크헉… 너, 너는… 강민호?!”

    시우의 눈이 공포로 크게 뜨였다. 죽은 줄 알았던 민호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예전과 다르게 창백했지만, 그 눈빛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처럼 섬뜩했다.

    “내 이름을 기억하는구나. 다행이네. 네놈에게 내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려줄 필요가 없어졌으니.”

    민호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차가운 얼음처럼 시렸다. 시우는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이능을 사용하려 했지만, 민호의 손아귀는 너무나 강했다. 그의 이능이 시우의 몸을 잠식하는 순간, 시우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선우… 그 개자식이 지금 어디 있지?”

    민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자비도 없었다. 시우는 숨을 헐떡이며 눈알을 굴렸다. 입을 열면 죽을 것이고, 열지 않아도 죽을 것이다. 하지만 민호의 눈빛은 그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흐읍… 대… 대표님은… 지금… 지하… 지하 5층에…”

    시우의 입에서 간신히 흘러나온 말은 민호의 심장을 꿰뚫었다. 지하 5층. ‘검은 심장 프로젝트’의 심장이 있는 곳. 이선우가 그곳에서 어떤 끔찍한 일을 벌이고 있는지, 민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민호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시우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지하 5층에… 무엇이 있지?”

    “괴… 괴물… 괴물을 깨우려… 헉!”

    시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호는 그의 목을 부러뜨렸다. ‘뚝’ 하는 섬뜩한 소리가 정적에 휩싸인 연구실에 울려 퍼졌다. 시우의 몸은 맥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민호는 죽은 시우를 한 번 훑어보더니, 그의 주머니에서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단말기에는 ‘대표님’이라고 저장된 연락처가 있었다. 민호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당장 이선우에게 연락할 것인가, 아니면…

    그때, 단말기에서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대표님’. 이선우였다.

    민호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타이밍이 너무나 절묘했다. 이선우가 직접 시우에게 연락을 해왔다는 것은, 그가 지하 5층에서 진행하는 일에 뭔가 중대한 전환점이 다가왔다는 증거일 터.

    손안의 단말기를 내려다보던 민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좋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직접 목소리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는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시우야. 진행 상황은?” 이선우의 목소리가 단말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목소리. 마치 이 모든 것이 그의 손안에 있다는 듯한 오만함이 뚝뚝 묻어났다. 그 목소리가 민호의 귓가에 닿는 순간, 민호의 분노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솟구쳤다.

    민호는 애써 감정을 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순조롭습니다, 대표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선우는 민호의 목소리가 평소 시우의 목소리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을까? 아니면, 그저 대수롭지 않게 넘길까? 민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잘됐군. 내가 곧 올라가지. 그 전에, ‘그것’의 마지막 동기화 작업을 시작해놔.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이선우의 목소리에서 기쁨과 흥분이 명백하게 느껴졌다. ‘그것’의 마지막 동기화라니. 과연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민호는 손에 땀이 흥건해지는 것을 느꼈다. 곧 이선우가 이곳으로 올라올 것이고, 그들의 파멸적인 재회가 이루어질 것이다.

    민호는 단말기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손아귀 안에서 플라스틱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눈빛은 맹렬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모든 준비를 마치겠습니다. 당신이 이 도시에 가져올 ‘새로운 시대’를 위해… 기꺼이.”

    민호의 마지막 말은 단순한 보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선우의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는, 피에 물든 맹세였다. 그는 이선우가 깨우려는 ‘괴물’을, 그의 손으로 다시 봉인할 것이다. 설령, 그 과정에서 그 자신마저도 괴물이 되어야 한다 할지라도.

    통화가 끊겼다. 민호는 허탈하게 웃으며 단말기를 부쉈다. 그의 눈은 지옥의 핏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 게임은 시작되었다. 이 지옥 같은 밤의 끝에서, 과연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민호는 시우의 시체를 무심히 밟고 지나쳐, 홀로그램이 떠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의 손이 홀로그램 위를 스치자,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이능의 기운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이제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선우가 도착하기 전, 그의 심장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남겨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검은 서리꽃이 피는 밤이었다. 그리고 그 꽃은, 가장 아름답고도 잔혹한 복수를 알리는 전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