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민준은 눈을 감았다 떴다. 아파트 거실의 디지털시계가 붉은 숫자를 깜빡였다. 새벽 2시 17분. 잠은 이미 저 멀리 달아난 지 오래였다. 며칠째 이어지는 기묘한 일들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저 ‘내가 피곤해서 헛것을 보나?’ 싶었다. 컵이 식탁 모서리에서 살짝 안쪽으로 밀려 있거나, 잠시 불을 켜놓고 나간 방의 스탠드가 꺼져 있는 식의 사소한 것들. 하지만 사소한 일들은 뱀처럼 몸집을 불려왔다.
‘젠장, 오늘은 또 뭘까.’
민준은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딱히 정해진 패턴도 없었다. 어떤 날은 새벽에, 어떤 날은 해 질 녘에. 마치 누군가가 제멋대로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 아니, 누군가가 아니라 ‘무언가’였다.
그때였다. 찌익, 찌이익.
주방 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루를 긁는 듯한, 하지만 분명히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민준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심호흡을 하려 했지만 폐는 이미 겁에 질려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는 멈췄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무것도 아니야. 바람이겠지. 바람이 불어서…….’
민준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하지만 이 아파트는 이상하리만치 외풍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갇힌 듯한 답답함이 있었다. 어쩐지 이 동네에 유난히 많다는, 대격변 이후 급하게 지어진 주상복합들 특유의 밀폐감이었다. 이런 건물들은 늘 ‘뭔가’ 꽉 막힌 느낌을 준다고들 했다.
쿠우우웅!
그때, 정적이 산산조각 났다. 거실에서 들려온 둔탁하고 거대한 충격음이었다. 마치 무거운 가구가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소리 같았다. 민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털이 곤두서는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누, 누구세요…!”
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터져 나왔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거실에서 묵직한 마찰음이 다시 들렸다. 끄으으윽, 끄으으으윽. 뭔가가 바닥을 질질 끌며 움직이는 소리였다.
민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손전등 기능을 켰다. 좁고 불안정한 빛줄기가 흔들렸다.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 끝, 거실 입구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휴대폰 빛을 비추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을 초월했다.
거실 중앙에 놓여 있던 4인용 소파가 벽 쪽으로 거의 한 미터 가까이 밀려나 있었다. 바닥에는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 옆, 거실 탁자가 기울어져 쓰러져 있었다. 탁자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주변 바닥에는 깨진 유리 파편들이 햇빛에 부서진 얼음 조각처럼 흩어져 있었다. 민준이 아끼던 고급 양주병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이게… 대체….”
말문이 막혔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현상이었다. 도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기이했다. 아무도 침입한 흔적이 없었고,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파괴하고 움직여놓았을 뿐.
그 순간, 민준의 등 뒤에서 갑자기 한기가 확 밀려왔다. 뼛속까지 시린 냉기였다. 숨을 들이쉬자 입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거실의 난방은 분명 작동 중이었다. 실내 온도는 25도. 그런데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마치 한겨울 밤의 길거리 같았다.
깜빡, 깜빡.
거실 천장의 메인 등이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전구가 터질 듯한 불안정한 빛이 거실을 섬광처럼 번쩍였다. 동시에 민준의 휴대폰 손전등도 불안하게 흔들리다 이내 꺼져버렸다. 완벽한 암흑. 사방에서 조여오는 어둠 속에서 민준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무엇인가가, 그 어둠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바스락, 바스락.
어둠 속에서 뭔가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귀 옆에서 울리는 듯했다. 민준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공포가 그의 사지를 마비시켰다.
“흐읍, 흐으읍…….”
공포에 질린 숨소리만 헐떡였다. 그때, 왼쪽 어깨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촉. 굳어있던 몸이 그 충격에 움찔 떨렸다.
동시에, 아파트 현관문에서 덜컹덜컹, 요란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잠금장치를 강하게 잡아 흔드는 듯한 소리였다. 쾅! 쾅! 쾅!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공명했다.
“나, 나가야 해…!”
민준은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이 아파트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손을 휘저으며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겨우 현관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문이 안쪽에서 덜컥, 하고 잠겼다. 분명히 열쇠로 잠그지 않았는데, 닫히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안 돼! 열어!”
민준은 필사적으로 손잡이를 돌리고 밀어보았다. 덜컥덜컥!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쪽에서 무언가 거대한 힘이 그를 밀어내는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문 너머에서 으르렁거리는 듯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 소리는 문 너머가 아니었다.
뒤였다.
등 뒤에서, 거실 한복판에서, 수십 개의 유리 파편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차르르르륵! 그 작은 조각들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민준을 향해 날아오는 듯한 섬뜩한 기척이 느껴졌다.
민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제발…!”
그때, 등 뒤에서 거대한 존재가 어둠 속에서 형체를 드러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투박한 돌멩이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거대한 몸체가 흔들리는 듯한 묵직한 진동. 그리고, 그의 귓가에 닿을 듯이 가까운 곳에서, 섬뜩하고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돌아오지 마… 너는, 이곳의 것이 아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수천 년 동안 잊힌 고대 언어가 지하실 바닥을 긁는 소리 같았다. 인간의 언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저승의 비명 같은 소리였다. 민준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섬뜩한 감각.
그는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그 소름 끼치는 어둠 속에서, 정체 모를 존재가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끔찍한 압력을 느꼈다. 그리고, 그 압력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두 개의 붉은 점이, 그의 눈동자에 박혔다. 마치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지옥의 불꽃처럼.
민준은 이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 아파트는, 그의 무덤이 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