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 앉은 도시
도시의 심장은 오래전에 멈췄다. 콘크리트 빌딩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하늘을 찌르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이름 모를 덩굴들이 회색빛 절망에 녹색 생기를 덧칠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먼지와 유리 조각이 섞인 으스스한 소리가 폐허의 찬가를 연주했다. 그 소리 속에서 지오는 발소리를 죽이며 움직였다.
“오빠, 저긴 어때?”
뒤따르던 아린이 작은 손가락으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가리켰다. 여덟 살 아이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반짝였지만, 그 속에는 어릴 적부터 익힌 경계심이 또렷했다. 아린의 손에 들린 낡은 곰 인형은 한때 하얗고 보송했겠지만, 지금은 먼지와 흙으로 얼룩져 도시의 풍경과 다름없었다.
“아니, 저긴 아니야. 저번에 재수 없게 ‘그것들’이 둥지를 틀었었어.”
지오는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들’은 균열을 통해 넘어온 변종 생명체들을 뜻했다. 몸은 비늘로 덮여있고 여섯 개의 다리를 가진, 마치 거대한 사마귀와 흡사한 녀석들이었다. 녀석들은 시력이 나빴지만, 미세한 진동에도 반응하며 맹렬히 달려들었다.
오늘은 식량을 구해야 했다. 어제 찾은 통조림 하나로는 이틀을 버틸 수 없었다. 이 폐허에서 식량만큼 귀한 건 없었다. 지오는 낡은 배낭을 고쳐 메고 주머니 속 칼날의 감촉을 확인했다. 익숙한 무게감이 안심을 주었다.
그들은 무너진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 쓰러진 버스 잔해를 밟고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지오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폈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위험뿐만 아니라, 지나치기 쉬운 작은 식량의 흔적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감각은 유달리 예민했다. 폐허 깊숙한 곳에서 풍겨오는 비릿한 냄새, 미세한 진동, 그리고… 균열의 ‘잔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기운까지도. 그 기운은 이 세계를 이렇게 만든 원인이자, 동시에 생존자들에게 알 수 없는 영향을 미치는 미지의 힘이었다. 지오는 가끔 그 잔재의 흐름을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위험을 미리 감지하거나, 특정 구역의 잔재가 강해 변종이 모여있을 법한 곳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저기, 오빠! 빛이다!”
아린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저 멀리 떨어진 빌딩의 상층부를 가리켰다. 유리창 하나가 깨지지 않고 남아, 저녁 햇살을 반사하며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저기, 혹시… 있을지도 몰라.”
아린의 목소리에는 희망이 섞여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그것’은 어쩌면 통조림, 어쩌면 마실 물, 어쩌면 버려진 책 한 권일 수도 있었다. 아이에게는 이 폐허 속에서도 작은 빛 하나가 큰 의미였다.
지오의 얼굴에 잠시 망설임이 스쳤다. 저 빌딩은 너무 높고, 멀었다. 그리고 너무 잘 보였다. 잘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도 크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아린의 반짝이는 눈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 암울한 세상에서 지오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래, 가보자. 대신, 내 말 잘 들어야 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숨어.”
“응!”
아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오가 시키는 대로 잘 따랐다. 그게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방향을 틀어 빛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빌딩 숲은 미로 같았다. 엉망으로 얽히고설킨 도로와 건물 잔해를 뚫고 나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햇빛이 사라지고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자, 도시의 풍경은 더욱 을씨년스러워졌다.
낡은 상점가를 지나갈 때였다. 지오의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잔재의 기운이 평소보다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저릿한 통증이 손끝에서부터 어깨까지 타고 올라왔다. 분명히, 무언가 있었다.
“아린, 조용히 해. 뒤로 물러서.”
지오는 거의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린은 눈치를 채고 말없이 지오의 뒤로 바싹 붙었다. 지오는 칼을 움켜쥐고 주변을 살폈다. 부서진 가게 문 안쪽에서 끈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거대한 곤충이 진흙탕을 기어가는 듯한 소리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파편을 밟지 않으려 조심하며, 지오는 천천히 가게 문 쪽으로 다가갔다. 안은 어두웠지만, 희미하게 빛나는 여섯 개의 붉은 눈이 보였다. 변종 사마귀였다. 그것은 부서진 진열장 옆에서 무언가를 뜯어먹고 있었다.
“큭…”
지오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녀석은 평소 보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몸길이만 해도 족히 2미터는 넘어 보였다. 게다가 주변의 잔재 기운이 너무 강했다. 이런 녀석과 싸우는 건 미친 짓이었다.
지오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아린의 발이 미끄러졌다. ‘쨍그랑!’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가 어둠 속을 갈랐다.
변종 사마귀의 붉은 눈동자가 순간 지오와 아린을 향했다. 녀석의 긴 앞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도망쳐!”
지오는 아린의 손을 잡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녀석이 그들 뒤를 쫓아오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콘크리트 바닥을 찍는 둔탁한 발소리, 날카로운 앞다리가 벽을 긁는 소리. 등 뒤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소름이 돋았다.
“오빠, 더 빨리!”
아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오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무너진 건물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좁은 통로를 지났다. 잔재의 기운이 더욱 격렬하게 그를 휘감았다. 위험했지만, 동시에 익숙한 방향이었다. 그 기운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곳, 아마 균열이 가장 처음 생겼던 곳일 터였다. 녀석이 그곳까지 따라올 수 있을까?
지오는 낡은 오피스 빌딩의 잔해 속으로 몸을 던졌다. 계단 대신 엉성하게 이어진 쇠파이프를 밟고 위로 향했다. 아린을 먼저 올려 보내고, 지오가 뒤따랐다. 녀석의 울음소리가 아래에서부터 진동하며 올라왔다.
“저긴 안 돼! 균열이 너무 강해!” 아린이 외쳤다.
지오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곳은 폐허에서 가장 위험한 곳 중 하나였다. 균열의 에너지가 너무 강해 변종들조차 가까이 오지 못하는 곳. 역설적으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도 했다. 운이 좋다면.
그들은 빌딩 옥상에 가까운 층까지 겨우 올라섰다. 사방이 뻥 뚫린, 철골만 남은 공간이었다. 거대한 변종 사마귀가 맹렬히 뒤쫓아 올라왔다. 녀석의 몸집이 너무 커서 좁은 통로를 통과하기 힘들었지만, 녀석은 그 거대한 몸으로 벽을 부수면서까지 쫓아왔다.
“망할!”
지오는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녀석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올라오는 모습이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녀석의 머리 위로 균열의 잔재가 마치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지오는 아린을 등 뒤로 숨기고 칼을 앞으로 겨눴다. 칼날이 흔들렸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린을 지켜야 했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지만, 머리는 차갑게 움직였다.
그 순간, 지오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잔재의 기운이 그의 팔 전체를 감쌌다. 늘 희미하게만 느껴지던 그 기운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의 혈관을 따라 흐르는 듯했다. 그의 눈앞에 변종 사마귀의 약점이 선명하게 ‘보였다’. 녀석의 몸을 감싸고 있는 비늘 사이의 아주 작은 틈, 그리고 그 틈으로 흘러드는 잔재의 에너지 흐름.
“오빠, 안 돼!” 아린이 울먹였다.
하지만 지오는 이미 움직였다. 그는 칼을 들고 맹렬히 돌진했다. 녀석의 앞다리가 허공을 가르며 지오를 노렸지만, 지오는 몸을 숙여 피했다. 잔재의 기운이 그에게 비정상적인 속도와 민첩성을 부여하는 듯했다. 그는 녀석의 육중한 몸을 타고 올랐다.
변종 사마귀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한 듯 몸을 흔들었다. 지오는 균형을 잡으려 애쓰며, 잔재의 흐름이 가장 약한 지점을 찾아 칼을 찔러 넣었다. ‘쿠칭!’ 칼날이 비늘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지만, 잔재의 기운을 받은 칼은 기적처럼 그 틈을 파고들었다.
검은 피가 솟구쳤다. 변종 사마귀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지오는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 번, 칼날을 박아 넣었다. 녀석의 움직임이 점차 둔해졌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자, 녀석은 거대한 몸을 통제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먼지가 폭발처럼 솟아올랐다.
지오는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이 떨렸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칼날에 묻은 검은 피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아린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지오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곰 인형을 꼭 껴안고 있었다.
“오빠, 괜찮아?”
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그는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잔재의 기운이 몸에서 빠져나가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능력은 아직 미숙했고, 사용하는 데 대가가 따랐다.
어둠이 완전히 내린 옥상에서, 두 남매는 서로에게 기대어 앉았다. 저 멀리 아린이 보았던 빛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빛이 있었던 빌딩은 어둠 속에 잠겨, 다른 모든 폐허와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오빠, 배고파.”
아린의 작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알아. 내일은 꼭 찾을 거야. 더 좋은 걸로.”
지오는 아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시의 밤은 차갑고, 위험으로 가득했지만, 지오의 품에 안긴 아린의 체온은 따스했다. 그는 이 작은 온기를 지키기 위해, 내일도 다시 폐허 속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빛이 사라진 도시에서, 그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